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풀 한 포기 다치지 않기를
클로드 안쉰 토마스 지음, 황학구 옮김 / 정신세계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전쟁과 살인, 폭력으로 점철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평화’를 갈구해왔다. 물론 ‘평화’에 대한 이해는 저마다 달랐지만 사람들은 한결같이 전쟁이나, 살인, 폭력의 문제들로부터 인류가 자유롭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평화는 현실 정치 안에서 소외당하기 일쑤였고,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현실적으로’ 적당히 타협되고는 하였다. 물론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들 또한 평화를 인간의 내부에서 찾기 보다는 외부적인 상황 속에서 찾으려는데 몰두하였고, 때문에 평화의 문제는 인간 하나 하나가 책임져야할 공동의 문제로 인식되기 보다는 정부나 국가와 같은 외부적 구조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정부나 국가는 인민의 기대만큼 평화에 봉사하지 못하였으며, 역사는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문제는 무엇일까? 평화에 이르기가 이토록 지난한 까닭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모르던 열여덟의 나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보내진 한 청년은 이제 한 선승(禪僧)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클로드 안쉰 토머스. 그는 자신의 추체험을 통해 폭력의 뿌리가 어디에 있으며, 평화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베트남에서 보낸 1년간의 처참한 전투, 생사의 기로 속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총을 쏘아댔던 그에게 남은 것은 27개의 빛바랜 훈장과 사람들의 냉대, 그리고 귓전을 떠나지 않는 총성과 비명  뿐이었다. 그는 하릴없이 술과 섹스, 마약에 의지하며 폭력이 낳은 사생아로 전락한다. 하지만 플럼 빌리지에서 틱낫한 스님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폭력의 상처로부터 치유하고, 구원한 일대 전환점이었다. 선승으로 재가하여 세계 각지를 떠돌며 평화 순례의 장도에 오르기까지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폭력의 뿌리를 제거하고, 평화를 찾기 위한 내적 순례를 계속한다. 이처럼 험난한 인생 여정 속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폭력의 뿌리가 외부에 있지 않고, 우리 내면에 있으며, 평화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나의 내면으로부터 성취되어야만 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말한다.

   
 

전쟁에 대한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전쟁은 우리 바깥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전쟁은 우리 마음의 연장선이고, 전쟁의 뿌리는 우리의 본성 속에 있다. 전쟁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64쪽) 

 때문에 그는 모든 인간의 내면 안에 베트남이 존재하며,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베트남, 즉 폭력성으로부터 깨어나지 않는다면 진정한 평화는 도래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내적 순례의 여정을 계속해야한다. 따라서 걷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일을 할 때에도 명상의 끈을 놓쳐서는 아니 된다. 오직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내면을 치유하고, 자신의 삶을 옹글게 살아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옹근 삶이 될 때에 비로소 우리 자신은 ‘평화’가 될 수 있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니까 평화는 결국 바깥으로부터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참 평화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깥세상을 평화롭게 만들 수 없다. 우리 자신이 평화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상처와 슬픔과 고통이 있다. 우리는 기꺼이 그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책임이 있고 이 악순환에 일조하는지를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고통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폭력과 연결되는지, 또 끝이 없어 보이는 공격성의 악순환을 어떻게 멈출 수 있는 지를 깨달을 수 있다.

 
  (167쪽)

 ‘나로부터의 변화’, 그것 없이 평화가 도래하리라는 기대는 부질없다. 내가 평화롭지 않고서 세상이 평화롭길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온갖 폭력의 흔적들과 화해하게 될 때, 비로소 평화는 가능하다.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에 우선하여 나의 내면을 응시하기 시작할 때, 폭력의 악순환이 그치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어있다는 영적 수행의 핵심대로,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한다. 내가 평화하면 세상도 평화롭게 된다. 전쟁과 살인과 폭력의 세상 속에서 ‘평화’에 목마른 이들에게 토머스 스님의 이 글은 아마도 빼어난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의 전언대로 평화를 찾지 말고, 평화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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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03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평화'를 동사형으로 쓰신 점, 무척 인상적입니다.
좋은 글 추천합니다.^^

바람결 2007-08-03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반갑습니다. 잘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평화', 만약 추상명사라면 평화로운 세상이 오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여하간 무리일 수밖에 없겠죠. 결국은 우리가 살아내야할 '동사'겠지요. 그게 맞겠지요...
 

8월 2일

하루는 모세가 광야에서 겸손한 늙은 목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침 알라께 은밀한 말씀을 드리는 중이었다. 목자의 어조는 매우 평안했고 친절했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알라를 도와드리고 싶은지, 그분 몸에서 이를 잡아드리거나 그분 옷을 빨아드리거나 그분 손발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다음 말로 기도를 끝냈다.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아아아아!'(Ahhhhh) 한 마디뿐입니다."

 모세가 질겁하여 소리 질렀다. "그대는 지금 그대의 늙은 숙부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거요?"

 목자는 매우 쑥스러워하며 알라께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겠는지, 모세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광야를 슬프게 떠돌기 시작했을 때 모세에게 거룩한 음성이 들려왔는데, 그를 꾸짖는 음성이었다.

 "모세야, 너에게는 잘못으로 보이는 것이 그에게는 옳은 것이다. 이 사람의 독(毒)이 저 사람의 꿀이다. 깨끗함과 더러움, 게으름과 부지런함, 그것이 다 내게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그것들 너머에 있다. 예배하는 방식에는, 더 좋고 더 나쁜 것이 없다. 모두가 좋고 모두가 옳다. 예배 행위로 빛나게 되는 것은 예배하는 자다. 내가 아니다. 나는 예배하는 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겸손함을 들여다본다. 그 낮고 열려 있는 비어 있음(low and open emptiness)만이 실재(實在)다. 말을 잊어라. 나는 다만 불타오르는 것을 원한다. 불타올라라! 이 불에 친구가 되어라. 너의 장엄한 생각들과 특별한 언어들을 모두 불태워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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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02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분(God)께서 원하시는 것은 미사여구가 아니다. 다만 '낮고 열려 있는 비어있음'을 원하신다. 장엄함, 특별함 모두 집어치워라! 오직 겸손하라.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긍정의 힘 - 믿는 대로 된다
조엘 오스틴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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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라는 종교적 정체 속에 몸담아 온 나는, 좀 유별나게도 소위 ‘신앙서적’에 대한 일종의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건 아마도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대한 종교적 속박에서 기인하는 거부감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종교적 속박’이란 ‘오직 성서대로’, 혹은 ‘오직 믿음으로만’과 같은 수사들에서 나타나는 ‘오직’이란 단어의 일의성, 배타성이 선사하는 구속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걸핏하면 하나님의 축복 운운하는 작태는 심기불편의 또 다른 이유였다.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전면에 내세운 채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 기독교’에 대한 모종의 배타를 제 나름으로 표출하곤 했다. 아마 그러한 방식 중 하나가 ‘신앙 서적’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 태도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얼마 전 잘 알고 지내던 한 교우의 선물로 받은 이 ‘신앙 서적’을 들게 된 것은 의무감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랜 기간 기독교 서적의 베스트셀러로 널리 알려진 이 책에 대한 궁금 또한 시독(始讀)의 이유였던 게 사실이다. 조심스럽게 펼쳐든 책 속에는 아니나 다를까 내가 염려하던 부분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믿는대로 된다’던 표제처럼 책의 전편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믿는다면 복을 받는다’라는 지극히 단순한 명제가 관통하고 있었고, 그러한 명제의 논리는 저자인 조엘 오스틴 목사의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유출된 것이었고, 여기에서 말하는 ‘복’이란 ‘성공’의 다른 말로, 즉 돈을 많이 벌어 출세한다는 뜻의 다름 아니었다. 

 왜 꼭 기독교에서는 ‘복’을 받아야한다고 말할까? 물론 복 받은 삶은 좋다. 하지만 복받은 삶이란 것이 ‘돈을 많이 버는 것’과 동의어일 수 있는가? 일례로 예수는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부자로서 사는 것’이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임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하였는데 왜 그렇게들 부자가 되라고들 하는가? 오히려 복된 삶이란 이 땅에서 사람답고, 따뜻하고, 아름답게 사는 삶을 말하는 것 아닐까? 경제적으로 부요하지 않더라도 사람과 사람이,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복된 삶은 아닐까?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 복을 받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이미 복받은 삶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긍정적인 시각, 긍정적인 말,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믿음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꼭 성공을 위한 것일 수는 없다. 이미 그러한 삶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인 것이다. 때문에 복은 다른데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의 현실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감춰진 보물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끊임없이 더 (경제적으로)부요하고, 풍성한 삶을 동경한다. 따라서 믿음은 철저히 복 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진다는 혐의를 지니게 된다. 일례로, “하나님의 복, 예컨대 승진과 놀라운 성장을 기대하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가 찾아온다”(17쪽)는 식의 주장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반증한다. 

 마지막으로 책의 근본 질문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을 부정하길 원치 않는다. 오히려 모든 이들이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긍정에의 희망’이 거세당한 사람들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이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체제 속에서, 현실의 상황 속에서 긍정을 꿈꿀 수 없는 곳으로 내몰린 이들이다. 이러한 구조적 현실은 역시나 고려의 대상이 되질 않는다. 다만 저자는 ‘믿으면 된다’라는 식의 선동적 수사를 남발 할 뿐이다. 이것은 마치 ‘하면 된다’라는 70년대식 구호를 연상시킨다. ‘믿을 수도’, ‘할 수도’없는 상황과 구조에 놓인 이들의 절망은 (간접적으로) 더욱 무시되거나 강화될 뿐이다. 이로써 인간의 이성과 자유는 믿음과 축복의 뒤안으로 내쫓긴다. 그냥 믿어라. 그러면 된다!

 책을 내려놓으며 느끼는 참담함은 이러한 서적들이 기독교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라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많은 교회들이 여전히 이와 같은 가치관 속에서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서글프다.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미명 하에 기술되는 뻔한(?) 말들 속에서 나는 난감할 뿐이다. 이 난감함은 지금 처치곤란이다. TV를 켠다. 수일 째 투쟁하고 있는 이랜드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모습이 암담하다. 하나님께 축복받아 성장했다던 박성수 사장의 간증이 오버랩 된다. 축복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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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재 서포터즈 1기"라는 중책을 안고, 서재 이곳 저곳을 둘러본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글을 쓰고 있지만 그 진정성에는 의문이 남는다.

나도 그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마음은 참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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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저로 하여금 저 자신을 그만 보고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제가 저에게 가까운 것보다

당신이 저에게 더욱 가깝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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