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03


 

  국어학을 배우다 보면 ‘어휘부(Lexicon)’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려운 개념인데, 쉽게 말해서 사람이 구사할 수 있는 어휘들이 있는 창고 정도가 된다. 위대한 작가들을 다룬 큰 책들을 읽다 보면 “A는 몇 개의 어휘를 사용했고, B는 몇 개의 어휘를 만들었고”와 같은 에피소드들을 만날 수 있다. 책 좋아하고, 글 쓰는 걸 즐기는 사람은 “나는 대체 몇 개의 어휘를 사용할 줄 알지?”라는 질문을 가져봤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국어사전에 하늘색 색연필을 칠해 가며 아는 단어들을 헤아려본 적이 있다. 얼마 못 가서 포기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일단 끈기가 문제이긴 했으나, 사실 어휘부는 우리가 보통 아는 ‘단어’와는 다르게 온갖 방언과 (특히 연령대별로 큰 차이를 보이는) 속어 등도 포괄하는 개념. 나는 결국 “꽤 많은 단어를 알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산의 허리 즈음까지만 올라간 주제에 정상에서의 기쁨을 만끽하려고 한 셈이다.


  책상 위에는 방학을 틈타 읽을 책들이 겹겹이 쌓여 있고, 책장에는 바라만 봐도 흐뭇해지는 책, 읽은 책, 그리고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꽂혀 있다. 마땅히 둘 자리가 없어 바닥에 내려놓은 것까지 하면 몇 백 권은 될 것인데, 나는 이따금 저 많은 책들 안에 잠들어 있는, 내가 읽어야만 마법의 잠에서 깨어날, 흡사 병마총의 병사들 같은 단어들로 끝이 보이지 않는 성벽을 쌓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 성벽은 내가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자, 내 삶의 말뚝을 박을 수 있는 땅이고, 한없는 동경의 대상이다. 단어로 된 성벽에 피그말리온의 사랑을 불어넣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로와 같은 삶에서 내가 찾아낸 단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책으로의 부단한 발걸음을 스스로에게 주문해야 하는 까닭이다.

 

 

 

 

 

 

 

 

 

 

 

 

 

 

 

 

 

 

 

 

 

 

 

 

 

 

 

 

 

 

  오늘 많은 책들이 도착했다. 여덟 권이지만 권수로는 열두 권이다. 그 중 몇 권은 서재에 꽂아두고 틈날 때마다 찾아 읽고픈 것들이다. 그것들은 한샤오궁이 말한 ‘갖고 있을 만한 책’이다. 가슴 절절한 무언가, 혹은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무언가가 들어 있진 않지만 호기심이 닿아 있어 훗날 글을 쓰고자 할 때에 불현듯 찾게 되는 책들이다. 그런 책들은 종합적인 것들이라 대체로 비싼데, 할인을 빌미로 나의 ‘지름신’을 달래보게 됐다. 리처드 도킨스의 <조상 이야기>, 쇼펜하우어의 <세상을 보는 방법>, 그리고 사사키 다케시 外의 <절대지식 세계고전>이 그 책들이다.


  어쩌다보니 리처드의 또 다른 책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한 권씩 사다보면 언젠가 그의 애독자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쇼펜하우어의 이 책은 평이 좋아 사뭇 기대가 된다. 사실 그의 책을 고른 까닭은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철학자들의 조언’이라는 콘셉트의 작은 철학책(이라기보다는 카운슬링에 가까운 책)을 문득 기억해냈기 때문이었다. 사사키의 책은 지식에 대한 큰 틀을 그리기 위해 샀는데, 챕터별로 발췌독하기에 용이하다. <맹자>의 주해본(박경환 譯)도 그런 의미에서 나의 동양철학서적들 사이에 꽂아두었다.


  어떤 이들은 “인터넷에 검색하면 되지, 뭐 하러 비싸게 돈 주고 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오래된 고성(古城)에 들어가 낡은 보물 상자 하나 들춰보는 장서의 미학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인터넷의 정보들은 이상하리만치 신뢰할 수가 없다. 이것도 내가 가진 선입견 중의 하나이겠지만 나는 책을 읽다가 궁금한 부분을 인터넷에서 여러 번 비교해 찾지, 인터넷을 하다가 궁금한 것을 책에서 찾아보진 않는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드디어 샀다. 익히 명성만 들어오던 터였다. 첫 장의 첫 구절부터가 인상적이다. 읽고 있는 책이 여러 권이라 당장은 못 잡겠지만 여름방학맞이 픽션 도서로는 1순위가 될 듯하다. 루카치의 <미학>은 미술 공부하는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책이다.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와 같은 계열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둘 모두 마르크스 선상의 위대한 학자들이다. 베냐민, 뵐플린, 파노프스키, 단토, 타피에 등을 읽으며 길러진 나름의 내공(?)으로 조만간 깊은 공부를 하게 될 것이라 설렌다.


  <나, 피에르 리비에르>는 속속 서재에 꽂히고 있는 푸코의 책(그나마 이 책이 푸코의 저서들 중에서는 쉬운 것으로 알려져 있더라.)이다. 우리나라의 소위 ‘푸코 읽기’는 인문학계에서 꾸준히 불고 있는 유행이라, 인문학의 위대한 사상들을 평소 동경해오던 나에게 푸코 읽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포만감을 준다. 비록 <광기의 역사>와 <감시와 처벌>의 완독이 실패로 돌아간 씁쓸한 기억은 있으나, 꾸준히 독서의 수준이 올라갈 것이라고 믿어본다. 전공자가 아니고서야 복잡하고도 상세한 대(大)철학가들의 사상서적을 홀짝홀짝 넘겨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핑계도 대본다.


  김애리氏의 <책에 미친 청춘>은 귀감이 될 수 있는 책이라 주저 없이 샀다. 젊음의 생존법을 ‘독서’라고 단언하는 그녀는 독서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의 날개를 펼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애독가인 그녀의 경험에서 우러른 한 마디 한 마디가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그녀는 나와 ‘젊음’이라는 코드를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생에의 치열함에 있어서 내가 감히 그녀와 비교될 수 있게냐마는.


  천천히 읽어볼 것을 벼르며 대충 책장을 넘기다가 (어떻게 나는 그녀가 소개하는 책 중 단 세 권밖에 못 읽어봤을까!) 95쪽에서 반가운 시 한 편을 만났다.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이란 없다>였다. 옛 미술블로그를 할 때, 아우구스트 마케(1887~1914, 독일 표현주의 화가)의 작품들을 그녀의 시와 엮어서 길게 포스팅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시집 한 권을 사놓고 가장 마음에 들어서 몇 번이고 고쳐 읽었던 시.


  “두 번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명언. “우리는 연습 없이 태어나서 실습 없이 죽는다.” 올 2월 초, 그녀의 타계 소식 접하고 다시 한 번 읽었던 그 시를 이 책에서 우연히 만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수많은 고뇌와 생각 속에서 태어났을 저 높은 책들의 탑에 삶을 던지지 않고서야 쉼보르스카가 말한 우리네들의 삶을 어떻게 경작할 수 있을까!


  창밖에는 소나기가 쏟아진다. 땅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흙내음도 잠재울 정도로 세차게 들이 붓는다. 놀이터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집으로 뛰어간다. 집은 그런 곳이다. 비 내리면 들어가 쉴 수 있는 곳. 우리와 같은 조그마한 독자들에게, 책은 바로 집과 같은 곳이 아닐까. 식상하지만 나는 이 비유가 포근하니, 가장 마음에 든다.

 

 

#. 얼마 전, 나는 방학동안 읽을 열한 권의 인문학 서적들을 나름 골라놓고 한 권씩 리뷰하기 시작했다. 두 권은 이미 올렸고, 곧 한 권의 리뷰도 올릴 것인데, 나머지 여덟 권을 밑에 조촐하게나마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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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7-06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저를 위한 페이퍼! 탕기님도 인문학 서재나 블로그나 나름의 기준을 갖고 책을 고르겠지만 저는 탕기님 서재만으로도 충분해서 좋아요. 몇 권은 저도 보고 싶은 것들이에요. 왜 11권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속도라면 곧 다 읽을 것 같아요^-^

탕기 2012-07-07 00:35   좋아요 0 | URL
부지런히 읽어놓고 8월의 11권도 선정할 생각이에요.
책장을 기웃거려보면 왜 "이건 못 읽겠어."라고 했던 것들도 다시 보이곤 하잖아요?^^
 
진단명 사이코패스 -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이상인격자
로버트 D. 헤어 지음, 조은경.황정하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12.07.01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2권]

 

 

  영화 <악마를 보았다(2010)>의 여러 장면들이 머릿속에 각인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장경철(배우 최민식氏)의 무덤덤한 표정으로부터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이라는 형용사구의 함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로 (한편으로는 우리에게는 저 영화 속의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맹신하면서) 새삼 깨닫게 된다. 잊을 수 없을 만한 종류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무고한 죽음과 닿아 있다.

  <진단명 : 사이코패스(원제 : Without Conscience : The Disturbing World of the Psychopaths Among Us)>의 저자 로버트 D. 헤어는 “누구나 사이코패스를 만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이 책의 살벌한 전제이다.

 

 

*    *    *

 


  사이코패스는 겉보기에 흉측스럽기 그지없는, 혹 뒤러의 <용과 싸우는 성 미카엘(1498년 작품)> 속에서 창에 찔린 고통을 온 몸을 뒤틀며 표현하는 용들처럼 혐오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대개 멀쩡하다. 지적인데다가 달변이기까지 한 경우도 많다. 그들에게 속는 순간 우리는 그가 손으로 눌러 죽이는 벌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선정적인 표현이 우리가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예외’들을 과장하려는 수사법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피상적 감정을 가진 사이코패스들에게 선처를 호소해봤자,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희미하게나마 돌아온 의식으로 한 피해자 여성이 장경철에게 “아저씨, 살려주세요.”라고 힘없이 호소했어도 결국 장경철은 그녀를 잔인하게 죽였다. 인간에게는 측은지심이 있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 측은지심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우리의 신체는 생리적 변화를 겪는다. 전달물질을 통해 감정이 발생하고, 우리의 몸 어딘가는 분명한 자극을 받는다. 하지만 로버트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들에게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생리적 불안이나 특징을 찾아볼 수 없(96쪽)”다.


  이 책은 사이코패스들의 ‘기막힌’ 사례를 시작으로 그들의 특징에 대해서 언급한다. 사이코패스들과 로버트가 직접 나눈 대담의 채록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의 ‘비정상적’이라는 단어 사용이 그다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로버트는 사이코패스를 정의내리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다고 강조한다. 우리들 중 “저 사람은 정신이상자이다.”와 “저 사람은 사이코패스이다.”, 이 두 문장의 정확한 차이를 알고 있는 이는 몇 안 될 것이다. 정신이상자는 분별력이 없다. 반면 “교도소나 구치소에 있는 사이코패스는 상당한 사교술을 발휘하여 판사가 자신을 정신병원으로 보내도록 설득할 수 있다.(55쪽)” 그들도 이미지 관리를 한다.


  로버트는 65쪽을 빌어 사이코패스의 증상들을 열거해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중 일부는 우리들 중 누군가에게는 하나쯤 속할 만한 것이다. 가령, “자기중심적이며 과장이 심하다.”라든가, “책임감이 없다.”라든가, 혹은 “거짓말과 속임수에 능하다.”라든가, 등등. 다행이도 그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로버트와 같은 전문가들은 각 항목별 사이코패스의 특징과 일반적인 ‘우리’들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그 예들은 3장에 길게 제시되어 있다.


  물론 로버트도 그가 제시한 진단법이 매우 신중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일반인들에게 잘못 적용하면 자칫 성격이 단순히 모날 뿐인 누군가에게 ‘사이코패스’라는 꼬리표를 붙일 수 있고, 반대로 진짜 사이코패스의 교묘한 수법에 속아 그를 다시 사회로 돌려보낼 수도 있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악당은 키스하면서도 당신의 이빨 개수를 세고 있다.(117쪽)”라는 유대인들의 소름끼치는 속담은 우리에게 사랑마저 의심할 것을 명심하도록 한다. 우리가 악당을 만날 확률은 (우스갯소리로) 만화 <명탐정 코난>에서 코난 일행이 있는 곳이라면 거의 매번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확률보다는 적겠지마는.


  우리는 대체로 ‘괜찮은’ 사회화를 겪는다. 로버트는 사회화의 조건으로 합리적 판단, 철학·종교적 신념, 협력과 조화의 필요, 그리고 공감 능력을 든다. 사이코패스는 이들을 모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할 수 없다. 로버트는 이를 “내면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126쪽)”기 때문이라고 표현한다. 만약 우리가 사회화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라면 사이코패스들은 대대적인 ‘마녀사냥’의 여파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구별해내기 힘들다. 게다가 오히려 사이코패스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일탈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사이코패스가 일종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사이코패스는 개인의 특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회적 양상으로까지 보일 것이다.


  로버트는 정신분석학자 린드너가 1944년에 펴낸 <이유 없는 반항>의 구절을 소개하며 당시에도 사이코패스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이 사회적 문제였다고 말한다. 강산이 수차례도 더 변했을 지금에도 그 증상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한 영화가 나오면 비평가들은 영화의 재미를 분석하고, 정신분석학자들은 작중 인물을 실제 사례와 대비하여 진단하는데, 사실 대다수의 영화팬들은 그저 보고 즐긴다. 그것은 차라리 쾌감이다. 감정이입이 되기 힘든 그런 영화 속 인물들에게는 제 3자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잔상은 남겠지만 충격은 금방 잊힌다.


  영화 속의 사이코패스들이 그러한 것처럼 (물론 연출 때문에 가감한 것은 있겠지만 대체로 증언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거의 사실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그들은 범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수행할 수 있다. 로버트는 경찰들도 ‘정서적 플래시백 현상’, 즉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에 범인에게 총을 쏘고 난 후부터 심각한 고통을 겪는다고 말한다. 범인이 총에 맞는 충격적 상황이 계속 떠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들은 너무 태연해서 그들의 증언을 듣는 ‘오랜 경험으로 단련된 상담전문가(147쪽)’들마저 기겁하게 만든다. 150쪽에 나온 한 사이코패스의 증언은 그 장면을 상상하는 우리들의 속을 뒤집어놓기에 충분하다.


  이 쯤 되면 우리는 그들이 혹시 교화(敎化)될 수 있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하지만 전자에 대한 질문에 로버트는 긍정적인 답을 내놓지 않다. 한 여성은 35세에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았고 엄청난 전과기록을 갖고 있었다. 42세에 석방되자, 그녀는 바른 삶을 살았다. 심리학 학사증도 받고, 좋은 일들도 했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는 속임수와 거짓말에 능수능란하다. 그녀의 진심을 판독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녀가 그저 잠시 법에 위배되지 않는 삶을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게 된다. 그녀의 사례는 1970년대 미국사회를 가히 엄청난 충격에 빠뜨렸던 존 게이시와 꼭 닮았다.


  ‘화이트칼라 범죄’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사람을 녹여버릴 듯한 미소를 띠고, 믿음직한 목소리로 먹잇감에 접근하며, 목에 그 어떤 방울도 달고 있지 않(169쪽)”은. 점잖은 신사나 숙녀가 사이코패스라면 우리는 쉽게 믿을 수 없을 것이고, 이윽고 정신적 비탄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의 판단능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과 같다. 최근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멘붕(mental collapse, 물론 이런 영단어는 없다.)’을 유발한다. 그들의 수법과 언어사용, 혹은 발화(發話)시의 자세 등 로버트가 예로 든 특징들을 우리가 자세히 관찰한다고 해도 사실 사이코패스들은 우리의 약점은 잘 알고 있으니, 그들을 이길 방법은 거의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로버트로부터 두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을 듣진 못했다. 구별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은 그가 전문가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태도이지, 우리가 실제로 삶에 적용할 수 있다는 확신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이코패스가 왜 만들어지는지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생물학적 요인과 환경적 영향이 결합된(260쪽)” 것이 사이코패시적 태도와 행동이라고 결론짓지만 이는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 요인이 동시에 작용할 것이라는 흔한 추론이다.


  여하튼 이렇게 ‘형성’된, 혹은 ‘유발’된 사이코패스들은 심리치료로도 교화가 불가능하다. 그들은 스스로의 심리에 만족한다. 그런 이들은 치료될 수 없다. 혹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시늉(305쪽)에 지나지 않을 수가 있다. 이 책은 1993년에 처음 나왔고, 우리나라에는 2005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로버트는 사이코패스에 대한 과학적 진단과 치료가 부재한 상황을 개탄하면서 결국 우리 자신이 사이코패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며 책을 마무리한다. 방법들은 대개 피상적이다. 연구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이코패스, 아니, 우리가 흔히 ‘사이코’라 부르는 인물들에게 많은 관심이 쏟아지면서 사회 전반의 사이코패스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향상된 듯도 하다. 그래도 우리가 그것을 사회의 문제요인이라 인식하기에는 피해 사례가 지극히 개별적(동시다발적이고 광범위한 환경문제도 등한시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 않은가.)이라는 특징이 한계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두고 “피해가 더 많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범죄적 발언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이해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더 확고해질 필요가 있다. 로버트의 이 책은 ‘행동과학’과 심리학이라는 난해한 분야의 충격적 사례를 알기 쉽게 풀어 썼다는 점에서 사회에 큰 공헌을 한 저서라고 할 수 있다. 로버트의 말처럼 “연구는 계속되어야” 하며, 우리는 연구자들의 주장과 경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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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7-02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 첫 책이 사이코패스라니ㅜㅜ 엉엉ㅜㅜ
물론 저도 좋아하는? 관심있는 분야고 리뷰는 여전히 멋지지만요.

11선 좀 공개해봐요, 탕기님.(저는 왜 이런 게 궁금할까요?)

탕기 2012-07-03 08:26   좋아요 0 | URL
제가 오래 전부터 '광기'에 관심 있는 건 아이리님도 알고 계셨잖아요.ㅎㅎ

지금은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멜라니 킹)>을 읽고 있어요. (아이리님도 좋아할 만한 책!)
11선 중 나머지 8권은 오늘 책 도착하는데로 '바이북' 페이퍼 쓸 때 같이 소개할게요.^^
읽고 싶은 책 중에 반값 할인하는 것들이 의외로 많아서 마일리지 다 쏟아부었거든요.ㅎ
 
권태 - 그 창조적인 역사
피터 투이 지음, 이은경 옮김 / 미다스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2012.06.30

[2012년 여름방학 논픽션 11선 中 제 1권]


  8시 30분. 버스에 오른다. 나와 같은 학생들이 타고, 서로 비슷해 보이는 회사원들이 타고, 이따금 나이 지긋하신 분들도 타고, 버스는 자유로에 진입한다. 그 쯤 되면, 나는 이미 한 시간 이상을 버스에 있었으므로, 졸기 시작한다. 버스는 가양대교 북단 즈음에서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버스 안의 사람들은 가끔 미동만 할 뿐인 버스 속의 불편한 고요함을 말없이 견디기 시작한다. 견뎌야만 한다. 그렇게 30분 정도. 교통사고가 있는 날은 한 시간. 그래야 버스는 사람들을 내려주기 위해 합정역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내린다. 종점까지 15분은 더 가야 하는 나를 남겨두고 줄줄이 내린다. 그들이 앉은 자리에는 채 떠나지 못한 ‘그것’들이 등받이처럼 붙어 있다. 떨어지지 않은 ‘그것’들이 이따금 나를 노려보는 것도 같다. 나는 하품으로 응수한다. ‘그것’들에게는 하품이 최적의 무기라는 설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들이 하품을 만든다.


  매일 반복되는 레퍼토리는 그 버스를 보기만 해도 몸서리를 치도록 만든다. 뭔가를 너무 많이 먹은 느낌이다. 포만감이 극에 이르면 토가 나온다. 그래, 사르트르의 ‘구토’가 나온다. 바로 라르스 스벤젠의 “과잉에 의한” ‘그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권태’이다. 지루한 가뭄이다. 혹은 한 음만 반복되는 4분짜리 곡 12트랙의 앨범이다. 그러나 달은 차면 기울지 않던가. 자연의 이치가 ‘변화’에 있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는데, 왜 우리의 일상은 마치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구두 한 켤레처럼 그토록 ‘어김없는’ 것일까? 그 구두를 신고 우리는 현관문 바깥을 단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

  나는 이 노골적인 제목의 책을 펼쳐들 수밖에 없었다. 피터 투이의 <권태(Boredom)>이다.

 

 

*     *     *

 

  사람마다 다르겠다. 나는 ‘권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Olafur Arnalds이다. 그는 순전히 Sigur Ros와 Bjork 때문에 알게 된 아이슬란드의 뮤지션이다. 책상에 앉아 인문학 서적들을 탐독하노라면 나는 대체로, 의자에 걸터앉아 축 늘어진 베케트와 담배를 문 카뮈 사이의 어느 즈음 정도 되는 자세와 잔뜩 찌푸린 인상을 하곤 한다. 주제들이 가볍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별로 재미없는 사람인 나의 천성인 듯도 하다. Olafur의 음악은 그런 나에게 제격이다. <권태>를 읽을 때, 나는 그의 음악 를 수 백 번 반복해서 들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단조가 별다른 클라이맥스 없이 3분 5초 동안 계속된다.


  한창 미술공부에 열을 올릴 무렵에는 뒤러의 <멜랑콜리아 Ⅰ>에 빠져있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을 뜯어본 까닭은 당시 파노프스키의 <뒤러>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러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아는 사실이지만 작품 속 여인은 뒤러의 은유이고, 뒤러의 ‘권태’는 화가를 학자의 반열에 올려놓는 그의 도전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서 연유한 것이다. 나에게 이 역설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자신을 초상화 속 예수로까지 묘사했던 북유럽의 자존심이 느낀 권태. 권태는 참으로 인간적인 쇠사슬이 아닌가 말이다!) 그 작품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의 판화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성 에우스타키우스>(1501년경 동판화)이다. 동물 묘사의 극치라 여긴다. 어쨌든, 이제 미술 이야기는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권태는 늘 역사적인 주제였다. 가볍고 간헐적인 권태는 불현듯 일상의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충동을 일으킨다. 예술이 그곳에서 탄생한다. ‘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누군가가 진지하게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막연함. 그곳에서 철학이 시작된다. 권태는 우리가 표현하도록 하고, 우리가 생각하도록 한다. 그래서일까? 피터는 책의 부제를 “창조적인 역사(Lively History)”라고 달아뒀다.


  “모더니즘이 우리에게 권태를 줬다.” 이런 주장은 이제 식상하기까지 하다. 아, 이것도 일종의 권태인가? ‘명제에 대한 권태’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까. 고등학생들은 대학생 새내기가 되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교양과목, 즉 한 분야나 주제를 통시적으로 훑는 과목에서 거의 모든 교수들로부터 모더니즘의 특징을 (고등학생 때보다는 조금 더 심도 있게) 배우게 될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받아 적는다.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가 왜 권위와 전통, 혹은 절대적 진리들을 이따금 적대시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그 역(役)현상도 재미삼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모더니즘이 유발한 ‘시대적 권태’에서 도망칠 수 있는 비밀통로나 첩경 따위는 찾기 힘들다. 피터의 책에서 권태는 차라리 ‘사회적 권태’의 약칭이다. 멜랑콜리와의 차이라고 할까. 그러나 우리에게 둘의 경계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권태, 멜랑콜리, 우울함은 시각적으로 같은 모습이다.(59쪽)
  그것은 강렬하지만 너비와 높이를 알 수 없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카뮈의 <이방인(L'Etranger)>을 읽다 돌연 손가락으로 방아쇠 당기는 흉내 내본 이라면 안다. 방아쇠를 당기려면 이것만 하면 된다. 입을 크게 벌리고, 별로 시원하지 않은 하품을 하는 것 말이다. 가져다 대면 살이 순식간에 익어버릴 정도의 고열을 방출하며 총탄이 총구로부터 음속에 필적하는 속도로 날아간다. 그래도 지루하다면 팔꿈치로 턱을 괴면 된다. 이 행동들의 순서를 뒤죽박죽 바꿔놔도 별 상관은 없다.


  바이런의 말이 맞다. 권태는 “잠으로도 가시게 할 수 없는 지독한 하품(57쪽)”이다. 무료한 우리의 일상에 드라마 같은 스토리는 없지 않은가. 혹 그런 까닭에, 결말이 훤히 보이는 드라마, 예컨대 남자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주인공이 사실 남자주인공의 배다른 동생이었다던가, 여자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렸는데 남자주인공이 목숨을 담보로 장기기증을 해서 살아난다던가, 대충 그런 드라마들을 보는 것은 아닐까. 막장드라마들도 시청률은 대체로 높다.


  피터는 의학에서 심리학에 이르는 여러 이론들을 문학과 미술 등의 다채로운 사례로 입증하거나, 혹은 이론이 문학과 미술을 뒷받침하는 방법으로 글을 엮어간다. 하지만 권태에 대한 그 특유의 (그는 서문의 마무리에 “고백하건대 나 역시 살면서 권태를 자주 느꼈다.”고 썼다.) 낭만적인 시각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읽는 이들은 아마 수시로 독서를 멈추게 될 것이다. 공감 때문이다. 권태는 그 정체가 애매모호한데도 이상하리만치 공감되는 무엇이다. 그렇다고 호들갑떨면서 무릎을 치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게 된다.


  그러나 그 정도의 권태면 다행이다. <권태>의 2장에 실려 있는 소위 ‘만성적 권태’는 위험하다. 이 권태가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면 ‘환자’가 된다. 사람의 성격유형을 구분하는 여러 유명한 이론들이 있다. 심리테스트 좋아하는 현대인들 중 몇몇은 그런 복잡한 이론들을 자신에게 실제 적용하기 위해 비싼 돈 주고 전문가에게 검사를 의뢰하기도 한다. 그들은 유형검사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는 자신의 성격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은 서로 다르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심각한 수준의 권태 ‘환자’들도 있다.


  만성적 권태가 해당 환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의학적 근거는 도파민 수치이다. 도파민은 소위 ‘짜릿함’을 느끼게 해주는 신경전달물질. 그것이 평소 낮은 사람들, 즉 늘 권태로운 사람들은 자극을 찾게 된다. 여기서 ‘자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권태와 분노의 상관관계도 이러한 맥락에서 언급된다. 여행도 자극이 될 수 있다. 이를 ‘배회증(흔히 말하는 방랑벽)’이라 부른다. 하지만 다행이도 만성적 권태는 대체로 가볍다.


  다음 장에서 피터는 동물과 권태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다. 동물을 여전히 하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일부 ‘인간중심주의자’가 아니라면 동물 중 일부 종이 권태를 느낄 수 있다는 의학적 주장을 별다른 근거 없이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반려동물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동물도 권태를 느낀다는 것을 경험으로 입증할 수 있다. 우리 집 강아지 중 하나는 집에 아무도 없으면 간혹 자신의 대변을 먹는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강아지 하나는 소변을 머리에 묻히곤 했다. (우리 가족은 그녀의 바짝 세워진 털을 보고 ‘베컴 머리(닭벼슬 머리)’라고 불렀다.) 이는 한 박사의 관찰(125쪽)과 꼭 닮았다. 격리와 감금은 동물에게 공포, 동요, 또는 우울을 유발한다. 이에 대해 설명을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단 동물의 경우만 그러할까. 감옥, 그것이 실제 감옥이든 은유의 대상이든 상관없이, 그것은 우리를 철창 속의 새처럼 만든다. 새는 날아야 한다. 본능이다. 우리는 박탈된 권리로부터 권태를 느끼게 된다. 영화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 1994)>에서 앤디(팀 로빈스氏)는 지루한 감옥생활을 잊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한 일은 교도소 주변의 돌을 모아 체스 말을 만드는 것이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는 살을 에는 추운 겨울에도 수용소 안에서 무언가를 부지런히 하는 죄수들이 그려져 있다. 카뮈의 <이방인>에도 방 안의 모든 물건들, 그리고 그 물건들의 흠집까지 기억해내는 방법으로 (카뮈의 표현대로라면) ‘추억거리’를 만들어 권태에서 벗어난다는 구절이 있다.


  고행자들에게는 권태가 피하지 못할, 넘지 못할, 막지 못할, 대체로 그런 존재로 다가왔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고행자들에게 그것은 악마였을 것이다. 피터는 에바그리우스(초기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사상가로, 이집트 사람이고, 흔히 ‘폰티쿠스’라고 부른다.)의 ‘한낮의 악마’, 즉 아케디아를 그 예로 든다. 그것은 실존적 권태이다. 거듭 예로 들게 되는데 <이방인>의 뫼르소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를 이해하긴 힘들어도 우리의 대부분은, 심리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많든 적든 (우리들의 대부분이 더 이상 권태를 종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한다면) 뫼르소적”이다. 원색적 욕망만을 탐닉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일말의 침묵은 있지 않은가. 여지없이 권태가 침투할 수 있는 시간. 나는 얼마 전 두 편의 레포트를 한꺼번에 마무리하느라 심각한 권태를 느꼈다. 뒤러가 <멜랑콜리아 Ⅰ>으로 호소한 ‘지성인의 권태’에 조금이나마 근접했던 때였다.


  실존이 권태로부터 위협을 받는다면, 아니, 당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그것은 차라리 ‘공격’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나’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카프카의 <변신>에서처럼 그 해괴망측한 상황에 빠진다면 차라리 결정된 상황 속에서 뭔가 해결책을 찾고자 머리를 쥐어짤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그런 상황은 애당초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편안한 상상을 할 것이다. 우리의 혐오는 ‘있을 법한 것에 기초’를 둔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그로테스크는 리얼리즘에 기초한다.) 그러나 장자(莊子)의 한 마디처럼 우리가 경계를 잃게 되면, 그리하여 “나는 <변신> 속의 해충이고, <변신> 속의 해충은 나”가 된다면 우리는 그 ‘환각’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혹은 호퍼의 <바다 옆의 방>(1951년 유화)처럼 그 모든 것이 단조롭기만 하다면 우리는 그 답답함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 피터는 실존적 권태를 “키메라 같은 존재(182쪽)”라고 묘사했다. 우리에게는 실제로 여러 개의 머리가 있다. 그런데 실존적 권태는 “정서도 아니고 느낌도 아니(189쪽)”다. 그렇다면 우리의 ‘여러 개의 머리’는 아주 거추장스러운 무엇이 된다. 무슨 쓸모가 있을까? 우리는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잉여가 된다.


  5장은 권태의 역사에 관한 공간이다. 그리스인들이 두려움을 신중함으로 여겼다면, 그리고 로마인들이 그것을 타인에 대한 지배와 연관 지었다면(201쪽), 권태도 시대마다 달랐을 것이다. 18세기부터 차곡차곡 누적된 근대의 산물들 속에 권태를 집어넣는 학자들의 의견도 있다. 우리가 ‘권태’하면 떠올리는 감정이 ‘권태’라는 언어 자체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므로 ‘boredom’이라는 명사가 처음 등장한 때가 1864년이라 권태의 시작은 엄밀히 말해 그 때부터일 수도 있겠다. (물론 그 이전에도 boredom에 충분히 상응할 수 있는 표현들이 있었을 것이다. 가령 “머리가 멍해진다.(209쪽)”라든지.)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가 느끼는 권태의 조건은 현대사회의 세속화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권태는 20세기에 들어서서 더욱 병적인 것으로 변화한 것일 수도 있겠다. 권태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호주 원주민들에 대한 사례(212쪽)도 있다. 문자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우리와는 다르게 사고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오늘날 보통의 이해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으므로 가깝게 와 닿지는 못한다.


  6장은 “어떻게 하면 권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얻고자 이 책을 펼쳐든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줄 수 있는 공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피터가 들려주는 것들은 그들도 이미 알고 있는 답이다. 다양한 활동을 하고, 음악을 듣고, 여가시간은 실용이나 도덕과는 무관하게 보내야 한다. 잔뜩 긴장한 몸을 쭉 이완시키는 것처럼. 이 모든 답들이 이 책에서는 의학적 근거들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한편, 극복할 만한 권태는 우리에게 (이 책의 부제처럼) 창조의 통로로 이어지는 놀라운 문이 되기도 한다. 브로드스키는 권태가 진정한 ‘나’를 만든다고 했다(252쪽). 그러나 이 모든 설명들을 아울러, 사실 길지 않은 책이긴 하지만, 피터가 하고자 하는 말은 맨 마지막 한 문장에서 집약된다. 이것이 명제이다.
  “권태는 그저 하나의 권태로운 경험일 뿐이다.(257쪽)

 

 

*     *     *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그 왼편 차창들 밖으로 노을 질 무렵의 한강이 황금빛처럼 빛난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다. Olafur Arnalds의 잔잔한 를 듣기 위해 음량을 되도록 크게 올려놓고.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하루의 고단함을 등받이에 이리저리 묻혀가며 졸고 있다. 아니, 잠을 쫓고 있다. 나처럼 종점에서 종점으로 오가는 사람이 아닌 경우라면 잠은 ‘버스타기’의 최대 적이니까. 그의 혈투가 못내 안쓰럽다. 차라리 “내리는 곳 알려주시면 제가 깨워드릴게요.”라고 말을 건네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하지 못한다. 잠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집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더 걸리니, 선잠 잘 시간은 충분하다. 의식이 몽롱해지다 결국 나는 차창으로 머리를 살짝 가져다댄다. 온몸이 차창으로부터, 의자로부터, 바닥으로부터 튀어 올라도, 나는 참 잘 잔다. 하나의 권태로운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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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테러 - 9.11 이후 종교와 폭력에 관한 성찰
브루스 링컨 지음, 김윤성 옮김 / 돌베개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2012.06.27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유난히 까무잡잡한 친구를 ‘오사마’나 ‘빈 라덴’이라 부르고 다녔던 때가 있었다. 학교 수업 시간에도 덩치 큰 TV 앞에 삼삼오오 모여서 뉴스 속보를 봤었다. 다음 날 학교를 가야 하는데, 아버지와 함께 새벽 4시가 넘도록 ‘Breaking News’를 보다가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리던 거대한 두 채의 빌딩을 보면서 등골이 오싹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중 3이었다. 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 우리나라 63빌딩도 무너질 것이라, 미국이 패망할 것이라고 나돌던, 일명 “카더라.” 통신의 소문들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것도 일어나지도, 무너지지도, 패망하지도 않았다. 대학생이 되어 그나마 책과 강의를 통해 알게 된 (그것도 겨우 곁가지를 잡는 수준이겠지만) 서구 對 아랍의 대결은 그 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이슬람의 연이은 혁명들도 이슬람 스스로의 민주화를 위한 것이다. 그보다 앞서 명을 달리한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인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주기도, 한편으로는 또 다른 테러의 공포를 줬다. 미국은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이냐를 두고 對 이슬람 정책의 향방에 주목하고 있다. (롬니는 전형적인 우파. 이스라엘의 지지를 명백히 드러낸다. 그가 당선된다면 이슬람과의 대치는 심화될 것이다. 반면, 오바마는 아랍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등 중동 관계에 있어 개방적이다. 또한 종교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견지한다. 아마 젊은 시절 체험한 인문주의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최근 나는 찰스 타운센드의 <테러리즘, 누군가의 해방 투쟁(한겨레출판)>을 읽고 있다. 때문에 9.11을 두고 ‘테러’가 아닌 ‘사건’이라 부르고자 한다. ‘종교, 폭력, 평화’라는 강의를 통해 내게 종교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눈이 무엇인지 알려주신 김명희 교수께서도 9.11을 두고 '테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서구적이다.”고 말씀하셨다. (이를 두고 反美라고 하면 곤란하다.) 브루스 링컨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책 <거룩한 테러>의 부제도 “9.11 이후 종교와 폭력에 대한 성찰”이다. 역자 김윤성氏도 ‘9.11 공격’이라는 표현을 쓴다.


  종교갈등이나 종교현상에 관해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이 책의 특징으로 아주 중요한 것을 또 하나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브루스는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특징을 모아 보면 <거룩한 테러>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엘리아데에게서 지도를 받은 브루스가 9.11 사건을 상징체계들의 충돌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9.11 사건을 음모론으로만 흔히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알려주는 또 다른 의미는 현재 서구 대 아랍의 대치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들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는 여러 종교들의 갈등 양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

 

 

*   *   *

 

 

  학문적 분석으로 시작하는 초반부(서문도 상당히 중요하다.)에서 브루스는 종교를 담론, 실천, 공동체, 그리고 제도로 나눠 생각한다. 그것을 통해 모하메드 아타(‘모하메드 엘아미르 아와드 엘사예드’라고도 불린다. 9.11 사건 당시 비행기에서 공격을 주도한 인물이다.)의 지령서를 분석하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소위 ‘테러리스트’들은 미국을 공격하는데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무기를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 브루스는 이를 “미국의 기술적 우위를 의문”에 부치는 상징으로 봤고, 찰스 타운센드는 그의 (앞서 언급한) <테러리즘, 누군가의 해방 투쟁>을 통해 그것이 테러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테러는 전쟁과는 달리 물리에 호소하는 바보다는 심리에 호소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분명 담론의 힘이다. 모하메드 아타의 지령서 배후에는 ‘쿠란의 담론’이 있다. 이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초기 이슬람 시대에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자힐리야(‘무지(無知)’라는 뜻으로, 알라를 따르지 않는 시대를 의미한다.)와 대립되었던 것과, 9.11 사건의 오늘날에 알카에다를 비롯한 여러 반미 계열의 과격 이슬람 무장단체들과 일부 이슬람주의자(이는 브루스의 용어이고, 우리에게 친숙한 용어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이다.)들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의 자힐리야’와 대립하고 있는 유사한 구도를 도출할 수 있다.


  9.11 사건의 물리적 힘이 아주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TV 모니터나 컴퓨터 스크린으로 수도 없이 봤고(혹은 노출되었고), 기회가 될 때마다 상기할 수 있는 그 시각적 충격은 기본적으로는 물리적 힘에서 나왔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충격은 대치하고 있는 나라의 당사자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브루스의 용어대로라면 ‘기호 가치(sign value)’로 여겨지지 않을 확률이 크다. 9.11 사건의 위협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가해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극소수의 음모론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 위협은 없었다. (일부 사람들은 우리나라 개신교의 무리한 아랍 선교로 몇 차례의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이 9.11 사건과 관련된 보복이라고 생각하나, 사실 테러와는 상관이 없는 사건들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9.11 사건의 기호가치적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브루스가 2장을 통틀어 비교한 부시와 빈 라덴의 연설 차이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종교는 자타(自他)의 구분을 통해 (그들)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의 생산과 권력 간 카르텔 형성은 거의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은 지하드(聖戰)의 개념(실제 ‘지하드’의 개념은 여러 층위로 이뤄져 있는데, 여기서는 ‘칼의 지하드’를, 즉 ‘정벌’ 개념의 지하드를 의미한다.)을 통해 이슬람 방식의 ‘평화의 세계’를 이룩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슬람만의 사정이 아니다. 십자군 전쟁은 그리스도교의 세계를 만들고자 한 시도였고,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들은 모더니즘을 기반으로 한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그들의 문명을 전 세계에 심어주고자 했다.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가 그러한 성격의 폭주기관차이기도 하다.


  흔히 기독교를 일컬어 ‘역사의 종교’라 말한다. 역사적인 종교라는 뜻이 아니라, 역사를 종교로 해석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는 종교라는 뜻이다. 가령 심각한 가뭄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그들의 신심이 약해졌거나, 종교적으로 비도덕적인 일을 일삼았거나, 혹은 십계명을 지키기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소위 “유치한 생각”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다. 오늘날 개신교가 주요 종교인 미국에서는 9.11 사건을 위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7~80년대 TV 선교를 통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던 팔웰 같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사용한 방식이 바로 저러한 해석 체계였다. 브루스도 그것을 분석틀에 넣어 살펴본다.

 

  만약 종교로 작금의 고난이나, 혹은 일부 ‘승리’라 일컬어지는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종교의 영향력이 강력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표현이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영향력과 관련해서 브루스는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하나의 장(章)을 할애한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가 이 장에서 제시하는 개념은 최소주의-최대주의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최소주의와 최대주의의 개념 정리가 아니다. 바로 후기식민사회에서 최소주의가 어떻게 적용되는가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서구 열강들은 최소주의(이것을 신자유주의와 이음동의어도 봐도 큰 무리가 없다. 그것은 시장이 지배하는 세계이다.)를 통해 소위 ‘근대화’나 ‘서구화’와 같은 가치들을 해당 사회에 심어준다. 브루스의 표현대로 그것은 곧 번영과 성취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반대적 경향들이 그 사회를 움직이게 한다. “미적 취향과 윤리적 선호가 여전히 종교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 사회에 있는 경우, 가령 이슬람의 교세가 매우 강한 지역을 우리는 예로 들 수 있을 것인데, 그 안에서는 종교적인 권위로부터 내적인 응집력을 요구받으며, 사람들은 기꺼이 그러한 요구를 수행할 자세와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 일부 유대교나 이슬람교 지역에서 맥도날드를 안 먹고, 메이저리그를 보지 않는 관행은 이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세속화에 대한 저항의 이데올로기는 사실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하나의 신화에 가깝기도 하다. (아마 이 점에서 브루스가 연구의 매력을 느끼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보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우리에게 물론 ‘신화’는 있다. 역사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영광의 시대’ 즈음으로 생각해본다면 정벌과 승전(勝戰)의 상징들인 역대 왕, 혹은 장군들의 이름이 군함에 붙여져 있는 것을 금방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시대적 저항을 상기시키진 못한다. 근대 이후 식민화의 과정에 저항을 했던 대표적 종교인 천도교가 북한에서는 제 1종교로 대접을 받으나, 우리나라에서는 4대 종단 안에도 들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세속화의 진행과 정도가 어느 수준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기제들이 있다면 그것은 ‘한민족’이라는 민족주의적 정서일 것이다. 그나마 있는 그 정서도 오늘날에는 점차 옅어지고 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브루스의 사례들에 ‘식민지 시대’를 겪은 우리나라가 포함되지 않는 것에서 우리나라 특유의 다종교성 풍토를 대비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마지막 장에서 브루스는 ‘현상 유지 종교’와 ‘저항 종교’들의 양상을 살펴본다. ‘유지와 저항’에서 보더라도 그는 긴 논의의 마무리로 종교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앞서 저항의 이데올로기로 종교가 작용하는 것과 맞물려 있고, 제목 <거룩한 테러>에도 잘 어울린다. 그는 갈등주의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채택하여 종교의 저항운동들을 분석하고, 그것이 혁명운동과 반혁명운동(이는 17세기 서구의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으로 살펴볼 수 있다.)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살펴본다. 사례들을 일일이 기억할 필요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190쪽의 한 구절이다.


  “역설적이게도, 성공이나 실패 어떤 쪽도 혁명 종교에게 종말을 고한다. 봉기에 실패하면, 혁명 종교는 다시 저항 종교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아예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반대로 성공하면, 혁명 종교는 권력 장악에 도움을 준 집단에게 봉사하는 새로운 현상 유지 종교가 된다.


  회의론자들은 종교의 한계로 위의 메커니즘을 든다. (물론 그들이 드는 한계란 종교의 신이 제각각 다르고, 배타적이며, 때론 지나치게 권위적일 뿐만 아니라, 무모하기까지 하다는 각종 비난을 아우르기도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봤을 때, 이 표현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때론 개인적 편견을 위한 관례적 근거일 때가 있다.) 결국 이익 싸움이라는 것이다. 브루스의 분석에 따르면, 그리고 수많은 종교사회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는 결과가 바뀌지 않을 진단인 것처럼도 보인다. 종교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들에는 여러 비판이 붙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개인의 삶을 고양시키는 정도가 전부인지도 모른다. (이를 피터 버거는 ‘종교의 사사화’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외려 종교가 강화되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고, 그것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현상에 직면해 있다.


  이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근본주의’와 분리주의에 종교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경우라고 해서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다는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종교의 객관적 분석과 현상의 판단은 그 때문에 더욱 요구된다. 비록 우리가 브루스의 책에 오를 정도의 심각한 갈등을 겪진 않았지만 종파 간 갈등이 산재해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문제를 풀기 위해 거울로 삼아야 할 사례들을 전 세계를 대상으로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깊이 배울 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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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6

 

#. 다음 주는 시험기간이다. 지난 목요일에 마지막 발표가 끝났고, 어제부터 본격적인 시험대비를 시작했다. 매번 그렇듯 나는 시험을 곧잘 보는 편이 아니라, 절박하진 않다. 이번 학기도 프레젠테이션과 레포트에 많은 신경을 썼다. 미술 블로그를 2년 정도 할 때에도 그랬었던 것처럼 내가 준비한 것들을 남들이 어떻게 봐주던 나는 늘 결과에 대해 인색하다. 올해의 절반, 그 기간동안 많은 걸 갖췄다. 지식은 잊히겠지만, 단련된 습관은 더 나아질 기반이 될 것이다. 그간 적어뒀던 순간의 깨달음들과 좋은 습관들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 않길 바란다. 항상 자신을 경계하며 사는 어른이 드물듯,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의 풍경을 잊으면 안 되는 법일 것이다. 이번 학기 귀감이 되었던 것들을 마음 속으로 혼자 복기해본다.

 

#. CPA 준비하는 동기 중 한 명과 잠시 시간을 내서 한가롭게 음료를 마시던 오후였다. 그는 나에게 경영학 수업을 들으라 권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답 없는 인문학 수업보다 훨씬 쉽다는 것이다. 경영학 수업은 반대로 답이 있다더라. 나는 숫자놀이를 고등학교 이후 한 번도 안 해봤다며 손을 저었지만 속으로는 제법 솔깃했다. '답'이라. 구구절절한 서술 없이 답안지에 몇 글자로 '똑' 떨어지게 쓸 수 있는 답. 그러고 보니, 여러 인문학 강의를 들었는데, 지금껏 속시원한 결론으로 마무리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인문학은 돌아가는 길이다. 어떨 때에는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를 때도 많다.


  신화학, 철학, 종교학, 국문학, 심리학. 곁가지로 알게 된 것들은 참 많다. 독학한 미술도 그러하다. 얕게 안다면야 TV의 퀴즈 프로그램에 나오는 단답들처럼 상식으로 알게 되는 것들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교수가 읽으라는 텍스트들을 접하는 순간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학사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우리가 알게 된 것들에게는 수많은 설(設)들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 순간 갖게 되는 회의란! 그런 까닭에 차라리 문제를 풀어 답을 낼 수 있는 수학이나 물리학 등을 동경해본 적이 아주 없진 않다. 내가 우주과학을 동경하는 까닭도 어쩌면 그와 닿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우주과학자들은 철학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지금껏 나는 '인간'을 배우고 있다. 인문사회와 사회과학 사이의 엄청난 차이는 둘을 포함한 교양과목 하나만 들어도 바로 알 수 있다. 아니면 후자의 학자가 전자의 현상을 설명한 책을 읽어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류의 책은 보통 전자의 학자들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으니까. 리프킨이 <엔트로피>를 냈다가 과학자들에게 비판 받은 건 반대의 경우라 하겠다. 차라리 인간은 문학의 낭만적 문구로 표현되는 편이 나은 존재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인문학에는 답이 없다."는 하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지식은 믿음을 준다. 그것은 일정 부분 종교와 유사하다. 배운 것들 중 잊히지 않고 남아 행동과 믿음에 영향을 주는 것이 있다면 그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답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여러 인문학을 공부했고, 바쁜 생활 중에서도 탐닉하는 사람이라면 "답은 없다.", 일종의 포스트모던한 '진리 아닌 진리'를 마음 속에 품고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에게 있어 그 포스트모던한 '진리'를 준 것은 다름 아닌 인문학이다. 그 진리가 그에게는 지배집단이자, 절대다수이며, 또한 나름의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대표가 되는 셈이다. 포스트모던인데도 말이다!

 

#. "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뜻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삶이 달라지듯, 인문학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해석 방식으로 달리 보일 수 있다. 싫은 것은 내칠 수 있고, 좋은 것은 서랍 속에 넣어뒀다가 기분 내킬 때마다 꺼내볼 수도 있다. 인문학이 어려운 까닭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나'에게 맞게, 자율적으로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에는 스토리도 없고, 문제지도 없으며, 어떨 때에는 아예 이미지조차 없다. 그런 종류의 게임이라면 아마 게임 매니악(혹은 오타쿠)이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르신들의 말씀처럼 삶은 흥행여부를 통해 결정되지 않는다. 얕은 지식과 피 마르지 않은 머리로 지금까지 내가 인문학에 대해 판단한 것이 있다면, 적어도 이런 것들이다. 나는 그 날 동기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큰 갈등을 했었다. 지나고 보니, 그건 괜한 갈등이었더라.

 

 

 

 

 

 

 

 

 

 

 

 

 

 

 

 

 

 

 

#. 시험이 끝난 다음 주에 레포트 두 개를 과(科)사무실에 제출하면 나도 드디어 방학이다. 이번 계절학기에는 전공 과목들을 보충하려고 했는데, 개설된 과목이 하나도 없어 패스하기로 했다. 야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니, 나에게 주어진 긴 시간이 마치 남창(南倉), 북창(北倉)에 가득한 노적들처럼 풍성하게 다가온다. 읽을 책, 할 공부, 다닐 전시회들을 김칫국 마시듯 계획해봤는데, 마음 속부터 북 받치는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 중 내친 김에 오늘 4권의 책을 주문했다. 주문해놓고 보니, 지난 학기부터 얼마간 관심을 가졌던 '종교', '폭력', '테러' 등으로 주제가 갈무리된다. <성배와 칼>이나 엘리아데 시리즈를 사려고 했는데, 금값이라 포기했고, 마침 <축의 시대>가 반값 할인이라 주저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다. 나머지 세 권은 누차 사고 싶었다고 말한 그 책들이다. 이번 방학의 초두에는 파농을 한 번 읽어볼 생각이다. 다행이 "방학이다!"며 들뜨진 않을 듯하다.

 

 

 

 

 

 

 

 

 

 

 

 

 

 

 

 

 

 

 

#. 시공사 인문서평단에서 이번 달에만 책 두 권을 보내줬다. 하나는 <궁녀>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전기>이다. <궁녀>는 무척 생소한 책이다. 우리나라 역사, 그 중에서도 미시사라 할 수 있는 영역을 다룬 책은 단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다. 식단을 교정할 만한 책이 될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예루살렘 전기>는 약 1년 간 계속 종교를 교양과목으로 듣는 내게 적합한 책이다. 그러고 보니, 종교와 관련된 두꺼운 책들(저 책은 무려 700페이지가 넘는다!)이 계속 서재에 들어서고 있다. 가톨릭에 적을 두고 있지만 냉담자인 내게 이러한 책들이 타 종교에 대한 넓은 시각을 주고, 종교를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게끔 도움을 준다는 것은 정말 근사한 일이다.

 

#. 이제 그만 글 쓰고, 시험공부를 해야겠다. 어릴 적, 멸치를 유난히 싫어 했던 내게 어머니께서 늘 하셨던 말씀, "편식하면 못 써!" 마음에 없는 공부라고 소홀히 하면 못 쓴다. 이렇게 말해놓고도, 늘 벼르기만 하는 형국이니, 나는 참 철이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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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6-20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험 잘 봤어요? 방학 했어요? 그렇잖아도 사촌동생이 오늘 보고서와 시험을 모두 끝내고 부산 집으로 내려온다고 했는데(!) 탕기님 보니까 상기되었어요. 만나서 놀아야지ㅋㅋㅋ

시험 잘 보고 얼른 책 많이 읽어서 서재 와요, 와!!

탕기 2012-06-27 07:48   좋아요 0 | URL
저도 드디어 방학입니다.^^
이제 천천히 책 읽으면서 학기 중에 힐끗힐끗 거렸던 책들도 정리해봐야 겠어요.
이것저것 막 주문은 해놨는데, 방학했다고 살짝 늘어지기 시작하네요.ㅎ
이번 주 중에는 탱자탱자 놀다가 조금씩 컨디션 끌어올리려구요. 아이리님도 자주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