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2010년에 출간된 책만을 포함하며, 당연히 국내에 출간된 모든 일본 미스터리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5위 가다라의 돼지 - 나카지마 라모

 
 

 

 

 

 

 

오컬트에 미친 괴짜 소설가 나카지마 라모의 대표작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주인공은 아프리카 민속학의 권위자 오우베 교수. 8년 전, 그는 현지 연구를 위해 케냐에 온 가족을 데리고 갔다가 사고로 딸을 잃어버린다. 딸의 시체는 찾지 못했지만 죽었을 것이라는 심증은 거의 명백한 상태. 일본으로 돌아온 오우베 교수는 알코올중독에 걸려 시시껄렁한 오컬트 방송에 게스트로 참여하는 웃음거리 신세로 전락한다. 한편 딸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여긴 탓에 실의에 빠진 아내는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해 사이비 종교에 가입하고, 자연스레 가족은 거의 붕괴 직전. 이 책은 총 3부로 되어 있는데, 1부는 오우베 교수가 탁월한 마술사와 손잡고 아내가 심취한 사이비 종교지도자의 가짜 기적을 폭로하는 내용이다. 2부에서는 다시 아프리카로 떠난 오우베 교수 일행이 무시무시한 아프리카 주술사의 손에서 그의 영능력의 기반이 되는 보물(?)을 되찾아오고, 3부는 보물을 빼앗긴 아프리카 주술사가 일본으로 찾아와 이 대명천지에 주술 대결을 펼친다. 즉, 일본-아프리카-일본의 순으로 진행된다는 얘기. 간단히 말해서 1부는 완전히 일본 드라마 <트릭>이고, 2부는 <솔로몬의 동굴>, <인디아나 존스> 같은 모험물, 3부는 주술이 난무하는 일본식 전기물 같은 느낌이다. 몇 가지 물리트릭이 나오는 1부를 제외한다면 정통적인 추리소설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특히 3부는 어떻게 봐도 추리소설이 아니다), 주술, 밀교 등에 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빠르고 박력 있는 전개에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특히 3부는 스플래터 호러, 좀비물 같은 B급 호러영화 스타일의 흥미도 주니까 그쪽 팬이라면 더 재미있어 할 듯. 잡종 장르 엔터테인먼트물로 강력하게 추천한다.

 
4위 리라장 사건 - 아유카와 데쓰야 

 

 

 

 

 

 

  

일본 추리소설계의 역사적 거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미지수였던 아유카와 데쓰야의 작품이 출간되었다.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 마쓰모토 세이초급의 작가가 이제서야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아쉽지만, 늦게라도 볼 수 있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유카와 데쓰야는 흔히 철도 알리바이 트릭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국내에서는 이 장르가 그다지 인기가 있다고 볼 수 없어 정통 본격 추리소설 <리라장 사건>이 먼저 소개된 듯하다. '리라장'이라는 여름별장(한정된 공간)에 머무르게 된 일군의 예술가 지망생들(한정된 등장인물)이 하나씩 살해되는 연쇄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다른 본격 추리소설처럼 경찰들은 무수히 쌓인 단서와 복선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변죽만 울리다 두 손을 들어버리며, 결국 죽을 만한 사람이 다 죽고 나서야 명탐정이 슬금슬금 등장해 멋지게 사건을 해결한다. 한마디로 애거서 크리스티 스타일이랄까, 익숙한 만큼 편안하고 기분 좋게 읽을 수 있다. 흔히 SF소설은 아무리 과학적인 설정을 바탕에 깐다 해도 결국은 비현실의 이야기라는 장르의 특성을 감안하고 읽어야 하는 것처럼, 본격 추리소설의 인공적인 작위성 또한 이 장르의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싶다. 작가와 독자가 공동으로 합의한 규칙에 따라 공정하게 펼치는 두뇌싸움. 이러한 퍼즐 추리소설의 역사는 벌써 150년이 훌쩍 넘었고, 아직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리라장 사건>을 150년 간의 은밀한 즐거움을 아는 모든 독자들에게 권하는 바이다. 개인적으로 고전 본격 추리소설의 팬으로서 앞으로도 <리라장 사건>과 같은 훌륭한 작품이 많이 소개됐으면 좋겠고, 아울러 <검은 트렁크>를 비롯한 아유카와 데쓰야의 철도 알리바이 트릭도 한두 권쯤 꼭 맛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한다.

 
3위 이방의 기사 - 시마다 소지 
 


 

 

 

 

 

 

  

시마다 소지가 창조한 명탐정 미타라이와 왓슨 역할을 하는 이시오카 콤비의 원점이 되는 작품. 작가는 습작 기간 동안 이 작품을 최초로 썼지만 출간이 불발되었고, 오히려 두 번째로 쓴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래놓고 몇 년을 잊고 있다가 출판사들의 신작 독촉이 거세지자, 혹시 <이방의 기사>를 재활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읽어보니 이게 웬걸, 지금 발표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내용이 아닌가! 겨울바지 주머니에 만 원짜리 한 장을 넣어두고 다음 해 겨울에 우연히 발견한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그 공돈이 생긴 듯 신나는 느낌, <이방의 기사>야말로 시마다 소지에게는 복권 같은 짜릿한 책일 것이라는 짐작에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된다. 여담이지만 최근 몹시 바쁘기도 하고, 또 스포일러를 당할 우려가 워낙 커서 타인의 추리소설 리뷰를 읽지 않은 지 좀 됐다. 그저 스쳐 지나가면서 덧글이나 볼까 말까 하는 정도인데, 이 작품은 대개 평이 좋지 않은 것 같더라. 국내에 나온 시마다 소지의 작품 중에 <이방의 기사>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아쉽지만 취향 차이를 운운하며 그냥 밀어붙이는 수밖에. 환상의 시체 유기 트릭을 선보인 <점성술 살인사건>이나 황당하리만큼 스케일이 큰 건축 물리 트릭을 사용한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에 비하면 추리나 트릭이 평범해서 반응이 그저 그런 걸까? 일면 수긍이 가는 부분이지만 개인적으로 <이방의 기사>만의 장점이 다소 평범하고 작위적인 트릭이라는 약점을 충분히 상쇄한다고 믿는다. 중반부에 펼쳐지는 AV(?) 혹은 가츠메 아즈사를 연상시키는 능욕당하는 유부녀와 그 복수담 같은 전개나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절절한 로맨스는 그간 트릭 지상주의자로만 보였던 시마다 소지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미타라이, 이시오카 콤비의 빛나는 우정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황량한 이방의 땅에서 위기에 처한 이시오카를 구하기 위해 현대의 말, 그러니까 오토바이를 타고 출전하는 기사 미타라이의 장쾌한 모습은 몇 번을 봐도 그저 황홀하다.     


2위 은폐수사2: 수사의 재구성 - 곤노 빈

 
 

 

 

 

 

 

원제는 <과단>. 작년에 출간되었던 <은폐수사>의 속편이다. 세상이 다 아는 고집불통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은 죽어도 안 통하는 원리원칙주의자 류자키가 겪는 새로운 사건을 기다렸던 분들께 무척이나 반가운 작품이 아닐까 싶다. 경찰청 본청의 고위직에서 일하던 전편에서 모종의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일선 경찰서장으로 강등된 류자키. 그는 도내에서 권총 강도가 인질극을 벌이는 사건 현장을 지휘하다가 결국 특공대에게 침투 사살 명령을 내린다. 무사히(?) 범인을 사살하고, 인질을 구출하지만 아뿔싸, 범인의 권총에는 남은 총알이 없었다! 총알도 없는 범인을 사살하다니 과잉대응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지만 류자키는 담담하다. 범인이 총알이 있는지, 없는지를 사전에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이번에도 인질극 현장 대응 매뉴얼을 원칙대로 따랐을 뿐이다. 한편 사살된 범인의 농성 현장을 조사하던 류자키의 부하 경관들은 수상한 증거들을 연달아 발견한다. 과연 류자키는 이번에도 논란을 벗어나 국민에게 봉사하는 국가공무원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전편과 비슷하게 빠른 속도감과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연속되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전편에는 없었던 제대로 된 사건의 수사 과정과 의외의 결말, 반전까지 만끽할 수 있어 딱 두 배 더 재미있다. 작가 곤노 빈은 경찰소설 분야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가로, 다카무라 가오루처럼 가혹할 정도로 정밀하거나, 요코야마 히데오, 사사키 조처럼 비장하지만은 않은 엔터테인먼트형 경찰소설의 제일인자라 불러주고 싶다. 언뜻 보면 재수없는 엘리트지만 알면 알수록 끌리는 류자키라는 캐릭터의 매력만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 보장한다.     


1위 마크스의 산 - 다카무라 가오루 
 


 

 

 

 

 

 

 

다카무라 가오루의 전설적인 경찰소설. 1993년에 출간되고 10년쯤 뒤에 작가가 전면 개고한 작품이 이번에 나왔다. 예전에 한 번 본 걸 또 읽을 가치가 있을까 하고 반신반의한 게 사실이지만 막상 읽어보니 역시 예전의 감동은 어디 가지 않더라. 또한 내용적으로도 수정한 부분이 많아 비교해서 읽는 재미도 있었다. 예컨대, 십수 년 전에 미나미알프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를 소상히 기록한 등장인물 중 한 명의 유서가 발견되는 상황 같은 곳은 완전히 새로 썼다. 예전에 나온 단행본판(고려원)과 비교하기 위해서라도 바로 단행본판을 다시 읽을까 생각했지만 이 우울하고 비통한 이야기를 두 번 연달아 읽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꼭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 모든 이야기의 발아점이 되는 1970년대의 일가족 자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산림노동자의 박살 사건, 그리고 신원을 알 수 없는 백골 사체의 출현을 지나 1991년 현재 도쿄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고다 형사의 활약상을 그린 소설이다. 그러나 고다 형사뿐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수사 1과7계의 모든 형사들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사건 해결을 위해 현장에서 발로 뛰는 그들의 처절한 2주일간의 투쟁의 기록이랄까. 현미경처럼 세밀하고 정교한 수사 과정의 묘사나, 동료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보다 한 발짝 더 앞서 공을 세우기 위한 형사들간의 암투 등은 그전의 어느 경찰소설에서도 본 적이 없다. 가히 입을 못 다물 만큼 압도적인 걸작! 흔히 먹먹하다는 말을 자주 쓰는데, 헤쳐도 헤쳐도 어둠만이 가득한 산을 오르는 '마크스'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그 무엇만큼 읽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장면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이미 현대의 클래식, 비슷한 시기에 나온 어떤 작품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경지에 오른 작품이라 생각한다.   

 

 

베스트 단편

<유리기린> 중 '닥스훈트의 우울' - 가노 도모코  


  

 

 

 

 

 

  

올해는 좋은 단편집이 제법 나온 해였다. 따라서 선택이 어려웠지만 여러 단편집 가운데 작품성에 비해 별달리 화제를 불러일으키지 못한 단편집을 골랐다. 가노 도모코의 <유리기린>. 한 고등학생 소녀가 살해되면서 시작되는 이 연작 단편집은 소녀의 죽음이 남긴 것, 그리고 쓸쓸히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첫 장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살아 있는 상태로 나오지 않는 소녀가 책장을 다 덮을 때쯤에는 피와 살을 가진 분명한 형태로 독자의 가슴속에 맺히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결국 작가의 필력이 뛰어다는 얘기겠지. 다소 무리하게 모든 단편들을 하나로 꿰어맞추려고 시도했던 마지막 단편이 조금 떨어지고 그 외의 모든 단편들이 다 좋다. 탐정 역할을 하는 인물은 소녀가 다녔던 학교의 양호선생. 이중 '닥스훈트의 우울'은 평범한 동네에서 고양이들의 다리가 잇따라 칼로 베이는 사건을 그린다. 다들 알다시피 살아 있는 짐승을 붙잡는 것만 해도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다리에 칼을 댄다면 그 짐승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사방팔방으로 뛰며 난리를 피울 터.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동네에서는 고양이 피습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이 이야기를 들은 양호선생은 사색이 된다.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더 큰 일이 벌어질 거라고...일상 미스터리풍의 간단한 트릭이지만 논리적으로 말이 되고 소름 끼치는 범인의 악의가 느껴져 뒷맛이 쓴 작품이다. 요즘은 어째 이런 단편이 끌린다. 단순하면서도 통렬하게 의표를 찌르는 그런 단편. 꼭 '닥스훈트의 우울'만이 아니라 모든 단편이 흥미로워 이대로 묻히기에는 영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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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1-02-28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위 마크스의 산 ㅠㅠㅠㅠㅠㅠ 정말 여운 긴 이야기에요. 그 다음에 막 흥분해서 산 '조시'는 1권 읽다 말았다는;

2위 곤노 빈. 정말 좋죠? 아주 깔끔하고, 재미난, 별 갈등 없이 주인공 위주로 흘러가는 이야기. 전편도 특이했지만, 2편은 더욱 좋았어요.

3위 이방의 기사는 .... 그냥 사심 가득 담아 나쁘지 않다. 정도

4위 리라장은 작년 일본 미스터리 순위를 거꾸로 하며 개인적으로 뒤에서 4위 정도는 할 수도 있을 것 같; ^^;

5위 가다라의 돼지...가 5위라니! 라고 하지만, 1위가 마크스의 산이다보니 뭐 ^^

무해한모리군 2011-02-28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별찜을 해두고 천천히 봐야겠어요 ^^

jedai2000 2011-02-28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조시>는 공장 묘사가 대박이죠ㅎㅎ 절대 끝나지 않는 기계 묘사-_-;; 결말도 암울하기가 <마크스의 산>의 두 배라죠. 그래도 3편 <레이디조커>까지는 나와줬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ㅠ.ㅠ

곤노 빈은 3편이 소개될지 안 될지 불투명한 것 같은데 꼭 나왔으면 좋겠구요. <이방의 기사>는 개인 취향이 넘 강하게 반영됐어요ㅎㅎㅎ <리라장 사건>은 퍼즐 미스터리로서는 괜찮은 수준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의외네요. <가다라의 돼지>는 정말 신나게 읽었죠^^

고고씽휘모리님...그래요. 다 좋은 작품이니 찬찬히 하나씩 읽어보세염^^

하이드 2011-02-28 23:53   좋아요 0 | URL
곤노 빈 못 나올 것 같다고 하던데, 2편이 재미났고, 입소문의 힘에 힘입어 잘 팔리고, 꼭 나왔음 좋겠어요.

리라장 역시 작가가 싫어서 그러는거니 역시 사심 가득합니다. ^^ 시마다 소지와는 반대의 의미로다가.

<조시>는 읽어보도록 해야겠네요. 여름에 읽어야 좋을 것 같긴 하지만, 우울한 결말이라니, 맘이 갑니다. <레이디 조커> 나오는거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안 나올지도 모른다는 건가요? ㅡㅜ

jedai2000 2011-03-02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시작 출판사 자체가 활동을 안 하는데다, 1, 2편이 썩 잘 나갔다고는 할 수 없으니 3편을 보기 힘들겠죠. <조시>는 늦여름, 가을쯤이 배경인데 가오루 소설 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우울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 S출판사가 <레이디조커>까지는 계약을 안 했다고 하네요.
 

*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2010년에 출간된 책만을 포함하며, 당연히 국내에 출간된 모든 서양 미스터리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5위 콘크리트 블론드 - 마이클 코넬리

 

 
 

 

 

 

 

  

잔뜩 기대를 한 미스터리 소설들이 연달아 꽝으로 밝혀졌을 때, 나는 언제나 마이클 코넬리의 책을 집는다. 그의 작품은 부동의 재미 4번 타자이므로. 지금껏 5권을 봤는데, 전부 홈런이었으니 적어도 내게는 10할 타자인 셈이다. <콘크리트 블론드>는 그런 마이클 코넬리의 대표 캐릭터인 해리 보슈가 등장하는 세 번째 이야기다. 아마도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형사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해리 보슈는 1권 <블랙 에코>에 처음 등장하면서 가장 특징적인 세 가지 배경을 공개한다. 먼저 베트남전 참전용사라는 것, 둘째, '인형사'라는 여성 연쇄살인범을 사살하고 그 사건의 판권을 팔아 거금을 손에 넣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어린 시절, 창녀였던 어머니가 길거리에서 살해됐다는 것. 마이클 코넬리는 작품 속에서 언뜻 언급되는 배경 스토리를 토대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가히 장인의 솜씨를 보여주는 작가라 어떤 사소한 설정도 가벼이 지나쳐서는 곤란하다. 예를 들어, 해리의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는 이야기가 시리즈 4권 <라스트 코요테>이고, 2권 <블랙 아이스>에서 살짝 언급되는, 보슈의 이복형 미키 할러 변호사가 스핀오프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 등장하는 식이다. 처음부터 전체 밑그림을 그려둔 것인지, 아니면 마구 뿌려놓은 이야깃거리 중에서 되겠다 싶은 걸 골라 쓰는지는 모르겠으나 좌우지간 대단한 재주다. 이중 <콘크리트 블론드>는 '인형사' 사건을 다루고 있다. 몇 년 전, '인형사'를 처치했던 일이 과잉진압 논란에 휩싸이는 바람에 그는 뒤늦게 법정에 서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죽은 '인형사'와 똑같이 여자를 살해한 다음 곱게 화장을 시키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그렇다면 해리는 범인이 아닌 무관한 사람을 사살한 것일까? 해리 보슈 최대의 공적이라 할 '인형사' 사건이 그를 파멸시키려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흔히 스릴러 작가로 불리지만 퍼즐 미스터리 스타일의 트릭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는 마이클 코넬리의 진가를 느껴보시길. 기자 출신다운 문장력도 발군, 빠르게 핵심만 파고드는 스토리 전개 능력에서도 비교할 만한 작가가 없다.

 

4위 붉은 오른손 - 조엘 로저스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무시무시한 공포소설에 가까운 분위기로 출발한다. 보아라. 표지부터 얼마나 무시무시(?)한가를...인적이 뜸한 미국의 시골 도로 삼거리 한복판에서 퍼져버린 자동차를 고쳐보려 애쓰는 의사가 있다. 그의 이름은 해리 리들(riddle, 수수께끼?). 한 시간 가까이 응급실에서 하듯 필사적으로 차를 수술해봤지만 그의 전공은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지, 차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서 결국은 실패. 패잔병이 된 기분으로 터덜터덜 주변의 마을로 걸어가서 도움을 요청하려는데, 평온한 시골 마을이 온통 쑥대밭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사정을 들어보니 두 눈은 빨갛고 귀는 찢어진데다 코르크스크루처럼 다리가 뒤틀린 괴물 같은 생김새의 부랑자가 방금 신혼부부를 살해하고 그들의 자동차를 훔쳐서 이 마을을 쏜살같이 지나쳐 갔단다. 마을 사람들은 리들에게 묻는다. 부랑자가 훔친 차의 진행 방향에 따르면 당신의 자동차가 멎어버린 그 삼거리를 반드시 지나쳤을 텐데, 혹시 보았느냐고. 리들이 지난 한 시간 동안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했다고 답하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의심한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봐도 자기가 수상하다. 엔진을 고치려고 허둥대다 다쳐 손은 피범벅이 되어 있고, 무더운 여름 뙤약볕에서 사투를 벌였던 탓에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하나의 내가 저지른 일일까? 리들은 그날 아침부터 겪었던 모든 일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차곡차곡 진실의 벽돌을 쌓아올리기 시작한다. 분명 어딘가 한 구석에 잘 설명이 되지 않는, 위화감이 가득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을 찾아야 하는데...마치 <환상특급>을 보는 듯 초현실적이고 섬뜩한 사건들 속에서 한 줄기 논리의 흐름을 좇아 마침내 해답을 밝혀내는 리들의 짜릿한 하룻밤 모험담으로 조금 작위적인 구석도 있지만 정말 탁월한 퍼즐 미스터리다. 판매 의욕을 저하시키는 표지가 아쉽고, 책에 삼거리 부근 지도가 들어 있었다면 하는 생각도 들지만 가히 엄지를 번쩍 치켜들 만한 책이다.

 

3. 탄착점 - 스티븐 헌터

 
 

 

 

 

 

 

  

1990년대에는 작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문적인 지식을 작품 속에 적절히 녹여내 사실성과 완성도를 높인 소설들이 대거 유행했다. 밀리터리 전문가 톰 클랜시의 테크노 스릴러, 변호사 출신 존 그리샴의 법정 스릴러, 법의관 출신 퍼트리샤 콘웰의 법의학 스릴러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의 책은 나왔다 하면 수백만 부가 팔렸다. <탄착점>의 스티븐 헌터 또한 이런 흐름 속에서 거론되는 작가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티븐 헌터의 전공 분야는 무엇일까? 바로 총기와 저격, 저격수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사실성이다. 스티븐 헌터는 위에 언급한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실제 저격수 출신은 아니고, 원래 저명한 영화평론가였다. 하지만 몇 년에 걸친 면밀한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사실감의 저격 액션 스릴러를 완성해냈다. <탄착점>의 이야기 구조는 지극히 단순하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전설적인 스나이퍼가 암살범 누명을 쓰고 쫓기다가 자신을 엿먹인 세력들에게 총 한 자루로 통쾌하게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보면 뻔한 얘기지만 일대일, 혹은 일대다의 다채로운 액션들과 서서히 드러나는 음모의 전모, 결정적 반전이 펼쳐지는 최후의 법정 장면까지 절대 지루하지 않게 잘 풀어냈다. 남자라면 누구나 일격필살, 일발필중의 저격수에 관심이 많을 터, 책을 읽다 보면 저도 모르게 '빵야, 빵야' 소리를 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참고로 마크 월버그가 주연했던 <더블 타켓>의 원작으로, 악당 캐릭터의 질감이나 매력 있는 서브 캐릭터, 전체적인 구성까지 영화가 훨씬 부족하다.
 

2위 메인 - 트레바니안

 
 

 

 

 

 

 

 

오랫동안 정체를 숨기고 양질의 미스터리 스릴러 작품들을 발표했던 복면작가 트레바니안의 대표작. 캐나다 몬트리올의 슬럼 지역인 메인 가를 수십 년간 지배하다시피 한 명물 경관 라프왕트가 주인공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독불장군 라프왕트는 정년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매일같이 메인을 누비며 거리의 범죄와 악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탕한다. 입버릇처럼 과학수사, 범죄자 인권 이딴 거는 개에게나 줘버려, 를 외치는 그의 말투에서 독자는 그만의 무지막지한 원칙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뇌물도, 협박도, 총알세례도 통하지 않는 강철의 이미지로 메인을 좌지우지하는 라프왕트에게도 아픔은 있었다. 불치병에 걸려 언제 심장이 멎을지 모르는데다, 사랑하는 아내도 먼저 세상을 떠나 철저한 고독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원했던 아이는 낳을 기회조차 없었고, 오직 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외적인 강인함과 달리 내면의 우울로 점철된 라프왕트의 쓸쓸한 일상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희망을 상실한 메인이라는 도시 자체의 막막한 어둠 또한 목격하게 된다. 생애 마지막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라프왕트가 발견한 범인의 정체 그리고 그 동기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읽는이의 가슴을 저민다.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많은 게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지난날을 회한하며 오열을 터뜨리는 라프왕트의 모습을 보고도 눈물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 같은 경우 세 번을 봤고, 세 번 볼 때마다 울었다. 딱히 트릭이 있다거나, 미스터리 구조가 탄탄하거나 한 작품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명작이다. 특히 추리소설에 무슨 문학성이 있어, 하고 빈정대는 사람의 면전에 확 들이대고 싶다.

 

1위 유다의 창 - 존 딕슨 카 

 
 

 

 

 

 

 

 

나 같은 부족한 추리소설 애독자가 감히 1위로 꼽는 게 죄송할 만큼의 걸작이다. 2010년, 아니 2000년대에 나온 모든 퍼즐 미스터리를 합친다 해도 첫 손에 꼽힐 영원불멸의 클래식에 손색이 없다. 밀실의 제왕, 존 딕슨 카 밀실 트릭의 정수가 담겨 있으며, 주요 무대가 법정이니만큼 법정 미스터리의 원조 격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고전의 가치는 누구보다 더 잘 인식하고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고전만을 찬양하는 사람들에게는 실소를 감추지 못하는 편인데, 아무래도 출간되고 나서 시간이 한참 흐른 고전은 시대에 뒤떨어진 트릭이나 미스터리 장치 등의 한계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다의 창>은 다르다. 1930년대에 나온 작품이지만 오늘날의 그 어떤 트릭도 범접할 수 없는 통렬한 한 방이 있다. 밀실에서 화살에 찔려 죽은 노인, 그리고 그와 같은 방에 함께 있었던 젊은이. 모든 문과 창문이 남김없이 잠겨 있어 당연히 젊은이가 용의자로 체포되는데, 그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한다. 나는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을 뿐이고, 진짜 범인은 따로 있노라고. 다들 젊은이의 항변을 비웃었지만 명탐정 헨리 메리베일 경은 뜻밖에 그 젊은이를 믿어준다. 메리베일은 이 세상의 모든 문에는 은밀한 빈틈, 즉 '유다의 창'이 있고 진범은 그 '유다의 창'을 이용해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얼른 믿을 수 없겠지만 '유다의 창'은 실제로 모든 문에 존재한다. 그 정체를 알고 나는 숫제 떼굴떼굴 굴렀다. 세상에나,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황홀한 트릭이 있었다니 하면서. 당장 책을 들어 '유다의 창'을 확인해보시길. 그리고 지금 당신의 방 문에도 있는 '유다의 창'을 보고 두 번 세 번 감탄하시라. 보통 딕슨 카의 걸작으로 이 작품과 <세 개의 관>, <구부러진 경첩>을 드는데, 내 기준에서는 이 작품이 첫 번째이고, 2등은 근소한 차이로 <세 개의 관>에게 주고 싶다. <Y의 비극>,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 밖의 어떤 작품과 비교해도 <유다의 창>은 떨어지지 않는다. 가히 역대 베스트 중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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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1-02-15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다의 창.은 다들 추천하는군요. 얼른 사 봐야 겠어요. 존 딕슨 카가 얼마나 재미있을까. 싶긴 하지만요 ^^a

붉은 오른손.은 평이 하도 좋아서 봤는데 별로

콘크리트 블론드.는 평도 별로였는데.. 마이클 코넬리 작품 아주 재미난거, 재미난거, 별로인거로 나눈다면 별로인거.에 속한다고 생각해요. 코넬리 중 거의 유일하게 재미없었던; 그러니깐, 코넬리는 재미있다.는 저의 편견(?)을 깨 준 작품이었죠. ^^; 그 후에 읽은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라스트 코넬리>는 지금까지 읽은 중의 코넬리 베스트였구요.

탄착점.과 메인.은 보관함에 담겨 있긴 한데, 끌어 올려 봅니다. 특히 탄착점은 제가 신뢰하는 어떤 분의 리스트에서도 보았는데, 여기서 또 만나네요. ^^

jedai2000 2011-02-15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제의 코담배케이스>에서 별 재미를 못 느끼셨다면 <유다의 창>도 비슷하실 텐데^^;;
저도 지금까지 읽은 코넬리 책 중에 <콘크리트 블론드>가 제일 떨어진다고 생각하는데,별로인 작품이라 해도 다른 작가에 비하면 그 수준이 월등히 높다고 생각해서 5위로 넣었습니다^^;;

제 생각에 하이드님은 <메인>이 더 취향에 맞으실 듯한데, 어떻게 보실지 궁금하군요^^

BRINY 2011-02-16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다의 창' 소개하신 글을 보면, 분명 예전에 어디선가 본듯한데 결말을 생각해낼 수 없으니, 책 사고 싶어지네요. 점점 형편없어지는 기억력이 미스테리 판매량에 일조를 하고 있다니...

jedai2000 2011-02-17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이러다 같은 책을 몇 번씩 사시는 거 아니예요ㅠ.ㅠ? 미스터리 애호가 입장에서는 브라이니님의 건망증을 더 부추기고 싶기도 하네요^^ 한 권이라도 많이 팔려야 더 많이 나올 테니까요^^
 
침묵의 교실 - 제48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소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1995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침묵의 교실>, 무려 654쪽이다. 보통 책 분량이 이쯤 되면 이걸 언제 다 읽나 하는 당혹감이 첫 번째고, 들고 다니면 팔이 빠지겠다 싶은 두려움이 두 번째다. 하지만 작가가 오리하리 이치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무래도 오리하라 이치는 결말이 이렇게 날 것이라는 독자들의 예측을 몇 번이고 엎었다가 또 뒤집는 반전의 선수이니만큼 654쪽이면 한 다섯 번쯤은 속겠군, 하면서 오히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침묵의 교실>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에는 통쾌하게 속는 쾌감은 살짝 덜한 편이다. 국내에 나온 그의 작품 중에서는 <원죄자>가 가장 강력한 반전을 선 보였다고 생각하는데, 안타깝게도 <침묵의 교실>에서는 그 만한 충격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추리소설’도 분명 ‘소설’일진대, 무슨 야바위 사기꾼마냥 오직 독자를 얼마나 멋들어지게 속여 넘겼는지로만 평가받아야 하는가. 작품의 주제의식이 분명하고, 읽는 내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몰입감이 있으며, 그럴싸한 인물과 실감나는 대사가 있으면 그게 바로 좋은 소설이 아닐까? 다행히 <침묵의 교실>은 언급한 좋은 소설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으니 귀한 시간과 돈을 날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붙들어 매두시길.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는 작풍이 주특기인 작가답게 <침묵의 교실>의 줄거리는 다소 복잡하다. 먼저 현재.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상실증에 걸린 삼십대 남자가 등장한다. 이름이며 집, 직장 등 자신에 관한 건 무엇 하나 생각나지 않는 그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물건은 ‘아오바가오카 중학교 동창회 살인 계획서’, 단 한 장뿐. 남자는 고뇌에 빠진다. 정말로 나는 대량살인을 꿈꾸었던 예비 살인마인가. 답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분명하다. 직접 조사에 나서면 된다. 남자는 아오바가오카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을 한 명씩 찾아다니며 자신의 정체에 한 발, 한 발 접근해 나간다.


한편, 기억상실의 남자와 더불어 20년 전 그 아오바가오카 중학교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관한 과거의 이야기도 번갈아 전개된다. ‘숙청’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집단 따돌림과 학교 안에서 벌어진 온갖 뜬소문들을 왜곡해 학생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공포신문’으로 학교는 온통 얼굴 없는 침묵과 공포가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침묵의 교실’에 새로 부임한 교사가 또 한 명의 주인공으로, 그는 비록 초보 교사에 불과하지만 나름의 사명감으로 학생들을 세심하게 신경 쓰며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숙청은 단지 학생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 칠판에 쓰인 자신의 숙청 메시지를 보고 교사가 느꼈을 아찔함은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여기까지가 1장의 내용. 2장에서는 20년 만에 학생들 전원이 다시 모이는 아오바가오카 중학교의 동창회를 다루고, 3장은 동창회 이후의 풍경 그리고 모든 사건의 전말이 낱낱이 밝혀지는 최종장이다.


오리하라 이치를 정의하는 두 가지 키워드는 ‘서술트릭’과 ‘서스펜스’이다. 그의 모든 작품은 이 두 개의 큰 틀을 벗어나는 법이 거의 없으며, 그것은 <침묵의 교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자, 그, 혹은 복수자 등 3인칭으로만 등장하는 범인은 만약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단번에 정체가 ‘보여졌겠지만’, 모든 정보를 작가가 제공하는 만큼밖에 받을 수 없는 소설 텍스트에서 독자는 작가가 오해하기 딱 좋게끔 이곳저곳 깔아둔 가짜 복선과 단서에 휘말려 이리저리 표류하는 난파선 신세에 불과하다. 오리하라 이치는 이렇듯 서술 트릭으로 독자의 오독을 유발케 하는 솜씨가 가히 장인 급이라 몇 번을 주의해도 결국은 속게 된다. 또 하나의 강점인 서스펜스는 아마도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계속되는 긴장감이나 불안감을 말하는 것일 텐데, 작가는 여기서도 굉장한 재능을 발휘한다. 기억상실, 집단 따돌림, 공포신문, 연쇄살인, 집단납치, 화재 등 질릴 만하면 한 번씩 충격적인 사건이 터지니 도무지 지루할 새가 없는 것이다.


전매특허인 서술트릭과 서스펜스는 여전하지만 위에 언급한 것처럼 범인의 정체나 반전의 순도는 조금 약한 편이다. 작위적일 정도로 심하게 줄거리를 꼬고 또 꼬았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담백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개인적으로 오리하라 이치가 능력이 없어 이 정도 결말밖에 못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기보다는 작품의 주제에 맞추기 위해 철저하게 인공적인 플롯을 배제한 게 아닐까. 20년 전의 치기 어린 장난과 아직 덜 성숙한 사춘기 소년의 악의가 먼 길을 돌아 현재에 어떤 상처를 남기는가를 주목한 이 작품에 몇 번이고 계속되는 뒤집기 한 판은 어울리지 않는다. 가해자가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피해자의 아픔은 오래 지속된다. 아주, 아주 오래…… 비록 많은 아픔이 있었지만 결국 과거와 화해하는 주인공들의 훈훈한 모습 역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 물만두님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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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살인게임 - 왕수비차잡기 밀실살인게임 1
우타노 쇼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 들어 유독 많이 나오고 있는 우타노 쇼고의 작품. 가만보면 이 작가 참 스타일리스트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들 중 서로 비슷한 소재와 형식을 취하는 게 거의 없을 정도. 히트작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공정하다, 아니다의 논란이 벌어졌던 서술트릭, 에도가와 란포의 오마주에 가까운 <시체를 사는 남자>는 고전 추리소설의 맛을 재현했고,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는 본격추리 중편집, 살인자로 몰린 어느 오타쿠의 험난한 여정을 그린 <여왕님과 나>는 판타지 요소까지 녹아들어가 있다. 이쯤되면 안정적인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기존의 방식을 계속 쓰느니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길을 걸어보겠다는 작가로서의 자세를 높이 사야 하지 않을까.

 

<밀실살인게임>에도 물론 작가 특유의 새롭고 신선한 면모가 있다. 각자 분장을 해서 나이도 성별도 알 수 없게 꾸민 5명의 인물들이 화상채팅을 한다. 영화나 아이돌가수 등의 주제를 놓고 떠드는 친목 모임도 아니고, 조막만 한 채팅창을 통해 음란한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다. 실은 그들 모두 살인자다. 살인의 목적은 그저 재미를 위해. 그들은 사람을 죽인 다음 사건 현장을 카메라로 충실히 찍어온다. 그러고는 자신의 범행을 토대로 문제를 내는 것이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사건 현장에는 외부인이 침입할 수 있는 어떤 통로도 없었어요, 그러면 나는 어떻게 이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죽인 걸까요?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게임 감각의 추리소설이다. 단지 게임의 재미를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설정에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책 띠지에 '19금을 박아넣을까 고민하게 만든 책'이라는 문구가 삽입되었지만, 이런 정신적인 테러(?)를 제외하고는 살해나 폭력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고 그 수위도 높지 않다. 읽으면서 어쩌면 5명의 출제자들이 추리작가의 고뇌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들은 특별한 원한이나 동기가 있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고, 다만 재미있고 수준 높은 트릭을 만들기 위해 죽인다. 추리작가들 또한 재미를 위해 (비록 가상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이들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유독 시시한 알리바이 트릭만을 만드는 참가자는 채팅 멤버들에게 온갖 비난을 듣는다. 이 역시 추리작가들의 팔자와 비슷하지 않나. 시시한 트릭을 내놓으면 수많은 독자들의 비난은 물론 심지어 욕까지...이런 점에서 <밀실살인게임>이 추리소설과 추리작가에 대한 추리소설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각자 한 문제 정도씩 출제하니 대략 대여섯 개 정도의 사건이 나오는데, 어차피 범인과 동기는 처음부터 알려져 있다(범인은 출제자들, 동기는 단순히 재미). 독자들이 이 게임 속에서 추리해야 할 건 오로지 사건의 트릭뿐. 이중 가장 긴 분량의 첫 번째 트릭은 뛰어나지만, 나머지는 솔직히 그다지다. 심지어 유명한 일본 고전 추리소설의 트릭을 그대로 재현한 것도 있다. 서술트릭이라 할 만한 마지막의 반전도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대다수 눈치 챌 것이다. 그럼에도 흥미롭게 읽히는 이유는 채팅 참가자들의 재기발랄한 말장난과 비록 살인자들이지만 게임을 게임답게 즐길 줄 아는 그들의 행동에서 기묘한 흥취가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결말에는 채팅 참가자들이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만나는데, 내로라하는 살인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필연적으로 사건이 벌어질 게 뻔하지 않은가. 누군가 죽음의 위기에 몰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to be continued.' 다음 이야기는 속편 <밀실살인게임2.0>에서 이어진다고 한다. 과연 그들이 모여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누가 살고 죽는지 몹시 궁금하다. 속편은 평도 더 좋은  것 같으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내 생각에 <밀실살인게임>은 그 자체로 얘기하기보다 속편까지 보고 나서 두 작품을 동시에 얘기하는 게 더 좋을 듯하다. 그래야 작품의 분명한 진가가 드러날 듯...그러니까 얼른 속편을 출간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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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장 사건
아유카와 데쓰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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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눈이 번쩍 뜨이는 작가가 나왔다. 무려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신이라고 불리는 아유카와 데쓰야. 줄여서 본신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국내 최초로 그의 대표작 중 한 편인 1958년작 <리라장 사건>이 출간되었으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아유카와 데쓰야는 1919년생이라는 연배도 그렇지만, 발표한 작품들의 높은 수준으로도 일본 추리소설계의 전설적인 이름들, 즉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 마쓰모토 세이초 못지않은 명성을 얻은 대가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마쓰모토 세이초풍 사회파 추리소설에 맞서 줄기차게 본격 추리소설만을 추구한 그의 업적을 높이 산 후배 신본격 추리소설 작가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이런 작가가 왜 이제야 겨우 소개되는 걸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의 작풍에 원인이 있지 않았나 싶다. 아유카와 데쓰야의 전매특허는 사실 기차 및 각종 운송수단의 시간차를 통한 알리바이 트릭에 집중되는 걸로 알려져 있어, 국내 추리소설 기획자들이나 편집자들이 복잡한 시간표를 꼼꼼이 따져자며 읽어나갈 독자들이 많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리라장 사건>은 외딴 별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이 한 명씩 살해되고, 미궁에 빠진 사건을 명탐정이 등장해 멋지게 해결해내는 전형적인 애거서 크리스티식 플롯을 가지고 있어 열차 시간표 등으로 골머리를 썩일 이유가 전혀 없으니 안심해도 좋다.

일본 예술대학의 미술학도와 음악학도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몰락한 대부호의 별장이었던 라일락장으로 휴가를 온다. 젊은이들답게 라일락을 줄임말로 리라라고 부르니, 이제부터는 리라장이다. 7명의 예술가 지망생 남녀는 아직 정식 예술가도 아니면서 예술가 특유의 아집과 괴팍한 성품만 미리 배웠는지 성격들이 장난이 아니다.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신경질적이고 비정상적으로 자존심이 강하며 공격적이어서 한마디로 비호감들. 작가조차 노골적으로 그들을 야유하고 조롱할 정도니 알만 하잖은가. 웃기는 건 분명히 친구들인데, 대부분 서로 싫어한다는 거. 그런데 왜 같이 놀러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함께 있으면 여지없이 재앙이 일어나는 인종들 사이에서도 로맨스는 싹트기 마련이니 그 안에서 몇 겹의 복잡한 삼각, 사각관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류의 소설에서는 보통 한 사나흘은 지나야 사람이 죽어나가기 시작하는데 반해 <리라장 사건>은 놀랍도록 페이스가 빠르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자마자 그날 오전에 한 명, 그 다음 날에 두 명이다. 시체들의 옆에는 그들이 들고 왔다가 잃어버린 트럼프의 스페이드 카드가 놓여 있는데, 처음에는 에이스, 그 다음에는 2, 이런 식으로 시체가 늘어날 때마다 카드의 숫자도 올라간다. 트럼프의 스페이드 카드는 전부 13장. 정신이상자같이 카드에 집착하는 범인은 13명을 죽여야 살인 행각을 멈출 것인가. 한편 노련한 경찰들의 눈앞에서도 살인은 계속되고, 이제는 완전히 벽에 막혀버렸다 생각될 때 도쿄에서 명탐정 호시카게 류조가 찾아온다.

이불에 배를 깔고 뒹굴뒹굴 누워 읽으니 극락이 따로 없는 기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2년 전 작품이라 어쩔 수 없이 낡은 부분이 있지만 그만큼 고전을 읽는 기쁨에 흠뻑 취하고 말았다. 사실 '여기서는 일단 넘어가고', '그래가지고 설라무네', '다른 곳에서는 뭐하고 있냐며는' 하는 식의 장면 전환 같은 건 확실히 요즘 소설에서 쓰는 기법은 아니다. 그러나 덕분에 외려 진짜 옛날이야기를 듣는 느낌이 나서 한층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본격 추리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트릭을 보면 여기에도 역시 지금 보기엔 약간 약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대에는 대단했던 트릭이라도 세월이 갈수록 후배 작가들이 그 트릭을 모방하고 차용하면서 점차 평범하게 돼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아유카와 데쓰야는 유독 신본격 작가들이 많이 사숙했던 작가라 더 그렇지 않았을까. 일부 독자들이 절대 알 수 없는 독약이나 음악, 미술 등의 사전 정보를 바탕으로 해답을 이끌어내는 경우도 있고, 등장인물이 너무 많이 죽어나가 나중에는 범인이 거의 2지선다, 3지선다 정도밖에 안 되는 것도 걸리는 부분이다.

다만 무수하게 깔린 복선들과 단서들을 탐정 호시카게 류조가 하나로 꿰어 단숨에 진상에 이르는 결말은 분명 압권이다. 예컨대 범인이 범죄 현장에서 사용하는 스페이드 카드들 말고, 클로버 잭과 하트3은 왜 가져갔을까 같이 몇 가지 사소한 의문들도 나중에 전부 설명되는데 죄다 범인찾기에 도움되는 힌트들이니 머리를 잘 굴려볼지어다. 여담이지만 원래 <리라장 사건>은 아유카와 데쓰야가 추리소설 동호회의 '범인맞추기 퀴즈용'으로 쓴 중편을 개작한 것이라 한다. 책 말미에 그 당시의 일들이 작가 자신의 입으로 술회되는데, 다 읽고 참으로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만으로 청춘을 불살랐던 친구들이 점차 생업에 바빠져 하나씩 연락이 끊기고, 겨우 30년 만에 연락이 되어 보기로 한 친구는 만남 며칠전에 세상을 떠나고...아아, 이런 게 추리소설광의 인생이런가. 나이도 국적도 다르지만 그 모든 선배 추리소설광들에게 경배를 바친다. 그때 당신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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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0-11-01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불에 배를 깔고 뒹굴뒹굴 누워 읽으니->우와~ 좋으셨겠습니다.

jedai2000 2010-11-02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세상에 이런 극락이 따로 없더라구요^^

상복의랑데뷰 2010-12-2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