눕기의 왕 / 임지은



뒤통수가 사라진다 누워 있었기 때문에

떠다니는 하품을 주워 먹는다 누워 있었기 때문에

아침이 돼서야 이를 닦는다

누워 있었기 때문에 ‥​

 

먹지 않고 걷지 않는다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늦겨울 봄볕처럼

아주 잠시 생겼다 사라진다

 

뭐든 중간이라도 가려면 가만히 있어야 하고

가만히 있기엔 누워 있는 것이 제격이니까

다른 걸 하려면 할 수도 있는데

안 하는 거다

 

? 누워 있으려고

 

그리하여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어디든

누워 있을 수 있게 된다

 

밥상, 난간, 동전뿐인 지갑

젖은 하루가 마르고 있는 빨랫줄

밥은 먹었어? 같은

질문이나

내 그림자 위에 포개진 다른 사람의 그림자까지

 

졸음을 데리고 와 같이

 

졸음은 죽음이 아닌데 코가 비슷하고

같은 베개를 나눠 쓰고

음음허밍을 하고

 

부서진 마음만 골라 딛고

 

이 방은 혼자 눕기엔 너무 넓으니까

때론 건조해서 코피가 흐르니까

누구도 마침표를 찍으려고 하지 않으니까

 

이 시는 지금 누워 있고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 묻은 빵 강성은

 

 

피 묻은 빵을 먹는다

입속에 피가 고인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피 묻은 빵을 먹는다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삶

배가 고프다

먹어도 배가 고프다

시계가 멈춘 것도 아닌데

내일이 오지 않고

아무리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빵

동네마다 빵집이 많고

아름다운 빵들이 진열된 환한 상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람들이 한 바구니씩 빵을 담고

값을 지불한다 피 묻은 빵의 값

뱀파이어는 피를 얼마나 많이 먹어야 할까

뱀파이어도 아닌데

나는 피 묻은 빵을 먹는다

입속에 피가 고인다

누구의 피일까

이토록 익숙한 맛은

 


세계가 불타는데 / 강성은

 

 

어느 해에는 사람들이

여자들의 머리채에 불을 질렀고

다음 해에는 여자들이

스스로의 머리채에 불을 질렀다

 

불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불은 여자들을 태우고 그다음 해에는 모두를 태웠다

그래도 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불에 타 죽은 줄 모르고

자꾸만 자기 머리채에 불을 질렀다

 

이상하게 몸이 차갑구나

불을 피웠는데 너무 빨리 꺼져서

머리를 잘랐는데 순식간에 길어져서

알 수 없는 이들이 자꾸 일어나서

춥고 불타는 세계가 동시에 펼쳐져서

 

쇼핑을 하다가 공중으로 떠오르고

밥을 먹다가 울음을 터트리고

수영장에서 투명해지는 몸을 보고는 어쩔 줄 모르고

불이 붙은 커튼을 걷으며

 

이렇게 추운데 불이 났을 리가 없지

오들오들 떨며 침대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얼음장 같은 이불을 덮는다

 

이상하게 몸이 차갑구나

세계가 불타는데 아직도 너무 춥구나

 

세계가 불타는데

세계가 불타는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르바나 2026-03-31 1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안녕하세요.^^

제가 늘 찾는 시인의 시집만 읽다보니
이누아님 덕분에 이제야 강성은 시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집을 검색해보니 강성은 시인이 등단한지 벌써 20년이 된 시인이시네요.
언젠가 시집 이름이 Lo-fi 라서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기회에 많은 독자들과 만났으면 하고 기대해봅니다.


이누아 2026-04-02 18:56   좋아요 1 | URL
얼마 전 이 책이 김종삼 시문학상을 받아서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읽히게 되었을 거라 생각해요.

대구는 벚꽃이 만발합니다. 점점 더 밝아지는 봄날, 니르바나님이 평안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컬투쇼] 지하철 진상

https://youtu.be/5k1JkGjo7ME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루피닷 2024-01-01 0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누아 2024-01-01 07:46   좋아요 2 | URL
루피닷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덕분에 새해에 서재에 접속했네요. 벌써 복을 좀 받은 느낌입니다.^^
 

울고 싶은 마음 / 박소란

 

 

그러나 울지 않는 마음

 

버스가 오면

버스를 타고

버스에 앉아 울지 않는 마음

창밖을 내다보는 마음

흐려진 간판들을 접어 꾹꾹 눌러 담는 마음

 

마음은 남은 서랍이 없겠다

없겠다

없는 마음

 

비가 오면

비가 오고

 

버스는 언제나

알 수 없는 곳에 나를 놓아두는 것

 

나는 다만 기다리는 것

 

사람이 오면

사람이 가고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더는 말하지 말아야지

 

암병원 흐릿한 건물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드는 마음

 

마음을 시로 쓰지는 말아야지

다짐하는 마음

 

 

-박소란, [있다](현대문학, 2021)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12-31 2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31 2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2-04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1월



이런 시간이 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앉아 창을 보는 시간. 바람이 잠시도 나무를 가만두지 않는다. 낙엽이 새처럼 무리를 지어 날아오른다. 떨어지다 다시 오르고 오르다 떨어지고. 바람이 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폭풍이 몰아칠 때 바다에서 노를 저을 수 없듯이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 바람을 피해 창을 굳게 닫고 있으면서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나. 피할 수 있는 한 피해 보는 것도 삶의 한 방식. 겨울이 오기 전까지 악착같이 붙어 있는 잎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가로수에 전구를 달고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밤이 칼날 같은 바람을 데려온다.  


이 달에 읽은 책들은 대체로 맘에 들었다. 박연준과 벌린 클링켄보그의 책은 글 쓰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다. 잘 읽힌다. 이수명의 횡단은 정말로 이수명의 시론이다. 이수명 시인이 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시적으로 표현한 1부의 글이 특히 좋았다. 평소 관심 있는 시인들이 시집을 출간해서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전에 함께 시 수업을 들었던 윤송정 시인이 시집을 냈다. 얼마나 정성을 쏟아 퇴고했는지 보여서일까. 습작기를 함께한 문우의 시집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한번 쓰다듬게 된다.


------------------------


있다-박소란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신용목

가차 없는 나의 촉법소녀-황성희

절름발이 늑대에세 경의를-바스코 포파

미기후-이민하

쥐와 굴-배수연

어느 멋진 날-87명의 할매, 할배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말하고 싶을 때-김기형 외

기린과 부츠-윤송정


횡단-이수명 시론집

쓰는 기분-박연준

비유에 대하여-카프카

캐럴-이장욱

짧게 잘 쓰는 법-벌린 클링켄보그

슨 폴록-캐럴라인 랜츠너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12-01 17: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이 셀렉트 하신 책들
제 장바구니로 쓸어 담아가여~@@
12월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

이누아 2021-12-01 18:56   좋아요 2 | URL
그러다가 책 쌓입니다. 저도 알라딘 마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장바구니가 무거워져서 요즘은 보관함에 넣어 뒀다 시간 지나도 읽고 싶으면 사 본답니다.^^ scott님도 한 해 잘 마무리하시길. 건강하게 지내세요.

2021-12-02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03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종이달 2022-01-23 0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