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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튼의 평화론
토마스 머튼 지음, 조효제 옮김 / 분도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지난 해 시월, 북한의 핵무기 실험 성공에 대한 전가(傳家)의 보도가 잇따르면서 국제사회는 심각한 고민에 처하게 되었다. 국제사회의 이단아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일단의 조처들이 지속적으로 이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급기야 핵무기 실험에 성공한 북한의 행보는 이미 위협의 수순을 넘어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부랴부랴 이에 대한 대책이 강구되었고, 이어서 대북 제재를 필두로 한 일단의 조처들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한편 국내의 정치적 공방 속에서는 대북 압박론과 지속적 협상론이라는 두 정치적 입장들이 충돌하면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정치적 논의들이 복잡한 형국을 띠고 있었다. 물론 흡수통일론을 주장하는 일각의 수구주의자들은 전쟁 불사론을 주장하는 등의 극단적 대응책들을 내놓았고, 이처럼 각기 다른 입장들로 인해 남한 내의 정치적 갈등 또한 고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들이 ‘평화’를 지향해야한다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궁극적인 관심을 근본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단지 북한의 핵실험 성공에 대한 우려 속에서 파생된 한정적이고 국소적인 고육지책이었을 뿐 ‘평화’ 자체에 대한 근본 담론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한반도 내에서의 생존 문제라는 급박한 현실인식과 관련하여서는 ‘평화’에 대한 근본 담론 운운하는 것이 한가한 얘기로 들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 문제에 대한 관심이 결여된 여하한의 현실적 해결책들은 단지 미봉책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컨대 어찌어찌 북핵 위기를 타계해 나간다고 해서 미국을 위시한 강대국들의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리 없으며, 점령과 지배, 착취의 오만한 전쟁이 만무할 리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핵 위기를 극복한다고 해서 한반도에 평화가 올 수 있다는 식의 피상적인 사고는 오히려 더 한가롭다. 그것은 단지 눈에 찬 현실의 난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치적 수순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의 ‘평화’는 모든 인류를 위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형태의 비평화의 상태를 연기하는 선에서만 유효할 뿐이다.
이처럼 참된 평화의 성취와 또 이를 위한 정치적 노력들이 답보된 상황 속에서 평화에 관한 토마스 머튼의 글을 만나게 된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20세기 최고의 그리스도교 영성가이다. 이러한 그가 쓴 이 책은 그가 추구하였던 ‘참여영성’, 즉 ‘명상과 활동의 통일’이라는 대명제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의 전편에서 펼쳐지는 그의 사상은 세상을 초월하는 식의 종교적 나르시시즘을 뛰어넘어 세상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참 종교 영성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현세와 현세의 문제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인간 사회에 대해서는 관심을 저버린 채 하느님과 관계된 일에만 온전히 자신을 바치겠다고 하는 사이비 관상적 영성은 오늘날 분명 필요치 않”(236쪽)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60년대 미국의 현실 속에서 집필되었다. 토마스 머튼은 이 책의 탈고 당시(1962년)가 ‘포스트 그리스도교’적 세상, 즉 현대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적 이상과 태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임을 직시하면서 국내외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핵무기 개발 등의 무기증강과 전쟁 준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핵무기의 사용, 즉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어느 지점에 정위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머튼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연코 전쟁에 대해 찬성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평화의 군왕’으로 오셨던 예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평화를 가꾸는 사람’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미국사회 속에서 많은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정당한 전쟁론’을 통해 미국의 전쟁 준비를 공공연히 옹호하고 있던 터였고, 대다수의 인민들은 ‘정당한 전쟁’이 필요불가결하다는 주장에 이론을 달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정당한 전쟁론에서 제안하는 원칙들은 머릿속에서나 가능할 뿐 실제의 전쟁 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이론이었다. 특히 현대전의 맥락에 있어서는 정교하고 제한적인 방어 전쟁이 성립될 수 없을 정도로 무차별적인 공격이 벌어지고 있다고 판단되는바 정당한 전쟁론이란 결국 허위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머튼은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정당한 전쟁론의 원칙들마저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잘 지켜질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인, 비폭력 평화주의에 투신해야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를 구체적인 삶 속에서 성취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머튼의 주장이 자신의 종교적 이상과 그 가르침으로부터 나온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오직’ 자신이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에서만 부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평화가 모든 종교(인)의 책임임을 분명히 한다.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한 대목-“모든 사회의 핵심은 인류 공통의 목표를 위해 보편적 사랑 속에서 일치하는 것”(91쪽)-에서 보여 지듯이 모든 사회를 이루는 개별적 인간 하나 하나는 ‘평화’를 지향해야하는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인류는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들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생산되는 현실에 대해 무관심할 수가 없다. 다만 전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이 자살행위에 반대하고, 지금 당장 자신의 행동 방향을 오직 양심의 법대로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야만 모든 인간이 보편적 사랑 속에서 일치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오늘날, 이러한 ‘평화주의자’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큰 위안거리가 아닐 수 없다. 반면에 그 보다 더 많은 이들이 ‘평화’보다는-폭력과 전쟁이라는-‘죽임’의 문화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우울하다. 이 책의 발간 당시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왔지만 전쟁은 그치지 않았고, 현실은 더욱 더 깊은 수렁 속에 빠져들었다. 때문에 이미 40여 년 전에 쓰여진 이 책의 중요성은 그만큼 부각된다. 대니얼 엘스버그의 평처럼 말 그대로 “내일 신문 헤드라인보다 더 시의적절하다!”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모든 인류의 구원을 갈망하는 한 명의 종교인으로서 머튼의 빛나는 예지에 경의를 표한다. 더불어 진작에 ‘평화’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바로 “오래된 미래”이며, 모든 인류가 걸어가야 할 거의 유일한 길임을 보여준 이 책에 이 못난 글을 헌사로 바친다.
(추기: 최근 핵무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북한의 입장 표명은 그나마 큰 위안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