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빗소리가 톡톡톡 좋았는 데, 오랫만에 오빠랑 본 영화도 너무 좋았고, 3월의 첫 월요일인 내일이 개강이라도 하는 듯이 설렜는 데, 차분했는 데, 저녁무렵에 지인의 부음 소식을 두 차례나 들었다. 가깝지 않았으며 이미 많이 멀어진 사람들이라 슬프다기 보다는 믿기지 않아 얼떨떨 하다. 

사실은 너무 이상하다.
언제부터 타인의 죽음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인지. 아주 멀리 있는 사람이라도 20대 시절의 나에게 부음은 분명 생각이 많아지는 이슈였던 것 같은 데.

삶에 관한 소식들. 시작에 관련된 축하와 죽음·장례식에 가야하는 빈도수가 거의 비슷해져가고 있는 것 같다.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당연해 하지 않기 위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경건하게 하는 기도” 정도가 아닐까. 물론, 나에겐 종교가 없다. 그러나 삼가 기도 드리는 것 말고 또 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인용된 문장에서 처럼, 감사를 위한 기도는 아니다. 의례적이지 않은 애도를 위해 내가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무언가로서의, 기도.

고인의 명복을.
마음을 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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