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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맨 앤드 블랙
다이앤 세터필드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도 죽음은 낯설다. 호상이라고 불리는 나이 드신 어르신들의 죽음부터, 내 또래의 낯선 사고사까지, 하다못해 나와 일면도 없는 유명 대배우의 죽음까지... 죽음은 항상 우리에게 낯설다. 특히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더욱 낯설다. 그러나 너무 뻔한 말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태어남과 동시에 점점 죽어간다. 인생은 죽음과 함께 한다. 생각하기 싫은 진리이고 평상시 잊어버리고 살기 쉬운 사실이지만, 이것을 기억하고 살면 우리 인생이 좀 더 지혜롭고 가치 있어지지 않을까?
벨멘 앤드 블랙]은 이런 죽음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저자인 다이앤 세터필드는 [열세 번째 이야기]로 이미 우리에게 알려진 작가이다. [열세 번째 이야기] 저자의 첫 작품으로 영국의 부유한 앤젤필드 가문에 숨겨져 있는 3대에 걸친 광기 어린 사랑을 그리고 있다. 사랑을 잃어버린 버린 사람과 가문, 그리고 건물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벨맨 앤드 블랙] 역시 전작과 주제는 비슷하다. 그러나 전작보다 조금 더 분위기가 어둡고, 시대적인 묘사가 뛰어나고, 죽음에 대한 메시지가 더 강렬하다.
소설은 비록 윌리엄 벨맨이란 주인공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이 부분은 에필로그 성격이 강하고 소설의 본격적인 시작은 윌리엄이 10세 때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사촌인 찰스, 빵집 아들인 프레드, 그리고 대장장이 집 아들인 루크와 함께 들판을 뛰놀다가 떼까마뀌 를 발견한다. (소설에서 '떼까마귀'로 번역되어 있어, 읽는 내내 여러 마리의 까마귀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일반 까마귀보다 좀 더 큰 까마귀의 한 종류이다) 윌리엄은 멋진 새총과 뛰어난 실력으로 떼까마귀를 맞추어 죽게 한다. 그때부터 윌리엄의 인생은 변하기 시작한다.
이후 소설은 윌리엄의 삶에 드리워진 어두운 죽음의 이미지가 지배한다. 그러나 전반부에 있어서는 그 어두운 이미지가 간간이 등장하고, 주로 윌리엄의 성공적인 인생을 이야기한다. 찰스의 아버지이자 윌리엄의 큰아버지인 폴은 윌리엄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자신의 방직공장에서 일하게 한다. 윌리엄은 성실함과 뛰어난 재능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방직공장에서 점점 승승장구한다. 그러는 사이에 할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죽고, 큰 아비지 폴도 죽는다. 죽음으로 인해 힘들어했지만, 그는 사랑스러운 여자인 로즈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점점 성공한다. 큰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방직공장을 물려받아 점점 더 크게 성장시킨다. 행복이 절정인 순간에도 어두운 그림자는 그를 쫓아다닌다. 어린 시절 함께 까마귀를 죽였던 친구들도 차례대로 죽는다. 그리고 1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마을에 열병이 돌아 자녀들이 죽고, 아내마저 죽는다. 이제 윌리엄은 인생이 자신을 가지고 놓다고 생각하며 절망에 빠진다.
"술에 취한 어느 순간, 윌리엄은 예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세계, 이 우주, 그리고 만약 존재한다면 신까지도, 인류와는 대립관계에 놓여 있었다. 새롭게 드러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과거의 행복은 잔인한 장난이었다. 자신이 운이 좋다고 믿게 만들어놓으면 나락으로 끌어내리기가 한결 쉬울 테니까. 그는 자신의 본질적인 미천함을, 운명을 통제하려 했던 허영심을 깨달았다. 방직공장 주인 윌리엄 벨맨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긴 세월, 그는 자신의 힘을 믿었고,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그를 짓밟을 수 있는 거대한 경쟁자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 그의 노력과 재능으로 일구어낸, 견고하다 믿었던 성공과 행복은 민들레 홀씨만큼이나 연약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정체불명의 경쟁자가 숨을 한 번 훅 내쉬자 홀씨는 사라져버렸다. 지금껏 왜 그걸 몰랐던가? 모든 걸 알았던 그였는데? 무엇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무지 속에 살게 했던가? (P 182)"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죽으려 하나, 마지막 순간에 블랙을 만난다. 그리고 그와 계약을 한다. 2부부터는 소설이 한층 더 어두워진다. 아내와 자녀들을 잃은 벨맨은 오로지 사업에만 매달린다. 그 사업이란 블랙과 계약한 '벨맨 앤드 블랙'이란 회사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당시로는 획기적으로 장례용품과 장례식을 기획하는 회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사업은 점점 번창하고 막대한 돈을 벌어드린다. 그러나 정작 윌리엄 자신은 점점 고독해지고, 외로워진다. 그리고 결국에 블랙이 찾아와 자신의 지분을 요구한다.
소설은 갈수록 어두워지고, 여러 부분에서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에 저자가 이야기하려는 정확한 의미를 해석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소설 마지막 부분에 저자의 주제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결국 인생의 죽음과 동행하는 거이라고, 그리고 죽음 앞에 남는 것은 인생의 추억뿐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살아 있는 삶을 즐겨야 한다고... 벨맨의 죽음과 함께 열병으로 겨우 살아난 딸 도라가 다시금 육체적으로 소생하는 장면을 통해 저자는 이 부분을 보여준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저자인 다이앤 세터필드의 시대적인 분위기가 무척 뛰어나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내내가 19세기 영국의 방직공장의 시골마을의 모습, 영국의 상가의 모습들이 그대로 그려졌다. 또한 윌리엄을 둘러싼 개인의 감정 묘사 부분에서도 매우 뛰어나다. 인생에서 한 인간이 느끼는 다채로운 감정의 묘사가 소설에서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살과 죽음에 대한 저자의 깊이 있는 생각이 소설에 배여 있다. 저자의 다음 소설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