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한 번도 나 자신 속에서 잃어버린 적이 없는데,

왜 나 자신을 찾을 필요가 있는 것일까.

나 자신을 어딘가 다른 곳에 두고

잊어 버린 일이 있다는 것일까.

진정한 나 자신과 지금의 나 자신이

별개라는 것일까.

별개라는 기분도 들고, 같다는 기분도 든다.

아아, 나 자신의 발자국조차 보이질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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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요시히로 저. 김지룡 옮김, [우리는 모두 돼지], 들녘,2002,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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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 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 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 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무상하다. 모든 것은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이다. 이 세상 어느 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 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 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 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자아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깨기 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금강검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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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각 엮음, 허문명 옮김, [선의 나침반1], 열린원, 2001,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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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4-07-14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체 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어제 금강경 7독을 하였습니다. 이 글귀가 남더니 오늘 여기서 또 만나네요.
물거품이란걸 머리속으론 이해하면서도 움켜쥐고 사는게 너무 많습니다.

이누아 2004-07-1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저도 금강경을 어쩌다 2번을 읽어서 많이 읽었네 했더니 혜덕화님은 7독!! 님의 내공에 나날이 놀랄 뿐입니다.
 

사람에게는 스무 가지의 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다.

 

가난한 자가 보시하기 어렵다.

강하고 부유한 자는 도를 배우기 어렵다.

목숨을 버리고 확실하게 죽기 어렵다.

오직 소수의 복받은 사람들만이 붓다의 경전을 얻어 볼 수 있다.

붓다가 계실 때 태어나기 어렵다.

성욕을 극복하고 욕심을 참기 어렵다.

좋은 것을 보고 탐내지 않기 어렵다.

모욕을 당하고 화내지 않기 어렵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남을 억누르지 않기 어렵다.

일을 만나서 순수한 마음을 갖기 어렵다.

널리 배우고 연구하기 어렵다.

아만심을 멸하기 어렵다.

배우지 못한 사람을 멸시하지 않기 어렵다.

마음을 평등하게 가지기 어렵다.

타인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기 어렵다.

진정한 스승을 만나기 어렵다.

깨달음을 얻고 도를 실행하기 어렵다.

사람들을 제도하기 어렵다.

항상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존재하기 어렵다.

붓다의 길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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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장경 중 제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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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깊은 숲 속의 한 나무 밑에 은둔하고 있는 친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다른 수행자들도 있었다. 어느날 내가 다른 수행자와 그의 나무 밑에 앉아 있는데 새로운 구도자가 나타났다. 그때 마침 친구는 강으로 목욕을 하러 가서 자리에 없었다. 새로 나타난 구도자는 비어 있는 친구의 나무 밑에 앉아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는 강에서 돌아와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새로 온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고 종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나의 나무요. 당신은 가서 다른 곳을 찾아보시오. 아무도 내 자리에 앉을 수 없소." 친구는 자기 집과 아내와 자식을 뒤로 하고 떠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무가 그의 소유물이 되어 버렸다. "당신은 내 나무 밑에서 명상을 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집착으로부터 그렇게 쉽게 도망갈 수는 없다. 집착은 다시 새 형태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대는 자신을 속일 수 있으나 집착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착과 싸우지 말라. 그저 집착이 왜 존재하는지 이해하려 애써라. 저 밑바닥에 있는 이유를 발견하라. 그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집착이 존재한다.

그대 내면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안정감을 얻기 위해 무엇에든 자꾸 매달리는 것이다. 그대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무엇이든 그대의 뿌리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에게 뿌리를 내릴 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될 때, 그대 안에 바로 이것이 있을 때, 그대 안에 바로 이 의식이 있을 때, 그대는 누구에게도 매달리지 않는다.

                                                          -오쇼, [사랑, 자유 그리고 홀로서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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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nr830 2004-06-23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 글 좋아서 퍼갈께요^^;;

수련 2004-06-26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착이 새로운 집착을 낳는다는 사실...평범하지만 깨닫기 어려운 거지요~
내용이 마음에 도착해서 다시 짚어봅니다.

집착으로부터 그렇게 쉽게 도망갈 수는 없다. 집착은 다시 새 형태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대는 자신을 속일 수 있으나 집착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착과 싸우지 말라. 그저 집착이 왜 존재하는지 이해하려 애써라. 저 밑바닥에 있는 이유를 발견하라. 그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집착이 존재한다.

그대 내면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안정감을 얻기 위해 무엇에든 자꾸 매달리는 것이다. 그대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무엇이든 그대의 뿌리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에게 뿌리를 내릴 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될 때, 그대 안에 바로 이것이 있을 때, 그대 안에 바로 이 의식이 있을 때, 그대는 누구에게도 매달리지 않는다.

-오쇼, [사랑, 자유 그리고 홀로서기] 중에서
 

감산의 금강경 풀이(감산 지음, 오진탁 옮김, 서광사, 1992)

이 책이 알라딘에 없어 리뷰를 여기에 적는다

 

감산 스님의 글은 언제나 나를 흥분시킨다. 금강경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금강경을 읽으면서 "왜 갑자기 이 대목이 나오는 걸까?"하고 의심이 많았던 나를 만나시기라도 한 듯이 금강경의 한 분마다 [의문]이라는 난을 만들어 한 대목에서 다음 대목으로 넘어가는 데 무리가 없도록 해놓으셨다.

금강경을 자주 읽는 나에게 이 책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겨우 이틀만에 책을 다 읽었다. 가슴이 뚫리는 것처럼 시원했다. 그러나 아직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한 내게 의문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게 무슨 말이지? 하는 부분도 많았다. 그래서 다시 읽었다.

작은 포스트잍을 준비한 뒤 다시 읽은 금강경에는 색색의 표시지가 대롱대롱 달렸다. 이해력이 부족한 것일까? 읽다보니 내가 불교의 주요단어들의 뜻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내면화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상(四相)이나 삼신(三身: 법신, 보신, 화신) 등...

그런데 읽는 데 또다른 어려움은 해석에 있었다. 이런 책을 옮겨 한글로 편하게 읽게 해준 옮김이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옮긴이는 읽는 이의 편의를 위해 같은 단어를 다르게 표현하는 배려를 했지만 그것이 내게는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역자의 주가 달려 있다. 그래서 같은 단어를 다르게 해석했을 때는 그것에 대해 역주에 설명을 할 수 있었을텐데 하지 않아서 왜 갑자기 이 대목에서는 찌꺼기가 망상이 되고, 다른 곳에서는 분별이 되는지 근거를 알 수 없었다. 주로 사상을 설명할 때 여러 군데에서 그런 부분이 있었다. 같은 한자에 대해서도 "몸이 크다"와 "키가 크다"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는데 특별히 다르게 쓸 필요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었다. 오히려 이러한 해석태도는 감산스님의 강해를 읽을 때 의혹을 더하기만 했다. 또 역자가 같은 단어에 대해 다르게 설명하고 있는지 않은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아쉽게도 이 책에는 금강경 원문만이 있어 확인할 수 없었다.  송찬우 님이 번역한 또다른 책이 있는데, 그 책을 구해 다시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한다. 같은 책을 두 권 사는 느낌이라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사실, 내가 금강경을 부지런히 읽지 않았다면 이런 의문이나 번역에 대한 꼬투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속이 시원할 정도로 이 책이 좋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읽으면 읽을수록 꼬투리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늘어나기를.

금강경은 전체가 화두다. 읽고 또 읽는다. 내가 금강경이 되든지, 금강경이 내가 되든지, 금강경도 나도 다 있는 것이든지 없는 것이든지... 깨닫고 또 깨달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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