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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2011.11.25
드러나지 않은 세계는 많다. 인터넷만 해도 그러하다. 우리가 아는 인터넷 세상은 빙산의 일각이다. 바다 속에는 ‘악마’가 살고 있다. 세계의 주요 포털사이트에서는 검색되지 않는 이른바 ‘딥웹(Deep-web)’이라는 세계에는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추잡스럽고 혐오스러우며, 아마 에코도 <추의 역사>에서 결코 다루고 싶지 않아했을 기괴한 사상과 이미지들이 펼쳐져 있다고 한다. “나는 인간을 과연 얼마나 잘 아는가?” 어떻게 사람이 그런(악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봤을 때, 우리는 대개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 도덕과 광기 사이를 우윳빛의 얇은 장막 하나가 위태롭게 가리고 있다. 사라마구는 <눈먼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cegueira)>로 우리의 인간성을 실험한다. 많은 이들이 이 픽션을 두고 인간성을 옹호하는 편과 주제 사라마구의 설정에 고개를 끄덕이는 편으로 나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크게 주목받은 시기는 2008년 이 소설이 영화로 개봉했을 때였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가타부타를 따질 논제가 아니다. 세계의 곳곳에서 이것이야말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추악한 미시(微示)의 역사가 진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 진정성을 갖고 그것들을 상기해 도덕을 각성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큰 충격을 줘야 했고, 되도록 ‘사실’에 가까워야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두려움을 준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시작장애인 체험을 한 적이 있었다. 체험이라고 해봤자 서로 웃고, 떠들고, 복도에서 넘어지고, 얘가 쟤를 밀었네 하며 싸우는 것이 전부였지만. 전체 감각의 대략 8할을 시각에 의존한다는 인간에게 있어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단순한 지각이 아니라, 더 나아가 “안다.”, 그리고 “믿는다.”로 이어지며, 특히 후자의 경우는 생존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중대한 판단으로 이어진다. 더군다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처음으로 시각을 잃은 서른여덟의 남성에게는 뭔가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윳빛 장막만이 보일 뿐이다.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감각적 현상이 그에게 준 공포는 차라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보다 훨씬 강하다. 환한 백색 상태가 그를 “삼켜버리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사라마구의 표현처럼 “이상한 영역”이 된다.
‘확인 불가능’의 모든 낯선 영역에 대해 남자는 히스테리를 부리게 되는데, 불신에서 비롯된 피해망상으로부터 서서히 시작되는 거의 모든 반응들은 그의 주변 사람들마저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이 기괴한 증상이 하나 둘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확인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나도 걸리면 어쩌지?”라는 사회적 공포가 퍼지게 된다. 사라마구가 의사의 심리를 묘사한 부분은 독자들의 숨통을 옭아맨다. 그는 어제 서른여덟 살의, 눈앞이 우윳빛처럼 환한 증상을 보이는, 그리하여 신경증을 부린 남성의 증상이 자신에게 옮아진 것에 대해서 공포를 느낀다. 아내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녀를 거칠게 밀어내며, “저리 가,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 당신도 나한테 옮을지 몰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보건부에 연락을 하나, 대부분의 픽션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본래 중대한 일은 중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윗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법이다. 의사의 직감은 진실이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이,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위력을 갖고 있을까? 하지만 의사의 걱정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상급 부처에서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의사는 격리조치 된다. 그 때, 아내가 뛰어나와 “방금 나도 눈이 멀었거든요.”라며 동행을 요구한다. 여기서 독자들은 최초의 희망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용기는 고통을 가져왔다. 앞으로 펼쳐질 역한 광경과 사람에 대한 불신, 그리고 고립감 때문에 그녀는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자신 역시 눈이 멀기를” 바란다.
격리된 병실은 “공기 자체가 무거워져, 강하고 잘 사라지지 않는 악취를 내뿜고 있는 것” 같았고, “공기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상황이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행동이라고 해도 끔찍한 악취와 별반 다르지 않다. 최악의 순간에서도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방관이 일어나고, 강간이 일어나고, 권위에 대한 쓸모없는 저항이 일어나며, 질서를 세우자는 이들과 “네가 무슨 상관이냐!”며 화를 내는 사람들이 싸운다. 어떤 것 하나 도움이 되지 않는데, 문제는 그들이 “눈을 뜰 수 없을 것이다.”라는 불확실한 상태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뒤, 거의 바닥에 가까운 회의와 절망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식량문제와 위생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병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의사의 아내는 고군분투한다.
도덕과 위선과 위법이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고, 할퀴고 싸우는 곳에서는 도덕도 잔인해진다. 첫 번째 사람이 격리소의 병사가 쏜 총에 맞아 죽은 뒤, 사람들은 훨씬 강해져야 한다고 다독이거나, 혹은 더 예민해졌다.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의사의 아내는 남자의 시신을 묻기 위해 삽을 가지러 병동을 빠져 나온다. 그런 그녀에게 삽의 위치를 에둘러 말하는 병사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녀를 보면서 쾌감을 느낀다. 화가 난 그녀는 삽을 금방 짚더니 들어가 버린다. 병사가 놀라며 웃는다. 상사는 원래 “맹인들은 길 찾는 방법을 금방 배우는 법이야.”라며 자신 있게 설명한다. (영화에서 그녀는 병사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린다. 악랄함에 대한 경고이다.)
“우리는 결국 공포 때문에 미쳐버릴 거야.”라고 의사는 생각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눈먼 깡패’들이 식량조달을 독점하면서 각 병실의 여인들을 ‘바치지’ 않으면 식량을 주지 않겠다는 엄포를 내린다. 엄포는 총성 한 방이면 충분했다. 남자들 중에는 “뭐하느냐? 희생하면 되지 않느냐?”는 이도 있고, “나의 아내는 보낼 수 없다.”는 이도 있었으며, 여자들 중에는 “나는 갈 수 없다.”는 이, 그리고 “내가 가서 식량을 가져오겠다.”는 이도 있었다. 여기서 사라마구는 남성의 추악함 앞에서 여성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보여준다. 병동에서 일어난 일 중 가장 구역질나는 이 ‘사건’이 병동의 역한 공기를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그러나 ‘눈먼 깡패’들이 한 여인을 죽이자, 의사의 아내는 ‘반란’을 도모한다. 모든 죄악들이 불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의사의 아내가 도와준 이들은 무사히 병동을 빠져나온다. 그런데 바깥을 지키고 있어야 할 군인들은 없고, 철문이 소리를 내며 열린다.
그들은 이제 해방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낳은 상황에서 탈출해 그들은 “보이지 않는 중”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병동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제각각 무리를 나눠 도시를 방황한다. 거처를 찾은 이들도, 거리에서 죽은 이들도 있다. 의사의 아내는 자신의 집으로 몇몇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눈이 먼 뒤 처음으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식량’이 아닌 밥을 먹는다. 한 사람씩 눈을 뜨고, “한 명만 더 있으면 눈이 보이는 사람이 다수가 되는” 상황 앞에서 그들은 행복과 희망을 느낀다. 그리고 서서히 사람들이, 그녀의 집에 있던 사람들 말고도 거리 도처에 있던 사람들이 “눈이 보여, 눈이 보여!”라고 소리치는 장면 속에서 그녀가 조용히 창가로 걸어간다. “이제 내 차례구나.”라고 그녀는 체념한 듯 거리의 기쁨을 바라본다. 하지만 사라마구는 비극이 이어지길 원치 않았다.
다음 날,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도시는 다시 세우면 되고, 밭은 다시 일구면 된다. 그러나 마음은 어떻게 됐을까? 한 차례의 죄악이 휩쓸고 지나간 곳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더 현명해졌을까? 사람 사이의 관계는 소원해졌을까, 아니면 더욱 돈독해졌을까? 이 세상이 통째로 들려 절망의 웅덩이에 푹 담겨져 있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절망의 빛깔을 얼마나 많이 씻어낼 수 있을까? 자신만 볼 수 있다는 잔혹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본 의사의 아내는, 아니 독자들은 인간에 대해서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인간은 수많은 거장들의 손을 거쳐 도덕의 심판대에 오르곤 했다. 하지만 사라마구의 설정은 끔찍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전쟁보다 더 극한으로 인간을 집어넣는다. 그곳에서 바라본 “원래의 자리”는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는, 백척간두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라마구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녀는 눈이 멀지 않는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