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일년에 한달은 한번 만났던 책들을 다시 읽어본다. 

올해는 로맹가리다.   

스물몇에 읽었던 이 단편집은 그저 낯설고 어려웠던 느낌만을 남겼는데, 

다시 만난 그는 처음으로 뜨겁게 내게 안겨온다. 

이 인간 천재로군.. 

어느 한 편도 놓치고 싶지 않은 빼어난 작품들이다. 

이차세계대전 이후에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가. 

신앙을 잊었고, 신을 버렸으며, 품위 있는 죽음이 낯설어졌다. 

옆집 숟가락 갯수까지 알던 이웃을 잃었고, 

내 마을 공동체를 잃었다.. 

그러고 보니 인간에게 남은 것은 앙상한 자기자신 밖에 없다. 

그 앙상한 자신이 무엇을 할 자유를 가지든 그게 뭐 그리 대수겠는다. 

유태계 프랑스인이고 그 자신이 2차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던지라, 

그의 글은 참 스산하다. 냉소적이다.

그의 단편선 전체에서 우리가 믿었던 신념들은 쉽게 부정되고 부서진다. 

그는 이제 아무에게도 편지를 쓰지 않았고, 누구에게서도 편지가 오지 않았으며,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그 불가능한 일을 하려 할 때 사람들이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던 것이다. (p15) 

그녀가 흐느꼈다. 그가 대책 없는 어리석음이라고 스스로 이름붙인 그 무엇에 다시 점령당하고 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손안에서 모든 것이 부서지는 걸 목격하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이런 식이었으므로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체념을 거부하고 줄곧 희망이라는 미끼를 물고 싶어했다. 그의 삶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황혼의 순간 문득 다가와 모든 것을 환하게 밝혀줄 그런 행복의 가능성을 은근히 믿고 있었다. 대책 없는 어리석음 같은 것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p20)

이데올로기이든 헛된 사랑의 열병이든, 이상이든 그것을 뭐라고 부르던 간에 종국에는 우리를 허무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근원의 언저리를 바라본다. 그리고 새들이 페루로 가서 죽을 수 밖에 없듯 배반될지 알면서도 다시 한번  대책없는 어리석음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기왕지사 삶이란 그런 것이라면 제길 멋지게 온힘으로 날아가 떨어져 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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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8-31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휘모리님 리뷰로 다시 읽고싶어지는 책,
마지막 문장 너무 멋지잖아요^^

무해한모리군 2009-09-01 09:45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멜랑꼬리에 젖어있거든요 ^^
반가워요 프레이야님~

Forgettable. 2009-08-31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거 [자기 앞의 생]의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읽었다가 큰 낭패였지요.
당시에 이거 괜찮다는 친구들 겉멋든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면 저도 천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생겼을지 궁금하네요- 아마 똑같을 것 같지만 ㅋㅋㅋㅋ 15페이지 부분이 어렴풋이 기억속에 남아있는 것 같아서 신기해요. 물고기 기억력이라도 차곡차곡 다 쌓이고 있는 것인지..


무해한모리군 2009-09-01 09:44   좋아요 0 | URL
덜컹이는 기차는 기차대로 멋진 세단은 세단대로 맛이 있는거 같아요ㅎ
음..
뭔가 맛을 볼 수 있는 범위가 점차 넓어지는 기분이랄까요?
어렸을 땐 아무 맛이 없던 음식들의 풍미를 알아가는 것처럼요~
아직 한참 멀었지만..

바람돌이 2009-09-01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맹가리 - 말로만 들었지 읽어본 적은 없는... 근데 휘모리님 글을 한 번 거치면 왜 이렇게 읽고싶어지는 걸까요? 아 그러고 보니 전에도 하나 휘모리님 글보고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책이 있었는데 뭐였더라.... 이놈의 기억력하고는... 이번에는 적어놔야겠어요. ^^

무해한모리군 2009-09-01 14:19   좋아요 0 | URL
이 책이 바람돌이님 마음에도 들까?
그럼 함께 스산함을 나눌 수 있을텐데요~
잊어버린 녀석은 인연이 아닌거죠 뭐 ^^

다락방 2009-09-01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이 너무 좋아서 친구에게 선물했는데 친구도 완전 반해서 읽고 있어요. :)

무해한모리군 2009-09-01 14:2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전 고향내려가는 기차에 이 책을 두고내려서 다시 샀답니다 ㅎ
읽던 중간에 잃어버려서 다시 산 두번째 책이예요.
거미여인의 키스와 이 책..
두 책 다 다시 사서 곁에 두고 몇 구절씩 읊어주고 싶은 녀석들이죠~
벌써 제 독서는 가을에 어울려지고 있어요.

머큐리 2009-09-01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거미여인의 키스...좋아요...^^; 이 책도 좋고...이 책을 소개해 준 사람도 생각나네용..ㅎㅎ

무해한모리군 2009-09-01 19:49   좋아요 0 | URL
각주가 본문만큼 되는 ㅎㅎ
가끔 사랑이 뭘까 하는 생각이 들땐 그 소설이 떠오르곤 합니다.

비로그인 2009-09-02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밀 아자르, 로맹 가리.. 되뇌다 보니 마치 오래된, 한 때 아껴 읽은, 먼지 쌓인채로 어딘가에 있던 책을 본 느낌이네요.

생각난 김에 먼지를 좀 닦아내야겠습니다 !

무해한모리군 2009-09-02 22:05   좋아요 0 | URL
저희집 책들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습니다만!!

꿈꾸는섬 2009-09-04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정말 좋았어요.^^

무해한모리군 2009-09-07 00:56   좋아요 0 | URL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처음 읽었을때 놓쳤던 것들이 더 잘 보였어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