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그런말을 했었다. 사람이 겪어버린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란 이미 와장창 깨진 유리조각 같은 것이라서 한쪽에 치워둬야 한다고. 그걸 완전히 없던 일로 할수는 없고, 이미 일어나 버린 것이기에 상처 이전의 삶으로 돌아 갈 수는 없는 것이라고. 비질하고 걸레질하여 한쪽에 모아두고, 무심코 밟지 않도록 넘어다니거나 비껴 다녀야 한다고.

심리치료는 그 유리 파편들을 잘 쓸어 담아 보이는 곳에 치워두는 작업이며, 이후에 우리는 그걸 인식하고 헤집어 밟지 않으려 노력하며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어쨌든 적어도. 상처가 일상을 초과하지 않도록. 그 것이 나의 평범한 하루를 해치지 않도록. 삶은 날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펼쳐져 있는 그 일과 사건들을 분초 단위로 겪으며 그래도 살아야 하는 것이라서.

2월 이후, 미투 이후.. 사실 어쩌면 페미니즘에 감응하기 시작한 이후 부터, 한쪽으로 치워둔 상처들을 자꾸 다시 헤집는 느낌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해 할 수 없었던 사건들, 사건들 속의 그들, 감당할 수 없었던 문제들, 문제들 속의 각 개인들.

그 땐 그것이 상처인 줄 몰랐으나,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상처받아 왔으며, 언제부턴가 시작된 무기력과 우울감, 되풀이 되는 꿈들도 시작을 좇아가니, 그 날들 이후였다.

그때 나는 정확하게 분노 했어야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몰라서 분노할 대상과 타이밍을 잃어버리고, 내 잘못과 부족을 탓했다. 페미니즘의 언어를 알고서야 조금은 정확하게 분노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너무 극찬했던 사람이 누군가에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사람의 이면. 사람이 가진 다양한 얼굴. 


인간에 대한 희망을, 사회 진보에 대한 확신을,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혀가며 힘주어 말할 수 있었던 때가 있다. 
내가 겪은 사람들이 너무 따뜻해서 였을 것이다. 따뜻했다. 좋아하는 민중가요 가사처럼, 좋은 이들과 함께 한다는 건,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의 전부. 내 전부 같은 좋은 이들이 좋았다. 우리를 괴롭히는 적들만 없으면 우리가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공통의 적을 미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낭만적인, 한껏 사랑할 수 있는, 그럴 수 있었던 날들.

지금은 
그렇지 
않다.


*

가끔은 내 안에 이렇게까지 서늘한 것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파괴적인 냉소로 사람들을 공격할 때가 있다. 
난 그런 내가 싫다.

그런가 하면 또 그는 나다.
해결되어야 하는 어떤 지점이 있는 것인지, 
한 쪽으로 치워놓은 채로 조심조심 피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
사실은 정신적으로 힘들다.

겨우 슬픔으로 바꿔 놓은 감정이 다시 날이 서게 끔 하는 상황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싸움을 포기하고 싶다. 그런데, 누군가들은 계속 싸운다. 나는 포기하려던 것을 다시 움켜잡고 그들과 함께하고 싶지만, 사실은 분노할 마음의 에너지가 없을 뿐더러.. 방향도 방법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만 든다.


*

어떤 방식으로든 정리를 좀 해야겠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는 곤란하다.

그나마 내가 마지막으로 기대는 것은 지금의 상황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며 변화할 것이라는 것. 
그것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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