우울한 날에 여권을 꺼내서 휘리릭 넘겨보다가 문득 비자 스탬프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아주아주 오래전에 모리셔스에 갔을 때 찍은 도장이에요.
모리셔스는 아프리카 대륙 바로 옆에있는 작은 섬으로
마다가스카르, 세이쉘과 함께 아름다운 해변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에요.
여행 자체는 비행기를 엄청 갈아탔다는거(직항이 없어서 싱가폴에서 갈아탐)랑
리조트가 좀 지겨워서 하루 5끼씩 먹었다는 거 외에는 특별한 추억이 없지만
당일치기로 다녀왔던 사슴섬만은 굉장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사슴섬 찾는다고 멍청하게 dear island로 찾다가 헤매고;; 겨우 진짜 이름을 알아냈습니다.
불어로 Ile aux Cerfs, 영어로 deer island라는 사슴섬.
동남아의 바다도 예쁘고, 카리브해의 바다도 예쁘지만
사슴섬의 해변은 뭐랄까...아주 착한 바다에요.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듯한 느낌이랄까.
그야말로 지상낙원이 이런 곳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슴섬을 멀리서 바라본 사진
저 하얗게 보이는 부분이 전부 모래톱입니다.
끝자락에서 모터보트를 타면 검푸른 바다로 나갈 수도 있어요.
사슴섬의 해변은 정말 놀라워요.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바닷물이 무릎까지 오질 않아요.
저는 수영도 잘 못하고 예전에 한 번 물에 빠진 적이 있어서 깊은 바다는 좀 무서워하는 편인데
사슴섬에서는 아무리 멀리 걸어가도 무섭지가 않았어요. 정말로 착한 바다에요.
이 사진은 제가 기억하고 있는 사슴섬의 바로 그 모습입니다.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발목 즈음에서 잘박거리는 바닷물...

바로 저기. 관광객이 누워있는 곳에 언젠가의 제가 누워었습니다.
광주리를 이고 다니는 현지인을 불러서 광주리에 뭐가 들어있냐고 물어봤더니 파인애플을 보여줬어요.
파인애플을 통째로 주면 칼이 없는데 어떻게 먹니- 물어봤더니 먹기 좋게 잘라주겠다는겁니다.
호기심이 일어서 달라고 했더니 작은 칼을 꺼내서 파인애플을 껍질을 벗기기 시작하는데
이건 진기명기가 따로 없더군요. 쓱쓱 머리와 밑둥을 잘라내고 대각선으로 단단한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하는데
1-2분도 걸리지 않아 순식간에 나무젓가락에는 통조림에서 막 꺼낸듯한 노란 파인애플 덩어리가 꽂혀있더군요 ㄷㄷ
그걸 와구와구 먹고 끈적거리는 손을 바닷물에 씻으며 진짜 천국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당시에는 디카도 없었고, 그나마 필름 사진기로 몇 장 찍은 것도 죄다 한국집 어딘가에 쳐박혀있을테고...
(사진은 모두 인터넷 검색)
그나마 남아있는 것은 이렇게 여권에 찍힌 도장 하나뿐.
게다가 저 때의 마냥 신났던 나는 지금 내 안에 단 1g도 남아있지 않은 듯 하네요.
여권의 도장을 보고 있으려니 뭔가 꿈을 꾸는 듯...과연 내가 저 곳에 있기는 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