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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 공부하는 여자 - 앎으로써 삶을 바꾸는 나의 첫 페미니즘 수업
민혜영 지음 / 웨일북 / 2019년 10월
평점 :
1. 이 책은 읽으면 안될 것 같아, 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2000년대 후반 쯤.
일단 어렵기도 했지만, 불편했다. 무슨 책인지는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당시의 내가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무언가를(지금 추측해 보건대 모성애, 이성애, 가족, 계급, 민족, 국가, 역사, 이런 종류의 개념이었을 거다) 심각하게 공격 당한 느낌이 들어서 무서웠다. 알면 좋긴 하겠지만, 힘들어 질 것 같아, 안 읽을래.
2. 몇년 후에 내가 소속감을 느끼고 있는 곳에 이런저런 이슈들이 생겨서 참조하듯 얇은 책들을 골라 발췌해서 읽었다. 조심조심, 필요한 부분만 읽자... 처음에 접할 때의 그 무서움이 있어서, 페미니즘에게 완전히 설득 당하지는 않을 거야! 라는 마음이 있었다. ‘명예 남성’이라는 단어가 눈에 밟혔다. (이후 이 단어는 메르스 갤러리를 거치며 명예자지 흉내자지를 줄여 명자, 흉자가 되었다....)
이 글에 따르면 나, 명예 남성이네. 열심히 살았는 데, 네 사는 방식 별로였다고 갑자기 뺨이라도 맞은 듯 울고 싶었더란다😅 꽤 아팠는 데, 내가 사실은 명예 남성인 걸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면 했다. 나도 더 알고 싶지 않아졌고. 3. 그 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2016년 겨울의 촛불 집회에서 박근혜에 대한 여성혐오를 멈춰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이야기가 불편했던 건 아니었다.정작 불편했던 건 주변의 사람들의 반응. “그런 맥락이 아니잖아, 맥락으로 읽어야지 그게 어떻게 여성 전체에 대한 공격이냐?” 보다 참기 힘들었던 종류는 ‘공작’의 입장. “촛불을 꺼트리기 위해 일으키는 ‘작은’ 소란이다” 와 같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대의’를 가로막는 작은 분란으로 인식하는 그 큰 목소리에는 박근혜 퇴진을 원하는 나의 마음도 있었지만, ‘나’의 또다른 어떤 모습들은 담겨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여성혐오를 멈춰달라’는 말을 완전한 나의 목소리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 말이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여성이었으니까.
조금은 긍정적인 입장에 서서 페미니즘의 텍스트를 읽어가기 시작한 것 역시 그 무렵이다. 당시에는 너무 급진적이라 생각했으나, 이제와 생각해보니 참으로 온건한....(응?)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으면서, 나는 몇번 울었고, 20대의 나 자신을 참으로 진실로 회개(?)했으며, 내 주변을 둘러싼 어떤 관계들이 미워졌다.
그리고... 그리고........
이 종류의 책을 더 읽으면 왕따가 될 것이란 강한 직감이 왔다.
온 세상이 불편해지리라, 안그래도 반골인데 더 심한 반골이 되리라, 어쩌면 연애도 결혼도 못하고 혼자 살아야 되리라, 나랑 술마셔 주는 사람들과 더 이상은 따뜻한 대화를 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그 직감은 맞아 떨어져... 3년 후 현재 인간관계 90% 정리하고 혼자사는 중... 뚜..뚜..😭....)
역시, 이 정도에서 멈추자. 페미니즘은 모르는 게 좋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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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삼세번 공격에도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은 나였으나, 몇달 뒤 2017년의 초봄. 더 겁내다가는 도태된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나의 측근(주로 친족들)들이 장난섞어 나를 명자라고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 앗. 들켰다. 그런데 어쩐지 들킨 것이 반가웠단다.
왜냐면, 이젠 그것들을 읽어도 아예 ‘왕따’는 아닐 것 같아서. 물론, 좀 외로워지긴 하겠지만. 최소한의 안전망이 확보된 것 같아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아주 조금씩 집중해 읽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책들을.
“(37) 질문을 바꿔보자. 그렇다면 가족은 해체되면 안되나? 그토록 극심한 폭력으로도 가족이 파괴되지 않는 것이 실은 더 큰 문제 아닌가? 이 문장은 작은 일상이 무너질까 두려워 페미니즘을 멀리하려 던 내가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통찰을 주기도 했다. 무언가를 자각하지 않고 배우지 않아야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유지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그것이 더욱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토록 중요하다고 하는 ‘가정의 평화’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평화인가? 나의 삶이 무언가를 일부러 멀리해야만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실은 그것이 더 큰 문제 아닐까?
어쩌면 나는 짧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식은, 내가 생각하는 형태로 나를 압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나의 삶을 바꿔줄지 모른다. 페미니즘을 통해 나의 이야기가 변화하기 시작하고 그 변화의 내러티브를 써내려감으로써 나는 새로운 해석의 틀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가족의 취약성을 인식하는 것 만으로 더 자유로운 가족의 모습을 상상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무엇이 바뀔지 혹은 바뀌지 않을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지로 지속 가능한 현실을 지속하는 것이 더욱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이 질문을 잊지 않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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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이었던 저자는 일상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다. 학부시절 막 알아가기 시작한 개념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까봐, 함께 어울리는 친구와 동료들과 멀어질까봐 걱정했던 나보다 훨씬 강도 높은 두려움이었을거라 짐작해본다.
저자와 내가(함께!) 좋아하는 정희진 샘의 글 대로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세상이 넓음을 알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과정을 뜻한다(p.19 혼자서 본 영화)”, 어떤 앎은 알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이 곧 실천이 되기도 한다.(이 책의 부제는 “앎으로써 삶을 바꾸는 나의 첫 페미니즘 수업”이다.) 저자는 알기 시작하면서 깨닫게 되고, 깨달으면서 어느새 공부해 여성학 석사과정에 까지 진학해 공부 중이시다.
꼬박 만3년 동안 이 정도 수준으로 페미니즘 책을 읽어내려면, 얼마나 절박한 앎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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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을 막 읽고서 100자평에 “역시 탈혼과 이성애거부, 재생산 노동(특히 임신, 출산, 육아)거부 만이 가부장제를 때려 부수는 페미니즘의 근본적 실천이라는 확신이 든달까.”라고 적었는 데, 책에서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직업을 가진 여성이자, 결혼을 한 여성이자, 또 재생산 노동을 해야 하는 엄마로서 녹록치 않았던 그 경험을 해석하기 위한 공부의 힘듦이 글에 그냥 배겨있어서, 저절로 그런 결론이...
“(187) 말할 것도 없이 페미니즘이 필요 없는 세상은 페미니즘이 필요한 세상보다는 훨씬 더 좋은 곳”이라면 -> 내가 지금 당장 페미니스트로서 해야 할 일은 -> 지금까지의 내가 페미니즘이 왜 필요한지 충분히 자각했으니, 미래의 나는 페미니즘이 필요 없어지도록 만드는 것 -> 여성을 그만둘 수는 없고, 일을 그만둘 수도 없으니, 일단 결혼과 재생산 노동(특히 임신, 출산, 육아)이라도 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깨달음. 그렇다면 그것은 어쩌다보니, 이미 내가 하고 있는 것? ㅋㅋㅋㅋㅋ 앗, 알면서 삶이 바뀐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페미니즘 책들과 함께 점점 깊어지는 저자의 사색들이 돋보이는 책이었다.
덧붙여 나는 그만큼 절실하게 읽고, 공부하고, 삶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도.
각자가 소화하고 살아갈 수 있는 앎과 삶이 있다. 3년을 내리 페미니즘을 공부한 저자만큼의 절박함은 아니었을 지라도, 나 역시 지난 3년동안 어떤 태도들을 고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를 구성하는 관계들과 끊임없이 이별하게 되었다(어떤 의미에서는 이별 중에 있기도 하다). 나를 고치기 싫어서 페미니즘을 거부했었고, 어떤 헤어짐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어서, 페미니즘을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도 싶기도 했었다.
나는 많은 것들이 불편해지고, 모르는 것을 더 몰라가는 사람이 되었고, 그 덕에 자유로워졌지만 또 외로워졌다. 외로우니 책을 읽고 책을 읽으니 더 알게되고 알게되니 또 모르겠고,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자유로워지고... 더더 자유로워지기 위해 청산하고, 이별하고....
그러다보니 더욱더 외롭....🤧 콧물이 난다.. 아, 춥다....
엄마와 아빠는 또 올해를 넘긴다고 시집 못가는 딸을 걱정한다. 원래도 불효녀였지만, 결론적으로 또 불효녀가 되었네. 나를 외롭게 만든 페미니즘은 이처럼 나를 불효녀로 만들었고, 효자를 싫어하게 만들었고, 대한민국 남자들 다 효자고, 그래서 난 결혼을 못하게 되었으니, 이 모든 사연을 부모님께 털어놓으며 그 앞에서 가부장제 어쩌고 할 수는 없고, 다가올 설날을 또 어떻게 슬기롭게 헤쳐나가야 하나 고민도 추가되어서 또 코에서 눈물이....
음,
그래도 누군가가 페미니즘 알래, 모를래? 라고 물어보면 알래! 라고 대답 할거다.
기왕이면, 2000년대 후반으로 돌아가서 아예, 확 알아버릴 수 있으면 더 좋겠다 싶다.
책을 읽으면서 어쩐지 어떤 영상이 떠올랐다. 함박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바닷가에서 밀려오는 파도에 🌊🌊 앗차거 앗차거 피하던 어떤 여성이 발을 적시고 무릎을 적시더니 갑자기 배낭에서 전신 수영복을 꺼내 갈아입고 서핑보드들 들쳐메고 마구마구 헤엄쳐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그런 멋진 이미지. 그녀는 곧 서핑보드에서 일어나 파도를 멋지게 타실 것 같다. 응원해요🙌🏻🙌🏻🙌🏻
마지막으로 페이퍼 쓰다가 다시 꺼내서 읽게된 <정희진처럼 읽기>의 세 문단을 첨부 한다.
“(p.278)
생각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생각은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이다. 나도 조금 생각한 적이 있다. 피학의 쾌락이 있었지만, 공부가 가장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에서 기름이 빠져나가는 느낌, 빛이 투과되지 않는 심해에서 괴물과 마주한 기분, 완전히 무기력해져서 눈물만 흐르는 상태. 긴장을 견디다 못해 물건(연필)을 부수거나 더 큰 고통으로 상쇄하기 위한 자해(별로 안 아팠다.) 이 우주에 나도 타인도 없는 것 같은 무섭도록 외로운 상태. 단것을 먹어대도 두통만 올 뿐 배가 부르지 않았다. 무기력, 청소와 세수의 반복. 이것이 공부다.
내 무능력도 원인이겠지만 사유는 힘든 일이다. 생각할수록 공부할수록 무지의 공포는 비례 상승한다. 나 자신이 작아지고 우울해진다. 우울은 공부의 벗.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덧, 이전에 ‘여성주의 고전을 읽다’에서는 주디스 버틀러 하나도 이해 못했는 데, 이 책을 통해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다양한 페미니즘 책들을 저자가 공부한(이해한) 방식으로 알기 쉽게 해설하고 있어 지금 나의 인식 수준에는 적절했다. 추천해 주신 단발머리님께 감사! ^0^*
나는 그저 내가 ‘왜‘이렇게 힘든지 알고 싶었다. 힘든 것을 말하는 것이 ‘왜’ 치사한 것처럼 느껴지는지, 왜‘ 인생이 자꾸만 어깃장을 높는 것 같은지 알고 싶었다. 이유를 알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 P21
자신의 재생산을 위한 노동은 자신이 해야한다. 자기 몫의 재 생산을위한 노동은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는 이 당연한 마링 너무나 전복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지극히 당연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어서일 것이다. - P48
나는 최근 노동을 공부하면서 이 문제를 너무나도 절실하게 깨닫고 있다. 차이에 맞추어서 육아 휴직을 강화하든, 평등에 맞추어서 여성의 사회 진출을 늘리든 여성의 처지가 근본적으로 나아지지 않는다는 곤궁함은 여전하다. 이럴 때 그 기준 자체가 성인 남성의 노동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깨닫는다면, 그 기본값 자체를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P171
‘보이지 않는 손’만을 경제로 치고 ‘보이지 않는 가슴’을 비가시화 하는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은 결국 ‘돌봄의 공백’이다. 모두에게 필요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돌봄 공백 사회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 돌봄이 필요한 존재이자 돌봄을 해야할 주체라는 인정 아닐까.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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