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맥주한잔에 기대 운다.
참 단단해 보이던 아직 어린 세아이의 아버지인 김관홍 잠수사의 죽음에 이런 세상에 살아야하는 아이들이 그리고 내가 불쌍해 절로 울음이 난다.
금요일엔 원가관리 수업을 들었다. 원가관리에 따르면 인간은 원가이고, 고로 탈법이 아닌한 가장 적은 임금을 주고 필요한 만큼 쓰다 버리면 된다. 강사가 테크놀로지가 발달하고 모두가 비정규직이 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 태연히 얘기한다. 나는 인간은 왜 일을 해야하고 이 세상에 기업이 왜 필요한가 생각한다. 나는 나와 가족의 삶을 위해 일을 한다. 기업의 목표따위 상관도 없다.
십여년도 전에 배웠던 조직관리론을 되새긴다. 기업은 사회가 키우고 가르친 인간을 헐값에 이용중이고, 국가가 만들어둔 사회적 인프라를 이용한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기업은 당연히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한다. 성차별적 임금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가족임금의 개념을 꼭 끌고오지 않더라도, 적정임금이 죽지않고 살만큼일 수 없다는 것이다.
최저임금 세후 수입 103만원은 월세 35(서울에서는 반지하를 아주 잘 찾아봐야함), 교통비 7.5만원, 식사비 37.5만원, 핸드폰비 8만원, 공과금 10만원을 내고나면 5만원이 남는단다. 이돈으로 학자금도 갚고, 가끔 영화도 보고, 몇달을 모으면 왕복 7만원인 고향갈 차비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공공기업까지 뻑하면 들고나오는 이윤극대화, 서민들 쥐어짜서 극대화한 이윤으로 도대체 뭘 할 것인가? 이윤만을 추구해 사람의 평범한 삶을 파괴하는 것이 기업이라면 그런 조직은 인간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
삼십명이 넘는 부상당한 세월호 잠수사들에 대한 지원을 새누리당이 거부해 법제화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젊음이 실업, 최저임금과 빚더미에 몸부림치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가.
살인자들. 그리고 방관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