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게 길을 묻다 - 트라우마를 넘어선 인간 내면의 가능성을 찾아서
고혜경 지음, 광주트라우마센터 기획 / 나무연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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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꿈 속에서 비행기가 꽝꽝 떨어지곤 했다. 뒤에서 꽝, 앞에서 꽝, 산너머에서 빌딩 뒤에서 꽝! 소리만 들리고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곤 했다.
돌이켜 보면 네가 믿었던 것들이 이제는 추락했다는 내면의 암시였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 후로도 몇 년동안 수 십번 (기억 못하는 것까지 합하면 수백번) 비슷한 내용의 꿈을 꾸었다.
내가 믿었던 것들을 어렵사리 포기하고 난뒤, 거짓말처럼 나는 다시는 그 꿈을 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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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꿈을 꾸면 로또를 사는 우리들은 꿈이란 미래를 내다보는 계시라고 막연히 생각하지만, 사실 꿈은 무의식 속에 잠재된 과거와 현재가 나에게 보내는 어떤 신호일 가능성이 높다.
난 종종 기억에 남는 꿈을 꾸는 날이면 그 때 느낀 감정과 은유들을 해석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잘 몰랐던 내면의 목소리가 들린다. 항상 완벽하게 깨닫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꿈을 되새기며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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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7명의 아저씨들은 30년이 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심각한 악몽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고 겨우 잠들거나, 불을 키고 자지 않으려고 노력하거나. .. 생의 1/3은 잠을 자는 것이 인간의 생리이니 그들은 적어도 10년의 시간을 악몽 속에서 고통받아왔다. 깨어있는 시간인들 괴롭지 않았을까. 518이 사건으로서의 상처였다면, 살아남은 이들이 겪어낸 세월은 그야말로 생지옥.


광주트라우마센터는 그룹투사 꿈작업가 고혜경을 불러 그분들과 꿈 분석-치료를 시작한다. 잠을 자고 꿈을 꾸고 꿈을 적고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고, 바꿔 꾸면서 그들의 사회적-개인적 트라우마를 조금씩 달래가는 과정의 녹취를 묶은 책이다.
꿈작업 참여자들은 모진 고통을 겪은 이들이지만 꼭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아니라 누구라도 읽고 공감할 수 있다.
왜 아닐까. 우리모두는 연결되어있으므로- 사회의 상처는 모든 개인의 상처의 다른말이다. 나는 그들의 증언과 그들이 꾸는 꿈에서 놀랍도록 일치하는 경험과 꿈들을 발견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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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은 나쁜 꿈이 아니다.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매우 시급한 문제를 그냥 넘겨서는 안된다며, 사건의 해결을 촉구하는 무의식의 붙잡음이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꿈을 기억할 수 있다면, 마음 속 깊은 곳의 상처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결국 스스로와도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p.119)
보세요, 뭔가 할 수 있지요. 어떤 상황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내셨어요. 가위에서 벗어날 힘이 내 안에 있어요. 마비가 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건 내 안에 마비를 풀 힘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꿈 상황을 기억하는 것이고요. 고통이나 두려움에 압도당하면 그 사실을 잊게 되지요.
518때 고문당한 분들 아니면 이와 유사한 극한사황에 처해서 그 뒤에 트라우마를 앓는 분들이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 같아요. ‘인간은 절대 무력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무력했다면 지금까지 살아 계시지 못할거예요.


무척 감명깊게 읽었고,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었다. 특히 자면서 악몽을 꾸는 사람, 비슷한 꿈을 되풀이해 꾸는 사람, 자주 가위에 눌리는 사람들은 꼭 읽었으면. (현실적 팁 제공)
또한 현재 우리에게 산재한 구조적문제와 관련된 사회적 해결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지, 약간은 다른 장르의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도 좋다.

한동안 인류애도 떨어지고, 역시 인간은 지옥인가 절레절레 했었는 데- 읽으면서 잠시.. 아주 잠시(!) 사람에 대해 긍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흘만에 까먹었다고 한다.. 인류애 지못미..)

덮고나면 “트라우마를 넘어선 인간 내면의 가능성을 찾아서”라는 책의 부제가 더 또렷이 보인다.
우리의 내면엔 우리가 감지한 것 보가 더 강한 힘이 있어, 우리는 반드시 우리를 극복할 것이다. 알기 쉽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단단한 인간 내면의 세계를 책으로나마 경험해 보시기를.


“(p.274)
김광현 : 518때 기동타격대 활동을 했던 제 동지들 중에서 민재, 석홍이, 창규란 친구가 죽었어요. 둘은 국립묘지에 들어갔는데, 안타깝게도 한 명은 구묘역에 있지요. 평상시에도 가끔 생각나면 밤중에 그놈들을 찾아가곤 해요. ... 또다시 잠들었는데, 이번에는 평소처럼 술을 사들고 망월동에 갔어요. 세사람 무덤에 가서 술을 비웠는데, 문득 우리 넷이 한자리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더군요. 다들 별말 없었는데, 석홍이만 막 울었어요. 나만 많이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요. 그러더니 자기는 먼저 가야겠다면서 일어나버리더군요. 그 친구를 막 붙잡다가 깨어났어요.
...... 공중파에서 제 이런 이야기를 촬영해서 방영한 적이 있어요. 거기 나온 저를 보면 미친놈에 알콜중독자, 정신병자에요.
..
고혜경 : ..... 꿈이 전개되는 자리가 망월동 묘지여서인지 꿈 자체가 생사와 시공을 초월해요. 이 긴 세월 혼자서 술 사들고 묘지를 찾아와 독백해오던 입장이 되어보니, 이 독백에 드디어 친구들이 화답해주는 듯 해요. 저는 이 자리가 제 안에서 일어나는 화해의 자리 같아요. 그동안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우정보다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은데, 드디어 그 전환이 일어나요. 30여 년 지나 다시 만난 우리에게는 우정이 더 소중해요. 친구들이 나를 염려하고 위로해주는 장면은 뭉클해요. ˝너 힘든 것 알아, 그동안 짊어진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도 알아.˝ 이렇게 내 마음을 알아줘요. 그런데 이는 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요. ˝그간 애 많이 썼다.˝ 드디어 내가 나 자신에게 친절해져요. 이는 긴 세월 내가 나에게 하지 못했던 말이에요. 친구들한테 미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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