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2011.11.25
 


  옛날 옛적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었다. 사실 그가 한 말은 맞는데, 그가 만든 말은 아니고, 다만 델포이 신전의 문간 위에 새겨져 있던 것을 인용한 것으로 판명됐다. 출처야 어쨌든 서양에서는 훗날 데카르트가 소크라테스의 조언을 들어 ‘나 자신’을 아는 방법으로 ‘의심’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알다시피 이 지점에서부터 서양의 근대화가 시작된다. 정감이 정복되고, 합리가 머리를 들어 신이 의심 당하고, 과학이 유럽 대륙을 통째로 움직이게 할 초특급 엔진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왜 이 무렵에서부터 동서양의 기술과 제도적 격차가 발생했는지에 대한 답은 사실 여러 정황을 판단해야 하므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결과가 그러했다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독서와 교육을 통해 학습한 내용이다. 

  진중권氏는 서양의 근대화 사례와 비교해 우리나라의 폐단들을 소상히 드러낸다. <호모 코레아니쿠스>는 소위 “비교하면 다 나와.”라는 따끔한 일침의 모음이고, 한국의 미래를 예단하는 계발서이다. 그가 설명의 근거로 삼는 수많은 학문들은 이 얇은 책을 충분히 지지해준다. 잘못된 점들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노출시키는 진중권氏 특유의 ‘공격력’ 강한 문장들 역시 독서의 속도를 배가시켜준다. 마력이 강한 책이다.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육체를 길들이는 ‘규율’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진중권氏의 지론이며, 이는 박노자氏의 책에서도, 강준만氏의 책에서도, 아니 한국의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대다수의 학자들의 책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규율은 강제력이 강하다. 때문에 우리의 신체가 어떤 규율에 의해 고정되면 그 이후의 삶은 규율 속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생존의 미학’으로 점철된다. 국가의 입장에서 국민들을 ‘규율화’시키면 세 가지 이득을 얻는다. 정치, 국방, 그리고 경제이다. 오늘날에도 1주일에 40시간 이상을 일하는 우리나라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노동예찬’이라는 기이한 현상이 간혹 일어나는데, 병폐의 잔재라 할 수 있다. 

  신체가 기계로 변신했으니, 근대적인 노동계약이 아닌 “노예해방 이전의 상태” 속으로 빨려 들어간 노동자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혹사당한다. 오늘 아침 <한겨례>의 오피니언에 박노자氏의 칼럼이 있어 반갑게 읽었는데, 그가 공격하고자 하는 사회의 폐단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노동운동이었던 ‘희망버스’ 사건 이후에 송경동 시인이 구속된 현 체제의 무법(無法)을 놓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인가? 담론적 대결에서 희망버스를 이길 수 없으니 지배자들은 ‘구속’이라는 노골적 폭력에 호소하고 말았다.”고 일갈한 칼럼이었다. 이제 막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치며, 오류투성이인 자본주의 사회 앞에서 간절한 호소를 내뱉는 단계까지 왔는데, 지배자들은 아주 간단하게 구속을 전략으로 내놓을 수 있는 사회이다. 지금이라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대놓고 규율을 운운하는 영역은 많이 줄었어도 조금 더 세련된 형태의 규율은 여전히 남아 있다. ‘기업 면접형 인간’이야말로 올바르고 성공한 인간이라는 편견이 지배적인 사회이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진중권氏의 공격은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 한국사회의 문제였는데, 어제와 오늘, 이런 문제에 경종을 울리는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작가 공지영氏가 강자에게 약한 우리 사회에 대한 자신의 분노와 의지를 트위터에 표출해 화제가 되었다. 공지영氏는 자신의 트위터에 “아버지에게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문자가 왔다. 걱정 되시나보다. 내가 힘 있는 자들에 맞서고 있으니. 노무현 대통령 연설 떠오른다. 언제까지 우리는 ”옳은 일 하다간 너만 다친다“는 말을 물려주고 살 건가? 울 딸, 울 아들, 엄마가 있다. 쫄지 마!”라는 글을 올렸다. 진중권氏는 “거대한 것은 우리에게 분노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래서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리라.) SNS의 세례를 받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무엇인가 각성할 수 있는 전환점이 사회에게 주어진다면 그것을 잡고 사회 전체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힘을 알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최근 들어 행동적 실천의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고, 여야 정치구도에 대한 회의로 말미암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박원순氏의 서울시장당선, 안철수氏의 제 3당 참여여부를 놓고 벌어진 찬반논란 등)과 ‘마이너스 협상’이라고 알려진 한-미 FTA와 관련된 시민들의 시위가 이를 입증한다. 이제 우리의 시대는 바야흐로 “거대한 것에도 분노할 줄 아는” 용기를 서서히 인식해가는 듯하다. 

  이어서 진중권氏는 단기속성으로 서구를 따라잡으려다 생긴 온갖 병폐들에 대해서 설명한다. 근대화 과정이 짧아서 생긴 ‘정념의 제국’인 우리나라는 서양이 보기에는 대단히 기괴할 정도의, 소위 ‘오바(over)’를 많이 하는데 그런 일상은 한 통신회사의 광고처럼 “성질 급한 한국사람”을 양산해왔다. 황우석 사건을 예로 든 그는 우리나라가 소수의 합리적 사고를 가진 이들을 다수의 감정적 동향을 가진 이들이 억누르는 이상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일갈하면서 감정을 형성하는 미디어의 ‘왜곡’에 대해서도 한 소리를 한다. 미디어의 이미지는 허상일 뿐이고, 상상력은 음모론을 만들어낸다. 음모론에 기초한 추측성 기사가 기정사실화된다. 이 때문에 루머가 현실이 되는 철로에 사람들이 너도 나도 몰리는 것이다. 이런 ‘쏠림 현상’이 진실을 보조할 수 있다면 어떤 사회적 혁명도 가능할 텐데, 아쉬울 뿐이다. 

  한국의 ‘평등’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진단하는 그의 글도 인상 깊다. 우리나라에서 평등은 신분제 폐지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전 인민 평등화”라는 과정을 통해 달성되었는데, 이는 부자가 ‘못 가진 자’와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명품을 사도 서민들은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명품을 사는 어리석은 사회를 낳았다. 요즘 서민들은 아울렛에 관심이 많다. 일산에도 몇 군데 있긴 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약 명품 할인행사가 한다고 하면 소위 “짝퉁 아니야?”라는 의심을 하면서도 한 번 쯤 사보고 싶은 것이 서민들의 인지상정, 그리고 일상다반사가 아니겠는가. 상황이 이러하니, 여전히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수직’이고, 예절 역시 수직의 예절이 발달해 있는 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동등한 수평 예절은 어색한 도덕이 되어버렸다. 

  사실 에티켓이라는 것은 서구에서 들어온 것으로 우리나라 사정에 알맞게 조정되지 않는다면 “한국인은 참 에티켓 없다.”는 열등감에 빠지기 십상이고, 진중권氏도 그것을 간파했다. 에티켓이란 “불쾌를 불쾌로 느끼는 미적 취미”이다. 이는 다시 말해 에티켓은 문화와 장소, 그리고 집단 간에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불쾌로 여기는 것을 서구에서는 아무 상관도 하지 않는 사례는 캐보면 상당히 많을 것이다. 진중권氏의 독일 유학 경험이 그 사례들을 대체할 수 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호주에서 잠시 머무를 때에 ‘서구인’과 ‘동양인’의 차이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동양인들은 서구인들의 에티켓을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래도 백호주의에 대한 반감을 동양인들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열등감으로 바라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여타 다른 문제들과 우리나라의 현상들이 재미있게(‘어른이’라는 단어에서 웃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설명되어 있지만 자세히 따지자면 워낙 분량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저자가 얼마나 많은 고찰과 준비를 하고 낸 책인지 알 수 있다. 인정에 기초한 ‘초근접거리’문화의 쇠퇴를 아쉬워하는 따뜻한 마음씨까지 들어 있으니, 마냥 소문난 독설가라고만 그를 평가할 순 없을 것이다. 그가 미래사회의 여러 모습을 진단하기 전, 마지막 일갈을 적어 놓은 부분이 특별히 인상적이어서 옮겨보는데, 이는 이 시대의 모두가 알고 있는 문제이고, 극복해야 하는 폐단이 아닐까 싶다. 크게 두 가지 문제이다. 하나는 ‘수치심의 윤리’이고, 다른 하나는 ‘공포의 보수성’이다. 

  서양과는 달리 우리나라에는 신(神)을 전통적인 도(道)가 대신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과는 다른 윤리관을 우리에게 심어줬다. 하지만 일본의 수치심, 일본인들이 심지어는 ‘자학(自虐)’이라고까지 부르는 윤리관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뭐든지 빨리빨리 서구를 따라잡으려고 정신적 공백을 남겨뒀던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반성의 주체가 되었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이전 세대들의 미흡한 태도 때문에 전근대적 사회의 특성을 고스란히 답습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우리도 일본인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수치심은 “남 보기에”라는 어구로 압축된다. 모든 행동과 양심이 타인의 시선으로 말미암아 옭아매어지는 것이다. 윤리가 수치심으로부터 도출되면 사회의 안정은 유지되겠으나, 진정한 자기반성은 줄어들고, 타인의 시선이 누군가를 죽이는 심리학적 현상들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공포의 보수성’은 이렇게 정리된다. 무언가를 대할 때, 우리는 ‘무서움’과 ‘즐거움’이라는 감정을 갖게 된다. 무서움은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는다. 반면, 즐거움은 놀이로써 대하기 때문에 구성원들을 개별화시킨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미래상이 도출된다. 공포는 획일성을 지향하며, 놀이는 혁신과 창안을 낳는다. 획일성은 우리를 보수적으로 만드는데, 그 이유는 사교육 문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왜 아이를 비싼 돈 들여가며 과외시키세요? 형편도 좋지 않으실텐데?”라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남들도 다 시키니까요. 안 시키면 불안해요.”라고 답한다. “남들도”라는 말에서 우리는 일련의 ‘편승’ 심리를 느끼게 된다. 남들이 다 하는 걸 안 하면 불안하니까 그 공포 때문에 ‘편승의 광기’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남들이 안 하는 걸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고, 실제 안철수氏의 지적처럼 혁신적 시도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없으니 우리나라에서 “놀자!”는 말은 철없는 소리로 들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잘 노는 사람들”이라 일컬으니, 그것이야말로 ‘철없는 소리’가 아닐까? 

  책장을 넘기다보면 <개벽이>라는 사진을 보게 될 것인데, 나는 거의 죽도록 웃었다. 미래사회를 진단한 부분은 현대인의 특징을 여러 기술과 예술문화의 현상에서 뽑아낸 부분이라 앞의 여러 장보다는 읽기 훨씬 편하고, 재미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여전히 비판은 유효하다. 낸시랭 부분이 그러하다. 이전에도 낸시랭에 대해 이 공간에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상당히 성공한 아티스트이다. 그녀가 실제 그런 사람(소위 된장녀)인지, 아니면 전략적인 퍼포먼스인지 그녀가 설명해주지 않는 이상 우리는 제대로 판단할 수 없고, 그녀는 우리의 ‘무지’를 이용해 판단과 감각을 거의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나는 낸시랭을 보고 있으면 “내가 판단의 주체가 맞는가? 아니면 판단은 외부에서 삽입되는가?”라는 회의에 빠지곤 한다. 예술은 워홀의 전략에 따라 자연스럽게 상품이 되었다. 하지만 낸시랭의 전략은 우리의 판단을 자연스럽게 객체화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예술의 문외한이니, 사회적 보수이니 하는 말만 되풀이하는 칼럼과 코멘트들만 보게 된다. 안타깝다. 

  진중권氏의 일갈이 종료되고, 마치는 글에서 그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디자인’할 것을 권장한다. 우리의 미래상은 이러하다. 유희, 유목, 예술가, 그리고 기획. 유희는 경직된 사회 소통의 물꼬를 터 엘리트 사회를 전복시킬 힘이 있는 유쾌한 반전이 될 수 있다. 유목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술가의 삶을 동경하는데, 이는 왜곡되어 심각한 교육적 붐으로 번지지 않는 이상 매우 바람직한 ‘바람’이다. 그리고 ‘신민’으로 번역되는 Subject에서 ‘Project’, 즉 자신을 기획하는 단계에 이르자는 진중권氏의 주장은 이 나라의 현대인들이 “제대로 근대화되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탈출할 수 있는 지침서가 된다. 우리나라를 한 번 뒤집어 놓고 생각하면 “위는 아래가 되고, 아래는 위가 되는”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과 같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날 것인데, 그곳에 우리의 미래가 있을 것이다. 온갖 폐단 속에서도 꿈꿀 수 있는 자만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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