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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연애편지 ㅣ 편지 쓰는 작가들의 모임 서간집 시리즈
김다은 엮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편지'의 형식을 빌린 서간문학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이미 소개된 많은 책들이 서간문의 형식을 빌고 있고, 그러한 글들을 마주하며 익숙해진 터였다. 그러나 그것들 대부분이 '광장'으로 나올만한 것들이었고, 그만큼 공개적일 수 있었던데에는 무엇보다 교훈성과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용상 이념성이 드러나는 일단의 '편지'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들 대부분이 공개되었다.) 한편 인간의 가장 사적인 영역이라고 부르는 '사랑'을 매개로한 '편지'가 우리에게 읽혀지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던 듯 싶다.
우리시대의 문인들이 자신의 내면 깊은 곳, 그 낡은 서랍 속에 간직해두었던 '편지'들을 우리 앞에 내어놓았다. 그것은 허투루 방기할 수 없는 흔적이었고, 부둥켜 안아 살아가기엔 너무나 버거운 상처였으리라. 어느 누군가는 그 누군가를 떠올리며 다시금 회한의 쓴웃음을, 혹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으리라. 추억의 어느 길 모퉁이에서 만지작 거리던 사랑의 편린들은 이제 '내 것이 아닌 열망'(기형도)이리라. 그 잡을 수 없는 것들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나르던 한 줌, 한 줌의 '편지'들은 잡을 수 없음을 기리는 '추모'이리라. 그 '추모' 속에서 작가들은 단심과 하여를 노래하고, 사랑의 길에서 우리는 급기야 그들의 방황을 목격하게된다.
수신자이거나 수신자'들'에게 보내는 그들의 편지에는 각기 다른 방황의 내용이 펼쳐진다. 그들이 부르는 사랑이란 예의 한 대상이 한 대상과 나누는 그것이 아닌 까닭이다. 오히려 사랑은 마르틴 부버의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는 말처럼 그들의 의식이 머무는 자리에 존재하는 만남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통적이고 한결같은 대상이란 있을 수 없고, 여성이거나 남성이거나 어느 한 대상으로 귀착될 수 없다. 정해종 시인의 편지가 참 흥미롭다. 그는 그의 '당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혹시 당신은 소위 명품으로 분류되는 물건들을 한두 개쯤 소유하고 있지 않은가요? 기능에 문제가 없는 물건들을 갈아치우거나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사들이는 데 돈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요? 너무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거나, 너무 많은 음식물들을 섭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나요?"(176쪽)
'당신'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애정을 담고 있다는 차원에서 연애편지에 다름 아니다. 그의 물음은 사랑하는 그 '모-오-든' 사람들의, '사랑하며, 나누는 삶을 향한' 연정의 메시지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읽는 이로 하여금 맑은 공명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또한 이 책의 전편에서 단연 나를 사로잡은 글이 있다면 다시 사랑의 메모장을 연 김훈의 편지이다. 그는 '기어이 사랑이라 부르는 기억들'을 걷어올리고 있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205쪽)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편지쓰듯 지난 날의 사랑을 되새김질하며, 자신이 사랑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진지한 탐색을 보여준다. 그에게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며, '참혹한 결핍'이다. 사랑은 잇닿을 수 없어서 사랑이다. 그리고 그 아득한 거리는 기억 속에 여전히 '사랑'이라는 메모로 남는다. 나는 김훈의 이 편지를 곡릉천을 건너는 버스 안에서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가슴 뼛 속까지 저려오는 사랑의 정체를 씹고, 또 씹었다. 뿐만 아니라 27인의 편지 도처에서 꿈틀거리는 명문을 만날 때마다 그 소름끼침은 감동과 슬픔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들 개개의 사랑에는 속절없는 것이 없었다. 그 속절없음이 '앓음'다웠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아름다웠다. 그 사랑의 아름다움은 나에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앓음다워라'"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작가의 연애편지를 통해 새로운 문학장르의 가능성을 발견한 엮은이의 수고로움 또한 쨍하다. 이 한 권의 책이 작지만 소중한 초석이 되리라 믿는다. 또한 '작가들의 연애편지'를 통해 사랑에 관한 깊은 사유를 선물받은 나는, 아마도 작가의 연애편지가 문학장르로서 자리매김할 때까지 열렬한 지지자가 될 것이다.
작가들의 연애편지를 읽고 찬찬히 눈을 감고 곱씹는다. '사랑 안에서 길을 잃어라' ...... 루미의 말이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