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2010년에 출간된 책만을 포함하며, 당연히 국내에 출간된 모든 일본 미스터리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5위 가다라의 돼지 - 나카지마 라모

 
 

 

 

 

 

 

오컬트에 미친 괴짜 소설가 나카지마 라모의 대표작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주인공은 아프리카 민속학의 권위자 오우베 교수. 8년 전, 그는 현지 연구를 위해 케냐에 온 가족을 데리고 갔다가 사고로 딸을 잃어버린다. 딸의 시체는 찾지 못했지만 죽었을 것이라는 심증은 거의 명백한 상태. 일본으로 돌아온 오우베 교수는 알코올중독에 걸려 시시껄렁한 오컬트 방송에 게스트로 참여하는 웃음거리 신세로 전락한다. 한편 딸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여긴 탓에 실의에 빠진 아내는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해 사이비 종교에 가입하고, 자연스레 가족은 거의 붕괴 직전. 이 책은 총 3부로 되어 있는데, 1부는 오우베 교수가 탁월한 마술사와 손잡고 아내가 심취한 사이비 종교지도자의 가짜 기적을 폭로하는 내용이다. 2부에서는 다시 아프리카로 떠난 오우베 교수 일행이 무시무시한 아프리카 주술사의 손에서 그의 영능력의 기반이 되는 보물(?)을 되찾아오고, 3부는 보물을 빼앗긴 아프리카 주술사가 일본으로 찾아와 이 대명천지에 주술 대결을 펼친다. 즉, 일본-아프리카-일본의 순으로 진행된다는 얘기. 간단히 말해서 1부는 완전히 일본 드라마 <트릭>이고, 2부는 <솔로몬의 동굴>, <인디아나 존스> 같은 모험물, 3부는 주술이 난무하는 일본식 전기물 같은 느낌이다. 몇 가지 물리트릭이 나오는 1부를 제외한다면 정통적인 추리소설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특히 3부는 어떻게 봐도 추리소설이 아니다), 주술, 밀교 등에 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빠르고 박력 있는 전개에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특히 3부는 스플래터 호러, 좀비물 같은 B급 호러영화 스타일의 흥미도 주니까 그쪽 팬이라면 더 재미있어 할 듯. 잡종 장르 엔터테인먼트물로 강력하게 추천한다.

 
4위 리라장 사건 - 아유카와 데쓰야 

 

 

 

 

 

 

  

일본 추리소설계의 역사적 거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미지수였던 아유카와 데쓰야의 작품이 출간되었다.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 마쓰모토 세이초급의 작가가 이제서야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아쉽지만, 늦게라도 볼 수 있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유카와 데쓰야는 흔히 철도 알리바이 트릭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국내에서는 이 장르가 그다지 인기가 있다고 볼 수 없어 정통 본격 추리소설 <리라장 사건>이 먼저 소개된 듯하다. '리라장'이라는 여름별장(한정된 공간)에 머무르게 된 일군의 예술가 지망생들(한정된 등장인물)이 하나씩 살해되는 연쇄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다른 본격 추리소설처럼 경찰들은 무수히 쌓인 단서와 복선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변죽만 울리다 두 손을 들어버리며, 결국 죽을 만한 사람이 다 죽고 나서야 명탐정이 슬금슬금 등장해 멋지게 사건을 해결한다. 한마디로 애거서 크리스티 스타일이랄까, 익숙한 만큼 편안하고 기분 좋게 읽을 수 있다. 흔히 SF소설은 아무리 과학적인 설정을 바탕에 깐다 해도 결국은 비현실의 이야기라는 장르의 특성을 감안하고 읽어야 하는 것처럼, 본격 추리소설의 인공적인 작위성 또한 이 장르의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싶다. 작가와 독자가 공동으로 합의한 규칙에 따라 공정하게 펼치는 두뇌싸움. 이러한 퍼즐 추리소설의 역사는 벌써 150년이 훌쩍 넘었고, 아직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리라장 사건>을 150년 간의 은밀한 즐거움을 아는 모든 독자들에게 권하는 바이다. 개인적으로 고전 본격 추리소설의 팬으로서 앞으로도 <리라장 사건>과 같은 훌륭한 작품이 많이 소개됐으면 좋겠고, 아울러 <검은 트렁크>를 비롯한 아유카와 데쓰야의 철도 알리바이 트릭도 한두 권쯤 꼭 맛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한다.

 
3위 이방의 기사 - 시마다 소지 
 


 

 

 

 

 

 

  

시마다 소지가 창조한 명탐정 미타라이와 왓슨 역할을 하는 이시오카 콤비의 원점이 되는 작품. 작가는 습작 기간 동안 이 작품을 최초로 썼지만 출간이 불발되었고, 오히려 두 번째로 쓴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래놓고 몇 년을 잊고 있다가 출판사들의 신작 독촉이 거세지자, 혹시 <이방의 기사>를 재활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읽어보니 이게 웬걸, 지금 발표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내용이 아닌가! 겨울바지 주머니에 만 원짜리 한 장을 넣어두고 다음 해 겨울에 우연히 발견한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그 공돈이 생긴 듯 신나는 느낌, <이방의 기사>야말로 시마다 소지에게는 복권 같은 짜릿한 책일 것이라는 짐작에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된다. 여담이지만 최근 몹시 바쁘기도 하고, 또 스포일러를 당할 우려가 워낙 커서 타인의 추리소설 리뷰를 읽지 않은 지 좀 됐다. 그저 스쳐 지나가면서 덧글이나 볼까 말까 하는 정도인데, 이 작품은 대개 평이 좋지 않은 것 같더라. 국내에 나온 시마다 소지의 작품 중에 <이방의 기사>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아쉽지만 취향 차이를 운운하며 그냥 밀어붙이는 수밖에. 환상의 시체 유기 트릭을 선보인 <점성술 살인사건>이나 황당하리만큼 스케일이 큰 건축 물리 트릭을 사용한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에 비하면 추리나 트릭이 평범해서 반응이 그저 그런 걸까? 일면 수긍이 가는 부분이지만 개인적으로 <이방의 기사>만의 장점이 다소 평범하고 작위적인 트릭이라는 약점을 충분히 상쇄한다고 믿는다. 중반부에 펼쳐지는 AV(?) 혹은 가츠메 아즈사를 연상시키는 능욕당하는 유부녀와 그 복수담 같은 전개나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절절한 로맨스는 그간 트릭 지상주의자로만 보였던 시마다 소지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펼쳐 보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미타라이, 이시오카 콤비의 빛나는 우정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황량한 이방의 땅에서 위기에 처한 이시오카를 구하기 위해 현대의 말, 그러니까 오토바이를 타고 출전하는 기사 미타라이의 장쾌한 모습은 몇 번을 봐도 그저 황홀하다.     


2위 은폐수사2: 수사의 재구성 - 곤노 빈

 
 

 

 

 

 

 

원제는 <과단>. 작년에 출간되었던 <은폐수사>의 속편이다. 세상이 다 아는 고집불통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은 죽어도 안 통하는 원리원칙주의자 류자키가 겪는 새로운 사건을 기다렸던 분들께 무척이나 반가운 작품이 아닐까 싶다. 경찰청 본청의 고위직에서 일하던 전편에서 모종의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일선 경찰서장으로 강등된 류자키. 그는 도내에서 권총 강도가 인질극을 벌이는 사건 현장을 지휘하다가 결국 특공대에게 침투 사살 명령을 내린다. 무사히(?) 범인을 사살하고, 인질을 구출하지만 아뿔싸, 범인의 권총에는 남은 총알이 없었다! 총알도 없는 범인을 사살하다니 과잉대응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지만 류자키는 담담하다. 범인이 총알이 있는지, 없는지를 사전에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이번에도 인질극 현장 대응 매뉴얼을 원칙대로 따랐을 뿐이다. 한편 사살된 범인의 농성 현장을 조사하던 류자키의 부하 경관들은 수상한 증거들을 연달아 발견한다. 과연 류자키는 이번에도 논란을 벗어나 국민에게 봉사하는 국가공무원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전편과 비슷하게 빠른 속도감과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연속되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전편에는 없었던 제대로 된 사건의 수사 과정과 의외의 결말, 반전까지 만끽할 수 있어 딱 두 배 더 재미있다. 작가 곤노 빈은 경찰소설 분야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가로, 다카무라 가오루처럼 가혹할 정도로 정밀하거나, 요코야마 히데오, 사사키 조처럼 비장하지만은 않은 엔터테인먼트형 경찰소설의 제일인자라 불러주고 싶다. 언뜻 보면 재수없는 엘리트지만 알면 알수록 끌리는 류자키라는 캐릭터의 매력만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 보장한다.     


1위 마크스의 산 - 다카무라 가오루 
 


 

 

 

 

 

 

 

다카무라 가오루의 전설적인 경찰소설. 1993년에 출간되고 10년쯤 뒤에 작가가 전면 개고한 작품이 이번에 나왔다. 예전에 한 번 본 걸 또 읽을 가치가 있을까 하고 반신반의한 게 사실이지만 막상 읽어보니 역시 예전의 감동은 어디 가지 않더라. 또한 내용적으로도 수정한 부분이 많아 비교해서 읽는 재미도 있었다. 예컨대, 십수 년 전에 미나미알프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를 소상히 기록한 등장인물 중 한 명의 유서가 발견되는 상황 같은 곳은 완전히 새로 썼다. 예전에 나온 단행본판(고려원)과 비교하기 위해서라도 바로 단행본판을 다시 읽을까 생각했지만 이 우울하고 비통한 이야기를 두 번 연달아 읽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꼭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 모든 이야기의 발아점이 되는 1970년대의 일가족 자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산림노동자의 박살 사건, 그리고 신원을 알 수 없는 백골 사체의 출현을 지나 1991년 현재 도쿄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고다 형사의 활약상을 그린 소설이다. 그러나 고다 형사뿐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수사 1과7계의 모든 형사들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사건 해결을 위해 현장에서 발로 뛰는 그들의 처절한 2주일간의 투쟁의 기록이랄까. 현미경처럼 세밀하고 정교한 수사 과정의 묘사나, 동료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보다 한 발짝 더 앞서 공을 세우기 위한 형사들간의 암투 등은 그전의 어느 경찰소설에서도 본 적이 없다. 가히 입을 못 다물 만큼 압도적인 걸작! 흔히 먹먹하다는 말을 자주 쓰는데, 헤쳐도 헤쳐도 어둠만이 가득한 산을 오르는 '마크스'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그 무엇만큼 읽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장면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이미 현대의 클래식, 비슷한 시기에 나온 어떤 작품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경지에 오른 작품이라 생각한다.   

 

 

베스트 단편

<유리기린> 중 '닥스훈트의 우울' - 가노 도모코  


  

 

 

 

 

 

  

올해는 좋은 단편집이 제법 나온 해였다. 따라서 선택이 어려웠지만 여러 단편집 가운데 작품성에 비해 별달리 화제를 불러일으키지 못한 단편집을 골랐다. 가노 도모코의 <유리기린>. 한 고등학생 소녀가 살해되면서 시작되는 이 연작 단편집은 소녀의 죽음이 남긴 것, 그리고 쓸쓸히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첫 장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살아 있는 상태로 나오지 않는 소녀가 책장을 다 덮을 때쯤에는 피와 살을 가진 분명한 형태로 독자의 가슴속에 맺히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결국 작가의 필력이 뛰어다는 얘기겠지. 다소 무리하게 모든 단편들을 하나로 꿰어맞추려고 시도했던 마지막 단편이 조금 떨어지고 그 외의 모든 단편들이 다 좋다. 탐정 역할을 하는 인물은 소녀가 다녔던 학교의 양호선생. 이중 '닥스훈트의 우울'은 평범한 동네에서 고양이들의 다리가 잇따라 칼로 베이는 사건을 그린다. 다들 알다시피 살아 있는 짐승을 붙잡는 것만 해도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다리에 칼을 댄다면 그 짐승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사방팔방으로 뛰며 난리를 피울 터.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동네에서는 고양이 피습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이 이야기를 들은 양호선생은 사색이 된다.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더 큰 일이 벌어질 거라고...일상 미스터리풍의 간단한 트릭이지만 논리적으로 말이 되고 소름 끼치는 범인의 악의가 느껴져 뒷맛이 쓴 작품이다. 요즘은 어째 이런 단편이 끌린다. 단순하면서도 통렬하게 의표를 찌르는 그런 단편. 꼭 '닥스훈트의 우울'만이 아니라 모든 단편이 흥미로워 이대로 묻히기에는 영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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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1-02-28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위 마크스의 산 ㅠㅠㅠㅠㅠㅠ 정말 여운 긴 이야기에요. 그 다음에 막 흥분해서 산 '조시'는 1권 읽다 말았다는;

2위 곤노 빈. 정말 좋죠? 아주 깔끔하고, 재미난, 별 갈등 없이 주인공 위주로 흘러가는 이야기. 전편도 특이했지만, 2편은 더욱 좋았어요.

3위 이방의 기사는 .... 그냥 사심 가득 담아 나쁘지 않다. 정도

4위 리라장은 작년 일본 미스터리 순위를 거꾸로 하며 개인적으로 뒤에서 4위 정도는 할 수도 있을 것 같; ^^;

5위 가다라의 돼지...가 5위라니! 라고 하지만, 1위가 마크스의 산이다보니 뭐 ^^

무해한모리군 2011-02-28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별찜을 해두고 천천히 봐야겠어요 ^^

jedai2000 2011-02-28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조시>는 공장 묘사가 대박이죠ㅎㅎ 절대 끝나지 않는 기계 묘사-_-;; 결말도 암울하기가 <마크스의 산>의 두 배라죠. 그래도 3편 <레이디조커>까지는 나와줬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ㅠ.ㅠ

곤노 빈은 3편이 소개될지 안 될지 불투명한 것 같은데 꼭 나왔으면 좋겠구요. <이방의 기사>는 개인 취향이 넘 강하게 반영됐어요ㅎㅎㅎ <리라장 사건>은 퍼즐 미스터리로서는 괜찮은 수준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의외네요. <가다라의 돼지>는 정말 신나게 읽었죠^^

고고씽휘모리님...그래요. 다 좋은 작품이니 찬찬히 하나씩 읽어보세염^^

하이드 2011-02-28 23:53   좋아요 0 | URL
곤노 빈 못 나올 것 같다고 하던데, 2편이 재미났고, 입소문의 힘에 힘입어 잘 팔리고, 꼭 나왔음 좋겠어요.

리라장 역시 작가가 싫어서 그러는거니 역시 사심 가득합니다. ^^ 시마다 소지와는 반대의 의미로다가.

<조시>는 읽어보도록 해야겠네요. 여름에 읽어야 좋을 것 같긴 하지만, 우울한 결말이라니, 맘이 갑니다. <레이디 조커> 나오는거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안 나올지도 모른다는 건가요? ㅡㅜ

jedai2000 2011-03-02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시작 출판사 자체가 활동을 안 하는데다, 1, 2편이 썩 잘 나갔다고는 할 수 없으니 3편을 보기 힘들겠죠. <조시>는 늦여름, 가을쯤이 배경인데 가오루 소설 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우울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 S출판사가 <레이디조커>까지는 계약을 안 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