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에서의 이틀 밤
로마제국, 영광의 날들에 바치는 글
세상에 단 하나, 혼자 떠나도 심심하지 않을 것 같은 소도시가 있다면 그건 베네치아다. 산타루치아역으로 통하는, 들어서자마자 짠 비릿내가 훅 끼쳐오는(나는 부산을 떠나본 적 없는 부산사람이라 다른 지방 사람들이 부산역에 내릴 때 그렇더라는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정말로 그랬는데 이건 과장이 아니라 그곳은 기차역 바로 앞이 바다니까 당연한 것이다) 리알토 다리와 바포레토와 곤돌라, 산 마르코 성당과 카사노바의 도시. 마지막으로 물의 도시. 그곳은 온 전역의 유럽 배낭여행객들을 쏟아내는 유럽 아니 이탈리아의 심장 같은 곳이다.
어쨌거나 피렌체도 쓰고 로마도 썼으니 이번에는 베네치아다. 갑자기 아무 것도 없이, 어떤 방향성도 없이 [이탈리아 3종 세트]를 완성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먼저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의 고뇌와 열정이 잘 나타나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과 <토니오 크뢰거>의 토마스 만의 소설집으로부터 시작한다.

토마스 만은 <마의 산>이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1929년 노벨상 수상작) 같은 장편도 훌륭하기로 유명하지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과 [토니오 크뢰거]는 우수한 단편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수준의 문학읽기에 도달했을 때에야 읽는다, 헤세나 괴테처럼 중학교 때 읽는 경우는 잘 없다. 예술과 타락, 순수와 퇴폐를 예술의 본성과 연관시켜 논쟁,회상 형식을 빌어 그리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과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동경하며 예술에 대한 뜨거운 고민을 시도하는 예리하고 예민한 토니오와 그의 질투와 경멸을 받는 속 편한 한스 한젠의 대립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토니오 크뢰거]는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분량이 짧고 곱씹으며 여러 번 읽을 만한 '예술과 예술가의 고민'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다. 두말 할 필요 없이 풍경과 영상미, 이미지가 다소 지루해질 수 있는 내용을 압도하는 영화도 있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떠올릴 사람이 있다면 단연 바람둥이의 대명사 카사노바다. 카사노바는 1725년 4월 2일 베네치아 출생으로, 17세 때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천재두뇌의 소유자였다. 그는 약 1400명의 여인의 체취를 탐했으며, 왕의 딸과 바람을 피운 죄로 두칼레 궁전의 맨 꼭대기 층에 있는 방에서 재판을 받고 궁내의 감옥으로 가는 탄식의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이 다리를 건넌 죄수 중 단 한 명이 탈출했는데 바로 카사노바다. 유일한 탈출죄수였던 그는 이후 온 유럽을 휘젓고 다닌다. 카사노바가 간 곳을 따라 유럽을 여행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정도. 그는 희대의 천재였으며 온갖 직업을 전전할 정도로 능력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다 그렇듯 죽음마저 화려하지는 않았다.
슈니츨러의 [카사노바의 귀향]은 카사노바의 노년을 다룬다. 젊은 날이 아무리 화려해도 말년까지 찬란하기 어디 쉽던가. 그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하는 고민과 낙담 같은 것들을 소재로 썼다. 덧붙이자면 저기 표제작 [꿈의 노벨레]는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만이 부부로 출연했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아이즈 와이드 셧}의 원작소설이다.
베네치아에 가보기 전이었다면 이 영화를 보고 신혼여행지를 베네치아로 정했을 것 같다. 신혼여행의 특성상 어디에 있느냐보다는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니까 베네치아의 전망 좋은 방을 물색해두고 거기서 이 도시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 이런 영화 한 편 찍는 건(안되겠지;;) 어떨까. 신혼여행지에서의 갈등이 영원한 이별이 되지 않길 바라면서. 영화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다.
오랜만에 셰익스피어로 가볼까.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4대 비극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비롯해 <템페스트>지만 베네치아 하면 떠오르는 고전, 맞다, <베니스의 상인>!


알 파치노와 제레미 아이언스가 동시에 나오던 영화를 심야시간대에 스크린으로 보며 꾸벅꾸벅 졸던 기억이 난다. 장황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잠에는 이길 수가 없던 셰익스피어. 어떻게 옮겨도 그 자체로 훌륭한 시어인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럼 이번에는 액션으로 가볼까. 물 위 액션씬이 멋졌던 영화, 미니 쿠퍼로 수상스키를 즐기는 것 같던 주인공들이 매력적이던 {이탈리안 잡}은 베네치아 로케와 범죄액션에도 불구하고 내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나는 지금도 그렇고 액션이 그다지 취향이 아니다. 다시 보면 어떨지 모르지만 샤를리즈 테론과 에드워드 노튼은 마음을 좀 움직이게 하긴 하는데.
안젤리나 졸리와 조니 뎁의 이 재미없는 영화 {투어리스트}는 배경만 맘에 든다. 여행 생각 그것도 비행기 탈 생각 0%일 때가 여름인데, 조금 심장이 뛰기도 하는데. 대체 이 주인공으로 이런 영화는 뭐하러 만드는지 모르겠다. 투어리스트는 관심없고, 이탈리아 일주는 언젠가부터 이루지 못할 듯해서 더 간절한 꿈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이런 책을 써보는 거지. 오로지 자기만족으로. 모든 에세이와 여행에세이는 자기만족적 나르시시즘 80%와 복합의 20%가 더해져 탄생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만 먹고 살 수 없을 때 딸기 아이스크림 한 입은 굉장한 행복이 되기도 한다. 모든 책이 의미있고 어렵고 또 내 마음에 들 필요도 없으니까. 정 맘에 안들면 안 사보면 그만이다. 그런데 내가 대부분의 여행에세이를 항상 좋아한다. 좋아할 만하게 생겼고, 막상 사면 또 좋아서 안고 다니면서 본다. 책이 나온 이유와 경위를 잘 알기 때문에 평범한 기대치가 정해지고 그 기대치만 충족시켜주면 별문제가 없다.
아, 이 아름다운 수상도시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추리소설(이라기엔 뭣한데)도 있다. 베네치아의 명소인 라 페니체 오페라 극장의 '라 트라비아타' 공연무대를 배경으로 하는 <라 트라비아타 살인사건>과 18세기 베네치아의 뒷골목을 재현하며 브래드 피트의 영화 {세븐}과 동일한 구조로 가는 <단테의 신곡 살인>은 유명한 소설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썩 재밌다는 평가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바흐가 존경하다못해 경전으로 삼았던 비발디는 17세기 중엽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베네치아에서 [사계]를 듣는다면 영원히 해가 뜨지 않거나 빛이 사라져도 괜찮을 것 같다.
클래식 음반은 다 이렇게 앨범 자켓이 예쁜 건가. 사본 적이 거의 없어서 모르겠다. 오랜만에 클래식의 세계로 풍덩 빠지기엔 여름이 너무 덥지;;
동양의 이탈리아 역사연구가 시오노 나나미는 베네치아에 관한 이런 책들을 썼다. 내가 이탈리아, 그것도 베네치아를 탐한 지는 아주 오래 돼서 이 책들은 예전에 도서관에서 다 읽은 책 같은데 도서관에서 읽은 책을 샀을 리 없으니, 이제 사야 할까. 그런데 이 책들이 그렇게 완성도 높은 인문서들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제대로 긁어주는 베네치아 이야기인 건 분명한데.
최인호의 <상도>와 쌍벽을 이루는 상인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은 정말 어릴 때 읽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책 대여점이 한창 시작과 동시에 붐이 일던 때, 대부분 만화책을 빌려봤지만 이렇게 당시 나온 소설들을 읽기도 했었다.
작가는 네덜란드의 거장 루벤스가 그린「한복을 입은 남자(A Man in Korean Costume)」에서 모티브를 얻어 소설을 썼다. 책소개 글은 이렇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이탈리아에 건너가 세계무역을 주름잡은 한국인, 안토니오 코레아의 일대기와 국제 경제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활로를 찾기 위한 후손 유명훈의 끈질긴 노력을 따라가다 보면 비범한 상재와 진정한 상도를 발휘하며 온갖 역경을 지혜롭게 극복한 자랑스러운 한국인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17세기 거장 피터 폴 루벤스가 조선 사람을 모델로 그린 그림, 이탈리아 사람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일본 나가사키에서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조선인 청년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다는 기록, 남부 이탈리아의 알비라는 작은 마을에 코레아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직접 연결되지 않는 사실을 기반으로 이 팩션 속 인물들과 이야기를 창조해 냈다.
베네치아는 낭만과 꿈 뿐만 아니라 각국의 상인들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던 중동 교역의 중심지였다. 13세기 이곳 출신의 상인이었던 마르코 폴로는 일찌감치 동방여행을 떠나 <동방견문록>을 내놓았다. 우린 서방을 못 가서 야단인데 그 물 좋고 볕 좋은 곳에서 태어나놓고 왜 동방으로 여행을 왔을까. 그가 동방에 대해 느낀 건 우리의 것과 많이 다를까. 이 책 역사책에서 들을 때는 고리타분하게 느껴졌는데 오, 좀 궁금해졌다.
그곳은 멜로와 로맨스, 사랑과도 참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도시다. 이별하기에 좋은 도시는 아니다. 부서지는 햇살 아래 반짝이는 푸른 바다를 보면서 어떻게 이별하는가. 아름다운 어떤 장소에 갇힌 것처럼 작고 아담하고 조용한 이미지는 환상을 북돋기에 충분하다. 실제로는 작은 도시로 엄청난 여행객들이 공항과 기차역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늘 본섬의 바포레토 주위가 시끌벅적한데 감수할 만하다. 가로등 불빛만이 밝게 비추던 은은함 속에 드러나던 물 위의 도시를 훔치고 싶었다. 이탈리아 로맨스를 시작하려면 피렌체도 로마도 아닌 베니스에서. 나는 밀라노 로맨스를 꿈꾸고 있지만. 그리고 이 영화.
데이빗 린 감독의 영국영화. 1955년작. 줄거리는 이렇다.
이태리 본토와 베니스를 연결하는 철교 위로 한 열차가 달리고 있다. 열차 안에서 오랫 동안 비서일을 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풀려고 혼자서 유럽 여행을 하는 제인(Jane Hudson: 캐서린 헵번 분)은 차창 밖의 풍경을 8밀리의 카메라로 열심히 담아내고 있다. 베니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는 낮에는 모든 외로움이 사라지지만 숙소로 돌아오는 밤거리에서 본 연인들의 모습에 그녀는 외로움에 지쳐버린다. 그러던 어느날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는 광장 한구석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중년의 이태리 사나이인 레나또(Renato Di Rossi: 로사노 브래지 분)를 만나게 된다. 제인은 외면하지만 골동품점에서 다시 만난다. 만남의 순간이 너무 우연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레나또에게는 별거 중인 아내와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의 사랑은 베니스를 뒤로 하여 아름답게 막을 내린다.
[출처-네이버 영화]
처음 들어보는 영화지만 베니스, 유럽 여행, 기차, 만남, 우연, 사랑, 오오, 외도까지. 아름답게 막 내리는지는 봐야 알겠고, {콰이강의 다리},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인도로 가는 길}까지 내가 좋아한 영화만 만든 감독이니, 이 영화도 분명히 좋을 것이다.(오랜만의 장담)
마지막으로 베네치아 하면 카니발이다. 내년 카니발이 2013년 1월 26일부터 2월 12일까지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고,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아니 세계 최대의 축제 중 하나로 꼽힌다. 'Carne vale : 고기여, 그만'이라는 뜻이다. 내가 베네치아에 갔을 땐 이 축제가 이틀 정도 남은 날이었는데 무식해서(!) 그걸 꼭 봐야한다는 사실을 몰랐고, 달랑 가면 하나 사서 그냥 갔다. 어디로? 피렌체로. 피렌체에서 로마로.
베네치아 카니발(Venezia Carnival)
1268년 처음 시작되었으며, 사순절의 2주 전부터 열린다. 카니발 기간에는 민속놀이, 황소 사냥, 곡예사의 가장 무도회가 진행되며 이를 보러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수십만 명의 관광객들과 형형색색의 고깔모자와 가면들로 도시의 좁은 골목마다 가득 찬다.
베네치아 카니발의 가장 오래된 의식은 사순절 전 목요일에 행해졌다. 이날은 일종의 전쟁을 위한 공물인 황소 1마리와 12마리의 돼지가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에 의해 준비되었고 잔인한 의식이 끝난 뒤 대중 앞에서 그 동물들을 죽였다. 이 의식은 12세기에 있었던 베네치아공화국과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관할국의 대결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고관들 앞에서 행해졌으며 칙명에 의해 1525년 중단되었고 황소 한 마리의 목을 자르는 단순한 행사로 바뀌었다.
카니발 기간 동안에는 아퀼레이아에게 승리한 날을 기념하는 경축 행사 등 많은 행사와 말을 이용한 스포츠, 공중곡예, 민속전시회가 벌어지는데, 이것들은 숙련된 광대와 '콤파니 델라 칼자'라는 단체에 의해 진행된다. 이들은 여러 개의 축제행사를 계획하고 공연하는 활동을 하며, 각 '콤파니아'는 귀족 혈통의 회원 20명으로 구성된다.
현재 베네치아 카니발은 이탈리아 최대 축제이자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축제에 속한다. 이 기간 동안 시 당국은 다양한 문화행사를 마련한다. 그중 산마르코 광장에서 펼쳐지는 가면과 의상대회에서는 베네치아의 옛날 가면과 의상, 현재의 가면과 의상이 출품되어 현재와 과거가 만나는 장을 이룬다.
출처-네이버 테마백과사전
다들 구글링하는데 버릇이 돼서 나도 모르게 자꾸 네이버에;;
내가 관심있는 게 바로 이 가면축제였고, 있는 집 아니 높은 집 파티 때 로맨스 소재용으로도 빠지지 않는 이걸 꼭 해보진 않더라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쓰지도 못하고 장식용으로 겨우 한국까지 데려온 검은색과 흰 색이 섞인 석고 가면 하나가 거실 피아노 위에 아직도 놓여있을 뿐이다. 요즘은 베네치아 가면 축제 보다는 스페인 토마토 축제에 더 가보고 싶다. 온 몸에 토마토 칠갑 아니 범벅되면 어떤 느낌일지도 궁금하고, 섹스의 로망 요플레랑 비슷한 기분일지도 궁금(응?)하다. @.@
예전에 미드에 이런 게 있었다. 다 보지 못해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카니발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색적이고 칙칙한 느낌이 이질적이어서 두려웠던 적이 있다. 가면이란 게 생각해보면 되게 무서운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도 가면 쓰고 왔고, 보통 나쁜 짓 할 때 스스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용하는 법이니까. 얼굴을 가리면 아무 일이나 나쁜 짓도 막 할 수 있으니 가만보면 로맨스의 소재가 아니라 범죄의 소재로 딱인데, 것도 좀 고리타분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내용은 전혀 낭만과 상관없는 스릴러/공포인데 당시 좀 보다가 시청률 때문에 급하게 시즌이 마감돼서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걸 보고는 뒷전으로 미뤘다. 한창 빠져있는데 마무리도 없이 급하게 끝내니, 욕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놈의 돈이 사람 잡는구나, 했었는데 다음 이야기 궁금하다고 죽을 일도 없겠지만 만약 죽을 것 같아지면 안 죽기 위해 작가라도 찾아가야 하는건지 어쩔 건지는 각자 알아서.




일단은, 과거의 찬란함을 뒤로 하고 그 많은 우아한 역사를 지닌 채 늙어가는 이 도시 '베네치아'의 좋은 점만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