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경부터 올해 3월 말까지는 생애에서 가장 심한 슬럼프였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고, 매사에 의욕이 안 생겨서 글 한 줄도 쓰기
힘들었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NBA 게임이었지만 예전에는 글을 충분히 쓰고 게임 한두 시간으로 가볍게 머리 식히는 정도였다면, 이번 슬럼프
기간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만 하면 편두통이 올 지경이었다. 작년에 나온 책의 반응도 뜨뜻미지근해 다른 책을 또 쓰면 뭐하나,
어차피 망할 텐데 하면서 기분이 영 끓어오르지 않은 탓도 있고 크게 의욕을 떨어뜨릴 만한 개인사도 있어 도통 집중이 힘들었다. 반년 가까이
무위도식해 통장이 거의 말라붙어가는 3월 말에 예전 친구가 생일선물로 주었던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를 무심코 읽어보았다.
<소설가의 각오 - 마루야마 겐지>
나도 이
에세이 말고 마루야마 겐지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는데 아무래도 흔히 말하는 순문학 작가 같았다. 돈이 되는 대중문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생활비를 줄이느라 산 속에 틀어박혀서 본인이 쓰고 싶은 것만 쓴다는데 비장한 각오가 정말이지 남다르더라. 일본은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순문학이
인기가 별로 없어 겐지 님의 장편소설은 평균 2만 권 정도 팔린다는데 아내까지 있으니 역시나 일본 기준으로도 생계가 빠듯할 터이다.
모자라는 생활비는 빨리 돈을 땡길(?) 수 있는 단편으로 메꾼다지만 이것도 쓸 수 있는 절대량에는 한계가 분명해 결코 넉넉한 환경은 못 만든다.
종목은 달라도 여기서 강한 동질감이^^;; 겐지 님은 '작가는 돈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안 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작가가 돈이
너무 많으면 주저앉아서 글 쓰고 싶겠는가, 놀러다니고 싶지. 한편으로 돈이 너무 없으면 기본적인 생계가 염려되어 어떤 아이디어도 빛을 잃는다는
말에 크게 공감이 가더군. 나만 해도 큰맘먹고 책상에 앉아서 몇 줄 쓰다가도 당장 다음 달은 어떻게 버티지? 하는 생각에 골몰하기 일쑤이니까.
아이디어의
빛을 잃지 않고 안정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마루야마 겐지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조건인 식비, 의복비 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산에서
은둔하는 것이다. 이렇게 허리띠를 졸라매고 졸라매도 모아둔 돈은 없어 아내를 위한 몇 년 간의 생계비를 제외하고 본인은 객사할 각오를 하고
있다는 얘기에 괜시리 숙연해졌다. 과연 소설가는 이 정도 각오를 가지지 못하면 소설가가 될 수 없는 것인가. 비슷한 시기에 일본의 대형
추리소설가인 모리 히로시의 <작가의 수지>도 읽었다. 이 양반은 마루야마 겐지와는 대조적으로 원래 조교수였다가 돈을 좀 만들기 위해
추리소설을 썼고 19년 동안 무려 278권의 소설을 썼다. 현재는 과도한 버닝으로 창작열이 하얗게 불탔는지 은퇴 상태. 히로시 님의 얘기에도 귀
기울일 구석이 많았다. 부업이 아니라 전업이라면 한 권, 한 권의 성패에 좌절하지 말고 무조건 빨리 많이 쓰라는 것. 아무리 안 팔려도
출판사에서 기본적인 인세나 계약금 등은 나오기 마련이니까 1년에 다섯 권만 써도 최소 생계비는 되고, 그중에 운 좋게 영화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판권을 파는 작품이 하나라도 나온다면 그 해 살림은 확 피는 것이다. 하긴 1년에 10편 이상의 소설을 썼으니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히 있어 보인다.
<모리 히로시 - 작가의 수지>
모리
히로시는 데뷔작인 <모든 것이 F가 된다>부터 초대박을 쳤으니 지금보다 출간 페이스를 줄였더라도 충분히 떵떵거리고 잘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데뷔작이 망했더라도 1년에 열 권 이상을 써냈으니 평균적인 직장인보다는 수입이 좋았을 터. 한마디로 작가는 어떤 상황이
닥치든 닥치고 써내려가서 물량공세로 다양한 기회를 만들라는 조언이었다. 어찌 보면 두 책에서 작가가 살아가는 두 극단을 본 듯해 매우
흥미로웠다. 작가는 원래 가난한 게 숙명이니까 구도자에 가까운 자세로 욕망을 최대한 버리고 본인이 쓰고 싶은 글만 쓰든가, 어차피 책도 상품이니
독자가 좋아하는 얘기를 최대한 많이 생산해서 한 재산 일구든가. 두 얘기 중에 어느 것이 맞다고는 내가 판단할 수 없을 것 같고, 둘 다 충분히
공감이 간다. 어쨌든 두 얘기의 공통점은 일단 쓰라는 것. 반년을 펑펑 놀아버린 나에게는 가슴이 뜨끔해질 수밖에 없는 일침이었다.
두 책을
읽고 새삼 지나버린 반년이 아쉽고 후회스러웠다. 반년이라면 장편 하나를 완성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는데ㅠ.,ㅠ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급우울해졌다. 그래서 가뜩이나 휑한 통장을 또다시 줄줄 짜서 무작정 호치민으로 떠났다(응?). 뭔가 마음을 다잡고 힘을 좀 얻기 위해서
일단 여기 아닌 어딘가로 떠난 것인데, 막상 해외로 나가니 그저 신나기만 해서 마음 다잡기보다는 단순 관광에 가까웠다^^;; 사철 푸르고 뜨거운
베트남의 공기가 어찌나 좋던지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커피 한 잔만 사려도 지갑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베트남에서는 배가 터지게
먹어도 2만 원 쓰기가 어려우니 백만장자가 된 기분으로 동(베트남 화폐)을 펑펑 뿌리고 왔다. 음식은 정말 맛있었고 달디단 커피도 내 입맛에
딱이었다. 겨우 2박3일이라는 게 눈물이 나게 아쉬었다만 쥐어짠 통장에서 흘러내린 물이 그것밖에 안 돼서ㅠ.,ㅠ
돌아오고
나서는 한층 담담하게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지난 반년의 방탕과 무위도식의 벌을 받아야 할 시간이라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더 이상 두세 달도
버틸 여력이 없다. 이제 산으로 들어가든가, 고시원을 잡고 남은 2018년 동안 다섯 권을 쓰든가, 늙은 편집자를 써주는 곳이 있다면 취직이라도
해야 한다. 새삼 지나버린 반년과 그 시간 동안 할 수 있던 다양한 기회들이 아쉽고 후회스러웠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게임은 인생의 적, 게임을 죽이자!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는 소설에 좀 더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겐지 님이나 히로시 님처럼 치열하게 써봐야겠다는 다짐이다. 언제 상황이 좋아져서 다시 작업에 매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꾸역꾸역 다시 해봐야지. 몇 주 전에 한 신문에서 요 네스뵈 작가가 '소설을
쓰고 싶은 직장인이 시간이 없다며 투덜댈 때 나는 늘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쓰라는 조언을 한다'는 말을 읽었는데, 혹시라도 취업을 한다면 그렇게라도 해봐야지. 아무튼 다시는 슬럼프 따위의 핑계를
대고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분위기가 넘 무거워진 듯해 깜짝 퀴즈. 두 게시판에서 다른
점을 찾아보시오.
선물은 재정 상태가 안 좋은 관계로 없어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