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전쟁 세트 - 전5권 7년전쟁
김성한 지음 / 산천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역사소설을 즐겨 읽는다. 물론 대다수의 역사소설은 권수가 무척 많은지라 자주 붙잡을 수 없고, 또 슬프게도 오랜 시간을 기꺼이 투자할 만큼 만족스러운 역사소설도 그리 왕왕 눈에 띄지는 않아 1년에 한두 편에 불과하지만. 언제 역사소설을 읽고 싶으냐면, 저녁 밥값을 고민할 때나 장바구니에 넣어둔 물건을 살까 말까 줄기차게 재는 상황에서 주로 생각난다. 다시 말해, 팍팍한 현실에 움츠러든 내 모습이 싫어지는 순간 억눌린 내 마음은 장쾌한 역사의 현장 속으로 달음박질 쳐가는 것이다.

 

역사소설은 이미 끝이 정해져 있는 얘기다. 그래서 역사 속 실존인물들의 행보를 가슴이 터질 만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 충신열사, 재자가인, 장삼이사, 기군역적의 다채로운 인간군상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인간 드라마를 때로는 감탄하며 혹은 비분강개하며 죽 감상하면 되는 일이다. 소설보다 실제 있었던 일이 더욱 흥미롭다는 말처럼 대부분의 역사는 알면 알수록 재미나고, 게다가 오늘날의 삶에 충분히 되살릴 수 있는 교훈까지 제공하고 있으니 읽어서 손해 볼 걱정이 없다.

 

역사소설이 이렇게 재미있고 가치 있는 것이라지만 그래서 내가 무엇을 읽었나를 생각해보면 조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3할이 사실이요, 7할이 허구라는 <삼국지> 등의 중국 고전이나 일본의 역사소설 거장 시바 료타로의 작품들을 주로 읽어왔는데, 남의 나라 역사만 줄기차게 들고파는 것도 물론 장점이 있겠으나, 먼저 우리 것을 알고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게 순서가 아닐까 하는 의문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다른 나라의 뛰어난 역사소설에 버금가거나 혹은 능가하는 작품을 쉽사리 찾지는 못했다. 그러던 차에 만나게 된 김성한의 <칠년전쟁>은 과장을 조금 보태 내게는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일독의 가치가 있는' 우리의, 우리만의 역사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국어 교과서를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90년대 중고교 교과서에는 김성한의 <바비도>나 <오분간> 등의 단편이 실려 있었다. 당시에도 우리나라 작가가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을 소재로 소설(<바비도>)을 썼다는 게 이채로웠는데, 이른바 '순문학' 작가로 활동하던 시기에도 첨예한 역사적 순간을 배경으로 삼았던 걸 보면 원래 역사에 예리한 감각이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작가인 듯하다. 실제로 60년대에는 영국에서 역사학을 정식으로 공부했고, 작가생활의 말년에는 본격적으로 역사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아마도 임진왜란을 다룬 <칠년전쟁>을 이 시기, 김성한의 대표작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고, 어떤 양상으로 전개됐으며, 어떻게 끝을 맺게 되었는가. <칠년전쟁>의 핵심이라 할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백년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했고, 조선은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상황까지 몰리다가 수군대장 이순신이 분전해 일본군을 쳐부수어서 전쟁이 끝났다, 이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전쟁이 7년 동안 지속된 것도 몰랐고, 정유재란이라는 일본군의 2차 침공에 대해서도 깜깜했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임진왜란에 대해 나와 비슷한 수준의 지식만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내가 너무 얕보는 건가)? 임진왜란이 동북아 삼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던 대전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무지는 가슴 아픈 부분이다. 오늘날에도 한중일, 삼국은 각자의 이익과 자구를 위해 열심히 경쟁하고 있는 처지니까. 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듯이 과거의 전쟁을 자세히 알면, 그 공부 속에서 오늘날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찾아내어 향후의 전략을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에 나온 김성한의 <칠년전쟁>이 요즘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리라.

 

전5권으로 된 <칠년전쟁>의 각권 내용을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1권에서는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거쳐 명나라까지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부리자, 조선과 일본의 중계무역으로 먹고 사는 쓰시마(대마도) 도주 이하 신하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총력을 다한다. 서서히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막후에서 펼쳐지는 이 치열한 외교전은 임진왜란을 다룬 어느 매체에서도 본 적이 없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마침내 20만 일본 대군의 침공이 시작되는 2권에서는 문치주의를 숭상해 전혀 방비가 되지 않은 조선이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조선 왕, 선조가 명의 국경과 맞닿은 의주까지 피난을 갈 정도였으니 그 참상이 오죽했겠는가.

 

전쟁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전라도 수군대장 이순신이 바다에서 일본군을 격파해 그들의 보급망을 끊어버리는 조선의 반격이 3권의 줄거리다. 이즈음 선조는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고 지난한 노력 끝에 마침내 명의 파병 승인을 이끌어낸다. 명나라의 원군과 조선군의 합동작전으로 평양을 탈환하고,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지친 일본군이 서울에서 방어선을 치며 전쟁은 장기화 조짐을 보인다. 한편 명에서는 희대의 걸물 심유경이 등장해 삼국의 화평을 중계하여 크게 한탕을 할 계획을 세운다. 민간에서 땅 한 뙤기 파는 것만 중재해도 구전이 떨어지는 판국에 항차 나라 간의 거래를 성사시키면 그 이득이 어떻겠는가. 4권은 이 화평회담에 얽힌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핵심이다. 대미의 5권에서는 결국 화평회담이 결렬되고, 재침공한 일본군(정유재란)은 다시 위세를 북돋우다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본국으로 철수한다. 이러한 일본군의 퇴각 과정에서 최후까지 적을 추격하던 명장 이순신은 전사하고 만다.

 

대강의 줄거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양상이 무척이나 선명하게 제시된다. 게다가 이건 그저 줄거리일 뿐, 실제 책을 읽으면 그 압도적인 정보량과 정교한 당시 정세의 묘사에 마치 그 시대에 살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10년에 걸친 작가의 자료 조사와 치밀한 고증에 힘입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삼국의 궁정과 초유의 사태에 고뇌하는 고관대작, 전쟁의 참상에 신음하는 민간 등 어느 곳이라도 소홀히 다뤄지는 법 없이 고유의 빛을 발하고 있다. 때로는 아이맥스 카메라로 전국을 멀찍이서 조망하는가 하면, 가끔은 다큐멘터리 8밀리미터 카메라로 치열한 전쟁터 한복판에서 들고 찍는 등 변화무쌍한 서술 방식이 일품이다.

 

아무래도 역사소설은 과거를 다루다 보니, 당대의 고색창연한 대화법이나 뜬구름 잡는 고담준론이 별로 익숙하지 않아 독서를 방해한다고 투덜대는 분도 있을 것이다. 단언컨대 <칠년전쟁>은 그렇지 않다. 인물 간의 대화는 대개 두 줄 이상을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짧으며 점잔빼는 꾸밈이나 꿈지럭거리는 서두 없이 꼭 필요한 핵심만 제시된다. 대화에 있어서는 일부 리얼리티를 벗어난 형국이지만 그만큼 속도감이 넘치며 독자들이 대화 속에 담긴 정보를 받아들이기에도 훨씬 수월하다. 하드보일드에 가까운 날렵한 묘사는 꼭 인물의 대화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서술에도 적용되는데, 빠르고 날렵하여 한마디로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조선, 일본, 명의 수많은 인사들이 등장해 한 폭의 풍경화를 이루고 있지만 각각의 인물이 거대한 풍경에 매몰되는 일 없이 오롯이 개성을 지키고 있다. 누군가(특히 이순신)의 무조건적인 장점만 보는 신격화나 적군이랍시고 사람의 형상을 한 악마 식으로 묘사하는 유치한 이분법도 보이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방불케 하는 화법으로 무지몽매한 군신을 일깨우는 정승 정유길의 지혜, 초일류의 군인다운 청결한 고상함과 기품을 지닌 이순신, 비록 전쟁에는 나왔지만 인명을 살상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평화를 갈구하는 천주교 신자 고니시 유키나가, 히데요시의 미친 야욕을 진심으로 믿고 진군 또 진군하는 전쟁중독자 가토 기요마사, 물건을 사고파는 시시한 장사치가 아니라 나라를 거래해 천금을 희롱하려는 명나라의 심유경 등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전술한 대로 이들 군상들이 이합집산하며 펼치는 인간 드라마가 <칠년전쟁>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유독 전쟁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들도 충분히 만족할 만하다. 각 군의 분포도와 주요 전장의 형세에 얽힌 지도 등 소규모 전투의 양상을 통찰할 수 있는 자료도 풍부하고, 무엇보다 다른 나라가 아닌 우리나라 안에서 펼쳐진 전쟁이라 한국 사람이라면 직관적으로 전쟁의 세부도가 들여다보인다. 예컨대 경상도 전역을 제압한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전라도로 침투하려 하는데,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진입하는 목줄이 바로 진주여서 전쟁의 향방을 가늠하는 이 진주를 둘러싸고 치열한 교전이 몇 차례에 걸쳐 펼쳐진다. 만약 다른 나라의 전쟁이라면 이곳이 핵심 장소니 어쩌니 해도 깊이 다가오지 않는다. 잘 모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조금 안 된 얘기지만 <칠년전쟁>의 주요 전장은 대개 우리가 잘 아는 곳이라서 따로 공부할 필요 없이 그냥 읽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 점에서도 편하다.

 

아주 허접한 책이 아닌 이상 한 권의 책 속에는 으레 교훈이 있게 마련이고, <칠년전쟁> 같이 좋은 책에는 당연히 더 많은 교훈이 있다. 예컨대, 전쟁을 잘 모르는 군신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에게 총공세를 지시해 수군을 전멸시킨 일화를 통해서는 농사는 농사를 잘 아는 농부에게, 전쟁은 전쟁을 잘 아는 군인에게 맡기라는 소박한 원칙을 확인할 수 있다. 화평회담을 이끌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불사한 심유경의 파멸을 통해서는 비록 뜻이 좋다 해도 큰일에 있어서는 역시 신의가 중요하다는 교훈도 느꼈다. 무엇보다 '무능한 지배자는 만번 베어 죽여도 부족하다'는 말이 대선을 앞둔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훈일 테지만. 결국 한 권의 책에서 3할을 얻을 것인지, 절반을 취할 것인지, 작가가 의도한 전부를 얻을 것인지는 개인의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 결정될 테니 부디 뜻 있는 독서를 하시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내가 <칠년전쟁>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직접 전쟁(6. 25)을 경험한 작가만이 쓸 수 있는 휴머니즘에의 갈구였다. 전쟁을 통해 무고한 백성들이 수도 없이 일본군은 물론이고, 도와주러 온 중국군의 손에도 죽어나갔다. 작가는 그 참상을 낱낱이 묘사해 하늘 아래 더는 이러한 인면수심의 지옥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부르짖고 있다. 비록 적장이지만 7년 내내 평화를 위해 막후에서 눈물겨운 노력을 펼친 고니시 유키나가, 그와 작가 김성한이 왠지 겹쳐 보이는 건 나만의 부질없는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