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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지음, 김도연.이선화 옮김 / 달콤한책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어린 시절 자주 이사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그 나이에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가고, 새로운 학교에 적응한다는 것은 내게는 우주가 바뀌는 일이었다. 처음 낯선 학교에 발을 내딛고, 자기를 소개하고, 전학생이라는 이름으로 한동안 불렸던 경험은 인생에서 절대로 잊히지 않는 시간이다. 그런데 낯선 땅으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아이에게는 어떤 경험일까. 더군다나 고국에서 쫓기듯 도망쳐야 했던 신세라면... 어린 소녀의 눈으로 이 모든 과정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있다. 이란 출신의 프랑스 작가 마리암 마지디가 쓴 자전적 소설인 [나의 페르시아어의 수업]이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의 주인공 마리암(저자와 이름이 같다)는 이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우리가 잘 아는 이슬람 극단주의자인 호메이니옹이 정권을 잡았을 때이고, 이란은 온통 혁명과 이에 대한 반체제 운동으로 시끄러웠다. 마치 우리나라 군사정권 때와 비슷한 분위기로 사람들을 잡혀가고 고문을 당한다. 마리암의 아버지는 은행원이었고 어머니는 의대를 다니고 있었지만, 둘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반체제 운동에 열심이었다. 그들의 집은 이런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였고, 심지어 마리암까지 연락책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오로지 할머니만이 이런 마리암을 따스하게 품어주었다. 그러나 삼촌이 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부모님 역시 점점 투옥될 위기가 찾아오자 결국 이란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먼저 아버지가 망명을 하고, 그 뒤 아슬아슬하게 엄마와 어린 마리암이 아버지를 따라 망명을 한다. 소설은 어린 마리암의 눈에 비친 이란의 혼란 상황과 고단하고 궁핍한 파리에서의 정착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화장실을 찾는데 보이지 않는다. 왠지 걱정이 되어 아버지에게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복도에 공용화장실이 있어. -중략- 아버지는 샤워실을 곧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며 당혹스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을 감추려 억지로 웃음을 비친다. 어머니는 침통한 표정으로 하나 밖에 없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는다. 오래전부터 말수가 적어진 어머니의 침묵은 이때부터 더욱 심해진 것 같다. 방을 둘러본다. 세면대 하나, 작은 텔레비전 하나, 붙박이장 하나, 식탁 하나, 의자 세 개, 화분 하나, 창문 하나. 창문으로 달려가 거리와 파리의 지붕들과 전철 입구를 본다. 우리 셋은 파리 십팔 구의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칠에 둥지를 틀었다. 숱한 난관과 시련 끝에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는데 나는 오로지 공용 화장실을 써야 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P 115)"
이후 소설은 마리암이 프랑스 학교를 다니고, 프랑스어를 몰라 배척 당하고, 다시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부모님은 그녀가 페르시아어를 잃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해 페르시아를 가르치려 하나 그녀는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부모님과도 조금씩 멀어진다.
"몇 년이 더 흘렀다. 소녀가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아버지는 딸이 새 언어를 말하면 휘둥그레 눈을 떴다. 단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의 놀라움은 곧이어 두려움으로 변했고 이 언어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딸이 예전에 그랬듯이 아버지도 입에 자물쇠를 채웠다. 소녀 역시 아버지의 두려움과 거부를 이해했다. 그래서 아무 말없이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새로운 단어와 알파벳을 익혔다. (P 207)"
이 작품은 세계 삼대 문학상 중 하나로 불리는 프랑스의 콩쿠르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읽어 본 콩쿠르상은 주로 소수자나 이민자의 불안정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반대자는 많지만, 그래도 프랑스가 이런 소수자나 이민자에게 얼마나 따스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이 콩쿠르상을 수상한 것은 단지 프랑스인의 이방인에 대한 따스한 시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 묘한 마력이 있다. 이 책을 읽게 되면 어린 소녀 마리암이 되어 그녀가 보았던 것을 함께 보고 느꼈던 것을 함께 느끼게 한다. 그만큼 작가의 문체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과 힘이 있다. 특히 그녀가 페르시아어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성인이 되어 다시 페르시아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그녀가 느꼈던 혼란과 방황, 그리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시적인 비유나 그녀가 만든 동화와 함께 어우러지면서 소설은 묘한 분위기를 낸다. 특히 소설 속에 그녀가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이입되는 부분이 매우 뛰어나다. 프랑스 생활에서 점점 정치사상과 신념이 무너지고 소수자로 전락하는 부모님을 보는 과정에서는 나 역시 그녀의 마음이 되어 눈물이 날 정도였다.
"당신 꿈들은 이란에서부터 이미 조금씩 사라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작은 꿈들조차 프랑스에 온 후로는 하나둘 의자 아래 카펫 위로 떨어져 서서히 죽어갔다. 원하지 않았던 망명으로 갈기갈기 찢긴 꿈들. 계획이나 야심, 인생에서 이루고 싶었던 작은 목표들. 이 모든 것이 잘게 부서져 스러지고 당신 모습도 조금씩 지워져 희미해졌다. 얼굴도 흐릿해지고 목소리는 작아지고 몸짓은 완전한 현실도 몽상도 아닌 꿈에서 움직이는 사람처럼 느려졌다. (P 126)"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언어라는 것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자가 자신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타의에 의해서든지, 환경에 의해서든지 자기의 언어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 소설 곳곳에서 배여 나오며 진한 감동을 주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