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91 | 92 | 93 | 94 | 95 | 9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거기서 그것과 하나 되시게
틱낫한 지음, 이아무개 (이현주)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를 사는 동안에 내가 살아있음을 느껴본 적이 얼마나 될까? 하고보면 나는 바쁘고 분주한 마음으로만 살아왔지, 한가한 시간이 주어졌을 때조차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감사해본 적이 없었다.번잡한 생각들이 하루 스물네시간 내내 나를 지배하고 있으니 나를 들여다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리라.

어쩌면 그것은 비단 나의 문제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바쁘고, 분주한 마음들을 갖도록 재촉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허나 그것을 모두 우리가 사는 바쁜 현대 사회의 탓으로만 환원시킬 수는 없겠다. 어쨌든 나의 문제는 나의 안에서 해결해야 되는 법이니.

하여 틱낫한 스님은 이 책에서 '마음모음'이란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어느 때, 어느 장소, 어느 사람을 막론하고, '마음모음'은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살게하고, 제 삶을 현존케하는 지표라고 한다.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현재만을 사는 것, 지금 나의 모든 행동과 동작들, 심지어 숨소리 하나까지도 느끼고 집중하는 것을 '마음모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를 위해서는 많은 수행과 명상이 실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틱낫한 스님은 수행과 명상의 실천적 방법들을 안내해주고 있는데, 나름대로 그 방법들 중에 탁월하다고 생각되는 수련법은 설거지, 빨래, 집안 청소를 통한 '마음모음'과 화가 났을때 빙그레 웃는 것들이다. 또한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서 빙그레 웃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라 생각된다. 나도 이러한 수련법들을 내 삶에 적용시켜 보았는데, 그 순간만큼은 나의 현존을 느끼게 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부박한 현실 속에서, 복잡다단한 사회와 총체적으로 연결된 인간군상들의 삶 속에서, '마음모음'을 행하기란 쉽지않은 일이다. 어찌보면 이는 현실을 몸뚱이 하나로 살아내는 민중들에게 사치와 같은 이야기로도 들릴 수도 있겠다. 마찬가지로 나 또한 그런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음은 이 '마음모음'이란게 책 속에서와 같은 개념으로 한정될 수 있는가하는 의구심에서 일터이다.

때론 치이고, 부딪치고, 늦은 밤에서야 집으로 귀가해 또 내일을 걱정하며 시름시름 잠자리에 드는 사람일지라도 내 앞에 주어진 현실을 가난한 마음으로 치열하게 살아내는 모든 씨알들에게 있어 '마음모음'은 이미 넘어선 경지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사랑은 어디 있습니까 - 행동하는 성자 피에르 신부의 분노의 휴머니즘
아베 피에르 지음, 김용채 옮김 / 바다출판사 / 2000년 8월
평점 :
품절


'이미 사태가 치명적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여기서 중립적이라 함은 그 방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위의 구절을 읽고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나는 중립이야'라고 말하곤 하지만 실은 그 중립이라는 것이 주류의 대세에 이미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물론 그러했기에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졌지요.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라는 책의 후유증은 꽤나 오래갔습니다. 근 한달간은 그 책을 손에서 내려놓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성서 다음의 복음, 즉 제2복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책의 감동이 잊혀질 즈음, 이번에는 피에르 신부의 <당신의 사랑은 어디 있습니까>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구와 구교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따르미라는 한울안에 몸담고 있는 분이기에 그의 글은 더욱 살갑게 느껴졌습니다. 반면에 저에겐 더욱 따끔한 충고요, 비판이었습니다.

굳이 80대 20의 사회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미 세계가 양극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구분은 갈수록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고, 그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지금도 온갖 수단을 동원해 '동의의 조작'(Walter Lippmannd의 개념)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진 자의 것을 모두 빼앗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평등의 원리에 입각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일 것입니다. 피에르 신부의 말대로 자본주의의 자유도 사회주의의 평등도 심각한 오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 드러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목표를 택하는 것이 현금의 신자유주의 세계를 타계해나가는 적실한 방법인가라는 물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피에르 신부는 박애, 즉 형제애를 주장합니다. 자유와 평등의 간극을 메우고 참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것은 연대의 틀을 넘어선 형제애라는 개념이라고 말이지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던 예수의 말처럼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과 관용을 전제하며 내포'(p.79)하고 있는 이 말은 피에르신부에게 있어서 '모든 문명이 살아남기 위한 조건'이요, '인류를 하나로 묶는 구원의 개념'(p.135)입니다. 요컨대, '형제애'라는 말이 바로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중심원리가 되는 것이지요.

이와같이 '형제애'를 인류 구원의 개념으로 확고히 하고 있는 피에르 신부는 우리에게 선택을 촉구합니다. '각자는 자신의 입장을 선택해야 합니다. 굴복하든지 아니면 모든 힘을 모아 버티고...'(p.65) 그리고 그러한 선택의 길은 한 마디로 '다른 사람 없이 나만 행복하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기를 원하느냐'(p.80)의 문제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피에르 신부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아니 비장하다고 하는게 더 낫겠습니다. '나누어 갖는다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p.24)!!!

다만 우리가 혼자만 행복한 길을 버리고, 더불어 행복한 길을 가기 해서는 우선 자기 안의 해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한 '사회의 평화는 마음의 평화로부터 솟아나는 것임을 확신'(p.85)하며 나만의 길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피에르 신부의 생각처럼 정의(正義), 비자만(非自滿), 진위(眞衛)가 사랑의 삼위일체를 이룰때 비로소 함께하는 참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말보다도, 사랑을 몸소 익히고, 개별적인 작은 행동들을 더해나'(p.132)감으로써 나로부터, 가정으로부터, 국가로부터, 하여 전 인류에까지 우리의 사랑은 확대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지금 당신은 두 갈래의 길 중에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지의 섬
주제 사라마구 지음, 강주헌 옮김 / 큰나무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쉽다.어렵다.아니 모르겠다...' 채 한 시간도 안되는 짧은시간동안 이 책을 다 읽고 난 저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알듯도 하고, 모를 것도 같고... 이 책을 덮고 나서 과연 저자는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을까라는 궁금증이 밀려 왔지요.

한 사내가 왕을 찾아와 배 한척을 요구하고, 느닷없이 그 남자를 따라나선 청소부 여인과 왕으로부터 얻어낸 배 한척으로 미지의 섬을 찾아 떠나기로 합니다. 아주 짧막하지만 저는 무언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앞에 선 느낌을 받았습니다. 책을 덮는 순간 읽어내려간 한자 한자를 곱씹어 봅니다.

그러나 어떤 명확한 답이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비춰질 수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요. 저도 고민 끝에 이 책에서 저자는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가라는 질문에 나름의 답을 내놓았습니다.

우선 이야기의 중간 중간 현실사회의 모순을 꼬집는 문장들이 있다는 건 누가 읽더라도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그래서 국가관료들과 민중들에 관한 이야기는 차치하겠습니다.

저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하나는 '미지'라고 하는 단어의 사용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찾아가려는 미지의 섬은 어디에 있느냐? 제가 그것을 말씀드릴 수 있다면, 그 섬은 미지의 섬이 아닐 겁니다.'(p.29~30)

무엇에 대해 전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어떤 대상에 '미지'라는 단어를 붙이게 됩니다. 물론 그 대상은 왕이나 다른 선원들의 태도처럼 존재하지 않는 무엇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미지'라고 하는 단어는 어떤 꿈이나 희망을 담을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둡니다. 예컨대, 로또복권을 한 장 사서 당첨자 발표가 나기전까지는(미지의 상태) 제법 큰 희망같은 것을 품게 됩니다.

하지만 당첨번호가 발표되고 난 후에는(인지의 상태)그동안 품어왔던 희망같은 것들은 없어지게 되지요. 이와같이 '미지'는 꿈과 희망을 담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어떤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여 저자가 '미지'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희망을 담는 그릇'같은 용도였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다른하나는 '섬'이라고 하는 단어의 사용입니다. 이 '섬'이라고 하는 말은 말그대로 현상적인 '섬'의 개념이 아니라 어떠한 대상 일반의 통칭으로 쓰인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에서 '미지의 섬'이라고 하는 것은 '미지의 무엇'입니다. 궁극적으로 저자가 '섬'을 이야기의 제재로 사용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기 때문에 조금은 크게볼 수도 있다는 관점에서지요. 그러나 '섬'을 현상적으로 본다면 그 공간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볼만합니다.

'섬'은 외따로 떨어진 곳입니다. 바다의 한 가운데 육지와는 고립된, 하지만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알려지지 않은 생명체들이 존재하는 그런 곳입니다.
하지만'섬'의 대부분은 인간에 의해 점령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애당초 지닌 '섬'이라고 하는 신비적인 이미지가 퇴색되었지요.
무튼 제가 이해하기로 '섬'이라고 하는 단어는 어떠한 대상, 목표물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된 제재인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미지'라고 하는 단어와 '섬'이라고 하는 단어를 조합해보면 '가능태로서의 목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상이, 즉 목표가 무엇이건 간에 그것에 희망을 부여하는 일.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자신의 희망을 찾아가는 항해, 사내가 청소부 여인이라는 미지의 섬을 발견한 것처럼, 어찌보면 그 목표는 희망의 바로 곁에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지의 섬'을 찾아나서는 용기, 절망이 아닌 희망을 고집하는 삶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 운명이 거의 언제나 그런 식이다. 운명은 항상 우리 바로 뒤를 따라다닌다. 우리가 혼잣말로 이제 끝났어, 이제 끝장이라구, 알게 뭐야!라고 투덜댈 때, 운명은 우리 어깨를 다독거리려 이미 손을 내밀고 있'(p.38~39)기 때문이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대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시 2
강은교 외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누군가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진 이 있는가 미치도록 붙잡고 싶은 사랑이었으나 붙잡을 수 없었던 사랑이었는가 헤어졌음에도 여전한 사랑이 남아있는가 자신의 마음 하나 굳게 믿으며 오직 단 한 사람을 기다리면서 살겠다 맹세한 이가 있는가

그런 사람들, 사랑을 잃고 그 아픔에 겨워하며 허우적 거리는 사람들 있다면 난 이 한권의 시집을 권하고 싶다. 일회용, 인스턴트식 사랑이 아니라 영원을 꿈꿀만큼 깊고 가슴저린 사랑을 믿고 있는 자들에게 이 시집을 권하고 싶은 것이다.

한때 난 많은 시인의 사랑노래를 마뜩찮아 했다. 너무도 흔한 '사랑'이란 말 또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허나 이제서야 난 왜 그토록 수많은 시인들이 사랑에 대하여 노래했는지 알 수 있을 듯 하다.

그래. 사랑은 분명 크다. 아프다. 우리네 인생에서 그것만큼 실존적인 단어는 없다. 그것으로 인해 삶은 꽤나 의미있는 것으로, 또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시집의 서두-사랑에 우는 당신에게-에서처럼 '누군가가 그리워도 울지 말고 견디라고, 그것이 인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눈물이 나면 울어야'한다. 너무 아프다면 울자. 울어버리자. 사랑이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면, 그리하여 견딜 수 없이 삶이 괴롭고, 어려워진다면 눈물을 쏟아내자.

이 시집에 실려있는 주옥같은 사랑시 중에서도 특별히 안도현 시인의 [목련], 고정희 시인의[그대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기형도 시인의 [빈집] 이 세 편의 시가 나의 마음을 울린다.

'징하다, 목련 만개한 것 바라보는 일

이 세상에 와서 여자들과 나눈 사랑이라는 것 중에
두근거리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었으니

두 눈이 퉁퉁 부은
애인은 울지 말아라

절반쯤만, 우리 가진 것 절반쯤만 열어놓고
우리는 여기 머무를 일이다

흐득흐득 세월은 가는 것이니'

안도현 시인의 [목련]이라는 이 시에서, '징하다'라는 한 마디 시구 앞에서 이미 코 끝이 찡해지는 것은 왜일까? 4연에서처럼 '절반쯤만'열어놓고 '여기 머무를'수 없음을 잘 알기에, 그 사람이 나에겐 '가진 것'전부였기에 가슴이 저미어온다. 그저 '흐득흐득 세월'가겠지...

고정희 시인의 [그대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라는 시는 1연과 4연은 2연과 3연없이 이어놓아본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바쁜 하루 중에도 사소한 말중에, 잡다한 일 속에서 불현듯 그 사람이 생각날때, 정말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를 때, 그 때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저 그리움에 운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뿐아니라 길을 가다가도, TV를 보다가도 '불쑥불쑥' 그 사람이 찾아올 때면, 그리움에 젖어 운다. 그래 어쩌면 내내 그렇게 그대가 그리우면 울지 모르겠다.

김현 선생이 '아무도 이 불온문서를 보지 말아라'했다지. 기형도 시인의 [빈집]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사랑에 눈이 멀어 잠궈버린 마음 이제 더 이상 주인없는 '빈집'에 갇혀버린 '가엾은 내 사랑'... '더듬거리며' 애써 가둬놓은 사랑이라 이제 그 사랑이 갈 곳 없구나. 하지만 빈집에 가두고픈 절절한 사랑이 가엾게도, 또는 행복하게도 보인다.

이외에도 이 시집에 실린 다른 시들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수없이 눈물 지었다. 하여 '아무나' 이 불온문서를 보지 말아라, 오직 사랑을 잃고 힘에 겨워하는 이들에게만 권한다.
가슴아파 눈물 짓고 두 눈 퉁퉁 부었어도 더 큰 사랑을 꿈꾸는 이들아 다른사람들의 사랑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리고 잊지못할 사랑이라면 그리워하면서 울기도 하면서 여기에 머무르자. 사랑하나 빈집에 가둬놓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인사를 거닐다
이윤기 외 지음 / 옹기장이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가끔씩 정처없이 삶이 외로워지고, 무미건조해질때면 좋은 글 한편이 참 그리워집니다. 저도 모르는새 팍팍해진 마음을 더듬고, 보듬어주는 그런 글 하나 말입니다. 요며칠 그래서인지 인터넷 서점을 구경하다 좋은 수필 한편 그리워 눈에 띄는 책 한권 주문목록에 더했습니다. 해인사를 거닐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이 책의 미덕은 세가지 정도로 살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첫째, 좋은 글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무려 스물두분의 글을 앞뒤 순서의 특별한 배열없이 묶어놓았지만, 글 한편 한편이 책 한권 안에 잘 스며들어 일관된 분위기와 목소리가 각 저자의 개성과 다양성을 함몰시키지 않고 아우르는 느낌입니다. 물론 '월간해인'이라는 간행지에 게재되었던 글이라는 공통분모가 전체적인 글의 분위기와 성향을 비슷하게 구축하겠지만 무엇보다 저자 개개인의 글쓰기가 지니고 있는 장점들은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소박한 가슴으로 만나는...산문'이란 말이 적실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우리네 일상 속에서 무심코 스쳐지나가기 쉬운 아주 작은 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그 속에서의 깨달음, 환상이나 공상이 아닌 삶의 자리에서 진솔하게 묻어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시선이 평상심을 견지한 담담한 필치로 그려져나가는 글쓰기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게 바로 좋은 글이라 하는구나!'감탄하게 됩니다. 하여 읽혀지는 글이 아닌 느껴지는 글의 경지에 '캬~'하며 찬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좋은 생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날이 더해갈수록 치열해지고, 각박해지는 세상 속에서, 또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말하는 것이 민망스러울만큼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스물네편의 산문을 통해서 과연 참 삶이 무엇인지, 진정 사람됨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할 것을 요청합니다. '불립문자', 즉 궁극진리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음으로 희망을 안고 사시는 이윤기 님,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한발 두발 길을 밟고 밟으면서 동시에 버리는 것이지요'(p.24)라며 버림과 비움을 통한 깨달음을 이야기하신 이현주 님, '콩 한 쪽도 나누면 큰 나눔입니다.'(p.42)라고 아주 당연한 말씀을 다시한번 새겨주신 이철수 님, 빗나간 사랑이라도 사랑하라고 말하시던 윤구병 님, 당산나무를 통해 참 자유로서의 믿음과 종교를 말씀하신 권정생 님, 이외에도 다른 님들의 글 속에서도 마찬가지 일상의 깨달음들이 나태해졌던 나의 삶에 죽비되어 내리칩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삶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와 둘째의 미덕 모두 이것으로 포괄될 수도 있겠습니다. 비록 '어찌 글 한편을 통해 그 사람을 알고, 그 삶을 가늠할 수 있겠는가?'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몇자 되지않는 글을 통해서 풍겨나오는 내음은 그 삶을 짐작케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은 것들에서도 큰 깨달음을 얻고, 내내 반추하시는 그들의 삶은 좋은 글쓰기와 좋은 생각을 넘어서 좋은 삶으로 귀결될 수 있겠습니다. 바라기는 저 또한 자그마한 일상사에도 내내 눈부릅뜨고, 귀 기울이고, 정신바짝 차려서 매양매듭 나의 손과 발, 나의 온 몸뚱이를 맘대로 함부로 굴리지 말았으면 합니다. 또한 '소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많은 사람들, 세상 만물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물론 이 책의 단점도 있습니다. 한분 한분 만나다보면 무려 스물두분의 글을 만나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한분의 글을 읽을 때보다는 독서의 흐름(감정의 맥이라고 할까요?)이 끊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모쪼록 하룻밤내 다 읽기보다는 며칠을 두고 글 하나 하나 마음 열어놓고 만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91 | 92 | 93 | 94 | 95 | 9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