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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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 아팠다. 아프다는 말을 하기 질릴 정도로 계속 아프기만 했다.
8월 첫주 쯤엔 잠도 자기 힘들 정도로 아팠고, 글을 더듬더듬 적는 지금도 미약한 두통 때문에 힘들다.
물리적 고통보단 자꾸 나약해지는 마음이 싫었다. 계속 이렇게 아프기만 하다가 돈도 못벌고 가난하게 늙어가면 어떡해? 불안에 기마저 쭉쭉 빨려들어갔다.
.

아픔없는 세상을 꿈꾸기도 했고,
상처주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아니,
지금도 한다. 종종.

거기에는 고통을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는 무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고통에도 아픔에도 목적이라는게 있는 것일까.



고통이 자아의 경계 역할을 한다는 구절을 읽으면서, 아픈 걸 인정하자고 생각했다.
그래 여기까지가 나다.
꽉 짜여있는 일상이라는 타임테이블에 해야할 ‘일’들, 해낸 ‘일’들 만이 내가 아니다. 몸이라는 공간에 엄연히 실존해 있는 감각하는 주체가 곧 나다.
그러니까,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내 ‘몸’에 대해.
몸이 자기를 잊지 말아달라고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 당장 부정해버려야할 증상으로 여기니 불안, 불평만 늘어갔던 거다.

.
.

성숙하게 아픔을 인식하는 것이 서툴다.
부정, 비명, 주저 앉음. 혹은 심각한 낭만화.
있는 그대로 아픔을 인식하지 않은 채, 쉽사리 누군가의 고통을 대신 말했던 적도 있다.
부끄럽지만 타인의 고통을 대상화 했던 적도, 일을 풀어가는 수단으로 여긴 적도 많았다.
그리고 여전히 어떤 고난을 패기 있게 맞받아쳐나가는 것이 가장 멋지다고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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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쩌면.

아픔 없는 세상이라 표현하는 천국이 정말 구원일까.
내가 획득하지 않은 평안과 원래부터 주어져있는 건강이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좋기만 한 것일까.

그런 물음이 생겼다.
아파서. 아프니까.
아프지 않았음 몰랐을 거다.

여전히 아픈게 싫다.
근데 싫어하면서도 생각은 좀 해야지 한다.
그 아픔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사랑의 출발점일지도 모르니.

“나병(한센병)이 생긴 피부는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고통은 촉각과 함께 퍼져있어 ‘자아’의 경계 역할을 한다. 내가 느끼는 것까지가 자아라고 한다면, 말단 부분의 감각이 없어진 나병 환자들의 자아는 손이나 팔 혹은 다리만큼 줄어드는 셈이다. 고통이 몸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함으로써 어떤 사회구성체의 일부가 되는 셈이다. 당사자를 당신 안으로 불러들여 마치 그 고통을 자신의 것인 양 반응하는 동일시. 당신이 누구와 혹은 무엇과 스스로를 동일시 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정체성이 구축된다. 정신적 자아의 한계는 사랑의 한계다. 사랑은 끊임없이 뭔가를 덧붙여가고, 가장 궁극적인 사랑은 모든 경계를 지워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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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가까운 6장 감다,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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