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위 <너의 퀴즈> - 오가와 사토시











예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퀴즈 프로들이 제법 인기가 있었다. 온 가족이 TV에 둘러앉아 저녁 먹으면서 퀴즈를 보곤 했는데, <장학퀴즈>처럼 최상위권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나와서 문제를 풀 때면 너는 왜 저런 데 못 나가냐, 는 부모의 구박이 항상 뒤따르곤 했었다. 어느덧 우리나라에선 퀴즈 프로의 열풍이 거의 소멸했지만 좋게 말해 전통을 중시하고, 제대로 말하면 많은 부분이 정체된 사회인 일본에선 그 인기가 여전하다고 한다. 오가와 사토시의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너의 퀴즈>는 바로 일본에서의 퀴즈계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방송국 퀴즈 대회 결승전에서 맞붙은 상대가 사회자의 입에서 단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았는데 정답을 맞췄다. 주최 측에서 짬짜미 의혹을 전면 부인하자, 퀴즈에 인생을 건 주인공은 마치 또 하나의 어려운 퀴즈를 풀어내듯이 그날의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살인 등의 강력범죄는 아니지만 듣지도 않고 문제를 맞추는 사람은 충분히 흥미로운 미스터리 소재이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파헤치는 가운데 퀴즈에 살고 죽는 이른바 '퀴즈 플레이어'들의 삶이 자세히 그려진다. 그냥 지식을 많이 쌓아 퀴즈를 잘 푸는 게 아니라 문제들의 경향성에서 출제자의 논리 프로세스를 파악하고, 여러 가능성을 하나씩 쳐낸 다음 유사한 사고 과정에 도달했을 상대 플레이어보다 먼저 버저를 누르는 도박에 나선다. 전국의 퀴즈대회를 쫓아다니면서 기량을 겨루는 그들의 삶은 마치 프로 스포츠맨을 방불케 한다. 이런 퀴즈 플레이어들의 모습은 어디서도 다뤄진 적이 없기에 대단히 흥미진진했고, 최종적으로 제시된 해답도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주인공을 비롯해 듣지 않고 문제를 맞추는 라이벌, 각기 다른 두 명의 인생사가 모두 밝혀지는 순간 그들이 겪어온 아픔에 가슴이 조금 먹먹해지기도 했다. 결국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퀴즈는 '인간'이라는 복잡다단한 종의, 그보다 훨씬 천변만화하는 '마음'의 양상이 아닐까 싶다.

4위 <폭탄> - 오승호












진지하고 첨예한 사회 문제를 오락소설의 대명사인 추리소설과 결합시켜 문학성과 재미를 동시에 도모한다. 이른바 '사회파 추리소설'은 창시자인 미쓰모토 세이초 이래로 일본 추리소설의 또 하나의 경향성을 대표하는데, 재일교포 3세 오승호 작가를 현재 가장 촉망받는 사회파 추리 작가라고 봐도 틀림이 없을 것 같다. <폭탄>은 도쿄 시내 곳곳에 장착된 시한폭탄을 해체하려는 경찰들과 폭탄 살인마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말 그대로 시한폭탄이기 때문에 사태는 분초를 다툰다.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민간인이 희생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생겨나는 서스펜스가 굉장하다. 물론 오승호는 진지한 사회파 작가로서 이러한 오락물로서의 설정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노숙자를 양산하는 빈부 격차, 범죄자 가족에 대한 집단 괴롭힘, 군중 속의 고독 등 현대 사회의 문제점들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 녹여내면서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탁월한 건 폭탄 테러를 계획하고 일부러 경찰에 잡혀와 수사진에게 두뇌싸움을 거는 악역의 인물 조형인데 정말이지 이렇게 징그러운 악당은 오랜만에 본다. 과공비례라는 옛말처럼 지나치게 공손한 것도 예의가 아닌 법이거늘, 매사 비굴함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을 낮추다가 은근슬쩍 수사진을 갖고 노는 악역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아마도 일본이나 한국에서 영화화될 확률이 높은 소설이라 토드 필립스의 <조커>를 연상시키는 메인 빌런을 누가 맡을지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더라. 의외로 결말부에서 사건이 한 번 뒤집히는 반전이 있는데 이것 또한 인상적이었다. 오승호 작가는 스토리텔러로서 타고난 감각이 있는 듯하다. 영화로 치면 컷, 클로즈업, 롱테이크 등의 기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재미있는 부분은 세밀하고 길게 보여주고, 좀 지루한 부분은 빨리 쳐내는 등 한마디로 소설을 재미나게 쓸 줄 알아서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것으로 보인다.

3위 <명탐정의 제물> - 시라이 도모유키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난해한 사건을 쾌도난마처럼 해결하는 명탐정의 활약이야말로 흔히 말하는 본격 추리소설의 정수가 아닐까. 그러나 본격 추리소설에는 구조적으로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니...소설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맨 뒤쪽 해결편에 '몰빵'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내 지인은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들을 뒤쪽 30페이지만 읽는다. 액기스만 읽으면 되지 뭐하러 시간 아깝게 다 읽느냐는 게 그놈의 요지. 아직도 본격 추리소설이 꽤 인기가 있는 일본의 추리 작가들 역시 이 문제점을 잘 알고 있을 터. 결국 그들은 하나의 해결책을 고안해냈으니 이른바 '다중추리'이다. 사건 발생, 용의자 취조, 현장 단서 수집 등의 과정을 지난하게 따라가다 최후반부에 모든 트릭이 밝혀지고 사건 해결의 카타르시스가 집중되는 기존 추리소설은 위에도 말했듯이 뒷부분만 짜릿하다. 다중추리는 '찐 명탐정'에 비해 한 수가 떨어지는 가짜 명탐정들을 다수 배치해 중간중간 다양한 해결편을 선보인다. 지루해질만 하면 탐정이 등장해 기발한 추리를 제시하니 질릴 틈이 없다. 그렇게 2~3번의 다소 허점은 있지만 매력적인 가설들이 이어지다 찐 명탐정이 최후에 참 진상을 밝혀주고 끝내는 것이다. 다중추리는 본격 추리소설의 뒷부분 몰빵 구조를 타파하는 참신한 구성이지만 하나도 아니고 몇 개의 그럴싸한 추리를 준비해야 하니 난이도가 몇 배로 높아지는 어려움이 있다. 한마디로 읽기에는 재미있지만 쓰기에는 어려운 것인데 현재 이 곡예와도 같은 난도의 작품들을 가장 잘 쓰는 사람이 <명탐정의 제물>의 시라이 도모유키라고 생각한다. 다만 같은 사건을 놓고 여러 가지 스타일의 추리를 선보여야 하므로 살짝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고, 설명이 필요한 살인사건이 무려 네 개일 정도로 스케일이 크고 복잡하다 보니 읽다가 지치는 감은 있다. 레이어드 룩에서 한 세 가지 옷만 매치하면 이쁠 텐데 무려 일곱 가지를 겹쳐 입은 사람을 보는 것 같달까. 물론 희대의 테크니션으로서 기예를 뽐내고 싶은 마음은 일견 이해가 가고, 개인적으로 그 탁월한 능력이 부럽기도 하다. 아무튼 <명탐정의 제물>이 최상급의 다중추리 소설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2위 <테스카틀리포카> - 사토 기와무










일상계에 가까운 추리소설, 라이트한 대중문예, 어깨에 힘을 뺀 이야기 일변도의 최근 일본 추리소설 시장에 모처럼 압도적인 작품이 등장했다. 멕시코와 인도네시아, 일본을 아우르는 마약 카르텔 사가로 직구 승부에 나선 <테스카틀리포카>에 그야말로 제압당하고 말았다. 마약 카르텔, 장기밀매, 아즈테카 신화 등의 주요 소재를 다루는 밀도에서 엄청난 취재와 자료 조사가 선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잘 모르는 부분은 상상으로 때우면서 작가적 허용이라고 변명하는 요즘 작가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자세가 아닐 수 없겠다(왜 내가 찔리지?). 물론 너무 밀도가 높다 보니 조금 뻑뻑한 감도 없진 않았다. 대사도 거의 없이 설명과 지문으로만 수백 페이지가 이어져서 단숨에 읽기 쉽지는 않다. 그러나 아즈텍 문명의 심장 공양과 현대의 심장 밀매를 연결시킨 대담한 상상력과 피의 복수를 위해 힘을 모으는 나르코(마약 밀매자)의 강렬한 서사를 외면할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흔히 피카레스크라고 하는 악한소설은 그 부도덕성으로 인해 지탄을 받기도 하지만 무단횡단 한 번 하면서도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소시민들에게 나름의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을 제공하는 역할도 해준다. 갱스터 조폭영화, 건달소설 등이 꾸준히 인기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을 텐데 현대의 조폭 중에서 으뜸이라면 역시 수백억 달러를 움직이는 멕시코의 나르코 카르텔이 아닐까. 아즈텍 신화에 심취해 자신을 신의 전사라고 생각하는 광신도 나르코가 조직을 재건하고 암살자를 키우면서 전쟁을 준비한다. 매 페이지마다 불길하고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감돌아 악당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열광할 만하다. 한편 <테스카틀리포카>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창작되어 온 국제 모험소설의 전통을 잇는 작품이기도 하다. 90년대 들어서야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우리나라와 달리 60년대 말부터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일본은 다양한 나라와의 비즈니스로 국제적인 감각을 길러온 덕분에 작가들도 해외 각국에서 위기를 겪거나 모험을 벌이는 국제 모험소설을 위화감 없이 잘 써낸다. 우리나라 밖에서 주인공이 활약하는 한국 소설이 거의 나오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집요하게 신성(神性)을 추구하던 등장인물이 마침내 인간성을 회복하고 불의를 혁파하는 후반부도 흡사 소나기처럼 시원하다.

1위 <방주> - 유키 하루오









제목의 <방주>는 '노아의 방주' 할 때 그 방주가 맞다. 흔히 본격 추리소설의 왕도를 '클로즈드 서클'이리고 한다. 폭풍우나 눈보라, 화재, 기타 사유로 고립된 산장 같은 곳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외부인의 출입이 불가능하므로 범인은 반드시 그들 안에 있고,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도 소수의 내부자들 안에 있다. 일종의 닫힌 원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만 내용을 진행시키기에 독자의 몰입도가 올라가고, 작가도 쓸데없는 외부 변수를 차단할 수 있으니 이야기의 집중력이 높아진다. 이 장르의 완성자는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애거서 크리스티일 텐데 <오리엔트 특급살인>, <나일 강의 죽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위에도 썼지만 클로즈드 서클을 만들 때 자연재해를 주로 쓰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냥 등장인물들을 한곳에 모으는데 자연재해만큼 편리한 설정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전까지는 그랬다. <방주>가 나오기 전까지는... 거대한 바위로 출입구가 막힌 지하시설에 갇힌 내부자들 속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방주>는 닫힌 원을 만드는 바위를 이야기의 주요 추동력으로 사용했으며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작품의 핵심과도 강렬하게 연결시킨다. 개인적으로 클로즈드 서클을 만드는 장치에 별로 주목해본 적이 없는데, 이토록 참신하게 사용한 유키 하루오 작가에게 살의에 가까운 질투를 느꼈다. 특히 반전은 근 몇 년 사이에 읽은 모든 추리소설 가운데 최고 수준이었다. 분량도 짧아서 읽기도 편한데 동기의 기저에 불륜 같은 축축한 내용이 있으니 아마 늘려 쓰기는 어렵지 않았을 터이다. 하지만 작가는 본인이 떠올린 반전과 핵심 트릭, 통렬한 결말을 얼른 선보이고 싶어 줄달음질친 듯하다. 마무리에 강력한 폭탄을 준비해놨는데 곁가지를 길게 쓸 맛이 나겠는가. 끝까지 읽어보면 그냥 강력한 폭탄이 아니다. 숫제 핵폭탄이다. 책을 다 읽고도 한동안 1인칭 화자인 주인공이 느꼈을 당혹감이 생각나 이따금 쿡쿡거렸을 정도. 글솜씨나 인물 조형 면에서 아직 완성된 작가 느낌은 안 나지만 꿩 잡는 게 매라고 결국 추리소설은 트릭과 반전을 즐기는 장르이다. 이 수준의 트릭과 반전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다면 당대의 추리소설 1인자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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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상처>에 이어 1년 3개월 만의 신작이 나왔다. 제목은 보다시피 <유령생활기록부>. 졸지에 유령이 된 허영풍이라는 백수가 지인들의 사건에 관여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어간다는 내용이다. 모두 다섯 편의 단편들이 긴밀하게 이어지는 연작 단편집으로 매편마다 추리소설의 원초적인 재미와 페이소스, 감동 등을 담으려 노력했다. 단편들의 제목은 '사랑과 영혼', '마더', '영능력자 배틀 로열' 등 모두 영화 제목에서 따왔고, 고유정, 이춘재, 모 유업회사, 사이비 치료사 등 현대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들을 모티브로 삼았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은 아주 옛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간들의 근원적인 질문일 터. 그래서 고스트 스토리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꾸준히 많은 사랑을 받는 게 아닐까 싶다. 작가 입장에서야 당연히 <유령생활기록부>도 그렇게 됐으면 하는데 과연 어찌 될지...

이번 책은 내게는 여섯 번째 장편소설이다. 냉정하게 평가해보면 그동안은 어쩌다 운 좋게 소설가 타이틀을 달았고 어디 가서 소설가 대접을 받는 게 좋아서 때 되면 한 권씩 쓴 것에 불과한 것 같다. 하지만 여섯 번째 책 <유령생활기록부>부터 내 소설인생의 2기라고 감히 자평하는 바, 그간의 안이한 마음은 싹 버리고 오직 완성도로 평가받기 위해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했다. 앞으로도 신으로부터 받은 작은 재능을 썩히지 않고 끊임없이 독자들의 마음에 노크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혹독한 비판, 살짜쿵 애정 어린 시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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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마와라시
온다 리쿠 지음, 강영혜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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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독서가로서 회상해보면 2000년대 중반 이전까지 일본소설은 서점의 주류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 등 당시에도 인기 작가를 제외하면 세계명작 코너에서 나쓰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정도나 찾아볼 수 있었을까.

그런 흐름은 2000년대 중반 이후에 일본 장르소설(콕 집어 추리소설) 붐이 일면서 극적으로 반전된다. 처음 몇 권 나올 때만 해도 일본 이름에 익숙하지 않아 얘가 앞에 나온 얘가 맞나 계속 책장을 앞으로 뒤적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흥미로운 점은 80년대부터 이미 일본에서는 흥행 작가들로 평가받으며 수십 편의 전작이 있는 작가들의 출간작이 우리나라에서는 몇 년 안팎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한 번 물 들어오면 노는 확실하게 젓는 우리나라 사람들답다. 특히 다작으로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등은 아마 그 시기에 30~50편은 나온 것 같다. 한 작가의 작품을 그것도 수십 편씩 짧은 시간 안에 과다섭취해버리면 질리지 않는 게 이상하다. 나 역시 애초에 다양한 소재와 쉬운 가독성으로 읽기 부담 없는 히가시노 게이고는 지금도 즐기지만 미유베 미유키는 30편 언저리에서 끊어서 안 읽은 지 10년은 넘은 것 같다.

 

<스키마와라시>의 온다 리쿠도 일본 장르소설 출간 러시 때 쏟아진 작가군 중 한 명이다. 명확한 기억은 없지만 어린 시절 어딘가에서 본 듯한 세계명작 만화, 메르헨(동화), 순정만화, 하이틴소설 등 왠지 친숙한 과거의 정서를 기가 막히게 소설 속 세계관에 구현해내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란 별명이 있는 작가이다. 추리소설로서도 좋은 부분이 있고 독서 내내 그리움에 빠져드는 느낌이 좋아 한 15편쯤은 출간 족족 따라갔지만 역시 질리고 말아 신작 출간 소식에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잡은 온다 리쿠의 <스키마와라시>는 옛 친구와 재회하는 기분이었다. , 얘랑 옛날에는 친했는데 그동안 다른 데 관심이 팔려 잊고 있었구나 하는 후회도 들고, 여전히 좋은 얘기를 들려주는 괜찮은 친구구나 하는 반가움도 있었다. 추억을 간직한 오래된 건물을 철거할 때마다 나타나는 스키마와라시라는 존재의 비밀을 찾아가는 형제의 이야기로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겠는데 약간의 호러와 판타지, 추리를 섞어 흥미롭게 끌고 가면서도 작가만의 따뜻한 정서를 놓치지 않은 점이 딱 온다 리쿠스러웠다.

 

60년대부터 급속한 발전으로 이미 노후화된 건물이 많은 일본에선 어린 시절 부모와의 추억이 담긴 대중목욕탕이나 다방, 오락실, 분식집 등을 찾아 학창시절에 뻔질나게 찾았을 상가빌딩들이 하루 걸러 하나씩 철거되고 있을 터. 이제 쉰 중반이 된 작가가 느끼는 상실감과 쓸쓸함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구나 그 대부분의 건물들은 고도성장기에 하루 걸러 하나씩 올라간 것들일 테니 작가이기에 앞서 노년에 가까워지는 일본인에겐 마침내 일본의 여름(성장)이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 법하다. 물론 작가는 주인공들에게 봄에 새롭게 움트는 뭔가를 쥐어주면서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는 응원의 마음도 잊지 않았지만 작품 전반적으로는 사라져가는 어떤 것에 대한 아쉬움의 정서가 지배적이다.

 

일본 못지않게 우리나라도 익숙하고 친밀한 것들이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다. 발전이나 속도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정상 온다 리쿠가 맞이한 풍경은 이미 우리에게도 낯선 것은 아닐 것이다. <스키마와라시>를 흥미롭게 읽은 분들은 가끔은 잠시 멈춰서 우리에게 익숙하고 친밀한 풍경을 한 번쯤은 돌아보면 어떨까. 분명 나쁘지 않은 시간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기왕에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났으니 앞으로는 좀 더 자주 봐야겠다는 결심을 전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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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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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로 국내 독자들에게 첫 선을 보인 시라이 도모유키의 신작...이지만 실은 이 작품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가 작가의 데뷔작이란다. 실상 1800년대부터 쓰여져온 본격 추리소설의 여러 장치들이 이젠 고갈 단계라서 좀비물이나 타임루프 등 독특한 특수설정을 가미해 새로운 맛을 전달하는 게 최근 일본 본격추리의 유행인데 그중에서도 시라이 도모유키는 독보적인 상상력을 자랑한다. 전작에서는 감염병으로 죽여도 죽지 않는 살아 있는 시체들의 탐정놀이였다면, 이번에는 인간의 클론을 배양해 식용으로 쓰는 근미래를 다루고 있다.

식인이라는 핵심 테마만 들어도 끔찍하지만 전작에서 엽기적인 특수설정을 밀어붙여 말초적인 재미만 추구하는 게 아닌 본격 추리소설가로서의 실력을 톡톡히 보여줬기에 믿고 읽어보았다. 결과는 충분히 믿음에 부합하는 재미있는 본격 추리소설이었고, 시라이 도모유키 작가는 데뷔작부터 비범한 구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상황이 더 복잡하게 꼬여 있고 트릭의 가짓수도 많았던 전작보다는 살짝 못 미치는 감이 있었지만, '클론'이 상용화된 세계에서의 규칙들을 적절히 이용해 한 방을 크게 날리는 이번 작품도 못지않게 좋았다. 전작이 소나기 펀치라면 이번 신작은 온힘을 모아 결정타를 제대로 던지는 느낌이라서 취향에 따라 이 작품을 더 좋아하는 분들도 많을 것 같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고민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혐 주의'라고 쓰여 있는 제목을 클릭할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하루 종일 뇌리에 남아 찝찝할 게 뻔한 끔찍한 영상이나 사진일 텐데도 왠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한쪽 눈을 감고서라도 슬쩍 보게 되는 게 사람 심리가 아닐까. 시라이 도모유키는 바로 이런 악취미로 독자를 유인하는 데 명수라서 모든 작품에 비정상적이거나 극도로 자극적이고 혐오스러운 테마를 깔고 간다. 이 정도의 엽기성이라면 작가들의 든든한 지원군인 2차 판권(아니메, 영화, 드라마 등)을 팔기도 어려울 텐데도 꿋꿋하게 악취미 외길만 걷는 작가의 근성과 똘기에 박수를 보낸다. 빈말이 아니라 이렇게 꿋꿋하게 한 우물만 파는 작가라면 당장은 인정을 덜 받아도 결국은 하나의 사조를 창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시라이류 엽기본격 같은 이름으로 말이다ㅋ

악취미니 엽기니 혐오니 했지만 본격 추리소설로서는 단연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기본적으로는 알리바이 깨기 트릭인데 남녀 두 서술자의 챕터가 번갈아 진행되면서 독자를 자연스레 미스리딩에 빠뜨리는 기법도 훌륭하게 써먹었다. 책장을 다 덮고 맨 앞으로 돌아가서 하나씩 복기해보면 참으로 교묘하게 안배된 서술이 많구나 하는 걸 절감하게 된다. 특수설정이든 일반설정이든 추리소설이라고 라벨을 붙이려면 무엇보다 트릭이 좋아야 하는데 이 작가는 그 점은 부족함이 없다. 그냥 잘쓴 추리소설로 봐줘도 좋고, 특수설정 미스터리란 어떤 것인가 알고 싶어서 봐도 좋고, 왠지 '혐 주의'가 땡길 때 봐도 좋다. 개인적으로는 고만고만한 추리소설에 질린 점도 있어서 한 번씩 이런 걸물이 나오면 너무 반갑다. 진심으로 응원하고 앞으로 다른 작품들도 만나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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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은 코로나로 거의 외출을 못한 덕분에 어느 때보다 많은 신간 추리소설을 읽었다. 그래서 다섯 편만 꼽기 너무 힘들었고, 아쉽게 순위에서 밀린 작품들이 눈에 밟히지만 그동안과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다섯 편만...실은 베스트를 다섯 개 이상 뽑으면 써야 할 글 분량이 늘어나는 게 끔찍해서 어쩔 수 없이^^;;

5위 <어리석은 자의 독> - 우사미 마코토









처음 읽어보는 작가의 책이었는데 가독성이 굉장했다. 물론 이건 우사미 마코토라는 작가가 글을 잘 써서이기도 하지만 '수기' 형태의 소설만이 주는 몰입감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여름, 나는 사람을 죽였다'라는 첫 머리로 시작하는 소설과 '딩동, 택배 왔습니다' 하고 시작하는 소설 중 어느 것에 더 흥미가 쏠릴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다. 읽는 내내 누군가의 내밀한 일기를 훔쳐보는 듯한 호기심에 도저히 책장을 놓을 수 없었는데, 틈틈이 앞으로의 끔찍한 파국을 예감케 하는 서술이 들어가 결말까지 달음질쳐 읽을 수밖에 없었다. 우연히 친해진 생년월일이 같은 두 여자가 남긴 수기는 그녀들이 접하는 공통의 사건을 각각의 시선에서 묘사하면서 점차 빠진 부분을 더해가고 끝에 가서 결국 하나의 큰 그림을 완성시킨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퍼즐은 두 여자의 '생년월일이 같다는 데서'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부분은 있지만 독자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어둡고 비극적인 사연들도 넘쳐난다. 절대적인 빈곤과 시대적인 아픔 속에 잉태된 '독'과 '악'의 씨앗이 어떻게 세대를 넘어 발아하는지 통렬하게 그려내는 결말은 가히 압도적. 무엇보다 다 읽고 보면 수기 속에 은근슬쩍 남겨진 복선들이 굉장히 많음을 깨닫게 되는데, 차근차근 복기해서 하나하나 맞춰보는 쾌감이 짜릿했다. 여러모로 굉장히 교묘하게 잘 쓴 미스터리이며, 특히 2부에서 쇠락한 탄광 마을의 묘사는 공들인 취재가 작품을 얼마나 빛나게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모범 사례가 될 것 같다. 여담이지만 2부에서는 탄광 마을의 일본 사투리를 번역가가 경상도 사투리로 번역했는데 네이티브 경상도인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굉장히 수준이 높은 것 같다. 보통 사투리를 잘 모르는 작가들은 어미만 '~했노', '~했나' 식으로 처리하고 넘어가는데 이건 그 수준이 아니라 경상도 사투리를 곁에서 생생하게 듣는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졸고를 집필할 때 사투리에 자신이 없어 아직까지 사투리를 쓰는 인물을 등장시킨 적이 없는데 만약 쓰게 된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4. <살인범 대 살인귀> - 하야사카 야부사카










외딴 섬에서 연속살인이 벌어지는 본격 추리소설의 왕도적 전개를 펼쳐 보이는 작품인데, 닳고 닳은 이 장르에서 이 작품만의 킬링 포인트는 '살인범'과 '살인귀' 두 명이 각각의 이유로 두 갈래의 연속살인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뻔한 장르에 독특함 한 스푼을 추가시켜 뭔가 새로운 것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주는 작가의 영리함이 돋보인다. 나는 미스터리 소설을 크게 엔터테인먼트 계열과 메시지 계열로 나누는데, <살인범 대 살인귀>는 엔터테인먼트 계열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본 소설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작가는 아주 새로운 구석은 없다. 여러 곳에서 자주 쓰인 트릭들을 재활용하는 경향이 강한데 그게 너무도 무지막지해서 오히려 흥겨울 지경이다. 예컨대 한 추리소설에서 범인에게 이어지는 단서나 트릭은 보통 3~4가지 정도이다. 그 이상 넘어가면 작가가 구상하기도 어렵고 지나치게 복잡해져서 독자들도 싫어한다. 하지만 하야사카 야부사카 작가는 줄잡아 10개 정도의 트릭과 단서를 범인을 특정하는 데 사용한다. 물론 '살인범' 하나를 특정하는 데만 그렇다는 얘기고, '살인귀'에게도 그만큼의 분량을 할애한다. 한마디로 설명 파트에서 20개 정도의 트릭과 단서가 줄줄이 제시되면서 독자들에게 다다다다 기관총을 쏘는 것이니 본격 추리소설 팬들에게 이보다 황홀한 순간이 또 있을까 싶다. 거울 장난이나 왼손, 오른손잡이 등 대부분 어디서 많이 봤던 것이지만 하여간 양이 많으니 뭔가 배불리 먹은 기분이다. 물론 뻔한 것만 팔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 둘 중 한 사람이 '희생자들을 선택하는 이유'에는 완전히 감탄했다. 근래 연속살인물 중에서 이보다 더 창의적인 동기는 못 본 것 같고, 한국어로도 비슷한 착상을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아무래도 노인문제나 영아살해 같은 사회적인 내용을 담는 메시지파 작품들은 그 주제의 무게만큼이나 좋은 평을 받을 확률이 높은데, 순전히 유희적인 추리소설이라도 이 정도로 화끈하게 잘해내면 그 못지않게 상찬을 받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3위 <녹슨 도르래> - 와카타케 나나미









추리소설 전문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립탐정을 병행하는 '히무라 아키라'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 레이먼드 챈들러에 경도된 하라 료가 챈들러처럼 극도의 과작을 선보이고 있기에 현재로서는 일본 정통 하드보일드 계열 미스터리를 단독으로 짊어지고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우연히 알게 된 할머니와 손자의 집에 세를 든 히무라 아키라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이라는 별명답게 화재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본격적인 조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에 걸쳐 그 가족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조사한다는 내용이다. 다소 사소해 보이는 의뢰로 출발해 거대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한다는 고전적인 하드보일드의 주제에, 'Seek & find'라는 하드보일드의 방법론까지 충실하게 구사하고 있다.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새로운 장소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증언이 더해지면서 점차 최종 결론을 향해 가는 이런 스타일은 용의자를 한 방에 몰아넣고 계속 증언만 청취하는 본격 추리소설과는 다른 흥취가 있다. 탐정이 가는 곳과 만나는 사람마다 1인칭 화자인 탐정만의 개인적인 생각을 들어볼 수 있어 한층 공감이 더해지며 몰입감도 높아진다. 요즘 유행하는 엽기범죄나 독특한 특수설정이 전혀 없이 담백하지만 볼수록 은은하게 잘쓴 소설이다. '녹슨 도르래'라는 제목의 의미가 밝혀지는 결말도 근사하고 전체적인 미스터리 구조도 짜임새가 훌륭하며 곳곳에 설치한 단서나 복선도 신중하게 배치되었다. <녹슨 도르래>에 X선을 쬐면 하드보일드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뼈대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그만큼 단정하고 튼튼한 수작이다. 냉소적이고 신경질적인 탐정 캐릭터가 등장하는 챈들러풍의 서구 하드보일드와 가장 구별되는 지점은 츤데레스럽고 툴툴대면서도 부탁을 잘 거절 못하는 아키라의 인간미일 것이다. 게다가 추리소설 전문 서점에서 펼쳐지는 일상적인 생활감도 기존의 하드보일드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대목이다. 하드보일드의 구조와 형태를 잘 분석한 뒤 작가 자신만의 개성을 가미한 이 시리즈가 계속 이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작가'로 남는 것도 꿈이 아닐 것 같다.

2위 <스완> - 오승호










총기소유가 일상화된 서구와 달리 아시아권에서는 총기 난사사건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스완'이라는 거대 쇼핑몰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사건으로 시작되는 도입부가 유독 시선을 제압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20명 넘게 사망한 이 초유의 사건에서 간신히 살아난 사람들에게 한 장의 초대장이 날아든다. 각자의 기억을 공유해 그날의 진실을 밝혀보자고...데뷔작 <도덕의 시간>이 크게 인상 깊지는 않았지만 오승호 작가의 독자를 이끌고 가는 파워는 주목할 만했는데, <스완>에서는 더욱 완숙해졌다. 조금씩 정보를 제공하다가 딱 흥미로운 지점에서 잠깐 끊고 다음을 기약하니 책을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요즘 드라마처럼 끊기 신공이 절묘한데 스토리텔러로서의 이 감각은 타고난 재능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미스터리가 풀린 후반부에서도 결정적인 한 가지 비밀은 남아 있었다. 이 비밀이 풀리는 최후반부에서 무릎을 쳤다. 상식적으로 그것밖에 답이 없는데 왜 깨닫지 못했을까 깊이 안타까웠다. 메시지에 더해 <도덕의 시간>에선 조금 아쉬웠던 미스터리 소설의 근원적인 재미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았으니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할 수 있었으리라. 주제 면에서는 미증유의 사건을 접한 주인공들이 순간순간의 절박한 상황에서 내린 판단들에 대해 집중력 있게 들여다본다. 돌이켜보면 그때 이랬다면 어땠을까, 저랬다면 좋지 않았을까, 그렇게 하지 말걸 하는 각자의 후회들이 꼬리를 물고, 현장에 있지도 않은 사람들이 합리적인 이유를 대면서 쉽게 늘어놓는 비난들에 가슴이 무너지는데 생존자들은 말 그대로 생과 사가 오가는 찰나의 상황에서 그때그때 최선으로 느껴지는 일들을 했을 뿐이다. 처음 겪어보는 사태에 멘탈이 나가는 게 당연한데도 상식과 논리를 내세우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요즘 세태에 꼭 필요한 얘기라고 생각한다. 결말은 조금 타협하는 느낌이 있었지만 온갖 비난 속에서도 백조처럼 다시 한 번 날아오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먹먹한 감동을 주었다.

1위 <거울 속은 일요일> - 슈노 마사유키









나온 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뛰어난 반전으로 간간이 회고되는 <가위남>으로 성가를 높인 슈노 마사유키의 간만의 신작이다. 소라고둥을 닮은 범패장이라는 건물에서 살해된 불문학 교수의 살인사건을 다룬 과거와 깔끔하게 해결된 그 사건을 재조사하는 현재가 교차되는 구성이다. 서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1인칭 화자의 넋두리가 때때로 삽입되어 독자를 함정에 빠뜨리는 작가의 익숙한 트릭도 만나볼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더욱 완숙해져서 진상을 제대로 추리할 수 있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과거 사건이 전문적인 지식을 이용한 트릭이라 살짝 실망했지만 그건 예고편에 불과하고 진짜 해답 파트에서는 작가의 장기인 독자를 혼비백산하게 하는 반전이 몇 번이나 튀어나와 본격 미스터리 팬으로서의 만족도는 최상급에 달한다. 불문학과 프랑스어 등이 자주 나오다 보니 왠지 프랑스 예술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도 있는데 왠지 현학적이고 시공을 초월한 듯한 그 느낌도 너무 좋았다. <기생충>이 아카데미를 수상하고 이미경 CJ부회장이 봉 감독이 말하는 방식, 웃음, 스타일, 유머 등 모든 것이 좋다고 한 소감처럼 나 역시 이 소설의 모든 것이 그냥 좋았다. 특히 명탐정 캐릭터는 일본 추리소설에 등장한 명탐정 중에서 단연코 제일 매력적이라 할 만했다. 자신만만한 모습, 사려 깊은 모습, 사랑스러운 모습 등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는 이 탐정을 계속 만나보고 싶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최대 매력은 책장을 다 덮었을 때 폭풍처럼 밀려오는 문학적 여운에 있다 할 것이다. 그동안의 추리소설에서는 사건이 해결되면 명탐정은 다음 사건을 기약하며 기분 좋게 떠나가지만 이 책에서의 명탐정은 여기서 끝이다. 모종의 이유로 더 이상 사건을 맡을 수 없으며, 과거 본인이 해결했던 사건들도 철없을 때의 옛 추억쯤으로 여기는 모습이 쓸쓸하기 그지없어 인상에 깊이 남았다. 아무리 복잡한 사건의 매듭도 쾌도난마처럼 끊어버리는 초인 명탐정의 비애를 담아내는 이런 추리소설이 또 있을까 싶다. 더구나 본격 미스터리는 전 세계적으로 어쩔 수 없이 사장되어가는 장르이다. 그 장르에 신명을 바쳐 봉사한 명탐정의 퇴역, 게다가 실제로 저자가 별세하기까지 했으니 <거울 속은 일요일>의 쓸쓸한 정서는 더욱 배가된다. 퇴장의 미학이랄까, 그 처연한 아름다움에 뛰어난 본격 추리소설적 트릭이 우아하게 융합되었다. 미스터리 소설 팬으로서 절대 놓치면 안 되는 한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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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니 2022-10-2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를 너무 잘 읽엇습니다.
1위 거울속의 일요일은 읽으셨을때의 그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거 같네요
5권 다 찾아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