ㅋㅋㅋㅋㅋㅋ 어후….
<물욕>은 빌린 책인데 부제가 적절하여 탑에 올려보았다.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는 고닉 에세이 <끝나지 않은 일>의 역자 후기의 이 문장을 확인하려고 구매했다.

“(234) 태어나면서부터 책을 읽었던 것 같다는 고닉은 천생 읽는 사람이다. 롤랑 바르트가 지명한바 ‘문학의 각인, 문장들의 명령을 받는 자’이며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아 (…) 문학적 또는 텍스트적 상상계’에 기거하는 인간이다. 고닉은 ‘문장이 우선 욕망을 유도하고 그다음에 뉘앙스를 유도하고 가르친다’는 바르트의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욕망은 학습되며 책이 없다면 욕망 역시 없다는 명제에도 동의했을 것이다. 비비언 고닉을 읽는다는 것은, 문장들로부터 모든 욕망과 뉘앙스를 학습한 작가가 텍스트화된 세계를 읽어내는 비범한 의식 그 자체를 읽는다는 의미다. 초기작에서는 그 욕망이, 후기작에서는 뉘앙스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바르트 강의의 첫 시작 부분

“(27) 견딜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주체를 억압하는 것입니다. 주관성이 지니는 위험이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주체의 제거 때문에 아주 많은 고통을 겪은 세대에 속합니다. 실증적 노선(문학사에서 요구되는 객관성, 문헌학의 승리)에 의해서든, 마르크스주의적 노선(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이 노선은 내 삶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에 의해서든 말입니다. → 객관성의 속임수보다는 주관성의 속임수가 더 낫습니다. 주체의 상상계가 주체의 제거보다 더 낫습니다.

알 수 없던 글씨들 때문에 극도로 우울했던 시간들을 지나서 이이들이 사용하는 어떤 언어적 도식에 나름 익숙해진 바. 이 문단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기쁘다!) 동의한다. 살아가고 있는 모두들에게 추천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맞다. 내게도 주관성의 속임수가 낫다. 텍스트라는 상상계에 기거할 거다. 그곳의 자아가 느끼는 전능감.이 나의 무망한 현실을 견딜만한 곳으로 바꿔주던 경험.들.

원래 글이란 여유로운 자들의 전유물이었을 테지만. 모두가 읽을 수 있어 이젠 아무도 읽지 않는 듯 한 시절의 문학은, 텍스트는, 읽기의 세계는 돈 없고 백 없고 그래서 얻어맞고 치이는 (나 같은) 사람에게 열린다. 기회가 열린다는 말은 아니다. 이쪽 세계는 현실의 열등감에 치여 자기들의 픽션을 쓰는, 거기에 탐닉하느라 자신을 잃어버리고 싶은, 그러나 그 동력 없이는 삶을 이끌 수 없는 이들이 천지삐까리라는 것이다.

나는 처음이었다. 어떤 드글거리는 욕망 혹은 충동 비슷한 것이 올라와서 너무너무 과하게 모든 것에 의미가 있어지고 없어지는 경험이. 그것들의 ‘명령’을 받으면. 문장들로 삶을 짓고 싶어진다.

현실의 나는 자랑할 게 없고, 일은 몸을 고단하게 하며, 지쳐있다. 딱 하나 내가 어제와는 조금 다르게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낄 때. 명령을 받는 것만 같다. 내가 나를 속이고 객관성의 속임에 주관성의 속임으로 응대한다. 틈입하는 현실에 귀를 막을 것. 현실의 법은. 지독하게 따라붙어 나에게 판결할 것이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알게 되었다. 결국은 근사한 픽션을 만들어내 보여주는 사람들이 이기는 게임이라는 것. 나를 포함 사람들은 그것들에 탐닉한다. 우리는 현실을 잊어야하니까. 주관이 객관이 될 때까지.

실컷 사제꼈으니 독서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부동산도ㅋㅋㅋ) 읽는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읽지 못하는 시간들에 대한 다짐과 기도를 소비로 채우는 나를 안다. 내가 저지른 것들을 내가 치우고 함께 저지르기를 권하며. 텍스트에 기거하기. 무용하게. 무조건 무용하게. 그런 귀한 종족을 만난 것에 감사하기. 읽으라. 읽을 수 있다면. 읽어라. 어떻게든. 시간을 확보하라. 책 소비는 좋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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