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읽고 있는 <풍경소리>라는 글묶음집에 '세기의 기도'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그 속에는 달마다 몇몇 '世紀의 인물'들의 기도를 모아 놓고 있지요. 볼 때마다 탄성과 기도가 함께 터져나오곤 하는데 혼자서만 알고 느끼기엔 아까운 마음이 들어 여기에 올려봅니다.

근자에 출간된 이현주 목사님의 책, <세기의 기도>에 모두 실려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어쨌거나 위대한 기도들을 발굴(?)해내고, 많은 이들이 더불어 은혜를 나누도록 애쓰신 이현주 목사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8-04-15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결님 봄날 잘 지내고 계시겠지요? ^^
이현주 목사의 책은 어린이책으로만 만나봤어요.
책 표지부터 마음에 듭니다.

바람결 2008-04-15 22:53   좋아요 0 | URL
혜경님, 저는 잘 지내고 있지요.^^
혜경님도 평안하신지요?
저는 공교롭게도 이제껏 이현주 목사님의
동화책을 읽어보지 못했답니다;;
혜경님께서 한권 추천해주세요ㅎㅎ
 
기독교 초기 수도원 운동사
남성현 지음 / 엠애드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 들어가는 말

 

 지난해 한국교회에서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100주년을 즈음하여 각성과 갱신, 그리고 부흥의 재가(再加)를 외치는 소리들로 들끓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는 그간의 한국 기독교(회)가 걸어왔던 길을 발본적으로 성찰하고, 반성하여 ‘새술’을 담아낼 ‘새부대’로 거듭나려는 시도와 모색이 감지되지 않았고, 때문에 각성과 갱신, 부흥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오히려 한국 교회는 참된 각성을 통한 영적 성숙을 고려하기 보다는 양적 부흥을 위한 ‘자폐증적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일단의 신학자들은 (당시의 혼탁한 대선 정국 속에서 대형 교회와 그 목회자들이 주도한 소위 ‘뉴라이트 운동’과 결부하여) “한국교회가 성장과 성공의 신화에 매달려 크고 화려하고 풍요로운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면서 물신주의에 빠져 세상에 대하여 대안적 가치를 제시하고 추구해야 할 사명을 저버렸다”(길희성)고 성토하였다. 또한 그러한 문제의 원인은 다름 아닌 ‘기독교 영성의 기반’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의 기반이 부재하게 된 작금의 현실을 타개하고, 새 천년을 맞이한 (한국) 기독교가 걸어가야 할 ‘새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 길을 오랜 전거로부터 찾을 수 있다. 바로 기독교 초기 수도원 운동인 ‘수도주의’를 통해서 말이다.

 

■ 몸 말

 

  본 책, 『기독교 초기 수도원 운동사』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영성이란(......) 간단히 ‘예수를 따르는 삶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_36쪽) 그러므로 영성적 삶이란 결국 ‘예수를 모방하는 삶’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이상’(完德)에 도달코자 했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사막의 수도자들이다.

  특별히 이 책은 사막의 수도자들 중에서도 파코미우스(290-346)와 바실리우스(329-378)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 둘의 삶은 분명 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고 있다. 태생이나 성장배경, 활동무대, 그리고 삶의 방식과 성격까지도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가령, “파코미우스는 관용의 미덕을 알고 있었던 자인 반면, 바실리우스는 엄격한 지성적 태도로부터 출발했다. 동료 수도자들이나 제자들에 대한 관용의 정신은 테바이드의 공주 수도원을 대규모의 수도원 조직으로 확장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반면 바실리우스의 문자적 엄격성은 수도원 확장이나 양적 성장에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는 영적 순수함을 보여준다.”(_191쪽) 이러한 차이에서일까? 파코미우스의 공동체 규칙의 성격은 육체에 대해 비교적 완화된 형태의 금욕을 보여주는 반면, 바실리우스의 수도서에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내적인 덕목은 절제”(_158쪽)라는 표현과 더불어 육체성에 대한 부정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둘을 대조하거나 그 차이를 부각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오히려 책은 두 명의 위대한 수도자, 파코미우스와 바실리우스의 삶과 기독교적 이상을 통하여 옹골찬 영성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성의 길은 그들 모두 이른바 공주수도주의, 즉 공동생활을 통해 치열한 수덕(修德)으로 일관하였다는 사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채택하였던 데에는 “공동생활이야말로 인간을 그리스도의 완전으로 이끌어 줄 최선의 삶의 형식”(192)이라고 보았던 이상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물론 각자가 공주수도를 추구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분명한 것은 그 공동생활의 요체가 성서적 원리에 입각하였다는 점이었다.

  완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은 그들을 사로잡았고, 그리하여 무소유한 가운데 하나님께로 집중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였다. 이 원리를 고수하는 가운데 그들은 물질적인 속세의 염려들로부터 해방된 삶을 살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독수(獨修)의 길보다는 공동체, 곧 작은 교회를 이루어 다양한 규칙들을 마련한 가운데 ‘여럿이 함께’ 걷는 영적 여정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바코미우스와 바실리우스, 두 영적 스승들이 걸어온 발자취는 분명 성서로부터 출원한 것이었고, 철저한 영적 훈련의 세월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다소 엄격하고 철학적이었으며, 탈속(脫俗)적이었던 바실리우스의 공주수도나, 사막의 혹독함을 극복하고 현실의 삶 속에서 복음을 실현하여 하나님을 체험하고자 했던 파코미우스의 그것이나 결국은 다르나 같은, ‘순수한 복음적 시도’의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나가는 말 

 

 

  결국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영성 고갈 문제는 과거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걸었던 수도자들의 각고를 간과하고 망각하였던 데서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소중한 영적 유산들을 물려받고 당대의 현실 속에서 그 정신을 구현코자 애쓰고 노력하였다면 지금의 한국 기독교(와 교회)의 영성적 기반은 제법 온당한 꼴을 갖추게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오랜 영적 전통들과 단절하고, 영성적 기반을 망실한 채 외적․양적 성장에만 골몰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참으로 가련하다. 
  그러한 차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한 파코미우스와 바실리우스, 이 두 영적 스승들의 삶과 사상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걸었던 그들의 삶 자체가 주는 메시지, 그리고 성서적 원리에 입각하여 청빈과 절제, 나눔을 공동생활 속에서 실천하였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삶의 자세와 법식은 타성에 젖은 개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질타이자, 외피에 마음을 빼앗긴 한국교회를 향한 준엄한 꾸짖음으로 들린다. 
  이처럼 우리 그리고 현금의 한국교회는 초기 기독교의 ‘수도주의’, 그 중에서도 특별히 ‘공주수도주의’를 통해 참된 신앙적 이상과 실천의 길을 배울 수 있다. 그 길은 비록 오래지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성의 기반을 마련토록 인도할 것임에 틀림없다. 바코미우스와 바실리우스의 공주수도의 삶은 ‘예수를 따르는 삶의 방법’(영성)이 과연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정표이자, ‘오래된 새길’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구판절판


사랑을 한다는 것은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산 사람의 몫이니까.-46쪽

"힘이 들 때면 오늘만 생각해. 지금 이 순간만. ......있잖아. 그런 말 아니? 마귀의 달력에는 어제와 내일만 있고 하느님의 달력에는 오늘만 있다는 거?"-49쪽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그건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거야."-51쪽

"쉽게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구. 그건 미움보다 더 나빠. 진실이 스스로를 드러낼 시간을 자꾸만 뒤로 미루어서 우리에게 진정한 용서를 빼앗아갈 수 있으니까."-57쪽

"어떤 부모든 최선을 다해. 하지만 자식에게 상처를 줘. 그건 어쩌면 인간의 운명 같은 걸 거야. 그래서 그 많은 심리학자들이 어린 시절을 연구하는 거고."-82쪽

"어떤 순간에도 너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돼. 너도 모자라고 엄마도 모자라고 아빠도 모자라......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자람 때문에 누구를 멸시하거나 미워할 권리는 없어. 괜찮은 거야. 그담에 또 잘하면 되는 거야. 잘못하면 또 고치면 되는 거야. 그담에 잘못하면 또 고치고, 고치려고 노력하고......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가 있는 거야."-85쪽

그래, 상처와 치유가 별개냐? 내가 내가 아닐 때, 그것은 상처이고 내가 다시 나를 찾을 때, 누구에게도 먼저 내 잘못이 아니라구요, 변명하지 않을 때 그게 바로 치유가 아니겠냐고......-128쪽

내 슬픔 하나를 두고, 그것에 정신이 팔려, 그것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 채로 우리는 또 얼마나 남의 상처를 헤집는 것일까.-177-178쪽

자극과 반응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우리의 성장과 행복은 그 반응에 달려 있다. 그래서 영어의 responsible이라는 것은 response-able이라는 거야. 우리는 반응하기 전에 잠깐 숨을 한번 들이쉬고 천천히 생각해야 해. 이 일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지만, 나는 이 일에 내 의지대로 반응할 자유가 있다,고.-179쪽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렵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작가의 말 중에서-34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 해 말, 지인으로부터 극찬의 소개를 받고 우연찮은 기회로 봤던 영화 '원스'는 올해도 여전히 내 귀와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나는 무시로 '원스'의 음악을 듣는가 하면 마음 슴슴할 때 곧잘 CD에 담아둔 영화를 재생시키곤 한다. 그러던 차에 상암 CGV에서 재상영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지난 저녁 극장을 찾았다.

거두절미하고 '원스'의 매력은 시놉시스의 치밀한 구성과 배우의 연기력을 바탕으로 한 질 높은, 혹은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영화들의 일반 문법을 초월해버린다는데 있다. 오히려 '원스'의 경우는 전혀 치밀할 것없는 영화 구성과, 연기라고 분류하기엔 어색하기 그지 없는 배우들의 연기보다는 그 이면의 정서에서 관객들과 크게 소통하고 있는 보인다. 그것은 바로 백 마디의 대사보다 한 줄 가사가, 한 줄 가사에 붙는 리듬과 짐짓 혼 서린 그 음색이 어느새 관객을 사로잡고, 노래로 그네들의 마음을 읽어내며 위무하는데서 '원스'의 힘은 바탕한다는 사실이다. 어느 시인의 시집 끝자락에 덧댄 한 평론가의 한 줄 글귀처럼 노래란 무릇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경험한자 만이 이해할 수 있으니 '원스' 또한 그 명제에서 결코 비껴남이 없다. 사랑의 소외와 배리로부터 격리된 이들만큼 이 영화를 읽어내기 힘든 이들도 없을 터, 그대들이여 뜨겁게 사랑하고, 아파하며, 이 치유의 음악과 마주하시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여러분, 정말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고, 또 그렇게 살기 원한다면 '삼난三難'을 각오해야 합니다. 첫째는 가난이요, 둘째는 비난이고, 셋째는 고난입니다. 그것들을 지혜롭게 받이들이지 않고서 평화를 위해 산다는 것은 분명 꿈같은 이야기일텝니다."

어제부터 기독교 청년 아카데미의 봄 강좌, <평화학교-분쟁지역 평화활동의 실례와 평화를 만들어가는 삶>을 수강하기 시작했다. 첫 시간 '개척자들'의 송강호 님께서 소중한 강의를 해주셨고, 윗 글은 그 시간 말씀하신 한 대목이다. 진정 '평화'를 몸소 살아내기 위해서는 가난도, 비난도, 고난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데, 그 말에 나는 죽비를 맞은 듯 마음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하고보면, '평화'는 삶의 구체 속에서 이해되고, 적용되기 보다는 희망이라는 관념의 터울 위에 높이 쌓아올려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 평화란 가난과 비난과 고난이라는 삶의 비애를 단호하게 마주하지 않고서는 결코 올 수 없다. 나는 그 자명한 진리를 재삼 확인할 수 있었고, 관념 속에서 부류하던 '평화'를 몸의 언어로 살아내리라 다짐하며 기도하는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