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나왔습니다.”
실어증에 걸린 여자는 말을 할 수 없다.
눈이 멀어가고 있는 남자는 여자의 상황을 퍼뜩 알아차리고 따라 나온다.
그리스어 수업을 함께 수강하는 어떤 학생들도 여자가 말을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남자에게는 보이는 세계.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사과.
나에게는 보이는 세계. 나에게만 느껴지는 미묘한 감정들.
이 페이지를 넘기다가 울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는 잘못한 게 없다. 여자는 곤란했을지언정 사과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느끼지 못했을 거다. 그래도 남자는 미안하다고 한다. 섬세해서? 따뜻해서? 그가 시각을 잃어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나는 잘 모르겠다.
이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 보였을 때, 까닭 없이 눈물이 차올랐던 내 몸이 나에게 보낸 신호를.
*
꿈을 꿨다. 전 직장 동료들을 만나는 꿈.
그 애가 신경 쓰였는 데, 안부를 묻고 싶었는 데, 우리끼린 가벼운 인사만 하고 잘 지내니 어떠니 물어보지도 못하고 직급이 높은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고 맞춰주느라 자리가 끝나고 말았다. 꿈에서도 언제나처럼 나는 그랬다. 익숙한 방식으로 익숙하게 보다 많은 발언권을 차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질문을 하고, 공감하는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옆에 있는 그 애가 인사할 때 보였던 표정이 못내 신경 쓰였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 데... 다음 자리로 이동하면서는 내가 먼저 물어봐야지,라는 마음을 먹었다. 술자리 계산을 마치고 돌담길로 접어들어 이름을 부르려고 입을 떼는데
꿈에서 깨버렸다.
"정말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나왔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실례에 해당하지 않는 실수를 스스로 눈치채고 따라나와 사과를 하는 남자에게. 나는 위로받았던 것이다. 그 마음씀을 바보 같다고 말하고, 때로는 신경과민으로 취급하는 세상 속에서.
그러고 보면 내가 먼저 아프다고 말하기도 전에 내게 먼저 사과해 줄 사람은 세상에 없거나 매우 드문 거지. 나는 할 수 있는 데. 나는 그런 걸 기대했던 걸까. 내가 아닌 사람들에게?
나는 가끔 자기가 아픈지를 잘 모르는 아픈 사람이 보일 때가 있다. 말과 몸이 무의식적으로 내보내는 공격들을 감각할 때가 있다. 어떤 자리에서 일어나는 저 자신들도 모르는 은근한 조리돌림과 미묘한 신경전을 알아채고 느낀다. 나는 힘들어지지 않기 위해 나의 감각을 조율하고 나를 없앤다. 때로는 더 강하게 나를 주장하고 나를 어필한다. 그런데에 기운을 모조리 쓰고 집에 돌아오면 기절한 것 처럼 잠을 잔다. 잠만 잔다. 신경이 가라앉지 않으면 술이라도 부어 안정시켜야 한다.
아무도 나한테 사과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사과를 해. 내가 잘못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그냥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몰랐으면 몰랐던 것에 대해서까지도. 나는 왜, 난 왜.
그런데 정말로 잘못한 사람들은 왜 사과하지 않지?
내가 느끼는 필요 이상의 예민한 미안함을 스스로 못났다고 비난한 적이 많다. 실은 최근까지도 그렇게 지냈다. 나도 사과 안 할 거야! 악착같이 마음 먹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또 알았다. 그냥 사과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는 걸.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사과일지도 몰라. 아무도 누구도 나한테 사과하지 않았다고, 나마저 미안해하는 마음을 없애버리면 안 돼. 그건 미안함을 잃어버린 사람들, 사과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닮아버리는 거야. 하고.
나를 다독이는 법을 가까스로 배워. 일기를 쓰면서.
의도하지 않은 실수에도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누군가 나 때문에 아팠다고 하면 마음이 쓰이고 곰곰이 곱씹어 사과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바보 같아서, 가끔은 나 자신을 보호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가당치 않은 위로를 건네 버리는 나는 안쓰러운 상황을 안쓰러워하는 나는. 실은 그런 나 자신을 안쓰러워 하는 것이었구나 하고.
세상물정 빠삭한 듯 영리한 척 굴다가도, 사실은 몸이 아플 만큼 모두에게 미안할 때가 있노라고. 그런데. 그냥 왜 그런 약한 마음이 내 마음인지는 모르겠고, 또 그래서. 또 그러므로. 나는 누구보다 거리 두기가 필요한 사람이기도 한 거라,
나는 혼자이다.
*
꿈에서 깬 다음에 퍼뜩 알았다.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순간은 지나간다.
지금 여기, 바로 내 앞의, 사람이 (그가 누구라도) 아파 보이면, 아프다고 하면 괜찮냐고 물어봐 줄 수 있는 거라고. 그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으면 된다고. 마음이 쓰이면 따라 나가서라도 사과하면 되는 거라고.
다만 내가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갖춰야 하는 내 몫이라. 나는 열심히 그런 것들을 만들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까진 넘어오면 안돼요.
이 이상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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