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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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때 압박감과 스트레스에 벗어나기 위해 등산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면 등산복과 배낭을 메고 주변의 산들을 올랐다. 어느 날인가 산을 올라가는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내려갈까 하다가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아 계속 올라갔다. 산 중턱에서부터 굵은 비가 계속 내리기 시작했다. 무척 낭패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비를 맞으며 걷다 보니 마음의 모든 찌꺼기가 씻어져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내가 새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어서 계속해서 산을 올랐다. 요즘은 주로 가족과 함께 산을 오른다. 한 주에 한 번 정도 가까운 산을 아내와 4살짜리 아이와 함께 오르고 있다. 아내가 배낭을 메고 아이는 반절 정도는 내가 업고 올라가는 식이다. 정상에 올라가면 아이가 혼자 올라온 줄 알고 사람들이 대견해 한다.

 

미나토 가나에의 [여자들의 등산일기]를 읽으면서 예전에 비를 맞고 산을 걸으면서 느꼈던 그 느낌을 책으로 받는 기분이었다. 미나토 가나에는 [고백]이나 [리버스]와 같은 대표 작품을 통해 만났었다. 그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왜 그녀의 작품들이 발표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고, 일본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알만 했다. 인간의 어두운 본성과 일본 사회의 부조리를 아주 날카로운 필치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그동안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소설이다. 마나토 가나에의 소설들을 읽을 때면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소설을 마치 내가 소설의 인물들과 함께 일본의 여러 산들을 걷고 있는 여유로움과 함께 마음속에서 힐링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을 주로 일본의 백 대 명산을 배경으로 등산을 하는 여자들의 8개의 단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단편소설의 인물과 배경은 다르지만, 단편들을 작가만의 특유의 장치를 통해 연결점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연결점을 찾는 것도 소설의 재미이다.

 

첫 번째 소설 [묘코산]은 백화점에서 리쓰코라는 여성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성향의 직장 여성인 유미라는 여성과 묘코산을 등산을 하는 이야기이다. 리스코는 모든 일을 철두철미하게 계획하고 책임감 있게 일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성격이라면, 유미라는 여성은 시간관념이나 책임감이 조금 부족한 여성이다. 특히 리쓰코는 우연히 유미가 직장 상사와 호텔에서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 그녀에 대한 반감이 더욱 크다. 우연히 둘은 함께 묘코산을 등산하고, 운동화를 신고 계속 민폐를 끼치는 유미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페이스를 맞춰주지 않는다는 유미의 불만에 드디어 리쓰코는 폭발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난 역지사지 정신이나 상대방의 페이스에 맞춘다는 감각이 부족할지도 몰라. 하지만 불륜 중인 사람에게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네." (P 40)

 

하지만 리스코 역시 결혼을 앞두고 남편 될 사람의 불안정한 미래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완벽하게 계획을 가져야만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전혀 다른 두 여성을 등산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정신적인 교감을 가지게 된다.

 

두 번째 소설 [하우치 산]은 앞서 두 여성의 등산 코스에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한 커플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하우치산은 묘코산 옆에 있어서 한 코스로 여행하는 경우가 많다. 미쓰코는 거품 경제 시대의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나이 든 여성이다. 조금 과하다 싶은 고급 브랜드의 옷과 액세서리를 하고 다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그녀에게 접근하기를 어려워한다. 그러던 중 결혼 상대를 만나는 단체 미팅에서 순박해 보이는 간자키라는 남성을 만나고 몇 번 만난 후 간자키의 권유로 등산을 한다. 간자키는 등산 동호회에서 활동할 만큼 산을 좋아하고, 처음 등산이라고 생각하는 미쓰코를 여러 가지로 신경 쓰면서 배려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겉모습을 통해 서로를 오해하고 있으나 조금씩 서로를 알아 가가는 과정을 리스코의 심리를 통해 너무 잘 표현하고 있다.

 

"혹시 간자기 씨도 그걸 노리고 나를 산으로 데려온 걸까? 거품 시절의 잔해를 몸에 두르고 있는 내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줘서 개심시키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개심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쿨한 미인이라서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말 자체도 좀 어떤가 싶지만 간자기 씨는 거품 시절의 잔해를 두르고 있는 내가 좋은 것이다. (P 85)"

 

이 소설에서만 미나토 가나에 식의 멋진 반전이 나온다. 이 소설만의 여유로운 힐링 분위기와 미나토 가나에 식의 반전이 어울려진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 나오는 단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모두 일본의 산을 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일곱 번째 소설인 [통가리로]만이 뉴질랜드의 트래킹 코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은 10여 년 전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던 연인과 함께 오던 코스는 이제는 혼자 등산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0년 전의 트래킹 과정과 지금의 과정이 반복되어 이야기되면서 산을 통해 자신의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는 이야기이다.

 

"사람은 크고 작든 짐을 지고 있다. 단, 그 짐은 옆에서 보면 내려놓을 것 같지만 그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색한다. 그것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요시다와 나는 서로의 짐을 자신의 해석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었다." (P 346)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을 많이 해 보게 된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 예전에 등산했던 산들을 올라가다 보면 그때의 추억과 그간의 인생이 저절로 펼쳐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름 오랜 등산의 경험을 통해 등산이 주는 가장 좋은 점이 있다면, 인생을 한 발자국 떨어져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속에 있으면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생의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은 것도, 산에 올라가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그냥 인생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산은 조금 더 여유롭게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준다. 미나토 가나에의 [여자들의 등산일기] 역시 이런 산이 주는 시각과 여유를 느끼게 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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