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생각들 - 당대 최고의 석학 110명에게 물었다
존 브록만 엮음, 이영기 옮김 / 갤리온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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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8 



  스티븐 핑커가 서문을 쓰고, 리처드 도킨스가 해제를 달았다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Dangerous Idea’를 일컬어 “Dangerous Idea”라고 부르는 시대의 조류에 대해 일침을 가하겠다는 것이다. 존 브록만이 설립한 <엣지(Edge, “지식의 최전선”을 표방하는 포럼 웹사이트)>에 기고해온 수많은 석학들의 급진적인 생각들을 모은 책인 <위험한 생각들>은 각 분야별로 우리가 숙고해봐야 하는 “비틀어진 사고”의 장이다. 최근 들어 사상적 슬로건이 되고 있는 문장들의 추세는 대략 이러하다. “비틀어라(Twist!).”, “점령하라(Occupy!).”, “분노하라(Indignez Vous!).” 등. 이들은 기존체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상기시킨다. 현재 우리가 저항하려고 하는 목표 대상들에는 종교, 극우주의, 신자유주의, 월가, 중앙정부, 세계 1%의 갑부, 보수적인 대학의 교수진, 사회의 폐단을 낳는 보수주의, 비열한 지역주의 등이다. 그 외에도 많으며, 심지어 저항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려는 이들도 있다. 이렇듯 저항정신은 모든 것을 전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저항을 방관한다. 우리는 대체로 안정적인 전철에 오르고자 하는 승객이다. 때문에 우리가 “다양성을 옹호한다.”고 하는 인심 좋은 발언들은 주로 ‘거짓’이라 판명난다. 다양성을 위험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핑커의 서문은 그런 사고들에 전적으로 의문을 던진다. 정말로 위험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어떤 생각을 애초부터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일이라고 그는 답한다. <위험한 생각들>은 그 생각들이 자유롭게 토론되는 공간이다. 이들은 지적논쟁을 통해 타당성을 검증받을 것이고, 다른 생각들의 도전을 받을 것이다. 한 방향으로 결론이 난 상태에서 이뤄지는 토론은 결론을 재차 확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비유하건대, 우리는 ‘신’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 의심을 종교의 집 바깥으로 내놓아 햇빛을 받게 해야 한다. 핑커는 한 판사의 유명한 격언을 알려준다. “햇빛은 최고의 살균제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 단, 타당한 근거와 견고한 논리를 지닌 것들만이 소통될 권리를 갖는 자유. 그것이 건강한 사회의 모습이다. (이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 확인된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소위 ‘악플’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처벌되고 비난받아야 한다고 말하며 사상과 표현도 권리를 가질 정도로 형체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상당히 많은 ‘위험한 생각’들이 이 책에 담겨져 있고, 일부 ‘생각’들은 해당분야의 전문가적 지식이 없으면 일반인들이 쉽게 생각해볼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기까지 하다. 석학들의 논쟁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에게 “대중을 겨냥한 낮은 자세”를 요구하는 것은 욕심일 것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어려운 까닭은 오히려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그런 생각들’을 거의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낯설어하는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나의 경험상 주변에 종교를 가졌으나 신의 존재에 회의를 가진 이들, 그리고 종교가 없고 무신론자인 이들은 상당히 많다. 현대사회는 이처럼 종교가 사회의 일부 기능만을 담당하는 ‘종교최소주의의 사회(<거룩한 테러>의 저자 브루스 링컨)’이다. 그런데 그들이 신을 믿지 않게 된 경위는 생각보다 다양하며, 어떨 때는 일관성이 없는 듯 보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들은 신의 존재여부를 논리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으로 “믿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을 이끌어내고, 그로부터 “왜 그렇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온갖 비논리적인 궤변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종교로부터 신앙을 강요당한 나쁜 기억을 떠올리며 격해지기까지 한다. 그런 사람들은 도킨스와 세이건의 논리적 반박을 통해 사고의 계통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위험한 생각들>에 나온 논쟁거리들을 쭉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신’, ‘윤리’, ‘영혼’, ‘자유의지(자아 포함)’, ‘뇌과학’, ‘진화론’, ‘우주론’, ‘온난화’, ‘직관’, ‘인간의 한계’, ‘사이버’, ‘성(性)’, ‘신화’, ‘평등’, ‘시장’, ‘고령화’, ‘민주주의’ 등 굳이 “위험한 생각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 않아도 우리가 충분히 논쟁의 각축을 확인할 수 있는 주제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이들 중 일부는 우리에게 고루한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자주 논쟁된다고 해서 일정부분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며, 거의 모든 주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가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를 가르는 것은 이 책이 가진 기능의 일부이다. 이 책의 전체적인 기능은 논쟁의 조건을 상기시키고 <엣지>의 모토인 “지식의 최전선”까지 독자들을 이끄는 것이다. 브록만이 엮은 ‘위험한 생각들’은 모두 근거, 반론을 반박한 논리, 그리고 미래예측 등을 구조로 한 견고한 건축물이다. 이러한 구조의 건물만이 논쟁의 땅에 세워질 수 있다. 

  부서지지 않는 논리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대개 고착된 관습 속에서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맹목주의의 비호를 받아 왔다. 반면, ‘위험한 생각들’은 위태하다. 아니, 오히려 제목을 “위태한 생각들”이라 해도 괜찮을 뻔했다. 하지만 위태한 동시에 위태함의 전체적인 모습은 그 어떠한 것보다 신선하며, 건강하다. 학자들은 이 ‘다양성’에 주목한다. 디터 젱하스는 그의 책 <문명 내의 충돌>에서 중국의 전국시대를 근거로 다양성을 옹호했다. 그 다양성들은 하나의 목표, 즉 “태평천하”를 목표로 했다. 브록만의 ‘위험한 생각들’은 무엇을 목표로 하는 다양성일까? 맹목을 타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양성이다. 마르틴 우르반의 <믿음의 엔진>을 읽으면 우리가 왜 맹목이 공격당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는지 알 수 있다. 맹목이 공격당하면 우리는 숨을 못 쉴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만약 혁신이 있다면 그건 누군가가 우리의 그 ‘공포’를 제거해주는 작업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위험한 생각들>에서 종교와 과학에 관련된 주제를 주로 찾아 읽었다. (필립 앤더슨의 “특정 신이 존재할 확률은 상당히 낮다.”와 스콧 아트란의 “종교는 과학에 없는 희망이다.”, 샘 해리스의 “과학은 종교를 파괴해야 한다.” 등을 비교해보는 작업은 재미있다.) 생소한 주제들은 한 번 스쳐 읽고 지나가는 정도로만 독서했다. 하지만 상당히 폭넓은 분야별 카테고리가 있으니 독서하는 이의 관심분야가 각양각색이더라도 이 책은 “위험한 생각”이라는 슬로건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의 대부분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통독과 발췌독이 모두 용이하다. 또한 하나의 생각을 읽어도 전체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 하겠다. 각 분야별로 깊이 있는 고찰을 해보고자 한다는 가정 하에 이 책의 각종 리뷰들을 모아보면 아마 <위험한 생각들>은 그 분량이 몇 천 배는 커질 것이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결과적으로 이 시대에 필요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맹목을 견제하는 우리의 힘과 사유의 범주가 증가하는 까닭이다. 

  도킨스의 해제는 이 책의 위험한, 때론 어려운 주제들 사이를 여행한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위험한 생각들’의 목표를 상기시켜준다. 도킨스 자신이 ‘위험한 생각’을 내놓아 대대적인 논쟁의 한복판에 오른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는 필히 절대주의, 본질주의와 싸워야 하고, 그렇게 하고 있으며, 항간에서는 그가 종교에 완전히 반(反)하는 인물(하지만 그의 <만들어진 신>을 정독한 사람이라면 그도 강경한 만큼이나 종교의 순기능을 인정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이라고 주로 소개된다. 하지만 그가 정말 하고픈 말은 “지금 내가 하는 위험한 생각이 진실이 아니라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맹목적인 관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덜 위험하다.”는 것이다. 생각의 통제가 강한 사회는 마치 오웰의 <1984>처럼 자유롭지 못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생학과 관련된, 그리고 인간만이 윤리적 감정을 갖는 동물이라는 생각과 관련된 우리의 은폐와 믿음 사이를 고발한다. 가령 (인용해보자면) 이런 것이다. “달리기 선수나 높이뛰기 선수를 훈련시키는 것은 받아들이면서도,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유전학적 번식을 통해 만들어내는 것은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나, “노예를 대하던 우리 조상들의 태도와,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을 대하는 오늘날 우리의 태도 사이에 도덕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흡사 바칼로레아에 출제될 것 같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우리가 입을 다문다는 것이다. 도킨스는 “왜 생각해보지 않는가?”라 묻는다. 우리는 그에게 반문하려고 하겠지만 유전학적 지식도, 노예의 역사에 대한 이해도, 아니 ‘인간’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상태라는 것이 곧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무지’를 굳건하게 유지시키면서 위태로운 개념이해 사이를 엮어주는 것이 바로 맹목이다. “위험한 생각들”이 위험한 까닭은 그것의 도발성에 있겠으나, 그것이 우리를 도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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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28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난 사람들이 금을 밟고 나가려는 걸 도발로 보지 않았어요. 그것도 좀 더 큰 원을 그리면 결국 안에 있는 거니까. 모든 게 가능해요, 모든 것들이. 책을 읽으며 그걸 잊으면 더이상 읽어도 나아갈 길이 없을 것 같아요.

어떤 위험한 생각인지 논쟁거리들을 보고도 흥미가 생겨요.

굿 애프터눈, 탕기님. 좋은 월요일 보내요.^^

탕기 2011-11-28 17:29   좋아요 0 | URL
아이리님 말씀이 맞아요. 지평을 점점 넓히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학자들만큼 뭔가를 이해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거죠. 그걸 상기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인 듯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