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아니, 이승기와 하지원이 나오는 <더킹 투 하츠>였다. 형의 목숨을 앗아가고 여동생을 하반신 마비로 만든 악당에 대한 왕(이승기)의 대응을 체제론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때마침 <군주론>과 <국가론>은 군주제를 이해시켜줄 좋은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왕(이승기)의 고민이지만 좋은 왕을 고를 수 있는 눈은 내 노력으로 얻어야 하는 필수적 능력이라고도 생각했다. 때로 드라마는 호기심 많은 나를 새롭고 낯선 세상으로 안내한다. <패션왕>은 관심도 없던 <언터처블-1%의 우정>을 보게 만들었고, <타이타닉>이 재개봉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물론, 호기심 동한 나는 둘 다 보았다. 극중 정재혁(이제훈)이 VIP관에서 혼자(신세경과 같이) 보는 장면이 나온다. <타이타닉>의 갑판 위 키스는 15년이나 지났어도 여전히 설렜다.
한때 르네상스 사조에 빠져 도서관에서 찾아읽던 로마, 그리스 왕정시대의 이탈리아를 다룬 저서들. 시간을 거슬러 고대, 중세 역사를 다룬 여러가지 책들을 겉핧기 식으로 닥치는 대로 접하면서 절반의 20대가 지나갔다. 그땐 도서관에 가까이 있었다. 체계를 갖추고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나아가면서 강제와 자율이 적절히 매치되어야 어느 한 분야라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법인데 그때는 그런 게 없었다. 사학과는 거리가 멀었고 매일 작품읽기와 해석, 매 학기마다 창작물 과제에 쫓기고 있었으니 어쩌면 인풋보다 아웃풋을 더 많이 요구하던 그때, 생애 가장 많은 지식에의 갈구를 느꼈던 것 같다. 요즘 기본적 고전(군주론, 국가론, 자본론이 현재 계획)과 <로마인 이야기>를 비롯한 시오노 나나미의 이탈리아를 다룬 저작들을 '다시' 읽고 있다. 걸음마 수준이다. 그나마 읽는다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지만 여전히 시작이 반을 채워주기에 나는 반만 더 가면 된다.
메디치 가문에 대한 무궁한 꿈을 안고 피렌체에 갔다. 피렌체 중앙역에 도착했을 때는 그 작은 영광의 도시가 사방으로 캄캄해진 해저문 늦은 저녁이었다. 중앙역에서 한국에서 대충 몇 개 적어온 숙소로 전화를 걸었지만 예약자가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세상에, 말도 안 통하고 길도 모르고 해외도 처음인데 달랑 몇 개 있는 한국인 운영 게스트하우스가 우리를 거부하니, 세상에서 버려진 것처럼 절망스러웠다. 이 낯선 땅에서 누구를 어떻게 믿어야 하나.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소개에 소개를 거듭해 조선족 모녀(물론 내게는 할머니와 엄마뻘)의 작은 집에 이틀 묵었다. 돌아와서는 내가 그곳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여행 도중에 만난 피렌체는 반나절에 도시 전체를 돌아볼 정도로 작은 곳이었기에 이틀 이상 할애할 필요도 없어서 바로 로마행 기차를 타기로 했다. 과거의 영광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중세의 도시 피렌체의 골목이 성큼 다가서는 생각만 해도 땀이 흥건해지는 밤이었다. 골목은 골목으로 통한다. 돌아올 때는 미켈란젤로 광장까지 가서 샌드위치 먹고 놀다가 숙소를 찾지 못해 기차를 놓칠 뻔 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골목이 수십 개는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익숙해지면 별 것 아니겠지만 이틀 만에 그곳에 통달하기란 어려웠다. 아르노 강의 베키오 다리, 단테와 베아트리체, 두오모에만 관심이 쏟아졌었다. 헤매던 길을 찾게 해준 건 묵던 게스트하우스 건물 1층에 있는 빵가게의 빵 냄새였다.
<군주론>은 15-16세기를 살았던 이탈리아 정치학자 마키아벨리에 의해 씌어졌다. 모두 동의할 만한 내용은 아니지만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며, 배경지식이 뒷받침 되어야만 더 많은 것이 보인다. 분량이 짧고 어렵지 않지만 정신줄 놓고 읽었던 처음에 나는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한 권 읽기 위해 몇 십 배의 자료와 책을 읽어야 하는 대표적 텍스트. 이번에는 어떤 상황에서의 마키아벨리는 그런 통찰을 할 수도 있겠다고 이해하는 중이다. 다음 번에는 그런 그를 비판하거나 더 좋은 대안을 찾아가며 스펙트럼을 넓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그간 당연시되던 정치와 종교의 유착을 비판하며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인간은 본래 사악한 존재이므로 정치영역을 종교의 윤리적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이상적인 정치상일 뿐이라는 것), 당시 도시국가로 이뤄졌던 이탈리아의 도시 중 하나인 피렌체의 통치자(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치는 헌정 형식의 정치철학서를 썼다. 메디치 정부 하에서 공직에 입문하려는 목적으로 집필한 것으로 전해지는데(집필목적이 이처럼 정확했는지, 후세대가 중요한 정치철학서로 둔갑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치가는 필요에 따라 일체의 도덕적 구속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도 논란이 되며, 오늘 날 그를 권모술수에 능한 책략가로 굳혀지게 만들었다. 몇 세기가 지난 지금, 그의 이론을 당시로 국한시켜 이해하는 것도, 오늘 날의 기준으로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대상에 대한 판단은 일방향을 띠는 단순한 문제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정치학 이론들이 이상적 정치공동체로만 지나치게 흘러간다고 생각한 그는 초점을 권력의 획득과 유지의 방안으로 돌리면서 정치가의 권력(힘과 능력)과 조직공동체를 중요하게 인식한 것이다.
"군주된 자는, 특히 새롭게 군주의 자리에 오른 자는, 나라를 지키는 일에 곧이곧대로 미덕을 지키기는 어려움을 명심해야 한다. 나라를 지키려면 때로는 배신도 해야 하고, 때로는 잔인해져야 한다. 인간성을 포기해야 할 때도, 신앙심조차 잠시 잊어버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군주에게는 운명과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맞게 적절히 달라지는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면 착해져라. 하지만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사악해져라.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키는 일이다. 일단 그렇게만 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 무슨 짓을 했든 칭송 받게 되며, 위대한 군주로 추앙 받게 된다."
당시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로서 작은 도시들로 분열된 쪼개진 케익 같았고 마키아벨리는 이런 이탈리아의 분열된 상황을 좋지 않게 보고 비판하려 했던 걸로 보인다. 악을 행해서라도 선한 목적을 관철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지만, 일단 선하고 안정된 사회제도(국가)가 뒷받침 되어야만 세분화된 정책의 정당성을 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자를 행하기 위해서 기독교의 선(善)과 윤리를 잠시 내려놓고 달려가도 괜찮다는 의미는 옳기도 한 것이다. 그는 '불가피하게' 그럴 수도 있음을 인정한 것이지, 윤리를 아예 배제시켜야 한다는 극한의 의미가 아니었다. 또한 관용과 도덕 만으로 공화정을 묵인한다면 혼란한 이탈리아에 혼란함을 더 가중시킬 뿐이라고 했으며, 불가피한 경우에는 전제정치나 권모술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민주사회가 중요하긴 하지만 일단 분열된 도시국가들을 하나로 통솔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새삼 피렌체 공화정의 메디치 가에 대해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얼마 전 미켈란젤로 관련 미술사 다큐를 보면서 또 한 번 당시 피렌체의 활짝 꽃피운 르네상스 문화를 동경한 후 읽은 책이라 자연스럽게 '군주'가 아니라 '번영'에 관심이 기우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선한 목적을 위해 악한 절차를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군주에게 가장 어렵고 힘든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아닐까 싶다. 선의의 거짓말도 있고, 다수의 이해관계가 공존하는 한미 FTA 같은 상황도 있는데 나는 늘 그런 결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목적이 모든 악행을 타당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쪽에 가까웠다. 실제로도 악행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오늘 날의 도덕 아닌가. 당시 이탈리아의 혼란과 분열 사이에서 느낀 공화정에 대한 답답함을 마키아벨리만큼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답답함이 느껴지기는 한다. 도덕은 거쳐야 할 과정이지, 도덕이라는 절차에 얽매이면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가 없다. 모든 정당성을 일일이 검사받아야 한다면 특히 이해관계를 극복해야 하는 정치의 영역에서는 엄청난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래서 대사의 공관 불가침/문서 불가침/민형사 관할권으로부터의 자유(물론 예외도 있다!)도 존재하는 것 아닌가. 이들은 해당국가에서 공적임무를 처리하는 동안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자격으로 이 모든 것들을 누린다. 한마디로 공적임무 처리기간 내에는 어떠한 개인적 잘못도 묻지 않는다. 도덕에 얽매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가장 큰 반증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책임은 또 다른 문제다. 선한 목적을 타당화시키기 위해 과정이나 절차를 불가피하게 묵인해준다고 치자. 행여 선한 목적이 변질되어 악한 결과로 나타났을 때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마키아벨리의 이론에는 이 또한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었겠지만 오늘 날 이 문제는 단순히 넘어갈 수가 없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게 재밌다. 결론은 항상 엉뚱한 생각으로 가지만 내가 이들 시대에 태어났어도 이렇게 생각했을 거야,라면서 자화자찬하면 더 재밌다. 아프리카를 버릴 만큼. 그래서 독서가 갑자기 옛날에 읽다만 이제 존재조차 옛날 이야기가 된 <로마인 이야기> 읽기로 건너뛰었다. 여러 권을 동시에 읽지만 관심사가 제일 깊은 책이 더 자주 손에 잡힐 수밖에 없다. 로마, 르네상스, 이탈리아가 내 로망의 정점을 찍는 단어들이긴 한데, 뭔가에 빠지기에 날이 점점 더워진다. 세상에, 더워더워더워더워더워. 날씨를 움직이는 건 군주가 할 수 없는 일일까. 쫌 해달라고 해보지. 미실처럼 하늘이시여, 하면서 제사라도.. 덥지 말라고, 쫌만 더우라고.. 이 책을 읽어서 이승기의 국가(?)가 이해되지는 않았다. 애초 독서의 시작이 불순했기 때문에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거겠지만. 뭐든 이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해야 끝까지 갈 수 있는 저질 의지력이라는 점은 반성한다. 내 몰입이 지속적이지 못한 건 프로이트식으로 볼 때 성적억압과 결핍 때문..( '') 다음 차례는 플라톤의 <국가론>인데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더 끌린다. 언젠가 찜해뒀던 거다. 그치만 아아, 진짜 생각만 해도 정신이 덥다. -_-;; 아이스크림 사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