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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사랑은 어디 있습니까 - 행동하는 성자 피에르 신부의 분노의 휴머니즘
아베 피에르 지음, 김용채 옮김 / 바다출판사 / 2000년 8월
평점 :
품절
'이미 사태가 치명적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여기서 중립적이라 함은 그 방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위의 구절을 읽고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나는 중립이야'라고 말하곤 하지만 실은 그 중립이라는 것이 주류의 대세에 이미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물론 그러했기에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졌지요.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라는 책의 후유증은 꽤나 오래갔습니다. 근 한달간은 그 책을 손에서 내려놓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성서 다음의 복음, 즉 제2복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책의 감동이 잊혀질 즈음, 이번에는 피에르 신부의 <당신의 사랑은 어디 있습니까>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구와 구교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따르미라는 한울안에 몸담고 있는 분이기에 그의 글은 더욱 살갑게 느껴졌습니다. 반면에 저에겐 더욱 따끔한 충고요, 비판이었습니다.
굳이 80대 20의 사회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미 세계가 양극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구분은 갈수록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고, 그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지금도 온갖 수단을 동원해 '동의의 조작'(Walter Lippmannd의 개념)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진 자의 것을 모두 빼앗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평등의 원리에 입각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일 것입니다. 피에르 신부의 말대로 자본주의의 자유도 사회주의의 평등도 심각한 오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 드러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목표를 택하는 것이 현금의 신자유주의 세계를 타계해나가는 적실한 방법인가라는 물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피에르 신부는 박애, 즉 형제애를 주장합니다. 자유와 평등의 간극을 메우고 참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것은 연대의 틀을 넘어선 형제애라는 개념이라고 말이지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던 예수의 말처럼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과 관용을 전제하며 내포'(p.79)하고 있는 이 말은 피에르신부에게 있어서 '모든 문명이 살아남기 위한 조건'이요, '인류를 하나로 묶는 구원의 개념'(p.135)입니다. 요컨대, '형제애'라는 말이 바로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중심원리가 되는 것이지요.
이와같이 '형제애'를 인류 구원의 개념으로 확고히 하고 있는 피에르 신부는 우리에게 선택을 촉구합니다. '각자는 자신의 입장을 선택해야 합니다. 굴복하든지 아니면 모든 힘을 모아 버티고...'(p.65) 그리고 그러한 선택의 길은 한 마디로 '다른 사람 없이 나만 행복하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기를 원하느냐'(p.80)의 문제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피에르 신부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아니 비장하다고 하는게 더 낫겠습니다. '나누어 갖는다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p.24)!!!
다만 우리가 혼자만 행복한 길을 버리고, 더불어 행복한 길을 가기 해서는 우선 자기 안의 해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한 '사회의 평화는 마음의 평화로부터 솟아나는 것임을 확신'(p.85)하며 나만의 길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피에르 신부의 생각처럼 정의(正義), 비자만(非自滿), 진위(眞衛)가 사랑의 삼위일체를 이룰때 비로소 함께하는 참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말보다도, 사랑을 몸소 익히고, 개별적인 작은 행동들을 더해나'(p.132)감으로써 나로부터, 가정으로부터, 국가로부터, 하여 전 인류에까지 우리의 사랑은 확대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지금 당신은 두 갈래의 길 중에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