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바이러스
티보어 로데 지음, 박여명 옮김 / 북펌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대인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이란 절대적인 선(善)이다. 남녀노소 모두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그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려고 한다. 돈을 들여 여러 가지 시술을 받고, 심지어는 뼈를 깎는 성형을 하고, 운동을 하고, 치장을 한다.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미용실에 가서 연예인의 이름을 대면 '누구처럼 해 주세요!'라고 말을 한다. 과연 그 '누구'가 미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어쩌면 모두 허상이라면 어떨까? 이것이 단지 뇌의 작용으로 어떤 모습에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뇌의 작용도 사실은 누군가에게 조작된 것이라면, 이런 가정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단지 뇌의 조작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허상을 가지고 있고,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 허상을 쫓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모나리자 바이러스]란 소설은 바로 이런 가정을 소설로 만든 작품이다. 소설의 띠지에는 댄 브라운의 귀환'이라는 문구가 적혀져 있다. 처음 나는 이 책이 댄 브라운의 작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작가는 '티보어 로데'라는 사람이었다. 아마 이런 문구를 쓴 이유가 이 소설이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라는 작품에서처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에 대한 소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의 구성은 매우 치밀하고, 소재 역시 매우 기발하다.

소설의 주인공 헬렌 모건은 한때 세계적인 모델로 활동했던 신경미학자이다. 신경미학이란 아름다움과 뇌의 작용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녀에게는 16살의 거식증에 걸려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매들린이란 딸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매들린이 사라진다.

매들린이 사라지는 시점으로 세계에는 이상한 일들이 발생한다. 제일 먼저는 미국 각 주에서 선발된 미스 아메리카 후보들이 멕시코 연수 중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들이 각가 추악한 모습으로 성형이 되어서 길거리에 버려진다. 이와 함께 세계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가 퍼져서 사람의 사진들을 추악하게 변형시킨다. 이제 신문과 뉴스 등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추악한 모습으로 변형이 되어 있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세계 도처에서 벌들이 집단 폐사를 하는 것이다. 벌들을 그 모습이나 구성이 모두 황금률과 연관이 되어 있다.

헬렌은 자신의 딸의 납치와 이 모든 것이 연관성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사건의 배후에 파벨 바이시와 그의 아들 파트리크 바이시가 있음을 눈치챈다. 이들의 목적은 미의 대표적인 인식 기준인 황금률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황금률의 기준은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라는 작품이다. 저자는 모나리자라는 작품이 마치 컴퓨터 바이스러스처럼 인간의 뇌에 작용해 아름다움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헬렌은 FBI 수사관인 그렉 밀너의 도움으로 황금률를 깨뜨리려는 바이시 부자의 음모에 대항하게 된다.


가끔 우리가 열광하는 것들이 어쩌면 모두 허상일 쁜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 부, 아름다움... 이런 모든 것이 어쩌면 언론이나 문화가 만들어낸 허상이고, 사람들은 그 허상의 노예가 되어 그것을 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나부터 그것이 허상이라고 해도 당장 눈앞에 그것이 없으면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은 생각에,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소설은 바로 우리가 쫓고 있는 아름다움의 허상, 그리고 그 허상이 만들어내는 광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치밀한 구성과 방대한 스토리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에서 온 아이
에오윈 아이비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눈에서 온 아이]는 알래스카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자의 첫 작품이다. 먼저 놀라운 점은 이 소설은 평생 소설을 써 온 능숙한 작가의 그것 이상으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체와 표현력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잭 런던의 소설들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20세기 초엽의 알래스카를 생생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이 소설이 100년 전에 씌여지기라도 한 것처럼. 전체적인 스토리는 청소년에게 딱 맞을 듯싶지만 남녀노소 누구라도 푹 빠질만한 사랑스러운 소설임에 틀림없다.
 
보일락 말락 하게 현실과 동화 사이를 오가며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다음 내용이 어떻게 이어질지 가슴 졸이게 만드는 환상의 실타래를 풀어나가고 있다
   
소설의 초반부는 적막함과 절망으로 시작한다. 따뜻하고 풍요로운 고향을 등지고 개발되지 않는 야생의 알래스카에 정착한 잭과 메이블 부부는 50대가 넘어선 나이임에도 자식 하나 없이 외롭게 살고 있다. 사실은 10년 전에 메이블이 남자 아이를 사산한 이후로 아이가 없었다. 아이가 없다는 사실과 주변의 수군거림에 견딜 수 없어진 메이블이 남편 잭을 졸라 알래스카까지 왔지만 대자연은 자신의 품을 그리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삶은 고단했고 경작지를 개간하는 일은 더디기만 했다. 결국 잭은 광산에서 일하며 겨울을 날 계획을 세울 정도였지만 다행히도 인심 좋은 이웃 조지와 그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잭과 메이블 부부는 약간의 위안을 얻게 된다. 조지는 잭에게 알래스카의 겨울을 살아남으려면 무스 사냥에 성공하는 수밖에 없다고 설득한다. 훌륭한 사냥꾼인 조지의 막내아들 개렛은 이미 짝짓기 철이 지나서 무스 사냥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한다. 사냥에 서툰 잭은 겨울이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도 무스 사냥에 성공하지 못한다.
 
첫눈이 내린 어느 날 저녁 잭과 메이블은 마당에 눈사람을 만든다. 잭이 얼굴을 깎아서 어린 소녀처럼 만들고 메이블은 장갑과 목도리로 눈사람을 장식한다. 그날 밤늦게 잭은 밖에 나갔다가 눈사람이 부서져 있고 목도리와 장갑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눈사람이 있던 곳에서부터 숲으로 이어지는 어린아이의 작은 발자국을 발견한다. 그 뒤고 잭과 메이블은 자신들 오두막집 주위를 맴도는 연한 금발머리의 아름다운 소녀와 붉은 털 여우를 자주 만나게 된다. 그 신비로운 소녀는 눈 덮인 숲 속에 발자국조차 거의 안 남길 정도로 가볍게 뛰어다니며 잭과 메이블에게 죽은 동물이나 야생 열매 같은 것을 선물로 가져다 주기도 한다. 메이블은 자신이 눈사람에게 입혀주었던 털 장갑과 목도리를 두른 그 소녀가 눈사람에서 생겨났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잭은 소녀의 도움으로 500kg은 될법한 엄청난 수컷 무스를 잡고 개렛과 함께 그 무스를 손질해 오두막집으로 가져와 겨우 겨울을 버틸 수 있었다. 겨울 동안 눈 소녀 파이나는 잭과 메이블 부부의 오두막집을 왕래하지만 저녁이 되면 부부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꼭 깊은 숲 속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겨울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 눈과 함께 소녀는 메이블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사라진다. 걱정하는 잭과 달리 메이블은 눈 소녀 파이나가 다음 겨울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봄이 되어 농사철이 되었지만 잭은 밭을 갈다가 크게 다쳐 꼼짝도 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걸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상황에서 호탕하기 그지없는 조지의 아내 에스더와 그녀의 아들 개렛이 모든 살림을 도맡아 해주며 밭농사까지 책임져 준다.
첫눈이 내리는 날 눈 소녀 파이나는 다시 잭과 메이블 부부의 오두막집의 문을 두드린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어하는 잭과 달리 메이블은 첫눈이 올 때를 준비하며 파이나의 새 외투를 완성시켜놓은 상태였다. 그렇게 몇 년 동안 눈 소녀 파이나는 겨울 동안 오두막집을 찾아오다가 봄이 되면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잭과 메이블 부부는 어느 정도 그 상황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6년이 흐른 어느 해 겨울 개렛은 파이나의 붉은 털 여우를 쏘아 죽인다. 그리고 오소리를 잡기 위해 점점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다가 올무에 잡힌 백조의 목숨을 빼앗는 파이나를 목격하고 무엇인지 모를 감정에 괴로워한다. 그러나 점점 파이나에게 빠져드는 개렛은 그녀에게 강아지를 선물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둘은 매일같이 얼어붙은 강줄기를 따라 눈덮인 숲 속으로 들어가다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잭과 메이블은 아직 어린 나이지만 임신을 하게 된 파이나를 위해 결혼식을 준비하며 둘만의 오두막을 지어줄 계획을 세운다. 아름다운 결혼식이 끝난 후 파이나는 사내아이를 낳고 온 정성을 다해 아이를 돌본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가 파이나를 낳고 일찍 죽었듯이 파이나도 온몸이 불덩이같이 뜨거워져 사경을 헤매게 된다. 잭과 메이블 그리고 개렛은 파이나에게 겨울 외투와 신혼 이불을 둘러서 오두막 밖에 눕힌다. 영하 20도의 차가운 바깥공기와 겨울 하늘의 별을 보면서 파이나는 겨우 살아난 듯 보이지만 메이블이 잠깐 잠든 사이 파이나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개렛은 파이나를 찾아 겨울 산속을 헤매지만 메이블은 러시아 동화 속의 눈 소녀처럼 파이나가 눈으로 돌아갔다고 믿는다. 잭과 메이블은 슬픔 속에서도 사내 아기를 돌보며 파이나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한 채 삶을 이어간다
   
알래스카의 대자연을 배경으로 신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동화같은 소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랜만에 다시 플라톤의 국가를 읽는다. [국가]의 초반에 해당되는 1-2권의 내용은 과연 '정의'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이 책의 저자인 박종현 교수는 '정의'를 '올바름'으로 번역하고 있다.) 플라톤의 제자들은 플라톤에게 결과나 이익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정의가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플라톤은 '정의로움', 즉 '올바름'의 상태(플라톤은 이것을 '덕', 또는 '덕스러움'이라고 말한다.) 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개인보다 살펴보기 쉬운 '국가'라는 대상을 살펴본다. 정의로운 국가란 무엇일까? 국가의 올바른 상태란 무엇일까? 이것이 국가의 3-4권의 논쟁의 주제이다.

3권에서 플라톤은 올바른 국가에서의 '수호자'의 역할과 교육을 강조한다.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이 필요하고, 그런 수호자를 위해서는 바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3권에서 수호자는 최소한의 의식주의 혜택만 누리고, 오로지 국가의 안정과 정의를 위해서 희생하며 국가와 구성원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4권에서는 이런 수호자의 역할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수호자는 자신은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희생만 한다면 수호자가 누리는 이익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플라톤은 수호자 개인이 아닌, 국가라는 커다란 공동체를 보는 시각에서 이야기를 한다. 수호자의 목표는 국가의 행복이고, 국가가 행복하게 하는 것이 곧 수호자의 정의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전체주의적인 발상과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사람들은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의 행복을 더 추구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플라톤은 국가에 있어서 정의란 통치자의 지혜와 수호자의 용기, 그리고 상인의 절제라는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개인의 정의에 적용시키며, 개인의 혼 안에 이런 지혜와 용기, 절제가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때 그것이 개인의 정의, 올바름이 된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이런 혼의 세 가지 성향을 다스리고 조율하는 것이 바로 이성(로고스)이다.

플라톤은 인간 안에 자신의 욕구를 추구하는 부분(감정적인 부분, 헬라어 Pathemata)과 그 욕구를 다스리는 부분(저자는 '헤아림'으로 번역함, 헬라어 logismos)이 충돌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욕구를 다스리는 부분을 '이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의로운 상태란 바로 이성이 자신 안의 욕구를 바르게 다스리고 통치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것들을 두 가지 서로 다른 것들로 보고서, 그것으로써 혼이 헤아리게(추론하게) 되는 부분(면)을 혼의 헤아리는 부분(추론적, 이성적 : Iogistikon)이라고 부르는 반면, 그것으로써 혼이 사랑하고 배고파하며 목 말라하거나 또는 그 밖의 다른 욕구들과 관련해서 흥분 상태에 있게 되는 부분은, 어떤 만족이나 쾌락들과 한편인 것으로서, 비이성적(헤아릴 줄 모르는 : alogiston)이며 욕구적인(epithymetikon) 부분이라 부른다 해도, 결코 불합리하지 않을 걸세 - [국가] P 300

사실 '올바름'이 그런 어떤 것이긴 한 것 같으이, 하지만 그것은 외적인 자기 일의 수행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자기 일의 수행, 즉 참된 자기 자신 그리고 참된 자신의 일과 관련된 것일세. 자기 안에 있는 각각의 것이 남의 일을 하는 일이 없도록, 또한 혼의 각 부류가 서로들 참견하는 일도 없도록 하는 반면, 참된 의미에서 자신의 것인 것들을 잘 조절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배하며 통솔하고 또한 자기 자신과 화목함으로써, 이들 세 부분을 마치 영락없는 음계의 세 음정, 즉 최고음과 최저음, 그리고 중간음처럼, 전체적으로 조화시키네 또한 이들 사이의 것들로서 다른 어떤 것들이 있게라도 되면, 이들마저도 모두 함께 결합시켜서는, 여럿인 상태에서 벗어나 완전히 하나인 절제 잇고 조화된 사람으로 되네 - [국가] P308


이로써 플라톤은 제자들에게 정의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짝 언급한다. 정의에 대한 물질적인 이익에 대한 논의조차 필요 없이 이미 이런 조화가 무너진 상태의 사람에게 이익이 무슨 상관이 있냐는 것이다. 결국 정의로운 것, 그 자체가 이익이라는 플라톤의 주장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정의란 국가 안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개인의 혼 안에서도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화를 이룬 상태가 정의, 올바름의 상태이고, 이 조화가 무너진 상태가 올바르지 않은 상태이다.

여기서 조화란 단순히 지배하는 자가 각자의 일을 맡기고, 지배받는 자가 이를 복종하는 조화가 아니다. 지배자와 지배받는 자 사이에 교감, 합의가 이루어져 각자의 일에 충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플라톤이 말하는 국가의 정의이다. 지배받는 자도 지배하는 자의 통치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누가 나라를 다스려야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다스리는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자들 간에 '같은 판단(의견)'이 이루어져 있는 나라가 과연 있다면, 그 또한 이 나라에서 이루어져 있을 걸세. - [국가] P283


우리가 사는 국가는 과연 정의로운 국가일까? 국가 안의 여러 계층이 자신의 일을 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을까? 각자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만족함이 서로에게 있을까?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그런 통치에 다같은 합의를 이루고 있을까?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며 국가의 정의, 그리고 개인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에 미국 드리마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었던 [뿌리]라는 드라마가 리메이크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직 새로 리메이크 된 드라마를 본 적은 없지만, 오래 전에 처음 드라마로 완성된 작품을 본 기억이 난다. 아프리카에서 끌려 온 쿤타킨데와 그의 후손들이 겪는 고난을 그린 이 드라마는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이 원작이다. 알렉스 헤일리는 이 소설로 인해 퓰리처 상까지 수상했고, 그의 작품은 미국 흑인 사회에서 뿌리 찾기의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는 마치 다큐멘터리와 같은 형식으로 자신의 조상인 쿤타킨타와 그의 후손들이 당한 고난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조상의 삶을 묘사하는 소설이 있다. 바로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이란 소설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흑인 여성 작가이면서도, 드물게 SF 장르에 도전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이 [블러드 차일드]라는 단편집을 통해 이미 그녀의 독특하고도 예리한 SF세계를 접한 적이 있었다. [킨]이란 작품의 그녀의 장편소설이면서도 이전의 이전의 소설과는 다른 배경을 다루고 있다. 미래사회가 아닌, 과거 남부의 노예사회, 그것도 자신의 조상이 살았던 시대와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시간예행 방식으로 과거로 가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 다나가 팔 한쪽을 잃은 채 병원에서 깨어나며 시작한다. 경찰관들은 그녀의 남편 캐빈을 유력한 용의자로 구금해놓고 있는 상태였다. 그 뒤로 이야기는 그녀가 어쩌다가 한 팔을 잃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와 캐빈은 둘 다 소설을 쓰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둘이 결혼해서 새 집으로 이사한 날 다나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지며 어지러움을 느낀 후 어딘지 모를 곳으로 순간이동을 한 것이다. 그곳에는 빨간머리의 한 아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다나는 그 아이를 물에서 구해 인공호흡을 했고 겨우 목숨을 구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엄마는 다나가 자기 아들에게 뭔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고 여기며 다나의 등을 마구 때린다. 그리고 그 아이의 아빠는 총신이 무시무시하게 생긴 총으로 다나를 위협한다. 그 순간 다시 다나는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갑자기 사라졌다가 거실의 다른쪽에서 나타난 다나를 보면서도 다나의 이야기를 믿지 못하는 그녀의 남편 캐빈은 다나가 사라졌던 시간이 겨우 2초정도였다고 말해준다. 그날 저녁 다나는 또다시 어지러움을 느끼며 빨간머리 소년의 집으로 순간이동을 한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분풀이로 집에 불을 지른 후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겨우 불을 끄고 보니 소년은 몇 년 더 훌쩍 자라있었다. 그리고 그 손년을 통해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다나를 더욱 충격에 빠뜨리게 된다. 다나는 1815년의 메릴랜드로 시간과 공간을 여행했으며 빨간머리 소년 루퍼스 와일린은 다나의 조상 중 한 명이었다. 다나가 알기로 루퍼스는 앨리스라는 흑인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고 다나는 그 아이의 후손 중 한 명인 셈이다.

 

과연 어떤 힘이 다나를 과거로 보내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번의 시간여행을 통해 짐작하게 된 것은 루퍼스가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빠질 때 다나가 시간을 거슬러 루퍼스를 구하도록 보내진다는 것과 다나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느껴질 때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였다. 만약 루퍼스가 앨리스를 만나기 전에 죽는다면 다나 역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다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루퍼스를 위험에서 건져내고 엘리스와의 사이에서 헤이거라는 아이를 낳게 도와야 한다.

 

그러나 루퍼스가 살고 있는 시대는 백인 농장주가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던 끔찍한 시대다. 흑인여성인 다나는 루퍼스가 생명의 위기에 빠질 때마다 과거로 돌아가게 되고 그 때마다 노예들의 비참한 생활을 직접 체험할 뿐만 아니라 루퍼스의 아버지 와일린씨에게 채찍질을 당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루퍼스는 엘리스와 친구로 지내다 언젠가부터 그 이상을 원하게 되었지만 엘리스는 다른 흑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자유를 찾아 도망치다 붙잡힌다. 초죽음이 되어 돌아온 엘리스는 루퍼스와 다나가 정성껏 간호한 덕에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지만 한층 더 루퍼스를 증오하게 된다. 그러나 흑인 노예인 엘리스는 좋던 싫던 결국 루퍼스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나가 루퍼스의 생명을 여러 번 구해주었기에 루퍼스와 루퍼스의 아버지 와일린씨는 다나를 흑인 노예로 대하는 동시에 루퍼스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루퍼스는 다나를 여자로 바라보게 되고 농장의 흑인 노예들은 다나가 농장의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하게 된다. 사실 엘리스와 다나는 자매처럼 비슷해보였고 루퍼스는 이상하게도 다나를 자기 옆에서 떨어지지 못하도록 속박하기 시작한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다른 소설들에서는 은연 중에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인 [블러드 차일드]라는 소설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외계인이 인간을 인간 소년을 자신의 생명을 잉태하는 숙주로 삼고 있는 끔찍한 현실을 그리고 있다. 그럼에도 숙주가 되는 소년이 외계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중적이다. 그는 자신을 지배하고, 숙주로 삼으려하는 외계인 트가토이에게 어머니와 같은 따스함이나, 연인과 같은 마음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을 착취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이런 이중적인 감정은 [킨]이란 소설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다나에게 자신의 조상인 루퍼스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그것이 옥타비아 버틀러가 직면한 불합리한 세계의 모순일 것이다.

옥타비아 버틀러에게 이 소설은 단순이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다루는 소설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녀가 살았던 세상은 여전히 흑백갈등이 존재하는 세상이었으며, 그녀는 그런 세상을 떠날수도 완전히 증오할 수도 없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만의 시간여행이라는 방법을 통해 그런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 한다.  소설에서 다나는 흑인노예의 신분으로 과거 속에 살면서 자신의 조상인 루퍼스가 관대한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희망하며 그에게 책읽기를 가르쳤다. 그리고 와일린씨의 감시를 피해 흑인 아이들에게도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다 글을 읽고 쓸 안다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세상에 만연한 폭력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유럽 세계사 1 북유럽 세계사 1
마이클 파이 지음, 김지선 옮김 / 소와당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유럽 역사를 알아갈수록 바이킹이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단순히 북유럽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걸쳐, 유럽의 근대 국가 형성에 대단한 영향력을 미친 것을 알게 되네요. 유럽 전역에 영향을 끼치고, 세계사의 판도까지 바꾸어 둔 북유럽 역사에 대해 기대가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