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에서의 이틀 밤
딸기향 베네치아
시오노 나나미의 <살로메 유모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원래는 읽다만 <로마인 이야기>를 끝까지 보려고 했지만 워낙 스펙타클한데다 길기도 길고 다양한 캐릭터의 복합적이고 연속적인 등장으로 심심할 틈 전혀 안 주는 이 책도 어쩔 수 없는 인문서이다보니, 한 눈 안 팔고 들입다 끝까지 팔 수는 없었다. 20대 초반에 읽으려던 것보다 확실히 편해지고 이해의 폭도 커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읽는대로 꿀꺽꿀꺽 소화가 잘 되는 건 아니었다.
좀 쉬어간다. 시오노 나나미가 신화와 역사의 여러 인물들을 불러와 재해석한다. 사실은 단테, 베키오, 피렌체, 베아트리체 키워드에 나는 반응한다. 나머지 인물들 오디세우스, 살로메, 성 프란체스코, 알렉산드로스 대왕, 네로 황제도 흥미롭다. 책의 특징은 이 인물들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 베아트리체의 그늘에 가려진 단테의 '아내'를 불러오는 식이다. 작가가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하기 10년 전인 1983년에 씌어졌다. 살로메, 단테, 알렉산드로스, 네로, 칼리귤라를 좋아하는데 다른 인물들로 화살을 돌리다니 아쉬운 면도 있다.
회화의 소재로도 가장 많이 쓰이고, 영화의 소재로도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이들을 삶을 되짚으면서 그들의 삶과 업적을 유추하고, 배울 점은 취하고 실패를 되밟지 않도록 노력하면 된다. 물론 이것이 오로지 역사가 아니라 모든 역사가 그렇듯 어느 정도의 고증과 작가의 상상력이 합쳐진 결과물이므로 감안해서 봐야 한다.
틴토 브라스의 [칼리귤라(1980)]를 볼 때 사실 왕이 궁 안에서 온갖 여자들을 불러모아 난잡한 성교를 벌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의 목을 단숨에 베는 장면에선 이상하게도 눈살이 찌푸려지지는 않았다. 로마시대에 그보다 더한 일들이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건 원형경기장(콜로세움)인데 로마에 일주일 머물며 나는 그곳에 매일 갔다. 겉으로도 구멍이 뿅뿅 뚫렸지만 꽤 높아서 한층한층 구경하려면 비스듬하고도 폭이 높은 계단을 기다시피 올라가야 했는데 크면서 고소공포증이 생긴 내 공포조차 꼭대기층까지 가서 내려다봐야겠다는 굳건한 결심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3층보다 2층 테라스가 더 낫다는 에펠탑도 굳이 3층까지 올라갈 요금을 내고 엘리베이터를 탔고, 한강의 소설 <희랍어 시간>에 상세히 묘사되는 성 슈테판 성당의 꼭대기까지, 피렌체 두오모의 꼭대기까지 올라 덜덜 떨면서도 밖을 내다봤다. 무엇에 대한 호기심은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 순간들이 많았다. 요즘은 아니다. 성당 꼭대기에 올라가봐야 하늘은 여전히 머리 위에 있고 발 밑에는 여전히 건물 아니면 사람이 지나가지 않겠는가.
칼리귤라가 유명한 건 도를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 폭정 때문이지만 당시 로마황제 누구는 안 그랬겠는가. 칼리귤라의 아버지 티베리우스도 마찬가지였다. AD 12~41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칼리귤라의 삶은 뭐 논할 만한 것이 못된다. 흔하디 흔하게 알려진 것이 여동생과의 근친, 매음굴을 만들 정도로 문란했던 성생활, 티베리우스를 음해한 후 오른 왕이므로 늘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한 채 불안과 원망에 시달렸다는 것, 내가 본 영화가 무삭제 버전이었는지 아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충분히 잔인한 살인 등이 그의 짧은 삶의 요약 전부다.
네로는 AD 37.12.15~68.6.9의 삶 중 54년에서 68년까지 14년을 재위한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다. 주로 정신이상자의 광기나 폭군의 이미지로 남아 오랫동안 귀감 아닌 귀감이 되지만 그는 예술을 지원했고 기독교를 박해했다. 세네카와 성 바울, 성 베드로 등이 이때 죽었다. 종교 지식이 없으니 예수와 예수의 열두 제자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하지만 예술과 종교인 베드로의 이야기는 언젠가 다시 얘기해야지. 요즘 이 책을 띄엄띄엄 읽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에 대한 거 다 보고나면 그때는 이 책에 대해서.
알렉산드리아 대왕의 별칭은 알렉산더 대왕이다. 그가 등장하는 한 편의 격정멜로이자 영화 같은 소설 한 편을 매우 좋아했는데 샨 사의 <알렉산더의 연인>이다. 역사나 신화 속 인물들의 일대기나 사랑을 다룬 팩션 소설을 참 좋아하는데 지금 본다면 약간 유치할 정도로 감정과잉일 이 소설이 그땐 참 좋았다. 출정나간 왕을 불안하게 기다리기만 하는 왕비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그의 씨앗이 제 몸안에 남긴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불안을 극복하며 강해지려는 왕비는 같은 여자였다. BC 356~BC 323년, 그는 무려 서른 셋에 죽었는데 전장에서 전사한 건 아닌 것 같다. 살아있을 때 그가 점령한 도시들은 가히 국가를 이룰 정도였으며 대제국을 건설했고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헬레니즘 문화의 창시자로 업적을 떨쳤다. 이건 기원전 인물인데 신나게 쓰다보니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실수를 범했다.
감상적인 샨 사의 문장은 한국어로 번역되어도 아름답다. 프랑스어로 씌여진 원서를 읽어본 적은 없지만 내용보다 문체에 치중하는 스타일을 느낄 수 있다. 문학적으로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불어로 소설을 쓰는 중국의 여류작가라는 이미지 때문에 중국과 공산주의, 문화혁명에 대한 시선이 좀 달라졌었다. 대학시절 교양으로 들었던 [중국문화의 이해]라는 과목에도 움직이지 않던 마음이 나중에는 연결되어 발로됐다. 역시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구경도 못하는 것보다는 한 번이라도 보는 것이 훨씬 나은 법이다.
단테 얘기를 하고 싶다. 그를 떠올리면 늘 아스라이 바스러지던 새벽 햇살 아래 베키오 다리가 떠오를 뿐이지만, 거기를 지나며 아래를 자꾸 기웃거리던 호기심 많은 친구의 얼굴과 목소리가 떠오를 뿐이지만, 작은 도시의 영광보다는 느끼지 못한 지옥의 끔찍한 고통만이 짐작될 뿐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단테는 아주 흥미롭다. 시오노 나나미가 베아트리체에게 가린 단테의 아내를 불러낼 만큼. 단테는 지옥에 빠진 인류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자신부터 구해내야 했는데, 아홉살 우연한 명문귀족 파티장에 따라갔다가 반한 그녀를 10대 후반 즈음 또다시 스쳐가듯 한 번 보고는 평생을 관통하는 순결한 감정인 사랑을 발견했는데 그 첫사랑은 결국 세속적 의미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 베아트리체가 스물 넷의 나이에 요절하자, 그녀에게 다가가는 마음으로 시를 썼고,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이 되었다. 내가 시를 어려워하는 이유는 한국시가 아니라 외국 산문시, 그것도 릴케나 단테, 보들레르 같은 시대의 뜻이 함께 담긴 시를 먼저 접했기 때문인 것 같다.
단테의 베아트리체는 실제인물설과 가상인물설이 존재하기 때문에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게 정석이겠지만 단테가 마음으로만 그리는 여인 베아트리체를 평생에 걸쳐 다가가야 할 고귀한 여성으로 상징화 시킨 것만 해도 숭고한 정신이 얼만큼 그를 지배하고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단테의 <신곡>과 로뎅의 [지옥문]과 괴테의 <파우스트> 그리고 스캇 펙 박사의 <거짓의 사람들>은 엄태웅, 신민아, 주지훈이 주인공이었던 드라마 <마왕>에 나온다. 인간 본성의 선과 악 중 악에 보다 가깝게 접근한 채 파고들려던 드라마.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 결국 복수극이 되고 말았지만 당시 이 구절에 취해 굉장히 오래 <신곡>과 [지옥문] 사이를 방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곡>읽기는 원문으로도 해석편으로도 너무 어렵기만 하지만.
고통의 도시로 가려는 자, 나를 지나가라.
영원한 고통으로 가려는 자, 나를 지나가라.
영혼을 상실한 인간들에게 가려는 자, 나를 지나가라.
단테, <신곡-지옥편> 중에서
EBS에서 했던 [로마제국의 탄생과 몰락]이라는 다큐는 총 6부작이다.
1부-네로황제의 최후
2부-카이사르의 선택
3부-그라쿠스의 민중혁명
4부-유대인 반란
5부-콘스탄티누스 대제
6부-몰락의 시작
고도로 압축된 다큐는 이 깊고 넓은 격정적 로마 제국을 상세히 이해하기에 역부족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이 기다리고 있다. 도서관에서조차 한 번 제대로 펼쳐본 기억이 없다. 친구들이랑 만난 자리에서 책 얘기가 나왔는데 하필 그때 대상이 된 책이 <다빈치코드>라서 댄 브라운의 작품수준은 몰라도 재미만큼은 확실히 보장하는 내가 안타까움에 그만 "그 책이 잘 안 읽히는 건 수준이라기 보다는 독서습관"이라고 했더니 "그렇다고 책을 꼭 읽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냐"고 했던 내 친구가 나는 그 순간엔 좀 미웠다.
책은 학창시절부터도 나는 항상 저들보단 많이 읽었고, 내가 어떤 책을 읽든 말한 적이 없고 제목을 말해도 잘 알지 못할 친구들이다. 베스트셀러만 일 년에 다섯 권쯤 읽거나 안 읽거나 하는 친구들과 책 얘기할 게 뭐 있으며, 내 사생활에서 나는 책얘기하며 재잘거릴 친구는 별로 없다. 실제로도 싫어하고 책은 혼자만의 취미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밖에 나가면 나 끌고 클럽에 가는 친구가 훨씬 더 자극적인 법. 그래서 글을 쓰잖아. 내가 읽은 책 얘기, 본 영화 얘기 들려줄라고. 사생활에서 그게 가능했으면 나는 글쓰기 따윈 안했을 것이다.
여튼 그 친구는 내가 책 읽는다고 잘난 척하는 걸로 보였던 모양이다. 댄 브라운 읽는다고 잘난 척하는 인격인가, 내가. <로마제국 쇠망사>쯤 되면 몰라도. 그건 20대 초반에 읽고 고고학과 사학, 음모론에 푹 빠졌던 순간을 좀 대변하려다 만난 역대 어이없는 논쟁이었다. 친구도 그냥 던진 말이었겠지만 내 뜻이 곡해된 게 아쉬웠다. 논쟁이라든가 싸움으로 변질되진 않았다. 그게 아니라 그렇다고;; 라고 나는 말했을 뿐이다. 누가 그 책을 읽든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실제로도 나는 내 관심사에 관심이 큰 편이라 책 읽는 대신 그 애는 뭘 다른 걸 하겠지, 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내가 그렇게 보였다니 억울한 것도 있었다. 실제로 책 읽는 사람끼리 얘기해도 취향과 좋아하는 것을 나누는 수준이 아니라 보고 읽은 걸 잘난 척하는 용도도 많아서 내 주변에는 책을 들입다 파는 사람이 잘 없는 편이다. 문창과에도 언제나 많은 책과 수준 높은 책을 가까이 하는 친구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보는 것과 읽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쓰는 일은 다 다른 루트로 이뤄진다. 다만 자기 세상에 골몰하고 다른 세계에 관심 갖는 친구들이 많은 편이긴 했고 그런 게 서로 자극이 됐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여튼 친구가 눈 동그랗게 뜨고 말했듯, 스스로도 이런 책 누가 읽나요, 할 만큼 제목과 페이지와 책가격에서부터 이미 압도되다 못해 압사 당하는, 인문서 좀 읽는다거나 역사서 좀 본다는 사람이라면 필독서인 이 책.
드라마로 보고 싶다면 미드 [ROME]이 있지만 이것도 그냥 막 볼 땐 몰랐는데 공부가 필요한 거였다. 일단 시대가 길거나 등장인물이 많으면, 게다가 우리말도 아니다보니 어느 순간 꼬이고 섞이고 될 대로 되라는 순간이 분명 온다. <변신 이야기>나 <그리스 로마 신화>, 철학개론서 읽을 때 주로 체험한 건데 이런 것들의 특징은 반복하지 않으면 어느 한 순간만 기억나거나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벼락치기 후 시험보고 집에 돌아온 느낌처럼 아스라이 멀어져간다. [ROME]는 시즌 1,2가 끝이고, [스파르타쿠스]처럼 검투사 노예 같은 일정부분 시대를 다루는 게 아니라 몇 백 년을 통째 다루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드라마 종영이 이탈리아에 지어논 세트장 화재로 다시 지을 제작비 문제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당시 많이 아쉬웠다. 어쨌든 로마 공화정 시기를 다루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그는 고대 로마의 초대황제다. 팍스 로마나의 실현이 그의 업적으로 꼽힌다. 실제로 권력다툼이 난무했던 그때를 두고 평화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평화의 의미는 다양하므로), 안토니오스, 브루투스까지 읊어대다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또 클레오파트라다. 어릴 때 내가 제일 좋아하고 또 제일 많이 본 영화. 이집트를 막연함으로 동경하게 했던 영화.
이후 시대는 흐르고 흘러 5세기 말(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강제퇴위 당하면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1000년간 더 번성했는데, 이는 먼 훗날까지 이어진다.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에서 오늘날의 교훈을 찾으려는 현대인들에 의해 그 이유는 수 백개가 논의되지만 정작 지구상에 일어나는 전쟁은 명분과 얻고자 하는 대상만 바뀌었을 뿐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는 싸움이 아닌 지 오래다. 아직도 배우지 못했다. 달라지지도 않았다.
이 페이퍼에서 찾을 교훈은 없다. 의도는 아닌데 잡다해졌고, 인문서 원고도 아니니 딱 재미로 볼 만한 게 되었다. 거기다 친구와의 갈등까지, 별로 좋지 않은 페이퍼다. 친구는 친구의 할 말이 있을테고, 당시에는 서로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나갔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서 알아지는 즐거움이 좋다면, 그 반대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요즘 푹 빠져있는 [로마제국의 탄생과 몰락]이라는 다큐 한 번 볼래? 라고 얘기해줄 친구는 없지만 여전히 술 얘기, 남자 얘기, 쇼핑 얘기, 연예인 얘기, 예능 얘기, 어제 먹은 음식 얘기, 지금은 없지만 아꼈던 강아지 얘기, 추억할 학창시절, 공부를 빙자한 친구가 짝사랑 하던 이웃 고등학교 남자애 몰래 미행한 얘기 등 수십가지는 되고 또 넘잖아. 책이 없으면 못 살겠지만 진짜 못 살지는 책이 없어져봐야 아는 거고, 책 한 자 안 읽는 친구라도 '책'으로만 친구가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운동하는 헬스장에서, 술 먹는 술집에서, 취미활동으로 인라인 타면서, 골프치러 필드에 나가면서(응?) 다 친구가 될 수 있으니까.
좋아하는 많은 것들 중 하나가 책인 것 뿐이지, 좋아하는 유일한 것이 책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 그때 나름 당돌한 발언을 내게 날렸던 친구를 미워하지 않으려 한다. 사실 살짝 아니다 싶었던 거지 기분이 나빴던 적은 없기 때문에 이게 글로 되지 않는 순간에 우리는 언제나 똑같다. 어제 오늘 내일 만난 사이가 아닌 것이다. 다만 서로 다른 점은 인식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뿐이다. 다시는 책 얘기(그때도 내가 꺼낸 건 아닌데!)를 하지 않겠다는 은연중 강박이 생기겠지, 어쩔 수 없이.
그래서 로마 제국의 몰락에서 현대인들은 늘 자극이 되는 교훈을 찾으려 애쓰는 것 아닐까. 실수 반복하지 말자고.
아, 오늘 지나면 7월이고, 7월에는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를 읽을 것이다. 7월의 독서계획은 이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