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대학교 때 읽은 책이다. 그때 아주 인상 깊게 읽은 탓에 언젠가 다시 읽으리라 생각했던 차에 서재지인과의 대화를 계기로 다시 읽게 된 것이다. 나중에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지금의 느낌이 약간은 필요할 듯해서 메모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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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1권을 읽고(빅또르 위고 지음, 송면 옮김, [레미제라블1-종달새 꼬제뜨], 동서문화사).
이야기는 주교로부터 시작된다. 주교는 자선을 베푸는 자다. 그가 상원의원을 만난다. 상원의원은 신과 인간의 불멸을 부정하며, 그래서 인간이 존재하지도 않는 내세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생은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고. 주교는 국민의회 의원 G를 만난다. 그는 비참한 민중의 삶을 좋은 집과 옷을 입고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며 혁명만이 그들을 더나은 삶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고 한다. 주교는 신을 신뢰하며 혁명이 아닌 자선의 방법으로 사람을 만난다. 서로 다른 이해와 가치관이 있다. 그것들이 격렬하게 부딪히지도 않으면서 공존한다. 어떤 것이 비참하고 누추한 삶에 손을 내미는 것인가?
그들 중 장발장에게 손을 내민 것은 주교이다. 그것이 우연이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사랑받은 바로 그 방법으로 사랑을 베풀게 된다. 장발장 역시 주교의 방식을 따른다. 그는 시장이 되어 조용하고 자비로운 삶을 살아간다. 건실하고 따뜻한 삶. 빵을 훔친 죄로 19년이나 감옥에 있어야 했던 그에게는 햇살이 닿는 8년이었다.
그런데 장발장은 왜 다시 도둑질을 한 것일까? 그에게 그 40수가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치 주교의 집에서 은촛대를 훔친 것처럼 부당한 대우에 익숙했던 그는 누군가에게 부당한 짓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이미 시장이며, 자비로운 자이며, 햇볕 아래 서 있는 자이다. 그런데 그 8년 전의 조금의 돈을 훔친 것이, 아니 되돌려 주려고 애썼지만 줄 수 없었던 그 순간이 이제 목을 죄어온다.
그가 그려러고 한 것이 아니었다. 사과를 훔치다 잡힌 그에게 니가 나 대신 장발장이 되라고 한 적도 없다. 그런데 어쩌다 그는 장발장으로 오해 받아 재범이라는 이유로 종신형을 받는 지경이 된 것이다. 어차피 장발장으로 오해받은 자는 사과를 훔친 자가 아닌가. 그렇다고 빵 때문에 몇 십년을 어둠에서 살았던 자신처럼 사과 때문에, 장발장으로 오해받아 종신형을 살도록 내 버려둘 것인가. 그러나 장발장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게다가 사과를 훔친 그자 때문에 자베르 경감조차 의심을 거두고 마을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가. 이것은 그에게 새 삶을 주는 기회가 아닌가. 장발장, 그대는 왜 고뇌하는가. 잊어버려라. 당신이 훔친 그 돈보다 몇 배나 자선을 베풀고 있지 않는가...그러나 왜 1800년 전에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했던 예수처럼 고뇌하는가. 왜 하느님 아버지 혹은 양심이라 부르는 그것은 그에게 말하라고 고동치는가...
나는 따뜻하고 밝은 현재를 살고 있다. 어두웠던 과거가 벌떡 일어나 내 목을 조여 온다면, 내가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어둠의 한 가운데로 와서 남은 생을 살라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게다가 그 요구가 나의 행위에 비해 지나친 것이라면? 나를 단죄하는 그 체계 자체가 이미 부당한 것이라면?
장발장은 마차를 빌려 타고 떠난다. 법정을 향해. 내가 장발장이요, 하고 말하는 순간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빵과 동전 한 닢을 훔친 죄의 댓가로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장발장의 자비가 너무 늦게 미친 팡띤느와 그의 딸 꼬제뜨는 장발장의 양심 때문에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가야 하는가?
2권을 펼쳐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