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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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도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룬 데뷔작 <13계단>으로 홈런을 친 다카노 가즈아키의 복귀작이다. 작년 여름에 사놓고도 688쪽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과 페이지마다 빼곡한 글자를 겁내 안 읽고 버티다가 며칠 전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막상 한 번 잡으니까 놓을 수가 없더라. 다 읽고 난 소감은 간단히 말해, 다카노 가즈아키의 현재까지 최고작이라는 것. 최근 일본 추리소설은 연애나 인간관계 등 다소 소소한 테마의 일상 미스터리가 많고, 그 배경이나 설정도 가능하면 평범하게 꾸며 자연스레 독자의 공감을 사는 내용이 인기였던 것 같다. 나와 우리 이웃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듯한 아기자기한 재미의 추리소설, 과연 읽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도 즐거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작가의 시공을 뛰어넘는 상상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방대하고 치밀한 자료조사, 거대하고 진지한 주제를 거침없이 다루는 역작이 그리웠던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재로 한 거니까 조금만 관찰력을 키우면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기분의 작품과 이런 정교한 구성과 과학적인 설명, 뛰어난 상상력이 어우러진 소설을 나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어, 하는 기분의 작품. 당연히 둘 중 우열을 가릴 수는 없을 테지만, 역시 대부분의 독자를 진정 감탄하게 만드는 것은 후자이리라. 몹시 거친 분류이지만 <제노사이드>는 바로 후자, 다시 말해 비범한 작가가 열과 성을 다해야만 쓸 수 있어 독자들의 자연스런 존경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제노사이드>는 일본과 아프리카의 두 주인공이 번갈아 등장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일본 쪽 주인공은 얼마 전 지병으로 아버지를 잃은 평범한 약학 대학원생, 고가 겐토. 물론 전공 공부를 무척 열심히 한 듯 약학 지식이 꽤나 탁월해 평범하다는 말에는 살짝 어폐가 있다(관련 지식이 전무한 진짜 '평범한' 독자들이 보기에는 약학계의 슈퍼히어로다). 겐토의 아버지 또한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학자였지만 그다지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 조금 궁상맞아 보이는 언행으로 인해 겐토는 과학자로서 아버지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례식이 끝나고 날아온 아버지의 예약 이메일 한 통은 겐토의 평범한 삶을 모험과 진지한 연구로 가득찬 신세계로 안내하는데, 이 부분은 흡사 히치콕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목표 기한 안에 궁극의 신약을 개발할 것. 다만 도처에 위험이 있으니 조심할 것. 겐토는 왜 자신이 이 신약을 개발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 정체불명의 적에게 쫓기면서 연구를 계속한다.

 

아프리카 쪽 주인공은 아들이 걸린 불치의 유전병 치료비를 대기 위해 이라크 등 교전지역에서 용병 생활을 하는 전직 군인, 조너선 예거. 예거는 거액의 사례를 약속받고 다른 용병 세 명과 함께 특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아프리카 콩고로 잠입한다. 그러나 작전 개시에 대비한 모의 훈련에서 예거는 한 가지 의혹을 느끼는데, 왠지 그들의 제거 목표가 어린이의 몸집을 가진 것 같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남의 아들을 죽일 수 있을까? 도덕적 딜레마를 애써 묻어두고 어쨌든 서서히 목표 지역으로 나아가는 예거 일행의 앞을 아프리카의 무자비한 정글 외에도 각종 중화기로 무장한 준군사 조직들이 가로막는다. 겐토의 챕터가 서스펜스 영화라면, 예거의 챕터는 흡사 브루스 윌리스가 나올 듯한 액션영화 같은 모험과 위기의 연속이다. 개인적으로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지는 두 이야기가 어떻게 접점을 이룰지 몹시 궁금했는데, 마침내 하나로 맞닥뜨린 이야기의 본질을 알고 나서 굉장히 감탄했다. 온 사방으로 뻗어 나간 이야기 줄기가 이 정도로 정교하게 맞물린 소설은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제목은 '종족 말살'을 뜻한다. 나치의 홀로코스터나 아프리카 부족 간의 격렬한 인종 청소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듯한데, 인류 역사상 수없이 반복되어 왔고,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는 비극이다. 다만 이 책에서의 제노사이드는 인류와 인류 간의 제노사이드가 아니라는 데 재미의 핵심이 있다. 내용을 전혀 모르고 보면 훨씬 놀랄 일이 많을 듯해, 구체적으로 현 인류의 제노사이드 대상을 밝히지는 않겠다. 아무튼 이 책에 나오는 인류의 '적'은 상상조차 못할 정도의 비범한 능력을 지녀 현 인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석학들과도 멋진 적수가 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체스 게임처럼 전개되는 두 세력 간의 치열한 두뇌싸움에 흠뻑 젖어보시길. 약학, 인터넷, 항공, 인류학 등 다양한 전문 영역을 깊이 있는 취재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마이클 크라이튼,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선배 과학 스릴러 작가에 부끄럽지 않고, 아프리카에서의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와 그 와중에 마주치는 소년병 등 현대 아프리카의 비극을 그린다는 점에서 후나도 요이치의 모험소설도 생각난다. 어떻게 봐도 모처럼 만난 소설계의 역작임에는 틀림없다. 데뷔작과 몇 편의 후속작들에서 이만한 깜냥을 짐작하지는 못했는데, 열정과 노력으로 자신의 한계를 돌파해낸 작가에 박수를 보내며, 독자들에게도 강력하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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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래간만에 개인적으로 기쁜 소식이 있어서 올립니다. 이번에 운 좋게도 <브라더>라는 창작 장편소설을 출간하게 되어, 홍보영업광고선전선동을 위해서 한 1년만에 글을 쓰네요. 무명의 신인 작가이다 보니, 출간 직후 열흘이 지나도 별 반응이 없고 조용히 잊히기만 해서 뭐라도 해보자 해서 예전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이곳에 글을 남겨봅니다.

 

요즘은 들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서도, 혹시나 간혹 제 서재에 들어오시는 분이 있으면 <브라더> 꼭 기억해주세요. 조폭세계가 주된 배경이지만 추리소설풍의 트릭도 있고, 남녀 4인의 시각으로 전개되는 등 구성적인 면에서도 재주껏 힘을 기울였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을 테지만, 겸허하게 반응을 기다려보고 싶네요. 지금은 악플보다 무서운 무플 상태라ㅠ.ㅠ 솔직히 독자분들의 반응이 너무 궁금하거든요.

 

그럼 모처럼 들어와 홍보영업광고선전선동만 하고 가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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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3-07-07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대박 나시길!

jedai2000 2013-07-07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대박은 기대도 안 하고요^^;; 소박...아니, 중박만ㅎㅎ 야클님 응원 정말 감사드립니다!

쥬베이 2013-07-07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제다이님!!!!!!!!!!
이런 완전 대박 소식을 들고 오시다니!!! 이제 소설가 제다이님으로 불러야 하나요??ㅋㅋ
소설가 데뷔 축하드립니다^^
제가 꼭 읽고 서평 남기겠습니다.
사적인 감정없이 최대한 객관적으로 냉정한(ㅋ) 평가를 내리겠으니 긴장하세요ㅋㅋㅋ

소설가 제다이님 만세!!!!!! ^^

2013-07-07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8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3-07-07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좋은 반응 얻기를 바랍니다^^

이매지 2013-07-08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제다이님 <브라더> 기억하겠습니다. ㅎㅎㅎ

jedai2000 2013-07-08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베이님...아이고, 반갑습니다ㅠ.ㅠ 반가워해주시니 너무 기뻐요. 실은 1년만에 나타나 홍보 글만 띡 던져놨다고 뭐라고 하실까 봐(멘탈이 유리라서요ㅎㅎ) 엄청 걱정했거든요. 이래서 오래된 곳이 좋은 곳인가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냉정...하지 않으셔도^^;; 다시 한 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프레이야님...네,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랜만에 보는 프레이야님 아이디, 너무 반갑네요^^

이매지님...이매지님도 정말 반갑습니다. 브라자도 아닌 브라더! 꼭 기억해주세용. 저도 이제 나이를 먹어서, 아저씨 저질 개그 죄송합니다(__)
 
빅 클락
케네스 피어링 지음, 이동윤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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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는 괜찮은 할리우드 스릴러영화들이 제법 있었다. 얼핏 기억나는 작품을 몇 개 뽑아보자면 일단 <해리슨 포드의 의혹>, 스콧 터로의 걸작 법정소설 <무죄추정>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당연히 해리슨 포드가 주인공이다. 지금은 셰익스피어 전문배우로 더 유명한 케네스 브래너가 감독하고, 주연까지 한 <환생>도 으스스한 서스펜스가 넘쳐났던 작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 웨이 아웃>. <언터처블>로 한창 뜨고 있던 케빈 코스트너가 한창때의 멋진 모습을 뽐냈던 잊지 못할 스릴러영화의 고전으로 아주 어렸을 때 봤지만 가슴이 타들어가는 긴박한 장면들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날 정도,

 

 

<빅 클락>이 그런 <노 웨이 아웃>의 원작이라고 해서 읽어보았다. 알고 보니 <노 웨이 아웃><빅 클락>의 두 번째 영화판이더라. 5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가 원래 있었다고. 아무튼 <노 웨이 아웃>이 미해군을 배경으로 소련(당시 기준) 스파이까지 나오는 등 스케일이 좀 더 크다면, 원작 <빅 클락>은 주로 출판사에서 모든 일이 벌어지는 살짝 소소한 이야기다. 물론 <고질라>가 최고의 스릴러영화가 아니듯이 스케일의 크기와 스릴의 크기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절묘한 상황 설정과 심장이 죄어오는 듯한 긴박한 분위기, 폭발적인 클라이맥스만 유지한다면 8평짜리 아파트에서 등장인물 두 명만 갖고도 충분히 매력적인 스릴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 <빅 클락>은 위에 언급한 몇 가지 잘된 스릴러의 필요, 충분조건을 남김없이 갖고 있는 소설이었다. 먼저 대강의 줄거리를 보자. 거대 출판사 사장의 애인과 불륜관계에 빠진 주인공 스트라우드. 홧김에 애인을 살해한 사장은 스트라우드에게 유일한 목격자인 어둠 속의 남자를 찾아내라는 지시를 내린다. 하지만 어둠 속에 있어 사장이 얼굴을 보지 못한 그 목격자는 다름 아닌 스트라우드 자신이었던 것이다. 이제 스트라우드는 자기 자신을 추적하는 팀을 조직해 스스로를 사냥해야만 한다!

 

 

한마디로 해설에서 멋지게 표현한 것처럼 자신을 추척하는 사람이라는 끝내주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제목의 <빅 클락>이 상징하듯, 시계 부속처럼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현대인들이, 영원히 멈추지 않고 재깍재깍 돌아가는 현대 문명의 거대한 시계 속에서 조금씩 그 본질을 잃어간다는 주제도 마음에 든다. 각 장마다 화자가 달라지는 구성 또한 독서의 지루함을 줄여주는 역할을 해서 만족스러웠다. 개인적인 취향에 가깝겠지만 분량이 다소 짧은 점도 나쁘지 않았다. 주인공의 대소사, 가정사, 여담, 객담을 끝없이 늘어놓는 요즘 스릴러에 독자들이 과연 진정한 스릴을 느낄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서스펜스 스릴러는 플롯 진행에 꼭 필요한 이야기 위주로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이 뻗어나갈 때 가장 밝은 빛이 나는 것 같다. 반드시 몰입할 수밖에 없는 줄거리에 마치 히치콕 영화와 같은 경제적인 진행, 그것이 <빅 클락>이 가지고 있는 궁극의 장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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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2-11-28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간만에 리뷰 남기셨네요. ^^ <노 웨이 아웃>의 원작이라면 안 볼 수 없군요.

jedai2000 2012-11-2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야클 님.

리뷰를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는데, 그놈의 시간이 발목을 잡네요ㅜ.ㅜ
앞으로는 자주 쓰겠습니다. 자주 뵈어요~~
 
7년전쟁 세트 - 전5권 7년전쟁
김성한 지음 / 산천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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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역사소설을 즐겨 읽는다. 물론 대다수의 역사소설은 권수가 무척 많은지라 자주 붙잡을 수 없고, 또 슬프게도 오랜 시간을 기꺼이 투자할 만큼 만족스러운 역사소설도 그리 왕왕 눈에 띄지는 않아 1년에 한두 편에 불과하지만. 언제 역사소설을 읽고 싶으냐면, 저녁 밥값을 고민할 때나 장바구니에 넣어둔 물건을 살까 말까 줄기차게 재는 상황에서 주로 생각난다. 다시 말해, 팍팍한 현실에 움츠러든 내 모습이 싫어지는 순간 억눌린 내 마음은 장쾌한 역사의 현장 속으로 달음박질 쳐가는 것이다.

 

역사소설은 이미 끝이 정해져 있는 얘기다. 그래서 역사 속 실존인물들의 행보를 가슴이 터질 만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 충신열사, 재자가인, 장삼이사, 기군역적의 다채로운 인간군상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인간 드라마를 때로는 감탄하며 혹은 비분강개하며 죽 감상하면 되는 일이다. 소설보다 실제 있었던 일이 더욱 흥미롭다는 말처럼 대부분의 역사는 알면 알수록 재미나고, 게다가 오늘날의 삶에 충분히 되살릴 수 있는 교훈까지 제공하고 있으니 읽어서 손해 볼 걱정이 없다.

 

역사소설이 이렇게 재미있고 가치 있는 것이라지만 그래서 내가 무엇을 읽었나를 생각해보면 조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3할이 사실이요, 7할이 허구라는 <삼국지> 등의 중국 고전이나 일본의 역사소설 거장 시바 료타로의 작품들을 주로 읽어왔는데, 남의 나라 역사만 줄기차게 들고파는 것도 물론 장점이 있겠으나, 먼저 우리 것을 알고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게 순서가 아닐까 하는 의문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다른 나라의 뛰어난 역사소설에 버금가거나 혹은 능가하는 작품을 쉽사리 찾지는 못했다. 그러던 차에 만나게 된 김성한의 <칠년전쟁>은 과장을 조금 보태 내게는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일독의 가치가 있는' 우리의, 우리만의 역사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국어 교과서를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90년대 중고교 교과서에는 김성한의 <바비도>나 <오분간> 등의 단편이 실려 있었다. 당시에도 우리나라 작가가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을 소재로 소설(<바비도>)을 썼다는 게 이채로웠는데, 이른바 '순문학' 작가로 활동하던 시기에도 첨예한 역사적 순간을 배경으로 삼았던 걸 보면 원래 역사에 예리한 감각이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작가인 듯하다. 실제로 60년대에는 영국에서 역사학을 정식으로 공부했고, 작가생활의 말년에는 본격적으로 역사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아마도 임진왜란을 다룬 <칠년전쟁>을 이 시기, 김성한의 대표작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고, 어떤 양상으로 전개됐으며, 어떻게 끝을 맺게 되었는가. <칠년전쟁>의 핵심이라 할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백년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했고, 조선은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상황까지 몰리다가 수군대장 이순신이 분전해 일본군을 쳐부수어서 전쟁이 끝났다, 이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전쟁이 7년 동안 지속된 것도 몰랐고, 정유재란이라는 일본군의 2차 침공에 대해서도 깜깜했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임진왜란에 대해 나와 비슷한 수준의 지식만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내가 너무 얕보는 건가)? 임진왜란이 동북아 삼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던 대전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무지는 가슴 아픈 부분이다. 오늘날에도 한중일, 삼국은 각자의 이익과 자구를 위해 열심히 경쟁하고 있는 처지니까. 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듯이 과거의 전쟁을 자세히 알면, 그 공부 속에서 오늘날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찾아내어 향후의 전략을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에 나온 김성한의 <칠년전쟁>이 요즘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리라.

 

전5권으로 된 <칠년전쟁>의 각권 내용을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1권에서는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거쳐 명나라까지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부리자, 조선과 일본의 중계무역으로 먹고 사는 쓰시마(대마도) 도주 이하 신하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총력을 다한다. 서서히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막후에서 펼쳐지는 이 치열한 외교전은 임진왜란을 다룬 어느 매체에서도 본 적이 없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마침내 20만 일본 대군의 침공이 시작되는 2권에서는 문치주의를 숭상해 전혀 방비가 되지 않은 조선이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조선 왕, 선조가 명의 국경과 맞닿은 의주까지 피난을 갈 정도였으니 그 참상이 오죽했겠는가.

 

전쟁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전라도 수군대장 이순신이 바다에서 일본군을 격파해 그들의 보급망을 끊어버리는 조선의 반격이 3권의 줄거리다. 이즈음 선조는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고 지난한 노력 끝에 마침내 명의 파병 승인을 이끌어낸다. 명나라의 원군과 조선군의 합동작전으로 평양을 탈환하고,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지친 일본군이 서울에서 방어선을 치며 전쟁은 장기화 조짐을 보인다. 한편 명에서는 희대의 걸물 심유경이 등장해 삼국의 화평을 중계하여 크게 한탕을 할 계획을 세운다. 민간에서 땅 한 뙤기 파는 것만 중재해도 구전이 떨어지는 판국에 항차 나라 간의 거래를 성사시키면 그 이득이 어떻겠는가. 4권은 이 화평회담에 얽힌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핵심이다. 대미의 5권에서는 결국 화평회담이 결렬되고, 재침공한 일본군(정유재란)은 다시 위세를 북돋우다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본국으로 철수한다. 이러한 일본군의 퇴각 과정에서 최후까지 적을 추격하던 명장 이순신은 전사하고 만다.

 

대강의 줄거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양상이 무척이나 선명하게 제시된다. 게다가 이건 그저 줄거리일 뿐, 실제 책을 읽으면 그 압도적인 정보량과 정교한 당시 정세의 묘사에 마치 그 시대에 살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10년에 걸친 작가의 자료 조사와 치밀한 고증에 힘입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삼국의 궁정과 초유의 사태에 고뇌하는 고관대작, 전쟁의 참상에 신음하는 민간 등 어느 곳이라도 소홀히 다뤄지는 법 없이 고유의 빛을 발하고 있다. 때로는 아이맥스 카메라로 전국을 멀찍이서 조망하는가 하면, 가끔은 다큐멘터리 8밀리미터 카메라로 치열한 전쟁터 한복판에서 들고 찍는 등 변화무쌍한 서술 방식이 일품이다.

 

아무래도 역사소설은 과거를 다루다 보니, 당대의 고색창연한 대화법이나 뜬구름 잡는 고담준론이 별로 익숙하지 않아 독서를 방해한다고 투덜대는 분도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칠년전쟁>은 그렇지 않다. 인물 간의 대화는 대개 두 줄 이상을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짧으며 점잔빼는 꾸밈이나 꿈지럭거리는 서두 없이 꼭 필요한 핵심만 제시된다. 대화에 있어서는 일부 리얼리티를 벗어난 형국이지만 그만큼 속도감이 넘치며 독자들이 대화 속에 담긴 정보를 받아들이기에도 훨씬 수월하다. 하드보일드에 가까운 날렵한 묘사는 꼭 인물의 대화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서술에도 적용되는데, 빠르고 날렵하여 한마디로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조선, 일본, 명의 수많은 인사들이 등장해 한 폭의 풍경화를 이루고 있지만 각각의 인물이 거대한 풍경에 매몰되는 일 없이 오롯이 개성을 지키고 있다. 누군가(특히 이순신)의 무조건적인 장점만 보는 신격화나 적군이랍시고 사람의 형상을 한 악마 식으로 묘사하는 유치한 이분법도 보이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방불케 하는 화법으로 무지몽매한 군신을 일깨우는 정승 정유길의 지혜, 초일류의 군인다운 청결한 고상함과 기품을 지닌 이순신, 비록 전쟁에는 나왔지만 인명을 살상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평화를 갈구하는 천주교 신자 고니시 유키나가, 히데요시의 미친 야욕을 진심으로 믿고 진군 또 진군하는 전쟁중독자 가토 기요마사, 물건을 사고파는 시시한 장사치가 아니라 나라를 거래해 천금을 희롱하려는 명나라의 심유경 등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전술한 대로 이들 군상들이 이합집산하며 펼치는 인간 드라마가 <칠년전쟁>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유독 전쟁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도 충분히 만족할 만하다. 각 군의 분포도와 주요 전장의 형세에 얽힌 지도 등 소규모 전투의 양상을 통찰할 수 있는 자료도 풍부하고, 무엇보다 다른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 안에서 펼쳐진 전쟁이라 한국 사람이라면 직관적으로 전쟁의 세부도가 들여다보인다. 예컨대 경상도 전역을 제압한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전라도로 침투하려 하는데,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진입하는 목줄이 바로 진주여서 전쟁의 향방을 가늠하는 이 진주를 둘러싸고 치열한 교전이 몇 차례에 걸쳐 펼쳐진다. 만약 다른 나라의 전쟁이라면 이곳이 핵심 장소니 어쩌니 해도 깊이 다가오지 않는다. 잘 모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조금 안 된 얘기지만 <칠년전쟁>의 주요 전장은 대개 우리가 잘 아는 곳이라서 따로 공부할 필요 없이 그냥 읽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 점에서도 편하다.

 

아주 허접한 책이 아닌 이상 한 권의 책 속에는 으레 교훈이 있게 마련이고, <칠년전쟁> 같이 좋은 책에는 당연히 더 많은 교훈이 있다. 예컨대, 전쟁을 잘 모르는 군신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에게 총공세를 지시해 수군을 전멸시킨 일화를 통해서는 농사는 농사를 잘 아는 농부에게, 전쟁은 전쟁을 잘 아는 군인에게 맡기라는 소박한 원칙을 확인할 수 있다. 화평회담을 이끌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불사한 심유경의 파멸을 통해서는 비록 뜻이 좋다 해도 큰일에 있어서는 역시 신의가 중요하다는 교훈도 느꼈다. 무엇보다 '무능한 지배자는 만번 베어 죽여도 부족하다'는 말이 대선을 앞둔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훈일 테지만. 결국 한 권의 책에서 3할을 얻을 것인지, 절반을 취할 것인지, 작가가 의도한 전부를 얻을 것인지는 개인의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 결정될 테니 부디 뜻 있는 독서를 하시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내가 <칠년전쟁>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직접 전쟁(6. 25)을 경험한 작가만이 쓸 수 있는 휴머니즘에의 갈구였다. 전쟁을 통해 무고한 백성들이 수도 없이 일본군은 물론이고, 도와주러 온 중국군의 손에도 죽어나갔다. 작가는 그 참상을 낱낱이 묘사해 하늘 아래 더는 이러한 인면수심의 지옥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부르짖고 있다. 비록 적장이지만 7년 내내 평화를 위해 막후에서 눈물겨운 노력을 펼친 고니시 유키나가, 그와 작가 김성한이 왠지 겹쳐 보이는 건 나만의 부질없는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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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야수 블랙 캣(Black Cat) 24
마거릿 밀러 지음, 조한나 옮김 / 영림카디널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국내에 거의 소개된 적 없는 영어권 서스펜스 거장 마거릿 밀러의 대표작이다. 본연의 확고한 작품세계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스 맥도널드의 아내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 <내 안의 야수> 출간을 계기로 그녀의 대표작들이 더 많이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해본다.

<내 안의 야수>는 평범한(해 보이는) 인물들이 범죄와 악의에 맞닥뜨리면서 느끼는 공포와 불안감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심리 서스펜스 계열의 선구자 격인 작품으로 1955년에 나온 고전이지만 지금 봐도 손색 없는 깊이와 완성도를 자랑한다.

서스펜스라는 용어가 낯선 사람을 위해 적절한 예를 찾아본다면 아마도 동화 <푸른 수염> 같은 게 아닐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러 명의 아내가 죽은 남자에게 시집간 평범한 새 아내에게 남편 '푸른 수염'은 열쇠를 하나 주며 다른 방은 다 들어가도 좋지만 마지막 방은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한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새 아내가 방문을 열자 그곳에는 죽은 아내들의 시체가 줄줄이 놓여 있고, 푸른 수염은 자신의 비밀을 눈치챈 새 아내 역시 살해하려고 하는데...

여기에 서스펜스의 모든 것이 있다. 비밀을 간직한 배우자, 호기심 많고 영리하지만 연약한 주인공, 마침내 드러나는 진실과 경악스런 결말! 굳이 동화에서만 이런 얘기를 찾을 필요도 없는 게 얼마 전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결혼한 남편들마다 수면제를 먹여 재운 다음 눈을 바늘로 찔러 실명시킨 악녀가 신문지상을 장식하지 않았는가. 만약 이 악녀의 남편이 잭 리처였다면? 잘 훈련받은 헌병 출신답게 바늘을 붙잡은 손을 뒤로 꺾어버린 다음 악녀 위에 올라타 망치와 같은 주먹을 내리칠 것이다. 아마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악녀의 남편이 링컨 라임이었다면? 악녀 소매에 묻은 흰 가루를 몰래 분석해 수면제와 동일한 성분이라는 걸 밝혀내겠지. 그리고 함정을 파놓고 기다린 후에 기분 좋게 범인 체포~

그러니까 서스펜스의 주인공은 범죄수사의 천재도, 완력이 남다른 터프가이도 안 된다.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평범한 남녀에게 닥친 위기를 통해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게 필수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 안의 야수>의 여주인공 헬렌이 신경쇠약 직전의 광장공포증 환자인 건 적절했다. 옛 친구의 전화 협박을 받고 불안에 떤 그녀가 아버지의 투자상담가였던 블랙쉬어에게 협박을 한 친구 에블린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이야기는 굴러가기 시작한다.

당대에는 결정적인 반전으로 유명했을 듯한데, 요즘에는 영화나 소설 등에서 수십 번은 써먹은 듯한 반전이라 그쪽에서는 유효가 다했다고 본다. 다만 간결하면서도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문장과 폭력 장면을 거의 넣지 않고도 스물스물 공포감이 피어오르게 하는 솜씨에서 거장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은근히 유머도 있고, 특히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운 마지막 장면은 다섯 번쯤은 다시 읽게 만든다. 여러모로 명성에 부끄럽지 않은 클래식이라는 생각이다.

1955년 에드거상 수상작으로 당시 라이벌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 있는 리플리 씨(태양은 가득히)>였다. 그 작품은 아직 읽지 않았는데, 이참에 읽은 다음 비교해보고 싶다. 그리고 서두에도 썼지만 <엿듣는 벽>, <천사처럼>, <내 무덤의 이방인>, <이 뒤에는 괴물들이 산다> 등 마거릿 밀러의 다른 심리 서스펜스 걸작들도 꼭 다시 만나보고 싶다.


p.s/ 스포일러가 될 소지가 다분한 제목과 표지는 불만족. 특히 팝아트풍의 느낌을 내려 했던 것 같은 표지는 작품 내용이나 밀러의 명성과 그다지 맞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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