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시 플라톤의 국가를 읽는다. [국가]의 초반에 해당되는 1-2권의 내용은 과연 '정의'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이 책의 저자인 박종현 교수는 '정의'를 '올바름'으로 번역하고 있다.) 플라톤의 제자들은 플라톤에게 결과나 이익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정의가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플라톤은 '정의로움', 즉 '올바름'의 상태(플라톤은 이것을 '덕', 또는 '덕스러움'이라고 말한다.) 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개인보다 살펴보기 쉬운 '국가'라는 대상을 살펴본다. 정의로운 국가란 무엇일까? 국가의 올바른 상태란 무엇일까? 이것이 국가의 3-4권의 논쟁의 주제이다.

3권에서 플라톤은 올바른 국가에서의 '수호자'의 역할과 교육을 강조한다.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이 필요하고, 그런 수호자를 위해서는 바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3권에서 수호자는 최소한의 의식주의 혜택만 누리고, 오로지 국가의 안정과 정의를 위해서 희생하며 국가와 구성원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4권에서는 이런 수호자의 역할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수호자는 자신은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희생만 한다면 수호자가 누리는 이익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플라톤은 수호자 개인이 아닌, 국가라는 커다란 공동체를 보는 시각에서 이야기를 한다. 수호자의 목표는 국가의 행복이고, 국가가 행복하게 하는 것이 곧 수호자의 정의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전체주의적인 발상과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사람들은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의 행복을 더 추구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플라톤은 국가에 있어서 정의란 통치자의 지혜와 수호자의 용기, 그리고 상인의 절제라는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개인의 정의에 적용시키며, 개인의 혼 안에 이런 지혜와 용기, 절제가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때 그것이 개인의 정의, 올바름이 된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이런 혼의 세 가지 성향을 다스리고 조율하는 것이 바로 이성(로고스)이다.

플라톤은 인간 안에 자신의 욕구를 추구하는 부분(감정적인 부분, 헬라어 Pathemata)과 그 욕구를 다스리는 부분(저자는 '헤아림'으로 번역함, 헬라어 logismos)이 충돌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욕구를 다스리는 부분을 '이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의로운 상태란 바로 이성이 자신 안의 욕구를 바르게 다스리고 통치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것들을 두 가지 서로 다른 것들로 보고서, 그것으로써 혼이 헤아리게(추론하게) 되는 부분(면)을 혼의 헤아리는 부분(추론적, 이성적 : Iogistikon)이라고 부르는 반면, 그것으로써 혼이 사랑하고 배고파하며 목 말라하거나 또는 그 밖의 다른 욕구들과 관련해서 흥분 상태에 있게 되는 부분은, 어떤 만족이나 쾌락들과 한편인 것으로서, 비이성적(헤아릴 줄 모르는 : alogiston)이며 욕구적인(epithymetikon) 부분이라 부른다 해도, 결코 불합리하지 않을 걸세 - [국가] P 300

사실 '올바름'이 그런 어떤 것이긴 한 것 같으이, 하지만 그것은 외적인 자기 일의 수행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자기 일의 수행, 즉 참된 자기 자신 그리고 참된 자신의 일과 관련된 것일세. 자기 안에 있는 각각의 것이 남의 일을 하는 일이 없도록, 또한 혼의 각 부류가 서로들 참견하는 일도 없도록 하는 반면, 참된 의미에서 자신의 것인 것들을 잘 조절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배하며 통솔하고 또한 자기 자신과 화목함으로써, 이들 세 부분을 마치 영락없는 음계의 세 음정, 즉 최고음과 최저음, 그리고 중간음처럼, 전체적으로 조화시키네 또한 이들 사이의 것들로서 다른 어떤 것들이 있게라도 되면, 이들마저도 모두 함께 결합시켜서는, 여럿인 상태에서 벗어나 완전히 하나인 절제 잇고 조화된 사람으로 되네 - [국가] P308


이로써 플라톤은 제자들에게 정의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짝 언급한다. 정의에 대한 물질적인 이익에 대한 논의조차 필요 없이 이미 이런 조화가 무너진 상태의 사람에게 이익이 무슨 상관이 있냐는 것이다. 결국 정의로운 것, 그 자체가 이익이라는 플라톤의 주장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정의란 국가 안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개인의 혼 안에서도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화를 이룬 상태가 정의, 올바름의 상태이고, 이 조화가 무너진 상태가 올바르지 않은 상태이다.

여기서 조화란 단순히 지배하는 자가 각자의 일을 맡기고, 지배받는 자가 이를 복종하는 조화가 아니다. 지배자와 지배받는 자 사이에 교감, 합의가 이루어져 각자의 일에 충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플라톤이 말하는 국가의 정의이다. 지배받는 자도 지배하는 자의 통치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누가 나라를 다스려야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다스리는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자들 간에 '같은 판단(의견)'이 이루어져 있는 나라가 과연 있다면, 그 또한 이 나라에서 이루어져 있을 걸세. - [국가] P283


우리가 사는 국가는 과연 정의로운 국가일까? 국가 안의 여러 계층이 자신의 일을 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을까? 각자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만족함이 서로에게 있을까?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그런 통치에 다같은 합의를 이루고 있을까?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며 국가의 정의, 그리고 개인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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