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무엇인가 - 유종호전집 4
유종호 / 민음사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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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8 



  “나는 국문학도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선뜻 이런 말을 건네기 힘들다. 대학에서 전공하고자 한 분야를 방관하는 것이 옳지 않은 태도임은 알지만 억울하다며 굳이 소심한 핑계를 대보자면 국문학이 나를 매료시키지 못한 까닭을 들 수 있기도 하다. 시인을 꿈꾸며, 나는 책을 좋아하는 몇몇 친구들과 시를 교류하고, 어린 머리로 문학을 논했던 고등학생 시절이 그립다. 바꿔 말해, 나의 풋풋한 로망은 대학교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소위 “뭣도 모르는 소리 마라.”는 학문의 일갈에 좌절한 것이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는 넘기 힘든 벽을 앞에 뒀던 것일 수도, 아니면 꿈을 옅게 꾼 것일 수도, 혹은 벽이 쓸데없이 높았던 것일 수도 있다. 흥미를 잃은 후에는 시도 쉽게 쓰지 못했다. 입대 전에 겨울창가의 눈발을 보고 쓴 시가 마지막이었으니, 올해로 4년이 되어 간다. 올 겨울에는 시를 쓸 수 있을까. 책 하나를 복기해본다. 

  “시인은 시 말고는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장정일氏가 <공부>의 서문 중에 밝힌 고백에는 이견이 많으리라 본다. 하지만 시인은 시로써 말하는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 그의 고백은 진실이다. 어떤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있든 그것을 표현하려고 하면 일단 시어(詩語)의 연못에 문제를 빠뜨려야 하는데, 그가 온전히 문제의식을 시로써 표출하진 않는다. 그곳에는 은닉이 있고, 은유가 있으며, 함정이 있고, 덫이 있다. 그래서 시는 대개 잘못 읽히기 일쑤이다. 시를 비평함은 사회문제를 비평함과는 다르다. 따라서 시에만 집중하면 다른 것은 보지 못해, 하여 소위 ‘골방 시인’이라는 말이 항간에 널리 퍼져 있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생각해볼 수 있다. 장정일氏는 시인의 무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마흔이 넘는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작정은 독한 것이어서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다루고자 공부했는지 들여다보면 혀를 내두르게 된다. 

  내가 그동안 각종 사회문제와 세계적 대안들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때를 반성하며 이런저런 어려운 책을 찾는 까닭도 같다. 시인이 되기보다는 ‘시대인(時代人)’이 되려고 한 것이다. 문학에게 주던 애정이 아주 식은 건 아니나, 정도가 덜해진 것은 분명하다. 내가 나의 전공으로부터 멀어지는 정도는, 아직 졸업하지 않았음에도, 점점 강해지는 듯하다. 독창적 사고를 지향하는 나에게 각종 문학이론과 논문들이 적잖은 방해를 했다는 것도 숨기지 못할 비밀이리라. 이런 것들이 지금의 나에게는 심각한 문제를 안겨준다. 문학인으로써의 자질이 부족함을 새삼 깨달은 까닭이다. (비전공인 미술에는 그토록 열정적으로 다가갔었건만!) 

  예비문학도들에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말이지만, 겨우내 내려 창가에 소복이 앉은 눈을 보고 갑자기 시상(詩想)이 떠올랐다고 해서 그대들이 시인의 자질을 타고났을 것이라 지레짐작치는 말아야 한다. 그것은 분명 창의적 사고이지만 대체로의 인간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시지각의 공통적인 연상 작용일 뿐, 시인의 경지에 이르러 갖게 되는 심오한 문학적 본질은 아니다. 어떤 스타팅라인에 서 있다고 해서 그곳의 길이 마냥 저만을 위한 것이라 짐작하면 낭패를 본다. 둘이 갖는 정도의 차이는 문학을 알면 알수록 더욱 선명하게 보일 것이고, “좋은 문학”을 선별하는 작업이 유난히 까다로운 이유도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멜랑콜리로부터 일상으로 되돌아오게끔 되어 있다. 그리하여 내가 내린 나만의 결론은 문학을 배우지 않고, 접하는 것이다. 이미 몇몇 방법들을 배운 사람이 에둘러 핑계를 댄다고 하겠지만, 맞다, 복잡한 이론들로부터 자유로워져 자신만의 독서를 하겠다고 벼르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오히려 제각각의 독서가 훨씬 현실적이지 않은가 하고 돌아봐야 할 일이다. 

  독서량도 턱없이 부족하고, 전공에 대한 애정도 적으니, 단지 잠시 시인을 꿈꿨다는 이유로만 이런 글을 적는 것에는 쓸모없는 비약이 숨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종호氏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복기하면서 나는 내 안에서 여전히 (비근한 표현이지만) 문학이 살아 숨 쉬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고등학생 때, 나에게 많은 가르침과 용기를 주신 (그분은 내게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을 당신께서 밑줄 치며 읽으셨던 영어 원본으로 선물해주셨는데) 은사께서 추천해주신 책이다. 제목처럼 “도대체 문학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답변을 갈구하는 예비문학도들이 읽기 좋은 책이다. 특히 시인이 그러하다. 유종호氏는 상당히 많은 분량을 오로지 “시 설명하기”를 위해 투자했다. 

  시어는 일명 ‘낯설게 하기(Defamilarization)’의 전략으로 만들어진 조어(造語), 즉 “만들어진 언어”이다. 그런 까닭에 시인을 일컬어 ‘언어의 연금술사’라 부르는 것이다. 유종호氏는 시어와 그렇지 않은 언어의 차이를 “우주적 차이”라 부른다. 단 하나의 언어선택으로도 시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시인들은 어휘력이 탁월해야 한다. 자신이 쓴 습작들을 쭉 펼쳐놓고 단어, 혹은 문장별로 유사한 것끼리 분류해봤을 때, 스펙트럼이 의외로 좁다면 자신의 어휘력을 의심하고 사전을 펼쳐들 일이다. 한편, 자신이 너무 어렵게 시를 쓴다면 그것 역시 특정 단어나 표현을 고집하게 되는 어휘력 부족을 문제 삼아봐야 하는 현상이다. 물론 유종호氏의 말처럼 “시는 무조건 쉽게 쓰여야 한다.”는 요즘 독자들의 독단도 심각한 문제이겠지만 예비 작가와 독자의 입장은 서로 다르므로 작가는 자신의 시적 소양을 독자보다 훨씬 심각하게 문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문학이 모름지기 이래야 저래야 한다는 말은 없다. 문학은 다양성과 창의로써 지금껏 위용을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보수적 평단의 “이건 문학이 아니다!”라는 일갈을 목격한다. ‘환상문학의 어머니’라 불리며 실로 엄청난 수의 세계적 팬을 보유하고 있는 어슐러 르귄도 정작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를 일컬어 “그것도 소설이냐?”고 비판했었다. 프랑스 문학계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소설가’가 아니다. 또한 문학상을 거부하는 사태도 빈번했다. 심지어 독자와는 글로써만 만나고 일절 사생활 노출을 꺼리는 쥐스킨트와 같은 기인(奇人)도 있다. (하지만 그가 기인일까? 아니면 그의 속살까지 보려고 하는 관음증적 독자들이 기인일까?) 그런 까닭에 유종호氏는 현명한 방법을 선택했다. 수많은 각주를 달아놓은 방대한 양의 논문들과는 달리 친절한 교육자의 입장에 서서 각종 이론들을 보기 좋게 나눠 설명한 것이다. 사실 프랑스 상징파 시인, 토마스 만, 제임스 조이스 등 직접 읽어봐야 이해가 되는 부분(나는 대개 이 부분에서 좌절하곤 한다.)이 있어 문학을 멀찌감치 뒤에서 조망하는 이에게 큰 도움이 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만한 가이드라인은 없다. (김대행氏가 쓴 동명의 책 <문학이란 무엇인가(92년 발행)>도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대목은 책의 맨 마지막에 놓여 있다. 독자라면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집중을, 예비 작가라면 “어떻게 쓸 것인가?”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사실 두 질문 모두 독자와 예비 작가에게 필요한 것이리라. 유종호氏의 답변은 정직하다. 독자들에게 그는 “꼼꼼히 읽으라.”고 강조한다. 많은 것을 알고 싶은 입장에서 속독(速讀)에 능한 사람, 소위 ‘대각선 읽기(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 시선을 내리며 한 줄의 문장을 단 번에 통독할 수 있는 독해력)’에 능한 사람이 부러운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유종호氏가 말한 ‘몰아적 집중’이다. 이는 무엇일까? “진정으로 즐길 수 있어서” 느끼게 되는 함몰이다. 쉽게 말해 책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짜릿한 경험을 느껴본 지 얼마나 되었기에 근래 들어 아득하게 연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특히 젊은 지금, 삶의 모색에 있어 중요한 어구들이 긴 독서 중 이따금 등장해 나의 머리를 때리던 경험은 어디 간 것일까? 서점에 나온 책들 중 베스트셀러의 대부분이 죄다 그런 경구들만 모아놓은 ‘계발서’인 것은 다분히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이어 유종호氏는 ‘서울대 선정 100대 도서’와 비슷한 고전리스트를 제시하는데,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어떻게 쓸 것인가?”는 조금이라도 글을 꾸려보려는 이들에게 항상 벽처럼 다가오는 질문인데, 글쓴이들에게는 거의 자아성찰에 버금가는 인내와 추진력을 요하는 난제이기도 하다. 유종호氏가 몇 가지 방법, 가령 동요를 많이 읽고 암송하여 말바꿈의 민감성, 소위 말하는 ‘언어구사력’을 키우는 것 등을 알려줬으나, 그도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정말 중요한 것은 역시 많은 책을 읽어 글을 분별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으나, 대체로 많이 읽은 이들이 문장을 세련되게 쓴다. 그것은 단기속성으로 배울 수 있는 재주가 아니다. 故 서정주氏의 교훈처럼 평생을 “불치의 욕구불만 감정”으로 가득 채워 “타성의 게으름”에서 벗어나고, 결국 “새 경지의 발견”을 추구하는 타파의 정신이야말로 글의 본질이자, 역할인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작가일수록 겸손하다는 것도 우리가 꼭 배워야 할 점이다. 

  나의 글부터 시작해서 이따금 칼럼에 등장하는 얄팍한 수준의 ‘전문가들의 글’에 이르기까지 세상에는 온갖 잡스러운 글들이 많다. 글은 사람이라고 했으니, 나부터 각골하여 반성해야 할 일이다. 앞서 나는 문학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애증이 쌓인다고 해야 옳을까. 그것을 사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고, 그 중 대학의 방법이 싫었던 것이라 말해야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싫증의 대상도 모른 채 무턱대로 “문학, 문학”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나는 어제 새벽까지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읽고 있지 않았던가! 

  문득 창밖의 보슬비 내리는 풍경이, 시름시름 앓는 11월의 마지막 풍경이 “지금은 언제인가?”라는 난해한 질문 하나 툭 던져놓고 막 밝아질 참이다. 나의 11월은 그렇게 가고, 별로 그릴 것도 없는 냉소한 마음으로 이번 해에는 시를 다시 쓸 수 있을까. 시집이 잔뜩 꽂혀 있는 어머니의 책장으로 가 아무 책이나 하나 덥석 들어 펼쳐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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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9 2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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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1 13: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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