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의 가치사전 -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
박민영 지음 / 청년사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2012.01.17

 

 

  나는 올해로 만 스물여섯이다. 보통이면 대학 졸업할 나이에 아직도 3학년이다. 국문학 전공은 나에게 여전히 맞지 않는 레고조각처럼 낯설기만 하다. 대학의 공부와 생활은 이모저모로 나의 기대에서 한참을 벗어났다. 군대에 가서 생각을 정돈하기 전까지 나는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핑계는 대지 않는다. 의지박약이었다. 그 때 쓴 글들은 모두 불살라버렸다. 때문에 나의 옛 글은 대학 초년생 무렵까지 썼던 시를 엮은 시집과 제대 이후의 글들로 확연히 구분이 된다. 얼마 전, 나는 이곳의 한 블로거와 함께 ‘자폐적 글쓰기’에 대해 코멘트를 나누다 응원을 하겠다는 요량으로 이런 말을 했었다.


  “천편일률적 글쓰기보다 차라리 안으로 굽어진 글쓰기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나 역시 그 때가 무척이나 창피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트라우마는 쉽게 지울 수 없다던가. 새벽녘 한창 예민해질 때에 나는 감성적 사유를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한다. 밑도 끝도 없는 어둠 속의 존재가 그리도 두려운 것이다.


  자폐적일 때에는 쾌락도 추구하지 않는다. 반복적, 혹은 습관적 쾌락은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때문에 당시 나는 기쁜 적이 없었다. 무색, 무취, 아니면 건조된 육포 정도였다. 혈기왕성하지도 않았고, 나이에 걸맞은 패기도 없었다. 자폐적 글쓰기라는 것은 진정 공포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 때 나는 몰랐다. 바로 그 지점에서 조금만 더 의욕적으로 생각했더라면 더 많은 성찰을 할 수도 있었다. 내가 빠진 물은 별로 깊지 않았었더라. 하지만 익사할 줄로만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굳이 군대가 아니었어도 물 밖으로 힘껏 뻗은 손으로 내가 원래 있던 곳의 공기를 한 줌 쥐어보고, “아, 저곳이다.”라고 외치며, 이윽고 큰 호흡과 함께 얼굴을 물 바깥으로 내밀 수도 있었다. 불교의 표현대로, 그것은 손등과 손바닥의 차이였다.


  손목을 꺾어 양면을 모두 본 어떤 사람의 책을 나는 몇 해 전 읽게 되었다. 그런 책이 있다. “이 책을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 때문에 서문을 읽자마자 잠시 책을 덮게 되는 그런 책 말이다. 저자도 기형도 시인의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는 시구를 나처럼 떠올린 경험이 있다고 했다. 낙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쾌락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했다고 했다. 나는 하지 못한 것. 아, 그는 과연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아픈 경험을 뒤로 하고, 나는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은 독서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 장씩 읽어갈 때마다 나는 위로를 받았다. 그가 위로할 목적으로 책을 썼는가? 천만에! 하지만 나는 반가운 이 책의 속표지 위에 크게 사인을 하나 그려 넣었다. 날짜를 보니 2009년 6월 25일. 제대한 지 막 반년이 되가는 때였다. 그로부터 얻은 3년의 위안을 다 털어놓기에 이 자리는 너무 작진 않은가. <즐거움의 가치사전>이라는 책에 대한 나의 이야기이다.

 

 

*   *   *

 

 

  내가 읽은 박민영氏의 책은 <이즘>이 처음이었다. 미학을 공부할 때, 철학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는 심산으로 산 몇 권의 책 중 하나였다. 하지만 크게 인상적인 책은 아니었는지, 나는 <즐거움의 가치사전>을 산 뒤 책장에 꽂고 나서야 비로소 의 저자가 바로 그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둔감함이 준 뜻밖의 놀라움이라고 해야 하나. 독서에 애착을 갖게 하는 것들은 그만큼 사소한 것들이구나 싶었다. 사실 이런 반가움이 나를 추동한 것은 아니었다. 쾌락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저명한 사례들을 근거로 펼쳐나가는 ‘박민영식(式)’의 명료한 문장은 든든한 벗이 되기에 충분하다. 나처럼 시도 때도 없이 글로써 배설을 일삼는 사람들이라면 탐낼 만한 내공이 들어 있는 문장이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관하리라.


  그가 적어놓은 항목들은 무척 많다. 따라서 전문적인 책이 아니다. 가령 이렇다. 근래 들어 읽고 있는 세 권의 책은 모두 심도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도 10도>는 종교분쟁 중에서도 제목과 같은 ‘위도 10도’의 분쟁국가 사례를 토대로 한 현장감 넘치는 책이다. <과잉연결시대>는 <위도 10도>보다는 한결 쉽다. 인터넷을 체험한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해할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슬란드 은행들의 파산, 각종 금융사기, 리먼 브라더스 파산, 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등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전문적인 글임은 부인할 수 없다. <휴버먼의 자본론>은 제목에서 이미 전문성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사례와 개념을 검색해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Wikipedia와 Google을 화면에 띄워놓는다. 미술을 공부했을 때와 똑같다. 하지만 <즐거움의 가치사전>은 제각각 단편적 내용들의 옴니버스 형식이라 설명이 깊지도 않을뿐더러 전체적 맥락을 공유한다. 요컨대, ‘쾌락의 종합’이다. 주제는 이렇듯 단순하지만 생각은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독자, 즉 생각의 주체와 말이다. ‘나’와 벗어난 사례는 하나도 없다.


  연결의 감도는 서로 다를 것이다. 누구는 독실한 신앙을 갖고 있어 ‘신앙’의 장(章)에서 감명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마냥 감명을 받을 수는 없다. 저자는 인문주의자이다. 비판도 항상 견지한다. 그가 종교에 대해 한 말은 도킨스와 세이건이 그의 두꺼운 책에서 했던, 혹은 수많은 강의에서 했던 주장의 축약본이다. 따라서 박민영氏는 해당 챕터의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에게 문제를 재고하도록 요구하며, 필요할 경우 더 공부하도록 유도한다. 이런 식으로 권력, 노동, 자유, 민족애, 독서, 미술, 스포츠, 애완동물(‘반려동물’이라 부르는 것이 더 좋으리라.), 쇼핑, 섹스, 매춘, 동성애, 효도 등 우리와 전혀 무관할 수 없는 거의 모든 문제들을 관통한다. 독자는 저자의 노력에 혀를 내두르며 “나는 왜 이런 생각들을 깊이 있게 해보지 않았던 것인가?”라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왜일까? 우리가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일까? 질문의 대답은 박민영氏의 서문에 명료한 문장으로 적혀 있다. 부분만 발췌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한 문단을 통째로 옮겨보고자 한다. 분명한 만큼 당연한 말이다.


  “이 책의 집필에는 꼬박 1년이 걸렸다. 그러나 자료 수집에는 거의 30년이 걸렸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지식이 총동원되었다는 의미이다. 힘에 부치는 작업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할 수 없는’ 작업 성격 때문이었다. 그것이 특정 분야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해 발언하고자 하는 나의 욕심에 불을 붙였다. 굳이 밝히자면 나는 ‘전문가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특정 분야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전문가는 결코 사회 전체를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분업화된 사회일수록 오히려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자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두루 알려고 하는 이의 실천을 나는 주변에서 거의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어떤 이가 요리도 잘 하고, 첼로를 잘 켜며, 운동에도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데, 그가 저명한 교수라면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을 다 잘해?”라며 놀라곤 한다. 여기에다 그가 생물학, 철학, 종교학 등에 모두 능통해 박사 학위를 무려 너덧 개 정도 지니고 있는 이면 놀람은 경외로 바뀐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질문을 하나 해보자. 우리는 정말 저 다양한 것들에 능통할 수 없는 사람들일까? 일부만 천재이거나, 일부만 탁월한 의지의 소유자라 ‘super-talent’의 경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일까? 과연 그것은 소수의 특권일까?


  루트번슈타인 부부의 공저 <생각의 탄생>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던진 책이었다. 박민영氏가 말한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자’란 <생각의 탄생>에서 줄기차게 주장된 ‘전인(全人)’이다. 단테와 알베르티가 그러했다. (참고하건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우리가 정의하는 ‘전인’이 아니다. 그는 언어적 능력이 다소 부족했다. 하지만 ‘예술적 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하며, 적어도 그 방면에서는 우리도 알듯이 역사 상 가장 탁월했던 인물 하나라 손꼽혀도 어색하지 않다.) 다방면에서 고루 뛰어나다는 것은 남들보다 넓은 시각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저자가 1년이나 걸렸다고 했던 집필의 시간이 평생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자와는 달리 ‘전공자’이다. 대학을 나온 이라면, 그리고 논문을 써본 이라면 전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항간에는 “직장 다닐 때에는 거의 쓸모없는 것” 정도로 회자되곤 하는 것. 그리하여 최근 대학에서는 미래형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전공논문을 폐지하고 인문학 수강을 독려한다. 이에 대해서는 짧게나마 다른 책 리뷰에서 언급한 바 있으니, 중복은 되도록 피하겠다.


  두루 견문이 있어 시각이 넓다는 것은 그 시대의 역사적 인식에 대해서도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장점일 것이다. “대중은 무지하다.”라는 말은 곧 “우리는 모두 전공자이다.”라는 말과 진배없는 것이지 않을까? 타인의 개입이 아니면 다른 분야의 것이 요구될 때 우리는 무능력자가 된다. 물론 세부적인 전공기술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중추가 되는가를 묻는다면 가령 이렇다. 나의 일부 국문학적 지식이나 미술적 지식이 그것만으로 온전한 지식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식이 삶의 지혜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할 수 없다. 요컨대 이것들은 하나로 연결되어야 한다. 관심의 사신들을 파견하고, 돌아온 그들로부터 견문을 얻어들은 뒤 모든 것을 종합해 각각의 것들을 ‘하이퍼링크’할 수 있는 역량은 전공에서 나오지 않는다. 박민영氏의 말마따나 그것은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에서 나온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전공자가 아닌 전인을 꿈꿔야 한다는 것도 일맥상통한 주장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며 얻어가야 하는 교훈도 바로 그것이다. 각각의 장과 그 장에서 설명된 사례들은 충분히 재미있다. 어렵지 않게 보따리에 넣을 수 있다. 얼마든지 대화와 작문에서 활용할 수도 있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직접적인 도움도 되리라. 하지만 그건 저자의 집필의도에서 벗어난 독서에 그친 것이다. 비유해본다. A씨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전공자이다. B씨는 권력에 대한 역사를 아주 잘 알고 있다. C군은 막 흡연에 관한 전공논문을 쓰려는 대학원생이다. 이들을 ‘쾌락’이라는 큰 나무에 가지로써 삼고, 멀찌감치 서서 그것을 바라보는 일을 한 사람이 바로 이 책의 저자이다. 이 책은 다름 아닌 원경(遠境)을 조망하는 시선, 혹은 버드아이(Bird-eye)이다.


  <즐거움의 가치사전>을 덮고 나면 독자들은 “쾌락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아.”라는 만족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조금의 이해’에서 오는 만족감이 바로 전인이 될 수 있는 기로에 섰다는 생리적 반응이다. 더 나아갈 것인지는 독자의 의지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다. 박민영氏는 각 장마다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명언들을 남겨뒀다. 명언은 의지의 마약이지 않은가. 그리하여 저자는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모든 것”을 쓰고자 이 책을 남겼으나, 독자는 쾌락의 실체를 통해 무언가에 열정을 가지려는 찰나에 놓이게 된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의 꿈이 샘솟는 소리가 나는 들린다.


  얼마 전, 나는 한 지인으로부터 카뮈가 그르니에의 책에 실어놓은 서문의 한 구절을 전해 들었다. 카뮈는 스무 살 무렵에 그르니에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회상했다. 훗날 그의 책을 읽을 독자들이 너무나도 부럽다고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즐거움의 가치사전>에 담긴 저자의 진의, 그리고 쾌락의 다양함 속에서 각기 얻을 깨달음을 생각하며, 나는 이 책을 읽을 미래의 독자들이 카뮈만큼이나 부러워진다. 그들은 또 무엇을 얻을 것이며, 그것은 나의 것과 얼마나 다르고, 나는 그로부터 또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런 기쁨은 우주적이다. 몸에 갇혀 있지 않고, 정신을 뛰어넘고, 신의 '말씀'보다도 가까우며, 모든 것을 초월해 나의 온몸을 전율케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또 누가 이 책의 한 구절에서 무엇을 얻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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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8 14: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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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8 2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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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5 17: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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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3

 

 

 

 

 

사진출처 : visualreader.pbworks.com
photograph by Jennifer Zwick

 

 

  이 공간에 글을 올리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타인의 독후감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타인의 책 리뷰는 거의 읽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야겠다.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책’의 리뷰는 접하지 않는다. 나의 것이 아닌 시선을 빌려 책을 읽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고전이나 경전을 누군가가 자신의 사상에 맞게 소화한 다음 나름의 글을 부려 책으로 낸 것이면 기꺼이 사겠으나, 짤막한 독후감을 실은 책이면 손도 대지 않는다. 이따금 “저 사람들은 어떻게 책을 읽을까?”가 궁금해질 때도 있다. 저명한 이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건 다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참는다. 다른 건 몰라도 타인의 평이나 소문보다는 나의 경험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외골수라 불려도 괜찮다. 이런 습성이 나의 ‘공감력(共感力)’을 확장시켜주는 건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막말로 “얹혀살기 싫다.”는 고집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고집을 ‘원서 읽기’에서는 부릴 수가 없다. 외국에 대한 지식을 주식으로 삼고, 우리의 것을 주전부리로 삼은 못된 습관이 오래된 탓에 책장에 꽂힌 책들의 대부분이 외국원서의 번역본이다. 고집의 원칙대로라면 나는 원서를 읽어야 한다. 번역이 ‘기계적 옮기기’가 아니라는 것은 독서가들 사이에서는 나도 알고, 너도 아는 사실이 아닌가. 역자의 역량에 따라 훌륭한 번역이 간간이 나온다. 이곳 알라딘에도 번역을 문제시 삼을 정도의 외국어 실력을 갖춘 애독자들이 꽤 많다. 그들의 글을 읽어보면, 실은 대부분 못 알아듣는 이야기이지만,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번역에 대한 평가가 좋은 책을 사자.” 권위 있는 출판사의 번역이라도 백이면 백 다 놓을 것이라 믿으면 엄하게 지갑만 팽(烹)하는 것이라는 속설이 진리라는 뜻이다. 새삼 번역의 중함을 알게 된 뒤부터는 마음에 들어도 서문 정도는 꼭 읽어보고 산다. 책값이면 하루 세 끼를 다 먹을 수 있는 때이다.


  책을 읽을 때는 또 어떠한가? 독서란, 비유컨대 “부딪히는 것”이다. 문장을 읽다가 막히는 구절도 더러 있고, 이해하지 못할 사상과 조우할 때도 있다. 실망도 참 많이 한다. 결말을 모른 채 본 영화가 다 보고 난 후에는 재미없어지는 것처럼, 책 역시 그러할 때가 있다. 요즘 출판사들은 워낙 부풀려 광고를 하기 때문에 책에 대한 기대는 적을수록 좋다는 험담도 오고 간다. 그렇게 힘들게 한 권을 다 읽어 놓으면 “내가 그것에 대해 과연 어떤 할 말이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읽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쓰는 것보다는 “읽은 것에 대해 쓰는 것”이 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것이 쉬운 것보다 반드시 나은 것도 아니다. 뭘 써야할지 모를 때에는 차라리 읽고 나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마음으로 어렴풋하게 글을 쓰고, 타인에게는 자신의 감상에 대해 공감해줄 것을 요구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그리하여, 한샤오궁의 말처럼 우리가 평생 소장해야 하는 책은 드물게 만날 수밖에 없다. 독서란 이 모든 것들이 조화되었을 때, “아, 참 잘 읽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하나의 요리이다. 무엇 하나 빠지면 안 된다. 더욱이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면 시쳇말로 “말짱꽝”이다.


  ‘창조적 독서’를 운운하는 요즘이다. 나는 독서에 비기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창조’라는 말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 같아 가끔 배알이 꼬인다. 사람들은 정해진 것을 좋아한다. 정해진 것이 공신력의 인정을 받으면 그것을 진리로 여기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정신과 사상에도 바코드가 찍혀 얼마 정도의 가치가 있으리라 평가되어야 그 쪽으로 조금이나마 움직일 채비를 한다. 하지만 대개 일상이란 일상 바깥의 삶을 기웃거리는 형국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들 배운 사람이라 자부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창조적일 수 있는 독서가 어렵다고 불평(독서는 원래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말이다!)하며,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을까?”와 같은 양적 문제에서부터 시작해 “어떻게 읽으면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온갖 공신력의 응원을 받고자 한다. 저명한 누군가가 ‘글 읽기’에 대한 주제로 책을 내면 “글 읽기에 대한 글 읽기”를 위해 기꺼이 돈을 주고 산다. 그것들 대부분이 비슷한 말을, 그 비슷한 말들 대부분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위안을 받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서의 양과 질은 언제나 첨예한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자신이 책을 너무 빨리 읽는다고 해서 소위 말하는 “깊은 독서”를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고, 책을 중구난방으로 읽어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것은 무엇이며, 자신은 남들보다 거북이처럼 책을 읽는 것 같아 늘 불안하다고 기우(杞憂)를 갖는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독서는 책과 얼굴을 맞대는 행위이다. 타인의 눈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문장을 읽고, 아인슈타인이나 뉴턴의 뇌가 아닌 자신의 뇌로 그것을 이해하며, 무엇보다도 그 독서하는 이의 마음은 자기 자신의 것이다. 너무 어려우면 쉬운 것을 찾으면 되고, 사상이 맞지 않으면 또 다시 골라 읽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우리는 독서의 ‘도(道)’가 있으리라 여긴다. 아니면 그렇게 여기도록 어떤 방식으로든 조정당하는 것이다.

 

  중학교 국어교사이신 어머니께서 이따금 교내 독후감 대회용이라며 아이들의 글을 가지고 오신다. 그 맘 때 나의 모습을 회상하며 하릴없이 그것들을 읽고 있노라면 글들이 하나같이 깊이도 얕고, 무엇보다도 턱없이 부족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따금 낭중지추처럼 눈에 띠는 글들을 만나면 반갑다. 하지만 그건 아이들 전체의 1%도 안 될 것이다. 그나마 발견한 글들 중 대부분도 다시 읽어보면 신선도가 떨어진다. 어머니의 말씀대로라면 학생들이 독서에 할애하는 시간은 턱없이 적다. 문제는 “얼마나 읽느냐?”가 아니다. 그들을 볼 때는 이미 “읽느냐, 안 읽느냐?”라는 수준으로 비판의 시각이 뚝 떨어진다.


  스페인 못지않게 책 안 읽는 대학생들이 많은 우리나라이다. 이런 세태의 책임을 어디인가로, 혹은 누군가에게 전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무책임한 행동이다. 문제는 개개인이 지닌 지적 성실성에 있다. 사람들은 요리조리 핑계를 잘 댄다. <믿음의 엔진>을 복기하는 자리에서도 거듭 밝혔지만 우리는 훌륭한 거짓말쟁이이다. 그리고 문제는 하나 더 있다. 우리가 문제의 방향을 애당초 잘못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즉 양적 문제에 지나치게 매달린 것은 아닌가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단락을 통해 거칠게 적어 내려온 나의 주장은 결국 이것이다. 책을 “어떻게, 얼마만큼 읽어라.”라는 것은 논리 상 말이 안 되는 일률이다. 한 권의 책이 너무 좋아 몇 달이 걸려도 필사하며 되읽는 사람이 있다. 속독을 너무나도 잘해 한 달에 수 십 권의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 독서 방식에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것을 문제시하는 것은 시중에 나온 수많은 책들의 다양성을 독자들이 무시하는 것과 진배없다. 책이 다양한 만큼 독자도 다양하며, 다양해야 정상이다. 다양성이란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조언과는 크게 상관없다. 조언들이 이따금 우리의 “더, 더, 더”라는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맹종하다보면 ‘주체성’이라는 크나큰 자존감이 상실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독서가 “읽어서 남 주는 행위”가 아닌 것은 자명하다. 어떤 글을 읽든, 어떻게 읽든, 얼마나 읽든 중요한 것은 독자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이다. 그렇다. 우리의 독서가 힘든 이유는 다중의 힘에 휘둘리는 얇은 귀, 그 속물근성 때문이다. 다른 것들 다 내려놓고, 책과 일대일로 정직하게 대면하는 습관만 기른다면, 그리고 독서의 어려움을 직시한다면 저 수많은 책들이 모두 자기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책은 '너의 책'이 아니다. '나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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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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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3

 

 

 

[사진출처] guardian.co.uk

 

 

  정확치 않은 기억으로는, 그 때는 아마 겨울이었다. 한창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소설을 읽겠노라고 벼르던 어린 시절. 카뮈, 가오싱젠, 쿳시, 그라스, 지드, 야스나리. 하지만 이들의 글은 얼마나 어려웠던가. 많은 것을 느끼기는커녕 나의 모자람만 반복적으로 확인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를 너무 앞당겨 경험한 기분. 처참하진 않았다. 동경은 오히려 커졌다. 단, 문제는 문학에의 열정이 식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문제를 앞에 두고 펜을 굴리며 잠시 공황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면 적절한 비유일까. 체력과 의지가 탁월하지 못한 나는 장애물을 만나면 한참을 머리로 씨름한다. 아니, 씨름만 한다. 문학에도 기초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노벨문학상’이라는 후광만을 바라보다 제 눈 먼 줄을 모르게 된 꼴이라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슨 근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 동경한 것은 계속 동경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끈을 만든다. 다행이도 나는 그 끈의 어느 즈음에서 유독 애착을 갖게 된 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을 알게 되었다. 십 수 명의 사람들과 차례대로 만나 멀찌감치 서 추상적인 이야기만 나누던 차에 어떤 단짝을 만난 기분이다.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이다.

 

 

*   *   *

 

 

  무언가로부터 충격을 받아 어떤 잔상이 생기는 건 워낙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솔제니친의 이 작품에서 나는 그 충격을 경험했다. 그것도 첫 장에서부터. 솔제니친은 구구절절 뭔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소설을 “기상을 알리는 신호 소리”, “레일을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로 시작한다. 두텁게 낀 성에가 소리를 돕는다. 곧바로 몸을 움츠리게 된다. 이 모든 낯선 상황은 소설의 마지막까지 별 수고로움 없이 전개된다. 솔제니친이 직접 겪은 체험이 낳은 가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낯섦’이 소설을 익는 내내 ‘익숙함’으로 변하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요컨대, 본래 나는 슈호프 같은 사람이었던 것일까? 노련한 솜씨로 취사부로부터 국을 네 그릇이나 빼돌리고 그 중 하나는 적어도 나에게 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그 사람 말이다. 어떤 경험으로도 이 책의 이야기를 공감하지 못한다. 수용소 생활을 직접 해본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것도 시베리아의 수용소를. 그러나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때론 해군 중령 죄수처럼 영창 갈 걸 알면서도 대꾸를 해보거나, 아니면 저열한 페추코프처럼 킁킁거리면서 어디 콩고물 떨어진 곳은 없나 눈치만 살피는 것이다. 그 모든 사람들이 나의 일면들에 속속 자리를 잡는데, 단 한 사람만은 될 수 없을 듯하다. 반장 추린 말이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은 전쟁터가 아닌 수용소에 더 적합한 말이지 않을까. 강한 자도 총을 맞으면 죽을 수 있으니. 반면, 솔제니친의 이 소설에는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다.”라는 비공식적인 정답이 여러 죄수들의 행동과 입담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나치게 정직하거나, 열심히 하거나, 혹은 도덕적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눈치를 잘 봐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원 전체의 목숨을 좌우하는 반장의 말을 잘 따라야 하고, 적절한 뇌물은 필수이다. 강하면 부러지는 곳이 다름 아닌 수용소이다. 형기가 “전혀 줄어들 기미가 없는(pg.76)” 이곳에서는 추위를 피하고, 먹을 것을 쫓고, 휴식을 갈구하는 삶에 맹종하게 된다. 그리하여 “당장 내일이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pg.76).”이라, 슈호프는 굴종하지 않는 해군 중령 죄수의 미래도 결국 죄수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며 넋두리로 생각해본다. 이런 상황에 우리가 빠지게 된다면 머리와 온 몸의 감각은 오직 하나만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앞이 캄캄한 곳에서 본능적으로 하게 되는 행동. “발밑만 보고 걸어 다니는(pg.82)” 것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의 수용소가 마냥 시베리아의 칼바람 같은 것은 아니다. 이곳도 엄연히 하나의 공동체이다. 누군가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할 관계라 해도 인정(人情)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낯선 환경이 읽는 이에게 금방 익숙해지는 까닭. 온갖 부류의 죄수들의 ‘온갖 이야기’는 또한 우리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극대화되어 있다.”는 것만 빼곤 어떤 것 하나 본질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없다.


  모스크바 사람인 체자리는 슈호프의 반원들에게 어렵지 않은 작업을 배당받게 해준다는 명목으로 그 어떤 이들보다 쉬운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엄동의 바깥에서 땀 흘릴 정도로 일하는 죄수들이 그를 원망할 수 있을까? 반장도 체자리는 존경하는데 말이다. 슈호프는 오히려 그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면서 그로부터 조금의 빵이나 국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의 소포를 지켜주고, 몰래 숨겨 왔던 만능칼도 빌려주면서 따뜻하게 배를 덥힐 수 있다면 그 무엇이 아쉬울까. 연차가 별로 안 된 해군 중령 죄수도 말은 명령조로 하지만 작업장에서는 녹초가 될 때까지 열심히 일한다. 알료쉬카와 같은 온순한 죄수는 말 그대로 ‘보물’이다. 하이에나와 같은 페추코프도 때론 불쌍해 보인다. 진짜 죄수든, 억울한 죄수든, 일단 그들의 편에 서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그들이 증오하는 간수들은 정말 악마처럼 느껴진다.


  반원들은 카리스마 있는 반장 추린의 비호를 받는다는 까닭에 서로 주동(主動)이 되어 도맡은 일을 끝까지 하고자 한다. 작업장에서 누군가가 돌아오지 않아 수용소 문을 코앞에 두고도 대기해야 할 때에 죄수들은 욕지거리를 한 바가지씩 내뱉으며, 슈호프의 말마따나 그를 죄수들 한복판에 세워둔다면 “송아지 새끼처럼 갈기갈기 찢어(pg.141)” 살점 하나 안 남기고 처참히 죽여 버릴 듯 군다. 하지만 이내 수용소 문을 통과하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그랬던 그들이 식당 앞에서는 다시 추위와 굶주림에 굴종한다. 그들은 마치 베를린을 탈환한 옛 ‘붉은 군대’를 연상케 하듯 식당으로 돌진하려는 장면을 연출한다. 모든 이들이 제각각 쓸모가 있고, 행동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식당의 풍경이다. 솔제니친은 그 풍경을 “경건하다.”고 묘사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빵과 국. 그것도 대부분이 썩은 재료로 만든 것들이다. 그러나 누구도 식사의 순간을 방해하지 못한다. 따뜻한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면 “한 번 견뎌보자.”라는 의지가 생기는 까닭이다. 복잡한 삶 속에서 잇달아 좌절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든든한 속은 늘 우리의 뚝심을 격려하지 않던가. 야만적이라 여길 법한 이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을 이가 있을까. 살벌한 군부 시절을 겪은 어르신들이라면 그 서슬 퍼런 시간을 그나마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회상해볼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우리(한국사람)’에게 각인되어 있는 역사의 한 토막도 짧게 소설에 등장한다. 슈호프가 담배를 구하기 위해 라트비아인의 방에 찾아갔을 때, 마침 그 방의 죄수들이 6.25 전쟁(중공군 개입)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면 말이다. 이런 사소한 것들도 ‘우리’를 익숙하게 만든다.


  “다른 놈들이 오늘 죽는다면 나는 내일 죽을 거란 말이다!(pg.195)” 
  독일의 유명한 축구선수 중에 한 명이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더라. 오래된 분데스리가(독일의 프로축구 최상위 리그) 축구팬이라면 알 법한, 소위 ‘사냥개’라 불렸던 (지금은 은퇴한) 그의 투지와 관련돼 한동안 명언이라 회자된 것인데, 그가 말하기를 자기가 누군가에게 한 대 맞는다면 자신은 그의 엉덩이를 두 대 걷어찰 것이라고 했다. 야만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든 자신의 손해는 늦춰 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손해 보는 세태에서 인정이 식고, 마음이 인색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무엇이 모범이고, 무엇이 도덕인가를 더욱 열심히 논하려는 이때에 우리가 늘 보고 듣는 비리와 혐의들이야말로 진정한 야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언젠가 “도덕은 얇다.”고 말한 적이 있는 듯하다. 역으로 말하면 그것은 도덕의 실천이 어렵지 않다는 희망이기도 하지만 당장은 그저 식어버린 사회를 묘사한 것과 다르지 않다. 수용소의 삶은 점점 익숙해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체감된다.


  묻는다. 신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솔제니친은 그 부분도 빼놓지 않는다. 불평하는 법 없고, 올곧게 친절한 알료쉬카가 취침 전 슈호프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독자들은 두 개의 목적을 발견한다. 둘 다 맹목적이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맹목의 손가락이 어딜 가리키고 있는가가 다르다. 우리는 대개 둘 중 하나이다.
  “왜 영혼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냐구? 알료쉬카, 기도라는 건 죄수들이 써내는 진정서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말해 봤자, 꿩 구워먹은 소식이 될 뿐이고, 거절당하기 십상이란 말이야!(pg.200)
  알료쉬카도 지지 않는다. 하지만 슈호프는 이미 담배를 태우며 생각에 잠긴 뒤였다.
  “자넨,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감옥에 들어왔으니까. 하지만 난, 무엇 때문에 여기 들어왔지? 1941년에 전쟁 준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pg.204)
  그리하여 슈호프는 그저 집에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논쟁은 결국 큰 의미 없이 끝난다. 어제 한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슈호프는 체자리를 도와준 대가로 받은 비스킷 하나를 알료쉬카에게 넘겨준다. 그가 신앙을 강하게 주장해도 슈호프는 알료쉬카가 ‘좋은 놈’임을 안다.


  유난히 ‘운수 좋은 날’이었던 슈호프의 하루는 이렇게 끝난다. 내일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상을 알리는 신호 소리”와 “레일을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창에는 두텁게 낀 성에가 이곳이 시베리아임을 알려줄 것이다. 단순한 이곳의 삶에서 “삶”을 쫓는 이들의 묵묵한 전쟁은 몇 십 년이고 계속될 것이다. 책은 얇다. 하루치 분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제니친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가 직접 겪은 8년의 형기를 통해 알게 된 진실이다. 이 책을 가장 밑에 365권 쌓아놓고, 그 위로 여덟 겹을 더 쌓아야 한다. 상상이 불가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 하나 옮겨놓고, 글을 접는다.
  “토끼들의 즐거움이다. 그래, 우리를 보고 놀라는 개구리들도 있다고 좋아하는 그런 즐거움 말이다.(pg.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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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내의 충돌 현대의 지성 127
디테 젱하스 지음, 이은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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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8

[깊게 읽기] 문명 내의 충돌 (1~4편)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어제 시리아에서는 또 한 번의 차량폭탄테러사건으로 인해 7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국 <뉴욕타임스(이하 NYT)>紙 홈페이지의 1면에는 거의 매일 아랍의 정치격변과 테러, 이라크, 이란, 파키스탄 등에서의 미군 피해, 미군 철수 등이 헤드라인으로 올라온다. 근 몇 주 동안 위와 같은 뉴스들을 제치고 1면을 장식한 사건은, 내 기억으로는 김정일 위원장 사망과 김정은의 집권 외에는 없었다. 미국이 아랍에 얼마나 깊게 개입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타깝게도 근래 들어 NYT가 보도하는 거의 모든 아랍 관련 국제사건들은 비극이다. 각 기사들에는 익명을 요구한 인터뷰이들의 부정적인 의견도 빠지지 않는다. 작년은 2001년 참사의 10주년 되는 해였다. 나아진 것은 없는 듯하다.


  작년 여름학기에 나는 요한 갈퉁의 평화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강의 하나를 들었다. 강의를 통해 나는 간디의 비폭력 평화운동을 근간으로 하는 창조적인 대응책들을 배우게 되었다. 납득은 되었다. 하지만 행동으로 이어가는 방향에 대해서는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생산적인 내용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강의의 레포트 주제로 나는 체첸의 내전을 선택했다. 그와 관련된 이론을 알아보기 위해 집어든 책이 바로 젱하스의 <문명 내의 충돌>이다. 그가 왜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는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반년만에 다시 읽어 나의 이해는 더욱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 어딘가가 씁쓸하면서도 한없이 공허했다. 이 책은 10년도 더 전에 발행된 책이다. 평화주의자인 젱하스는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제안은 거의 실천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다시 10년 뒤의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 한 달에 걸친 깊은 독서를 마치고 리뷰를 쓰려던 지금, 나는 어제 시리아에서 일어난 폭탄테러를 망연자실하게 상기하게 되었다. 일개의 어린 독자가 세계의 문제를 다룬 책을 통해 그 한복판에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장벽이 느껴진다. 공허해진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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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 내의 충돌>은, 지난 네 편의 심층독서에서 파헤친 것과 같이 ‘간문화적 철학’을 위한 태도를 소개하는 장이다. 기존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그들의 사고를 넓혀갔다면 현대의 철학자들은 사고의 경계에 서서 이론이 아닌 행동과 사건의 앞에 대면해야 한다. ‘간문화(間文化)’라는 문자만 보면 그것은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두 문화의 깊은 역사와 현재의 모습, 체제, 특수성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대한 정보량과 학문 간 토론, 심층이해, 현장방문 등을 필요로 한다. 석학들도 그것을 매우 어려워한다. 젱하스가 말한 “무의미한 학술대회”는 지금도 개최되고 있을 것이다. 이 철학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추상적인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의 길을 여는 학문이며, 따라서 행동과 직결된다. 이 철학은 제도가 될 수 있다. 젱하스는 이 철학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이해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자신의 저서를 통해 간곡하게 소개한다.


  매일 뉴스를 통해서 우리도 접한다. 세계는 갈등의 전쟁터이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해 연일 언론이 보도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국제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평화보다는 갈등을 더 직접적으로 체감한다. 살인, 방화, 성폭력, 테러, 비리 등의 보도가 빠지는 날이 없고, 이것들에 우리는 거의 신체적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혀를 차고, 고개를 좌우로 젓고, 입술을 삐죽 내밀거나, 아니면 한숨을 쉰다. 이렇게 우리를 치떨게 만드는 사건들은 우리가 갈등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다원적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는 바는 일치된다. 갈등을 중재해줄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의 정착이나, 소통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지도자의 등장이다. 법은 사소한 모든 것을 다룰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목도한 우리는 법을 탓한다. 그러나 그건 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갖게 되는 한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재하고자 하는 열망이며, 사회적 합의이다. 우리나라는 그런 힘도, 그럴 수 있는 지도자도 부재한 상태이다. 따라서 우리는 젱하스의 이 말에 동의할 수 있고, 동의해야 한다.
  “갈등을 통해 점점 강화되는 다원성을 위한 적절한 표현방식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그렇다면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여러 집단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다원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유일신 종교들은 이 태도에 대해 소극적이며, 다원성을 기초로 하는 종교인 불교와 힌두교에서도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이해를 방해하는 요인들은 많다. 종교적 특성을 누구나 먼저 꼽겠으나, 현대사회에 들어 그것의 영향력은 감소(종교최소주의 사회)해 있으니, 다른 요인을 하나 더 들자면 그것은 바로 권력의 문제이다. 한 가지 예로, 내가 강의과제로 제출하기 위해 조사했던 체첸의 내전에서 이 권력의 문제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상황이 유독 복잡한 지역이므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으나, 체첸의 대(對)러시아 항쟁의 근간(根幹)에는 상황에 알맞게 사용할 수 있는 종교(이슬람)가 있다. 권력이 종교를 손에 쥐고 있을 때, 그 밑의 사람들은 다원성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다. 여기에 민족주의와 낙후된 경제상황이 더해지면 상황은 극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일반적 이해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원성의 개념은 유럽이 백 년은 넘는 오랜 시간동안 온갖 시행착오와 피, 고통, 부정적인 역사를 감수해가며 얻게 된 근대화의 결론으로, 그것은 곧 ‘민주(民主)’라는 개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서구화’라고 칭했을 때, 동아시아는 서구화를 가장 성공적으로 이룩한 곳으로 손꼽힌다. 젱하스는 이 성공의 배경에는 바로 경제적 발전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성장한 국민이 경제적인 혜택을 보장받지 못한다거나, 혹은 경제적으로 성장한 국민이 정치적 참여를 보장받지 못한다면 동구권의 실존사회주의, 이슬람 세계, 다원적 인도 사회 등에서 발생했던 문제를 결코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한 사실이다. 이 모든 실패의 사례들은 다원성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던 ‘대항 프로젝트’의 토양에서 자라난 쓰디쓴 열매였다. 젱하스는 ‘아시아적 가치’도 그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고 분명하게 분류한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역사는 보수적 가치를 버리고 과감한 혁신을 통해 수준급의 민주화를 이룩하는데 성공했다. 우리나라와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가 유럽보다도 놀라운 정도의 역사를 쓴 것은 그도 인정한다.


  문제는 여전히 문화 간 대화가 시도될 여지가 없는 사례들이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사례들인지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사례를 바라보는 눈은 거의 일괄적으로 서구의 것인데, 젱하스는 이것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서구 사람들은 (헌팅턴의 용어를 쓰자면) ‘문화 간 충돌’을 바라보기에 앞서 이미 서구의 우월을 가정한다. 이에 젱하스는 이렇게 말한다. “유럽의 발전 경로가 근대화주의자들의 지속적인 승리였고, 전통주의자들은 항상 전망이 없이 후퇴하는 싸움만 했다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그 근거로 제 2차 세계대전 후 보통선거권을 가진 나라는 겨우 3개국이었고, 여성선거권은 20세기에 소극적으로 부여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든다. 오늘날 서구가 자랑하는 그들의 근대화가 마치 오래전부터 항구적으로 누려온 것이라는 환상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근대화의 산물을 영양분 삼을 수 있었던 후손의 자만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고를 물리고 그들의 역사를 되돌아본 다음, 타문화를 대할 때, 적어도 이슬람을 대할 때에 그들(과 우리)이 가져야 하는 태도는 “실제 모습에 주목하는 것”이다. 매우 새삼스러운 말처럼도 들린다. “시리아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한 것이 실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인가?”라고 주장하고픈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젱하스는 단호하게 말한다. 근본주의에 대한 유사한 비판이 계속되는 세태는 비생산적이라고. 이슬람의 민주적 대표자들과 열린 대화가 필요하다고. 공산주의 붕괴 이후 ‘적’의 이미지가 이슬람에게 전가되었다는 항간의 ‘괴담’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것일 뿐이라고. 관심의 편향이 ‘서구 대 이슬람’의, 마치 십자군 전쟁 이전부터 시작된 것처럼 가공된 기나긴 피의 역사에 대해 숱한 환상을 만들어냈다. 사실 이와 같은 편견은 두 세력 사이에 공존의 역사가 있었던 장에 직접 들어가 본다면 억측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 금방 들통 나고 말 것이다. 가령,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처럼 성지 예루살렘에서 공존하는 각 종교 세력과 교파들의 암묵적 합의가 오늘날이라고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두 세력의 역사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한 편견 때문일까?


  자만과 편견을 물리고, 눈을 돌릴 수 있게 된다면 젱하스는 이런 것들을 바라보라고 조언한다. 먼저, ‘서구 대 이슬람’ 이외의 문제 중 가장, 아니 ‘서구 대 이슬람’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그가 진단한 인도 내부의 문제이다. 인도의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는 여러 종족, 종교와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며 거의 모든 갈등의 근본을 양산하고 있다. 파키스탄과의 대외적 문제뿐만 아니라, 인도 내부의 문제도 시한폭탄과 같다. 이를 통해 젱하스는 ‘문화 내부’의 문제 역시 간과하면 안 된다고 본다. 이는 미국도, 아랍도 마찬가지이다. 두 세력을 상징하는 두 종교는 비폭력을 원칙으로 하지 않기에 폭력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할 수 있다(이와 관련해서는 <위도 10도>의 선교 내용과 이슬람의 ‘지하드’를 참조하거나, 르네 지라르의 저서들을 읽어보면 좋다.)고 하지만 비폭력을 원칙으로 하는 힌두교와 불교 사이의 갈등(스리랑카)은 얼핏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막상 내부의 문제는 부패한 엘리트들의 권력쟁탈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갈등은 종교의 여부를 떠나 어디에서든 존재할 수 있다. 갈등을 양산할 수 있는 조건만 충족되면 된다.


  이러한 갈등은 동아시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있더라도 그 사례들은 주요 사건이 일어나는 지역보다 현저히 적고, 사회적 위력도 작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비교적 평화로운 상황(막상 들여다보면 젱하스의 설명처럼 평화롭지만은 않다. 우리나라의 분단 상황도 그러하고, 한중일과 대만의 첨예한 갈등, 러시아의 개입, 남중국해 관련 문제 등도 우리가 자주 접하는 긴장이다.)을 유지하는 까닭은, 거듭 설명하지만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상관관계 때문이다. 젱하스는 이슬람 사회가 동아시아를 본받아야한다고까지 말한다. 반대로 실존사회주의의 실패로부터도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얻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모든 주장들은 젱하스가 ‘근대화’라는 것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 “근대의 역동성과 매력은 바로 운동과 반대운동, 그리고 그것의 확산을 통해 볼 수 있는 다양성에 있다.” 이 다양성은 “잘 쓰면” 건설적 합의를 통해 광범위한 평화상태를 유지하게 해주고, “잘못 쓰면” 내전의 씨앗이 된다. 서구는 “잘 쓰게” 되기까지 숱한 내전을 겪어왔다. 대신 그 상처는 다원성에 대한 이해, 성찰적 태도, 제도적 고찰 등의 여러 해결책을 발제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키워줬다. 진지하게 세계 문제를 다루는 서구의 학자들은 그들의 역사를 교훈 삼아 다른 곳의 근대화도 이뤄지길 간절히 소망하는데, 이 점에서 젱하스는 요한 갈퉁과 만난다. 그리고 그가 비판한 헌팅턴과도 조우한다.


  평화는 중재의 능력에서 비롯되는 현실적 상태이다. “평화를 바랍니다.”라는 추상적 말로 끝날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운동이며, 이동이다. 그 밑바탕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와 체제, 그리고 이해이다. 행동에 앞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 이해가 어떻게 갈등의 지역에 단비처럼 내릴 수 있느냐이다. 이 점에 있어서 <문명 내의 충돌>의 독서는 공허하게 남는다. 내일 당장 9.11 테러와 비견될 만한 참사가 벌어져 세계가 냉각된다고 해도, 안타깝지만 별로 이상하지 않은 현실이다. 이 책은 나에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애당초 하지 못하게 했다. 이럴 때 독자는 압도당한다. 독서가 늦어진 까닭도, 핑계대보자면 그 때문이다. 문득 세계 저 어딘가의 미래를 소망해본다. ‘아랍의 봄’이 정말 봄이 되어 평화에 대한 열망과 중재의 힘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면,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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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6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

 

 

  서양이 ‘아시아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언론보도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부심을 드높였던 때가 기억난다. 그 때 나는 세상 돌아가는 바를 거의 몰랐기 때문에 대학입학 수시1차 선발에 논술문제로 나오지 않을까 싶어 한 번 들여다보는 정도에 그쳤지만 돌이켜보건대 ‘아시아적 가치’에 대해서는 지금도 잘 모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진중권, 박노자, 강준만 등의 글을 읽고, 더불어 홍세화의 ‘서구 對 우리나라’의 비교를 읽으면 그 가치의 테두리가 얼핏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책을 덮고 나면 그 모든 가치들을 역사의 유전으로 물려받은 내가 객관적인 입장에 서기란 참으로 어렵다.


  서양미술을 공부할 때에는 서구의 사고 발전과정에 주목하면서 특히 모더니즘의 파격이 현대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클 것이라고 예상한 적도 있다. 바깥 것을 보다보면 늘 나의 것이 모자라 보이는 법이리라. 그런데 또 다른 면에서는 아시아적 가치를 추종하곤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다큐멘터리인 <차마고도>는 KBS의 ‘인사이트 아시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된 것인데, 이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때마침 서양이 동양을 주목하는 추세에 맞물려) 아시아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취지를 갖고 있다. 유교와 불교는 물론이고, 아시아에서 발원한 국수의 문화, 잃어버린 옛 가치들과 대안적 의미들을 발견하고자 했던 차마고도의 험준한 세계 등을 비춰준 적이 있고, 유독 관심을 많이 받았던 <차마고도>는 작년 12월에 영등위로부터 다큐멘터리 부문 “좋은 영상물”상을 받기도 했다.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자면, ‘인사이트 아시아’ 프로젝트는 <차마고도> 외에도 다큐멘터리 <누들로드>를 제작해서 큰 인기를 누렸지만 그 이후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지는 웹사이트가 개설되어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아시안 트리(가족 관계)’, ‘아시안 비트(장단)’, 불교(같은 주제로는 작년 말에 팔만대장경과 대안적 불교 관련 다큐멘터리인 <다르마>가 있었는데, 이는 인사이트 아시아 프로젝트가 아니다.)와 같은 아시아적 중심 주제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하루 빨리 계획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결국 나는 ‘아시아적 가치’ 속에서 서양을 바라보고 이따금 제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 연어와 같은 존재인 셈이었다. 우리는, 특히 우리와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발전에 있어 민주주의가 반드시 서양의 노선을 밟을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곤 했고, 그 중심에는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가 있었다. 이에 민주주의를 앞세워야 한다고 반박한 故김대중氏의 주장이 우리나라와 싱가포르 사이의 사상적 차이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일부 병폐로 기억되고 있는 가치를 애써 지키려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 가치는 경제발전을 가져왔고, ‘아버지’상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대중들에게 심어놨으며, 무엇보다도 옛것을 생각했을 때 연장자들이 느끼는 ‘따뜻함’의 촉각적 가치들로 비약되기도 했다.


  민주주의가 대중에게 있어 소중한 가치라는 오랜 생각에 수긍한다면 우리는 소위 ‘박통’시대로 대변되는 낮은 수준의 인권에 강한 부정을 해야 하는데, 아직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 다행이도 우리나라는 젱하스가 말한 단계를 잘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반(反)식민지주의의 상태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휘어잡을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를 요구한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도 같다. 그 과정에서 지도자들은 국가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는데, 이 시기의 이데올로기는 상흔으로 남지만 겉으로 보기에 국가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다. 그 과정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대중들에게는 ‘평등’, ‘민주’라는 가치들이 주목받는다. 평등과 민주의 형태는 서양이 백년은 훨씬 더 걸린 오랜 시간동안 고통과 갈등을 통해 도출해낸 것으로, 그것과 비슷한 수준이 막 경제발전을 이룩한 신흥 근대화 국가에게도 요구된다. 우리나라로 이를테면 7~80년대이다. 그 이전의 항쟁도 세계사적으로 보자면 매우 고무적인 사건이다. 알다시피 서양과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은 매우 다르다. 문민정부, 참여정부 이후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상당부분 진행되었는데, 아직 상흔을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이들, 가진 것으로 내리 누르려는 이들, 본래 민주화는 갈등의 연속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전체주의적 성향을 내비치는 상황이라 누구나 만족할 만한 수준의 상태에는 이르지 못했다. 요컨대, 우리나라는 갈등을 조정하는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의 소통부재도 큰 문제 중 하나이다. (마침 소통과 관련해서 좋은 다큐멘터리가 KBS 일요스페셜로 방영 중에 있다. SBS에서도 저번 주에 차두리氏와 북한 정대세氏가 함께 출연한 소통 관련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바 있다.)

 

 

 

 

 

중국의 한 미팅 TV 프로그램

 

 

  젱하스에 따르면 아시아적 가치는 이런 것들과 유사하다. 아나톨리적 가치, 슈바벤적 가치, 롬바르디아적 가치(슈바벤과 롬바르디아는 지명으로 전자는 독일이고, 후자는 이탈리아이다. 그런데 아나톨리는 무엇인지 찾아내지 못했다. 생각해보건대 이들은 개인보다는 전체를 강조하는 우리의 가치판단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곳일 것이다.), 이슬람적 가치, 실존사회주의적 가치, 신권주의적 가치, 사회주의-조합주의적 가치 등과 말이다. 몇 년 간 미술사를 공부했기에 이 독일 석학의 비유에 내가 아는 것 하나를 덧붙여보자면, 반(反)종교개혁적 가치도 어울릴 것이다. 이런 가치들은 서구적 민주주의와는 흔히 상반되는 것이라 불리지만 지역적 특성이 있기 때문에 양상들은 모두 다르다. 다만 수구적 성향이라는 것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가치들에 대해 저항하는 가치들이다. 그러나 아시아적 가치는 탁월한 경제발전의 덕을 봤다는 점에 있어서 상기 가치들과는 달리 성공 사례 중 하나로 서양의 관심을 받은 것이다. 이슬람과 실존사회주의, 신권주의는 큰 실패를 맛봤고, 경제발전의 단기적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에는 온갖 부정과 비리들이 드러나게 마련이며, 그리하여 그들이 겪은 병폐는 오히려 그들의 가치를 더욱 철저하게 지키고자 하는 보수적 성향을 키우게 된다. 이들은 사상과 종교로써 세속과 저항하려고도 한다.


  이런 저항적 사상과 관련해 나는 최근 중국을 주목했는데, 학자가 아니라 체계적인 분석은 하지 못했지만 최근 중국의 태도는 과거와는 다르다. 작년 말일에 에드워드 웡(Edward Wong)이 뉴욕타임스紙에 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기사는 매우 흥미로웠다. 웡이 주목한 것은 중국의 각 방송국들이 ‘변화하는 중국’, ‘소통하는 중국’을 모토로 해서 얼마간 소위 ‘된장남’과 ‘된장녀’를 연상케 하는 젊은 남녀들의 미팅 프로그램을 방송한 것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케이블 TV에서도 이런 것들을 많이 해주니, 새삼 어떤 프로그램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 프로그램들은 중국 CCTV의 저녁 뉴스가 기록하는 높은 시청률을 조금씩 나눠갈 만큼 큰 주목을 받았다. 프로그램을 대충 살펴보면 ‘막장’에 가깝다. 어떤 여자는 “나와 손잡고 싶으면 거액을 줘야 할 거에요.”라고 콧대를 세운다. 사회자가 왜 그러냐고 묻자, 그녀는 “나의 남자친구가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반문한다. 남자도 막장이긴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중국 젊은이들의 ‘아시아적 가치’를 희석시켰고, 급기야 정부가 나서 그 프로그램들을 폐지하거나, 혹은 벌금을 부과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나 역시 채널을 돌리다보면 일부 케이블방송 프로그램들이 대중의 다양성, 정신적 가치, 혹은 한국적인 것들을 강하게 부정하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가치가 위협받으면 자연스럽게 그 프로그램에 대한 반감이 생기게 마련이다. 즉물적 가치들의 선정성과 공격성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는 우리 역시 겪어봐서 다 알고 있다. 중국 방송계가 처한 상황은 지금의 우리와 진배없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가치의 두둔과 강조를 넘어선 ‘제한’이 중국인들을 옭아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뉴스와 신문에서는 중국의 신흥 갑부들이 중국정부의 강력한 경제압박을 피해 이민을 선택한다는 보도를 한 적이 있다. 이 현상은 중국에게 큰 골칫거리이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을 압박하며 소위 ‘차이메리카’의 시대를 열기 위해 국제 석유시장을 요모조모 공략하고 있고, 항공모함을 건조하여 미국의 태평양 라인을 경계해 베트남, 필리핀 등과의 남중국해 권력 다툼에서 우위를 보이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정작 안방이 문제인 셈이다. 돈을 가진 이들이 나가버리면 이미 흉흉해진 내부 경제가 얼어붙거나 흔들리게 될 것이 뻔한데, 막상 중국정부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고, 그들의 출혈만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재작년으로 기억한다. 중국정부가 대대적인 공자(孔子) 알리기에 나섰을 때였을 것이다. 그 무렵 우리는 유교적 가치에 대해 재고하고자 했고, 인문학계에서도 열렬한 반응을 했었다. 작년 베스트셀러 중 하나가 <관중과 공자>였으니 사상적 조류는 지속된다고 하겠다. 하지만 정작 중국정부가 겪고 있는 문제들은 자율적 시장의 동향이 아시아적 가치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주는데, 다만 중국의 아시아적 가치는 우리나라나 싱가포르와는 달리 실존사회주의적 가치의 맥락에서 진행되는 것이므로 앞으로 그들이 시장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게 될지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서구에서는 중국의 문이 열리는 것을 두려워하겠지만.


  젱하스가 결국 ‘아시아적 가치’를 논하는 짧은 장에서 하고자 했던 말은 그것을 맥락 없이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나는 이 경고가 섬뜩하게 들린다. 까닭은 이렇다.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아시아적 가치’라는 말은 별로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다양한 소통 매체를 활용할 수 있고, 이미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상의 이동과 변화가 이전 세대보다는 더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물론 모두 그렇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나, 유연성이 더 강화된 세대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본다. 그런 세대들이 점차 사회를 주도하는 시대에 접어들어 세계경제의 급랭이 큰 문제로 떠올랐고, 지난 가치들을 전복시키려는 사상적 움직임들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 병폐의 타파를 위해서라면 이 유연한 세대들은 어떤 것이든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면 예전의, 폐단이라 불린 가치들이 어떤 대안으로 급부상하는 것을 사회가 막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독일의 젊은이들 중에서 히틀러를 추종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젊은 극우세력의 등장은 우리에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의 극우세력이 커지고 있는 상태에서 압박을 받는 것은 우리와 중국이다.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감은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가 헛것을 쫓았다는 것이다. 이 갈등 상황을 중재해 줄 수 있는 소통이 부재하게 된다면, 물론 그것은 사회적 역량에 따라 달라지므로 나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수준에 많은 기대를 걸게 되는데, 우리는 옛 유물들을 끄집어내 왕을 세우고 독재자를 세우는 일도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독재자가 무너지는 곳도 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가 그러한데,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일련 사건들이 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긍정적 미래를 예단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그러고 보니, 그 꽃은 피를 자양분으로 발화하는 것이라 우리의 것과 매우 닮았는데, 상황은 결코 닮은 것이 아니다. 그들의 경제적 수준은 자국의 기대치를 만족시켜줄 만큼 준수하지 못하다. 그곳의 독재자들과 박정희의 차이도 그렇다. (이것이 소위 ‘박통주의자’들이 그의 동상 앞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이유이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등의 이권 문제도 놓여 있기 때문에 석유를 놓고 벌어지는 살벌한 싸움 속에서 민주화 과정이 더욱 진행되어야 한다. 결국 그곳 사람들은 리더의 자격을 꼼꼼하게 따질 것이고, 부족국가가 대부분인 북아프리카에서는 빈번한 유혈사태가 불가피할 것이다. 젱하스도 동아시아의 민주화 과정은 ‘아시아적 가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다고 긍정했지만 이슬람 사회에 대해서는 긍정하지 않았다.


  마지막 결론의 장에 앞서 젱하스가 ‘아시아적 가치’를 논하는 이유는 소위 ‘대항 프로젝트’의 세계적 사례들 중 거의 유일하게 민주화 과정으로 이어진 것이 바로 우리나라와 싱가포르의 그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와 반대되는 사례들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에 있고, 일부 이슬람과 북한이 서로 사상과 형태는 다르나 대항 프로젝트를 진행 중에 있다. 중국은 대단히 애매한 태도를 지니고 있어 ‘중국적 가치’라 따로 불러야하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이런 과정들이 부단히 진행되는 중에 발생하는 각종 갈등들은 헌팅턴의 표현처럼 ‘문화 충돌’이라 부를 수만은 없는 일이다. 각 사례들을 젱하스가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아니라, 독자들이 그들 나름의 사례찾기를 해야 하는 장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남은 이야기는 하나, 바로 중재이다. 과연 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젱하스는 어떤 고견을 내놓을 수 있을까?

 

 

 

 

- <문명 내의 충돌> 총 리뷰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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