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31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 아니며, 고소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사람들에게 고상함을 드러내보여야 한다. 여기에서 말한 고상함이란 그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고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의 초연, 선과 악에 대한 동일시이며, 동정의 눈으로 세계를 대하는 것이다.” - 위화(余華)
  이 얼마나 높은 자리인가. 작가란 결국 일종의 종교적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는 뜻일까. 영악하여,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일수록 무관심으로 대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조그마한 용기를 큰 것이라 착각해 작가의 꿈을 꾼다는 것은, 그리하여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란 말인가. 동정을 가지라니. 우리는 적(敵)을 동정할 수 있는가? 그들을 말할 때, 분노가 치밀어 올라 심히 떨리는 입술을 가라앉히고 그들에게 화해의 두 손을 내밀 수 있는가? 행동하지 못하는데 글 쓰는 건 죄악이다. 그렇다. 애당초 우리가 쓸 수 있는 글의 주제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때론 우리는 침묵한다. 그것이 고상함인 것으로 착각한다. 온갖 문제에 대해 입 여는 헤픈 사람들이 있고, 그런 이들 사이에서 눈을 위로 치켜뜨며 묵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에는 이도저도 아닌 이들만 힘들다. 위화를 읽다보면 “아무에게나 작가라는 칭호 붙여주지 말자.”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아, 참으로 높은 자리이다. 그 자리로 향하는 계단에 발이라도 붙인 듯 구는 사람들이라니. 이따금 작가라 소개하는 자들이 나와 칼럼에 써놓은 글들을 읽다보면 맛없어서 뱉곤 한다. 영양가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먹겠건만.

 

 

“문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박제화하고, 딱딱하게 굳어 화석이 되어가는 역사를 ‘살아 있는 현재’로 되살려내는 작업이다. 박제화·화석화는 기억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기억의 죽음과 의미의 영도(零度)로부터 다시 기억과 의미를 살려내는 것이 문학이다.” - 장석주
  테오 판 두스뷔르흐는 가졌는데, 몬드리안은 못 가졌던 것이 하나 있다. 미술 얘기라 재미없을 수도 있으나, (이 글을 읽는 이도 별로 없다. 걱정도 팔자다!) 그것은 바로 대각선이다. 공책에다가 정사각형을 하나 그려보고, 그 다음에는 직삼각형을 하나 그려보면 그 텐션(tension)의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질 것이다. 몬드리안은 사각형만 그렸다. 이 자리에서 그의 회화철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언급하진 못하겠으나, 여하튼 테오와 피에트는 대각선 하나 때문에 토라졌다.
  현대회화에서 대각선은 큰 의미를 갖는다. 직삼각형도 곡선과 비교하면 텐션이 부족하다. 곡선도 낙서에 비하면 텐션이 부족하다. 텐션이 증가할수록 앞선 형태들은 ‘화석’이 된다. 장석주氏도 ‘의미의 영도’라 했는데, 이는 러시아의 말레비치가 ‘회화의 영도’라 한 것과 매우 닮은 말이다. 말레비치는 그곳에서부터 회화의 길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것이라 봤다. 그리고 로드첸코가 얼마 지나지 않아 “회화의 죽음”을 선포했다.
  이들은 재미없다. 오히려 톰블리의 알 수 없는 낙서가 더 재밌다. (심지어 더 비싸기까지 하다!) 여기서 픽션의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화석학자들을 비하하는 말은 아닌데,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장석주氏의 말마따나 픽션은 지금 앞에서 뭔가를 움직이도록 만든다. <마이클 K>를 읽으며 그 회색빛 남아공 풍경 때문에 얼마나 낙담했던가. 또한 <미겔 스트리트>를 읽으며 “내가 저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지 못했기에 자연스레 방관자가 되었을 때, 나는 몹시 우울하지 않았는가. 위화는 또 나를 얼마나 많이 울렸는가, 말이다. 그것은 뜨겁다. 뜨겁게 꿈틀거리고, 심지어 나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혹 모를 일이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톰 리들의 일기장처럼 나를 어딘가의 세계로, 아니면 추억 속으로 아주 빠뜨리는 신비한 일이 일어날지.

 

 

(읽을 만한 책은) 물론 좋은 책이며, 생활경험의 진지한 결정(結晶)이자 사유와 감성을 꽃피우는 원동력으로, 종종 문화의 기록을 쇄신하는, 한 시대정신의 최고봉이다. 이런 책은 신기축을 세우고 신국면을 개척하여 절대로 세파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그 깊이가 얕든 깊든, 판에 박힌 말로 에돌지 않고 실천적 혈맥과 생기를 길어 올릴 것이며, 개념과 용어의 남발로 독자와 세상을 미혹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책은 (중략) 인류 지혜의 발화점이자 광원으로서 개개의 인간정신에 없어서는 안 될 버팀목이다.” - 한샤오궁(韓少功)
  <열렬한 책읽기> 서문의 한 대목인데, 그는 “읽을 만한 책”, “버릴 책”, “갖고 있으면 좋은 책”으로 장서를 분류하는 법을 소개했다. 서재를 살펴보면 내게는 아직 읽을 만한 책이 많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읽었는가?”가 사람을 말해준다고 하니, 돌아보건대 나의 책장에는 미술책이 가장 많이 꽂혀 있고, 종교/신화관련서적, 문화관련서적, 문학관련서적, 소설책, 역사책 등이 그 다음으로 많은 듯하다. 아, 시집도 꽤 많이 있다. 수(數)를 다루는 책은 거의 없다. 수학에 젬병이었던 트라우마가 여전하다. 그래도 우주과학에 관심이 있는 것을 보면 수학이 아주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따금 NASA와 Science 사이트에 들어가 영어읽기 연습도 할 겸사겸사 기사들을 읽는데, 몰라도 재밌다.
  한샤오궁의 “좋은 책” 정의는 나에게 미션과 같다. 컴퓨터 게임에는 미션이 있다. 미션을 완수했을 때, 게임유저들은 “미션을 클리어(clear)했다.”라는 표현을 쓴다. 익숙한 그것에 비유해보건대, 나는 저 조건들 중 하나라도 ‘클리어’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원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나에게 큰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 멜랑콜리의 수준을 웃돌 폭발력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에 산 너머 동네의 이야기처럼 들릴 때가 있다. 신기축과 신국면은 꿈도 꾸지 못한다. 세파에 부화뇌동하지 않고자 하는 것은 비단 글에서 뿐만이 아니라 삶의 모토로 삼고 있다. 개념과 용어의 남발이란 과연 어느 수준을 말하는 것인지도 꾸준히 탐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거창한 꿈을 꿔보자면 나는 결국 발화점이자 광원이 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허투루 말하거나 글을 부리진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짓 중 하나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쓰는 것이다. 그건 초등학생도 안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거짓으로 방학일기를 쓴 적이 문득 생각난다. 어렸을 땐 웃으며 넘길 수 있을지 모른다. 다 큰 사람이 그러면 간판 내려야 한다. 요즘 비평가들이 예리한 눈으로 진단하길, 그런 작가들이 많다고 하니 책도 꼼꼼히 따져 읽자. 아니, 나부터 그렇게 해야지 되겠다.

 

 

 

 

 

 

 

 

 

“김우창의 또 하나의 장점은 평정심이다. 그의 글은 쿨하다. 테러리즘, 환경파괴, 분배 불평등을 다루면서도 흥분하지 않는다. 70대 중반이라는 나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태를 길고 섬세하게 그려내는’ 이성적 성찰의 힘이고, ‘사고와 행동의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는’ 포용적 사고의 성취이기도 하다.” - 조운찬 경향신문 선임기자의 비평 中
  김우창氏의 글을 읽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알 것 같다. “쿨하다.”라는 표현은 칭찬이다. 저 위에서 말한 위화의 고상함과도 같은 말이 아닌가. 나는 노트에 조운찬氏의 평을 팬으로 또박또박 꾹꾹 눌러 쓰며 한 글자 한 글자 읽은 다음에 ‘이성적 성찰의 힘’과 ‘포용적 사고’에 밑줄을 막 그어댔다. 내겐 없는 그것들. 아, 배가 고프다.

 

 

“어떤 사람이 무엇에 정통했는지 아닌지는, 보기(일례·example)를 만들거나 제시하는 능력으로 드러난다. 흔히 자기 혼자서는 알겠는데 남에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그가 아직 보기를 만들거나 들 수 있을 만큼 알지 못해서다. 대저 무엇을 안다는 사람이 보기를 실어 나르거나 만드는 일에 능하다는 것은, 역사상 위대한 스승이 모두 비유에 능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어떤 명제나 논리든, 보기를 만들거나 들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알고 있는 게 아니다.” - 장정일
  이그잼뽈(example). 나는 그동안 블로그 포스트나, 혹은 남 보여주지 않고 폴더에 남겨둔 글을 쓸 때 얼마나 많은 보기와 일례, 그리고 비유를 사용했는지, 생각해보니 돌아본 적은 없는 듯하다. 마침 3년 동안 쓴 포스트를 한글문서로 바꾸는 중이니 얼추 통계를 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물론 비유도 비유 나름이다. 좋은 것은 거듭 응용하고, 나쁜 것은 버려야한다. 작문에 있어 쉽게 풀어 쓰고자 할 때, 비유만큼 좋은 전략은 없다. 생각해보면 비유를 다루기 위해서는 지금 유행하는 세태도 꽤 뚫고 있어야 함이 당연지사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그것이 고상함과 상스러움 사이를 예리하게 관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관절 ‘상스러움’이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잘 모른다. 대중적 글쓰기에 대해 보수적으로 반응하는 우리나라의 관행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글 쓰려는 이들은 자신의 스타일이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지도 미리 예단해봐야 한다. 결국 운전할 때 사이드미러 잘 보고 다니라는 말과 진배없다.

 

 

“참, 책은 과거가 아니야. 열여덟에 읽은 책도 지금 읽으면 전혀 처음 읽는 책 같아요. 책처럼 그때그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는게 없어. 나는 책이 자궁이고 내가 태아인 것 같아요. 서재 안에 있을 때가 가장 몸이 달아오르지.”
(한 책을 펴들더니)
“아, 이것 봐! ‘준성(準星)’이란 게 있네. 불확실한 별이라... 뱃속에 있는 태아 같은 거겠지? 이런 말을 만나면, 아, 미치지!”
“종이가 아까워서. 그냥 버리면 천벌 받을 것 같아요. 더군다나 나 같은 사람은 나무를 죽여 가며 사는 존재 아닙니까? 조금이라도 천벌을 덜 받으려면 종이를 아껴야죠. 백지는 내 종교예요. 보면 절 안 할 수 없고 달려가서 껴안지 않을 수가 없어요.”
- 고은

  거장은 늘 나를 반성하게 한다. <한겨레> 신문에 고은 시인의 관련기사가 있어 한참을 읽고 또 읽다가 파일로 저장해놓은 구절들인데, 노(老)시인의 넋두리야말로 진정한 ‘글 사랑’이 아닌가 생각해봤다. 그렇다. 조금이나마 시를 사랑했을 때, 나는 단어 하나와 문장 하나에도 그리 열광했었다. 그것이 소화되면 나는 점점 다른 차원의 사람이 되는 것 같은 이상한 경험도 했었다. 문제는 결국 시간이었고, 추진력이었지만 말이다. 그 시절의 기억들은 거장들의 한마디를 조약돌 삼아 마음의 웅덩이에 빠뜨릴 수 있는 나만의 풍경화와 같은 배경을 만들어준다. 수면이 일렁이면 나는 “미치는 것”이다.

  시작(詩作)을 관둔지 몇 년이 지난 지금이다. 이따금 볼펜을 쥐고 하얀 노트를 바라보면 뭐라도 불쑥 튀어나오겠지,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하다가 나는 어제도 시작(詩作)의 시작(始作)을 실패했다. 내년에는 한 문장이라도 시의 행으로써 써봐야겠다고 벼르고는 있는데, 무릇 욕심만 앞서면 그건 고은 시인의 말마따나 천벌을 받을 첩경이 아니겠는가 싶다. 천벌을 애써 찾아가 받는 건 또 무슨 바보 같은 짓인가. 언제 열릴까? 백지에 자음과 모음으로 적혀 내려가던 비밀의 상형문자들 사이로 피어나던 시상(詩想)들, 그 신비스러운 체험은 언제쯤 나에게 다시 찾아올까? 그러나 막상 기대는 안 한다. 라면물처럼 빨리 끓다 이내 식어버리는 사랑으로 시인의 경지를 탐냈던 적도 추억으로만 남은 것이면 족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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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사람

 

  5월이나 6월이었을 것이다. 철학 강의시간에 내 옆자리에는 새내기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청강인데도 열심이었다. 철학에 대해 아는 것도 참 많아 보였다. “나는 왜 새내기 때에 저렇게 하지 못했을까?” 자폐적으로 글쓰기에만 몰두 하고, 생활은 기형이 되었으며, 결국 안으로 찌부러졌던 날들이 나에게는 있었다. 그래서 참 부러웠다. 그런데 그보다는 사실 그가 철학을 대하는 태도가 더 부러웠다. 지식이라면 나도 있었다. 그가 모르는 것들 중 내가 아주 잘 아는 것도 있으리라. 문제는 그것이 나를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는가, 삶을 지탱해줄 수 있는가이다. 나에게 있어 지식의 양(量)이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었으니. 알고 있어도 실천하거나 말로 뱉어내거나, 글로 풀어쓸 줄 모르는 지식인들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질적으로 제련된 지식은 사람을 고민토록 한다. “알았다.”고 만족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부러웠던 것은 그의 고민하는 태도였다. 5년이라는 시간을 물리고 싶은 유치한 욕망이 문득 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는 나처럼 긴장을 유독 많이 하는 성격인 듯했다. 하지만 내게는 없는 용기가 있었다. 저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들 앞에서도 질문과 의견을 열성적으로 던지는 태도는 그의 “아는 것과 고민한 것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물론 누구든 살아가면서 그런 태도를 가질 때가 있다.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이다. 아, 그러고 보면 나는 문학을 사랑하긴 했는가? 미술을 사랑하긴 했는가? 아직 못 찾은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대학에서 사랑하는 학문을 못 만나는 건 비운이다.


  주변을 돌아볼까 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면접, 지원서, 기업 초청 오리엔테이션 이야기를 한다. 주변을 바라볼 때, 나의 위치가 비로소 정확해지는데, 나는 어디에도 없다. 순위와 점수, 돈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나의 위치를 말해줘도, 그들은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를 것이다. 지금의 위치를 내가 새내기 때 알았더라면 나는 매우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부럽기도, 대견스럽기도, 한편으로는 지금의 나를 자극하기도 했다. 다음 학기를 두 달 남짓 앞두고 그가 기억나는 이유이다.

 

 

 

 

 

 

미술을 놓고, 책을 읽다.

 

  바닥에 쌓인 책이 많아진 탓에 몇 달 전 부모님께서 새로 장만해주신 고동색 책장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러다 올 한 해 내가 한 일들과 읽은 책들과 얻은 것들을 나름 헤아려보고자 했다. 무엇이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나에게는 분기점 같은 때가 있었다.


  나는 네이버에서 <탕기의 아틀리에>라는 미술 블로그를 몇 년 간 꾸려왔었다. 블로그 이웃은 미술책 저자들, 화가들, 미술애호가들, 모두 나에게 도움을 주신 좋은 분들이었다. 좋을 때도 있었지만 항상 조용히 찾아주는 소중한 그분들이 있었기에 미술공부가 더욱 수월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닌데, 가끔 나에게는 큰 역사 속 사실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부단히 노력해서 길게 포스팅 해온 것들을 조금씩 정리해 몇 권의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지금도 하고 있다. 포스트 하나 당 A4용지 5~8장 정도는 되니, “이걸 다 언제 정리해?”라며 의욕을 잃을 때마다 그간 공부해온 양을 피부로 직접 느낀다. 쉽게 쓰고자 노력한 흔적들이 있어 어설픈 것들도 많다. 정말 많은 것을 토해낸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몇 달 전, 나는 그 블로그를 그만두고 이곳으로 몰래 옮겨왔다. 더 많이 배우고, 글을 연마해 책으로 인사드리겠다고 이웃분들께 약속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미술만 공부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그것에 집중하던 시간을 그간 읽었던 책을 복기하고, 인문학과 여타 학문의 답습에 나눠 쓰기 위해 블로그를 지웠다.


  여럿 쌓여 있는 미술책들을 보다가 문득 네이버 블로그를 그만 둔 뒤 갖게 된 해방감이 떠올랐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미술책과 논문, 해외사이트 포스트들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날에는 정말 미친 듯이 공부해 포스트를 두 개나 올린 적도 있었고, 다른 날에는 공부는커녕 책도 한 줄 안 읽은 날도 있었다. 뭔가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거의 반사적으로 싫어하는 나에게는 이런 변덕이 득이 되기도, 혹은 독이 되기도 한다. 겨울 같다고 할까? 삼한사온 말이다.


  용케도 그런 체질로 미술을 꾸물꾸물 지렁이처럼 공부하며, 돌아보건대 적잖은 것을 얻었다. 본래 공부의 목적은 대학교 진학이었다. 준비가 소홀해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니, 준비가 소홀한 것은 맞을지 모르겠으나, 미술을 열성적으로 공부한 것은 사실이다. 시험에 미술 문제는 거의 나오지 않으니, 떨어질 수밖에. 좋아하는 화가도 생겼고, 좋아하는 시대도 생겼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질적으로 느껴지던 서양문화에 상당히 가깝게 다가가면서 나는 공통과 차이에 따른 정신의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종교가 공통된 문제로 연상되어 그와 관련된 유익한 계절학기 강의와 책들을 접했고, 지금도 그 관심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두 번째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나는 거의 공황상태였다. 그 때처럼 나 자신에게 실망한 적도 없었다. 막상 심한 낙담을 겪었을 때에는 “그것도 경험이 된다.”는 조언은 아예 들리지 않는다. 냉철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나는 그 조언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리 추운 날이 아니어서 어머니와 함께 장 보고 돌아오는 길을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가기로 한 날이었다. 아픔이 추억이 되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추억하느냐가 사람의 앞날을 결정한다고들 한다. 글로 읽거나 말도 듣기만 하면 몸이 알지 못하는 그것이다. 나는 어머니와 오랜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도 기억한다. 1년 전 그 때, 나는 내가 여태껏 배운 미술의 모든 것이 결국 쓸모없어질 것이라 좌절했었다. 하지만 나는 미술로 말미암아 가지를 뻗어나간 여러 관심들을 통해 여러 책을 읽고, 이따금 미술을 연결해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3년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부모님의 조언은 적중했다. 나보다 앞서 더 많은 삶의 좌절을 겪어보셨을 부모님의 경험은 나에게 큰 지혜가 다가온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요즘 어른을 다짜고짜 싫어하려는 많은 아이들이 깨달아야 할 점인데, 삶의 경험을 갖고 있는 연장자의 말은 경청해야 하는 것이다. 뒤늦게 깨달으니 몸이 알아간다.


  이제 나는 잡식한다. 책장에 꽂혀 있는, 읽은 책들을 면면히 살펴보면 사실 집중되는 분야는 따로 있지만 잡식성에다가 책을 얌전하게 읽지 못하는 나의 게걸스러운 습성이 지금은 많은 도움이 된다. 미술을 잠시 놓으니, 편식하던 나의 3년을 보상하려는 듯 나는 거의 몰아치기로 (학기 중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많은 책을 읽고, 예전에 읽은 것들을 복기하곤 했다. 더불어 독서의 방향도 정하게 되었다.

 

 

 

 

 

 

 

소설 읽기는 힘들어

 

  소설 읽기를 유난히 힘겨워했기 때문에, 돌이켜보건대 학교와 집을 오고 가는 버스 안에서 얻은 3시간을 쪼개 소설을 읽었던 기억은 그리 선명치 않다.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나 위화의 소설 두 편 <허삼관 매혈기>와 <살아간다는 것>은 재독한 것이고, 처음 읽었을 때에도 워낙 집중해서 읽었던 것이라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똑같이 다시 읽는 것인데도 카뮈의 <이방인>, 흐라발의 <영국왕을 모셨지>, 오웰의 <동물농장>, 쿳시의 <마이클 K>, 레싱의 <다섯째 아이>, 케르테스의 <운명> 같은 책들은 분위기를 빼곤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논픽션을 읽으며 생긴 독서습관이 픽션의 독서를 방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길게, 그리고 자주 접해야겠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내 책상 위에는, 아니나 다를까, 논픽션 책들만 가득 쌓여 있다.


  일본의 유명한 한 장서가의 조언처럼 굳이 픽션을 안 읽겠다고 벼른 적은 없다. 언젠가 픽션의 강한 향기에 이끌리게 될 날이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러고 보니 그 향기를 아주 처음 느껴본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회상해보면 내게 그 향기를 처음 전해준 이는 쥐스킨트였다. 고등학생 때, 한 여자친구와 <좀머 씨 이야기>에 대해 열렬한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떠오른다.

 

 

 

 

 

 

 

 

 

2011년, 기억에 남는 책

 

  지난 한 해 동안 읽은 논픽션 중 내게 가장 신선했던 것은 셔키의 <많아지면 달라진다.>였다. 현대인들이 공기처럼 사용하고 있는 매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건설적인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갈 국가성장의 동력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나에게도 잉여의 시간을 어떤 노력으로 채워가야 하는지 귀띔해준 책이다.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은 도킨스를 접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도킨스가 눈에 보이는, 그래서 종교인들에게는 다소 거슬릴 수 있는 공격을 서슴지 않고 감행한다면 세이건은 반박할 여지가 없는 (그 점에 있어서는 도킨스도 물론 마찬가지인데) 합리와 논리로써 종교맹신주의자들의 틈을 파고든다. 그러나 이들 과학자들의 책은 과학을 맹신하려는 사람들이 자위할 목적으로 읽는다든지, 혹은 과학을 더 비중 있게 “이미” 다루고 있는 이들이 조언을 얻을 요량으로 접하는 것 말고도, 아니 그보다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읽었으면 한다. 나는 아직 삶의 경험이 적고, 아는 바 역시 적어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양자의 입장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못한다. 종교와 과학을 모두 알면 두 문제를 긴밀하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 교과서적인 말은 지켜지지 않기에 더욱 중요한 시대적 교훈 중 하나이다.


  복기한 책 중에서는 <믿음의 엔진>과 <사람들은 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할까?>가 기억에 남는다. 리뷰로 올리진 않았지만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KBS 다큐멘터리 <마음>의 책 버전도 읽기를 권한다. 맹종보다는 이해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이런 부류의 책들이 내리는 결론은 “인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믿음을 변형, 혹은 왜곡시킨다.”나 “인간은 쉬운 것을 좋아하려는 경향이 있다.”라든지, 혹은 “그것들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발현된다.”와 같은 것들이지만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아는 것은 우리가 “뒤늦게 지각하게 되는” 습성을 극복할 첫 번째 조건이 될 수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합하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상적인 해괴한 일들”의 원인도 알게 되고, 그것들에 대한 보다 넓은 시각을 얻게 될 것이다.


  창조와 관련된 좋은 책들도 올 한 해에는 많이 접했다. 본래 미술공부를 위해 구입한 것이지만 나 역시 창조와 아주 무관한 것은 아니기에 곁에 두고 틈날 때마다 읽어왔던 <창조자들>이나 <생각의 탄생>, 리뷰하진 않았지만 <신이 내린 광기>, 그리고 직접 연관된 것은 아니나 <위험한 생각들>과 같은 책들이 이해의 폭을 넓혀줬다. 또한 창조가 교육과 닿아 있기 때문에 교육과 관련된 여러 다큐멘터리를 리뷰하면서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을 비판해보는 시간도 나 스스로는 따로 마련하기도 했다. 교육자 집안이라 유독 그런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인데, 이따금 언론들의 논설을 읽다보면 ‘인권’이라는 문제와 ‘교육’이라는 문제의 융합을 모르는 사람들이 글을 쓴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 씁쓸하기도 했다. 연말에 가까워져 잡스의 사망소식이 들려왔을 때, 우리가 창조와 관련해 더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 것도 나에게는 많은 영향을 줬다.


  리뷰로 올리진 않은, 사실 리뷰로 올리기도 힘든 책으로 내가 깨달음을 가장 많이 얻은 책은 박민영氏의 <즐거움의 가치사전>이었다. 이 책은 챕터별로 나눠 읽어 깊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내용이 좋기에 여러 곳에서 추천도서로 이름이 오르내리곤 했는데, 나는 이 책을 이라는 그의 또 다른 책의 뒷날개를 보고 샀다. 어려운 것을 소화하여 재정리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 그는 대단히 뛰어난 저자이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난해한 책들 사이에 꽂아놓으면 절로 빛나는 책. 그런 것을 쓰기란, 문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나에게는 또 다른 매력으로 읽힌 책이었다.

 

 

 

 

 

 

 

 

 

좋은 다큐멘터리 보고 생각하기


  책과 영상은 다르다. 영상은 시각에 민감한 우리에게 훨씬 즉각적으로 다가온다. 책은 연상을 해야 하고, 쉴 새 없이 복기해야 한다. 더 깊은 사고가 가능하게 독서를 이따금 정지하기도 하는데, 이른바 pause라 불리는 그 시간들은 독서가 가진 가장 뛰어난 기능 중 하나이다. 영상은 쏟아진다. 따라서 대부분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대신 흥미를 갖게 하는 점에서는 독서보다 훨씬 유리할 수 있다. 다행이도 나는 다큐멘터리와 영화, 그리고 책을 두루 좋아하기에 잡식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는 듯하다. 때문에 나는 “책을 읽어라.”라며 문자만을 강조하려는 사람들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다. 반대로, “책은 싫다.”며 영상에만 빠지는 사람들의 외골수적 경향 역시 이해할 수 없다. 둘 다 좋지 않은가.


  물론 영상도 영상 나름이다. 소위 fresh한 마음 상태를 만들기 위해, 혹은 웃음을 통해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찾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은 버라이어티 이상의 기능을 하기 힘들다. 그것도 적당히 즐기면 좋은데, 중독되면 문제이다. <많아지면 달라진다.>에서 셔키가 지적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 시간들은, 심하게 말하자면 아무 것도 안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셔키가 그런 말을 했다. 그럴 바에야 그냥 인터넷 온라인 게임을 하라고. 그 정도로 그는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다르다.


  다큐멘터리는 재미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재미’라는 개념을 버라이어티 프로그램과 비교하면 다큐멘터리의 재미는 아주 형편없는 수준까지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누리는 재미가 어디 그것 한 가지 뿐이던가.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쾌락을 유발하는 정도의 재미는 반복적으로 체득하기 아주 용이한 중독성을 갖는다. 그리고 얻기도 쉽다. 그런데 의외로 지적 쾌락 역시 그것과 다르지 않은 영역에 있다. 단, 추구하는 바가 다를 뿐이다. 이 ‘다른 추구’가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수준급 다큐멘터리들이 다수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전 세계의 다큐멘터리 제작담당자들이 교과서로 삼고 있는 BBC의 기준에 비춰보면 해외로 수출할 수준에까지 이른 것은 거의 없다. 내가 알기로는 <차마고도> 이후 그런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꼼꼼하게 따지지 않더라도 시의적절한 문제제기와 다양한 분야의 쉽고 간편한 이해를 돕는 오밀조밀한 양질의 다큐멘터리들은 거의 매주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호기심을 자극하는 흥미를 지니고 있다.


  지식에서 있어서 호기심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당연한 말이다. 알고자 하지 않으면 결국 알 수 없다. 개인적인 오랜 생각인데, 다큐멘터리는 우리를 학문의 문 앞까지 데려다놓을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길잡이이다. 그래서 나는 미술을 공부할 때, 그것에 대한 글을 쓰는 것에서 나아가 영상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자 꿈을 꾸기도 했었다. 이미지와 음향으로 이해하는 것은 누군가의 좋은 강의를 듣는 것과 같다. 하지만 강의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만든 것이기에 완성도는 더 높다.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내레이션으로 그곳의 풍물과 전경을 설명하는 저예산 다큐멘터리부터 시작해서 수학의 비밀을 여러 부작으로 나눠 설명하는 전문 다큐멘터리, <차마고도>와 같은 다국적 방송사가 공동으로 제작한 스케일 큰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근래 들어 대부분의 것들은 세련된 형태로 제작되고 있다. 서구의 다큐멘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에 이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들을 잘 활용하기만 하면 우리나라의 교육적 병폐들도 상당부분 해소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한다. 수준에 맞게끔 공교육기관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방영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널리 실행되진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학생들이 그걸 보고자 할까, 이렇게 물어놓고 즉각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도 장애물 중 하나이다.


  다큐멘터리는 중립성이 강하다. 책보다도 훨씬 강하다. 따라서 문제를 제기하여 양자의 의견을 모두 사례로 드는 경우에는 웬만한 칼럼보다도 탄탄하다. 무엇보다도 “직접 보여준다.”는 이점이 있다. 다큐멘터리 한 편만 봐도 다음 한 주를 그것과 관련된 문제를 스스로 생각해보는데 할애할 수 있다. 피드백을 활용하는 노력만 보인다면 그 어떤 수업보다도 유익하다. 권위에 기대어, 혹은 경제적 성공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며 무언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인간의 생리라고는 하지만 학문 앞에서는 적어도 아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순수한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은 건강한 일이다.

 

 

 

 

 

 

 

 

 

마치며

 

  몇 시간이 지나면 지구는 이제 자신이 작년에 운행했던 그 노선을 얼추 비슷하게 따라가며 태양을 한 바퀴 더 돌기 시작할 것이다. 내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은 물리적으로 얼마나 다를까? 제인 구달의 책에 나오는 침팬지들에게도 송년의 아쉬움과 새해맞이의 설렘이 있을까? 왜 유독 인간만 시간 앞에서 청승을 떨까? 보신각 타종과 함께 폭죽이 터질 것이고,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며 인사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의식이 아주 중요하다. 자정까지 깨어 있지 않으면 눈썹이 하얗게 되기 때문이다. 아니, 내년이 그렇게 되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인생 하얗게 질려버리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바로 ‘다짐’이라는 것이다.


  나의 다짐은 별 것 없다. 조금 더 바르게, 조금 더 열심히 사는 것이다. 지금 하는 것들에 약간의 속도가 더 붙었으면 하는 작은 욕심도 있다. 하지만 몇 번의 실패가, 지금의 나에게는 세세한 것에까지 욕심의 약물을 투여하지 말라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알려준다. 뭉뚱그린, 보편적인, 아니 실현될 수 없는 큰 목표를 그렇게 잡아놓고 길잡이로 만든다. 틱낫한 스님이 그러셨다. 달에 가기를 바라고 걸어도 달에는 갈 수 없으나, 그만큼 멀리 갈 수 있다고 말이다. 내가 가진 용량에 수긍하며, 그 용량만큼만 일하는 것도 실은 힘드니, 욕심은 적을수록 좋겠다. 그래도 독서에는 욕심이 많이 생긴다. 아, “이 종이들을 더 많이 넘겼으면” 하는 바람은 도무지 떨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막 바람이 하나 생겼다. 보름달은 아니겠지만 오늘 밤하늘에 빌면 혹시 들어줄까? 책값 좀 싸게 해달라고.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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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1-03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응원이 됐으면 하고 늘 댓글을 남기려고 노력해왔는데 올해는 숨어서 지켜볼게요.
간혹, 말을 걸러 올게요. 늘 열심히 잘 했으니까 걱정은 안되지만 건강도 챙기고, 실속도 챙기고, 모든 것들 다 품에 안게 되는 한해였으면 좋겠어요.^^

탕기 2012-01-06 10:45   좋아요 0 | URL
욕심 같아선 모든 것을 다 품에 안고 싶지만, 저는 용량이 작은 컴퓨터 같아서 뭔가 욕심을 부리면 그게 잘 안 되더라구요.^^ㅎ 아이리님의 응원은, 아뜰리에 했을 때부터 늘 큰 힘이 되어왔습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쇼스타코비치 2012-01-10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이버 블로그에서 좋은 글 읽곤 했는데, 어느날 이웃에서 없어졌다 싶었는데 여기로 오셨군요.
예전 글 다시 못 보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새로운 글 기대해볼게요.

탕기 2012-01-08 01:48   좋아요 0 | URL
아틀리에에 들러주시던 분이군요. 닉네임만 보면 어느 분이셨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타지에서 만난 우리나라 사람처럼 반갑군요. 늘 모자란 글만 올리더라도 종종 들러주세요.^^

쇼스타코비치 2012-01-10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좋아하는 글을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닌 걸요. 자주 올 거예요.

탕기 2012-01-10 23:18   좋아요 0 | URL
별 거 없는 공간이지만 격려해주시니 고맙습니다.^^
 

2011.12.30

 

 

 

 

 

 

 

   젱하스는 헌팅턴의 실책을 두 가지로 나눠본다. 거시적 차원의 실책은 우리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교 문화의 축을 중국과 북한으로 보고, 이슬람 문화의 축을 파키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알제리 등으로 보는 그의 시선은 두 문화를 굳이 대비하려는 서구적 편견에서 비롯된, 보편화의 오류를 범한 통찰이다. 보편화의 오류는 우리에게는 일상과도 같다. 일부 여성들의 사치를 보도한 인터넷의 선정적인 기사들도 이와 다르지 않은 논리를 갖고 있다. 보수적 남성들은 이런 기사들을 접한 뒤 “모든 여성들이 그럴 것이다.”라고 거의 결론짓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어떤 정보를 흡수할 때, 우리는 의외로 편견과 착각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이는 저명한 학계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다. 특히 문화 간 비교를 필요로 하는 학문인 경우에 그러하다. 종교도 대표적인 예이다. 문명을 논하는 젱하스가 이 책의 대부분을 종교에 대한 면밀한 분석으로 채운 것도 사실 그 때문이다. 보편화의 오류는 대부분 상대방에 대해 거의 모를 때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 일부만 보고 그것을 전체인 듯 여기는 것이다. 새삼스러운 말일 수도 있으니, 이에 대해 거듭 언급하진 않겠다.


  ‘문명의 충돌’을 테제로 놓고 봤을 때, 헌팅턴이 위와 같은 오류를 범한 까닭은, 젱하스가 지적한 것처럼 정치적인 현상 때문이다. 경제적 이해관계도 이에 포함된다 하겠다. 저들이 서구와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때론 문화를 무시한 경향을 목격하곤 한다. 문화적 가치가 시대에 따라 잘못 발현(여기서 “잘못”이란 후대의 평가이다.)되는 까닭의 대부분은 정치와 경제 때문임을 우리가 아주 모르는 것도 아니다. 헌팅턴처럼 북한을 유교문화의 대표적인 축으로 본다면 북한과 중국 사이의 문화 차이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체제의 차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체제는 깊이 내재되어 있는 문화정신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하게 하는 일종의 감시망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문화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시각이, 흔히 당연하다 여겨왔던 그 시각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의심받게 된다. 이에 젱하스가 말한다. “모든 방면에서 문화주의적 논지를 가져오는 첩경”은 다름 아닌 문화 분석의 부족이라고 말이다.


  두 번째 오류는 미시적 차원에서 일어났는데, 여기서 ‘미시(微示)’란 큰 문화가 작은 지역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 차원의 오류는 위의 것만큼이나 자명하다. 젱하스는 소수민족의 문제를 예로 든다. 소수민족은 거대한 중앙정치집단으로 구성된 세력들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났기에 그런 명칭으로 불린다. 그런데 전 세계가 근대화의 조류에 휩쓸리고, 그 흐름을 소수민족들 역시 경험하다보니 그들의 요구수준이 높아졌다. 이윽고 독립의 문제가 온갖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외교적 문제와 부딪히며 전 세계에 보도될 정도의 핫이슈가 되기 시작했다. 헌팅턴은 이 과정 내에 문화적 요인들이 있음을 지적했고, 젱하스도 그것은 옳다고 본다. 하지만 젱하스는 헌팅턴과는 달리 문화는 거의 하는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문제가 부각되고 진행되는, 이른바 ‘갈등의 단계’에서 문화는 종속적 위치에 머문다. 후대가 평가하기를, 다만 이 모든 것이 끝났을 때에야 비로소 문화가 제 몫을 했노라고 술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문화를 유기체로 보는 시각에 머문다고 하더라도 문화가 갈등보다 덜 역동적이라는 것은 자명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갈등이란, 젱하스는 ‘단절선’이라 말하는데, 그에 따르면 “구조적으로 형성된 체계적 차별과 특권의 형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문제”이다. 문화가 정치적 슬로건으로 변질된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이해는 헌팅턴의 것보다 더 세련되게 다가온다.


  헌팅턴도 <문명의 충돌>에서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의 분석보다는 결론 부분의 주장이 사람들에게 훨씬 많이 알려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 <문명의 충돌>은, 사람들이 열광했던 정도의 좋은 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문명의 갈등과 충돌을 분석하는 대목에서 결론을 뒷받침할만한 긍정적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풀어 말해보면 이렇다.


  헌팅턴은 젱하스가 상기 언급한 두 가지 문제, 즉 거시와 미시의 문제를 거론하고서도 결론에 이르러서는 “비간섭과 방관의 원칙”, 그리고 “공동 중재의 원칙”을 제시했다. 이는 쉽게 말해 서구적 가치를 비서구에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재는 있어야 하기에 서구적 가치보다 더 도덕적일 수 있는 도덕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얇은 도덕’이다. 이는 ‘긴밀한 도덕’의 반대개념이다. ‘긴밀한 도덕’은, 가령 국가 간의 1:1 갈등 상황(혹은 다자간도 괜찮다.)에서 서로의 도덕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오히려 도덕 사이에서 갈등만 야기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 사이의 도덕이 상황마다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그 규모가 커지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얇은 도덕’이다. 이해하기 쉽게 풀자면 “뜬구름 같은 도덕”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런 도덕에 기초하여, 스위스의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의 ‘세계윤리’와 같은 것이 정립될 수도 있다. ‘얇은 도덕’은 야만적인 것들을 교정할 수 있는 문명적인 것이다. 이 문명은 오랜 역사의 고통을 대가로 치러 ‘얇은 도덕’을 만들어냈기에 그것이 반드시 서구적이라는 편견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론의 주장은 헌팅턴의 책에서 독자들이 반드시 체득해야 하는 정보였으나, 헌팅턴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의 논의를 하기보다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문화적 비교만을 펼쳤고, 젱하스는 그것을 “옳은 결론을 이끌어낸 잘못된 분석”이라는 식으로 비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젱하스는 과연 어떤 ‘방법’을 우리에게 내놓을 수 있을까? 다음 장에서 그는 <문명의 충돌>에 대한 대안적 시각을 내놓겠다고 선언한다.

 

 

 

 

 

 

 

 

 

 

  8장의 시작은 놀랍기만 하다. 나는 잠시 독서하기를 멈추고, “이런 말은 수전 손택 정도 되는 사람이나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허공에 질문을 했는데, 흔히 종교 간 차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냉철한 판단으로 무장한 학자들처럼 젱하스 역시 깊은 혜안을 갖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는 미국이 유럽적 가치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던 오래 전의 ‘연방 정신’을 인용문으로 언급하며 그 ‘미국’을 ‘이슬람’으로 바꿔 표현해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패러디도 이와 동일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데, 사실 이는 문화 갈등과 종교 갈등 사이의 무의미한 구분을 꼬집는 젱하스의 비판인 것이었다.


  유럽이 구세계가 되고, 막 신세계로 떠오른 미국은 그들의 가치를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었다. 나는 미술을 공부했으므로 그것을 예로 들어보건대, 20세기 초반에 들어 뉴욕이 세계미술시장의 중심이 된 것도, 잭슨 폴록이 미국 최초의 “월드 아티스트”가 된 것도 다 이와 같은 노력 때문이었고, 그 부단함은 이따금 파격을 만나며 21세기를 대비한 새로운 정신으로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워홀, 로스코, 라우셴버그 등의 스타급 작가들뿐만 아니라, 마크 트웨인, 마이클 잭슨, 할리우드, 오프라 윈프리, <아메리칸 아이돌>, 디즈니, 픽사, 마이크로소프트, 그리고 스티브 잡스 등이 바로 20세기를 선도한 문화코드임은 우리가 직접 체험해서 잘 알고 있다.


  항간의 말마따나 20세기는 진정한 미국의 시대였다. 그들이 보잘 것 없는 나라 중 하나로 취급되었을 때, 그들의 “방어 자세, 반헤게모니적 정신, 혹은 저항적 태도” 등은 매우 포괄적으로 일어난 하나의 현상이었다. 이것은 정치적이다. 따라서 젱하스는 단호하게 말했을 때, “문화는 곧 정치적 문화이다.”라고 정의한 것이다. 그런데 그 아메리카가 언제부터인가 별로 행복하지 않은 신세계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정점에 올랐을 때, 그들은 오히려 저항 받는 이들이 되었다. 오늘날 그들을 비난하는, 괄시하는, 혹은 (실제로 일상에서 그럴 수는 없겠지만) 거의 무시하려는 경향이 주류인 까닭이다. 요컨대 우리는 대부분 반(反)미국적 가치로부터 대안을 찾으려는 중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미국은 굉장히 성공한 경우이다. 역사상 그들의 독립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성공적이었다.


  아프리카는 어떨까? 혹은 남미와 아시아도 좋은 예이다. 최근 읽기 시작한 엘리자 그리즈월드의 <위도 10도>라든지, 개인적으로 가장 몰입해서 읽은 소설인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를 보면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의 원인은 비정상적인 독립이었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함께 사실상 아프리카 권력의 대부분을 지닌 나라이다. 인구도 많고, 유전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외부의 세력이 개입하여 갈등을 조장하거나 중재함으로써 그들의 이득을 취하기 안성맞춤인 나라이다. 남부의 기독교와 북부의 이슬람교의 싸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구글이나 위키피디아에서 그들의 싸움을 검색해본다면 혀를 내두르게 될 것이다. 그들의 불완전한 민주주의(1999년 군사독재 이후 설립된 민주주의 정부는 거의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의 유아적 수준과 비견된다 하겠다.)는 그 어떤 종교적 중재도 해내지 못했고, 더 나아가 자생 경제발전의 계획도 수립하지 못했다. 개인의 정체성이 종교로써 성립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문제는 집단에 있다. 집단의 정체성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흩어졌을 때, 정부는 통제력을 거의 잃는다. 반면, 미국은 경제발전과 종교중재를 훌륭하게 해내면서 현대판 제국의 힘을 얻었다.


  이번에는 동구이다. 그들은 서구와는 달랐고, 아프리카와도 물론 달랐다. 아프리카가 어느 정도 서구식 개발을 모토로 삼았다가 처절한 실패를 맛봐오는 중인 것과는 다르게 동구는 사회주의적 집단주의를 통해 갈등을 애당초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오로지 그것을 억압으로써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북한도 한창 그런 중이다. 문제는 실존사회주의가 완벽한 실패로 돌아갔을 때부터 일어났는데, 그들이 택한 노선은 자연스럽게 반제국주의적인 저항정신이었다. 명목상 그들의 적(敵)은 미국이다. 그러나 미국은 “무장한 서구”의 대변인에 지나지 않았다. 단, 미국이 그들의 대변인이 아닌 ‘최강자’임을 자처했기에 동구의 국가들은 한사코 그들의 간섭을 용납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실존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자명하다. 문화가 복합적으로 양성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나마 막아보려고 한 것이다. 갈등 없는 사회.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만은 사실 그보다는 지금 우리의 사회, 즉 근대화의 추진력이 만들어놓은 결과물이 “괴기스럽지만 자연스러운” 것이다. 누군가는 구조적으로 종속되고, 다른 누군가는 지배한다. 종속과 지배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전쟁으로 번진다.


  이런 세계의 조류에 대응하기 위한 일차적인 움직임은 아무래도 민족주의이다. 최근 들어 광신적 근본주의가 극우주의와 함께 날카로운 칼날을 세우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고, 히틀러의 주장과 일부 종교의 선민사상이 대단히 매력적인 시대 이데올로기로 부상하고 있다. 이는 가볍게 듣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 지금 독일 사람들은 극우파가 정당을 서서히 장악해가는 과정을 목도하고 있고, 일본은 군비 경쟁에 다시 뛰어들기 위해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게는 무기를 수출하지 않았던 과거의 법을 유연하게 만들고 있으며, 대부분의 종교전쟁이 일어나는 ‘위도 10도’에서는 여전히 테러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김정일 위원장 사망 시 위로를 하려는 일부 사람들과 천안함 사건, 연평도 사건을 기억하자는 격렬한 반북주의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터넷 총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국력이 이상한 방향으로 낭비된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성장을 이룩하면서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의 살아 있는 전설로 회자되는 동방사룡(東方四龍) 중 하나인 우리나라는 그나마 극단적 사건을 몸소 체험하는 일이 드물다. 그러나 이를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매우 안이한 태도이다.


  상기 언급한 위의 모든 문제들을 ‘문화’라는 차원에서 취급한다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떤 해결책도 마련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갈등을 문화를 중심으로 읽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젱하스의 구절을 하나 인용하는 것이 빠른 이해를 도울 수 있을듯하다.
  “문화 갈등은 또한 동원될 수 있는 권력의 원천이 빈곤한 상태에서 언어, 종교, 그리고 역사가 억지로 동원되고 도구화되어서 생기는 것이다. 이런 경우, 문화를 원천으로 내세우는 것은 문화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권력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그 문화적 원천을 해석하는 것은 문구 해석에 충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욕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구의 문화가 ‘우리’에게 유입되어 온갖 문제를 야기했다고 보는 시각에는 일견 부당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젱하스의 서구문화 두둔이 아니다. (이 책은 도저히 그렇게 읽히지도 않는다!) 탈식민지 역사를 겪은 거의 모든 나라들의 역사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서구가 근대화를 겪은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순전히 서구를 “도구”로써 사용했을 뿐이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서구식’으로 변해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 서구에서는 위계질서에 따른 서열의 병폐가 드물다. 우리나라에서는 ‘윗사람’이라고 하면 ‘아랫사람’의 생사를 결정할 만큼의 권력이 주어진 의미의 언어로 용인된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온갖 정치적 비리들이 서구에서 온 것일까? 호남과 영남의 지역주의도? 박노자, 진중권, 강준만, 유시민 등이 우리나라를 뒤집는 발언으로 끄집어낸 병폐들이 모두 서구에서 온 것일까? “그렇다.”며 자랑스럽게 자위(自慰)할 수 있는 우리나라 사람은 거의 없다.


  이는 더 넓게 봤을 때,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갈등에도 해당된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회자하곤 하는 “이슬람”이라는 것은 사실 없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정치적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테러와 학살, 착취 등으로 문제를 만들 뿐이지, 대다수의 무슬림들은 <꾸란>에 적혀 있는 문구를 가지고 정치적으로 크게 확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발언을 하는 이들을 골라 편집해 보도하는 대다수의 방송사들은 그들의 서구적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정치적 방영을 한 것일 뿐이다. 우리나라도 그렇다. 이슬람은 문제될 때만 언급된다. 그들이 메카에서 위대한 종교행사를 연다거나, 자선축구경기를 열어도 보도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슬람 내부에도 수많은 종파들이 존재한다. 터키에서는 수피 교도들이 신비한 춤을 추지만 이라크에서는 우리가 잊을 수 없는 ‘후세인’이라는 이름이 교파를 이유로 엄청난 학살을 벌여 결국 미국으로부터 ‘축출’당했다. 이슬람 국가들의 민주화 바람 때문에 세계의 봄이 찾아왔다고 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 표현은 결코 어울리지 않았음을 우리는 회상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 기반, 제도적 장치 없이, 아마 그들이 만들려고는 할 것이지만 결코 달성하기 힘들 그런 것들의 도움 없이 탈식민주의의 노선을 밟았던 상기 아프리카, 아시아, 혹은 동구의 퇴보한 민주주의를 경험할 것이라는 예측은 거의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젱하스의 구절들을 읽으며 우리가 직접 들어왔던 구체적 사례들을 통해 확장 해석할 수 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꾸준히, 그가 서문에서부터 주장했던 것처럼 헌팅턴의 테제를 반박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서구를 문화 투쟁의 대상으로 여기는 오늘날 전 세계적인 세태 역시 ‘서구’라는 문화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무지로부터 출발한, 창피한 역사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견지이다. 여기에는 큰 지혜가 존재한다. 문화를 가장한 권력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이른바 ‘정치화된 문화 갈등’의 원인을 지목다면 우리는 무지몽매한 간에 타인을 보편화시켜 쓸데없는 싸움을 일으키려고 않을 것이다. 현실은 권력이 움직인다.

 

  ‘문화’란 없다. 오로지 충돌을 조장하는 권력만이 있을 뿐이다. 이 낯선 시각에 익숙해져야 우리는 비로소 전 세계의 문제를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장에서 젱하스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할 어떤 가치에 대해서 말한다.

 

 

 

 

- 4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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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8

 

  이번 달은 거의 내내 창작의 구상에 빠져 있었기에, 이틀에 한 권 정도 읽던 독서가 뜸했다. 채우는 것과 덜어내는 것은 다르다. 조금이나마 시상의 고통에 빠져봤거나, 말도 안 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지어내본 사람이라면 그 필연적 차이를 알 것이다. 일기도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둘은 매우 긴밀하다. 따라서 쓰고자 하는 이는 읽어야 하고, 읽은 이는 써야 한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쓰는가?" 현대인들은 이런 질문을 던져놓고 스스로 그 능력을 소유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듯하다. 이 주제의 책은 매우 다양한데, 놀랍게도 하나같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유명작가가 돈을 벌고 싶으면 자신의 작문 철학을 한 권의 책으로 내기만 해도 되는 시대이다. 하지만 그런 책들을 읽어 봤자, 독서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책을 많이 읽어라."라는 말은 집과 학교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듣는 훈계이다. 그 훈계를, 뭔가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고자 1만원은 족히 될 "뻔한" 교양서 하나 사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이 세태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의 책을 사서 읽으면 자연스럽게 하고픈 말이 생기고, 그것을 부단히 쏟아내며 타인과 비교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문장이 견고해지는 것인데, 글을 생각이 아닌 표현법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책을 많이 읽지 않아도 좋다. 온갖 생각의 낙서를 해가며 한 챕터만 읽어놓고 그것에 대해 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튼튼한 주장과 넓은 사고를 만들어준다. 독서는 30분만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생각은 3시간이든, 3일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은 발췌본이 읽어도 좋다. 그리고 요즘은 책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독서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던가. 그렇다고 해서 말로 끄는 수레 세 개를 채울 정도로 책을 읽었다는 옛 현인들의 오래된 조언을 무시하란 것은 아니다. 많이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노력한다는 뜻이다. 새삼 하는 말이나, 독서는 단순한 책과의 조우가 아니지 않은가.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방법은 많다. 권위 높은 누군가의 권유에 따라 괜히 자신의 사고와 리듬을, 돈을 들여 바꾸는 것보다는 나 자신의 성향을 충분히 알고 책을 접하는 노력이 현명한 방법이다. 따라서 책 읽는 법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고백하는 양심 있는 저자들은 독자들에게 독서의 왕도를 두리뭉실하게 권유할 수밖에 없다.

 

 

 

*    *    *

 

 

  연말부터 내달, 아니 내년의 달력 첫 장까지 읽을 책들을 주문해놨다. 성탄절 전날에 주문했는데, 배송에 혼선이 있어 오늘에야 왔다. 많은 탐서가들이 그렇겠지만 겨울날 배송된 새 책을 받아들었을 때 느껴지는 표면의 한기는 나의 마음을 항상 설레게 한다. 미술을 조금 공부했다는 이유로 책의 표지 디자인을 한껏 음미하기도 하는데, 근래 표지가 독창적이지 않은 책은 거들떠 보이도 않는 사람들의 심리를 아주 모르겠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다 가끔 오래된 것 같은, 별 눈요깃거리도 안 되는, 고리타분할 것 같은 표지의 책을 우연히 펼쳤을 때, 예상 외의 놀라운 이야기와 사려 깊은 저자의 마음을 읽게 된다면 그 순간 느껴지는 환희는 가히 탐험가가 미지의 섬 동굴에서 보물창고를 발견했을 때와 비견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 까닭에 서울의 큰 서점들을 다닐 때면 한 번 즈음은 구석진 곳에 가서 쪼그려 앉아보기도 하고, 인터넷 서점에서는 평점이 매겨져 있지 않은, 출간된 지 꽤 오래된 책을 간략한 개괄이나마 훑어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책이 여덟 권이다. 새벽을 틈타 그 서문들을 읽은 뒤에 정리한다.

 

 

 

 

 

 

 

 

 

 

 

 

 

 

 

 

 

 

 

 

 

 

 

 

 

 

 

 

 

  '그늘진 정신'이라 표현하기에는 어폐가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흔히 양지라고 부르지는 않는, 고독과 권태, 멜랑콜리 같은 정신에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피터 투이의 <권태>와 앤서니 스토의 <고독의 위로>를 주문했고, 멜라니 킹의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이유로 산 책이다. 틸 뢰네베르크의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과 윌리엄 데이비도우의 <과잉연결시대>는 이번 달 초에 흥미 있게 읽었던 <많아지면 달라진다>와 이어지는 책들이 될 것이다. 현대인에게 있어 "연결과 시간"의 새로운 개념이 어떤 운동성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건 비단 견지가 부족한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은 얼마간 버트랜드 러셀의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와 더불어 읽을 것 같다. (순수하지만은 않은, 혹은 순수할 수 없는) 대중운동을 다소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나의 습관은 이현우氏가 간략하게 소개해준 지젝의 발언을 접한 뒤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호퍼의 '맹신자'라는 개념이 나에게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 그리즈월드의 <위도 10도>는 평소 종교전쟁에 관심이 많았던 탓에 주저 없이 고르게 된 책이다. 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분쟁을 다뤘지만 이 두 종교의 분쟁만 다루더라도 (내가 지난 계절학기에 들은 종교분쟁관련 강의에 따르자면) 전 세계의 종교분쟁 8할은 진단할 수 있다. 잠깐 읽어본 서문과 나이지리아 관련 첫 챕터에서부터 이미 빠져 들게 되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이미 고전이라 들었다. 환자의 병을 '병력'이 아닌 환자 개인의 역사로 다루는 올리버의 글에서는 높은 통찰력과 사려가 느껴진다. 따뜻한 책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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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9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30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창조자들 - 셰익스피어에서 월트 디즈니까지, 위대한 예술가 17인의 창조 전략
폴 존슨 지음, 이창신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2011.12.20

 

 

  나는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하루에 거의 한 편씩 시를 쓰곤 했다. 나는 시와 애증관계에 있었고, 그것은 나의 계륵이었다. 방문을 닫고 얼마간은 소설만 쓴 적도 있었으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형편없었다. 시간이 지난 뒤에 차츰 알게 되었다. 가끔 작가들 앞이라면 부끄러웠을 정도의 저자세로 작품을 대하고, 미술을 “배운다.”는 취지로 각종 지식을 섭렵하기도 했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나는 늘 예술을 접하고 있었다. 세상에 공개되어 오랜 시간의 공격, 수많은 눈들의 검열을 거쳤으나 지금껏 명작의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은, 혹은 막 그런 위치에 오르고 있는 작품들은 모두 용기의 산물이었다. 나에게 재능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무명들의 인정을 안 받아본 것도 아니고, 이름은 낮으나 공식적 자리에서 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에조차 자만할 수 없었다. 늘 굶주려 있었거나, 아니면 더 솔직하게는 용기가 없었던 것이리라. 사춘기의 얄팍한 고민에서부터 아직 접해보지 않은 철학적 주제에 이르기까지 시를 통해 성찰하고자 했고, 그로 인해 분명 보이지 않는 장애를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간 달성한 것들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어느 날 일기에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겠다.”며 작정하고, 창작의 어려움에 대한 잇단 핑계를 대며 스스로를 시로부터 밀어낸 것은 요컨대 부족한 사랑과 형편없는 집중 때문이었다. 용기가 있었다면 시를 더 사랑했을 수도, 시에 훨씬 더 깊게 미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용기는 재능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용기의 비가 내리지 않으면 재능의 텃밭에선 작물이 두터운 땅을 뚫고 나올 수 없다. 나에게는 잡초만 무성했던 것이다. 잡초를 뽑고 난 뒤 공부한 것이 미술이었고. 그러나 밭의 주인이 해마다 준비해뒀던 옛 씨앗들을 잊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이따금 시를 읽을라치면 먼저 작가의 뛰어남에 혀를 내두르고, 나중에는 “왜 용기의 비는 내리지 않았던가?”며 후회를 한다. 그렇다고 내가 비를 내려달라 소리쳐 애원한 적이 있기는 했는가? 결국 나는 그것을 진정으로는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착실한 독자보다는 더 참여적이긴 해도 예비문학도의 발치에는 가지 못하는 정도라고, 나는 몇 해 전 끈을 묶었다. 그래놓고 남은 미련이 나를 시의 더욱 은밀하고도 가까운 독자로 만들어준 것이리라.

 

 

 

*   *   *

 

 

 

  위의 단락들은 폴 존슨이 쓴 <창조자들>의 서문을 다 읽고, 막 초서를 읽으려던 참에 적은 것이다. 굳이 리뷰를 위해 정리한 생각은 아니지만 써놓고 보니 서문이 됐다. 어떤 독서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장(場)이 되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경향이 뚜렷한 듯하다. 실력을 갖춘 누가 봤다면 괄시했을법한, 그래도 시를 꿈꾸던 나의 옛 경험이 <창조자들>을 읽는데 상상 외의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미경험자가 아니기에 폴이 그의 책에 적어놓은 문학, 미술, 혹은 음악 관련 개념어들과 창조에 관한 관념어들이 살에 달라붙듯 다가왔고, 나 스스로 “나는 저들 중 누구와 가장 가까운 성향이었을까?”를 물어놓고 답을 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독서할 수 있었다. 그들과 나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이겠거니와 숱한 독자들의 비근한 오류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꿈꾸던 것에 대한 향수를 대신하여 자기평가를 했던 것이니, 이런 생각이야말로 진정한 독서의 쾌락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핑계를 하자면 그렇다. 하지만 깊게 따졌을 때, 나는 이들과 견줄 구색을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폴이 소개한 인물들 중 나는 미술을 공부한다는 까닭에 뒤러, 터너, 그리고 피카소에 주목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평 중 처음 듣는 것을 제외하자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어 다소 실망했고, 오히려 나의 관심은 문인들에게 있었다. 요컨대, 나는 문학도의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문인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아주 안 읽은 것은 아니다. 다만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인생의 대종(大鐘)을 울릴 정도로 큰 영향을 준 작가가 없었다. 몇몇이 기억날 뿐이었다. 시를 외우려는 열정도 없었기에 나는 김소월, 윤동주, 한용운의 절절하면서도 한국미 넘치는 그 구절들조차 암기한 것이 하나 없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유종호氏가 일러준 대로 좋은 글을 쓰고자 하면 짤막하게나마 동시(童詩) 정도는 암송해서 좋은 리듬감을 갖춰야 한다는데, 나는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게을리 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소설의 기억나는 구절을 대라고 하면 외지 못하나, 그래도 나이폴, 위화, 솔제니친 등을 “좋아한다.”고는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식으로 이래저래 변명거리를 찾아봤자 쓸모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 스스로를 문외한이라 불러도 어울리는 표현이다.


  사실 초서, 셰익스피어, 엘리엇, 트웨인 등 영어문학의 최고봉들이라 평가받는 거인들의 원어(原語)본을 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지라, 폴이 그들을 평하거나 인용한 부분의 역자 번역 구절을 읽어도 큰 감명을 받은 것은 없었다. 받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내가 아무리 카라바조에게 감명해서 그의 작품 중 그가 몰타에서 그린 <세례요한의 참수>를, 누구 못지않은 열정으로 소개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그 그림을 보지 않은 이에게, 그리고 카라바조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이에게 그 감동이 전해지겠는가. 초서가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로부터 기법 면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설명 부분에서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라틴어를 배워야 하는 것일까? 셰익스피어가 방언을 포함해서 약 24,000여개의 단어와 표현을 만들었다는데, 나는 그 수에 혀를 내두를 정도에 족하면 될까? 아니면 그것들을 다 찾아봐야 할까? 또한 그는 뛰어난 음악적 감각을 지녀 그것을 자신의 작품 속에 넣었다고 하는데, 영시를 접한 적이 거의 없고, 더군다나 영시를 읽을 정도의 언어능력도 안 되는 내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만 할까? 그것들을 나의 경험과 비교하여 유추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읽는 이들은, 아마 나와 대부분 같은 처지일 것이라는 가정 하에, 폴이 열거한 사례들을 하나의 거대한 그릇에 담은 뒤 그것으로부터 눈에 보이는 것들을 찾아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혹시 모른다. 누군가는 바흐에 정통한 이라, 폴이 말하는 모든 정보들에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할지. 혹은 다른 누군가는, 예컨대 퓨진에 대해 잘 알고, 건축을 해본 경험도 있어 무릎을 치며 뿌듯해할지. 하지만 대개 우리는 영문학애호가임과 동시에 미술애호가, 거기에다 패션의 역사와 감각을 꿰뚫고 있으며, 애니메이션을 아주 좋아하고, 더불어 건축에도 일가견이 있는 동시에 악기를 아주 잘 다뤄 음악을 깊게 이해할 수 있고, 여기에다 일본 회화사까지 정통한, 소위 말하는 전인(全人)이 아니다. 세세한 정보들에 과도하게 집중한다면 앞 문단에서 내가 말한 온갖 불이해(不理解)의 좌절을 겪게 된다. 나는 엘리엇과 제인 오스틴에 대해 잘 모르는 까닭에 대학 논문 몇 편(우리나라에는 엘리엇학회가 있다.)을 찾아 읽었는데 오히려 두 번째 불이해의 공격을 허용했다. 도움이 아주 안 된 것은 아니나, 폴의 의도로부터 더 멀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창조자들이란 어떤 이들이란 말일까? 폴은, 요컨대 그들이 뭘 썼고, 그렸으며, 만들었는지는 결과적인 이야기이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자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낼 수도 있고, 반대로 차이점도 찾아낼 수 있다. 모든 것을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무척 힘들겠지만 폴은 이들의 헌신, 미침, 용기, 고독 등을 말한다. 위고처럼 워낙 탐욕적이었던 이도 있고, 트웨인처럼 탐욕을 인정하며 그보다는 웃음을 더욱 추구한 ‘쇼맨’도 있고, 엘리엇처럼 욕망을 억제하면서 은밀하게 작품 속에 드러내는, 하지만 일상은 거의 청교도와 같았던 이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광적일 정도로 집착했으며, 그런 헌신적 창조의 밑바탕에는 그것을 가능케 할 정도의 방대한 지식이 들어가 있었다. 뭘 배우든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었고, 선택한 배움은 늘 도움을 줬다. 엘리엇은 엄청난 독서량과 학습능력, 그리고 문학에 대한 집중으로 그 방면에 있어서는 가히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구사한 단어들 중 일부 외설적인 것들은 그가 젊었을 때에 (아이러니하지만) 푹 빠져 있었던 보들레르에게서 온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는데, 여하튼 그의 보수적인 삶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반면, 셰익스피어와 초서는 글쓰기와 단어에 도취돼서 명예를 얻고자 하면서도 동시에 저속한 단어들을 엄청나게 쏟아내곤 했다. 이는 모두 삶의 유희를 높게 평가하고, 한편으로는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트웨인은 어떠했는가? 그의 매력적인 재담은 그를 미국의 서부개척이 낳은 ‘근대의 호메로스’로 만들어줬다고 하는데, 그 모든 것의 기반은 이야기꾼들 사이에서 겪은 그의 경험이었다. 이로써 그는 진정으로 독자가 원하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그것은 모두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완벽하게 체득한 탁월함이었다. 트웨인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내가 가장 존경하는 톨킨에 비춰 보자면 톨킨이 <호빗>을 통해 펼쳐놓았던 빌보와 드워프들, 베오른, 그리고 골룸 사이에 오고 간 “나름 재미있는” 대화들은 트웨인의 발치에도 못 미칠 정도이다. 특히 <반지의 제왕>은 퍽 지루한 면도 있다. 하지만 트웨인은 톨킨과 같은 일은 하지 못했다. 거의 20년이라는 시간을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집중적으로 투자한 전무후무한 일은 그의 시대 이후 환상소설가들에게 “뭘 해도 톨킨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을 겪게 만들지 않았던가. 다시금 그가 조명되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트웨인보다는 톨킨의 위력이 더욱 가시화되기도 하는 중이다. 하지만 트웨인의 글이 분명 더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맞다. 어쩌면 폴의 표현처럼 “너저분하거나 어설프거나”, 그렇지만 오로지 재미있는 것들이 말 그대로 독자들에게 훨씬 재미있게 다가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트웨인이 삼류의 저속한 작가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 정정해서, 최고의 대가 중 한 명이라는 것이 대단한 일인 것이다.


  예술의 기능은 다양하다. 지금 곁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접해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톨킨을 읽으면 그의 세계로 ‘점프’하게 되고, 롤링을 읽으면 어느 공중화장실에 들어가 혹시 저 변기가 마법부로 통하는 비밀의 길이 아닌지 실제로 의심하게 되며, 위화를 읽으면 뿌리 깊은 인간애를 느낀다. 그리고 모든 대작들은 읽는 중에 재미있고, 읽은 후에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개인에게 가까운 주제라면 더욱 기억에 남게 되고, 생각과 행동을 바꾸게 된다. 심지어 신체도 바꿔놓는다! 작가의 순수한 동기가, 혹은 탐욕적 동기라도 좋은데, 어쨌든 창조의 항로를 거쳐 독자의 부두에 정박하고, 결국 길고 짧은 문장, 밝고 어두운 색채, 높고 낮은 음 등으로 수입되면, 비근한 비유이겠지만 우리에게는 거대한 삶의 인프라가 구축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열렬한 독자에게는 자신이 왜 그토록 예술에 몰두하는지에 대한 비밀을, 반대로 예비 예술가들에게는 자신이 예술을 하려는 철학과 동기를 재점검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창조의 비밀 중 하나가 용기라는데, 그런 비밀을 사용할 일이 거의 없을 것만 같은 우리의 삶에, 대관절 용기는 무슨 말인가 싶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서문의 한 대목을 옮겨본다.
  “가장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장애가 오히려 엄청난 용기와 의지력을 일깨웠다. 혐오와 자기 비하의 삶은 최고의 창작품을 무수히 쏟아 내면서 새롭게 태어났다.


  우리나라에서는 꽤 유명한 프랑스 화가 툴루즈-로트렉와 관련된 평 중 일부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그 못지않은, 스스로 돌이켜봤을 때 어마어마한 규모의 산과 같은, 하지만 남이 보면 사소할 수 있는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산을 넘기 위한 방법이 하나밖에 없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아마 우리가 기억하는 “내 생애 첫 번째 대성통곡 때에 부모님께서 해주신 말”이라든지, 교과서에서 본 “교과서적인 삶”의 비밀과 관련해서, 혹은 그 외의 숱한 경험들로 말이다. 그것은 용기이다. 베토벤, 미켈란젤로, 르누아르도 마찬가지였다. 삶을 긍정으로 보든, 총체적인 멜랑콜리로 보든 그것은 큰 상관이 없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의 심장을 뛰게 만드느냐에 있다. 그리하여 용기가 생기고, 그 순수한 힘이 우리를 어디론가 이끄는가가 문제이다. 대단히 지루한 말일 수도, 그리고 별 차이가 없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 차이는 크다. 폴이 말한다.
  “창조는 즐겁기보다는 인내해야 하는 괴롭고 혹독한 경험이며, 차라리 창조자가 아니길 바라는 때도 많다는 게 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삶의 에너지는 소비된다. 이와 같은 예술가의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때론 그들 못지않은 엄청난 에너지를 어딘가에 쏟아 부어야 하는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 에너지로 만든 용기가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다. 폴은 그들이 “열심히” 일했다고 말한다. 이 부사에 대해 우리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들의 삶과 비교하여 얼마간 읽은 클레이 셔키의 <많아지면 달라진다.>를 복기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과연 어디에 에너지를 얼마나 투자하고 있을까? 엘리엇의 회고처럼 만약 우리가 삶의 시간을 일말이라도 낭비하지 않고자 하는 자기훈련에 뛰어난 이들이라면 우리가 TV에 한 눈을 팔거나 인터넷에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시대를 움직일 어마어마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놀라운 집중력에 대해서 부러워하거나 그것과 비교하여 자기 자신을 폄하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는 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일상과 예술의 대조적 삶 중 하나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창조라는 것은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그건 용기가 부족한 이들이 변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정말 창피한 핑계가 아닐까. 상기된 기억을 인질로 삼아 추궁해보고, 지금을 반성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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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1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2 0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4 0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5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