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p.127

 

에르노식 애도일기라고 해야 할까. 딸을 이해할 수 없지만 딸이 자신과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걸 자랑스러워했던 아버지 이야기다. 지식인 딸과 노동자 아버지로 바꿔 말하려니 너무 딱딱하게 느껴진다. 남자로서의 아버지보다 그냥 아버지 이야기 같아 아버지의 자리가 더 어울리는 제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길지 않은 이야기인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다 담겨 있는 것 같다. 글이 뭔가 그럴 듯하게 보이려고 하는 게 없어서 좋다. 책을 덮으면 다 아버지 생각이 나지 않을까. 나도 아버지 생각이 났다. 유학자 아버지와 서울대생 아들을 둔 노동자. 에르노의 아버지가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고 충실했던 것과 달리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리가 본래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다. 이렇게 사는 게 아닌데, 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러나 달리 살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 돌아가셨다. 마음이 울적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G.H.에 따른 수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얼거림이다. 나는 중얼거리고 있다. 6개월 간 청소부의 방이었던 공간에서, 내 집이면서 내 집이 아니었던 공간에서 중얼거리고 있다. 방을 정리하려고 들어갔지만 정리할 것이 없다. 하려고 했던 것이 사라진 시간에 옷장에서 바퀴벌레를 본다. 문을 닫아 바퀴벌레를 짜부라뜨린다. 나는 기쁨으로 불결해진다. 바퀴벌레의 몸에서 흰 내용물이 고름처럼 흘러나온다. 이것은 엄마의 젖 같다. 중립적 사랑을 생각한다. 바퀴벌레의 흰 덩어리를 입안에 넣을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 토한다. 포기한다. 포기는 계시다. 낮고 겸허해진다. 그리고 바퀴벌레의 질료를 입안에 넣는다. 마침내 내 껍질은 깨어졌고, 나는 한계가 없다. 내가 아니었으므로 나였다. 내가 하는 말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이렇게 이 글의 줄거리를 이해해도 될까? 혹은 오해해도 될까. 중얼거리지 말고 날 쳐다보고 또박또박 말해 봐요. 작자는 관심이 없다. 초인적인 무관심. 그 무관심 속에서 책을 읽는다. 한 문단을 읽으면서 이게 무슨 말이지? 했다가 다음 문단이 맘에 들어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다.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면서 다 읽었다. 다 읽었지만 다 읽었다고 해도 될까. 책은 알록달록 포스트잇으로 뒤덮여 있다. 너무 많은 표식은 없는 것과 같다. 포스트잇이 무의미할 정도로 이 책이 좋았나. 책을 덮고 한 시간을 가만히 있었다. 이런 책이 좋다. 이해를 지연시키는 책. 무언가를 보고 나면 이해하고자 한다. 약간씩의 이해가 책장을 넘기게 한다. 그러나 다 이해하지 못한 느낌. 그 미완의 기분으로 나는 계속해서 읽게 된다. 읽고 있는 중이다. 읽지 않는 순간에도.

 

옮긴이 배수아 작가는 만약 어떤 독자가 이 책을 읽고 어떤 종류의 고양을 느꼈다면, 그는 이것을 읽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고, 읽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페이지를 펼칠 때마다 어떤 종류의 고양을 느낀다. 어쩌면 그 고양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바퀴벌레를, 바퀴벌레의 고름 같은 흰 덩이를 보고 있는 사람의 중얼거림을, 방에 혼자 앉아 듣고 있는 것뿐이다. 그뿐이라도 이 책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읽어야 한다. 비록 읽지 못하더라고 그런 장소가 필요하다. 내 집이면서 내 집이 아닌 공간이. 내 생각이면서 내 생각이 아닌 생각이 일어날 것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0-12-27 1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한 거 읽고 계시네요ㅋㅋㅋ지독했어요 진짜...다 읽어도 뭔말인지 몰라...

이누아 2020-12-27 12:56   좋아요 2 | URL
다 읽었어요. 다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책 같기도 하고, 제 마음속에서 계속 읽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열반님 서재에서 보고 따라 읽은 거예요. 저는 정말 좋았어요. 덕분에 읽을 수 있었어요. 감사해요. 저는 약간 혼란스러운 책이 좋나 봐요. 이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 볼까 해요.

*아까 댓글 달았는데 갑자기 이전 페이지로 가면서 사라져서 다시 썼어요.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일까요. 이제 없는 글인데. 이제 없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걸까요. 이 책을 읽으면 이런 종류의 중얼거림이 일어나요.^^

반유행열반인 2020-12-27 12:58   좋아요 2 | URL
네 저는 단편 쪽이 그나마 더 나았어요 ㅎㅎ아주 가끔은 서사가 잡혀서요ㅋㅋㅋ그러게요 말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래도 눈으로 글자 좇았으니 바퀴벌레 알만큼 내장만큼이라도 어디 모를 곳에 박히지 않았을까요 ㅎㅎㅎ

이누아 2020-12-27 13:26   좋아요 2 | URL
허기가 불러서 다녀 왔어요. 먹어도 먹어도 허기는 반드시 찾아 와요. 그렇다고 안 먹으면 죽겠죠. 먹은 것들은 몸으로 가든 몸 밖으로 가든 사라져요. 그 사라지는 것들로 나는 살아가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바퀴벌레나 나나 바퀴벌레의 흰 고름이나 엄마의 젖이나, 까지 닿게 될까요. 중얼중얼. 계속 흘러나와요. 흘러가요. 근데 이런 이야기 하다가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군요. 서사가 잘 안 잡히는 글을 읽으면 읽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계속 서사를 채우거나 구성하게 되지 않나요? 그런 면에서 서사가 잘 안 잡히는 책이 소설가가 읽어야 할 책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열반인님의 소설을 읽고 싶어요. 바퀴벌레가 나오든, 안 나오든.^^

반유행열반인 2020-12-27 13:29   좋아요 2 | URL
헤헤 언젠가 이누아 님께 닿을 수 있을 만큼 열심히 뻗어 보겠습니다. 소설 속 인물이야 밥 안 먹어도 안 죽고 바퀴벌레 내장 집어먹어도 살지만 우리는 밥을 먹고 힘내야죠 ㅋㅋㅋ밥도 먹고 책도 먹고 ㅋㅋㅋ
 
도둑 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4
장 주네 지음, 박형섭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머리칼을 헝클어지게 하는 것. 혹시 그런게 문학이라면 이 책이 진정한 문학이다. 막 청소를 끝낸 거실에 페인트통을 엎질렀을 때, 그게 괜찮다면 체념이 빠른 사람일까, 자유로운 사람일까.  

 

이 책은 '배반과 절도와 동성애가 근본 주제'라는 주네의 이야기 그대로다. 수치심, 악의, 나태, 체념, 경멸, 권태, 용기, 비겁함, 공포가 있다. 반복되는 느낌이다. 소설이면서 수기다. 도둑이 작가다. 이런 이야기 속에 성스러움과 예술을 말한다. 이게 뭐지? 다 읽고나서 처음을 펼치게 된다.

 

 

 

 

배반과 절도와 동성애가 이 책의 근본 주제이다. - P245

이 책 「도둑 일기」는 ‘불가능한 무가치성‘을 추구하고 있다. - P134

추악하고, 더럽고, 일그러진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다니, 그 얼마나 훌륭하고 달콤하고 정다운 악인가! - P129

‘분명 난 그런 인간이야.‘ 그러나 적어도 난 내가 그런 놈이라는 것을 자각을 하고 있다. 그러한 자각은 부끄러움을 물리치게 해주며, 다른 사람들이 잘 인식할 수 없는 아주 독특한 감정이다. 그것이 바로 자존심이다. 나를 경멸하는 당신들의 삶은 비참한 나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대들은 결코 나와 같은 자각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러한 자각을 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이를테면 그것은 우리만의 고유한 비참함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가지고 있는 비참함을, 그리고 그 비참함에 저항하도옥 하는 힘을 인식하는 일이다. - P157

아르망에 대한 나의 사랑이 그처럼 깊지 않았다면 나는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과연 내 사랑을 알고 있는지 어떤지 궁금했다. 그의 존재는 나를 두렵게 만들었고, 그의 부재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 P290

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내 삶을 이끌어 온 것은 나의 체험이 아니라 그 체험을 이야기하는 태도였다. 즉 다양한 일화들이 아니라 예술 작품이었던 것이다. 삶이 아니라 그 삶의 해석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삶을 환기시키고, 그것에 대해 말하고 표현하기 위해 언어가 내게 제공해 주는 것이다. - P297

성스러움이란 아름다움처럼(그리고 시처럼) 본래 유일하고 독특한 특성을 띤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서로 혼동하는 것이다. 그것의 표현은 독창적이다. 그러나 나에게 그 스스로를 이루는 유일한 토대는 체험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것을 자유와 혼동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성자가 되기를 원한다. 이 말이 인간의 가장 고상한 정신적 태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할 것이다. 나는 그것에 나의 자존심을 적용하고, 나의 자존심을 희생시킬 것이다. - P303

죄수복은 분홍색과 흰색 줄무늬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내 마음의 명령에 따라, 내가 좋아하는 세계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거기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가령 ‘꽃과 죄수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같은 의미의 말이다. 꽃의 연약하고 섬세한 성질은 죄수의 거칠고 무감각한 성질과 본질적으로 똑같다. 나에게 죄수나 범죄자를 묘사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그들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수많은 꽃으로 그들을 장식할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다른 것들과 전혀 다른, 새롭고도 커다란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나는 사랑 때문에, 사람들이 악이라고 부르는 것을 향해 모험을 계속해 왔고, 그 때문에 감옥에까지 가게 되었다. - P11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12-08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자미상,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p.139)

 

이 책의 제목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이다. 자기 자신의 순례. 서양미술에 대한 어떤 정보를 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작자는 이 순례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본다, 보여준다. 고흐를 통해 '생활'을 생각하고, 피카소의 게로니카에서 5월 광주를. 미켈란젤로의 노예상에서 감옥에 있는 형들을 떠올리며, 레온 보나의 화가 누이의 초상을 통해 자신의 누이를 본다. 낯선 호텔방에서 죽은 아버지의 영혼을 만나고... 오랫동안 이 책이 사랑받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집을 만나는 것, 먼 시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외면하고 싶었던 상처를 자기 스스로 드러낼 수 있는 것. 그것이 순례가 아닐까.

 

작자의 뒤에서 함께 그림을 보는 느낌이다. 작자를 통해 그림을 만나고 그림을 통해 작자를 만난다. 고야의 '물살을 거스르는 개' 또는 '모래에 묻히는 개'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작자는 개가 고야 자신이라는 걸 알지만 이 그림을 볼 당시에는 자신이 그 개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표현하고 싶지만 표현하지 못한 것을, 혹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줄도 몰랐던 감정의 덩어리를 대신 나타내 주는 작품에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고야, 모래에 묻히는 개(p.109)

 

 

돌아보지 마라, 하고 나는 자신에게 말한다. 돌아보면 훌쩍 사라져 버릴는지 모른다. 그건 서운한 일이다.
어둠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아버지같이 여겨졌다. 아버지는 몹시 괴로워하시다가 반년 전에 돌아가셨다.
창 밖에는 검고 그로테스크한 탑, 달에는 커다란 달무리.
이런 데까지 오셨습니까, 보세요. 여기는 스트라스부르예요...... 등뒤의 아버지에게 말하듯 중얼거려본다.
대답은 없다. - P197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20-08-10 2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올려주신 조각도, 그림도, 뭉클합니다.
나 자신이 순례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순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군요.

이누아 2020-08-10 22:54   좋아요 0 | URL
예. 글도 그림도 뭉클해요. 읽고 나서 오래 여운이 남아요.

바람돌이 2020-08-10 21: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책인데 이렇게 다른 분의 리뷰로 만나니 반갑네요. 덕분에 이 책을 다시 보고싶어지는 밤입니다.

이누아 2020-08-10 22:56   좋아요 1 | URL
다 읽고나서도 자꾸 뒤적거리게 됩니다. 아마 우리 다 다시 읽게 될 거예요.^^

하나 2020-11-04 2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굉장히 좋아하는 책인데, 이렇게 이누아님 덕분에 다시 보게 되네요. 이런 밤에 다시 읽으면 좋을 거 같아요. ^^

이누아 2020-11-04 21:44   좋아요 1 | URL
하나님 서재에서 글 읽고 있었어요. 하나님은 반유행열반인님 서재에서 뵀는데 서재에는 오늘 처음 가 봤어요. 진작 가볼 걸 그랬어요.^^ 반갑습니다.

하나 2020-11-04 20:58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저도 반가운 책을 여러 권 이누아님 서재에서 다시 만나서 신나고 있었어요 :) 저녁 운동 다녀와서 또 놀러 올게요! 시집 리뷰들 너무 아름답네요. 저도 덕분에 이 계절에 시집 몇 권 새로 들여야겠어요. 반갑습니다. ^^

이누아 2020-11-04 21:02   좋아요 1 | URL
사실 저는 님 서재에서 제가 읽은 책을 아직 못 만났어요. 독서량이 많지 않거든요. 모르는 책을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따라 읽게 되기도 하고. 님의 서재에 들어가니 틈틈이 읽을 글이 많아져 신나요.

하나 2020-11-04 23:20   좋아요 1 | URL
제 서재에서 이누아님께서 같은 책을 못 찾으신 이유는, 제가 그 책들을 읽었던 시간을 묻어둬서 그런 것인데요. 음, 서경식은 옛날에 친했던 친구 y가 알려준 작가인데, 그때는 제가 되게 슬퍼하던 때여가지고 막 그 사람의 슬픔에 제 슬픔을 포개가지고 울면서 보던, ˝당신도 언젠가 (그 미술관에 그 그림을 보러) 가게 될 거야.˝ 라는 말을 어딘가에 옮겨 적던 게 기억났고요. 독서량이 많지 않으시다는 건 지나친 겸손이신 듯합니다. 저야말로 오늘 덕분에 잊고 있던 책들을 만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 여기서 이렇게 읽고 계셔 주셔서 감사드려요.
 
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편을 택한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못 한다거나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안 하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짧은 소설이다. 안 하는 편을 택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긴 글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친 탓일까. 안 하는 편을 택하는 그가, 떠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그가, 그래서 감옥에 가는 그가, 식사를 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그가, 그래서 죽어 버린 그가, 전혀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처럼 "약간 미친 것"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어느 날 아침, 한 젊은이가 내가 낸 광고를 보고 찾아와 사무실 문턱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창백하리만치 말쑥하고, 가련하리만치 점잖고, 구제불능으로 쓸쓸한 그 모습이! 그가 바틀비였다. - P25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안 하겠다고?"
"안 하는 편을 택한다고요" - P41

"어째서죠? 별나군요. 그렇죠?"
내가 서글피 말했다.
"약간 미친 것 같소." - P8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0-07-30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틀비, 책을 가지고 있는데, 먼저 오디오북으로 들었어요.
흥미롭게 들었어요. 하지만 우리도 어떤 면에선 그러고 싶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 건 용기가 필요해 보이지만...

이누아 2020-07-30 23:03   좋아요 1 | URL
짧아서 오디오북으로 들어도 좋을 것 같아요. 바틀비가 안돼 보이지 않고 용기 있게 보이는 게 변명이나 핑계 없이 자신의 선택이라는 걸 밝히고 안 하는 편을 선택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또 우리가 뭐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바틀비가 자유롭게 보이는 건 아닐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