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구토할 것 같은 건 사르트르가 아니라 나였다. 백지연을 좋아해서 샀던 자기계발서(크리티컬 매스)에는 늘 15도까지만 끓어오르라는 얘기가 반복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14.9999999도에서 포기할 때 나만이라도 0.1111111만큼만 더 끓어오를 간절함과 끈기와 몰입을 가지라고. 몰라서 그런 게 아닌 거잖아. 나는 그 책을 던졌지만 의미를 잃어버린 건 아니었다. 스물 아홉과 서른이 내게는 그다지 벅차지 않았고, 평균수명과 절명 사이에서 방황하며 살아갈 일이 더 많이 남은 걸 저주했다. 자기만의 세상에 방을 만들고 들어가 끝내 스스로를 죽이는 간절함을 이해했다. 나는 다만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그래, 지금껏 내가 살 수 있었던 건 용기가 조금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 책은 5년 전 영국 드라마 [스킨스]를 보면서 처음 읽으려고 했었다. 거기 나오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존재를 증명해야 할 기로에서 정신착란을 겪고 있었다. 꿈을 찾아야 했고, 세상을 전복시키려 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순간이 오면 약과 춤과 자기학대에 골몰했다. 처음에는 퇴폐적이었다. 영국은 무겁지만 어두운 곳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영국 드라마를 배운 나는 BBC 뉴스보다 먼저 그 어린 주인공들이 생각난다. 자기 삶 앞에 제대로 존재하기 위해 애썼던 어린 영혼들 말이다.

 

대학 졸업 때까지 내가 욕심낸 전집은 카뮈 뿐인데, 내 20대 안에 카뮈의 사유와 게바라의 용기만 있다면 뭐든 할 것 같았는데, 카뮈만 책장에 나란히 있으면 세상 끝까지라도 갈 것 같았는데, 그의 도시 알제와 프랑스면 그토록 황홀한 여행이 또 없을 것 같았는데, 성큼 다가왔다. 내가, 나라는 존재가, 그리고 사르트르가, 사르트르의 사유가, 사상이, 그가 세상에 뱉어논 <구토>가 구원 같았다. 이 책을 보부아르 두 권(위기의 여자, 제2의 성)을 읽고난 이후 다시 읽을 거란 생각은 못했다. 이토록 버겁고 무겁고 아픈 내가 존재의 증명인데, 얼만큼 더 실존의 증명을 배워야 하는지 궁금했다. 구토는 구토를 유발할 뿐, 읽어낸다 해서 그 속에 답이 없건만, 어리석은 나는 답을 구하려 했다. 내민 손이 하염없이 부끄러워졌을 때 그때 깨달았다. 내가 타고 있는 롤러코스터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애초부터 사르트르에 답은 없었다. 그는 단지 그 사실을 전했다. 책 안에는 답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자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내가 갖고 싶은 것에는 형체가 없었다. 아니 불분명했다. 그때마다 구토가 일었고,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끊었다. 술에는 그래, 말하고 싶지 않은, 말하지 못하는 아픈 추억이 많다. 그 시절 나는 외롭지는 않았지만 지독히 무서웠다. 그러나 잘 살고 싶었다. 자존심과 고집과 나르시시즘까지 고수해온 모든 것들이 차례로 구겨지고 접힐 때, 울지 말아야 할 곳에서 주저 앉았다. 책은 멀어졌다. 20대의 절반은 그렇게 책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읽었다고 했지만 충분하지 않은 걸 아는 건 나 뿐이다. 섹스와 마약에 쩔어있지도 않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시간이 흘러갔다. 대상도 없이 미쳐있었던 모든 찬란했던 순간을 이제와 책에 양보할 수는 없겠지만.

 

그때는 그렇게 혼란으로 겨우 덮었는데 올해 맘 먹은 책 네 권(삼십세, 시지프스 신화, 벨자, 구토)을 서른(만으로는 여전히 이십팔세다)이 절반 남은 시점에서 시작하며 나는 좀 성숙해졌다(고 믿고 싶다). 바흐만을 가르쳐준 친구가 있다. 20대 내내 오래 파리와 서울을 오간,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숨도 안 자고 일큐팔사를 단숨에 읽어내리던, 실비아 플라스 같은 예민함으로 세상을 견딜 듯했던 친구가 있었다. 전공이 불어였고 파리를 사랑했다. 그애 20대의 절반은 파리였다. 어쩌면 절반보다 더 긴 시간을 파리에서 살았다. 한동안 그를 좋아해서 때로 나는 탐정이 됐었다. 그애가 그의 여자라고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탐정놀이는 생각보다 미련하지 않고 집착스럽지도 않고 포기도 빠른 내 덕으로 오래가지 않았다. 내게 파리의 모든 문학과 예술은 그애로 귀결된다. 무엇을 더 알아야 할까. 이 나이에. 더 알아야 할 게 남긴 했나. 마음이 둔탁해지고 못 가진 것만 보이고 닿지도 않을 질투를 시작한다. 5년 전이었다면 '좋아해요'라고 단숨에 고백했을 것이다. 싫은 티를 숨기기 보다 좋은 티를 숨기는 게 더 힘들다는 걸 스무살에 이미 배웠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는데 모두 알고 있던 마음보다는 크고 싶었다. 숨기기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말할 용기 아니 용기를 가질 거란 욕망조차도 잃었다. 어른이 되려는 것일까. 어느 순간 가는 세월을 더는 붙잡지 못할 걸 알았고, 더는 물을 것도 구할 답도 없으니 제발 이 착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고작 그것만이 아니, 그것조차도 불가능할 거란 걸 알고 있었으면서.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과거의 일이다. 현재의 일이기도 하지만 무시할 수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거니까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가 내 맘을 알아채는 일도 없겠지. 그저 왜 이 순간 내쳐야 했는지, 이제 날 잊었는지에 대해서는 혼자만 생각할 것이다. 미지의 공간에는 아무도 들여놓지 않을 것이고, 달래기 위해 바흐의 칸타타 속으로 침잠할 것이다. 태양이 작열하고 아스팔트가 끓어오르는 아픈 여름에는 아무래도 고백할 수가 없다. 가을이나 겨울이었다면 시끄러운 명동 어느 거리에서 네 손을 잡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데. 사르트르는 오래도록 잊고 있던 묘지기행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 때문에 모든 여정을 시작했지만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안내하는 파리관광을 고스란히 답습했던 그 여정은 돌아와서야 실망스러웠지만 괜찮았다. 가보지 못한 몽파르나스의 묘지, 그곳에 시대를 앞선 결혼생활을 했던 유명한 지식인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고 처음 알려준 그녀를 다시 볼 일은 없다. 다만 이 모든 상황이 구토스럽다. 차오르는 말을 삼키는 것이 어른이 됐다고 믿는 이것이, 그저 몸이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자위하는 이것이, 나도 모르게 놓쳐버린 시간들의 반증이다. 지나간 시간은 없다. 다가올 시간도 마찬가지다. 나는 혼자다.

 

하루, 일생, 지구, 우주. 네 가지 테마로 시간(Time)를 설명하는 BBC 다큐를 틀었다. 이토록 그대로인 나를 자꾸만 다른 무엇이 되도록 강요하는 '시간'이란 괴물의 정체를 알 수 있을까 해서. 시간에 얽매이는 삶을 살기는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던 것처럼 시간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주진 못할 터였다. 아무 것도, 그 무엇도, 나를 해갈시킬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불안하게 내 머리 위로만 내려앉는 것 같을 때에는 늘 그랬듯 방법이 없다. 쌓인 신문에서는 종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으르릉대며 싸우고, 간혹 감동적인 사연이 살아가는 이유를 챙겨준다. [신의 퀴즈]의 어느 주 에피소드는 환각이었다. 독성을 가진 식물, 서서히 파괴하는 식물, 치유하는 식물 등 식물들의 세상도 인간사와 같다. 도움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필요한 것과 필요악, 쓰잘데기 없는 것, 나의 무엇을 긍정하고 또 무엇을 부정할 수 있을까. 어떤 식물은 그 향에 노출되면 환각을 보여주는데, 환각 속에서 평소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본다. 지금 그 향에 중독된다면 나는 또다른 나를 볼 것 같다. 바닥에 가라앉은 절망과 고독과 질투와 시기, 그런 것들과 마주할 것 같다. 처녀귀신 보다 악마보다 사탄보다 강시보다 훨씬 겁날 것 같다. 알제리의 독립을 적극 지지해 드골과 대립각을 빚었던 사람, 나처럼 남쪽 항구도시에서 살았던 사람, 보부아르와의 결혼생활에서 보통(대부분)의 남자들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들)를 과감히 내려놓고 삶의 동반자이자 지식인으로서 그녀를 인정했던 사람, 그 무엇보다 자유를 우선했으면서도 책임을 잃지는 않던 사람, 누군가로부터 본질을 결정당하는 게 싫어 노벨상 수상마저도 거부했던 그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내'가 구토라고 말했다. 존재 자체가 구토라고. 존재는 구토를 견디며 앞으로 가는 거라고.

 

"우리는 여기에 있고 우리라는 귀중한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먹거나 마시고 있지만, 존재하는 데는 어떠한 이유도 전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p.209)

 

로캉탱이 사르트르의 페르소나란 걸 부정할 수 없다. 철학교사, 역사연구가, 항구도시 르 아브르, 연금자, 구토자, 내면 연구자까지 로캉탱의 내면은 사르트르의 그것과 닮았다. 아무리 남의 의식이라지만 따라가는 입장이 만만찮다. 어려우면 내면에 처박히든지 외부로 시선을 돌리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하자. 외부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를 내면으로 끌어안아 죽음을 생각할 필요는 없을테니까. 어긋난다면 차라리 죽어버리자. 극단을 택하란 말이다. 소멸시키고 다시 쓰자는 말은 과거를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당신의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 네가 그렇듯 너의 옛날에 나는 관심이 없다. 내 이전에 이미 이름 붙여진 것들과는 싸우고 싶지 않다. 연애관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이 쉽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물들은 명명된 그들의 이름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사물은 그로테스크하고, 고집이 세고, 거인같이 거기에 있다. 그것들을 의자라고 부른다든가, 또는 무엇이든 그것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려는 짓은 바보 짓일 것이다. 나는 이름붙일 수 없는 '사물들'의 한복판에 있다. 혼자서 말없이, 아무 방비 없는 나를 사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밑에서, 뒤에서, 위에서 나를 에워싸고 있다. 사물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강요하지 않는다. 거기에 있을 뿐이다. 의자 쿠션 밑 나무틀에 한 줄기 어두운 선이 닿아 있다. 그것은 신비스럽고 장난꾼 같은 모습으로 거의 미소에 가까운 것을 띠고 의자를 타고 뻗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미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한다. (pp.234-235)

 

환각은 계속된다. 이런 방법으로 사물을 계속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를 부정하지 않은 채 세상을 부정하려 하고, 이해되지 않는 관념을 이미지로 환기하는 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 진정성 결여의 체험이다. 사르트르는 로캉탱이 되어 만나는 모든 등장인물을 전복시킨다. 옳다고 생각했던 윤리도덕적 휴머니즘에도 구토한다. 읽는 나는 무력화된다. 무엇이 구원이고 절망이며, 왜 어떤 것은 잠재적인 반면 어떤 것은 발화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밤 이름이 없고 그러므로 부재한다. 갑자기 이 모든 것들이 속절없는 미친 짓으로 자각된다. 누구나 두 가지(선과 악) 모습을 가졌으면서 왜 어떤 사람은 선이라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악이라 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이 순간에도 나는 내 모습이 어떨지를 걱정하고 있다. <구토>는 서울대 추천 고교 필독서다. '고교'생은 무얼 느껴야 할까. 당시의 내가 아니 내게, 사르트르가 있었다면, 홀든이 있었다면, 나는 내 좁은 방을 박차고 나올 수 있었을까. 제도와 관습에 꽁꽁 묶인 학교를 박차고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었을까.

 

혼란이 술주정처럼 발화하다니, 지금 나는 낭패라고 생각하고 있다. 길어지는 건 생각이 많았다는 증거이자 무슨 생각하는지 몰랐다는 반증이다. 나로서는 이 글을 간추려볼 엄두도 내지 못하겠다. 사르트르는 글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야 했다. 의식과 사상의 흐름이 이토록 멋지게 형상화된 글을 나는 처음 읽어본다. 이 순간에도 나는 진정성을 잃었다. 환각상태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대화가 없다. 고통이 없고 공감이 없고 간절함이 없다. 내 안에 나는 존재하는가. 얼마나 더 서로에게 상쾌한 바람일 수 있을까. 부르고 부르다 지쳐 겨우 들려오는 메아리에도 귀기울이는 법을 알지 못한다. 권태는 만나지 못한다. 내 말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시대에 사랑이라는 게 있을까. 아니, 이 계절에도 사랑할 수 있을까. 난 이렇게 뼛속 깊은 곳까지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미치도록 화사한 오늘같은 여름날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니. 청춘과 빛과 희망과 행복을 말하는 모든 것들을 불살라야 한다. 아니면 거창한 사랑을 시작하거나.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댈러웨이 2012-07-23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스파게티 잘 만드는데, 마늘 빵 옆에 구색 맞춰서 두고, 또 적포도주도 한 잔 있으면 더 좋겠고, 그래서 같이 밥 먹어요. 말은 안 나누는 게 더 좋겠네.

(아 이 피하고 싶은 첫 댓글을 또 달게 하시는구먼요.)

아이리시스 2012-07-23 22:48   좋아요 0 | URL
첫 댓글이 아니라 유일한 댓글이에요. 댓글이 하나 뿐이야ㅜㅜ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가 사르트르한테 있긴 하지만요. 저 지금..<공산당 선언> 읽다가 엄청 좌절모드 됐어요. 벼르고 벼르다 자신있게 샀는데.. 마르크스는.. 이 나이에도 안 읽히는 겁니다ㅜㅜ

스파게티는 다이아몬드값을 치러야 먹을 수 있겠어요. 우리의 물리적 장벽이ㅜㅜ 거기다 경제적 장벽도ㅜㅜ 마늘빵도 댈러웨이님이 직접 구워요? 적포도주도 직접 담가요? 그럼 어디 먹어볼까?!ㅋㅋ 저는 늘 말을 해야했어요 :)

하지만 말은 안 나누는 게 더 좋겠어요222

댈러웨이 2012-07-24 14:34   좋아요 0 | URL
아이 참, 미안해요. 또 무플권장 댓글이 되어버렸어요. 또 비글로 돌려야 하나.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07-25 01:03   좋아요 0 | URL
푸핫, 괜찮아요, 댓글이 다섯 개니까요ㅜㅜ

알로하 2012-07-24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여름에 도전하기엔 왠지 어려울 것 같아요.ㅠㅠ 사르트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복잡한 당신! 전 계절탓을 하며 추워지면 읽어보렵니다ㅋ

아이리시스 2012-07-25 01:05   좋아요 0 | URL
전에 몇 번 포기하고 또 도전하고 하는데 그..의식의 흐름을 좀 따라가고 싶은 타이밍이 있어요. 타이밍을 잘 잡으면 보부아르도 참 재밌고 그럽니다, 알로하님. 하지만 다른 작품은 당분간 안 읽는 걸로.

진짜 재밌는 것도 짜증나요ㅜㅜ 너무 더워요ㅜㅜ

2012-07-24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5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5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5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태 2020-03-20 0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 언저리에 남긴 주절거림이 이렇게 시간이 지나 다른 사람에게 닿았습니다. 거침 없이 쓰였으나 기어코 끝까지 내려보게 만드는 이유는 선명한 문장 때문인가요, 나도 구역질을 느끼기 때문인가요. 8년이 지난 당신은 어떤 모습인지 묻고 싶습니다. 많은 것을 잊으셨나요, 아니면 저 언저리에 오랫동안 떠돌 운명을 예감하고 계신가요, 말이 필요없나요.

아이리시스 2020-08-28 22:20   좋아요 0 | URL
여전히 거기, 계신가요. 알라딘에 가끔 오나요? 저는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순응했고 많이 가라앉은 일상을 살아요. 다신 서른 언저리에 했던 생각들로, 저로 돌아갈순 없을 것 같아요. 지금도 꽤 괜찮거든요 : )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별을 스치는 바람 2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 권의 책에 대해 정성껏 혹은 혼을 다해 말하는 일이 어느새 좀 어려워졌다. 쉽게 읽기와 단편적 쓰기만 가능하다. 읽기와 사색, 글쓰기 사이에서 방황하며 줄세우려한지 한 해 두 해도 아니지만 그동안 나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심지어 왜 읽는지마저도 희미한 상태로 앞으로 나아가려 발버둥쳤다. 시간이 멈춘다. 문장과 책으로 쌓인 벽이 허물어진다. 이 바람을 타고 식민지 청년들이 목숨처럼 읽었던 모든 작가와 책들이 불어온다. 어쨌든 작가 이정명이 윤동주를 말한다면 그건 반드시 읽어야한다는 뜻이다. 윤동주의 시(詩)에도 생(生)에도 관심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뜻이며 당장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언젠가 <절정>이라는 특집극을 보고 이육사(李陸史, 1904-1944) 시인에 대해 썼었는데 이 삶은 그보다 더 무겁단 말인가. 아는 게 별로 없다. 오히려 다행인가. 시를 읊조려본다. 그는 스물 아홉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다. 두 시인의 삶이 다르지 않다. 시작부터 먹먹하다. 또 이 시대인가.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삶은 더 팍팍하고 더 불꽃 같고 더 짧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하던 그는 이제 없다. 잔혹하고 끔찍한 상상력으로 복원하는 일제의 만행과 생체실험, 그의 마지막 1년을 그려내는 이 소설이 소설이 아니라서 막막하다. 읽을 수 있을까. 그의 삶을 끌어안기에 이 계절과 시대가 가혹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序詩))

 

돌아보고 싶지도 않은 형무소, 삶 뒤에 남겨진 것들의 헛헛함과 팍팍함, 무겁고 퀴퀴한 공기가 전부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날선 짐승처럼 고독했던 한 간수(스기야마 도잔)가 1944년 겨울 어느 날 나체로 천장에 목매달린 채 발견된다. 징병되어 형무소로 온지 3개월 된 신참 와타나베 유이치에게 그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 밝혀내라는 은밀한 지시가 내려지고, 아직 스물이 채 되지 않은 앳된 소년의 형무소 구석구석 탐험기가 시작된다. 슬프고 우울하고 고독하고 미치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제3수용동에는 악질 중의 악질로 손꼽히는 조선인 죄수들이 산다. 그들이 대단한 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제 나라를 찾겠다는 투쟁이 겁나 제국 스스로가 이름 붙인 것이다. 모든 기록과 서류를 검토하던 와타나베는 거칠고 난폭한 최치수 일당을 스기야마의 살인자로 내정한 다음, 그의 삶과 수감생활을 하나하나 캐지만 전쟁통의 여느 인생이 그렇듯 뭐하나 뚜렷한 게 있을 리 없다. 수용동 내의 모든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라 사실로 쓰여진다. 불리한 진실은 소각되고 유리한 진실이 탄생한다. 다만 그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차례로 소동을 일으켜, 들어간 지 3일이면 영혼마저 잃어버린다는 독방으로 기어들어간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 눈여겨본다. 최치수에게 다가간 와타나베는 스기야마와 최치수 본인에 대해 묻고 들으며 전쟁을 나기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영혼마저 내놓은 간수 스기야마의 삶과 죽음에 대한 조각난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간다. 그러던 중 간사한 기회주의자 소장에 의해 살인자는 최치수로 낙인 찍힌다. 그는 없는 죄를 인정한 채 사형당한다.

 

누구의 삶이 더 가엾고 슬픈지 논하기에는 시대가 어지럽다. 전쟁에서 승리국이 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일본국과 다른 나라들. 가해자가 누구고 피해자가 누구든 전쟁 안에서 영혼을 잃어가기는 매한가지다. 영혼을 잃으면 곧 생명을 잃는 것과 같다. 와타나베는 마흔이 넘은 스기야마의 고독한 생과 마지막을 추적해가는 한편, 최치수를 비롯한 조선인들에 대한 엄청난 소음을 듣는다. 그는 헷갈린다. 혼란스럽다. 시와 문장과 별과 책을 사랑하는 민족, 힘겨운 노역장에서 잠시라도 틈이 생기면 늘 머리를 맞대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미소마저 띄고 있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길래. 나중에 모든 것이 꿈과 희망을 나누는 시간이었다는 걸 안 순간 그는 전율한다. 영혼까지 하얗던 민족, 전쟁의 적국이 아닌 식민국임에도 제국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민족, 조선인들의 모든 문장과 시, 책의 중심에는 매순간 히라누마 도주(윤동주)라는 인물이 존재했다.

 

이 이야기는 혹독하게 스러져가는 전쟁중의 어느 형무소에서 스기야마 도잔이라는 한 일본인 간수의 영혼을 구원한 조선인 시인에 대한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뉠 수밖에 없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문장'과 '시(詩)'라는 빛으로 슬프도록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던 한 남자와 한 남자의 뜨거움에 관한 것이다. 글이 뛰어난 동주는 온 편지가 검열을 당해 자신들처럼 이 형무소 안을 빠져나가지 못한 채 소각될 때, 서러움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종이 위에 쓸 줄 알았다. 독방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을 하염없이 두드리던 최치수 일당은 유약한 외모 속 강인한 생명력을 먼저 알아보고는 음모에 끌어들이려 한다. 하지만 동주는 굴복하지 않는다. 아니, 그의 동조는 목적은 같되, 방법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를 바보라 놀리던 최치수가 어느새 동주를 맹신해 저지르지 않은 죄를 모두 인정하고 떠날 만큼 제3수용동의 동주라는 인물은 크고 빛났다. 자기가 가진 모든 빛을 동주에게 얹어주고 떠난 최치수도 마찬가지였다.

 

동주는 수감동 안 모든 죄수들이 눈물로 쓴 편지를 소각되지 않도록 대필했고, 이를 세상으로 내보낼지 말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스기야마였다. 뼛속까지 악마인 줄로 알았던 스기야마는 날마다 날아드는 동주의 편지글 속에서 봐서는 안될 것을 본다. 두 영혼이 통한 것이다. 그것은 금기시 된 영역이자 지양되어야 할 우정이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희미한 문장과 시로서 우정을, 영혼을, 전쟁을, 이를 제외한 수많은 것들을 나누고 이겨왔다. 스기야마는 동주의 천재적인 시적 재능을, 동주는 스기야마의 악마 같은 외면 속에 가려진 전쟁의 상처와 개인적 나약함을 통찰했다.

 

수용동 안에 들어온 제국병원 의료진과 미도리라는 간호사, 간호사가 연주하는 오래된 피아노, 형무소 안의 유일한 꽃과 희망이던 피아노 반주 맞춰 노래하는 성가단은 조선인을 비롯한 모든 수감동에서 '별'처럼 여겨지는 죽지 않은 하나의 인간성이다. 누구도 말살하지 못할 내면 깊은 곳의 순결이기도 했다. 하지만 온갖 고문과 매질로 독방 생활을 자처하면서 지키고자 했던 무엇 때문에 동주는 하루하루 쇠약해져 갔다. 그즈음 이전까지는 없던 의료진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잊혀져가는 기억과 가눌 수 없는 육체, 잃어가는 영혼을 두눈으로 확인할 뿐인 일련의 일들로 스기야마는 갈등한다. 소각해야 할 시(글)와 더 깊이 탐구하고픈 시(글) 사이에서 고뇌하는 스기야마는 나중에 와타나베가 그런 것처럼 동주를 감싸고 보호한다. 죽음을 막아주고 시를 쓰길 부탁했으며, 살아남길 희망했다. 하지만 이들의 간절함과는 반대로 모든 것은 서서히 부서진다. 단 하루라도 조국으로 돌아가 햇살 아래 바람을 맞으며 별을 바라보고 싶었을 이들의 한숨과 눈물과 희망이 행간마다 너울댄다. 꿈처럼 아득하다. 돌아오지 못한 영혼이, 말살되어간 육체와 영혼과 모국어와 문장들이, 자신이 쓴 시로 단 한 권의 시집을 출판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냉전시대에 희생당한 청년의 꿈이 바스러져 간다. 문장과 단락과 페이지마다 살아숨쉬는 이들의 영혼이 아우성치기라도 하는 듯.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아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시는 감동에 감정을 더한다. 릴케와 고흐와 프랜시스 잠과 스탕달과 도스토예프스키와 괴테, <몬테 크리스토>와 <삼총사>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와 작품들이 이 소설을 관통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제3수용동에 수감된 이들에게는 단 한 권도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권의 책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하나를 얻기 위해서라면 영혼마저 팔았을 그들에게 책은, 불꽃처럼 사라져가거나 냉혹한 손길에 소각될 가지지 못할 유일한 희망일 뿐이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별이 없었다. 형무소 안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도 없었다. 안과 밖이지만 전쟁 속에 갇힌 건 같았다. 동주는 단 2년을 선고받았을 뿐인데도 영영 민족과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짐승같은 타국 땅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에는 별이 빛나고 있지 않았다. 그 순간에 별은 어디를 비추고 있었을까.

 

한 권이 아니, 두 권의 문장 전체가 시처럼 반짝인다. 그들은 죽어 시가 된 것인가. 다소 아스라이 그려진 실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하지만 진짜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 끔찍한 이야기를 언급할 자신이 없다. 와타나베가 밝히고자 다가간 진실은 우리(조선인)만이 피해자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절망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으니까. 대체 스기야마와 미도리와 와타나베가 이미 벌어진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란 뭐가 있었겠으며, 있었다한들 가능했을까.

 

살려준다는 의료진 말에 그들은 의무병동으로 옮겨져 주사를 맞았다. 처음에는 약인 줄 알았다. 나중에야 독인 줄 알았다. 어떤 이는 왜 죽는지 모른 채 죽어갔다. 굵은 주사기가 팔뚝을 뚫고 약물이 몸 속으로 흘러들어갈 때, 그가 그것이 자신을 완전히 죽이고 짓밟는 거라는 사실과 영혼을 갉아 먹히고 있다는 사실과 곧 모든 시와 기억을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매 순간 가늘게 부서져내린 희망이지만 이 순간에도 희망을 찾아 주사와 피아노 반주의 노래소리를 바꾸었을 그의 마지막 희망이 내게는 다급한 절망이란 게 멀쩡한 정신을 좀먹는다. 밤하늘의 별은 당연한 것이 아닌데도 아이들의 연날리기는 일상이 아닌데도 자라는 풀과 웃지 않는 벌레와 다정하게 자장가를 불러주던 어머니의 목소리와 쓰다듬는 손길은 일상이 아닌데도 모두가 그런 줄 안다. 단 한권의 책을 갖기 위해 지하로 가는 땅굴을 파고, 자유로운 바람과 반짝이는 별 하나를 보기 위해 즉시 총알이 날아와 박힐 상황을 무릅쓴 채 나가려 했던 이들의 시간을 이제와 어떻게 끌어안을 수 있을지 먹먹하다. 내 평온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얻은 게 아니라는 뼈저린 사실을 왜 우린 종종 잊는 걸까. 어째서 더 죽을 힘 다해 살지 못할까. 왜 이루지 못할 일에 매달려 불평하고 왜 바꿀 수 있는 일은 쉽게 포기해버릴까. 암울한 시대도 이용가치는 있다.

 

겨울을 나기만 하면 또 한철을 날 수 있다던 감방 안의 작은 희망, 부스러기를 붙잡고 한마음으로 책과 책을 말했던 민족이 바로 우리다. 이제와서 위기철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잘 써먹는 위기도발, 한국공격(속터지는 독도발언), 내부결집으로 몰아가고 싶진 않다. 피를 갈아채울 순 있어도 그렇다고 출생의 비밀을 가릴 순 없다. 우린 강했고, 타국을 공격하지 않고도 그 누구보다 용기있게 싸워 영혼을 불살라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장렬하게 꺼져간 불꽃 같은 민족이다. 잘못은 글과 말과 조국과 어머니를 가진 민족의 몸과 영혼을 태워 없애기만 하면 깡그리 소각될 거라 믿었던 어리석었던 이들에게 있는 것이고, 비록 수용동 담장벽을 넘지 못했던 초라한 연이지만 연을 만들어 날려보려 했던 이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희망이 절망으로 변했대서 희망을 탓할 수 없었던 이들은 절망 속에 든 희망을 끌어안고 전사했다. 시는 종이 위에 글로 쓰는 게 아니라, 마음 속에 정신으로 쓰는 것.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린다고 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일본이라는 제국은 몰랐고, 하얀 정신으로 무장한 우리 민족은 알았다. 그래서 이겼다.

 

바람은 우리가 바람인 줄 모르는 동안에는 바람이 아닌가. 하물며 스쳐지나가는 바람은 누구에게나 말을 건넨다. 말을 건네는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 이름없이 바스러져간 조선인들과 담장 밖에서 그들을 지켜주던 쓸쓸한 별과 갇힌 이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모래와 흙을 하염없이 실어나르던 바람은 모두 우리 편이었다. 육체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들이 남긴 정신은 영원히 조국을 비추고 또 지킨다. 시인 윤동주의 짧은 삶과 남겨진 시는 엄청난 풍파를 겪고 살아남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여름밤은 책 한 권을 읽기에 지나치게 짧다. 윤동주의 삶은 여름밤에 삼키기엔 너무나 크고 무겁다. 그리고 벅차다. 시가 반짝인다. 문장의 결이 종이 위에 녹아내린다. 그 날 사라진 별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바람과 별과 시가 보일 것이다. 문장은 더이상 그들을 가두지 못할 것이다. 죽음으로 찾은 자유가 오늘 밤에도 그들을 불러내 평소보다 더 밝은 별이 되었으면 좋겠다. 살아있다고, 자유롭다고 말해준다면 나는 으스러져 울어버릴 것이다. 오늘밤은 어젯밤과 다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시는 새로 씌어야 하며, 이 소설은 누가 죽고 죽이는 지를 떠나 시대의 행간에 숨은 의미를 되새기며 읽어야 한다.

 

그는 만으로 고작 스물 일곱 되던 해 시대를 등지고 조국을 안은 채 수도없이 많은 작가와 책을 탐하고 숨막힐 듯 아름다운 문장을 뱉어낸 천재시인이었다. 소설 속에 아름다운 문장이 쏟아지지만 모든 문장은 이 천재시인의 삶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시(詩)는 가슴에 박혀 마음결을 어루만지는 가장 고결한 언어다. 시는 용감하고 잔인하다. 뒷이야기는 훨씬 더 잔혹하지만 그게 바로 그가 속했던 시대의 유일한 진실이었다. 이토록 쓸쓸한 이야기가 당신의 가슴을 울리지 못한다면 이 시대 소설은 실패한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댈러웨이 2012-07-24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의 이 폭탄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저 밖에 없는 것 같애요.
이정명 그렇게 좋아요? 그렇게 단호할 정도로? 품어야 할 작가가 또 늘어난 거에요?

(근데 서재 왜 이렇게 조용해요? 벌써 피서 시즌이에요?)

아이리시스 2012-07-25 00:56   좋아요 0 | URL
피서시즌도 맞지만(쫌 이른데?!) 더워서 피서를 부르는 날씨예요. 폭염이에요. 해운대 바닷가 마실가면 해변의 여인이 되는 게 아니라 인파에 깔려서 짜증만 나는데..

폭탄 에너지!(ㅋㅋㅋ) 리뷰랑 페이퍼를 묵혀서 쓰면 이상하게 길어지네요. 요즘은 쓰다만 게 너무 많아요. 이정명보다는 윤동주가 좋아요. 예술혼이 살아있고, 시대에 시가 어떻게 타인의 신념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문학전공자나 문학애호가들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에요!

소이진님이 없어서 그래요. 이 더운데 어린이 소이진님은 대구에..( '')

맥거핀 2012-07-25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정주였나, 이광수였나, 다른 누군가였나 기억이 잘 안나는데, 왜 친일을 했느냐는 물음에 일본이 그렇게 빨리 패망할 줄 몰랐다,였다죠. 하기는 그 때 많은 지식인들조차도 일본이 그렇게 폭탄 몇 방에 무너질 줄 알 수가 없었겠죠. 그러니 반대로 보면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이 진짜 대단해보이기도 해요. 거의 희망이 없어보이는 일에 모든 것을 걸은 걸테니까요. 글을 읽으면서 시를 읽으니 시가 좀 달라보이네요.

아이리시스 2012-07-25 01:01   좋아요 0 | URL
그렇죠..이광수 작품들을 저는 정말 좋아해요. 카프문학 다음으로요. '시공사'에서 나온 책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입할 때가 있거든요. 이런 이중성. 내가 닥쳐보지 않은 이상 알 수가 없네요. 독립운동 했던 분들은 진짜 대단하지만요, 그게 국가적 차원에서지, 개인적 차원으로는 더없이 불행한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본지진났을 때 별로 슬퍼하지 않았어요.(응?)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국민들이 고생하듯, 과거책임을 지는 거죠.

이 책이 완성도와 문학성이 '아주' 뛰어나다고는 못하는데요. 정말로 시가 다르게 읽히고, 가슴에 콕 들어와박혀요. 같이 보는데 이 책이 [제노사이드]를 이겼어요. 마음속에서 일본소설을 밀어냈어요!(진짜 주관적인 감상이다..)
 
피렌체에서의 이틀 밤
로마제국, 영광의 날들에 바치는 글

 

 

세상에 단 하나, 혼자 떠나도 심심하지 않을 것 같은 소도시가 있다면 그건 베네치아다. 산타루치아역으로 통하는, 들어서자마자 짠 비릿내가 훅 끼쳐오는(나는 부산을 떠나본 적 없는 부산사람이라 다른 지방 사람들이 부산역에 내릴 때 그렇더라는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정말로 그랬는데 이건 과장이 아니라 그곳은 기차역 바로 앞이 바다니까 당연한 것이다) 리알토 다리와 바포레토와 곤돌라, 산 마르코 성당과 카사노바의 도시. 마지막으로 물의 도시. 그곳은 온 전역의 유럽 배낭여행객들을 쏟아내는 유럽 아니 이탈리아의 심장 같은 곳이다.

 

어쨌거나 피렌체도 쓰고 로마도 썼으니 이번에는 베네치아다. 갑자기 아무 것도 없이, 어떤 방향성도 없이 [이탈리아 3종 세트]를 완성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먼저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의 고뇌와 열정이 잘 나타나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과 <토니오 크뢰거>의 토마스 만의 소설집으로부터 시작한다.

 

 

 

 

 

 

 

 

 

 

 

 

 

 

 

 

토마스 만은 <마의 산>이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1929년 노벨상 수상작) 같은 장편도 훌륭하기로 유명하지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과 [토니오 크뢰거]는 우수한 단편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수준의 문학읽기에 도달했을 때에야 읽는다, 헤세나 괴테처럼 중학교 때 읽는 경우는 잘 없다. 예술과 타락, 순수와 퇴폐를 예술의 본성과 연관시켜 논쟁,회상 형식을 빌어 그리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과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동경하며 예술에 대한 뜨거운 고민을 시도하는 예리하고 예민한 토니오와 그의 질투와 경멸을 받는 속 편한 한스 한젠의 대립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토니오 크뢰거]는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분량이 짧고 곱씹으며 여러 번 읽을 만한 '예술과 예술가의 고민'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다. 두말 할 필요 없이 풍경과 영상미, 이미지가 다소 지루해질 수 있는 내용을 압도하는 영화도 있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떠올릴 사람이 있다면 단연 바람둥이의 대명사 카사노바다. 카사노바는 1725년 4월 2일 베네치아 출생으로, 17세 때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천재두뇌의 소유자였다. 그는 약 1400명의 여인의 체취를 탐했으며, 왕의 딸과 바람을 피운 죄로 두칼레 궁전의 맨 꼭대기 층에 있는 방에서 재판을 받고 궁내의 감옥으로 가는 탄식의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이 다리를 건넌 죄수 중 단 한 명이 탈출했는데 바로 카사노바다. 유일한 탈출죄수였던 그는 이후 온 유럽을 휘젓고 다닌다. 카사노바가 간 곳을 따라 유럽을 여행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정도. 그는 희대의 천재였으며 온갖 직업을 전전할 정도로 능력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다 그렇듯 죽음마저 화려하지는 않았다.

 

 

 

 

 

 

 

 

 

 

 

 

 

 

슈니츨러의 [카사노바의 귀향]은 카사노바의 노년을 다룬다. 젊은 날이 아무리 화려해도 말년까지 찬란하기 어디 쉽던가. 그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하는 고민과 낙담 같은 것들을 소재로 썼다. 덧붙이자면 저기 표제작 [꿈의 노벨레]는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만이 부부로 출연했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아이즈 와이드 셧}의 원작소설이다.

 

베네치아에 가보기 전이었다면 이 영화를 보고 신혼여행지를 베네치아로 정했을 것 같다. 신혼여행의 특성상 어디에 있느냐보다는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니까 베네치아의 전망 좋은 방을 물색해두고 거기서 이 도시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 이런 영화 한 편 찍는 건(안되겠지;;) 어떨까. 신혼여행지에서의 갈등이 영원한 이별이 되지 않길 바라면서. 영화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다.

 

 

 

 

 

 

 

 

 

오랜만에 셰익스피어로 가볼까.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4대 비극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비롯해 <템페스트>지만 베네치아 하면 떠오르는 고전, 맞다, <베니스의 상인>!

 

 

 

 

 

 

 

 

 

 

 

 

 

 

 

알 파치노와 제레미 아이언스가 동시에 나오던 영화를 심야시간대에 스크린으로 보며 꾸벅꾸벅 졸던 기억이 난다. 장황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잠에는 이길 수가 없던 셰익스피어. 어떻게 옮겨도 그 자체로 훌륭한 시어인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럼 이번에는 액션으로 가볼까. 물 위 액션씬이 멋졌던 영화, 미니 쿠퍼로 수상스키를 즐기는 것 같던 주인공들이 매력적이던 {이탈리안 잡}은 베네치아 로케와 범죄액션에도 불구하고 내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나는 지금도 그렇고 액션이 그다지 취향이 아니다. 다시 보면 어떨지 모르지만 샤를리즈 테론과 에드워드 노튼은 마음을 좀 움직이게 하긴 하는데.

 

 

 

 

 

 

 

 

안젤리나 졸리와 조니 뎁의 이 재미없는 영화 {투어리스트}는 배경만 맘에 든다. 여행 생각 그것도 비행기 탈 생각 0%일 때가 여름인데, 조금 심장이 뛰기도 하는데. 대체 이 주인공으로 이런 영화는 뭐하러 만드는지 모르겠다. 투어리스트는 관심없고, 이탈리아 일주는 언젠가부터 이루지 못할 듯해서 더 간절한 꿈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이런 책을 써보는 거지. 오로지 자기만족으로. 모든 에세이와 여행에세이는 자기만족적 나르시시즘 80%와 복합의 20%가 더해져 탄생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만 먹고 살 수 없을 때 딸기 아이스크림 한 입은 굉장한 행복이 되기도 한다. 모든 책이 의미있고 어렵고 또 내 마음에 들 필요도 없으니까. 정 맘에 안들면 안 사보면 그만이다. 그런데 내가 대부분의 여행에세이를 항상 좋아한다. 좋아할 만하게 생겼고, 막상 사면 또 좋아서 안고 다니면서 본다. 책이 나온 이유와 경위를 잘 알기 때문에 평범한 기대치가 정해지고 그 기대치만 충족시켜주면 별문제가 없다.

 

 

 

 

 

 

 

 

 

 

 

 

 

 

 

아, 이 아름다운 수상도시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추리소설(이라기엔 뭣한데)도 있다. 베네치아의 명소인 라 페니체 오페라 극장의 '라 트라비아타' 공연무대를 배경으로 하는 <라 트라비아타 살인사건>과 18세기 베네치아의 뒷골목을 재현하며 브래드 피트의 영화 {세븐}과 동일한 구조로 가는 <단테의 신곡 살인>은 유명한 소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썩 재밌다는 평가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바흐가 존경하다못해 경전으로 삼았던 비발디는 17세기 중엽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베네치아에서 [사계]를 듣는다면 영원히 해가 뜨지 않거나 빛이 사라져도 괜찮을 것 같다.

 

 

 

 

 

 

 

 

 

 

 

클래식 음반은 다 이렇게 앨범 자켓이 예쁜 건가. 사본 적이 거의 없어서 모르겠다. 오랜만에 클래식의 세계로 풍덩 빠지기엔 여름이 너무 덥지;;

 

동양의 이탈리아 역사연구가 시오노 나나미는 베네치아에 관한 이런 책들을 썼다. 내가 이탈리아, 그것도 베네치아를 탐한 지는 아주 오래 돼서 이 책들은 예전에 도서관에서 다 읽은 책 같은데 도서관에서 읽은 책을 샀을 리 없으니, 이제 사야 할까. 그런데 이 책들이 그렇게 완성도 높은 인문서들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제대로 긁어주는 베네치아 이야기인 건 분명한데.

 

 

 

 

 

 

 

 

 

 

 

 

 

 

 

최인호의 <상도>와 쌍벽을 이루는 상인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은 정말 어릴 때 읽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책 대여점이 한창 시작과 동시에 붐이 일던 때, 대부분 만화책을 빌려봤지만 이렇게 당시 나온 소설들을 읽기도 했었다.

 

 

 

 

 

 

 

 

 

작가는 네덜란드의 거장 루벤스가 그린「한복을 입은 남자(A Man in Korean Costume)」에서 모티브를 얻어 소설을 썼다. 책소개 글은 이렇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이탈리아에 건너가 세계무역을 주름잡은 한국인, 안토니오 코레아의 일대기와 국제 경제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활로를 찾기 위한 후손 유명훈의 끈질긴 노력을 따라가다 보면 비범한 상재와 진정한 상도를 발휘하며 온갖 역경을 지혜롭게 극복한 자랑스러운 한국인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17세기 거장 피터 폴 루벤스가 조선 사람을 모델로 그린 그림, 이탈리아 사람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일본 나가사키에서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조선인 청년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다는 기록, 남부 이탈리아의 알비라는 작은 마을에 코레아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직접 연결되지 않는 사실을 기반으로 이 팩션 속 인물들과 이야기를 창조해 냈다.

 

베네치아는 낭만과 꿈 뿐만 아니라 각국의 상인들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던 중동 교역의 중심지였다. 13세기 이곳 출신의 상인이었던 마르코 폴로는 일찌감치 동방여행을 떠나 <동방견문록>을 내놓았다. 우린 서방을 못 가서 야단인데 그 물 좋고 볕 좋은 곳에서 태어나놓고 왜 동방으로 여행을 왔을까. 그가 동방에 대해 느낀 건 우리의 것과 많이 다를까. 이 책 역사책에서 들을 때는 고리타분하게 느껴졌는데 오, 좀 궁금해졌다.

 

 

 

 

 

 

 

 

 

그곳은 멜로와 로맨스, 사랑과도 참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도시다. 이별하기에 좋은 도시는 아니다. 부서지는 햇살 아래 반짝이는 푸른 바다를 보면서 어떻게 이별하는가. 아름다운 어떤 장소에 갇힌 것처럼 작고 아담하고 조용한 이미지는 환상을 북돋기에 충분하다. 실제로는 작은 도시로 엄청난 여행객들이 공항과 기차역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늘 본섬의 바포레토 주위가 시끌벅적한데 감수할 만하다. 가로등 불빛만이 밝게 비추던 은은함 속에 드러나던 물 위의 도시를 훔치고 싶었다. 이탈리아 로맨스를 시작하려면 피렌체도 로마도 아닌 베니스에서. 나는 밀라노 로맨스를 꿈꾸고 있지만. 그리고 이 영화.

 

 

 

 

 

 

 

 

 

 

 

 

 

 

데이빗 린 감독의 영국영화. 1955년작. 줄거리는 이렇다.

 

이태리 본토와 베니스를 연결하는 철교 위로 한 열차가 달리고 있다. 열차 안에서 오랫 동안 비서일을 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풀려고 혼자서 유럽 여행을 하는 제인(Jane Hudson: 캐서린 헵번 분)은 차창 밖의 풍경을 8밀리의 카메라로 열심히 담아내고 있다. 베니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는 낮에는 모든 외로움이 사라지지만 숙소로 돌아오는 밤거리에서 본 연인들의 모습에 그녀는 외로움에 지쳐버린다. 그러던 어느날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는 광장 한구석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중년의 이태리 사나이인 레나또(Renato Di Rossi: 로사노 브래지 분)를 만나게 된다. 제인은 외면하지만 골동품점에서 다시 만난다. 만남의 순간이 너무 우연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레나또에게는 별거 중인 아내와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의 사랑은 베니스를 뒤로 하여 아름답게 막을 내린다.

 

[출처-네이버 영화]

 

처음 들어보는 영화지만 베니스, 유럽 여행, 기차, 만남, 우연, 사랑, 오오, 외도까지. 아름답게 막 내리는지는 봐야 알겠고, {콰이강의 다리},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인도로 가는 길}까지 내가 좋아한 영화만 만든 감독이니, 이 영화도 분명히 좋을 것이다.(오랜만의 장담)

 

 

마지막으로 베네치아 하면 카니발이다. 내년 카니발이 2013년 1월 26일부터 2월 12일까지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고,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아니 세계 최대의 축제 중 하나로 꼽힌다. 'Carne vale : 고기여, 그만'이라는 뜻이다. 내가 베네치아에 갔을 땐 이 축제가 이틀 정도 남은 날이었는데 무식해서(!) 그걸 꼭 봐야한다는 사실을 몰랐고, 달랑 가면 하나 사서 그냥 갔다. 어디로? 피렌체로. 피렌체에서 로마로.

 

베네치아 카니발(Venezia Carnival)

 

1268년 처음 시작되었으며, 사순절의 2주 전부터 열린다. 카니발 기간에는 민속놀이, 황소 사냥, 곡예사의 가장 무도회가 진행되며 이를 보러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수십만 명의 관광객들과 형형색색의 고깔모자와 가면들로 도시의 좁은 골목마다 가득 찬다.

베네치아 카니발의 가장 오래된 의식은 사순절 전 목요일에 행해졌다. 이날은 일종의 전쟁을 위한 공물인 황소 1마리와 12마리의 돼지가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에 의해 준비되었고 잔인한 의식이 끝난 뒤 대중 앞에서 그 동물들을 죽였다. 이 의식은 12세기에 있었던 베네치아공화국과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관할국의 대결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고관들 앞에서 행해졌으며 칙명에 의해 1525년 중단되었고 황소 한 마리의 목을 자르는 단순한 행사로 바뀌었다.

카니발 기간 동안에는 아퀼레이아에게 승리한 날을 기념하는 경축 행사 등 많은 행사와 말을 이용한 스포츠, 공중곡예, 민속전시회가 벌어지는데, 이것들은 숙련된 광대와 '콤파니 델라 칼자'라는 단체에 의해 진행된다. 이들은 여러 개의 축제행사를 계획하고 공연하는 활동을 하며, 각 '콤파니아'는 귀족 혈통의 회원 20명으로 구성된다.

현재 베네치아 카니발은 이탈리아 최대 축제이자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축제에 속한다. 이 기간 동안 시 당국은 다양한 문화행사를 마련한다. 그중 산마르코 광장에서 펼쳐지는 가면과 의상대회에서는 베네치아의 옛날 가면과 의상, 현재의 가면과 의상이 출품되어 현재와 과거가 만나는 장을 이룬다.

 

출처-네이버 테마백과사전 


 

 

다들 구글링하는데 버릇이 돼서 나도 모르게 자꾸 네이버에;;

 

내가 관심있는 게 바로 이 가면축제였고, 있는 집 아니 높은 집 파티 때 로맨스 소재용으로도 빠지지 않는 이걸 꼭 해보진 않더라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쓰지도 못하고 장식용으로 겨우 한국까지 데려온 검은색과 흰 색이 섞인 석고 가면 하나가 거실 피아노 위에 아직도 놓여있을 뿐이다. 요즘은 베네치아 가면 축제 보다는 스페인 토마토 축제에 더 가보고 싶다. 온 몸에 토마토 칠갑 아니 범벅되면 어떤 느낌일지도 궁금하고, 섹스의 로망 요플레랑 비슷한 기분일지도 궁금(응?)하다. @.@

 

 

예전에 미드에 이런 게 있었다. 다 보지 못해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카니발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색적이고 칙칙한 느낌이 이질적이어서 두려웠던 적이 있다. 가면이란 게 생각해보면 되게 무서운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도 가면 쓰고 왔고, 보통 나쁜 짓 할 때 스스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용하는 법이니까. 얼굴을 가리면 아무 일이나 나쁜 짓도 막 할 수 있으니 가만보면 로맨스의 소재가 아니라 범죄의 소재로 딱인데, 것도 좀 고리타분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내용은 전혀 낭만과 상관없는 스릴러/공포인데 당시 좀 보다가 시청률 때문에 급하게 시즌이 마감돼서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걸 보고는 뒷전으로 미뤘다. 한창 빠져있는데 마무리도 없이 급하게 끝내니, 욕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놈의 돈이 사람 잡는구나, 했었는데 다음 이야기 궁금하다고 죽을 일도 없겠지만 만약 죽을 것 같아지면 안 죽기 위해 작가라도 찾아가야 하는건지 어쩔 건지는 각자 알아서.

 

 

 

 

 

 

 

 

 

 

일단은, 과거의 찬란함을 뒤로 하고 그 많은 우아한 역사를 지닌 채 늙어가는 이 도시 '베네치아'의 좋은 점만 보기로 하자. 

 

 

 


댓글(29) 먼댓글(1)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로마제국, 영광의 날들에 바치는 글
    from 너의 의미 2013-06-27 06:59 
    시오노 나나미의 <살로메 유모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원래는 읽다만 <로마인 이야기>를 끝까지 보려고 했지만 워낙 스펙타클한데다 길기도 길고 다양한 캐릭터의 복합적이고 연속적인 등장으로 심심할 틈 전혀 안 주는 이 책도 어쩔 수 없는 인문서이다보니, 한 눈 안 팔고 들입다 끝까지 팔 수는 없었다. 20대 초반에 읽으려던 것보다 확실히 편해지고 이해의 폭도 커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읽는대로 꿀꺽꿀꺽 소화가 잘 되는 건 아니었다.
 
 
2012-07-18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3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07-18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니스에서 죽다...토마스 만이 동성연애자였음을 알 수 있는 작품이죠.폴란드 출신 미소년을 묘사하는 장면을 보면 아! 미소년은 미소녀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사실임을 느낄 수 있죠.또 영화에서 그 폴란드 소년역 맡은 소년도 정말 미남이죠.

아이리시스 2012-07-23 15:24   좋아요 0 | URL
새벽에 막 댓글을 띄엄띄엄 달았나봐요ㅜㅜ 토마스 만이 동성애자였다면 으헉, <메피스토> 쓴 그 작가아들은 어떻게 나온 걸까요? 히히히히. 노이에자이트님이 일깨워주셔서 저도 언뜻 생각나긴 한데 그 아들작가를 알게 되고도 전혀 인지 못했네요. 뭐, 동성애자들에게도 언제나 아들이나 딸이 있지만요^^

비로그인 2012-07-18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개의 괴물 같다는 말이 실감나는...(저 누구라고 말 안 했어요!) 그런 글이네요. 이번에는 베니스의 세피아빛 풍경화가 연상되는걸요. 저는 언급된 작품들 중에서 토마스 만을 언젠가는 꼭 읽어보리라 다짐만 몇 달 째 하고 있어요. 토마스 만은 <베니스에서의 죽음> 말고는 다 잘 안 읽히는 것 같아요. 적어도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아름다운 소년과 강렬한 욕망이나마 있어서 잘 읽힌 듯. 그나저나 아이리시스님은 정말 '생각하는 어린이' 같아요. 너 나중에 커서 뭐가 될래? 하고 물으면 딱 잘라 대답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궁무진한 그런 꼬맹이요. 언제 한 번 베니스에 가보고 싶네요. 나룻배 타고 도시를 휘젓고 싶어요.

댈러웨이 2012-07-19 00:34   좋아요 0 | URL
누가 아이님 괴물이라고 그랬어요??? 이쁜 괴물??? 전 아니에요. 전 마르지 않는 샘물같다는 그런 이쁜 말만 했어요.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07-23 03:00   좋아요 0 | URL
열심히 먹어야 돼요, 수다쟁이님은. 아름다운 걸로만 예쁜 걸로만. 다른 거 잘 안 읽힐 거예요. 저 좀 고생했어요. 짧은데 책도 옛날 거고(2005년판 열린책들 페이퍼백) 짱나요! 저는 '생각하는 어린이'가 될 거예요. 저한테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어봐요.. 저랑 똑같이 생긴 꼬맹이를 보내줄게요. 그래서 한 백가지 정도 대답해줄게요! 나룻배 같이 타면 좋겠어요.

댈러웨이님이 하시는 말씀은 다 예쁘지만 괴물도 뭐. 예쁘니까요^^ 나는 글도 잘쓰고 예쁘고, 착해..아하하. 밤되면 잠을 자야 해요ㅋㅋㅋ

맥거핀 2012-07-18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예전에 베네치아랑 베니스랑 다른 데인줄 알았어요!(무식) 근데 이상하게 베니스하면 좀 없어보이고, 베네치아하면 왠지 귀족 느낌. 베네치아하면 '씨받이'죠.^^(베니스 영화제 강수연 여우주연상ㅋ)

신혼여행 가시면 뭐 피렌체, 로마, 베네치아 다 가시면 되죠. 저는 이태리하면 피렌체가 좀 친근감..문학 뭐 그런 거 때문이 아니구요. 여기 연고지 축구팀이 AC 피오렌티나 거든요. 축구 게임할 때 유니폼이 이뻐서 주로 선택하던 팀..ㅋ

아이리시스 2012-07-23 02:56   좋아요 0 | URL
제 남자친구는 그때가 스물 세 살이었나, 제가 한창 베네치아를 꿈꿀 때였는데 저더러 거기가 어느 나라에 있냐고 했어요. 베네치아랑 베니스는 이름이 다르니까 다른 도시라고 아는 것도 전혀 무리는 아닌 거예요ㅋㅋㅋ 그 씨받이 오랜만에 보고싶네요. 저는 이상하게 강수연이 좋아요.

그쵸.. 축구는 잘 모르지만 피렌체도 연고지구나..뭐 이런 느낌ㅋ 그런데 이탈리아로 신혼여행 가면 진짜 웃기겠어요. 신혼여행 온 사람은 한 명도 본 적이 없어요. 너무 더럽고 너무 더울 거예요. 저기 영화 신혼여행 가서 헤어지는 거 이해감. 더럽더라고요, 저 나라가.

그나저나 씨받이.......... 요즘 베니스 영화제 무슨 영화가 좋나요? 하긴 하는지 작품이 잘 안 들어오는 것 같아요.

맥거핀 2012-07-25 00:17   좋아요 0 | URL
소위 유럽 3대 영화제 중에서 칸 빼고는 베니스나 베를린은 요새 고만고만한 것 같아요. 작년 베니스나 베를린 수상작들을 봐도 크게 화제성을 끌지 못했구요. (뭐 굳이 비교하자면 베를린이 좀 더 낫지 않나 싶기도 하구요. 베니스는 베를루스코니 때문에 너무 말아먹어서..) 8월달에 베니스 영화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작품들이 화제를 끌지 궁금하기는 하네요.

아이리시스 2012-07-25 00:43   좋아요 0 | URL
8월ㅜㅜ 아 더워ㅜㅜ 겨우 칸 영화제나 오스카상 찾아보는 걸로 영화 본다고 생각했었는데 베니스랑 베를린 갑자기 확- 다가오네요. 저는 조만간 씨받이..... 그리고 임권택 감독이 찍은 강수연 영화들을 봐야겠어요!

cyrus 2012-07-18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읽어본 토마스 만의 단편소설 중에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 제일 좋았어요. <토니오 크뢰거>가 만의 대표작이지만 위의 말없는수다쟁이님 말씀처럼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에 다른 작품은 이상하게도 제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 그리고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도 보고 싶어요, 영화 중간에 삽입된 말러의 음악도 좋다던데.. 베니스도 한 번 가보고 싶고요.. 오늘 아이리시스님의 글은 저에게 베니스와 관련된 욕망만 잔뜩 주었네요 ^^;;

아이리시스 2012-07-23 02:51   좋아요 0 | URL
<마의 산>은 제가 아파서 요양가거나 절에 수양하러 들어가야지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읽은 게 많지가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저 소설은 베네치아만으로 먹고 들어가는 것 같아요. 저 단편 때문에 베네치아 방문한 1인 여기 있어요!^-^

영화가 (냉정히) 좀 지루하지만 뭐, 예술영화니까요 :)
얼른 놀러갑시다! 더워요ㅠ

2012-07-19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었는데, 왜 베네치아에서 딸기향이 나는지 모르겠서요..(수정> 왜 나는지 알았습니다!! 이런 바보같은 댓글, 쏘리~. 킁) 그나저나 밀라노 로맨스를 꿈꾸고 계시군요. 구체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꿈입니다.ㅎㅎ
저는 부산이 좋아요. 제가 도시 3종세트를 하면 반드시 넣고 싶은 도시지만, 사실은 부산 경험은 정작 부족하고, 그냥 머릿속의 낭만 도시이지요.^^
언젠가 아이님이 부산 좀 한 번 훑어주세요. 아주 지대로일 듯. (아마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와 소설이 또 엄청 많지 않나요? ㅎㅎ)

+ 흥! 벌써 베네치아의 아침과 밤과 낮을 경험하셨군요! (질투)

아이리시스 2012-07-23 02:49   좋아요 0 | URL
푸하, 그래서가 아니고 저렇게 쓰면 달콤한 내용인가 싶어 막 클릭해보잖아요.(나꼼수ㅋㅋ)
밀라노나 베로나가 예쁠 것 같아요. 세 도시는 가봤으니까. 원래 잡은 물고기에겐 먹이를 안주는 법.

자, 섬님 도시 3종세트 합시다! 원래요, 경험이 많다고 다 아는 건 아니랍니다. 그곳이 일상이 되고나면 보이는 건 정작 여기나 거기나 다를 게 없는 것 같아요. 딱 한 번, 잊혀지기 전 두 번 갔을 때 그 도시에 대해 적당한 낭만과 현실을 섞어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부산.... 해운대,광안리,태종대,자갈치,송정, 이런 거 바래요?ㅋㅋㅋ
(올드보이에 경성대부경대 앞이 나오는 건 알아요. 그 외에는 잘 몰라요ㅠㅠ)

베네치아는 빠져죽어도 좋을 것 같았어요. 물이 더럽긴 하지만=3333


카스피 2012-07-19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베네치와 베니스가 다른 도시줄 알았어요(2)^^

아이리시스 2012-07-23 02:45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ㅎㅎ 근데 베네치아랑 베니스가 이탈리아인 줄 모르는 사람도 많아요.
뭐 모를 수도 있으니까.. 저는 비엔나=빈 인게 더 놀라웠다고요=333

페크pek0501 2012-07-22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니오 크뢰거- 를 여기서 보다니 반갑네요. 글쟁이들은 다 이렇구나, 하면서
인상적으로 읽었던 작품이에요. 그래서 리뷰까지 썼지요.

공부하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다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소설에 비하면 희곡이 빨리 읽기 힘들긴 하지만 명언 같은
말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어요. ㅋ

아이리시스 2012-07-23 02:44   좋아요 0 | URL
저는 독일소설이 영 취향에 안 맞는지(그래도 괴테 좋아요! 괴테는 나의 힘) 읽을 때마다 버벅대고 어려워해요. 독일문학에는 제가 바라는 낭만이나 서정이 별로 깃들지 않은 것 같아요. 좋은 작품이고 좋아하지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과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도 다 어려운 작품 같아요.

무슨 공부라 셰익스피어를 다 찾아읽을 정도입니까? 논문 쓰셨어요? 연극무대에 환상이 있어요, 희곡은.. 다가가지 못할 꿈이죠! 희곡 중에 좋은 게 많아요^^

노이에자이트 2012-07-23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마스 만 아들이 크라우스 만이죠.혹시 가지고 있는 <메피스토>는 몇 년 전 번역된 것입니까.80년대 번역본의 역자해설이 더 자세하고 좋은데...나치잔당들이 크라우스 만이 죽은 후까지 괴롭힌 것을 보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알 수 있죠.

아이리시스 2012-07-23 22:52   좋아요 0 | URL
펭귄판이죠! 얼마 전에 알았거든요. 근데 나치와 연결된 걸 보고는 단순히 악에 대해 다루는 게 아니구나 하고선 휙- 던져버렸어요. 읽은 게 아니랍니다, 노이에자이트님. 자세한 역자해설이 궁금해지네요. 뭔가 어려워서 영화를 준비해뒀어요!

노이에자이트 2012-07-24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나치와 연결된 걸 보고 휙 던져버리다니...왜 그러셨어요? 서양엔 나치와 관련한 소설이나 영화가 정말 많은데...

아이리시스 2012-07-25 00:41   좋아요 0 | URL
아..저 혼나는 거예요?(히히히) 알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님 믿고 저 <메피스토> 읽을 겁니다! 불끈! 나치가..너무 더워서요.. 순간 뫼르소 마음가짐으로 던져버렸죠. 총 안쏜 게 다행..(휴..)

노이에자이트 2012-07-25 16:26   좋아요 0 | URL
저는 <이방인> 읽을 때 알제리 사람들이 카뮈를 싫어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아무 이유없이 왜 알제리 남자를 죽이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아이리시스 2012-07-25 23:32   좋아요 0 | URL
카뮈가 프랑스인인데 알제리 독립을 적극 지지했으니 그걸로 용서를..

노이에자이트 2012-07-27 16:42   좋아요 0 | URL
카뮈는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지 않고 일종의 자치제나 연방제를 내세워 알제리 독립운동가들과 사르트르 등의 좌익지식인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죠.특히 알제리 해방전선의 무장투쟁을 비판해서 사르트르와 결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그래서 카뮈가 알제리 독립에 대해 애매한 자세를 취했다는 지적이 많죠.

아이리시스 2012-07-27 21:34   좋아요 0 | URL
아..(한숨) 저걸 쓰고 이틀동안 들어오질 않았어.. 노이에자이트님 땡큐. 저 그..사르트르랑 카뮈를 착각..사르트르와 카뮈? 카뮈와 사르트르? 그 책 읽었는데..논쟁이 자세히 나오던데요?으흐흑 (댓글은 생각을 좀 하고 쓰라고-_-)

이상했던게요, 어떤 사람이 비난해야 할 일에 가만있는다고 그걸 욕할 수 있나요? 제 생각에 사르트르는 급진적이었고 카뮈는 현실적이었던 것 같아요. 정확히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본인만이 알겠죠. 초창기에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걸 보면 자치제나 연방제 주장이 곧 독립반대로 이어지는 입장은 아닐 듯한데 침묵한 걸 두고 모국인 프랑스편을 든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요. 그건 해석하는 사람 마음. 그래서 침묵이나 중립은 언제나 이쪽저쪽으로부터 우유부단하다고 돌팔매질을 당하는 거지만.

대부분은 가만있는 게 편하고 입장을 변명함에 있어 도움이 되죠.

노이에자이트 2012-07-29 19:3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우리는 프랑스 식민지가 아니라서 알제리인들의 아픔을 잘 모르니까요...하지만 알제리에서 카뮈는 별로 좋은 소리를 못듣는 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우리나라에서도 일제시대 때 독립을 주장하지 않고 자치를 추구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별로 안 좋잖아요.한국-알제리 일본-프랑스 이렇게 비교해보면 될 것 같아요.
카뮈 전기가 우리나라에도 꽤 나왔던데 알제리 독립을 둘러싼 논쟁은 반드시 나오더라고요.

아이리시스 2012-08-02 19:47   좋아요 0 | URL
네! 이광수 생각나서 말해놓고 좀 기분이.. 자유로운 입장을 논하기에 전쟁은 너무 복잡해요..

한국-알제리, 일본-프랑스 짱이에요!
 

 

 

 

* 경고- 엄청 깁니다.

 

영화 <데블스 에드버킷(The Devil's Advocate, 1997)>은 장르상 법정 스릴러로 분류되어 있다. 인간의 뒤틀린 욕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 양심과 재물에의 저울질 등 검붉은 포스터가 말해주듯 인간이 가진 악의 본성을 탐구하는 거대한 드라마로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며 선택의 극한까지 관객을 몰고 간다. 무엇보다 알 파치노와 키아누 리브스의 연기대결이 이 모든 것과 상관없이 전율하게 한다. 이 영화를 알려준 책은 헤닝 만켈의 <방화벽>이다.

 

 

 

 

 

 

 

 

 

헤닝 만켈은 '발란더 형사' 시리즈로 유명한 스웨덴 출신의 북유럽 스릴러 작가다. 여기 앉아 저기를 조정할 수 있는 사이버 테러를 소재로 하는 <방화벽>에서 발란더 형사가 단서상 발견하게 된 영화가 <데블스 에드버킷>이다. 요즘 드라마 <유령>에서 악성코드로 원격조정 당하는 자동차까지 보면서 사이버 테러의 무궁무진함을 흠뻑 체험중이다. 이혼 후 떨어져 사는 딸에게 전화로 줄거리를 묻지만 면박만 당하고, 수사의 단서가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한 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직접 보려고 한다. 그래서 나도 본다. 범인을 알아내야 할 임무를 띤 채 독서하고 있으니까. 이걸 두고 '빙의된 아이리시스'라고 한다.

 

"이것은 도미노와 같은 거야. 돌멩이가 하나 무너지면 이어서 모든 것이 붕괴하는 거지. 이른바 연쇄반응이 일어나는 거야. 티네스는 바로 처음 무너진 돌멩이에 해당해." (<방화벽> 2권 중에서)

 

 

 

 

 

 

 

 

 

 

 

 

 

 

 

"우리는 과거에도 종종 이런 상황을 맞은 적이 있지. 즉 두 사건이 우연히 서로 맞물려 일어나는 경우 말이야. 우리는 우연히 일어난 충돌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그 두 사건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믿는 거지." (<방화벽> 2권 중에서)

 

추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쳇바퀴와 충돌과 우연한 연관을 구별짓는 일이다. 시작점을 어디로 하느냐에 의해 수사의 단서와 추리는 일방향으로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때문인데, 같은 사람이 하던 방식대로 생각하는 경우나 같은 사람이 같은 주제로 줄기차게 써먹는 글의 소재와 문체 같은 것과 비슷하다. 다만 이걸 깨닫는 데는 언제나 시간과 희생이 따르기 때문에 초반에 쉽게 얻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헤닝 만켈이 발란더 형사에게 투여한 발상과 사고의 전환은 초기 수사의 중요성을 꼬집는 것 같다. 그는 굉장하다. 몇 가지 사건을 외따로 벌여놓더니 배경을 넓혔다가 좁혔다가 다시 넓힌다. 경계를 오가며 맛보는 짜릿함이 일품인데, 모든 패를 까고 시작하는 이 게임은 정작 끝나고 나서 후련한 게 아니라 허무하다.

 

헤닝 만켈은 처음이지만(처음 아닌 게 별로 없지만;;) 알게 된 건 <이탈리아 구두>의 번역본이 국내에 출간된 2010년이었다. 일련의 추리 시리즈가 아니라 순문학으로 그의 이름을 삼켜버렸다는 게 우습다. 겉만 보고 판단하는 뭐 그런 거. 사건은 순차적 혹은 동시다발적으로 빵빵 터지고 단서는 던져줄 듯 말 듯 애간장을 녹이다 배후에 뭔가 커다란 음모가 도사리는 것처럼 무대영역을 확장시킨다.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거나 떡밥을 던지며 복선을 깔아두는 이른바 반전 스릴은 없지만 믿음직하고 거대하고 탄탄하다.

 

 

헤닝 만켈의 배경 무대가 주로 아프리카여서 차가운 느낌이 강한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나 <스노우맨> 보다는 내용상으로 사회적 음모 분위기가 물씬나는 <밀레니엄> 시리즈에 가깝다. 북유럽 스릴러의 개요를 정리하자면, 요 뇌스뵈(노르웨이), 스티그 라르손(스웨덴), 페터 회(덴마크),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아이슬란드) 정도를 듣거나 읽었다. 

 

 

 

 

 

 

 

 

 

 

 

 

 

 

 

(여기서 읽은 책은 <스노우맨>이랑 <우아한 제국>)

 

이유없이 북유럽 스릴러로 넓어진 페이퍼를 힘껏 좁히자면 다시 헤닝 만켈로 돌아온다. 스티그 라르손이 북유럽 스릴러의 대중화를 시도했다면 헤닝 만켈은 그 프로젝트에 화룡점정 역할을 한다. BBC 방송은 '발란더 형사'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를 방영중이다. 국적은 영국인데 스웨덴 올로케라서 영상미가 상당하다. 보는 중. 영국 드라마 특유의 90분짜리 3부작의 1시즌 구성은 <셜록>에 이어 계속되고 있다. 영화 한 편 보는 것과 동일한 체력과 집중력을 요하는 진지하면서 긴박한 영국 드라마의 묵직함이 좋다.

 

 

 

 

 

 

 

 

 

 

 

 

 

BBC 방영 드라마 [Wallander]

 

 

이름 : 쿠르트 발란데르
나이 : 1948년 출생
사는 곳 : 스웨덴 남부 스코네 주의 위스타드
직업 : 위스타드 경찰서의 형사

가족 : 린다라는 딸이 있고, 아내 모나와는 이혼했음. 어머니는 그가 11살에, 화가였던 아버지는 그가 46세에 사망했음. 형제로는 스톡홀름에 사는 누이 크리스티나가 있음.
취미 : 음악 감상. 주로 오페라를 들음.
건강 : 48세에 당뇨 진단을 받았음. 몸이 무거웠을 때는 92킬로그램까지 나갔음. 용의자 사살 후 우울증에 시달려 1년 병가를 내고 쉬었던 적이 있음.
성격 : 무뚝뚝하고, 직선적이고, 침울함. 생각이 많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음. 수사관다운 직관과 끈기가 있음. 사회성이 부족하고, 때로 독불장군처럼 고집을 부리거나 다혈질적으로 분노함. 정치 사회적 시각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며, 특정 주의를 따르지 않음.

 

 

 

 

 

 

 

 

 

 

 

 

 

 

 

 

줄을 못세우고 닥치는 대로 읽어서 순서가 뒤죽박죽이라 나 좀 orz <방화벽> 다음 <미소지은 남자> 보면서 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섯 작품 다 읽을 거였음 줄 좀 세우고 읽어도 됐잖아. 헤밍웨이는 그렇게 나란히 줄도 잘 세워놨었으면서.

 

<미소지은 남자>는 장기를 사고팔 목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마저 이용하는 범죄현장을 담아낸다. 1990년대에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2010년대인 지금은 암묵적으로 있는 일이라는 점만 빼면 충격은 마찬가지다. 산 사람이 살기 위해 산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악이라면 이 악의 끝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이미 있는 일이 아니라 앞으로 벌어질 일이 두려운 이유다. 과거보다 미래가 겁나는 이유다. 이 소설에 언급되는 작품은 <맥베스>다. 악의 결정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래서 나는 굳이, 반드시, 헤닝 만켈 중간에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읽어야 했고 그렇게 했다.

 

 

 

 

 

 

 

 

 

 

<하얀 암사자>는 이 문장이 배경을 관통한다.

 

헤닝은 이것이 영국인들의 지배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얀 암사자> 중에서)

 

약 80년 전 '형제단'이라는 조직의 결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헤닝이 친구들과 함께 보어인의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기 위해 조직한 '형제단'은 50주년 되던 1968년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단체가 되었으며, 1970년대 후반 급속히 위축됐는데 이는 인종차별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이 유색인종과 흑인의 반발과 백인의 동조로 인한 대결 상황에 임박해 있었기 때문이다. 30년간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있던 넬슨 만델라의 석방이 보어인인 클레르크 대통령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은 보어인들에게 큰 배신으로 여겨진다. 과격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클레르크 대통령 암살작전은 천천히 아주 은밀하게 진행된다. 만델라가 클레르크와 함께 1993년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것 외에 아는 게 없다. 클레르크(1989년부터 1994년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제10대 대통령이었다)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철폐시킨 공로자로서 그 정책 아래 존재한 가장 마지막 대통령이었다. 작품 속 간간이 등장하는 아프리카민족회의와 KGB는 내 교양을 벗어난다.

 

죽은 뱀 한 마리. 뱀의 머리는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뱀이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도 바로 이러한 형국이었다. 죽어서 이제는 무덤에 묻혀 있다고 생각되는 많은 옛것들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있는 것과 연합하거나 대항해서 싸우는 게 아니라, 끈질기게 살아 있는 과거에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 (<하얀 암사자> 중에서)

 

배경에 도움이 되는 만델라의 여러 버전이 있다. 물론 만델라를 몰라도 헤닝 만켈을 읽을 수 있지만, 이 역사적 배경이 호기심을 끌 정도로 대단한 먹이사슬로 이뤄진 인종다툼이라 관심분야와도 맞다. 스웨덴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먼나라 남아프리카까지 뻗어있는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과 남아메리카를 이으려는 광대한 스케일에서 개연성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꼭 스웨덴이거나 꼭 남아공이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

 

 

 

 

 

 

 

 

 

아프리카의 독립과 백인,유색인종,흑인 간, 다민족간, 다종족간, 다부족간, 식민종속관계이자 먹이사슬 관계의 검은 대륙의 싸움이 고스란히 배경이 된다. 보어인은 그 중 하나일 뿐인데, 그들은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기 위해, 백인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계속적으로 편리하게 시행하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지리한 싸움을 끝맺지 못한다. 첫 스웨덴 여성의 살인은 그저 우연이었다. 만델라 암살의 킬러로 투입된 이들의 마음이 어긋나 벌어진 우연한 사건의 실마리가 마침내 풀렸을 때, 이 일이 단순한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아프리카 지도자 한 명을 죽이고 정치적으로 원하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한 특정집단(여기서는 보어인)이 오랜시간 계획적으로 주도해온 사건이란 걸 알게 되면 놀랄 것이다. 헤닝 만켈은 모든 것을 까발린 채 시작하는데도 일단 재밌다. 발란더 형사의 개인사와 경찰서 동료들과의 인간적 관계, 단순과 우연과 거대한 사건사고가 얽혀 하나의 뿌리 깊은 사건의 전말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대단하다.

 

<다섯번째 여자>는 우연한 관광객에 불과했지만 수녀 넷이 단체로 죽는 사건에 끼여 죽은 한 중년 여자를 일컫는다. 이름하여 다섯번째 여자로 통하게 될 그녀의 죽음을 이상하게 여긴 사람은 그녀의 딸이다. 그리고 다른 사건. 자동차 판매업으로 큰돈을 번 한 남자의 죽창에 찔린 죽음, 꽃가게 남자의 실종, 단서는 처음 발견된 사체의 주인공 집안 금고에 든 콩고에서의 용병 경험을 기록한 몇 십년 전의 일기장과 고도로 압축된 해골 뿐이다. 차례대로 4번째 작품을 읽어오는데 제일 난감한 단서들이다. 어떻게 다시 한 번 스웨덴에서의 죽음과 아프리카의 역사를 연결할지 궁금한 가운데, 우리의 발란더 형사는 쉴 틈이 생긴 날, 이 영화를 빌려온다. 참, 이번 편에서 그의 아버지가 뇌출혈로 급사한다.

 

 

 

 

 

 

 

 

 

이 영화는 <안개 속의 풍경>인데, 소설 속 제목은 <안개 속의 다리>라고 나온다. 그런 영화는 없는데, 우리가 모르는 영환가, 고전영화라고 해서 그 영화가 이 소설의 배경인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영화라서 호평 받은 비슷한 제목의 영화로 때우;;면 안되겠지만 이 영화는 되게 좋은 작품이다.

 

다음 인용구는 다소 역사적, 정치적인 배경인데 어떤 책을 읽다가 이런 부분을 만나 궁금증이 생겼을 때 이런저런 자료나 검색, 또 다른 책으로 자세한 내용에 대해 알아보는 게 좋다.

 

"1953년부터 시작해 보겠소. 당시에는 네 개의 아프리카 주권국가가 국제연합 회원국이었소. 그러던 것이 7년 후에는 스물여섯 국가로 늘어났고 아프리카 전체 대륙이 들끓었소. 이른바 탈식민지화가 극적인 단계에 접어든 거였소. 독립을 선언하는 국가들이 늘어났고 독립국으로 태어나기까지는 종종 엄청난 진통이 따랐소. 그 중에서는 벨기에-콩고처럼 격심한 진통을 겪은 나라는 없을 거요. 벨기에 정부는 1959년 주권 양도를 위한 계획안을 마련하고, 주권 이양 시기를 1960년 6월 30일로 확정했소. 그런데 그날이 가까워질수록 전국적으로 격심한 소요가 일어났소. 각 부족들이 나름대로의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연일 폭력사태가 발생했소. 어쨌든 독립은 이루어졌고, 카사부부라는 경험 많은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고 루뭄바는 총리가 되었소. 루뭄바라는 이름은 당신도 한번쯤 들어보았을 거요." (중략)

 

"카탕가에서의 전투에는 수백 명의 용병이 참전했소. 용병들의 출신지는 다양했소. 프랑스, 벨기에, 알제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5년이 흘렀으나, 전쟁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독일인들도 많았소. 그들은 아무 죄 없는 아프리카인들에게 복수했소.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용병들도 상당수 있었소. 이들 중 일부는 전사해 무더기로 묻히기도 했죠. 그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르오. 어느 날 한 아프리카인이 유엔군 스웨덴 진영을 찾아왔소. 그는 죽은 용병들의 서류와 사진들을 가지고 있었죠. 스웨덴 출신 용병들은 거기 없었소." (<다섯번째 여자> 중에서)

 

용병들은 돈을 가장 많이 주는 사람 편에 서서 사람을 죽였다. 명분으로야 자유라는 이념을 수호하기 위해,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있었지만 그들의 삶은 결국 피폐해져갔다. 사디스트나 정신이상자로. 그리고 지금은 사진 한 장 속 이름모를 인물로 나뒹군 채 이름도 소식도 잃은 채 살거나 죽었다. 일기장의 주인은 현재 그 이름이 아닐 수도 있고, 가명일 수도 있고, 원래 그 이름이 아닐 수도 있다. 발란더 형사는 수사가 벽에 부딪치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수사의 단서와 증거들 보다 이런 얘기가 더 가슴에 와닿는다. 인생을 통찰하고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를 촉구하는 사람들의 대화.

 

"할아버지는 자기 세계에 갇혀 살았지. 그림을 그리고, 그림 속에서 해의 움직임을 결정했어. 해는 언제나 있던 자리에 걸려 있었지. 50년 동안 나무 그루터기 위에. 뇌조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나는 가끔 아버지가 자신이 살고 있는 집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른다고 생각했어. 자기 둘레에 테레빈으로 된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사셨지."

"그렇지 않아요. 할아버지는 많은 걸 알고 계셨어요." (<다섯번째 여자> 중에서)

 

누구나 누군가에 대해 잘 모른다. 어쩌면 가장 가깝다고 믿는 그 사람에 대한 내밀한 것은 물리적 거리로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자기 세계, 바깥 세계, 그런 게 있다면, 내면으로 침잠하는 사람과 바깥 뉴스에 골몰하는 사람의 결혼생활은 위태롭다. 관심분야, 흥미거리, 삶의 방향성이 모두 다를 것이므로. 그런 것들이 걱정이 된다. 나는 너와 함께 오랫동안 잘 살아내지 못할까봐. 정작 깊은 곳으로 파고든 작품은 용병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건이었다. 가장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촉발된 살인동기 그리고 슬픈 사연과 쳇바퀴 돌듯 연결되는 부조리, 그것이 범죄. 나만 발빠지지 않으려 애쓰고 애쓰는 것만이 과연 최선일까. 삶에 최선이 있다고 보기란 힘들지만. 소수자에 대한 배려는 어느 사회에서나 문제가 된다. 여자, 아이, 장애인, 성소수자 등에 대한 배려는 인도적 차원이나 휴머니즘 차원을 넘어선 인간 본연의 윤리로 작용했으면 좋겠다. 용병의 윤리문제로 가는가 싶던 <다섯번째 여자>의 살인이 오뉴월에 서리 내리게 하는 여자의 '한' 때문이란 걸 알았을 때-특히 남편의 폭력에 의한-나는 좀 놀랐다. 용병에서 남편에게 매맞는 여자까지는 넓어도 너무 넓은 물리적 거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여름의 축제로부터 시작되는 소리소문 없는 두려움, 발란더의 동료가 살해된다. 발란더에게는 단지 동료였는데, 그는 여러 사람에게 발란더를 가장 친한 친구로 소개하고 다녔다. 그의 외로움과 고독, 관심사와 삶을 파고들면 들수록 한 사람이 남기고 간 생의 자취는 점점 더 희미해진다. 엉망으로 어질러진 사건현장에도 불구하고 찾아낸 비밀공간 서랍에서 두 장의 사진을 발견하면서 불이 켜지는 듯하지만 여전히 수사는 혼돈이다. <한여름의 살인>은 끈적하다. 유럽여행을 떠난 줄로 알았던 세 아이들의 실종, 이들이 평소 벌였다던 역사속 시대 흉내내기 가장무도회 축제, 여행간 딸의 엽서 속 서명을 딸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엄마, 동료의 살해, 단서가 네(한 명은 아픈 바람에 약속에 참여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평소 놀이처럼 게임처럼 했다던 그 변장쇼에 있을까. 늘 그랬듯 수사는 좀처럼 진척되지 않는다. 연달아 읽다보니 다소 스타일이 지루해지면서도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아쉬운 걸 보면 좋아한 모양. 같은 캐릭터를 또 불러오고 함께 숨쉬고 시간이 흐르고 묵히고 그러면서 여느 인간처럼 실수도 하고 변화하고 다치고 울고 이기심도 비치고 이런 것들이 좋다. 함께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죽은 사촌 둘로부터 찾아낸 어느 여자의 사진, 동료들은 아연해지고 수사는 미궁 속으로 빠지면서 1권이 끝날 때까지 사건의 윤곽은 짐작되지도 않는다. 마침내 한 권이 남았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최대한 읽는중의 즐거움과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거나 스포일러에 해당하는(할 것 같은) 전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쓰는 중이다) 벌어진 살인을 추적하는 중에 연쇄반응의 2차 살인이 계속 터져나오는 통에 작가가 처음부터 까놓고 시작해도 막상 끝나면 범인이 누구였는가 보다 왜 살인할 수밖에 없는가가 더 중요해진다. 소수자와 소외된 자 혹은 소심한 자들의 꽁꽁 눌렀던 분노가 발화되면서 범죄를 낳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로서 지상낙원 같던 복지국가의 나라 '스웨덴'도 뭐 별 것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범죄는 그곳이라서 있는 게 아니고 인간이기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 다양한 인간군상과 인간 본연의 성질과 기질에 의해 스웨덴이나 한국이나 범죄양상은 별다를 게 없음을 본다. 그래서 지구촌은 하나.

 

번역작을 다섯 개 끝내자마자 여름에 새로운 출간소식이 있다고 주워 들었다. 쇼~ 끝은 없는 거야.( '')

 

 

*

참고로 헤닝 만켈이 최고로 꼽는 범죄소설은 <드라큘라>와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이다. 나머지는 내가 끼운 책. 올 여름 내내 차례대로 읽고 있는 공포와 악의 문학들이다. 앞의 책 다 까먹어야 다음 책 읽고 그리고 두 번째를 까먹고 세 번째를 읽는 식이 되겠지만 언젠가 끝나긴 끝나겠지.. 네버엔딩 스토리는 사절.

 

 

 

 

 

 

 

 

 

 

 

 

 

 

 

 

 

 

**

발란더 형사 시리즈 순서는 이렇다. (도움이 되기를!)

 

 

얼굴 없는 살인자들 (1991)

리사의 개들 (1992)

하얀 암사자 (1993)

미소 지은 남자 (1994)

가짜 흔적 (1995)

다섯번째 여자 (1996)

한여름의 살인 (1997)

방화벽 (1998)

피라미드 (1999)

 

***

추리나 미스터리를, 그것도 사회파를 넘어 역사파까지 읽으려면(예능을 예능으로 못 받아치는 나는) 당연히 고민해봐야 한다. 악의 역사나 영향 혹은 효과에 대해서. <악의 역사> 세트는 예전에 사이비 종교와 사탄에 관심 많았을 때 읽으려다가 나가 떨어진 전력이 있지만 여전히 흥미롭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클 2012-07-17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대단한 페이퍼네요. 헤닝 만켈은 왠지 지루할 것 같은 느낌이 앞서서 사놓기만 하고 읽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읽고 싶어지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

아이리시스 2012-07-18 10:50   좋아요 0 | URL
제가 장르소설을 많이 안봐서 누구랑 비교해야 할 지를 잘 모르고, 그래서 더 설명할 수가 없지만 살인사건 자체보다는 곁가지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헤닝 만켈이라 그래서 '사회적 배경'에 대한 페이퍼를 쓸 수 있었거든요. 90년대에 나온 건데도 오늘날이랑 하나도 다르지 않은 배경에 저는 좀 신났었어요. 좋아하는 아프리카 역사(?)도 나오고요.

머리 묶은 꼬양이 귀여워서 쳐다보고 있어요!

cyrus 2012-07-17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이 나올 수 있는 건 그만큼 헤닝 만켈의 작품을 많이 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네요. ^^
예전에 헤닝 만켈 첫 시리즈 읽어본 적이 있었어요, 그 때가 중학생(!)이었는데 그 나이에는 만켈의 소설이
낯설었던가봐요. 몇 페이지 읽다가 중도 포기~~ ㅋㅋㅋㅋ
그러다가 한동안 오래 잊고 있었는데 헤닝 만켈..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

아이리시스 2012-07-18 10:54   좋아요 0 | URL
여러 권 한꺼번에 손을 대니까 2주는 읽은 것 같은데(동거하는 기분) 헷갈릴까봐 한 권 끝날 때마다 페이퍼를 작성해뒀어요. 그..배경이 저는 흥미로웠거든요. 제가 한 작가를 쭉 읽어대는(그렇게 진득한) 타입은 아니라서, 그나마 진도 잘나가는 장르라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싫어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충분히. 근데 저는 애거서 크리스티를 세 권째 보는데도 여전히 이게 하나도 재미가 없네요. 다섯 권째 되면 괜찮으려나.. 일단 한 번에 확 다가오지 않는 건 몇 권 도전해봐야 알 것 같아요. 저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니까요ㅎㅎㅎ

icaru 2012-07-17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도움 많이 되는 페이퍼네요 ^^
추리시리즈가 아니라, 순문학 이탈리아 구두로 처음 만나셨군요. ㅎㅎ 하긴 저도 하얀 암사자나 다섯번째 여자, 방화벽은 그의 책을 읽은 순서이긴 하지만, 구매한 순서는 이탈리아 구두, 그담에 산 것이 검은 고양이 뭉켈인가 하는 책이었는데, 검은 고양이~는 심지어 아동 청소년 도서더라고요 ㅠ) 물론 처음 산 책은 아직 안 읽고, 훗날 구매한 추리물부터 읽었지만요..

아이리시스 2012-07-18 11:02   좋아요 0 | URL
정말로 도움이 되셨어야 할텐데요^^ 저는 음..<맥베스>와 <만델라 평전>을 필독목록에 끼운 제가 좀 기특했어요. 아동 청소년 도서는 어떤 내용이에요? 뭣하러 번역했을까요?(아동청소년에 무심한 1인..) 사실은 이탈리아 구두도 제목만 안답니다..

이런 페이퍼를 쓰니까 이카루님도 뵙는군요! 좋아요!!!

라로 2012-07-1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한 페이퍼에요!!^^
발렌더 형사는 늘 딸에게 구박받아요,,,ㅋㅋ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묵직한 분량이라는 말씀 딱이에요,,,영상도 아주 훌륭하지요!!
더구나 발렌더를 하기 위해 태어난 듯한 케네스 브래너의 연기도 정말 볼만하구요,,
암튼 아이리시스님 저도 자주 방문할께요,,^^

아이리시스 2012-07-23 02:41   좋아요 0 | URL
스웨덴은 멋진 나라인가 봐요. 제가 헤닝 만켈 책을 찾으며 리뷰랑 페이퍼를 꼼꼼히 읽지 않았다면 뤼야님을 못 보고 지나칠 뻔 했죠. 인사도 못하고..

볼 게 없지만 자주 오세요^^
 

 

 

 

나는 그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저기 있는 것. 쉬운 일이 아니었다. 쉽긴커녕 미칠듯한 기시감이 자꾸만 나를 10시간 전으로 15시간 전으로 20시간 전으로 24시간 전으로 돌려 나를 서울역에 세웠다가 드골공항에 세웠다가 부산역에 세웠다가 인천공항 리무진의 어느 좌석에 세웠다가 그랬다. 메멘토도 아니고 아이덴티티도 아닌데, 나는, 수없이 많은 내가 됐다. 나는 하늘에도 있었고, 땅에도 있었고, 빨간색 공중전화 박스 안에도, 파리의 길바닥에도 있었다. 제일 괴로운 건 거기에 그가 있고 여기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만 그를 생각하고, 나만 시간을 되돌리고 싶고, 나만 아쉬워하고 있고, 나만 그 말을 꼭 해야 했었다고 생각한다는 거였다.  

 

견뎌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가자고 할 때 선뜻 따라나서지 못했던 것, 그게 어디든. 그의 손을 끝내 뿌리쳤던 것, 예쁘게 안녕이란 인사를 못했던 것, 마지막이 산뜻하지도 못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지도 못했던 것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때 나는 앞으로 괜찮아질 거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염없이 초라해졌다. 괜찮지가 않으니까, 후회가 많으니까, 딱 그만큼이 나라는 걸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가장 잘 아니까, 그래서 내가 싫었다. 혼자 메멘토도 찍고 아이덴티티도 찍었다. 단독 주연. 그건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추억으로 남겨진 시간의 세 배는 앓았다. 괜찮지가 않았다. 왜, 그때, 그 사람은 내게 그랬을까. 그걸 알 수가 없어서 시.분.초.침이 모두 벅찼다. 태어나 처음으로 시간이 가장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세상의 시간은 가장 느리게 움직이며 기어서 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올 때까지 나는 매일, 가을과 겨울에는 문득 그렇게 떠올렸다. 나와 낯선 도시와 그 도시에서 듣던 음악과 걸었던 거리와 머리를 채우던 생각과 말로는 표현못할 어떤 정취를.

 

난 이제 여기, 있다. 그는 어딨는지 모른다. 이 순간에 그가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밤이 아니라, 무언가에 쫓기듯 추억을 짜내면서가 아니라, 맑은 정신으로 이른 아침에 듣는 에피톤은 추억에 젖게 하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나는 이성적이다. 박효신의 '추억은 사랑은 닮아'를 흥얼거리던 시절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추억은 정말로 사랑을 닮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의 종류가 수십만 가지란 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추억의 종류가 여러가지라는 건, 그게 사랑을 닮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비록 사랑이든 추억이든, 둘 중 어느 쪽이어도, 둘 다여도 전혀 상관없게 된 다음에야 잊혀지지 않음으로서 잊혀져갔다.

 

 

 

 

 

 

 

 

 

 

잊혀지는 건 바래지는 것과는 다르다. 가을방학이 나왔다. 시간을 건너든 세월을 건너든 그런 걸 허락하지 않는 가을방학이 말했다. 지금 당장이 더 소중하지 않냐고. 끄덕이며 노트를 펼쳐 적었다. Long Story Short. 그렇지만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그리고 덮었다. 앞의 글자는 파란색, 뒤의 글자는 빨간색이었다. 눈에 띄는 밑줄도 그었다. 간혹이면 족하다. 매일이면 달아나게 된다. 마음은 움직여야 한다. 언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마음이 시차를 극복하고, 국경을 넘는 기차를 타고, 터미널과 플랫폼에서 그리워하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가끔 아무나 꽉 껴안고 싶은 충동과 같은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어느 날 밤에는.

 

 

그리움은 혼자일 때 오지만, 그가 나를 그리워하고 내가 그를 그리워한다 해서 그리움이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움은 어떠한 경우에도 늘 혼자다. 친구는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갔다. 스무살 나는 그애의 입술이 내 귓가를 스치는 그 짜릿한 전율을 여전히 기억한다. 한여름밤 여행지에서의 축축한 키스나 아주 추운 날 입술에 닿던 따뜻한 입김보다 더 시끄러운 곳에서 귓속말할 때 전해져오는 그 뜨거운 숨결이 오래 남았다. 그와 나는 친구일 뿐, 그 무엇도 아니었는데도.

 

그애는 해병대에 갔고 두세번쯤 편지가 오갔고 나중에 학교에 그애 학번과 이름으로 혈액샘플을 구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그게 그애일까. 믿기에는 오래 뜸했고 확인하기에는 가슴 뛰게 벅차서 차라리 외면했다. 모든 것이 낯설지만 모든 것에 꿈과 희망이 가득했던 한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는 내가 현실을 부정하거나 알아보지 않으려 하던 그 짧은 순간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 나중에는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가족을 찾아갈 수도, 그때 함께 만난 다른 친구를 찾아갈 수도, 오열할 수도, 화를 낼 수도, 미안해할 수도 없었다. 이 앨범을 이영현의 목소리로 들으면서는 왜 그애가 생각났을까. 지독하게 짧은 순간을 공유한 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와 약간의 어색함과 침묵으로 다가올 미래를 기다리던 우리의 '우정'이 예고도 없이, 만남도 없이 갑작스레, 그렇게 어이없이 끝나버렸던 그 순간 느낀 자책이, 떠오르게 했다.

 

 

 

 

 

 

 

 

 

 

 

 

이건 음반리뷰가 아니다. 음악에 대한 얘기도 아니고 뮤지션에 대한 얘기도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한없이 소소한 살아온 날, 살아갈 날에 대한 이야기다. 아주 가끔은 시공간을 초월해 존재하고 싶은, Good Bye이란 말로 끝내지 못한, 이유없이 작별한, 여전히 그 시간에 매달려 거꾸로 걷고 있는 듯한 내 이야기다.

 

그래서 궁금하다. 당신은 지금 어느 도시를 그리도 하염없이 걷고 있는지. 우리 다시 만날 수나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을, 자책과 공허를, 미칠 것 같은 전율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야 하는지를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누가 알려줄 수 있는지.

 

이렇게 날 지나쳐가거나 나와 함께 걸었던 이들이 있는데, 이제는 그들을 진짜 만나기나 했었는지 의심스럽다. 지나간 추억의 시간들에 웃음과 눈물과 꽃을 뿌려준 건 그들인데, 이렇게 나만 남아서 시간을 곱씹고, 내게만 환상처럼 남아서 나만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다. 우린 함께인 적이 있었을까. 지금은 함께가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디있고, 당신은 어디 있을까. 내 옆에는 아무도 없다.

 

모든 음악은 내게, 매 순간순간 항상, 이토록 벅차다.

한 번씩 불쑥 고개를 치켜들고 솟아오르면 난 뭐 어떻게 할 재간이 없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사랑과 그리움과 죽음과 이별에 대해 말하려니 늘 서툴고 낯설다.

오늘도 아침부터 딸기 아이스크림을 간절히 부르는 계절이다.

피서가 아니라 추운 나라로 도피하고 싶다. 그리고 도피는 오랫동안 아니 영원히 끝나지 말아야 한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7-13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
나는 그냥 실시간! 이라고 댓글만 달래요.
이런 감정들은 제게는 너무 어렵잖아요. 어려워요.

아이리시스 2012-07-13 21:09   좋아요 0 | URL
나 밥먹어요. 소이진님 컴퓨터 고칠 기사는 왔습니까?
어젠 혼자 안녕하고 가버렸어 엉엉ㅠㅠ

이진 2012-07-14 14:46   좋아요 0 | URL
아이씨, 컴퓨터 고칠 기사 안옵니다...
결국 제가 어제 컴퓨터 다 뜯어서 어디가 타고 있는 지도 알아내고, 먼지 청소도 좀 해놨는데도 안 옵니다. 전화도 안 받습니다. 저는 노트북을 하나 사달라고 했습니다. 노트북 사오면, 원래 컴퓨터는 파일만 옮기고 버릴 겁니다. 컴퓨터 따위, 이번 일로 영 흥미를 잃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세 시간 째..........

아이리시스 2012-07-14 23:00   좋아요 0 | URL
그래요, 노트북 사는 게 낫겠어요. 몇 번 불타는 냄새 맡아봤는데 메인보드, 파워, 램, 여튼 뭐가 나가든 돈이 박스로 들거예요! 그리고 그 컴퓨터 오래되긴 했잖아요. 사라고 종용하는 건 아니지만 고쳐서 또 고장나면 그게 더 속상해요. 저는 그런 적 있어요. 한 번 고장나기 시작한 건 계속 고장나더라고요. 내가 그래서 동생한테 엄청 욕먹었어요. 대부분은 걔가 수리해주는데(탁월한 재능) 부품이 나간 건 어쩔 수가 없잖아요. '우리동네 컴퓨터'라는 수리점에 그 큰 본체를 맨날 들고갔다가 고쳐서 들고오고ㅎㅎ

내 동생은 내 스타일이 아닌 남자지만 그럴 때는 좀 멋있었어요!

교회에서 세 시간 째.............그 교회는 소이진님만 다니는 겁니까?!
하나님이 무지 좋아하시겠어요ㅎㅎㅎ 소이진님과 맨날 데이트 해서^^

댈러웨이 2012-07-13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태그는 좀 곤란합니다. --
저는 제 방의 댓댓글 나중에 달겁니다.
들었다 놨다 했다는 앤틀러스의 풀 앨범 링크를 좀 달아 주고 싶은데 댓글을 먼저 올려야 하나 봅니다. --
아, 아이님 없는 동안, 저 미치게 외로웠습니다. ㅎㅎㅎ

우씨~ URL에 왜 안 걸어지지요? http://www.youtube.com/watch?v=xSi_FE52TAY 페이버릿으로 즐찾하세요.

아이리시스 2012-07-13 21:28   좋아요 0 | URL
오오오오, 앨범 통째로다..와아..신난다!!! 땡큐! 제가 생각해도 너무 반가워서ㅋㅋㅋ를 너무 많이 했어.. 근데 지금 브라질이거든요, 나중에 전화할게요ㅎ

저는요, 사르트르의 [구토]가 구토나올 것 같아가지고 그동안 못온 거예요. 소이진님 공부도 시켜야 하고..의리가 있지..그랬어요! 근데 소이진님은 나만 빼놓고 혼자 놀고 있었어요ㅜㅜ

댈러웨이 2012-07-14 17:10   좋아요 0 | URL
다시 왔어요. 진상이라고 미워하지 마요.

1.유튜브로 한 곡 정도는 곡 서비스 해줘요. 이영현 음색이 엄청 허스키 한 것 같은데, '시간'에서는 부드럽네요,,,?
2.가을방학을 박학기로 착각했다는... 아, 미치겠다. ㅠ.ㅠ
3.롱스토리 숏에서 소름이 돋았지만,,, 아이님 곁에는,,, 제가 있어요. =333
4.지금 갑자기 사르트르의 <구토>가 나오는 이유는, 다른 함의적인 의미는 없는거에요???
일전에 쫌 느끼한 말을 해 놨더니 바로 김치전 너무 많이 붙여서 느끼하다는 답댓글을 받은 후로부터는,,, 음,,, --;

봤어요? 살짝 고칠려고 했는데. 그건 그 뜻이 아니었어요. 저도 너무 반가워서 입가에 팔자주름 새겨가면서 엄청 웃었어요. 웃다가 숨 막혀서,,, --;;

아이리시스 2012-07-14 23:07   좋아요 0 | URL
좀 부담스러운 음색이라고 생각하는데(좋지만 콘서트라고 생각해보면 그 여자 목소리로만 한 시간동안 음악을 듣는 게 얼마나 부담스러울까요..) 요즘은 '나가수'에서 보거든요. 관심이 생겨가지고 들은 거고, 저는 평소에 막 음악 달고사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뭔가 좀..정신 없어요! (도리도리) 보통은 뭐할 때 음악을 들으며 흥얼대지만 저는 드라마를 틀어놓고 욕하고 흥분하고 동조하고 그럼...........( '')

없어요. 로캉탱의 일기가 구토나올 것 같아요. 리뷰를 써봤는데 아직 덜 읽어서..그리고 대체 사르트르는 뭔 말을 하는 건지 여전히 모르겠고, 일전에 몰랐던 걸 이젠 좀 알 것 같은데, 호주머니에 잡히는 조약돌에서 구토를 느꼈다니 대체 무슨 말인지-_-b 댈러웨이님과 고백과 김치전의 느끼함은 전혀 상관이 없죠! 암! 없어요, 전혀!!!

제가요, 대부분은 포스트를 안 읽고 댓글을 달거든요. 아 이런 거구나, 해놓고 킵한 담에 나중에 와서 정신차리고 읽어요. 근데 그러면 안되는 포스터도 있다는 걸 어제 깨달았어요. 대충 읽어도 분위기는 파악하는 앤줄 알았는데 ㅋㅋㅋ거린 거 보고 다들 나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 같았어요. 부끄러ㅠㅠ

근데 저는 그 뜻이 아니었으니까요. 댈러웨이님도 그 뜻이 아니었다는 걸 알아요. 완전 알아요. 우린 반가워서 웃은 거잖아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7-14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곳은 단연코 파리죠...
거기엔 아직도 '그'가 있으니까요...^^

여행가고 싶어요~~~진정으로. 올 여름도 우리 가족은 한 주가 멀다하고 놀러가지만, 가끔은 혼자 훌쩍 시원스럽게 떠나는 그런 여행이 정말 고파요. 그런 날이 올까요? 그런데 온다해도 아마도 나이들고 힘 없어 여행이란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질 때쯤이 아닐까...ㅎㅎㅎ
비 많이 오죠? 여긴 올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왔다 안왔다 계속 흐려요..
원래 오늘 천문대에 별 보러 가기로 했는데 방금 취소했어요. 별나라도 못 다녀오게 하네요~
좋은 주말 보내요.!!

아이리시스 2012-07-14 23:15   좋아요 0 | URL
'그'는 아직 거기 있을지 모르겠네요. 다른 여자와 그 아름다운 파리를, 울랄라세션 노래 생각나네요.

'그대와 나의 밤이 아름다운 밤이 영원하도록 집에 가지 말아요~' 대체 음표는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나 하트는 할 수 있는데♡♥ 이히히히히 맥북 2년 만에 키설정 제대로 하고. 근데 어느 순간 음량키하고 명암키가 가버렸는데............. 힝ㅠ(근데 왜 점점 하소연.........)

좋겠다, 우리도, 저희 가족도 열여덟살 때까진가도 아부지가 텐트 싸서 계곡으로 여름 캠핑을 끌고 다니셨거든요. 지금은 갈 수도 있지만 이제 늙어서(!) 아부지가 아니라 엄마랑 제가 돌멩이 위에 누워 잠을 못 잘 것 같아요. 어릴 때 주말마다 놀이공원, 박물관, 행사, 관광지에 갔었는데 그런 게 도움이 많이 돼요! 나중에 커보니까 다들 그런 줄 알았는데 친구들이나 사촌만 해도 그런 경우가 잘 없더라고요.

(뜬금) 아빠 고마워요. (푸하하)

천문대는 어디에 있는데요? 또 비와요. 그쳤다 싶으면 또 오고 젖은 땅이 마를 날이 없네요. 집에 가만히 누워 맛난 거 먹으면서 노는 게 딱인 주말이에요. 낮에는 비가 그쳤길래 괜찮을 줄 알았는데..주말에 비오면 뭔가 억울해요. 현맘님도 안녕. Have a good weekend!!

맥거핀 2012-07-14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방학이 새로 나왔군요. 지금도 가끔 첫앨범 듣는데..요새는 주로 말랑말랑한 음악들을 들어요. 예를 들어, 가을방학이나 몽니나 하와이 같은 음악들. (근데 페퍼톤스는 좀 별로.^^) 탑밴드에서 건진 니케아 좋더군요.

아이리시스 2012-07-14 23:20   좋아요 0 | URL
아까 그걸 봤어요. 유희열의 스케치북! 말랑말랑한 거 좋아요, 몽니나 하와이는 저도 들어보겠음ㅎ 저는 훔치기에 탁월한 재주가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음악에.. 딴 건 좋네, 봐야지, 여기서 주로 그치는데 음악은 잘 모르니까 꿈쳐놔야겠다는 욕망이 스멀스멀. 페퍼톤스도 나왔을 때 한 번인가 듣고는 이번에는 좀 별로라고 생각했어요. 언제더라, 여튼 제가 좋아하는 노래 있었는데, 막 미니홈피에도 깔고. (기억안남)

탑밴드는 우연히 본 이후로 여즉 못 봐서.. 니케아는 니베아 생각나게 하네요. 있잖아요, 그 겨울에 귀신분장한 것처럼 발리는 크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2-07-15 1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6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