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07

 

  군생활 중에 나는 두 개의 문학상을  받았다. 규모는 그럴 싸 하나, ‘사회’에서 하던 것들과는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라 어디 내세울 건 못 되지만. 새로 온 대대장이 내게 관심을 가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하루는 집무실로 나를 불러 자신의 아들도 막 입대했다며 20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해줬다. 요컨대 남은 군복무기간 동안 호연지기의 정신을 기르고 가라는 것이었다. 부대에서 동쪽을 보면 속초의 바다가 보이고, 반대편에는 외(外)설악의 장벽이 기암괴석을 자랑했다. 폐쇄적인 군생활이 익숙해져야 그런 것들이 보이기 마련이나, 나는 적절한 시기에 조언을 들은 경우였다. 그 무렵부터 연등(소등시간인 22시 이후부터 두 시간동안 제한된 인원에게 공부할 공간을 제공하는 것. 제대가 임박한 병사들에게 주로 주어지나, 보통 군·사단별로 자체적인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을 하게 된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거의 매달 책 소포를 받곤 했던 나는, 예컨대 <로스트 랭귀지>, <총, 균, 쇠>, 혹은 <세계문학의 천재들>과 같은 어려운 책은 거의 읽지 못했다. 마음을 다듬을 수 있는 책이 자연스럽게 손에 잡혔다. 장석주氏의 <느림과 비움>, 임현담氏의 <히말라야 있거나 혹은 없거나>는 마음을 배부르게 해준 고마운 책이었다. 치열한 지적논쟁의 기회는 대학공부 중에 얼마든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대학이, 연장자가, 혹은 사회가 나에게 제공할 수 없는 개인적인 사색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군대에서의 사색이라. 어불성설 같지만 해본 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안다. 이런 독서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대대장의 ‘호연지기’처럼 담대해지는, 이런 책은 어떤 ‘정신적 약물’ 같은 것도 아니다. 그저 담백하게 “위로하는 책”이다. 고음을 내지르는 가수들의 노래가 아닌, 읊조림이다. 강한 타격이 아닌, “엄마 손은 약손”이다. 혹은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나를 위로하는 글들은 오히려 나를 가슴 아프게 한다. 내성이 생기면, 그 땐 견디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강해지진 않는다. 단지 촉촉한 눈시울을 만들어준다.
  “울 준비가 된 사람이 울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그래서 미술을 공부하려고 덤벼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임스 엘킨스의 <그림과 눈물>에서처럼 복합적으로 분석하진 않겠지만, 그래, 나도 도판연구를 한답시고 음악을 들으면서 꽤 많이 울었다.


  지금 읽는 책들에게 도타운 정을 주지 못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근래 읽은 <위도 10도>나, 지금 읽고 있는 <인종주의는 본성인가>, <핀치의 부리>,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 리뷰를 쓰기 위해 복기 중인 <눈의 지혜>, <의무론>, <아인슈타인과 피카소> 등은 지식의 나열과 결론도출, 논점제시의 패턴을 가지고 있다. 학문적 논픽션이다. 많이 알수록 감상에 도움이 된다는 (역으로 감상이 조장되기도 하나, 복잡한 문제이니 여기서 괜스레 얕게 거론해볼 문제는 아니다.) 것을 미술공부를 통해 알았기 때문일까. 때론 지적 권위에 기대거나, 추천에 속아 넘어가기도 하면서 여러 지식을 동냥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기에 책 읽는 내내 힘겹게 고민하는 모습을 잠시 떨어져 바라볼라치면 스스로가 애처롭기도 하다.


  콜드플레이, 라디오헤드, 후바스탱크, 더 프레이, 오아시스 등을 좋아하는 내게 친구 한 명이 해준 말이다. “록만 듣고 있으면 마음이 푸석푸석해지는 것 같아. 나는 발라드도 가끔씩 들어주는 것이 좋더라.” 음악‘잡식종’인 나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됐다. 굳이 비유하자면 책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한 저명한 독서가처럼 “소설은 읽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진 않으나, “이왕 읽으려면 오랜 시간 공들여 논쟁적 지식을 탐닉하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까닭에 픽션과 에세이에 눈길을 주는 때가 점점 줄어드는 듯하다. 독서편력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지만 편식이 몸에 좋지 않은 것과 꼭 닮은 이치이리라.


  논쟁적 지식과 그를 다룬 책은 자극적일 수밖에 없다. 지적 공부는 그런 자극에 연이어 노출되는 것이고. 역사와 시대를 이해하려는 자기와의 공정한 투쟁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두고자 야망을 가진, 소위 ‘지식인’들에게는 이런 말이 때때로 실없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따금 자극에서 벗어나는 것이 현명할 때가 있다. 좋은 자극도 마찬가지. 그렇다고 자기계발서나 멘토링북을 찾진 않는다. 상품용으로 인생과 지혜를 정리해놓은 책에는 도통 마음을 열기 싫다. 소소한 주제들로 엮인 에세이가 나에겐 제격이다.


  겉멋만 들어 빈 수레처럼 덜커덩 요란한 에세이가 아닌, 삶을 음미할 수 있는 책. 사유의 빈 공간이 허용되는 책. 내가 살지 않은, 살지 못할, 혹은 살 수 없는 삶들에 잠시 몸을 담가보고, 되도록 가장 낮은 자세로 겸손해질 수 있는 책. 자주 알라딘을 산책하지만 그런 책을 신간으로 만나보긴 힘든 듯하다. 저기 큰 서점들의 구석진 코너에 있는, 허름한 외장 탓에 견문의 망에도 걸려보지 못한 조그마한 어떤 책이 내가 찾는 그런 책일 수도 있겠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너도나도 읽는 인기만점의 책이 아니라, 운명이라 여길 만큼 우연히 발견한 어떤 작은 책 말이다.


  아, 나는 자유사상가이다. 우연이든, 운명이든 믿지 않는다. 수학적 확률이야말로 교교한 인망(人望)을 떠받치는 실체라고 여긴다. 그런데 이런 인연은 정말 교교하다. 책상 앞에 앉아 눈 돌리면 가장 먼저 보이는 (혹은 보는) 구석에 그런 책들이 몇 권 꽂혀 있다. 그들을 보면 나는 우연과 운명에 관한 어떤 ‘신학적 순리’의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책과 나의 관계를 수학이 아닌 종교적 조화로 생각해보는 일에 있어 나는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자력(磁力)이 너무 강해 도무지 떼어낼 수 없는.


  올해 두 번째로 묶어 사는 책들도 실은 ‘촉촉한 책’이 아니다. 내 안에 있을지 모르는 잠재적인 지성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 미학, 철학, 종교, 과학 등을 주로 접하며 나름의 계획을 실행 중에 있는데, 2012년의 계획을 위한 여덟 권의 책들을 사봤다.

 

 

 

 

 

 

 

 

 

 

 

 

 

 

 

 

 

 

 

 

 

 

 

 

 

 

 

 

 

 

 

#1. <미학 산책>은 제목 그대로 ‘산책’을 하고자 샀다. 어려운 논문들보다는 쉬울 것이고, 저자가 공들여 여러 시대의 미학을 간추려 놓았으니, 그동안 소홀했던 미학공부를 상기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꽤 근래의 일인데, 언젠가 미술블로그에서 잠시나마 현대미학을 다뤘을 때, 나는 “미학은 미술을 보는 눈이다. 미술사와는 다르다.”라는 새삼스러운 소개를 쓴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미술사와 ‘미술지식(말 그대로 미술과 관련된 잡다한 지식들이다. 연계되기 힘든 지식의 조각들이, 즉 각주 정도로 실릴 정도의 내용들이 이 시대에는 교양인의 필수조건처럼 회자된다. 나는 <지식의 미술관>의 리뷰에서 그 문제를 언급한 적이 있다.)’을 쉽게 얻을 수 있지만 미학의 문을 두드리기 힘든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전히 어렵다. 조금이나마 미학을 경험해본 입장에서는, 관심이 있다면 “맨 땅에 헤딩”해보기를 권하나, 미학의 지혜를 삶의 영역으로 끌어오기 힘든 사람들에게는 이런 교양서가 안성맞춤일 것이다. 재밌게 읽고, 다른 미학서들과 비교해 언젠가 리뷰로 꼭 다뤄보고 싶다.


#2. <다윈 지능>은 <핀치의 부리>를 읽고 있는 지금 그와 관련된 흥미로운 신간이라 골라봤다. 최재천氏의 책이라 더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리뷰나 추천글, 100자 평 등을 하나도 읽지 않았기에 “다윈을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시대적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를 지금 이 순간에도 심하게 궁금해 하는 중이다.


#3. <종교의 바깥에서 의미를 찾다>는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를 사놓은 이때에 “둘을 붙여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들어 구매한 책이다. 여덟 권 중 가장 마지막에 선택한 책이기도 하다. 몇 번 밝혔지만 나는 자유사상가이므로 신의 현존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처럼 신이 없음을 확고하게 주장할 정도는 아니다. 차라리 칼 세이건의 “의심해보라.”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다고 설명하는 편이 낫다. 이 책의 저자 앤드루 커노한은 무신론자들을 겨냥해 책을 썼다. 신을 믿진 않으나, 무신론자도 아닌 내가 이 책을 어떠한 방법으로 읽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예상하기 힘들다. 본성에 관한 탐구가 있다면 최근 천천히 곱씹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에도 닿아놓고 같이 읽는 책이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4. <인문학, 세상을 읽다>는 박민영氏의 책을 왕창 살까 생각하다 아무래도 책값이 만만치 않으니 한 권만 추리자고 하여 고른 책이다. 나는 그의 글이 부럽다. 문체를 탐낸다는 것이 아니다. 단단한 사유로부터 시작되는 글이 마치 발원지에서 바다까지 흘러가는 물처럼 자연스럽기에 그 생각의 힘이 존경스럽다는 뜻이다. 궁할수록 기교를 부리는 법이다. 인문학과 철학을 다룬 책들 중 일부 저급한 것들에서는 쓸데없는 기교가 발견되기도 하니, 욕심 많은 젊음을 운영해야 하는 때일수록 이런 저자의 철옹성 같은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도 작법과 사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7회 우수 리뷰로 세 개의 글이 선정돼 적잖은 적립금을 받아놨는데, 그걸 방송개론과 작가론 책을 살 때 다 써버린 것이 못내 후회된다. 아니었으면 지금쯤 박민영氏의 여러 책에 내 지문을 찍어놨을 테니 말이다.


#5. 강신주氏의 책이 최근 인기라고 하지만 감히 읽어볼 용기를 내진 못했다. 동서양 지식의 균형을 맞춰가는 일은 퍽 어렵고,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지난 3년의 대부분을 서양의 지식을 얻고자 쓴 터라, 관중, 공자, 장자, 노자 등을 깊게 읽기에는 마음의 시간이 부족하다 느꼈다. 그래도 한 권을 접해봐야 견문이 넓어지리라 여겨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샀는데, 이것도 창홍의 <미학 산책>처럼 간추린 부류에 속한다. 읽다가 유독 마음 가는 철학이 있으면 나름 깊은 독서를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행여나 놓쳐버리는 양식이 있을까 경계하며 조심조심 읽어야겠다.


#6.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다 작년에 알게 된 이름들이다. 아마도 지젝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랭의 철학을 깊게 설명한 한 유명 블로거의 공간(가물가물한 기억에 그 블로그 이름이 ‘붉은 서재’였나 했을 것이다.)에서 며칠을 끙끙대며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그는 아마 철학도였을 것이다. 철학에 대한 동경이 내 머리 어딘가에 적어둔 이름들. 제대로 알고 있는 철학 하나 없는 나에게 저들의 책이 과연 얼마나 생소하게 다가올지, 아니면 의외의 깨달음이 있진 않을지, 온갖 잡상(雜像)들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그래도 용기는 나의 편이었더라. 기왕 지식으로 불태울 이번 학기 중에 왕복 3시간은 걸리는 등하교 버스 안에서, 가끔은 어둑어둑 해 저무는 황금빛 한강을 바라보기도 하며 머리 싸매고 읽겠노라 벼렸다. 결국 조르조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 알랭 바디우의 <비미학>,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샀다. 그 벽을 넘으면 무엇이 보일까. 또 다른 벽일 테지, 아니, 분명 또 다른 벽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서는 이런 점에서 좋다. 걸려 넘어진 허들이 있어도 110m를 달린 기록에 감점이 붙거나 하진 않으니. 지적 실험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 (이런 식으로라면 나는 지젝과 아렌트, 파농도 곧 읽게 되지 않을까. 알고 있는 것은 이름과 몇몇 용어들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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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2-08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안녕.

저는 오늘 국사공부를 너무 해서 머리가 지끈지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런데 이름 보니까 이 페이퍼가 더 어려워요. 이제 철학까지 섭렵하시고 대단해요, 독서량이. <위도 10도> 리뷰 잘 봤어요. 이제 <인종주의는 본성인가> 기대중^^ 글을 쓰려면 철학공부는 꼭 해야하는 것 같아요. 블로그에서 아는 의사 분이 철학 아카데미에 다니신대서 우와, 대단하다 했는데 요즘은 정말 이것저것 잘하는 분들이 한둘이 아니라 머리가 더 아파요ㅠㅠ

봄학기는 학교에 가는 거예요? 탕기님도 왕복 3시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탕기 2012-02-08 23:39   좋아요 0 | URL
이번 학기 열심히 다녀야죠. 책도 많이 읽고, 사유의 시간도 늘리고. 교양으로 러시아어나 독일어를 들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전공을 소홀히 하면 안 되니까, 졸업반 되면 배워볼 요량입니다.^^ 영어도 제대로 못 하면서 늘 바라는 건 많아서 큰일이에요.ㅎ 철학을 고리타분하게만 여기던 시기가 지나가는 듯하니, 저도 조심스럽게 '나의 글'을 쓸 때가 온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이리님도 열심히 공부하시는 한 해 되시길.^^
 
위도 10도 - 종교가 전쟁이 되는 곳
엘리자 그리즈월드 지음, 유지훈 옮김 / 시공사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2012.02.03

 

 

  우리나라는 잘 사는 편이다. (이 말은 리뷰에서 다루게 될 다섯 나라와 비교했을 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세계 10위권 안에 진입하기 위한 대(對)21세기적 목표도 가지고 있다. 국가선전을 목적으로 만든 공익광고를 가끔 TV에서 보면 자랑스럽기도 하다. ‘88만원 세대’도 후한 점수라며 나와 같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취업난 속에 허덕이지만 그래도 물질적 풍요를 얻어먹은 격이니, 고마워할 줄도 알아야 하리라. 나의 아버지는 학비를 벌기 위해 주경야독을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학창시절 만나 자장면 한 끼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신다. 하지만 나는 매달 지혜를 탐닉하겠다는 요량으로 거의 8~10만원 정도하는 책값을 이곳에 쏟아 붓고 있다. (사놓고 소위 ‘뻥튀기’된 광고에 속아 넘어갔다는 생각이 들 때는 분을 삭이지 못하기도 하지만) 나는 가난을 모른다. 그리하여 분쟁도 모른다. 모든 것이 “있는 세상의 실없는 넋두리”로 들릴 때가 있다. 그만큼 세상을 모른다.


  그리하여 먼 곳의 경치를 보면 두 가지 생각이 든다. “저곳에 가보고 싶다.”, 혹은 “저곳은 나와 상관없는 곳이다.”라는 생각. 금강산에서 그랬다. 나는 금강산 육로관광의 1세대이다. ‘세대’라 하니 거창한데, 기념비적인 현장에 참여한 것은 맞다. 검문 차 버스에 올라 탄 북한 장교의 날카로운 눈매, 소가 건초수레를 끌고 가는 시골의 풍경, 이루 말할 수 없는 절경의 금강산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북한은 ‘심리적 원거리’이다. 나의 망원경은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하는지 몰랐던 것 같다. 분단의 한복판에서 그들의 실상을 울타리 너머에서라도 봐왔는데, “이곳은 나의 땅이 아니다.”라는 생각과 함께 이질감이 생겼다. ‘이곳’에서 어떤 간부가 어떤 여성을 겁탈하든, 압록강을 건너던 탈북자 가족이 한꺼번에 잡혀 몰살당하든 나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 ‘큰’ 상관. 이것이 뭔지도 사실 잘 모른다.


  볕 좋은 여기에서는 음지가 보이지 않는다. 엘리자는 <위도 10도>를 읽는 나를 거칠게 음지로 데리고 들어갔다. 어려운 책은 아니다. 하지만 힘겹게 읽었다. 먼 곳의 풍경이 코앞까지 파도처럼 밀려올 때, 그 때 느껴지는 현기증과 공포도 있었다. 신앙이 돈독한, 특히 기독교 신자와 무슬림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이 책의 내용에 빚을 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긴 리뷰이지만 하고픈 말은 곱절이나 많다.

 

 

*   *   *

 

 

  나는 궁금했다. 사람이 유일신을 믿게 되는 경위. 그래서 읽은 책이 <믿음의 엔진>과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할까?>였다. 최근 이와 비슷한 주제로 출판되는 여러 책들도 결국 같은 말을 한다. (굳이 비싸게 사서 읽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와 같은 ‘자유주의적 신자’에게 “참된 신앙”이라는 세계는 공감할 수 없는 곳이다. 열고 싶지 않은 문은 고리도 잡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지적 편식이다. 종교도 예외일 수는 없다. 신앙인이 보면 ‘불신’이고, 근본주의자가 보면 ‘이단’이며, 내가 스스로 봤을 때는 ‘유연함’이다. 서구와 비슷한 수준의 경제적 위상을 가지고 있고, 대체로 의식주에 큰 불편이 없을 정도의 생활을 누리고 있으며, 교육수준도 중간 이상인 우리나라는 일본, 싱가포르 등과 함께 전형적인 ‘서구적 아시아 국가’로 분류된다. 조금 거친 분류이므로 세세한 것들은 차치했으니, 이런 분류가 무지의 소산이 아님을 밝혀야겠다. 여하튼 이런 사회의 분위기는 나와 같은 ‘자유주의적 신자’를 만든다. 믿어도 그만이고, 안 믿어도 그만이다. 이른바 종교최소주의의 사회이다. 독실하기로는 유별난 일부 개신교 근본주의자, 혹은 복음주의자들(이들이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자들을 파견하는 국가로 만들었다. 약 12,000여명으로 추산된다.)은 예외이겠지만.


  반면, <위도 10도>에 나온 국가들, 예컨대 나이지리아, 수단, 소말리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은 경제적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 고속성장을 기반으로 아시아에서는 비교적 부국에 속한다 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의 속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다. 이 책을 통독해보면 이들의 공통점을 어렵지 않게 더 추려낼 수 있다. 식민통치를 겪었고, 그 이후의 민주화과정이 실패하거나 독재정권이 국가를 장악했으며,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분쟁이 지속되고 있고, 때론 그것이 서구와 이슬람의 대리전(proxy war)으로 비화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무렵은 서구의 식민주의가 극에 달했을 때이다. 이때의 선교사들은 국가와 자신의 종교가 공익(共益)을 추구한다고 여겨 열성적인 포교를 했다. 종교가 정부와 연루되자, 그것은 자연스럽게 ‘국가 마케팅’이 되었다. 이슬람교도들 중 대부분이 미국과 기독교를 동일한 집단으로 인식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이 무지해서가 아니다.


  종교도 세력이다. 그들은 팽창하기를 원한다. 가톨릭에서는 미사가 끝나면 신부가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말한다. 개신교도들은 그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열심히 아파트 단지와 대도시 중심가를 돌아다닌다.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무슬림들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미국 등지에서 돈, 혹은 반(反)기독교주의를 이용해 신도들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부교(富敎)’라고도 불린다. 인도의 힌두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말씀’이 아닌 ‘권력’이 된 종교는 말씀을 빙자한 권리를 주장한다.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전 세계의 자기화를 꾀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주장하는 보편적 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결코 보편적 권리가 될 수 없다. 십자군전쟁과 지하드는 같은 투쟁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런 역사는 “흉악한 원혼들이 서로 역사의 잘잘못을 따지며 옥신각신한” 역사와 다르지 않다.


  종교가 이렇게 강력한 이유는 ‘말씀’에 있지 않다. 세부적 내용은 물론 다르겠으나, 공자와 싯다르타, 예수와 무함마드가 한 말은 차이가 거의 없다. 신을 근거로 들더라도 인, 의, 예, 지, 애 등 우리가 흔히 들 수 있는 도덕과 윤리의 기본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따라서 순수한 도덕에 순위를 매길 수 없는 것처럼, 만약 종교의 ‘말씀’이 그들이 강한 이유라면 종교 사이의 충돌과 편차는 있을 수 없다. 종교가 강해진 이유는 그것이 “국가를 휘어잡는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경우에는 ‘무역’도 있겠다. 개종이든, 배교이든 권력의 확보를 위해 종교의 권위를 순간적으로 상승시켜 이단자들을 사형시키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A라는 나라는 기독교를 전통적으로 믿고, B국가는 이슬람공화국이다. A에서 독재자가 출현해 군부와 언론을 장악해 그 나름의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분명히 나온다. 독재자는 B국가와의 전쟁을 빌미로 강력한 탄압을 실시할 수 있다. 이때, 독재자가 처단할 수 있는 대상은 A국가 내의 비(非)기독교 세력뿐만이 아니다. 죄는 만들 수 있다. 종교가 국가의 옷이 되었을 때, 그것은 권력의 훌륭한 방탄복이 된다.


  같은 맥락으로 미국이나 서구 등 강대 세력의 지원을 받던 독재가가 그들의 힘을 더 이상 등에 업지 못했을 경우에도 종교는 큰 힘이 되어 준다. 그런데 이것은 미국과 서구의 입장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독재자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해당 국가의 종교적 권위가 너무 강해 개입이 용이하지 않을 때에는 그들이 먼저 독재자를 처단하거나 상황에 개입한다. 미국은 이런 방법으로 이슬람과의 ‘아프리카 전쟁’을 수행 중에 있다. 그런 까닭에 아랍혁명에 미국이 개입하고자 했지만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혁명에 참여한 국가들의 과도정부가 확고하지 않은 것이 좋다. 미국은 그들의 상처가 깊을수록 이슬람이 크게 분열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는 것이 뻔하다. 오히려 미국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지금 이란에서 일어나고 있다. 다행이라고 하긴 뭐하나 유럽발 경제위기가 이란의 강경책 탓에 이미 올랐어야 정상일 배럴당 원유값을 고정시켜주고 있다. 곧 이라크에서 열릴 아랍연합회의에 미국이 어떤 외압을 불어넣을지가 언론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관심사로 떠올랐다.


  아프리카의 세 국가들과는 달리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서는 특히 종교로 인한 전통지역사회의 분리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엘리자도 그것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인도네시아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각종 종교의 권위를 인정해 겉으로는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완성한 듯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정부가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선언하며 친미 계열로 기울었을 때, 인도네시아의 전통적인 무슬림들이 정부를 외면한 것이다. 결과는 뻔하다. 정부는 권좌유지를 위해 이슬람과 손을 잡았다. 이런 땅에서 기독교를 선교한다는 것은 ‘순교’를 피치 못하게 동반하도록 한다. 그런데 엘리자의 말처럼 종교는 이상한 특징을 한 가지 가지고 있다. “종교 활동의 수수께끼는 바로 ‘박해 아래서 더욱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pg.231)” 진실로 순수하게 신만을 섬기며 선교하다 순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순교가 전략적 카드로 사용되는 세태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밖에 없다.


  마르쿠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억압받고 짓밟힌 피식민자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자기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었을 때 비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박민영 著 <이즘> 참고)” 테러리즘의 철학적 근거이다. (인종주의에 대항한 프란츠 파농의 테러리즘이 여기에 기초를 둔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가 이것을 이용하기 시작하면 문제는 매우 심각해진다. 그 결과를 우리는 거의 매일 언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팽창지향적인 종교에서 순교자는 전략적 ‘선봉군’이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선교를 하다 순교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첨예하게 말들은 오가지만 실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있다고 해도 대서특필될 정도로 충격적 사건이 되는 이곳에서 ‘저곳’의 선교와 순교가 얼마나 열성적인가를 확인하는 일은 아마 나도 그렇고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이에 대해서 그곳 사람들의 말을 들어봄도 좋을 듯하다.


  “주일에만 하느님을 믿을 만큼 정신 상태가 ‘느슨한’ 서양 기독교인과는 달리, 위도 10도에 분포된 신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부인할 여유가 없었다.(pg.233)
  “형편이 넉넉한 삶 속에도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있을까요?(pg.290)
  “저희는 형편이 넉넉지 못해서 종교에 크게 의지합니다.(pg.291)


  그런데 이는 한편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종교가 아닌 전통에 의지하던 사람들이 종교 때문에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 사례도 엘리자는 비중 있게 소개한다. 말레이시아는 세계적인 이슬람 국가 중 하나이다. 그들의 종교와 경제발전이 동반성장을 이룬다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의 국가목표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말레이시아는 이슬람의 종교법인 ‘샤리아’를 세속의 영역으로 수용하면서, 한 인물이 했던 말처럼 “이란혁명을 죽이며” 말레이시아 특유의 약진을 이뤄오는 중이다. (이란혁명은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 하에 호메이니가 국가지도자로 등장한 1979년의 민주혁명을 의미한다. 이때 이란은 서구화를 극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말레이족과는 차별화된 전통을 지닌 소수민족들은 무슬림이 되면 돈을 준다는 여당의 공략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준다는 기독교에 힘을 실어주며 정치력을 갖게 되었다. 이를 단순한 여야의 구도로 보면 곤란하다. 소수민족의 입장에서 야당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말레이시아 안에 강제적으로 통합되면 부족문화가 사멸된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이를 두고 고도로 연결된 시대에 단절로써 문화를 고수하겠다는 시대착오적 생각이라 비판하는 이도 있겠으나, 그것은 문명적 사고일 뿐이다.


  “가난한 나라의 타락한 대통령”은 필리핀에게도 들어맞는 묘사이다. 아시아에서 유일한 기독교 국가인 필리핀은 남부의 무슬림과 그들의 땅을 장악하려는 미국의 개입으로 여전히 골머리를 앓고 있다. 디터 젱하스도 그의 <문명 내의 충돌>에서 가난이 종교분쟁의 기본적인 조건 중 하나라고 밝힌 바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는 별로 중요치 않을 수 있는 소규모 원유매장량이 필리핀의 남부를 병들게 만들었다. 기독교인들은 이 무슬림들의 땅으로 이주를 강행하고 있고, 일부 가톨릭 폭력조직(Ilaga : ‘들쥐’라고 불린다.)은 학살을 일삼는다. 엘리자는 이런 상황을 원유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엘리자는 초지일관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한다. 그녀가 평가를 내리는 부분은 종교분쟁의 근본이 목격되는 곳뿐이다. 그곳에서는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미국도, 해당 국가의 정부도 모두 비판을 받는다. 이런 태도 사이사이로 그녀는 종교인들(선교자나 신도)과 분쟁대상자들의 대화를 적나라하게 싣는다. 읽다보면 기가 찬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전후좌우가 종교적 신념으로 막혀 있는 대화이기 때문에 그것의 논리는 철저하게 순환논증 속에서 돌고 돈다. 반대의견은 튕겨져 나가거나 사멸되기를, 혹은 동화되기를 강요받는다.


  그런데 엘리자가 방문한 6개국, 그리고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는 종교분쟁의 최전선에서는 이런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부국의 종교들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을 갖는다. 생존의 문제이며, 권력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엘리자의 ‘위도 10도’라는 명칭은 종교보다 더 큰 존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석유가 나고, 보다 풍요로운 땅을 차지하고자 하는 전쟁이 일어나고, 식민주의의 상처가 씻기지 않은 곳에서 분쟁의 진물이 올라온다. 책을 덮고 난 뒤, 나는 “이런 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라는 어린 아이 같은 소감을 한숨과 함께 먼저 내뱉었다. (하지만 내려놓은 <위도 10도> 옆에는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한겨레출판)>가 놓여 있었다.)

 

 

*   *   *

 

 

  밝힌 바 있지만 나는 가톨릭 신자이며, 동시에 자유사상가이고, 종교보다는 과학과 합리, 그리고 도덕철학의 기반을 더욱 신뢰한다. 유일신은 입증되기 전까지 믿지 않고, 지적 태만과 맹종으로부터 발생되는 인류의 모든 문제 앞에 반성코자 한다. 따라서 종교 사이의 종교적 논쟁은 나에게 “어떤 분쟁을 야기하는가?”를 제외하면 큰 의미가 없다. <위도 10도>는 그런 나의 성향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우연일까? 나는 방금 저녁때까지만 하더라도 한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영화 <천사와 악마>를 봤다. 여러 번 본 것인데, 볼 때마다 사뭇 느끼는 바가 늘어난다. 영화의 말미에 한 추기경이 극중인물인 로버트 랭던에게 말한다.
  “종교는 흠이 많소. 인간이 흠이 많은 존재이니. 날 비롯해서 세상 모두가.”


  나에게 종교적 진리는 이것이다. 하지만 종교의 흠과 인간의 흠은 분쟁이 진행되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너무 멀리 있거나, ‘등잔 밑’에 있는 것이다. 생각의 여유가 없는 곳에서는 종교가 강해진다. 종교는 그곳에서 팽창한다. 이것이 21세기 과학과 지성들의 지적 도전장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종교가 전 지구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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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1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3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12.01.30

 

 

  영화 <300>을 본 것은 군대에서였다. 가장 큰 내무반에 모여 조그마한 TV를 응시하던 장정들이 탄성을 내지르는 장면은 뻔했다. 스파르타의 용사들이 ‘이모탈’들을 가르고, 베고, 날아오는 화살을 방패로 막아내는 야성의 향연에서 우리는 주체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CG인지 실사인지 구별할 수 없는 오묘한, 혹은 ‘광택’이 나는 화면처리가 전사들의 육체미를 한껏 부각시켰다. 몇몇 장면은 컴퓨터게임을 연상케 했다. 전쟁이 아니라 예술이었고, 학살이 아니라 화려한 기술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각 내무반으로 돌아가던 병사들 중에는 더러 “스파르타!”라고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남자들을 전쟁터로 나가게 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죽음이 아닌 영예와 승리만 선전하면 그들은 포비아(phobia)를 잊는다. 영화 <300>에 관한 부정적인 비평들은 대개 그들의 관심 밖에 있다.


  제대 후, 나는 미학을 공부했다. 물론 고난이도를 자랑하는 전문적인 원서를 읽진 않았다. 몇몇 개념만 알면 될 것 같다고 시작한 공부를 크게 벌여놓은 까닭에 나의 관심이 미술로 완전히 전환된 것도 있지만 우선 진중권氏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대담하게 내지르는 일침과 같았다. 내친 김에 그의 저서를 많이 주문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매진>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영화를 보진 않았다. 몇 편은 소위 ‘암흑의 통로’를 통해 보긴 했지만 <필로우 북>, <파렌하이트>와 같은 영화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굳이 책에 실린 영화들을 다 볼 필요는 없다. 진중권氏도 서문에 “이것은 담론의 놀이이다.”라고 거듭 밝히지 않았던가. 비평이라면 각 단편들이 이 정도로 짧진 않았을 것이다. 진중권氏의 필력에 비춰 예상해보건대 그가 비평을 쓴다면 영화 하나로 책 한 권은 족히 냈을 것이니.

 

  미학과 시대적 담론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이런저런 반찬들’ 정도가 될 것이다. 즉, <이매진>은 ‘영화’라는 이름이 붙은 한 끼의 식사와 같다. 독자들은 각자 알맞게 소화해야 한다. 유독 “맛있더라.” 싶었던 것이 있으면 직접 구해서 느긋하게 보는 것도 역시 각자의 몫이다. 편식은 아니고, 나도 몇 가지 반찬의 맛이 특히 기억난다. (나는 진중권氏가 다룬 영화 34개 중 21개를 독서 전에 봤다. 제 2, 4, 5, 7장의 영화들은 <웨이킹 라이프>를 제외하고 모두 봤다. 하지만 제 1, 8장의 영화들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편식이라고 해야 할까.)

 

 

*    *    *

 

 

  영화의 기술적 진보와 관련해서 CG의 발달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동생에게 <디지털 모자이크>라는 책을 추천받아 조금 접해본 적은 있지만 사실 나와 같은 일반 관람객들이 CG를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싼 기술인 만큼이나 난해하기 때문이다. 제작자가 아닌 우리가 CG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이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혹은 대부분이 CG로 이뤄진 영화의 영상미와 충격이 서사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문제들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 기술이 우리에게 주는 이득은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 이에 이의를 제기할 영화팬은 아마 없으리라 감히 짐작해본다. 고전의 서사가 CG의 몸을 빌려 웅장한 규모의 고대그리스 신화로 재탄생한 것을 나는 영화 <타이탄>에서 목격했다. 그 날,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동생에게 “다른 그리스로마 신화의 이야기들도 이렇게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며 감탄을 연발했었다.


  나의 반응은 CG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과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나리오에 담긴 상상력이 실사로는 도저히 발현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별세계’를 다루는 영화에 대한 기대가 큰 영화팬들은 CG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광신도가 아닐까.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나 톨킨의 <반지의 제왕>, 롤링의 <해리포터> 등은 CG가 없었다면 우리가 스크린으로 보지 못했을 환상적인 별세계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이들 영화는 비평가들에 의해 두 부류로 나뉜다. <아바타>는 “별 내용이 없는데도 CG의 효과를 톡톡히 본 영화”라 저평가받기도 했다. 이에 반해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는 이미 오랜 시간동안 독자들 사이에서 이 시대를 빛낸 명저라는 찬사를 받아왔으므로 탄탄한 서사가 뒷받침되어 있다는 것이다.


  후자의 평에는 대체로 이의가 없다. 더 나아가 <반지의 제왕>은 감독 피터 잭슨과 그와 함께 시나리오를 쓴 작가들의 역량이 더욱 빛난 경우라 할 수 있다. 소설로 <반지의 제왕>을 읽어본 이라면 누구나 느낀 점이겠지만 톨킨의 소설에는 지루한 면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해리포터>는 다소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환상문학의 어머니’라 흔히 회자되는 어슐러 르귄은 롤링을 빗대어 “소설을 쓸 줄 모르는 작가”라 비하했고,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특히 <죽음의 성물>의 재구성에 있어서 수많은 ‘해리포터팬’들을 실망시켰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들은 세베루스의 죽음과 회상이 너무 짧고 성의 없는 장면들로 이뤄져 있다고 성토했다.)


  진중권氏가 <폴라 익스프레스>를 설명하며 제시한 개념인 ‘언캐니(uncanny)’는 CG 기술의 진보로 인해 앞으로는 찾아보기 힘든 기술용어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픽사, 디즈니 등 굴지의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성공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들은 대부분이 동물을 다룬 3D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런 점에서 <인크레더블>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하지만 진중권氏가 이어 담론을 논한 <베오울프>라든지, 올해 개봉한 <틴틴>에서는 ‘언캐니적’인 현상이 많이 줄어 들은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여전히 “인간을 닮았으나 2% 부족한” 것에서 느껴지는 언캐니는 “CG가 인간을 대신할 수 없다.”는 우리의 보수적인 경향으로부터 옹호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완벽한 CG의, 단 하나의 실사도 없는 환상적인 세계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0년간을 되돌아보면 기술은 인간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놀라운 수준의 압축 성장을 이뤄오지 않았던가.


  CG와 함께 이 시대의 영화 관람객들에게 또 하나의 변화를 느끼게 해준 것은 서사의 해체이다. 고전은 언제나 향유되며, 그 권위가 향유의 정신을 고취시키기 마련이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아티스트>는 흑백 무성영화의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켜 수많은 영화팬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심지어 흑백 무성영화를 전혀 본 적이 없는 젊은 영화팬들에게도 ‘향수’라는 상상력을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영화팬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층위의 서사가 한꺼번에 진행되는 영화가 이 시대의 문제작들로 그 못지않은 관심을 받고 있다. 영화 <나비효과>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영화 <밴티지 포인트>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주인공이 다양한 시대에서 별로 늙지 않은 모습으로, 마치 ‘평행공존’하듯 진행되는 영화(패션과 관련된 강의에서 봤는데, 제목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도 있다. 진중권氏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양자영화(콴툼시네마)’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이 영화는 눈이 아닌 뇌를 통해 보는 영화로 관람자들마다 서로 다른 서사가 진행되게 된다.


  만약 이런 기술이 실행된다면 우리에게 서사는 개인적인 체험이 되어 더 이상 단일성을 띤 ‘공유체’로써 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흥미를 가진 개념 중 하나인데, 이는 온라인게임의 스토리진행 형식과 일면 닮은 점이 있다. 온라인게임에는 굵직한 스토리가 있고, 그 외에 선택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스토리들이 있다. 물론 유저들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스토리에 집중을 하거나, 캐릭터의 힘을 기를 목적으로 다른 스토리들을 마치 “헬스클럽에 다니는 사람의 심정”마냥 진행한다. 추천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온라인게임은 ‘자율’이라는 원칙에 따라 운영된다. 모든 이가 동일한 서사를 체험하지 못한다. 따라서 서사는 개인적 체험이 된다.


  콴툼시네마도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서사의 가짓수가 많아질수록 서사는 훨씬 깊은 개인적 체험이 될 것이다. 이런 것이다. A가 B에게 “나는 그 장면에서 왼쪽이 아닌 오른쪽 길을 선택했거든. 그랬다가 거의 죽을 뻔 했어.”라고 말했다고 하자. B는 바로 그 선택의 장면에서 상상을 동원한 약간의 공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A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이 겪지 못했던 사건들이 연속됨을 알게 되고, 결국 공감의 수준은 떨어지게 된다. 이것은 마치 서사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체험자들의 심리를 읽고 미리 대비하여 자신의 몸을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상황과 같다. 서사는 확정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사실상 유기체가 될 것이다. 비록 작가가 공을 들여 만든 수많은 ‘경우의 수’라고 하더라도 관람객에게 높은 수준의 콴툼시네마는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가상체험’이 될 소지가 높다.


  여기서 ‘가상체험’은 CG와 서사의 해체 외에도 시각적 충격, 혹은 진중권氏가 자주 쓰는 용어인 ‘촉각적 충격(혹은 체험)’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클로버필드>는 “자세하게 보여주거나, 혹은 1인칭 시점으로 진행”하면서 관람객들의 위치를 바꿔놓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영화 초반부터 관람객들을 로버트 카파로 만들어버린다. 아마 관람객들이 노르망디 해안에서 충격에 노출되는 시간은 30분이 족히 넘을 것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예수의 역할을 맡은 제임스 카비젤에게 아람어(예수가 활동했을 당시 지금의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등 중동에서 국제공용어로 사용되었던 언어)를 사용하게 하고, 예수의 수난(passion)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관람객들을 당시 예수를 따르던, 혹은 그의 삶을 목격한 한 무리의 중동사람들로 바꿔놓는다. <클로버필드>는 영화 <REC>와 마찬가지로 1인칭 기법을 사용해 관람객들에게 엄청난 멀미와 현기증을 준다. 그러면서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도록 유도한다. ‘고전적 의미’의 관람은 이런 영화들 앞에서 일제히 해체된다.


  영화의 기법과 관련해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것들은 대체적으로 이 정도이며, 영화가 짚고 간 다양한 주제, 예컨대 사이보그, 유령선, 미디어, 권력, 망상, 부조리, 폭력, 천재, 동화(童話), 역사 등도 진중권氏는 다채로운 관점에서 조명한다. 가벼운 문장인 것 같으나 몇 번이고 곱씹어 읽어봐야 하는 내용이다. 현대를 규정하고, 구성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지금의 담론들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유의 기회라 생각된다. 영화팬이라면 그가 언급하지 않은 영화들도 해당 챕터들에 삽입해 자신만의 생각을 펼쳐나갈 수도 있다.


  “누가 영화를 이렇게 복잡하게 봅니까?”라고 물어본다고 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저자가 부제를 달아놨듯이 이건 ‘인문학적 상상’이며, ‘즐거운 사유놀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영화를 말하지 않는 부분도 상당히 많다. 따라서 저자의 의도를 바로 알아들은 이는 위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또한 영화를 단순한 픽션이 아닌 ‘시대읽기의 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저런 식의 투정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재미있고, 무섭고, 환상적이고, 슬프고, 때론 아리다. 이 다양한 얼굴을 가진 작품들을 보며 우리의 시대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상해보는 일은, 그리하여 재미있고, 무섭고, 환상적이고, 슬프고, 때론 아릴 수밖에 없다. 인문학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하는 세태에 이 책과 같은 시도는 우리에게 제대로 된 크로스오버(cross-over)의 매력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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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2-02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탕기님 :)

영화는 대부분 대작이고 또 본 것들이지만 글은 좀 어려운 것 같아요. 진중권은 제게 [미학 오디세이]보다 나은 게 없었어요. 제가 작년에 [필로우 북]을 본 것 같은데 진짜 특이하더라고요. 그걸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하네요. 사실은 전혀 배경지식 없이 틀었다가 너무 신기해서 끝까지 봤거든요. 영화사나 기법에서 한 획을 그었을 것 같았어요ㅋㅋㅋ

탕기 2012-02-02 20:34   좋아요 0 | URL
저도 나중에 한 번 봐야겠네요. 안 본 영화들을 다룬 챕터는 사실 절반 정도 이해를 못했던 것 같아요. 글도 인문학 중심이구요. :)
 

2012.01.25

 

   가수들은 음반작업을 위해 똑같은 노래를 수 천 번이고 부를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훌륭한 프레젠테이션은 완벽주의자인 그의 피나는 노력이 낳은 결과물이라 했다. 운동선수들은 정확한 동작을 하고자 하루에도 같은 과정을 수 백 번 반복한다.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같은 문장을 매일 읽어 입에 붙여놓고, 또한 그 문장을 반복해서 들어 귀에 들여놓아야 한다. 반복은 향상을 위한 노력 중 하나이다. 반복에 익숙해져 어떤 행동에 대해 신뢰가 생기면 인간은 심지어 목숨을 거는 일에도 도전할 수 있다. 거칠게 표현해서, 반복은 삶의 보증수표이다.


  오늘 영어공부 겸 읽은 <뉴욕타임즈>의 한 예술관련 리뷰에도 ‘반복’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 그것이 큰 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러했다. ‘캐롤 보겔’이라는 기자가 쓴 20일자 기사는 미국 화계의 거장 엘스워스 켈리를 다룬 리뷰였다. 그가 동년배의 팝아티스트들이나 미니멀리스트들과는 달리 추상화를 고집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인데, 향년 88세인 그의 회고전이 여러 곳에서 개최되고 있는 미국의 추세를 반영한 듯했다. 그런데 기사 중 엘스워스를 화단에 안착시킨 한 인사가 이 고령의 화가를 설명하는 대목이 내게 뜻밖의 인상을 줬다.

  “He’s the last artist to repeat himself,” Mr. Storr said. “But he always comes back to his basic vocabulary: surface, scale, color, image. And he always gets it as simple as he can.”


  최근 들어 ‘복기(復棋)’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까닭에 ‘repeat himself’는 ‘repeat myself’로 받아들여졌다. ‘basic vocabulary’도 내게는 중요한 개념이었다. 부모님과 선생님들로부터 거의 매일 들어왔던 말, “기초를 닦아라.”는 이런 때를 위해 교훈 삼아야 하는 것이리라. “타인에게서가 아닌 나 자신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복기의 원론은 내게 ‘실용’이라는 효과의 여부를 떠나 하나의 ‘젊은’ 철학이 되었다.


  이런 글을 쓰며, 생각해보건대 나는 나의 삶에 그다지 충실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무엇을 반복하여 잘하고 싶은가?”를 묻게 되었다. 새해도 되었고, 목표도 다시 바로 잡았으니 이런 새삼스러운 질문은 나를 건강하게 해준다. 반복하여 기술적으로 향상되어야 하는 부분에 나는 항상 ‘글쓰기’를 던져 넣는다. 같은 주제로 글을 쓴다고 해도 필사(筆寫)가 아니라면 매번 달라지는 것이 작문인지라, 어떤 글이 더 나은지를 판단하는데 있어 매양 힘들다. 글쓰기가 단순한 동작이 아님은 자명하다. 기분에 따라 문체도 달라지고, 다루고 싶지 않은 주제에 대해서 쓸라치면 문장의 자신감도 현저히 떨어진다. 비극적 사건을 다루는데 리드미컬한 구성이 적절하다 할 수도 없다. 따라서 내게 “글을 반복하여 잘하게 된다.”라는 논리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어떨까?


  주제 하나로 큰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문장을 한글문서로 타이핑하는 것이든, 필사하는 것이든 반복해서 써보는 것이다. 즉, “반복한다.”라는 범위를 좁혀보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필사하거나 암기하는 것은 예로부터 많은 문인들이 사랑하던 학습법이다. 좋은 씨앗이라도 질 좋은 토양에 심어야 잘 나는 법이라는 뜻이리라. 토양이 좋으면 나쁜 씨앗이라도 예쁜 꽃을 피우고, 왕왕 열매를 맺게끔 바로잡아줄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닐까. 그리하여 글을 쓰고자 한다면 돌아보고자 하는 것이 여럿 있게 되는데, 여기엔 필사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글을 곱씹어보는 것도 포함된다. 어쩌면 이것이 더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3년 간 꾸렸던 미술 블로그의 옛글들을 한글문서로 바꿔 몇 권의 책으로 보관하고자 얼마 전부터 작업을 하고 있다. 공부와 소통을 목적으로 쓴 글들이라, 정리와 1~2회의 퇴고 외에는 특별히 손 쓴 적이 없었다. 때문에 문서편집을 하며 되돌아보는 지금 그것들은 나를 무척 창피하게 만든다. 모르면 용감해진다고 하더라. 미술에 대해 잘 모를 때에는 마치 잘 아는 듯 흉내를 내고 싶기도 했었다. 겸손해져야 한다고 깨달은 후부터 글은 공부의 난이도만큼 갈수록 어려워졌고, 결국 내가 간직해야 하는 글들은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학교 초년생 무렵의, 제대 후 모두 지워버린 자폐적 글들보다는 알찬 것들이라 책으로 꾸며보고자 남겨뒀는데, 생각해보니 그것들은 하나같이 복기해봐야 하는 것들이었다.


  적절하지 않은 문장을 고치거나 틀린 전문용어를 바로잡는 것은 큰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적 수준이다. 2~3차의 퇴고를 꾸준히 한다면 이런 종류의 실수는 쉽게 예방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은 다른 영역에 있는 듯하다. 내가 복기 중 생각해보는 것은 글을 썼을 당시의 마음이다. 주제에 대해 잘 몰랐었을 무렵, 혹은 글에 너무 많은 힘이나 기교를 줄 정도로 열정적이었던 무렵을 상기해보는 것은, 더군다나 소심한 나 같은 이에게는 나름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아픈 만큼 큰 도움이 된다. 쓴 약이 몸에는 좋더라는 어르신들의 말씀에는 뺄 말이 하나도 없다. 부족한 것은 여전히 많지만 내가 예전의 글들보다 지금의 것들에 신뢰를 얹어놓는 까닭은 나날이 진행되는 복기이다.


  어제의 글보다는 오늘의 글이 더 나아야 한다. 특별히 글에 기교를 부리지 않으려는 나의 성향 탓일까. 나에게 글은 작문 당시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정해진 틀 없이 들쑥날쑥하고, 사변이 많은 것이 (나 스스로 봐도) 눈에 띠는 특징이다. 이 방법은 작문 전에 마음을 정갈히 하지 않으면 글이 배설 수준까지 추락한다는 큰 단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정돈된 마음으로는 어떤 글이든 “잘 쓸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는 “마음을 잘 드러낼 수 있다.”와 같은 뜻이다. 따라서 나에게 ‘복기’란 나 스스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성장했는가의 성찰과 다름없다. 글을 생각하는 것과 철학을 하는 것이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상처가 아물 때마다, 그리고 새로운 상처가 생길 때마다 나는 하나의 문장에 매달려 그 마음에까지 다다르는 긴 작업을 오랫동안 견뎌내야만 한다.


  새해만 같으라고 하더라. 의지가 나를 어디까지 밀고 갈지, 어디에서부터 내가 그 의지를 다시 밀고 가야할지는 연극이 진행되어봐야 알 수 있을 듯하다. 글과 영상으로써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새파란 학생이라, 용기를 가지라는 덕담을 나 자신에게 주워들어본다. 올해는 다시 복학하는 만큼 많은 일들이 나의 의지를 실험할 것이다. 그 첫 번째 일로 임진년의 서막을 함께 열어줄 다섯 권의 책을 샀다. 두꺼운 책이 두 권이나 있어 비싸게 주고 살 뻔했던 것을 반값 할인을 빌미로 샀다. ‘이달의 당선작’으로 얻은 알사탕(환전했더니 4만원이나 나왔다!)이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 까닭에 알차게 읽어주겠노라 벼르고도 있다. 이런 책들이다.

 

 

 

 

 

 

 

 

 

 

 

 

 

 

 

  니체는 “잘 모르지만 가까이 하고픈 철학자”이다. 철학에 입문조차 하지 않은 나에게 거창한 목표가 있다면 두꺼운 철학원서를 한 번은 읽어보는 것. 4년 만의 복학에 벌벌 떨던 나를 격려해주신 한 철학교수님의 도움이 몇 가지 동기 중 하나일 것이고, 그밖에 이진경氏, 박민영氏, 진중권氏, 버트런드 러셀, 우치다 타츠루 등의 책이 빈약한 나의 ‘철학적 지식’을 반성케 했다. 이번에는 이수영氏의 <명랑철학>을 통해 다시 한 번 철학에 대한 호기심을 살찌울 참으로 과감하게 철학책을 구해봤다.


  미술 블로그를 할 적의 일인데, 나에게 큰 격려를 준 이웃분 중 한 분이 내게 “꼭 반 룬과 같은 저자가 되어주세요.”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사실 그 때 나는 반 룬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터라, 그냥 “고맙습니다.”라는 답변만 할 수 있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매우 성공한 대중적 저자라는 평과 함께 그의 서술방식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상반된 평가까지 다양한 리뷰들이 있었다. 그 분의 격려를 허투루 듣지 않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비록 번역서라 할지라도 그의 책을 읽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책은 하나같이 비쌌다. 다행이도 이번 알라딘 메일에 4만원은 족히 넘는 고가의 책들을 반값 할인해준다는 정보가 있어 찾아보던 차에 반갑게 “지르게” 됐다. 예술사 전체를 아우르는 ‘큰 눈’을 배양한다는 목적 외에도 나에게는 “반 룬의 글이란 어떠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중요한 과제가 주어졌다. <반 룬의 예술사>. 고심하며 읽어봐야 할 책이다.


  피터 왓슨의 <생각의 역사 1>도 비슷한 이유로 샀다. 비싼 책이 반값 할인을 했고, 저자에 대한 평이 좋았다. 더불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저자 남경태氏가 역자이다. 1권을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2권도 사야겠다는 심보로 일단 ‘지름신’을 물려놓고 보니, 1권의 분량이 무려 1200페이지를 훌쩍 넘긴다. 막대한 분량을 다룰 수 있는 저자가 이 시대에 몇 명이나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더욱 기대가 되는 책이다. 저자가 취급한 정보들이 다양할수록 깊이는 얕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통설이고, 피터의 이 책도 그런 평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다. 나는 통시적인 ‘거대 프로젝트’를 시도하는 저자들이 적어진 것이 문제라는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지식의 미술관>을 리뷰할 때도 한 말이지만 이 시대에는 파편화된 지식이 너무 많지 않은가를 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도킨스와 세이건을 읽을 때, 그리고 대학교 철학 강의 중에 나는 ‘설계논증’이라는 것을 비교적 자세하게 접했다. 평소 종교적 창조론을 신뢰하지 않는 입장(이것이 종교에 대한 모든 회의라고는 할 수 없다.)이라, “설계논증은 그럴싸하게 들린다.”는 항간의 반응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진화론적 설명의 ‘목적’을 신에게 닿아놓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을 쓴 두 저자가 서론에서 말한 “이의제기에 변명할 방법을 보유”한 전형적인 종교의 수법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저급한 사상이라 여기는 선민사상을 낳은 종교의 모태가 진화론을 뒷받침할 수 있다는 논증 자체가 나에게 전혀 설득력 있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주제에 대한 고찰에 있어 나에게 남은 몇 가지 과제 중 하나는 설계논증에 대한 과학자들의 반박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는 근래 나온 책들 중 나의 호기심을 가장 많이 자극한 책 중 하나였다. 신간알림 메일로 얻게 된 논쟁적 책이라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최근 공들여 읽고 있는 <위도 10도>는 분명 종교적 분쟁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명백한 인종주의도 포함되어 있다. 예전부터 프란츠 파농을 읽고 싶었지만 “어렵거나 너무 충격적일 것 같다.”는 비근한 핑계로 밀어뒀었다. 파농을 읽기 전에 ‘예비학습’ 겸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를 읽어 이 첨예한 문제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느꼈다. 만약 내가 책을 잘못 골랐다고 느꼈다면 이 책 역시 나에게 너무 큰 충격을 줬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이 주제 자체가 자신을 다룬 그 어떤 책이든 충격을 무기로 장착하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해 벽두부터 나를 몰아세우는 기분이 든다. 어려운 만큼 피해가면 안 된다는 오기가 그리 만든 듯하다. 지나친 회의주의나 부정적 견해가 생기지 않도록 긍정적 예들도 곁들어 찾아가며 천천히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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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1-26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위도 10도>는 꼭 리뷰 써줘요. 그거 보고 싶었어요. 알게 된 것도 탕기님 서재에서지만.. 책 많이 구입했군요. 연휴 잘 보냈어요?

탕기 2012-01-27 11:19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아이리님.^^ 연휴 잘 보내셨죠? 당선작으로 모은 돈이 있어서 큰 부담없이 두꺼운 책도 사봤습니다. 연휴 끝나고, 학기 시작하기 전까지 뭔가 체계적으로 하려고 이런저런 목표를 세우고 조금씩 하고 있어요. 아, <위도 10도>도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한... 1/3 읽었어요. 다른 책도 같이 읽고 있어서 아마 다음달 초에야 리뷰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과잉 연결 시대 - 일상이 된 인터넷, 그 이면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윌리엄 H. 데이비도우 지음, 김동규 옮김 / 수이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2012.01.20

 

 

 

  MBC의 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안철수氏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러다간 모두 공멸할 것 같아요.” 이 시대의 대중들이 사회적 병폐들을 충분히 겪고 있으면서도 묵인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방관하는 우리의 자세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임은 알겠으나, ‘공멸(共滅)’이라는 말은 무슨 뜻을 갖고 있을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검색해보니 ‘공멸’은 “함께 사라지거나 멸망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고, 발행한 지 조금 오래된 사전들에는 없는 단어이기도 하다. 함께 사라지거나 멸망한다. 무엇 때문에 “함께”라는 부사어가 굳이 첨가되었을까?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보면 슈호프는 죄수 알료쉬카와의 대화에서 죄 없는 자신이 왜 이곳에 끌려 왔는지 모르겠다며 한탄하는 장면이 있다.


  예컨대, 그런 것일까? 나는 아직 사회에 나서지 않은 학생이고, 죄를 지은 적은 없다. 의무교육도 성실히 받았고, 군복무도 열심히 이행했다. 이 사회에 내가 해를 끼친 것은 없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나는 어떤 이유 때문에 이 사회의 추락과 함께 ‘공멸’해야 하는 위기에 처해 있다. 하지만 솔직한 생각으로 나는 무엇이 공멸의 위기를 야기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책으로만 봐온 세상이다. 대기업들의 횡포, 정부의 무능력, 폭력에 둔감한 사회 등의 문제는 논설이나 칼럼에서만 읽어왔다. 이 좁은 시야를 가진 일개의 학생이 무슨 이유 때문에 “함께 멸망하는” 시나리오의 한복판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일까?


  새삼스러운 질문이다. 우리는 온갖 링크(link)들로 이어진 그물 사회에서 살아감을 충분히 알고 있다. 유럽의 위기가 9시간이나 시차가 나는 이곳에서도 문제를 야기한다. 어떤 원리로 그런 비극이 벌어지는지 정확한 메커니즘은 학자가 아니라면 알기 힘들다. 대략적인 이해는 이것이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윌리엄 데이비도우의 <과잉연결시대(Overconnected)>는 이 시대의 ‘연결’에 관한 충격적인 사례와 저자의 예리한 시각을 담은 책이다. 인터넷 선을 잠시 뽑아놓거나 무선연결을 해제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는 더 이상 세상과 소통하는 창이 될 수 없다. 순간 우리는 어딘가에 갇힌, 혹은 누군가로부터 동떨어진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인터넷에 접속하고자 할 것이다. 이것은 오프라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온라인은 놀라운 속도와 ‘연결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연결욕구를 가속화시킨다. 빛의 속도로 대화를 주고받는 시대이다. 같은 뜻으로 위기 역시 빛의 속도로 다가오게 된다. 세계가 동시다발적인 공황상태에 빠지는 시나리오는 더 이상 하찮은 음모론이나 비관론이 아니다. 윌리엄은 그런 위기들을 짚어가며 우리에게 섬뜩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진출처] crowdfundingbank.com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를 읽은 이라면 <과잉연결시대> 역시 비슷한 부류의 서적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다양한 사례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기에 앞서 과학 분야의 이론을 사회에 적용하고, 그것으로 사회를 해석한 뒤, 문제해결을 위한 몇 가지 방안을 내놓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탄탄한 형식의 책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상당한 기대를 하게 되고, 다소 어렵더라도 각종 사례들을 통찰하는 저자의 혜안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과잉연결시대>에는 주로 금융권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경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나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예시들이었지만 얼마간 언론보도를 통해 들어본 것들이라 익숙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용두사미(龍頭蛇尾)라 하던가. 일주일 정도 이 책을 붙잡고 조금씩 쪼개어 읽은 뒤, 오늘에서야 결론을 읽었다. 그가 여러 단락과 장(章)을 통해 설명한 사건들의 중대함에 기대어 생각했을 때, 과연 이 책의 꼬리는 얼마나 매력적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 먼저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알아야 하는 용어들은 책의 첫머리에 나온다. 물리학 이론에서 따와 그가 만든 용어인 overconnected와 positive feedback은 일단 이해하면 전혀 생소한 개념이 아니다. 피드백이란 A가 B에게 영향을, B가 C에게 영향을 줬을 때, C가 다시 A에게 영향을 주는 아주 간단한 형태의 영향관계이다. 이 관계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을 overconnected라고 한다. 요컨대, 우리 사회가 그렇다는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현대사회는 정체되지 않고,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빠르게 변화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SNS을 통해 실시간으로 사건들을 알게 되고, 복잡한 교통시스템을 이용한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몸을 얹혀 놓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경향이 드러나는 때는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고(accident)’를 당했을 때이다. 2008년 세계는 극단적 사고를 겪은 바 있다. 그것은 무서울 정도의 공격적 투자, 미래를 내다보지 않는 안이함, 규제구조의 문제, 그리고 도덕적 해이가 낳은 총체적인 비극이었다.


  윌리엄은 이 책에서 잠시 ‘사고전염(thought contagion)’이라는 또 다른 개념을 소개한다. 우리가 사고의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어 이리저리 휘둘리거나 병에 걸린다는 뜻이다. 자기실현적 예언은 <믿음의 엔진>과 같은 인간의 정신을 분석한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인간의 고질적 한계이다. 사고전염은 경제에서도 일어난다. ‘버블(bubble)’, ‘토네이도(tornado)’와 같은 단어는 자주 들어본 것이리라. 사고전염은 소통의 욕구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여기에는 기대도 포함된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 평가가 좋으면 투자자들은 당연히 그곳에 투자를 하고자 한다.


  아이슬란드도 그러했다. 어업에 전념하던 가난한 이 섬나라가 금융업으로 전환한 뒤 2008년 10월에 겪은 국내 3대 은행 글리트니르, 란드스방키, 카우프싱의 잇따른 파산은 영국, 네덜란드에게는 직격탄을 날렸고, 전 세계 금융증시의 불황을 가져왔다. 기대가 전염되고 투자가 몰리면 거품이 생긴다. 은행은 그 버블로 재투자를 하면서 더 큰 버블을 만든다. 그런데 정작 투자로 운영되는 돈이 부풀어지는 중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산이 줄어들고, 다시금 사고전염이 발생해 거품이 갑자기 사라지면 투자자들은 은행의 실체를 알게 되고 돈을 급히 뺀다. 은행은 망한다. 부채가 생기고, 그곳에 투자했던 이들은 인터넷뱅킹은 물론이고, 은행본사의 입구가 봉쇄된 것을 목격한다. 땅을 치고 통곡하는 건 이미 늦은 일이다. 이렇게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세 은행 탓에 영국과 네덜란드에게 막대한 빚을 물어야 한다. 화가 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2009년 1월 26일 연정붕괴라는 사태를 초래했다.


  최근 그리스 사태도 마찬가지이다. 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도 마찬가지였다. 거품은 overconnected를 만든다. 그것이 사라지면 막대한 손해가 온다. 놀라우리만치 단순한 구조이지만 이를 피해갈 수 있는 혜안을 지닌 투자자는 많지 않다. S&P와 무디스와 같은 굴지의 신용평가사들마저도 2008년 사태에 앞서 위험부담이 매우 높은 채권들에 트리플에이의 평가를 매겨 투자자들의 쏠림을 부추겼다. 이런 쏠림현상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건초수레 제단화>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악마들이 이끄는 수레 위에서 방탕한 자들이 놀음을 일삼고 있고, 수레 근처의 사람들은 자기네들도 태워달라며 손을 하늘로 뻗은 채 욕구를 드러낸다. 저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수레 위의 천사만이 알고 있다. 종교적 지옥을 ‘사회적 지옥’으로 바꿔 생각한다면 그 천사는 진리, 혹은 진실을 우러러보며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나이다.”라는 기도를 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버블이 하나의 문제였다면 overconnected는 정보들이 연계되는 것, 윌리엄이 말한 정보연계가치(values by association)을 통해 사생활 침해문제를 유발하기도 한다. Cyworld, Daum, Naver 등 굵직한 사이트들은 물론이고, 각종 온라인게임에 사용된 개인정보들이 하루 만에 유출된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이상하리만치 미온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집주소로, 전혀 모르는 기업의 홍보물이 자신의 이름으로 도착한다면 그제야 화들짝 놀라곤 하는 것이다. 물론 기업들은 정보를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기업, 예컨대 윌리엄이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이라 소개한 초이스포인트(ChoicePoint)와 같은 기업에 돈을 주고 고객의 정보를 구매한다. 그 기업들은 회사를 홍보하거나 고객의 취향을 분석하고 판매계획을 세우는 것에만 그 정보들을 활용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기업들이 정보를 취급하는 안전성에 있어서는 일괄적이지 못하다. 윌리엄은 개인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개인에게 주는 ‘비밀번호 제도’를 제안하지만 피해복구방안이 마땅히 존재하지 않다는 것도 더불어 언급한다. 요컨대 그것은 윌리엄이 결론에서 언급한 ‘외부효과(externality)’를 제 3자가 부담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앞서 말한 사고전염에 대해 우리가 우려해야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최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극우세력들의 온라인 활동이다. 페이스북은 신(neo) 나치주의자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정책을 펼친 바 있다. 소위 ‘hate group’들의 사고전염은 위험하다.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증오심이 부추겨지면 다양한 경우들이 생겨나 각종 민족주의의 부활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야기된 현실”이 지금의 모습이다. 특정 연예인에 대한 조그마한 안티-카페들은 그나마 사소한 경우이겠지만 인터넷은 사람의 의견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악플도 전염된다.”는 학자들의 진단은 사실이며,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볼 수 없다.


  윌리엄은 통제를 주장하는 사람으로 따지자면 보수주의자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가 결론에 그의 보수성을 드러낸 이유는 “미친 철마(鐵馬)와 같은” overconnected의 실상을 제어해보기 위한 현실적인 의지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도 통제와 자율시장의 공존을 통해 국부(國富)가 증대된다는 개념인데, 오늘날의 정부통제는 필요악인 경우가 많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기업들에게 상호연결성이 강한 현대사회는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문제는 그들이 그 땅을 정복하기 위해 비도덕적인 수단들을 카드로 꺼낸다는 것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엄청난 혜택을 누린다고 여기고, 실제 그러하며, 따라서 대안을 생각할 만큼의 의지를 발휘할 수 없는 “길들여진 상태”이다. “위험은 곧 기회비용이 아닌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식의 진화론적 인식이 지배적인 시대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우리의 상황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결국 윌리엄은 원론으로 돌아가 점검과 예방이 필수라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결론으로 담는다. 이런 것들이다. 투자자들의 공격적인 거래를 규제하기 위해 positive feedback의 수위를 낮추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유류세를 예로 들건대 과세제도를 점검해야 하며, 경제학자 토빈이 제안한 금융시장 세율 1%도 좋은 사례일 수 있다. 프라이싱(가격책정) 장치를 점검해 버블을 조장하는 positive feedback을 조기에 차단해야 한다. 외부효과에 대한 프라이싱도 중요한데, 탄소배출권의 경우 시장가격에 맡기는 방안이 정부의 규제보다 나을 수도 있다. 제 3세계의 무역성장속도를 낮추기 위해 그들 기업들에게 선진국 기업들의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


  예방을 제시하는 자리에서 윌리엄의 태도는 더욱 막연해진다. 사례를 들고, 문제점을 언급한 뒤 “이렇게 했더라면”의 식으로 맺는 단락들이 여럿 있다. 요컨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방어운전’하라는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엔트로피>를 통해 “엔트로피를 줄이자.”라고 한 주장과 거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용두사미의 책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의 주장을 ‘식어버린 라면물’처럼 대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윌리엄은 미래사회의 모습을 예상하며 우리가 주체적으로 overconnected에 적응할 것이냐, 아니면 객체적으로 적응할 것이냐, 그것도 아니라면 도태될 것이냐를 놓고 무거운 저울질을 한다. 그의 관점에 따르자면 다소 비관적이긴 하나 주체적 적응을 위해서는 이 세계의 속도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늘 그렇듯 문제는 우리의 인식이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잉연결시대>가 이미 빠르게 달리는 소위 ‘문명권’ 독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주장처럼 들릴 수도 있다. 우리는 인구가 과잉밀집된 대도시에서 벗어나 전원(田園)의 삶을 추구하고자 하고, 그런 탓에 미술에 있어서도 유난히 인상주의 거장들과 러시아 이동파 화가들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돈을 벌어 귀농하는 젊은 청년들의 꿈을 담은 다큐멘터리들도 여럿 제작된 바 있다. 하지만 개발도상국과 제 3세계의 독자들에게 윌리엄의 말은 소위 “태평양의 원주민이 본 <최후의 만찬>”과 같지 않을까? 이 세계의 문제를 야기하고, 속도를 주도하는 이들이 조금 더 넓은 시선으로 윌리엄이 말한 상기 문제들을 바라본다면 마땅히 수치심을 느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세계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관점에 더욱 무게를 주려고 한다. 우리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해 극도의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과잉연결시대>를 덮고 창밖을 내다본다. 잔뜩 눈이 내릴 것처럼 웅크린 흐린 하늘이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이 세계는 분명 내달리고 있다. 상반된 속도 탓에 현기증이 난다. 내달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회를 일갈하려는 윌리엄의 진단이 과연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까? 책을 읽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 것 같고, 그러나 해결책을 실천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모르는,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 독서가 아니었는지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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