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무엇인가 - 유종호전집 4
유종호 / 민음사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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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8 



  “나는 국문학도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선뜻 이런 말을 건네기 힘들다. 대학에서 전공하고자 한 분야를 방관하는 것이 옳지 않은 태도임은 알지만 억울하다며 굳이 소심한 핑계를 대보자면 국문학이 나를 매료시키지 못한 까닭을 들 수 있기도 하다. 시인을 꿈꾸며, 나는 책을 좋아하는 몇몇 친구들과 시를 교류하고, 어린 머리로 문학을 논했던 고등학생 시절이 그립다. 바꿔 말해, 나의 풋풋한 로망은 대학교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소위 “뭣도 모르는 소리 마라.”는 학문의 일갈에 좌절한 것이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는 넘기 힘든 벽을 앞에 뒀던 것일 수도, 아니면 꿈을 옅게 꾼 것일 수도, 혹은 벽이 쓸데없이 높았던 것일 수도 있다. 흥미를 잃은 후에는 시도 쉽게 쓰지 못했다. 입대 전에 겨울창가의 눈발을 보고 쓴 시가 마지막이었으니, 올해로 4년이 되어 간다. 올 겨울에는 시를 쓸 수 있을까. 책 하나를 복기해본다. 

  “시인은 시 말고는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장정일氏가 <공부>의 서문 중에 밝힌 고백에는 이견이 많으리라 본다. 하지만 시인은 시로써 말하는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 그의 고백은 진실이다. 어떤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있든 그것을 표현하려고 하면 일단 시어(詩語)의 연못에 문제를 빠뜨려야 하는데, 그가 온전히 문제의식을 시로써 표출하진 않는다. 그곳에는 은닉이 있고, 은유가 있으며, 함정이 있고, 덫이 있다. 그래서 시는 대개 잘못 읽히기 일쑤이다. 시를 비평함은 사회문제를 비평함과는 다르다. 따라서 시에만 집중하면 다른 것은 보지 못해, 하여 소위 ‘골방 시인’이라는 말이 항간에 널리 퍼져 있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생각해볼 수 있다. 장정일氏는 시인의 무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마흔이 넘는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작정은 독한 것이어서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다루고자 공부했는지 들여다보면 혀를 내두르게 된다. 

  내가 그동안 각종 사회문제와 세계적 대안들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때를 반성하며 이런저런 어려운 책을 찾는 까닭도 같다. 시인이 되기보다는 ‘시대인(時代人)’이 되려고 한 것이다. 문학에게 주던 애정이 아주 식은 건 아니나, 정도가 덜해진 것은 분명하다. 내가 나의 전공으로부터 멀어지는 정도는, 아직 졸업하지 않았음에도, 점점 강해지는 듯하다. 독창적 사고를 지향하는 나에게 각종 문학이론과 논문들이 적잖은 방해를 했다는 것도 숨기지 못할 비밀이리라. 이런 것들이 지금의 나에게는 심각한 문제를 안겨준다. 문학인으로써의 자질이 부족함을 새삼 깨달은 까닭이다. (비전공인 미술에는 그토록 열정적으로 다가갔었건만!) 

  예비문학도들에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말이지만, 겨우내 내려 창가에 소복이 앉은 눈을 보고 갑자기 시상(詩想)이 떠올랐다고 해서 그대들이 시인의 자질을 타고났을 것이라 지레짐작치는 말아야 한다. 그것은 분명 창의적 사고이지만 대체로의 인간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시지각의 공통적인 연상 작용일 뿐, 시인의 경지에 이르러 갖게 되는 심오한 문학적 본질은 아니다. 어떤 스타팅라인에 서 있다고 해서 그곳의 길이 마냥 저만을 위한 것이라 짐작하면 낭패를 본다. 둘이 갖는 정도의 차이는 문학을 알면 알수록 더욱 선명하게 보일 것이고, “좋은 문학”을 선별하는 작업이 유난히 까다로운 이유도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멜랑콜리로부터 일상으로 되돌아오게끔 되어 있다. 그리하여 내가 내린 나만의 결론은 문학을 배우지 않고, 접하는 것이다. 이미 몇몇 방법들을 배운 사람이 에둘러 핑계를 댄다고 하겠지만, 맞다, 복잡한 이론들로부터 자유로워져 자신만의 독서를 하겠다고 벼르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오히려 제각각의 독서가 훨씬 현실적이지 않은가 하고 돌아봐야 할 일이다. 

  독서량도 턱없이 부족하고, 전공에 대한 애정도 적으니, 단지 잠시 시인을 꿈꿨다는 이유로만 이런 글을 적는 것에는 쓸모없는 비약이 숨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종호氏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복기하면서 나는 내 안에서 여전히 (비근한 표현이지만) 문학이 살아 숨 쉬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고등학생 때, 나에게 많은 가르침과 용기를 주신 (그분은 내게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을 당신께서 밑줄 치며 읽으셨던 영어 원본으로 선물해주셨는데) 은사께서 추천해주신 책이다. 제목처럼 “도대체 문학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답변을 갈구하는 예비문학도들이 읽기 좋은 책이다. 특히 시인이 그러하다. 유종호氏는 상당히 많은 분량을 오로지 “시 설명하기”를 위해 투자했다. 

  시어는 일명 ‘낯설게 하기(Defamilarization)’의 전략으로 만들어진 조어(造語), 즉 “만들어진 언어”이다. 그런 까닭에 시인을 일컬어 ‘언어의 연금술사’라 부르는 것이다. 유종호氏는 시어와 그렇지 않은 언어의 차이를 “우주적 차이”라 부른다. 단 하나의 언어선택으로도 시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시인들은 어휘력이 탁월해야 한다. 자신이 쓴 습작들을 쭉 펼쳐놓고 단어, 혹은 문장별로 유사한 것끼리 분류해봤을 때, 스펙트럼이 의외로 좁다면 자신의 어휘력을 의심하고 사전을 펼쳐들 일이다. 한편, 자신이 너무 어렵게 시를 쓴다면 그것 역시 특정 단어나 표현을 고집하게 되는 어휘력 부족을 문제 삼아봐야 하는 현상이다. 물론 유종호氏의 말처럼 “시는 무조건 쉽게 쓰여야 한다.”는 요즘 독자들의 독단도 심각한 문제이겠지만 예비 작가와 독자의 입장은 서로 다르므로 작가는 자신의 시적 소양을 독자보다 훨씬 심각하게 문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문학이 모름지기 이래야 저래야 한다는 말은 없다. 문학은 다양성과 창의로써 지금껏 위용을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보수적 평단의 “이건 문학이 아니다!”라는 일갈을 목격한다. ‘환상문학의 어머니’라 불리며 실로 엄청난 수의 세계적 팬을 보유하고 있는 어슐러 르귄도 정작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를 일컬어 “그것도 소설이냐?”고 비판했었다. 프랑스 문학계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소설가’가 아니다. 또한 문학상을 거부하는 사태도 빈번했다. 심지어 독자와는 글로써만 만나고 일절 사생활 노출을 꺼리는 쥐스킨트와 같은 기인(奇人)도 있다. (하지만 그가 기인일까? 아니면 그의 속살까지 보려고 하는 관음증적 독자들이 기인일까?) 그런 까닭에 유종호氏는 현명한 방법을 선택했다. 수많은 각주를 달아놓은 방대한 양의 논문들과는 달리 친절한 교육자의 입장에 서서 각종 이론들을 보기 좋게 나눠 설명한 것이다. 사실 프랑스 상징파 시인, 토마스 만, 제임스 조이스 등 직접 읽어봐야 이해가 되는 부분(나는 대개 이 부분에서 좌절하곤 한다.)이 있어 문학을 멀찌감치 뒤에서 조망하는 이에게 큰 도움이 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만한 가이드라인은 없다. (김대행氏가 쓴 동명의 책 <문학이란 무엇인가(92년 발행)>도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대목은 책의 맨 마지막에 놓여 있다. 독자라면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집중을, 예비 작가라면 “어떻게 쓸 것인가?”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사실 두 질문 모두 독자와 예비 작가에게 필요한 것이리라. 유종호氏의 답변은 정직하다. 독자들에게 그는 “꼼꼼히 읽으라.”고 강조한다. 많은 것을 알고 싶은 입장에서 속독(速讀)에 능한 사람, 소위 ‘대각선 읽기(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 시선을 내리며 한 줄의 문장을 단 번에 통독할 수 있는 독해력)’에 능한 사람이 부러운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유종호氏가 말한 ‘몰아적 집중’이다. 이는 무엇일까? “진정으로 즐길 수 있어서” 느끼게 되는 함몰이다. 쉽게 말해 책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짜릿한 경험을 느껴본 지 얼마나 되었기에 근래 들어 아득하게 연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특히 젊은 지금, 삶의 모색에 있어 중요한 어구들이 긴 독서 중 이따금 등장해 나의 머리를 때리던 경험은 어디 간 것일까? 서점에 나온 책들 중 베스트셀러의 대부분이 죄다 그런 경구들만 모아놓은 ‘계발서’인 것은 다분히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이어 유종호氏는 ‘서울대 선정 100대 도서’와 비슷한 고전리스트를 제시하는데,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어떻게 쓸 것인가?”는 조금이라도 글을 꾸려보려는 이들에게 항상 벽처럼 다가오는 질문인데, 글쓴이들에게는 거의 자아성찰에 버금가는 인내와 추진력을 요하는 난제이기도 하다. 유종호氏가 몇 가지 방법, 가령 동요를 많이 읽고 암송하여 말바꿈의 민감성, 소위 말하는 ‘언어구사력’을 키우는 것 등을 알려줬으나, 그도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정말 중요한 것은 역시 많은 책을 읽어 글을 분별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으나, 대체로 많이 읽은 이들이 문장을 세련되게 쓴다. 그것은 단기속성으로 배울 수 있는 재주가 아니다. 故 서정주氏의 교훈처럼 평생을 “불치의 욕구불만 감정”으로 가득 채워 “타성의 게으름”에서 벗어나고, 결국 “새 경지의 발견”을 추구하는 타파의 정신이야말로 글의 본질이자, 역할인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작가일수록 겸손하다는 것도 우리가 꼭 배워야 할 점이다. 

  나의 글부터 시작해서 이따금 칼럼에 등장하는 얄팍한 수준의 ‘전문가들의 글’에 이르기까지 세상에는 온갖 잡스러운 글들이 많다. 글은 사람이라고 했으니, 나부터 각골하여 반성해야 할 일이다. 앞서 나는 문학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애증이 쌓인다고 해야 옳을까. 그것을 사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고, 그 중 대학의 방법이 싫었던 것이라 말해야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싫증의 대상도 모른 채 무턱대로 “문학, 문학”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나는 어제 새벽까지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읽고 있지 않았던가! 

  문득 창밖의 보슬비 내리는 풍경이, 시름시름 앓는 11월의 마지막 풍경이 “지금은 언제인가?”라는 난해한 질문 하나 툭 던져놓고 막 밝아질 참이다. 나의 11월은 그렇게 가고, 별로 그릴 것도 없는 냉소한 마음으로 이번 해에는 시를 다시 쓸 수 있을까. 시집이 잔뜩 꽂혀 있는 어머니의 책장으로 가 아무 책이나 하나 덥석 들어 펼쳐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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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9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1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위험한 생각들 - 당대 최고의 석학 110명에게 물었다
존 브록만 엮음, 이영기 옮김 / 갤리온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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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8 



  스티븐 핑커가 서문을 쓰고, 리처드 도킨스가 해제를 달았다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Dangerous Idea’를 일컬어 “Dangerous Idea”라고 부르는 시대의 조류에 대해 일침을 가하겠다는 것이다. 존 브록만이 설립한 <엣지(Edge, “지식의 최전선”을 표방하는 포럼 웹사이트)>에 기고해온 수많은 석학들의 급진적인 생각들을 모은 책인 <위험한 생각들>은 각 분야별로 우리가 숙고해봐야 하는 “비틀어진 사고”의 장이다. 최근 들어 사상적 슬로건이 되고 있는 문장들의 추세는 대략 이러하다. “비틀어라(Twist!).”, “점령하라(Occupy!).”, “분노하라(Indignez Vous!).” 등. 이들은 기존체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상기시킨다. 현재 우리가 저항하려고 하는 목표 대상들에는 종교, 극우주의, 신자유주의, 월가, 중앙정부, 세계 1%의 갑부, 보수적인 대학의 교수진, 사회의 폐단을 낳는 보수주의, 비열한 지역주의 등이다. 그 외에도 많으며, 심지어 저항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려는 이들도 있다. 이렇듯 저항정신은 모든 것을 전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저항을 방관한다. 우리는 대체로 안정적인 전철에 오르고자 하는 승객이다. 때문에 우리가 “다양성을 옹호한다.”고 하는 인심 좋은 발언들은 주로 ‘거짓’이라 판명난다. 다양성을 위험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핑커의 서문은 그런 사고들에 전적으로 의문을 던진다. 정말로 위험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어떤 생각을 애초부터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일이라고 그는 답한다. <위험한 생각들>은 그 생각들이 자유롭게 토론되는 공간이다. 이들은 지적논쟁을 통해 타당성을 검증받을 것이고, 다른 생각들의 도전을 받을 것이다. 한 방향으로 결론이 난 상태에서 이뤄지는 토론은 결론을 재차 확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비유하건대, 우리는 ‘신’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 의심을 종교의 집 바깥으로 내놓아 햇빛을 받게 해야 한다. 핑커는 한 판사의 유명한 격언을 알려준다. “햇빛은 최고의 살균제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 단, 타당한 근거와 견고한 논리를 지닌 것들만이 소통될 권리를 갖는 자유. 그것이 건강한 사회의 모습이다. (이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 확인된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소위 ‘악플’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처벌되고 비난받아야 한다고 말하며 사상과 표현도 권리를 가질 정도로 형체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상당히 많은 ‘위험한 생각’들이 이 책에 담겨져 있고, 일부 ‘생각’들은 해당분야의 전문가적 지식이 없으면 일반인들이 쉽게 생각해볼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기까지 하다. 석학들의 논쟁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에게 “대중을 겨냥한 낮은 자세”를 요구하는 것은 욕심일 것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어려운 까닭은 오히려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그런 생각들’을 거의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낯설어하는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나의 경험상 주변에 종교를 가졌으나 신의 존재에 회의를 가진 이들, 그리고 종교가 없고 무신론자인 이들은 상당히 많다. 현대사회는 이처럼 종교가 사회의 일부 기능만을 담당하는 ‘종교최소주의의 사회(<거룩한 테러>의 저자 브루스 링컨)’이다. 그런데 그들이 신을 믿지 않게 된 경위는 생각보다 다양하며, 어떨 때는 일관성이 없는 듯 보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들은 신의 존재여부를 논리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으로 “믿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을 이끌어내고, 그로부터 “왜 그렇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온갖 비논리적인 궤변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종교로부터 신앙을 강요당한 나쁜 기억을 떠올리며 격해지기까지 한다. 그런 사람들은 도킨스와 세이건의 논리적 반박을 통해 사고의 계통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위험한 생각들>에 나온 논쟁거리들을 쭉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신’, ‘윤리’, ‘영혼’, ‘자유의지(자아 포함)’, ‘뇌과학’, ‘진화론’, ‘우주론’, ‘온난화’, ‘직관’, ‘인간의 한계’, ‘사이버’, ‘성(性)’, ‘신화’, ‘평등’, ‘시장’, ‘고령화’, ‘민주주의’ 등 굳이 “위험한 생각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 않아도 우리가 충분히 논쟁의 각축을 확인할 수 있는 주제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이들 중 일부는 우리에게 고루한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자주 논쟁된다고 해서 일정부분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며, 거의 모든 주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가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를 가르는 것은 이 책이 가진 기능의 일부이다. 이 책의 전체적인 기능은 논쟁의 조건을 상기시키고 <엣지>의 모토인 “지식의 최전선”까지 독자들을 이끄는 것이다. 브록만이 엮은 ‘위험한 생각들’은 모두 근거, 반론을 반박한 논리, 그리고 미래예측 등을 구조로 한 견고한 건축물이다. 이러한 구조의 건물만이 논쟁의 땅에 세워질 수 있다. 

  부서지지 않는 논리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대개 고착된 관습 속에서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맹목주의의 비호를 받아 왔다. 반면, ‘위험한 생각들’은 위태하다. 아니, 오히려 제목을 “위태한 생각들”이라 해도 괜찮을 뻔했다. 하지만 위태한 동시에 위태함의 전체적인 모습은 그 어떠한 것보다 신선하며, 건강하다. 학자들은 이 ‘다양성’에 주목한다. 디터 젱하스는 그의 책 <문명 내의 충돌>에서 중국의 전국시대를 근거로 다양성을 옹호했다. 그 다양성들은 하나의 목표, 즉 “태평천하”를 목표로 했다. 브록만의 ‘위험한 생각들’은 무엇을 목표로 하는 다양성일까? 맹목을 타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양성이다. 마르틴 우르반의 <믿음의 엔진>을 읽으면 우리가 왜 맹목이 공격당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는지 알 수 있다. 맹목이 공격당하면 우리는 숨을 못 쉴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만약 혁신이 있다면 그건 누군가가 우리의 그 ‘공포’를 제거해주는 작업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위험한 생각들>에서 종교와 과학에 관련된 주제를 주로 찾아 읽었다. (필립 앤더슨의 “특정 신이 존재할 확률은 상당히 낮다.”와 스콧 아트란의 “종교는 과학에 없는 희망이다.”, 샘 해리스의 “과학은 종교를 파괴해야 한다.” 등을 비교해보는 작업은 재미있다.) 생소한 주제들은 한 번 스쳐 읽고 지나가는 정도로만 독서했다. 하지만 상당히 폭넓은 분야별 카테고리가 있으니 독서하는 이의 관심분야가 각양각색이더라도 이 책은 “위험한 생각”이라는 슬로건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의 대부분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통독과 발췌독이 모두 용이하다. 또한 하나의 생각을 읽어도 전체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 하겠다. 각 분야별로 깊이 있는 고찰을 해보고자 한다는 가정 하에 이 책의 각종 리뷰들을 모아보면 아마 <위험한 생각들>은 그 분량이 몇 천 배는 커질 것이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결과적으로 이 시대에 필요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맹목을 견제하는 우리의 힘과 사유의 범주가 증가하는 까닭이다. 

  도킨스의 해제는 이 책의 위험한, 때론 어려운 주제들 사이를 여행한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위험한 생각들’의 목표를 상기시켜준다. 도킨스 자신이 ‘위험한 생각’을 내놓아 대대적인 논쟁의 한복판에 오른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는 필히 절대주의, 본질주의와 싸워야 하고, 그렇게 하고 있으며, 항간에서는 그가 종교에 완전히 반(反)하는 인물(하지만 그의 <만들어진 신>을 정독한 사람이라면 그도 강경한 만큼이나 종교의 순기능을 인정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이라고 주로 소개된다. 하지만 그가 정말 하고픈 말은 “지금 내가 하는 위험한 생각이 진실이 아니라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맹목적인 관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덜 위험하다.”는 것이다. 생각의 통제가 강한 사회는 마치 오웰의 <1984>처럼 자유롭지 못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생학과 관련된, 그리고 인간만이 윤리적 감정을 갖는 동물이라는 생각과 관련된 우리의 은폐와 믿음 사이를 고발한다. 가령 (인용해보자면) 이런 것이다. “달리기 선수나 높이뛰기 선수를 훈련시키는 것은 받아들이면서도,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유전학적 번식을 통해 만들어내는 것은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나, “노예를 대하던 우리 조상들의 태도와,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을 대하는 오늘날 우리의 태도 사이에 도덕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흡사 바칼로레아에 출제될 것 같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우리가 입을 다문다는 것이다. 도킨스는 “왜 생각해보지 않는가?”라 묻는다. 우리는 그에게 반문하려고 하겠지만 유전학적 지식도, 노예의 역사에 대한 이해도, 아니 ‘인간’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상태라는 것이 곧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무지’를 굳건하게 유지시키면서 위태로운 개념이해 사이를 엮어주는 것이 바로 맹목이다. “위험한 생각들”이 위험한 까닭은 그것의 도발성에 있겠으나, 그것이 우리를 도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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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2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난 사람들이 금을 밟고 나가려는 걸 도발로 보지 않았어요. 그것도 좀 더 큰 원을 그리면 결국 안에 있는 거니까. 모든 게 가능해요, 모든 것들이. 책을 읽으며 그걸 잊으면 더이상 읽어도 나아갈 길이 없을 것 같아요.

어떤 위험한 생각인지 논쟁거리들을 보고도 흥미가 생겨요.

굿 애프터눈, 탕기님. 좋은 월요일 보내요.^^

탕기 2011-11-28 17:29   좋아요 0 | URL
아이리님 말씀이 맞아요. 지평을 점점 넓히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학자들만큼 뭔가를 이해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거죠. 그걸 상기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인 듯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11.11.27 



 

 

 

 

 

 

  디터 젱하스의 <문명 내의 충돌>은 지난 계절학기에 들은 종교관련 강의 레포트를 위해 참조했던 것이다. 비록 요한 갈퉁과 강인철 교수의 책을 기반으로 써야 한 레포트였지만 사실 몇 주 간의 심각한 고민에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은 디터였다. 그가 문화에 대해 깊게 알고자 하는 신중한 독자들에게 준 메시지의 중요성은 상당히 크다. 언젠가 제대로 복기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긴 호흡으로 그의 책을 샅샅이 파헤쳐보고자 한다. 몇 편에 걸쳐 긴 글을 쓸 것이다. 

 

*       *       * 



  디터는 문화의 불연속성과 투쟁에 대해 꼼꼼하게 역설하고 있는데, 그와 반대되는 테제는 그 유명한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이었다. 새뮤얼의 테제는 문명 간의 갈등이 심각한 현대사회의 단면을 밝혀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요한 갈퉁 역시 이에 동조하여 비폭력 평화주의를 역설했다. 하지만 같은 평화주의자로써 디터는 문명충돌의 세계적 현상을 다르게 바라본다. 그가 보기에 문화는 명백한 실체가 아니다. 문화는 카테고리로써 규정할 수 없다. 여기서 디터는 한 학자(Dirk Baecker)의 문장을 빌린다. 문화란 “가치를 둘러싸고 벌인 투쟁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투쟁’이라는 단어에 집중한다면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유독 동양에서는 고전적 성격을 띤 민족국가와 대제국이 자주 출현했으나, 유럽은 그렇지 못했다. 독자적인 자율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세력도 쉽게 유럽을 ‘통째로’ 소유하지 못했던 것인데, 이것이 바로 유럽의 ‘빗나간 권력집중현상’을 수 세기동안 진행시켰다. 이의 중요한 예로써 디터는 영국의 <대헌장(1215년)>의 취지, 즉 ‘통제와 균형’을 상기시킨다. 유럽의 역사는 이후 불연속과 혁신이 주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근대화했을 때, 제국주의가 등장했으며, 그들의 정치적 야욕 앞에 비유럽의 문화가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런 경우 대체로(디터는 분명히 나뉜다고 하진 않았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대략적인 분류는 해놓았다.) 비유럽의 문화는 서구화 정책, 폐쇄정책, 둘의 적절한 혼합, 혹은 아주 드물게 대단위의 혁신을 이룩하는데, 이 과정 속에서 전통사회는 유례없는 ‘유동성’ 탓에 혼란기를 겪는다. 이것이 바로 문명 내의 문화충돌이며, 디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이다. 혼란기를 잘 극복하고 서구화를 이룩한 지역은 대체로 동아시아이고, 여전히 극복하지 못해 숱한 내전과 만성적 개발위기를 겪는 지역은 이슬람이다. 하지만 둘의 문화적 결과는 동일하다. 전통문화가 파괴된다는 것이다. 문화는 분화된다. 

  분화된 문화가 일률적으로 서구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근대화가 진행될수록 “전통사회의 가치관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즉, 근대화를 통해 개조된 가치관이 해당 문화를 거의 독점하게 되는데, 이는 유럽이나 비유럽이나 유사한 과정을 거친다. 유럽은 근대화의 시작과 함께 각종 사회적 병폐들을 떠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인권’, ‘민주적’, ‘사회적’, ‘법치(法治)’ 등의 제도적 완충장치가 마련되게 된다. 이는 철학적으로 정당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과정 중 그들의 선택에 의해 확보된 가치관으로써 어떠한 역사적 보편성도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보편화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세계가 마치 그리스도교 對 이슬람교로 확연히 구분되는 것처럼 ‘보도’되는 편향적인 현상에 사람들이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서구의 가치관은 비유럽의 전통문화를 파괴시킨다. 다만 유럽이 천천히 계몽된 것과는 달리 대부분의 비유럽에서는 서구화의 압력과 제국주의의 압제, 혹은 스스로의 개혁의지가 빠르게 박차를 가했다는 점에서 유럽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우리나라가 이와 같은 상황의 대표적 국가이다. 서구화가 상당히 진행된 것처럼 보이나, 그 과정이 너무 빨랐고, 정신적 가치들이 전통문화와 거의 강제적으로 충돌하면서도 제대로 흡수되지 않은 채, 혹은 왜곡된 채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각종 사회적 병폐들이 ‘치유’되지 못한 선진국이 된 것이다. (우리는 너무 빨랐기 때문에 디터의 말에 따르면 “그에 대한 방어로서 더욱 강렬하게 기존의 문화, 그리고 일상적 혹은 상상된 전통을 찾게 되는” 현상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진단은 우리 사회를 비판적으로 견지하려는 수많은 국내도서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디터는 1장에 들어가기 전, 생소한 용어 하나를 제시한다. “문화 상호 간의 비교를 새로운 과제로 인식한 철학”이라는 뜻의 ‘간문화적 철학(Interkulturelle Philosophie)’이다. 용어는 낯설지 모르나, 개념은 익숙하다. 디터의 글이 완성된 때는 21세기가 아니었다. 당시 우리는 세계화, 지구촌, “세계는 하나”와 같은, 나름 ‘트렌디’한 용어들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체감할 수 있을까? 지금은 과연 어떠한가? 21세기에 접어들어 이 시대의 철학자들에게는 새삼스러운 과제가 하나 주어졌다. 전례 없었던 세계화를 철학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전통사회를 기반으로 했던 역대 유명 철학자들의 원대한 사고와는 전혀 다른 차원을 요구하는 철학이었다. 

  세계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는 매년 발행되는 각국의 미래보고서를 통해 수 있고, 우리는 과거와 비교했을 때, 얼마나 많이 사회가 ‘개조’되었는지를 진단해볼 수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읽을 때에도 느낀 것이지만 라다크 사회의 개조는 우리가 흔히 각 분야라 여기는 ‘사회’와 ‘정치’가 서로 얽히면서 일어난 충돌과 투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 결과는 안타까웠으나, 라다크가 예외일수는 없었다. 문화개조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 “코카콜라”나 “나이키”, 혹은 “켈빈 클라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라다크의 티벳 불교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이야 서양인들에게 재조명되고 있으나, 소위 ‘문명화’된 사회에서 티벳 불교와 같은 ‘우주중심적’인 전통철학은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전통철학이 유지해오던 사회의 유기적인 모습은 산산조각난다. 라다크 사람들은 갈등이라는 것을 거의 몰랐었다. 하지만 서구화되는 동안 양산된 각종 갈등둘이 그들을 시시각각 괴롭혔고, 결국 그들은 열등감에 빠져 남의 손을 빌리는 처지로 내몰렸다. 

  반면, 서구에서 진행된 이 갈등들, 혼돈과 카오스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답을 내놓은 지역은 역시 서구였다. 담론, 규율, 기능적 분화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역할 분화, 민주적 참여 요구, 분배의 정의와 공정에 대한 논란, 그리고 이를 모두 합친 바로 ‘정치문화’이다. 디터는 이를 “문명화의 육면체”라 부른다. 그러나 이것들의 실체는 사실 임시이자, 강제였다. 결과는 어떠한가? 분배의 정의와 공정을 위해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항상 참패를 맞이해야 했다. 오히려 그것은 갈등을 드러내기만 했다. 어떠한가? 우리가 저지르는 온갖 병폐와 비리가 자연스러운가? 아니면 그것을 방지하고 처벌하는 제도들이 자연스러운가? 디터는 전자라고 답한다. 전자가 선행한다. 즉, 문명화는 전통사회에 대한 투쟁이다. 따라서 ‘문화 본질주의’라는 단어는 성립하지 않는다. 문화에는 본질이 없다. 그것은 DNA도 없고, 상속도 없다. 문화 본질주의는 때론 우생학적 궤변(에드문트 후설)으로 잘못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유럽은 대단히 힘든 역사를 거쳐 만든 가치로써 병폐와 맞서고자 했고, 때론 운이 따르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성립된 유럽 내의 ‘서구화’는 국제적 표준안이 된 듯 큰 권력을 행사했고, 비유럽이 그 권력 앞에 놓였다. 이는 유럽이 스스로 받았던 힘보다 더 큰 힘이 된다. (유럽이 열광했던 오리엔탈리즘, 시느와즈리, 우키요에, 유교 유입, 러시아 문화 유입, 최근 티벳 불교에의 관심 등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힘은 다양한 현상을 낳는다. 중국처럼 최근에 들어서도 전통문화를 대체할 서구적 사상들 중 하나를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국가가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처럼 비교적 명확하게 서구화된 나라도 있다. 반대로 이를 저지하는 움직임으로 디터는 간디를 예로 든다. 절반만 추구하려는 움직임에서는 다소 민족주의적 경향(독일의 경우)을 발견할 수도 있다. 정신을 그대로 두는 쪽에는 오늘날 상당한 문제가 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도 있다. 최근 KBS, NHK, CCTV, 대만TV 등을 비롯한 아시아 유수의 방송들이 “아시아적 가치”를 모토로 한 여러 다큐멘터리, 가령 <차마고도>, <누들로드>, <아시안 트리> 등을 기획하는 것도 이런 정신을 대변한다고 하겠다. 앞서 말한 네 번째 경우인 혁신에는 서아프리카의 철학자들이 포함(이들의 사상에 대해서 나는 거의 모른다.)된다고 하나, 이는 대안적 인식론일 뿐 어떠한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혁신이란 대체로 전통사회와 서구화 사이의 문제점을 깨닫고 사회 전체의 질적 변화, 소위 ‘점프’를 요하는 것인데, 한 사회가 전적으로 완전히 개방되리라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디터는 위의 과정을 거치는 유럽적 경험들이 반복될 자명한 현상, 즉 세계화는 앞으로 수 십 년은 지속될 것이라 예견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슬람의 ‘봄’을 거의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다. 

  디터는 이어 중국의 백가쟁명(百家爭鳴) 시대에 등장한 대표적인 다섯 가지 사상을 예로 들면서 그곳으로부터 현재의 우리가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필요한 교훈 몇 가지를 끌어낸다. 이 부분은 특별히 정리하지 않아도 중국역사를 잘 알고 있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공자, 맹자, 순자, 한비자, 묵자, 양주, 그리고 도교 등의 사상은 유명하다. 그리고 이들의 사상이 모두 역사적 혼돈기에 사회의 질서를 구비하고자 나타난 것임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디터는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달리 이들이 모두 현대적 사상을 설파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아주 명료하다. 우리는 흔히 공자를 수직사회의 병폐를 야기한 인물로 보나, 실제 공자가 내놓은 패러다임은 “지배자의 정당성 문제를 사회적 복지와 관련”해 생각했다는 점에서 탁월했다. 맹자가 이에 근거해 역성혁명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디터는 도교의 ‘문명저항’적 이미지에 대해 갖는 편견을 반박하며 “공적 질서의 형성을 위한 하나의 기본 입장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법을 모두 동일하게 적용한다는 패러다임을 설파한 한비자, 자율적 윤리(사랑)에 호소하는 묵자, 자기중심적 삶의 영위를 주장한 양주 역시 현대적 인물들이라 주장한다. 

  이런 사상들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상호보완적 특성을 지닌다.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중국이 현대적 사상을 내놓을 수 있었던 까닭을 디터는 유럽의 근대화와 맞닿아 설명한다. 즉, 유럽의 근대화는 전통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이룩되었는데, 중국의 백가쟁명 역시 그러했다는 것이다. 이를 디터는 “전통을 비판하는 전통”이라 부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오늘날의 중국이 그 전통을 다시 한 번 상기하도록 우리가 격려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이는 “중국이 틀리니 미국이 옳다.”고 말한 노벨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의 견해와는 다르다. 디터는 중국의 과거에서 다양성의 긍정을 보고 고무되었던 것이다. 현 중국정부의 체제와 이를 비교해봤을 때, 분명 디터의 주장은 실효성이 적어 보이기는 하나, 중국의 올바른 근대화를 이끌기 위해서 중국이 반드시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중국은 중국 나름의 중앙체제적 발전방법이 있다고 말한 싱가포르의 국부(國父) 리콴유의 옹호에도 일견 타당한 면이 있으나, 그런 개발이 준 폐해는 서양이 지적해온 바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의 폐단도 늘 상기되기 때문에 故 김대중氏가 리콴유의 ‘아시아적 가치’에 반대해 서로 다른 가치의 융합인 “지구적 민주주의”를 말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민주주의만이 유일한 결론이라고 봤다.)    

 



- 2편으로 이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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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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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5
 


  드러나지 않은 세계는 많다. 인터넷만 해도 그러하다. 우리가 아는 인터넷 세상은 빙산의 일각이다. 바다 속에는 ‘악마’가 살고 있다. 세계의 주요 포털사이트에서는 검색되지 않는 이른바 ‘딥웹(Deep-web)’이라는 세계에는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추잡스럽고 혐오스러우며, 아마 에코도 <추의 역사>에서 결코 다루고 싶지 않아했을 기괴한 사상과 이미지들이 펼쳐져 있다고 한다. “나는 인간을 과연 얼마나 잘 아는가?” 어떻게 사람이 그런(악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봤을 때, 우리는 대개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 도덕과 광기 사이를 우윳빛의 얇은 장막 하나가 위태롭게 가리고 있다. 사라마구는 <눈먼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cegueira)>로 우리의 인간성을 실험한다. 많은 이들이 이 픽션을 두고 인간성을 옹호하는 편과 주제 사라마구의 설정에 고개를 끄덕이는 편으로 나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크게 주목받은 시기는 2008년 이 소설이 영화로 개봉했을 때였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가타부타를 따질 논제가 아니다. 세계의 곳곳에서 이것이야말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추악한 미시(微示)의 역사가 진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 진정성을 갖고 그것들을 상기해 도덕을 각성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큰 충격을 줘야 했고, 되도록 ‘사실’에 가까워야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두려움을 준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시작장애인 체험을 한 적이 있었다. 체험이라고 해봤자 서로 웃고, 떠들고, 복도에서 넘어지고, 얘가 쟤를 밀었네 하며 싸우는 것이 전부였지만. 전체 감각의 대략 8할을 시각에 의존한다는 인간에게 있어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단순한 지각이 아니라, 더 나아가 “안다.”, 그리고 “믿는다.”로 이어지며, 특히 후자의 경우는 생존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중대한 판단으로 이어진다. 더군다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처음으로 시각을 잃은 서른여덟의 남성에게는 뭔가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윳빛 장막만이 보일 뿐이다.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감각적 현상이 그에게 준 공포는 차라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보다 훨씬 강하다. 환한 백색 상태가 그를 “삼켜버리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사라마구의 표현처럼 “이상한 영역”이 된다. 

  ‘확인 불가능’의 모든 낯선 영역에 대해 남자는 히스테리를 부리게 되는데, 불신에서 비롯된 피해망상으로부터 서서히 시작되는 거의 모든 반응들은 그의 주변 사람들마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이 기괴한 증상이 하나 둘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확인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나도 걸리면 어쩌지?”라는 사회적 공포가 퍼지게 된다. 사라마구가 의사의 심리를 묘사한 부분은 독자들의 숨통을 옭아맨다. 그는 어제 서른여덟 살의, 눈앞이 우윳빛처럼 환한 증상을 보이는, 그리하여 신경증을 부린 남성의 증상이 자신에게 옮아진 것에 대해서 공포를 느낀다. 아내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녀를 거칠게 밀어내며, “저리 가,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 당신도 나한테 옮을지 몰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보건부에 연락을 하나, 대부분의 픽션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본래 중대한 일은 중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윗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법이다. 의사의 직감은 진실이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이,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위력을 갖고 있을까? 하지만 의사의 걱정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상급 부처에서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의사는 격리조치 된다. 그 때, 아내가 뛰어나와 “방금 나도 눈이 멀었거든요.”라며 동행을 요구한다. 여기서 독자들은 최초의 희망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용기는 고통을 가져왔다. 앞으로 펼쳐질 역한 광경과 사람에 대한 불신, 그리고 고립감 때문에 그녀는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자신 역시 눈이 멀기를” 바란다. 

  격리된 병실은 “공기 자체가 무거워져, 강하고 잘 사라지지 않는 악취를 내뿜고 있는 것” 같았고, “공기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상황이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행동이라고 해도 끔찍한 악취와 별반 다르지 않다. 최악의 순간에서도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방관이 일어나고, 강간이 일어나고, 권위에 대한 쓸모없는 저항이 일어나며, 질서를 세우자는 이들과 “네가 무슨 상관이냐!”며 화를 내는 사람들이 싸운다. 어떤 것 하나 도움이 되지 않는데, 문제는 그들이 “눈을 뜰 수 없을 것이다.”라는 불확실한 상태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뒤, 거의 바닥에 가까운 회의와 절망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식량문제와 위생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병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의사의 아내는 고군분투한다. 

  도덕과 위선과 위법이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고, 할퀴고 싸우는 곳에서는 도덕도 잔인해진다. 첫 번째 사람이 격리소의 병사가 쏜 총에 맞아 죽은 뒤, 사람들은 훨씬 강해져야 한다고 다독이거나, 혹은 더 예민해졌다.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의사의 아내는 남자의 시신을 묻기 위해 삽을 가지러 병동을 빠져 나온다. 그런 그녀에게 삽의 위치를 에둘러 말하는 병사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녀를 보면서 쾌감을 느낀다. 화가 난 그녀는 삽을 금방 짚더니 들어가 버린다. 병사가 놀라며 웃는다. 상사는 원래 “맹인들은 길 찾는 방법을 금방 배우는 법이야.”라며 자신 있게 설명한다. (영화에서 그녀는 병사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린다. 악랄함에 대한 경고이다.)

  “우리는 결국 공포 때문에 미쳐버릴 거야.”라고 의사는 생각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눈먼 깡패’들이 식량조달을 독점하면서 각 병실의 여인들을 ‘바치지’ 않으면 식량을 주지 않겠다는 엄포를 내린다. 엄포는 총성 한 방이면 충분했다. 남자들 중에는 “뭐하느냐? 희생하면 되지 않느냐?”는 이도 있고, “나의 아내는 보낼 수 없다.”는 이도 있었으며, 여자들 중에는 “나는 갈 수 없다.”는 이, 그리고 “내가 가서 식량을 가져오겠다.”는 이도 있었다. 여기서 사라마구는 남성의 추악함 앞에서 여성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보여준다. 병동에서 일어난 일 중 가장 구역질나는 이 ‘사건’이 병동의 역한 공기를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그러나 ‘눈먼 깡패’들이 한 여인을 죽이자, 의사의 아내는 ‘반란’을 도모한다. 모든 죄악들이 불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의사의 아내가 도와준 이들은 무사히 병동을 빠져나온다. 그런데 바깥을 지키고 있어야 할 군인들은 없고, 철문이 소리를 내며 열린다. 

  그들은 이제 해방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낳은 상황에서 탈출해 그들은 “보이지 않는 중”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병동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제각각 무리를 나눠 도시를 방황한다. 거처를 찾은 이들도, 거리에서 죽은 이들도 있다. 의사의 아내는 자신의 집으로 몇몇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눈이 먼 뒤 처음으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식량’이 아닌 밥을 먹는다. 한 사람씩 눈을 뜨고, “한 명만 더 있으면 눈이 보이는 사람이 다수가 되는” 상황 앞에서 그들은 행복과 희망을 느낀다. 그리고 서서히 사람들이, 그녀의 집에 있던 사람들 말고도 거리 도처에 있던 사람들이 “눈이 보여, 눈이 보여!”라고 소리치는 장면 속에서 그녀가 조용히 창가로 걸어간다. “이제 내 차례구나.”라고 그녀는 체념한 듯 거리의 기쁨을 바라본다. 하지만 사라마구는 비극이 이어지길 원치 않았다. 

  다음 날,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도시는 다시 세우면 되고, 밭은 다시 일구면 된다. 그러나 마음은 어떻게 됐을까? 한 차례의 죄악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더 현명해졌을까? 사람 사이의 관계는 소원해졌을까, 아니면 더욱 돈독해졌을까? 이 세상이 통째로 들려 절망의 웅덩이에 푹 담겨져 있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절망의 빛깔을 얼마나 많이 씻어낼 수 있을까? 자신만 볼 수 있다는 잔혹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본 의사의 아내는, 아니 독자들은 인간에 대해서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인간은 수많은 거장들의 손을 거쳐 도덕의 심판대에 오르곤 했다. 하지만 사라마구의 설정은 끔찍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전쟁보다 더 극한으로 인간을 집어넣는다. 그곳에서 바라본 “원래의 자리”는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는, 백척간두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라마구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녀는 눈이 멀지 않는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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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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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11.11.25
 


  옛날 옛적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었다. 사실 그가 한 말은 맞는데, 그가 만든 말은 아니고, 다만 델포이 신전의 문간 위에 새겨져 있던 것을 인용한 것으로 판명됐다. 출처야 어쨌든 서양에서는 훗날 데카르트가 소크라테스의 조언을 들어 ‘나 자신’을 아는 방법으로 ‘의심’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알다시피 이 지점에서부터 서양의 근대화가 시작된다. 정감이 정복되고, 합리가 머리를 들어 신이 의심 당하고, 과학이 유럽 대륙을 통째로 움직이게 할 초특급 엔진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왜 이 무렵에서부터 동서양의 기술과 제도적 격차가 발생했는지에 대한 답은 사실 여러 정황을 판단해야 하므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결과가 그러했다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독서와 교육을 통해 학습한 내용이다. 

  진중권氏는 서양의 근대화 사례와 비교해 우리나라의 폐단들을 소상히 드러낸다.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소위 “비교하면 다 나와.”라는 따끔한 일침의 모음이고, 한국의 미래를 예단하는 계발서이다. 그가 설명의 근거로 삼는 수많은 학문들은 이 얇은 책을 충분히 지지해준다. 잘못된 점들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노출시키는 진중권氏 특유의 ‘공격력’ 강한 문장들 역시 독서의 속도를 배가시켜준다. 마력이 강한 책이다.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육체를 길들이는 ‘규율’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진중권氏의 지론이며, 이는 박노자氏의 책에서도, 강준만氏의 책에서도, 아니 한국의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대다수의 학자들의 책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규율은 강제력이 강하다. 때문에 우리의 신체가 어떤 규율에 의해 고정되면 그 이후의 삶은 규율 속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생존의 미학’으로 점철된다. 국가의 입장에서 국민들을 ‘규율화’시키면 세 가지 이득을 얻는다. 정치, 국방, 그리고 경제이다. 오늘날에도 1주일에 40시간 이상을 일하는 우리나라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노동예찬’이라는 기이한 현상이 간혹 일어나는데, 병폐의 잔재라 할 수 있다. 

  신체가 기계로 변신했으니, 근대적인 노동계약이 아닌 “노예해방 이전의 상태” 속으로 빨려 들어간 노동자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혹사당한다. 오늘 아침 <한겨례>의 오피니언에 박노자氏의 칼럼이 있어 반갑게 읽었는데, 그가 공격하고자 하는 사회의 폐단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노동운동이었던 ‘희망버스’ 사건 이후에 송경동 시인이 구속된 현 체제의 무법(無法)을 놓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인가? 담론적 대결에서 희망버스를 이길 수 없으니 지배자들은 ‘구속’이라는 노골적 폭력에 호소하고 말았다.”고 일갈한 칼럼이었다. 이제 막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치며, 오류투성이인 자본주의 사회 앞에서 간절한 호소를 내뱉는 단계까지 왔는데, 지배자들은 아주 간단하게 구속을 전략으로 내놓을 수 있는 사회이다. 지금이라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대놓고 규율을 운운하는 영역은 많이 줄었어도 조금 더 세련된 형태의 규율은 여전히 남아 있다. ‘기업 면접형 인간’이야말로 올바르고 성공한 인간이라는 편견이 지배적인 사회이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진중권氏의 공격은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 한국사회의 문제였는데, 어제와 오늘, 이런 문제에 경종을 울리는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작가 공지영氏가 강자에게 약한 우리 사회에 대한 자신의 분노와 의지를 트위터에 표출해 화제가 되었다. 공지영氏는 자신의 트위터에 “아버지에게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문자가 왔다. 걱정 되시나보다. 내가 힘 있는 자들에 맞서고 있으니. 노무현 대통령 연설 떠오른다. 언제까지 우리는 ”옳은 일 하다간 너만 다친다“는 말을 물려주고 살 건가? 울 딸, 울 아들, 엄마가 있다. 쫄지 마!”라는 글을 올렸다. 진중권氏는 “거대한 것은 우리에게 분노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래서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리라.) SNS의 세례를 받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무엇인가 각성할 수 있는 전환점이 사회에게 주어진다면 그것을 잡고 사회 전체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힘을 알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최근 들어 행동적 실천의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고, 여야 정치구도에 대한 회의로 말미암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박원순氏의 서울시장당선, 안철수氏의 제 3당 참여여부를 놓고 벌어진 찬반논란 등)과 ‘마이너스 협상’이라고 알려진 한-미 FTA와 관련된 시민들의 시위가 이를 입증한다. 이제 우리의 시대는 바야흐로 “거대한 것에도 분노할 줄 아는” 용기를 서서히 인식해가는 듯하다. 

  이어서 진중권氏는 단기속성으로 서구를 따라잡으려다 생긴 온갖 병폐들에 대해서 설명한다. 근대화 과정이 짧아서 생긴 ‘정념의 제국’인 우리나라는 서양이 보기에는 대단히 기괴할 정도의, 소위 ‘오바(over)’를 많이 하는데 그런 일상은 한 통신회사의 광고처럼 “성질 급한 한국사람”을 양산해왔다. 황우석 사건을 예로 든 그는 우리나라가 소수의 합리적 사고를 가진 이들을 다수의 감정적 동향을 가진 이들이 억누르는 이상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일갈하면서 감정을 형성하는 미디어의 ‘왜곡’에 대해서도 한 소리를 한다. 미디어의 이미지는 허상일 뿐이고, 상상력은 음모론을 만들어낸다. 음모론에 기초한 추측성 기사가 기정사실화된다. 이 때문에 루머가 현실이 되는 철로에 사람들이 너도 나도 몰리는 것이다. 이런 ‘쏠림 현상’이 진실을 보조할 수 있다면 어떤 사회적 혁명도 가능할 텐데, 아쉬울 뿐이다. 

  한국의 ‘평등’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진단하는 그의 글도 인상 깊다. 우리나라에서 평등은 신분제 폐지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전 인민 평등화”라는 과정을 통해 달성되었는데, 이는 부자가 ‘못 가진 자’와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명품을 사도 서민들은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명품을 사는 어리석은 사회를 낳았다. 요즘 서민들은 아울렛에 관심이 많다. 일산에도 몇 군데 있긴 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약 명품 할인행사가 한다고 하면 소위 “짝퉁 아니야?”라는 의심을 하면서도 한 번 쯤 사보고 싶은 것이 서민들의 인지상정, 그리고 일상다반사가 아니겠는가. 상황이 이러하니, 여전히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수직’이고, 예절 역시 수직의 예절이 발달해 있는 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동등한 수평 예절은 어색한 도덕이 되어버렸다. 

  사실 에티켓이라는 것은 서구에서 들어온 것으로 우리나라 사정에 알맞게 조정되지 않는다면 “한국인은 참 에티켓 없다.”는 열등감에 빠지기 십상이고, 진중권氏도 그것을 간파했다. 에티켓이란 “불쾌를 불쾌로 느끼는 미적 취미”이다. 이는 다시 말해 에티켓은 문화와 장소, 그리고 집단 간에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불쾌로 여기는 것을 서구에서는 아무 상관도 하지 않는 사례는 캐보면 상당히 많을 것이다. 진중권氏의 독일 유학 경험이 그 사례들을 대체할 수 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호주에서 잠시 머무를 때에 ‘서구인’과 ‘동양인’의 차이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동양인들은 서구인들의 에티켓을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래도 백호주의에 대한 반감을 동양인들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열등감으로 바라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여타 다른 문제들과 우리나라의 현상들이 재미있게(‘어른이’라는 단어에서 웃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설명되어 있지만 자세히 따지자면 워낙 분량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저자가 얼마나 많은 고찰과 준비를 하고 낸 책인지 알 수 있다. 인정에 기초한 ‘초근접거리’문화의 쇠퇴를 아쉬워하는 따뜻한 마음씨까지 들어 있으니, 마냥 소문난 독설가라고만 그를 평가할 순 없을 것이다. 그가 미래사회의 여러 모습을 진단하기 전, 마지막 일갈을 적어 놓은 부분이 특별히 인상적이어서 옮겨보는데, 이는 이 시대의 모두가 알고 있는 문제이고, 극복해야 하는 폐단이 아닐까 싶다. 크게 두 가지 문제이다. 하나는 ‘수치심의 윤리’이고, 다른 하나는 ‘공포의 보수성’이다. 

  서양과는 달리 우리나라에는 신(神)을 전통적인 도(道)가 대신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과는 다른 윤리관을 우리에게 심어줬다. 하지만 일본의 수치심, 일본인들이 심지어는 ‘자학(自虐)’이라고까지 부르는 윤리관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뭐든지 빨리빨리 서구를 따라잡으려고 정신적 공백을 남겨뒀던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반성의 주체가 되었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이전 세대들의 미흡한 태도 때문에 전근대적 사회의 특성을 고스란히 답습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우리도 일본인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수치심은 “남 보기에”라는 어구로 압축된다. 모든 행동과 양심이 타인의 시선으로 말미암아 옭아매어지는 것이다. 윤리가 수치심으로부터 도출되면 사회의 안정은 유지되겠으나, 진정한 자기반성은 줄어들고, 타인의 시선이 누군가를 죽이는 심리학적 현상들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공포의 보수성’은 이렇게 정리된다. 무언가를 대할 때, 우리는 ‘무서움’과 ‘즐거움’이라는 감정을 갖게 된다. 무서움은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는다. 반면, 즐거움은 놀이로써 대하기 때문에 구성원들을 개별화시킨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미래상이 도출된다. 공포는 획일성을 지향하며, 놀이는 혁신과 창안을 낳는다. 획일성은 우리를 보수적으로 만드는데, 그 이유는 사교육 문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왜 아이를 비싼 돈 들여가며 과외시키세요? 형편도 좋지 않으실텐데?”라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남들도 다 시키니까요. 안 시키면 불안해요.”라고 답한다. “남들도”라는 말에서 우리는 일련의 ‘편승’ 심리를 느끼게 된다. 남들이 다 하는 걸 안 하면 불안하니까 그 공포 때문에 ‘편승의 광기’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남들이 안 하는 걸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고, 실제 안철수氏의 지적처럼 혁신적 시도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없으니 우리나라에서 “놀자!”는 말은 철없는 소리로 들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잘 노는 사람들”이라 일컬으니, 그것이야말로 ‘철없는 소리’가 아닐까? 

  책장을 넘기다보면 <개벽이>라는 사진을 보게 될 것인데, 나는 거의 죽도록 웃었다. 미래사회를 진단한 부분은 현대인의 특징을 여러 기술과 예술문화의 현상에서 뽑아낸 부분이라 앞의 여러 장보다는 읽기 훨씬 편하고, 재미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여전히 비판은 유효하다. 낸시랭 부분이 그러하다. 이전에도 낸시랭에 대해 이 공간에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상당히 성공한 아티스트이다. 그녀가 실제 그런 사람(소위 된장녀)인지, 아니면 전략적인 퍼포먼스인지 그녀가 설명해주지 않는 이상 우리는 제대로 판단할 수 없고, 그녀는 우리의 ‘무지’를 이용해 판단과 감각을 거의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나는 낸시랭을 보고 있으면 “내가 판단의 주체가 맞는가? 아니면 판단은 외부에서 삽입되는가?”라는 회의에 빠지곤 한다. 예술은 워홀의 전략에 따라 자연스럽게 상품이 되었다. 하지만 낸시랭의 전략은 우리의 판단을 자연스럽게 객체화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예술의 문외한이니, 사회적 보수이니 하는 말만 되풀이하는 칼럼과 코멘트들만 보게 된다. 안타깝다. 

  진중권氏의 일갈이 종료되고, 마치는 글에서 그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디자인’할 것을 권장한다. 우리의 미래상은 이러하다. 유희, 유목, 예술가, 그리고 기획. 유희는 경직된 사회 소통의 물꼬를 터 엘리트 사회를 전복시킬 힘이 있는 유쾌한 반전이 될 수 있다. 유목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술가의 삶을 동경하는데, 이는 왜곡되어 심각한 교육적 붐으로 번지지 않는 이상 매우 바람직한 ‘바람’이다. 그리고 ‘신민’으로 번역되는 Subject에서 ‘Project’, 즉 자신을 기획하는 단계에 이르자는 진중권氏의 주장은 이 나라의 현대인들이 “제대로 근대화되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탈출할 수 있는 지침서가 된다. 우리나라를 한 번 뒤집어 놓고 생각하면 “위는 아래가 되고, 아래는 위가 되는”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과 같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날 것인데, 그곳에 우리의 미래가 있을 것이다. 온갖 폐단 속에서도 꿈꿀 수 있는 자만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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