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22  

  어쩌다보니, 11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겨울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달력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매몰차다. 원래 시간은 인정머리가 없다지만 생각할수록 정말 야속하기 그지없다. 가끔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한다. 텃밭에 파종도 안 했는데, “수확하고 나면 겨울에는 뭘 하지?”라는 투로 걱정하는 우를 범하고 나면 씁쓸하면서도 참 스스로 어리석다며 다그친다. 뭐가 그리도 급한 것일까. 그래도 다행이다. 시간은 가도 격려는 남는다. “내가 뭐 시간 때문에 사나?” 격려가 나를 살게 하는 것임을 재차 상기해본다. 마음의 끈이 빙빙 돌다 다시 말뚝으로 돌아가 자신이 묶여 있는 곳 언저리에서 털썩 주저앉는다. 그래, 거기가 바로 네 자리다.

  이런저런 일도 있고 해서 동네 잔디구장 트랙을 돌고 왔다. 나름 단단히 무장하고 나갔는데, 의외로 추웠다. 뛰는 사람도 별로 없더라니, 휑한 트랙 탓에 더 추워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땐 그냥 계속 뛰는 것이 상책이다. 무리를 했는지, 씻고 나오니 다리에 누가 바윗덩어리를 얹은 듯 무겁다. 메일 확인하고, <나는 가수다> 재방송을 어머니와 함께 보며 “그래, 김경호가 대세야!”라고 무릎 좀 치다가 책상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봤다.

  책상 위, 바닥,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이 위용을 뽐낸다. 그까짓 것 사람이 쓴 것인데, 라는 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했는지 몰랐던 시절에 손댔다가 화상을 입은 책들도 있다. 곁에 두고픈 책들도 있다. 읽다가 운 책도 있고, 자지러진 책도 있다. 독서라는 행동은 참 묘하다. 인식의 메커니즘이야 오래 전에 이미 철학적으로든 과학적으로든 심리학적으로든 소상히 밝혀진 바이지만 가만히 표지를 쳐다보고 있으면, 독서 좋아하는 이들은 다 동의할 것인데, 웃음이 나온다. 오늘 나의 웃음을 받을 새 책 4권이 도착했다.  얼굴 반반한 책들이 후줄근한 책들 사이에서 광을 낸다.

 

       

 

 

 

 

 

 

   내가 최근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는 책을 사놓고 나면 뒤늦게 알게 된다. 기대가 크다. 따뜻하게 몸 지지고, 새 책 냄새 맡으며 기웃기웃 거리고 있으면 입이 “헤~”하고 벌어진다. 내가 읽고파 산 책인데도 느껴지는 막연한 부담감과 “대체 어떤 내용을 만날까?”라는 호기심이 교차하면서 몇 문장 읽다보면 다시 그 교차된 감정이 나의 독서를 압도적으로 방해한다. 성가신 큐피드이다. 누가 내 등짝에다가 화살을 마구 박아 놨다. 책을 덮었다. 책 제목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본다. 꾸깃꾸깃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어주리라, 벼른다. 겸손한 지혜에 다다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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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3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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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2  

 

  나에게 있어 양서(良書)란 무엇일까? 많은 책을 읽은 것도, 문장에 능통한 것도, 혹은 저자를 비판할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조심스레 생각해보건대 나는 어떤 책이 ‘양서’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직감을 지닌 듯하다. 하지만 이는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책 읽는 이들 중 대부분이 이런 능력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양서의 기준은 서로 다르다. 물론 몇 가지 대원칙은 있다. 건강하며, 균형 잡혀 있고, 사실에 충실하며, 또한 문장을 잘 다룬 책이어야 한다. 단순한 지식을 얻는 책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책이어야 한다. 인간에게 중요한 미덕을 상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양서의 기능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나는 홍세화氏가 그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 프랑스의 토론문화에 빗대어 비꼰 양비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일단 저울의 두 손에 동등한 무게의 의견을 올려 독자가 비교하게끔 하는 것이다. 어느 쪽에 자신의 타당한 의견을 보태어 저울이 기울어지게 할 것인지는 순전히 자기 훈련을 거친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양비론이라고 해서 모두 건강한 글은 아니다. 홍세화氏가 비판한 ‘양비론’도 사실 알고 보면 그런 ‘악취 나는 글’이다. 독자가 (회의론을 가져) 저울의 한 쪽을 선택하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한 쪽에 의견을 싣는데 그것이 감정에 치우친 오만, 오해, 혹은 기만에 기초한 것이라면 저자는 실패한 것이 되고, 그 자신은 나쁜 저자가 된다. 여러 의견들을 비교해 균형 잡힌 상태를 유지해야만 하는 수준의 지성들은 건강한 양비론을 먼저 접하는 것이 좋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원제를 풀이해보면 “신앙은 망상이다.” 정도가 된다.)>은 종교와 과학의 양쪽 입장을 모두 이해한 사람에게만 양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종교를 무조건 멀리하고, 자신의 자유사상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과학지상주의자들이 많이 양산되는 요즘 대중들은 ‘도발적인 의견’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도킨스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주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물론 도킨스 자신은 무엇보다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읽어 자신의 뜻을 헤아려주길 바랐을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명백한 사실에 근거한 ‘종교를 바라보는 눈’이지만 세이건의 주장처럼 종교의 순기능을 대체할 개념은 인류가 여태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종교 고유의 기능 역시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과학지상주의자들은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과학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미덕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터무니없는 기대를 한다. 과학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려는 이들은 그들이 “종교인들은 타종교인들과 대립한다.”고 비난하는 종교의 태도를 바로 자신들이 취하고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대체적으로 맹목적 비난은 상대방을 거의 모를 때에 일어난다. 그리고 사실 도킨스도 과학의 모든 것을 대변하진 못한다. 일부 종교가 과학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것처럼 일부 과학 역시 종교를 업신여기지 않는다. 

  이 책을 접하기 전, 나는 BBC 다큐멘터리로 도킨스의 의견을 미리 들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책장에 꽂혀 있던 <만들어진 신>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때는 대학교에서 여름 계절학기를 들은 후였다. 그 학기동안 종교와 평화, 그리고 전쟁과 관련된 유익한 강의를 들었기 때문이다. 교수는 개신교도이지만 뮌헨에서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등 세계의 주요 종교들에 대해 심도 있게 공부한 뒤 종교학자가 된 분이었다. 그는 나에게 종교와 관련된 단 하나의 진실을 말해줬다. 그것은 칸트의 절대선과 연결되어 있다. 교수의 주장은 원래 종교들은 모두 궁극의 도덕들과 관련이 있는데, 그것이 ‘인간’이라는 매개를 거쳐 왜곡되면서 온갖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종교의 폐쇄성을 낳았고, 대체적으로 종교인들은 타종교에 대해 무지하면서도 “우리가 믿는 것을 그들은 믿지 않는다.”는 맹목적 논리와 수많은 정치, 외교, 역사적 변수들이 융합된 편견을 갖고 있다고 했다. 

  교수는 가령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이 서로를 비난하는 맹렬한 역사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고 했다. 이는 가장 흔하고, 뚜렷한 흔적일 것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낮은 수준의 공방이 오고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를 근거로 <꾸란>이 폭력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 중 <꾸란>을 소위 ‘각 잡고’ 읽어본 이는 거의 없다. “알라는 유일한 신이다.”라는 구절을 그들이 읽는 순간 얼마나 큰 종교적 모욕감을 느낄지는 뻔하다. 여러 가지 종류의 지하드(Jihad)가 존재하는 이슬람 사회에서 유독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마치 극우주의자들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남을 죽이지 말라. 하지만 그가 너를 죽이려고 한다면 죽여라.”라는 <꾸란>의 대목을 인용해 “미국이 우리를 죽이려고 했다.”라고 비난하며, 미국과 기독교, 그리고 서구 전체를 동일시하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은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오늘날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니 오해는 대부분 남아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교수는 나에게 모든 종교적 충돌의 역사는 ‘무지(無知)’로 쓰였다고 가르쳤다. 하물며 종교인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종교 경전들이 뜻하는 바를 자기 식대로 판단하기에 바쁘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아주 단순하고도 고귀한 예수의 가르침은 오늘날 ‘이웃’을 고르는데 열중인 종교인들로 변질되었다. 간디나 마더 데레사,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처럼 예수의 뜻을 제대로 판단하여 직접 행동에 옮긴 사람은 드물다. 예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예수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잘못한 것일 뿐이다. 

  나는 집안의 내력에 따라 가톨릭 신자이지만 내가 알게 되어 많은 깨달음을 얻은 종교는 불교이며, 나를 굽혀 신을 믿기보다는 과학과 철학이 지닌 겸손한 진리추구의 자세로 모든 것들을 단 하나의 끊어짐이나 비약 없이 연결해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강요된 ‘진리’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번복과 수정이 가능하다. 거의 매번 바뀌는 믿음의 요동 앞에서도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정서적 위안을 얻기도 한다. 자기 판단은 끊임없는 계발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단 하나의 진리가 있어 그것이 신이 우리에게 내려주는 것이 아닐 확률이 높다. 물론 세이건이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한 말처럼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신은 대단히 편향적인, 상대적인, 그리고 비전문적인 존재가 된다. 특히 유일신이 그러하다. 나는 선민사상을 매우 저급한 태도라 본다. 그것은 사상적 우생학과 진배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의 존재를 부인할 근거 역시 내겐 없다. 진화론을 배웠고, (아직 초보단계이지만) 우주를 좋아하는 나에게도 도킨스의 말마따나 설계논증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신이 없다면 어떻게 완벽에 가까운 생명체들이 생겨났겠느냐는 이론 말이다. <Book of Life>, 소위 ‘생명의 서(書)’라 불리는 아미노산 조합방식(유전정보) 중에서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단 20개의 아미노산 조합방식만을 사용했다. 그런데도 엄청나게 많은 형태의 생명체들이 다양한 지구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만약 나머지 44개를 다 사용했다면 어떠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궁금해 하게 된다. 그것이 너무나도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계를 설계한 지적 존재의 초월적 ‘현존’을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근래의 가설임에도 ‘낡은 가설’의 새로운 도전을 쉽사리 이겨내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데, 그 ‘낡은 가설’이란 최근 들어 재조명된 바 있는 다윈의 진화론이다. (2009년은 <종의 기원>이 150주년을 맞이한 해였다.) 다윈의 ‘자연선택’은 설계논증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근거로써 밝혀졌기 때문이다. 또한 도킨스가 인용한 철학자 대니얼 데닛의 말처럼 “크고 엄청나고 명석한 것이 그보다 못한 것을 만든다.”는 오랜 관념들은 “신이 왜 그랬을까?”를 우리에게 설명하지 못해왔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다윈의 편을 끝까지 들어준다. 

  여기에 온건한 칼 세이건도 한 몫을 보탠다. 그는 과학은 “이해하려는 태도”라고 하면서 사실 복잡한 것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메커니즘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도킨스도 같은 말을 한다. “무엇인가가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하다고 그냥 선언하지는 말라. 세세한 사항들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거나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양자적 입장을 또한 밝힌다. 과학의 입장에서 교조적으로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왜일까? 과학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고, 혹시 또 모를 ‘환원 불가능체’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확정적 진리에 복종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건강한 태도이다. 반면 창조론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이 과학에 해박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만약 진정 그렇다면 여전히 “나는 모른다.”라며 무지로써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야 하는데)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내 그것을 ‘신의 설계’가 존재하는 증거로 만들어버린다. 

  종교인들 중 일부는 매우 개방적이며, 여러 가능성의 뜻과 다양성의 공존을 이해하기 때문에 내가 종교에 대해 마땅히 거부감을 느낄 경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창조적 사고와 면밀한 관찰을 지향하는 나에게 창조론자들의 태도는 매우 봉건적 사고, 혹은 전근대적 사고로도 충분히 비춰진다. 그렇다고 해서 창조론자들의 논리가 진화론자들의 근거 앞에서 몇몇 무너진 사례들을 보고 즐거워하진 않는다. 이런 점에서 양비론은 특히 지속적으로 비교하고 순기능을 추려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창조론자들은 ‘신’에 집착하지만 그들의 종교에는 순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려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집착은 지금껏 인류가 저지른 (잠시 푸코를 빌리자면) ‘광기의 역사’를 다시금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맹신주의도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과학은 종교나 철학과는 달리 명백한 근거로써만 가설을 세우고, 사유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연은 인간에게 어떻게 살라고 가르치는 법”이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과 공존하되, 지나치게 자연에게 자신을 투영해서는 안 된다. 그 사유에 있어 일모의 오만이라면 범하게 된다면 공존관계는 다시 파괴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자연과 공존하자.”라는 말은 서양의 과학계보다 동양의 종교계가 수 천 년은 앞서 주장한 바이다. 

  종교인들은 읽기 거북스럽겠지만 <만들어진 신>에서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라는 챕터는 종교인들이 알아야 할 종교의 이면이 여과 없는 표현으로 실린 대목이라 이 책의 가장 논쟁거리가 되었다. 종교의 역사 중 (나는 몇몇 사람들의 주장처럼 ‘거의 모든 역사’라 부르진 않겠는데) 일부가 비도덕적 행위로 쓰였다는 것은 어린이 역사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십자군전쟁, 코소보 내전, 9.11테러, 체첸 내전. 그 중 나는 개인적으로 체첸 내전에 대해 평소보다 심도 있게 생각해볼 기회가 있어 종교전쟁의 형태들을 분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처음으로 종교 근본주의가 지닌 엄청난 파괴력을 알게 되었다. 급진적인 근본주의자들은 종교에서 ‘도덕’을 쏙 빼놓고 얼마든지 ‘근본이 아닌’ 사상으로써 사람들을 매도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듯하다. 그들은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유전적 ‘도덕문법’조차 매도한다. (흔히 우리가 도덕적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난 뒤,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를 진화론자들은 “도덕도 유전된다.”는 주장으로 설명한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이어 ‘이타적 유전자’로써 말이다.) 그리고 종교인들의 도덕과 진화론자들의 유전적 ‘도덕문법’에는 차이가 없다. 즉, 도덕은 하나이다. 근본주의자들의 오독과 극단적 행동은 그들이 종교를 들먹거리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종교는 도덕과 같다. 하지만 일부 오해된 도덕을 종교의 이름으로 강요하려는 자들이 있어서 문제이다. 만약 도덕이 종교의 이름으로 강요된다면, 쉽게 말해 “신을 믿습니까?”라는 투의 “믿으라.”라는 강요로써 주입된다면 그것은 아인슈타인의 표현대로 “오로지 처벌이 겁나서 그리고 보상을 바라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한 것이라면 우리는 정말 딱한 존재가 아닐 수 없는” 궁지에 처하게 된다. 종교가 없어도 사람은 선할 수 있다. 도덕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킨스의 논리이다. 

  종교에서 도덕을 제거한 형태의 처사들이 계속해서 등장할 수밖에 없다면 나는 차라리 종교를 버리고 도덕을 선택할 것이다. 이것이 이치에 맞는 선택이다. 하지만 나는 세이건처럼 아직 종교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다. 아직까지 내가 보기에 종교와 과학, 이 두 거인은 서로 비교되어 인간에게 최상의 도덕을 상기시키기 좋은 짝꿍이기 때문이다. 영화 <천사와 악마>에서 원작자 댄 브라운은  한 추기경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현대적 진리 하나를 알려준다. “과학과 종교는 우리에게 모두 필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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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22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안녕.
:)

종교가 없어도 도덕을 지키며 살 수 있다는 주장에는 저도 동의해요. 저 또한 그러니까. 신이 무서워 나쁜 일을 안한다거나 좋은 일을 더한다거나 이런 게 일련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드물기도 하구요. 예수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잘못한 것. 이게 대다수라고 생각해요. 타종교도 마찬가지로.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만 조금 읽었는데 이 논리대로라면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종교나 과학은 거의 아는 게 없어서 어쩐지 이론이 뒤섞이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아껴둔 건데..( '')

오늘 하루 굿 데이^-^

탕기 2011-11-22 17:09   좋아요 0 | URL
종교와 과학에 대해 생각해보려면 일단 세이건의 책을 읽고 시작하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논리적이면서도 온건한 태도로 종교를 비판하거나 옹호하거든요. 도킨스는 강한 문장을 자주 쓰기 때문에, 신심이 굳은 사람들에게는 비판이 아닌 공격처럼 비춰지기도 하죠. 아이리님도 하루 마무리 잘 하세요^^

2011-11-23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3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
V.S. 네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2011.11.21  

 

  차멀미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에게는 나름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나는 지난 3년간 네이버 블로그에 나만의 미술공부를 연재해오면서 소설책을 거의 접하지 못했었다. 다행이도 늘 벼르기만 하던 문제를 등하교 시간(대략 3시간이 조금 넘는다.)을 쪼개 해결하자는 계획이 지난 학기에는 꽤 잘 실천되었던 것 같았다. 소설에 잘 집중하지 못하던 예전과는 달리 솔제니친도, 쿳시도, 위화도, 그리고 카프카, 레싱, 흐라발, 사라마구도 한 권 씩 다시 읽었고,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도 그 중 한 권이었다. 개인적 취향 탓인지, ‘재미’로만 점수를 매겼을 때는 <미겔 스트리트>가 단연 으뜸이었다. 기억에 오래 남는 것도 당연할 수밖에 없다. 사실 글이라는 것은 동일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더라도 “어떻게 표현되는가?”로써 현격한 수용의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자면 ‘재미’ 역시 글의 큰 요소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는 그냥 재미있는 소설이 아니다. 희극도 아니다. 블랙코미디이다. 독자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읽었을 때는 이 소설의 단 한 대목도 독자들을 웃길 수 없을 것이다. 나이폴의 능력은 여기에 있다. 독자들을 트리니다드의 한복판에 떨어뜨려놓은 뒤, “그들(소설 속 인물들)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조금 과장된 표현이긴 하나, 독서의 호흡이 유난히 긴 독자라면 책을 덮은 뒤 “여기는 어디이지?”하며 깜짝 놀랄 수도 있다. 

  나이폴은 심각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그건 분명 심각하게 다뤄져야 할 일들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도 그것이 심각한 줄 모른다는 것, 즉 “그걸 다뤄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트리니다드 사람들은 재미있게 살고, 때론 격정적이며, 루머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면서도 전해 오는 기준이 없는 자유에 기댄 자기 확신은 있어 줏대 없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지 모른다. 쉽게 말해 그냥 이러니 저러니 사는 것이다. 소설에서도 그런 이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가족을 패면서도 “원래 그랬어.”라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물은 물론이고, 공부 잘 하는 이를 시기하면서도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도 있다. 이들의 판단은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트리니다드에서는 ‘인간’을 찾아볼 수 없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실종’되었다. 나이폴은 그런 트리니다드의 1930~40년대의 삶을 그렸다. 

  별로 어렵지 않으니, 축구에 비유해보자. 흑인들은 운동신경이 유독 좋다.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축구를 시작해 재능이 있으면 유럽 구단들의 스카우팅 제의를 받는다. 그래서 돈을 벌어 부자가 된다. 만약 재능을 놓고 보자면 아프리카는 축구 선진국들로 넘쳐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축구는 개인이 하는 운동이 아니다. 팀을 구성하는 선수들과 재원을 대주는 구단주와 협찬 기업들, 구단을 감독하는 이사진들, 그리고 팀을 응원하는 팬들과 광고업계가 공존하는 하나의 세계이다. 이 세계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단합을 할 정신적 ‘응결점’이 있어야 한다. 역사도 필요하다. 때문에 유독 아프리카 국가들이 국제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전문가들은 “흑인들은 단결심이 없다.”는, 가히 인종차별’로 이어질 수 있는 진단을 내놓곤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온라인 댓글들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조차 그런 생각을 빈번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래서 안 돼.”라는 자기비하적 발언으로도 이어지곤 하는데, “일제가 우리의 근대화를 도와줬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일부 국민들의 생각도 이와 유사한 논리를 갖고 있다. 이런 생각들의 스펙트럼은 큰 편차 없이 하나로 모아진다. 바로 열등감이다. 

  요컨대 <미겔 스트리트>에 나오는 모든 이들은 열등감을 갖고 있다. 특히 미국식으로 변해가는 인물들의 행동에서 우리는 “Give me Chocolate”라는 영어는 알았다는 우리나라 전후(戰後) (그들은 이미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되었지만) 어린 아이들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미겔 스트리트>와 우리가 일견 닮은 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그러한 면이 있다. 소위 욕된 말로 “양놈, 양년”이라는 표현으로 타민족의 경시하는 태도가 있는 반면, 스스로 한국적 자부심을 벗어던지고 “이깟 나라”라는 표현을 쓰는 이들도 있다. 전자는 너무 격양되어 극우로 빠져나가기 일쑤인 민족주의자이며, 후자는 근본 없는 이국주의자이다. ‘우리’라는 말은 극도의 공감, 혹은 경멸이 가득 담긴 어조로 얼마든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 

  이 책을 덮으면 “나는 무언가를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나에게 판단기준은 무엇인가?”라는 내적 성찰에 이르는 고된 여정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아니, 이것이 사실일 것이다. 만약 이 여정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미겔 스트리트>에 등장하는 ‘도덕적 쾌락’, 쉽게 말해 ‘알코올중독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중독자들은 도덕적 계약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올바른 방법을 사회적 계획안에 새겨 넣기 위해 구성원들은 수많은 고민과 자기반성을 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판단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기준 중에는 지금 사용하지 못해 버려야 할 것들과 앞으로 사용해야 할 것들이 있으며, 지속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만약 이 판단을 타인에게 유보한다면 우리는 뭔가 얻어 탄 편안함을 당장이야 느낄 수는 있겠지만 만에 하나 우리 스스로가 판단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는 회피할 기회나 도피할 장소를 궁리할 수밖에 없는 난처함에 빠지게 된다. 남을 때리거나, 술을 마시거나, 심지어 누굴 죽이거나.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폴은 분명 트리니다드의 역사를 말해준다. 픽션이 가미되긴 했지만 명백한 역사의 한복판이고, 그가 직접 보고 느낀 바이다. 그것을 소위 “‘영국물’을 먹었다.”는 작가가 비판적 시선을 통해 “그대로 노출”시킨 것일 뿐이다. 그러나 소름끼치게도 우리의 상황과 그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겉으로 봤을 때, 그들은 대개 흑인이고, 우리는 대개 한국인이다. 그들과 우리 사이의 심미안과 도덕의식의 차이도 분명 존재하리라. 하지만 그 차이가 “막 식민지에서 탈피해 아무런 민족의식과 전통도 없고,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는 그들”과 “세계 11대 강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우리”의 차이여야 할, 소위 ‘낙후된 곳’과 ‘문명화된 곳’ 사이의 차이라고 흔히 인식되어야 할 어마어마한 차이가 아니라는 점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미겔 스트리트>를 일컬어 ‘블랙코미디’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문명 우월론은 따위 언급하지 않겠다. 나는 그런 차별적 발언, 우생학적 발언을 삼가는 것이 진리라 여긴다. 하지만 돌아보기에 우리가 “우리는 다르다.”라고 자부하는 사회의 일면에서 “대체 뭐가 다른데?”라고 반문할 수 있는 점이 많다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진다. 고칠 것이 많은 사회 앞에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해야 하는 것이 모름지기 ‘배운 자’의 도리임은 알지만 이 사회를 끝까지 믿고 싶어 하는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는 자연스러운 점, 그 사실의 생리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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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1 15: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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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2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011.11.21
 


  나에게는 되도록 지키고자 하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책을 접할 때, 저자에 대해 미리 알고 들어가지 말자는 것이다. 때문에 책날개가 별도의 커버에 붙어 있고, 그곳에 저자소개가 있는 책이라면 보통 뒷날개에 있는 해당 출판사의 여러 추천도서목록들만 (나중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살짝 옮겨 적어놓고, 커버는 버린다. 책 읽을 때 거추장스럽게 덜렁거린다는 이유도 분명 있지만 나는 독서에 앞서 되도록 저자에 대한 편견이 없는 ‘나’를 책과 대면시키도록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모든 노력이 성공하진 못한다. 제목에서부터 “나는 이런 사람이고, 저런 생각을 지지하여 요런 내용을 썼고, 결론은 고로 이렇소.”라고 말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일단 한 번 접한 작가의 성향은 쉽게 잊히지 않기 때문에 그 작가의 책을 연이어 읽을 때에는 위의 노력이 거의 시도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글 자체로만 판단하려는 시도가 올바른 것이라 배워온 나에게 저자소개와 서문은 항상 맨 마지막에 접해야 하는 정보 즈음이 된다. 브랜드 이름만 보고 옷을 사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런 까닭에서일까? ‘홍세화’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한겨레’가 어떤 성향의 언론인지도 몰랐을 때, 내가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읽고 받은 충격은 그야말로 “뺨을 한 대 얻어맞고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나를 냅다 던져버렸다. 내 앞가림도 하기 힘들고, 사회를 포용하고자, 혹은 판단하고자 하는 능력 자체가 부족했던 탓에 홍세화氏가 한국과 프랑스 사회를 비교하며 펼쳐놓은 예리한 통찰력은 사실 내겐 언감생심이었다. 물론 나에게 어떤 문화집단 사이를 비교할 만한 판단능력이나 경험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고등학생 무렵, 나는 시드니대학교 기숙사에 머물며 낯선 문화를 온몸으로 느껴본 적이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행이도 “짧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문화에 중화되지 않을 수 있었다. 외국에 나가야 우리나라의 위상이 보인다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당시 득세하던 백호주의, 풀어 쓰자면 ‘백인 호주사람 우월주위’의 냉담한 시선 탓에 상처받은 것은 지금도 외상(外傷)으로 남아 있다. 나는 그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 그런데.”라는, 정에 이끌린 판단을 하는 우를 범했고, 한국에 돌아와 훗날 홍세화氏, 진중권氏, 박노자氏, 그리고 강준만氏의 신랄한 책을 읽었을 때에 그 ‘우’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도타운 정보다는 회의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물론 ‘민족’은 좋은 단어이다. 그러나 극우주의자들의 ‘민족’이라는 단어는 결코 올바른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도 언급된 극우주의자들의 득세가, 발매로부터 10년은 더 지난 어제 KBS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시 한 번 문제시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대체로 어떤 시기와 상황에 ‘민족’이라는 단어를 제멋대로 꺼내놓을 수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지를 상기시켜주기에 충분했다. 나치와 파쇼는 사실상 히틀러처럼 “우리민족의 결정적 순간”에 나타나 이 상황을 타개할 방책이 있다며 민족적 이데올로기를 잘 선전할 수 있는 달변가만 있다면 언제든지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 어제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는 그런 보고서들이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사실과 함께 이 문제가 어느 정도 위험수준에 돌입했다는 잠정적 해석을 내놓았다. 전문가들의 진단처럼 정말 세계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일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각종 전쟁과 내전, 사회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타락이 벌어졌고, 다시금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듯하며, 극우주의와 전체주의가 각 국가의 불편한 경제상황 속을 비집고 나오려는 중이다. 지젝은 월가 시위대들 앞에서 한 연설을 통해 그의 ‘극강 공산주의’를 재차 주장하며, 실패한 사회주의의 전략이 아닌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써 사회주의가 다시금 세계의 조류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여전히 ‘월가’는 건재하다. 신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로써” 사람들을 모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돈이 그러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강요와 억압을 받는 피해자로써의 삶을 살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까닭은 “원칙이 있는데 지켜지지 않는다.”라는 회의적 평화주의 때문이다. 반면, 극우주의와 전체주의는 분명한 타겟과 방법을 지닌 명확한 행동을 한다. 히틀러가 다시 등장한다면 그가 이길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이런 진단들을 여러 칼럼을 통해 읽어봤다. 독일에서 최초의 공화정이 실패하고, 온갖 정당들이 루머와 자기고집으로 집권하려고 했을 때, 그 때 나치가 나오지 않았던가. “독일인의, 독일인에 의한, 독일인을 위한”, 아니 “독일인만의” 움직임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도, 다시 말해 극우주의자들이 나치를 반복하려고 한다는 거센 비난이 독일 사회 전면에서 제기되면서도 그들의 활동은 현 정권 내에서 유지되고 있다.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천하의 고집쟁이가 극우주의를 만나, 만약 노르웨이의 참혹한 총기난사 사건을 훨씬 뛰어넘는 계획을 세운다고 한다면 오늘날 ‘평화로운’ 사람들이 그 앞에서 어떤 저항을 해볼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대원칙에 입각한 판단을 견지하며 우리의 문화를 다른 나라의 문화와 비교함으로써 상대론적인 입장에서 우리의 부족한 점과 잘못된 점을 고쳐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는 그런 면에 있어서 매우 탁월한 책이다. 박노자氏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한국의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이 한국 안에서 한국을 바라본 시선(그럼에도 그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잘 안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과 자기반성의 기회를 줬다.)”이라면 홍세화氏의 이 책은 “한국에서 타국으로 나간 사람이 한국 바깥에서 한국을 바라본 시선”이다. 그런데 두 책은 많은 부분에서 일치를 보인다. 다시 말해 “모로 봐도” 한국사회와 문화에는 우리가 자부하는 것 자체마저도 비난받을 수 있는 일련의 잘못된 코드, 혹은 DNA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홍세화氏는 특유의 명료한 문장과 신랄한 주장, 그리고 되도록 양비론을 지양하는 태도로써 독자들이 ‘쎄느강’과 ‘한강’ 사이의 균형 잡힌 시각을 갖도록 독려한다. ‘쎄느강’을 마냥 칭찬하는 글이 아니라는 점은 책의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때문에 만약 그가 프랑스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쓴다면, 비유컨대 그 글은 프랑스인들이 읽은 ‘박노자氏의 책’이 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홍세화氏는 프랑스문화에서 본받을 것들을 추출해서 이 책을 엮었다. 겨냥된 독자가 한국인일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프랑스의 긍정적인 면들이 우리 사회의 병폐를 치료할 약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개성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회, “어떤 돈인가? 어떤 권력인가?”에서 ‘어떤’이 자주 생략되는 사회, 사람이 아닌 직분을 만나는 사회, 토론문화가 퇴보된 사회(우리나라 정치인들 토론회 하는 것을 한 번 보라. 이따금 대학생 토론대회라고 방영하는 케이블방송의 TV토론회를 보라. 그러나 정작 창피한 것은 나 자신도 토론의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해본 적은 거의 없고, 배운 기억도 없다. 이 점에 있어서 홍세화氏는 프랑스 방송편성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는데, 예능 프로그램을 줄이고 토론 프로그램을 살린다고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권리’와 ‘인권’ 등을 주장하며 반대하겠지만 토론 프로그램의 활성화는 분명 좋은 토양을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잘못된 언어생활과 ‘언어’의 수능화로 점차 떨어지는 한글사랑, 그럼에도 영어 공용어화론이 정말 심각하게 논의될 수 있었던 사회, 언론의 양비론과 부족한 윤리의식, 상(賞)이 갖는 권력의 재확인, 똘레랑스가 부족한 사회, 좌우편향이 심해 지진이 일어나는 사회, 세대 간 공유되는 인식이 현저히 부족한 사회. 

  작금의 수치스러운 세태들이 괜스레 오늘날 사회 이곳저곳에서 비판받고 있는 것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며,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라고 묻는 것을 실례라고 여기기까지 한다. 이러니 토론이 없고, 윽박지름만 있으며, 안철수 교수가 말한 “문제인식의 공유”는 세대 간의 차이, 좌우의 차이, 혹은 강남과 강북, 대학교 이름, 아니면 지역 간 차이로 도저히 시도조차 되지 못한다. 이것이 구태의연한 문제제기일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 문제들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심각성에 대해 추호의 고찰도 해보지 않은 이들이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가 출판된 때가 20세기였다는 것을 고려해 봐도 우리 사회는 뭔가 나아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것들은 그대로 있는, 쉽게 말해 사람은 같은데 옷만 바꿔 입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체질이 변화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혹은 기술적 조류에 맞춰 “트렌디한 것”을 마치 ‘선도’하는 나라인 것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면 민족주의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사회개혁을 시도하려는 이에게 “빨갱이!”라고 소리치며 목덜미를 후려친 할머니가 어디 이 나라에 단 한 명이겠는가? 전쟁을 일으키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인권을 부마로 삼아 자신이 원하는 바를 타인의 인권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지나치는, 나귀를 탄 양반 같은 이들도 있다. 

  몇 년 만의 재독인데도 여전히 나 자신은 그대로이고, 문제제기는커녕 뭘 하느라 그리 바쁘고 어지러웠는지 돌아보게 되는 책이 있다. 홍세화氏의 책도 그런 책 중 하나이다. 지식을 소유하게 하는 책들은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지만 의식을 견지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홍세화氏의 글에서 “그래서 어쩔 건데?”라는 회의적 인식이나, 혹은 여전한 편향적 인식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침에 머리를 빗고 나갔는데 도저히 오늘 나의 머리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친구에게 물어본다. “오늘 머리 괜찮아?” 그러면 친구는 “괜찮아.”, “앞머리가 조금 이상해.”, “왁스를 너무 많이 바른 것 아니야?” 등등 의견을 말해준다. 이 의견은 우리의 행동방향을 정해준다. 남이 좋다고 하니 하루를 당당하게 살든지, 아니면 어디가 이상하다면 화장실에 가서 열심히 손질해본다. 조언과 수정은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문제는 그것이 ‘사회’라는 수준에서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우리가 대개 아파트 위층에는 누가 살고, 그 이웃의 아들딸은 몇 살이고, 집주인의 직업은 무엇인지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무관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뭔가를 고치기 위해서는 사회를 허상이 아닌 ‘실체’로써 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것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그 생각을 나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게끔 하는 토론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물론 이 공간에 이 생각을 적어놓는다고 해서 내가 누군가와 활발한 토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절반 남은 대학생활 중 얼마나 많은 건강한 토론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며, 특히 어느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 내가 그런 선상에 서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선상에 서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재확인했다는 것이고, 홍세화氏의 책이 많은 독려를 해줬다는 것이다. 프랑스인들과 같은 역량, 용기, 그리고 집요함을 갖고자 하는 바람이야말로 ‘행동하는 지성’의 유일한 꿈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 마땅히 곁에 둬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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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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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9
 


  내가 ‘리프킨’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해보건대 고등학생 때였다. 친하게 지내던 여학생 중 한 명이 “리프킨의 책 같은 걸 읽고 싶어. <소유의 종말> 같은 책 말이야.”라고 말하며 자신이 사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적이 있다. 무슨 대화가 오고 간 중이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나는 멋도 모르고 맞장구를 쳐줬었다. 고등학생 때는 대개 그렇다. 막연한 관심으로부터 여러 가능성을 찾고, 자신이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는 대학생이 되면 대개 깨닫게 된다. 지대한 관심을 애초부터 가졌던 이들은 강의 토론시간에 낭중지추가 된다. 다른 학생들이 어느 정도 위화감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전공과목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하며 쩔쩔 매던 나는 함께 다니던 너덧 명의 친구들과 함께 “걔는 아마 사회학 전공일 거야.”라며 혀를 내두르곤 했다. 우리가 다룰 문제가 아니라는 소극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대단히 안이한 태도였다. 

  제대 후,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뭐든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을 때, 나는 그동안 소홀히 했던 문제들에 관심을 조금씩 갖기 시작했다. 다시 읽은 진중권, 박노자의 책이 마중물이 되었고, 보다 거시적 시각들이 필요했을 때에는 우연히도 교내 독서경시대회에 나가겠다고 벼렸던 것이 도움이 되 <자유론>과 같은 원칙적 고전을 읽을 수도 있었다. 다른 하나는 교수의 추천으로 읽은 책이었는데, 사실 추천이라기보다는 “맹렬한 비판과 비추” 탓에 호기심을 갖고 읽은 것이라 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건 리프킨의 <엔트로피>였다. 

  따지고 보면 리프킨은 훌륭한 저자가 아니다. 중복되는 표현이 책의 절반을 차지할 것 같은, 어찌 보면 괜한 내용 부풀리기를 위해 비슷한 주제를 가진 내용을 챕터별로 나눈 것 같은 면도 없지 않았다. 쉽게 쓰고자 한 그의 전략이 오히려 적절한 예시에 대한 그 나름의 코멘트를 가볍게 보이게 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통독한 사람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명확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데, 이 점에서 리프킨은 성공한 저자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교수의 ‘비추’의 근거는 리프킨의 글쓰기에 있지 않다. 

  과학에 정통한 이들 중 대부분은 리프킨이 과학 법칙인 ‘엔트로피(Entropy)’를 사회과학에 적용하려고 한 시도 자체가 그른 것이며, “자연은 인간에게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라고 충고하지 않는다.”는 자연중립의 원칙에도 위배되는 자의적 해석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교수는 “타분야의 사람이 자신이 전공하지도 않은 분야에 대해 책을 쓰고자 할 때는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책”이라며 한 권의 과학 도서를 위해 300여 권의 예비독서를 한 빌 브라이슨의 노력과 비교하며 리프킨의 안이한 태도를 비꼬기도 했는데, 그 강의를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 날 집에 돌아와 강의 리뷰를 썼던 기억에 오늘 그것을 다시 읽어보니 나 역시 리프킨을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주 신랄하게 비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읽지도 않고 비판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 말이다. 

  교수의 말처럼 엔트로피 법칙을 사회로 끌어온다는 것이, 문학으로 지차면 일단 ‘비유의 오류’를 범한 셈인 것은 분명하다. 사회과학의 통계에 대해 회의를 갖는 사람들은 대개 “통계를 산출할 대상 집단의 수가 터무니없이 적다.”는 것에서 비판의 근거를 찾는데, 리프킨의 <엔트로피>도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가령 이렇다. 사회과학계에서 엔트로피가 포함된 열역학 법칙을 그들의 분야에 가져다 쓰기 위한 시도는 1960~70년대에 거의 세계적인 붐으로 일어난 바 있다고 한다. ‘엔트로피’라는 개념 자체가 질서와 무질서의 척도이기 때문에 사회과학자들 입장에서는 “이걸 사회에 적용시켜보면 인간 사회의 여러 현상들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여기에 몇 가지 오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 인간은 ‘투영의 동물’이다. 떨어지는 낙엽에서 저무는 인생을 논하는 오래된 문학적 관습은 인간이 주변 사물을 자기중심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음을 입증하는 좋은 예시일 것이다. 하지만 뉴턴 이래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밝혀온 바에 따르자면 자연법칙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법이 없다. 그것은 우주에 걸친 법으로써 존재할 뿐이다. 인간의 삶을 ‘법화(法化)’시키는 원칙으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아마 이 점이 <엔트로피>의 가장 큰 오류일 것인데, 인간의 집단인 사회는 열역학에서 다루는 통계집단인 분자보다 훨씬 작다. 사회과학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로 내세우는 통계가 다룰 수 있는 최대의 숫자는 고작 70억이다. 반면, 열역학에서 다루는 분자집단은 천문학적인 표본을 대상으로 한다. 간단한 예로 커피머신에서 나오는 종이컵 하나에 들어갈 수 있는 물의 최대량에는 대략 10의 23승이나 되는 물 분자들이 존재한다. 10의 23승이라는 숫자는 태양이 초당 발산하는 에너지를 kw로 환산했을 때나 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인간들을 물 분자 정도 크기로 줄여 컵에 담는다면 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얄팍하게 깔릴 것이다. (70억은 10의 9승이다.) 열역학에서 다루는 규모는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 정도의 규모는 되어야 엔트로피의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 사회과학의 통계가 열역학의 법칙을 사용하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평형’이라는 문제가 있다. 평형이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겉으로는 변화가 없는 상태”이다. (열역학의 첫 번째 법칙은 열적 평형이다. 평형은 ‘equilibrium’으로 보통 균형, 즉 ‘balance’로 오역되곤 하는데, 균형은 좌우의 개념이 있어야하는데 반해 평형은 그렇지 않다는 큰 차이가 있다.) 가령, 컵 속의 물을 보자. 컵 속에는 H2O라는 물 분자가 앞서 말한 것처럼 10의 23승개나 들어 있다. 물이 증발한다는 것만 예외로 하면 겉으로 보기에 이들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다. 아니, 증발하지 않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외부에서 관찰이 가능한 ‘닫힌계(clossed system : 물질의 소통이 불가능하지만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의 수조를 만들어 그 안에 물을 넣었다고 하자. 여전히 겉으로 보기에 물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하지만 실제 물속에서는 어마어마한 변화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물 분자는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분자끼리 부딪혀 서로 수소나 산소 원자를 바꿔치기도 하고, 물 분자 입장에서는 마치 우주와도 같을 수조 안을 우주선처럼 열심히 떠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를 일컬어 “겉으로 보기에는 변화가 없으나, 내부는 활발한 상태”라는 뜻의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이라고 한다. 열역학에서 다루는 시스템들은 대단히 어지럽게 움직이는 내부를 가졌으나, 결국 육안으로는 평형을 이루고 있는, 즉 이모저모 다 따져 봐도 평형인 것들이다.  

  사회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사회과학이 어려운 것이겠으나) ‘사회’라는 것은 육안으로 봐도 끝없이 변화가 일어나는 상태이다. 지난 봄, 서울 지하철역 보관함에 폭탄을 넣어두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당시 시리아에서는 연일 끔찍한 폭력적 탄압이 계속되어 무고한 시민들이 주검으로 거리에 나뒹굴고 있고 있었다. 인류는 지금까지 대략 천 여 개 안팎의 전쟁을 겪어왔으며, ‘지구’라는 것도 모자라 지금은 ‘제 2의 지구’를 찾기 위해 몇 개의 도구를 손으로 삼아 우주공간에 내보내고 있다. 인간의 사회는 결코 평형 상태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과학에서는 엔트로피의 평형 개념을 무시한 채 인간 사회의 질서와 무질서의 척도로 엔트로피의 개념을 사용한다. 이런 점들이 <엔트로피>의 ‘불성립’을 주장하는 여러 과학자들의 과학적 근거이다.   

  사회과학적 주장은 정확한 근거에 입각해야 하기 때문에 위의 주장들은 분명 <엔트로피>를 읽을 미래의 독자들, 혹은 읽었던 독자들이 생각해봐야 하는 명제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리프킨이 하고자 하는 말이 분명했고, 그것은 전(全)지구적 차원의 각성을 호소하는 글이었으며, 사람들이 열역학을 대체로 잘 몰랐기 때문이다. 이 쯤 되면 우리는 그가 과연 무슨 말을 하고자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을 열역학 법칙의 사회과학 적용을 끝까지 고수했던 것인지 궁금해 할 수밖에 없다. 그의 메시지에는 총체적인 시대의 경고가 들어 있다. 과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봤으니, 이번에는 리프킨의 주장을 들어봐야 할 차례이다.

  <엔트로피> 초판이 나온 해가 1980년이다. 리프킨은 당시를 ‘기계의 시대’라 정의했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인류의 사고를 점령했을 때, 서양에서는 비약적인 기술발전이 이뤄졌었다. 그 결과 ‘운동하는 물체’만을 고려한 편향적 발전이 “인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맹렬한 비난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기계론적 세계관을 완성한 이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뉴턴이며, 이것을 국가의 패러다임에 적용한 이는 로크, 그리고 경제를 설명할 때 사용한 이가 아담 스미스이다. 로크는 “개인 생산물이 늘어나면 사회의 부도 늘어난다.”는 이른바 ‘트릭클-다운(trickle-Down)’을 주장하며 부의 총량이 증가하는 것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도록 했다.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을 강조하여 경제에서 도덕성을 제거하는데 일조했고, 실용주의 경제사관을 건축했다. 리프킨은 이들을 ‘근대의 적’으로 지목한다. 

  열역학 법칙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워낙 난이도가 높기 때문에 이곳에 일일이 게재할 사항은 못 되는 것 같아 리프킨이 왜 엔트로피를 이용해 사회를 설명하고자 했는지에 대해 적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열역학 법칙이란, 쉽게 말해 우주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한데, 엔트로피의 총량, 즉 무질서의 총량은 계속 증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바꿔 말하면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에너지는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한하며, 형태만 변화한다. 인간이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것은 유용한 에너지를 무용한 에너지로 만드는, 즉 ‘오염’을 뜻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다음 세대들은 우리보다 더 ‘오염된’, 즉 “에너지가 적은” 세상을 살게 된다. 로크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이 보다 빨리 변형되면 진보도 더욱 빨라질 것이고, 세계는 더욱 질서 있게 되며, 따라서 시간은 절약된다.” 리프킨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일갈한다. 

  리차드 윌킨슨은 그의 저서 <Poverty and Progress>에서 “구하기 쉬운 원료에서 어려운 원료로 넘어감에 따라 인간은 점점 더 복잡한 처리 및 생산기술을 이용해야 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에너지 발전사를 통시적으로 들여다봤을 때 얻을 수 있는 결론이다. 가령, 리프킨이 예시로 든 것처럼 나무를 원료로 사용했을 무렵, 석탄을 이용했을 무렵, 그리고 원전에서 석유를 뽑아내는 지금을 서로 비교해보면 인류는 점점 수집하기 어려운 자원을 이용하며, 그로 인해 새로운 기술을 필요로 하고, 또 다른 에너지를 그곳에 쏟아 붓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기술적 발전이 마치 진보를 이루는 것처럼 광고되어도 정작 근로자 계급은 그들이 공장에서 만드는 양모로 된 옷을 전혀 입지 못한다는, “누구를 위한 발전인가?”를 묻게 되는 현상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리프킨은 엥겔스의 <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를 참조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그보다 더 큰 문제를 자크 엘룰(Jacques Ellul)의 <The Technological Society>의 내용 발췌를 통해 알려준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모든 기술은 당초부터 예측불가능한 2차 효과를 품고 있다. 2차 효과는 차라리 기술 없이 지내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엘룰의 주장이다. 

  에너지 대란이 점차 현실화되고, 우리나라 국민들도 갈수록 높아지는 유류세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는 상황이라 그런지 최근 KBS는 우리나라의 해외 원전 개발 사업의 ‘자랑스러운’ 청사진을 다큐멘터리로 방영해준 적이 있다. 중국에 비하면 한참 뒤쳐져 있지만 언젠가는 목표치에 근접할 것이라는 잠재적 국가경쟁력의 선전인 셈이었다. 한편, 중국,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 국제 에너지 세력판도의 변화도 시시각각 보도되고 있으며, 이로써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는 지구의 자원에 대한 전 세계적인 공포감이 확산되어 있다. 각 나라들의 ‘덩치’는 점점 커지고 있는데 비해 사용가능한 자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최악의 상황이 가까워지자 예년보다 많은 양을 생산했는데도 왠지 수확을 덜한 것 같은, 이른바 ‘수확체감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미국이 이 현상의 가장 큰 피해국이라 알려졌다. 다국적 기업과 엄청난 규모의 중앙정부관료 체제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는 ‘슈퍼 아메리카’의 맹점이 치부를 드러낸 것이다. 리프킨은 이렇게 말했다. “지구상에 미국이 또 하나 있다면 지구는 지탱할 수 없다.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가난한 상태에서 삶을 시작해야 한다.” 

  인간이 발명하고 개발한 것들이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광고를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발의 이면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화학비료와 현대식 화장실의 상관관계(질소화합물과 관련이 있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들은 별로 없다. 새로운 에너지 생산을 위해 어마어마한 돈이 드는데도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새 에너지가 나오나보다.”고 생각할 뿐, 에너지 생산에 투입되는 막대한 자금이 결국 자유시장의 전체적인 물가를 인상시킨다는 경제의 메커니즘은 이해하지 못한다. 원자력 발전소의 발전량과 거의 24시간 가동을 중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에 현혹된 사람들은 발전소를 돌리는 돈이 우리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감춰진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리프킨은 “결국 가장 큰 부담을 지는 것은 납세자이다.”고 단언한다. 

  이런 방식으로 수송, 도시화, 군대, 교육, 컴퓨터, 보건 등 각 분야의 엄청난 수준이 ‘낭비’와 ‘오염’을 고발하는 리프킨의 주장은 1980년에 이미 제기된 것이지만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의 풍요로운 ‘정신적 삶’을 방해하는 심각한 요인들로 실체화되어 있다. 리프킨이 로마를 예로 든 도시화 비판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는 로마 제국이 식민지 사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당시 인구 100만에 육박하는 도시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 타지의 노동력과 자본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당시의 로마는 오늘날 뉴욕, 파리, 런던 등 세계 주요도시들에 비유된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현대 도시들은 인근 지역의 에너지 환경이 갖고 있는 생산용량을 훨씬 초과해버렸기 때문에 일단 국내 및 해외의 에너지 기반이 한계에 달하면 붕괴할 가능성이 크다.” 얼마 전, ‘I♡NY’이라는 테마로 방영한 KBS의 한 다큐멘터리가 갑자기 기억났다. 뉴욕의 신화를 설명한 영상이었는데, 리프킨의 주장을 듣고 보니 저 거인이 얼마나 많은 식량을 빼앗아 먹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뉴욕 사람들은 별로 개의치 않을 것이다. 서울이라고 사정이 다를까. 

  한 학자(Herman Daly)는 위의 문제점을 낳은 서양식 발전 모델이 지구의 미래를 황량한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현재 세계 인구의 6%밖에 안 되는 미국인들이 세계 광물자원의 약 1/3을 소비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 모든 사람들이 미국의 생활수준에 도달하려 애쓰고 있다. 자원 생산량이 현대재로라면 미국과 동일한 생활수준을 누리게 되는 것은 세계 인구의 18%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82%에게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오래되지 않은 기억으로, 나는 미국인들이 햄버거를 먹지 않으면 세계의 기아인구 10억 명이 하루 세 끼를 챙겨먹을 수 있다는 충격적인 비유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한 적이 있었다. 이는 에너지 독점이다. 리프킨은 이러한 독점이 엔트로피의 법칙 내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결국 현재의 사고 개념을 바꾸지 않는다면 인류는 자원이 0이 될 때까지 남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전쟁”을 치룰 것이며, 기아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당시는 태양 에너지가 인기를 얻고 있던 때였으므로 리프킨은 그것이 대안이 되리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도 인식의 변화를 촉구했는데, 그것은 태양 에너지를 사용가능한 에너지로 전환하는 기술이 보유한 효율이 지극히 낮다는 것에 근거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원자력 발전소가 가장 운용대비 효율이 좋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세계의 인식이 바뀌면서 독일은 자국 내 모든 원전을 폐쇄하겠다고 했고(하지만 독일의 경우는 특별하다. 우리나라는 원전 폐쇄의 트렌드를 따라갈 대체 에너지 개발이 부족하나, 독일은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등지의 땅을 구입해 태양열 발전소를 직접 세워 그것을 자국으로 끌어들이는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으며, 그 외에 여러 대체 에너지가 언제나 사용될 수 있는 상황이다.), 프랑스는 가장 원전의존률이 높음에도 트렌드에 맞춰 정치적 전략들이 제기되는 곳이다. 지금껏 태양열 에너지로 소위 ‘재미를 본’ 나라는 없다. 미국은 화력 발전소의 천국이고, 중국은 사상 최대의 원전 보유국이 될 야망을 꿈꾸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에 리프킨의 ‘전 인류적 호소’는 사실상 힘을 잃은 듯하다. 

  리프킨이 제시한 대안들, 아니 ‘혁신’들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원칙적이라는 뜻이고,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원칙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있는 상태라는 참담한 현실을 씁쓸하게 되짚어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시인구의 전면적 감소와 농촌의 활성화, 민주적 기업조직, 재생불가능한 자원의 소비 최소화, 세계 인구의 큰 감소(이 부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불성설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등이 리프킨의 대안이었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남긴 최악의 유물들을 거둬내기 위해 필요한 고통과 희생의 방안들은 이 정도의 무모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대안들은 그가 내리고 싶었던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다. 

  “궁극적인 도덕률이란 가능한 한 에너지를 적게 쓰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독자들은 리프킨의 호소문이 아주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근검절약’이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절실한 실천적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리프킨이 경계했던 낙관주의자들, 즉 “진보를 막을 수는 없다.”는 사람들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찬란한’ 모습을 상상하며 오늘도 전기와 물을 낭비하고 사치와 오염을 일삼고 있다. 이 책이 시대의 경종을 울려 많은 이들의 손에 들려졌었지만 종소리는 얼마나 오래 울리고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되는, 창피함과 곤혹스러움에 한숨을 쉬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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