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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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1

 

 

  자유의지[명사] : 외적인 강제ㆍ지배ㆍ구속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의지. 라틴어로는 Liberum Arbitrium Voluntatis. 영어로는 Free Will.


  나는 사람들이 해리스의 『자유 의지는 없다(원제 : Free will)』에 대해서 어떤 다양한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 그저 상상만 해보는 것이다. 누군가는 해리스를 아예 ‘허풍쟁이’라고 예단하는 바람에 이 책을 읽지 않을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에 분노하는 것처럼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화를 낼 수도 있다. 이런 반응은 대개 어떤 것들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보지 않았거나, 혹은 않으려는 태도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믿음’이 탐구하려는 자세를 방해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그러니까 해리스가 ‘자유의지’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문제에 대해 평소 깊은 생각을 해본 것은 아니지만 나와 같은 독서취미나 글쓰기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그의 주장은 별로 생소하거나 놀라운 것이 아니다. 고대철학에서도 ‘나’에 대한 전복적 사고는 있었다. 예컨대 장자(莊子)가 있다. 다만 그런 철학자들이 오늘날 ‘전복적 사고’를 주장하는 학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그들의 대부분이 광인(狂人)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뛰어난 성찰과 획기적인 사고로 기존의 믿음을, 대륙처럼 큰 거인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위험했다.


  나는 적게나마 거인을 무너뜨리려는 시도, 혹은 그런 시도들로부터 여전히 저항하며 자신들을 지켜나가는 거인들의 시도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활동하게 되는지를 읽어왔다. 물론 그것들 사이의 첨예한 논쟁에 직접 뛰어든 적이 없다는 한계는 앞서 고백해야겠다. 나는 루이스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이라든지, 리처드 도킨스가 근본주의적 종교세계와 전쟁을 선포한 역작들, 지적설계론들에 대한 서양 학자들의 반론, 니체, 진화론,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존 브록만의 등을 보면서 ‘확신’이라는 기둥이 무너져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계속 탐구하고 질문하다 보면 인문학은 어느 순간 과학적 진실들과 마주하게 된다. 종교처럼 과학과 아주 다른 대륙의 진리들에 접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인문학을 붙잡고 있으면 그 진실들을 피해갈 수가 없다. 과학은 증거를 통해 가설을 세우고, 입증이 되면 반박의 논거가 나오기 전까지 그것을 잠정적인 사실[fact]로 공인하는 공적 제도이다. 인문학이 과학적 진실들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논리가 아닌 증거를 찾아야만 한다. 논리는 현대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때론 ‘말놀이’에 지나지 않을 때가 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엄중한 현대인들은 유전자학, 진화론, 우주과학, 뇌과학, 지질학, 고고학 등 인류가 발견해온 증거들의 역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이런 증거들에 기초한 논리가 아니라면, 사실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어필할 수조차 없다.


  그런 면에서 샘 해리스의 “자유의지는 환상이다.”라는 주장은 확신에 대한 의심을 예전보다는, 적어도 근대 사람들보다는 더 쉽게 할 수 있는 현대인들에게 그다지 놀라운 역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항간에 이 책은 엄청난 문제작이라고 소개되는데, 아마 그 까닭은 현대인의 양자적 태도 때문일 것이다.


  매사를, 심지어는 모든 것, 아니 신까지 의심할 수 있으면서도 이것만큼은 의심하기 힘들고, 혹은 하기 싫을 때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 ‘이것’이란 바로 ‘나’이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솔직히 말해 장자는 사유놀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물증이 없다. 현학적이고, 해학적이고, 그래서 고도로 형이상학적인 철학들은 어렵지만 그만큼 수용하는데도 별 무리가 없다. 더군다나 오늘날은 지식 소비시장의 세계가 아닌가! 그런데 해리스는 막강한 증거를, 실제 실험들의 데이터들을 들고 우리에게 선언한다.


  “자유의지는 없다.”


  책에 소개된 생리학자 벤저민 리벳의 실험은 생각에 앞서, 그러니까 우리가 ‘자유의지’라 부르기 좋아하는 어떤 과정에 앞서 뇌피질의 뉴런 256개가 활동하는데, 그것을 분석하면 우리가 내리는 의사결정의 무려 80% 정도를 예측할 수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도출해냈다. 쉽게 말해 ‘나’보다 뇌가 먼저 움직인 것이다. 이를 해리스는 “나의 정신생활은 단지 우주에 의해 내게 주어진 것일 뿐이다.(28쪽)”라고 표현했다. 그럼 자발적 행동과 비자발적 행동의 차이는 어떨까? 해리스는 이것을 그저 “뇌의 수준” 정도라고 여긴다.


  해리스는 우리의 이해를 (종교적 의미가 배제된) 결정론으로 끌어내린다. 그러나 이것은 운명론과는 다르다. 운명론은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도 문제시되었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죽이기로 되어 있어서 Pricrime 시스템에 따라 적색경고볼에 내 이름이 새겨진다고 하자.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톰 크루즈(극중 앤더튼)과는 달리 그저 내 방 침대에 누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내가 누군가를 죽이는 순간만을 기다린다고 하자.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해리스의 말처럼 운명론을 믿고 그저 관망하는 태도는 단순한 결과 딱 하나만 만들어낼 뿐이다. 내가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서는 영화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여야만 한다. 즉 운명은 없고, 선택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해리스에 따르면 이 선택에 대해 우리는 한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 우리가 선택을 ‘생성’하는 것이라 믿는다는 것이다.


  “당신이 내리는 다음 번 선택은 선행 원인이라는 암흑 속에서 출현하기 마련인데, 그 원인들은 당신 경험의 의식적 목격자로서 당신 스스로 생성한 것이 아니다.(45쪽) [중략] 당신은 이번에 왜 상황이 달라졌는지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사후적인 사건들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48쪽)


  해리스는 우리에게 계속 “우리는 왜 그런 선택을 했지? 우리는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지?” 등을 심리적 원인을 찾는 방식대로 추적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면 “자욱한 안개”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면에서도 그렇고, 또 한 편으로는 우리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는 주장이 별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 남는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통제를 받는다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저자도 이 우려에 대해 십분 공감한다. 그러나 그는 바꿔 생각할 줄 알았다. 실제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는 생각의 실종은 “희망과 두려움, 노이로제가 덜 사사롭고 덜 부담스러워(58쪽)”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여기서 훌륭하며 재치 넘치는, 생화학적인 비유를 하나든다.


  “본인의 인격에 필요한 건 다름 아닌 한 끼 식사뿐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59쪽).”


  자유의지는 죄(원죄:sin)와 도덕관념과 당연히 연관된다. 근대철학이 그것을 부추겼다. 따라서 해리스처럼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건 우리 사회의 윤리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해리스는 윤리제도를 존중하는 뉘앙스 속에서도 일단 그것을 의심해본다. 선악과 진위 같은 것은 인간의 복잡한 패턴 속에서 “일관적으로” 논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철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의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63~64쪽에 다섯 개의 사례를 수록했다. 아마 이 책을 읽을 용의가 있는 많은 독자들이 이 대목에서 상당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실제 윤리제도는 다섯 가지의 사례에 동일한 형량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유를 불문하고 일단 분노부터 하는 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어쨌든 피해자는 죽었고, 가해자는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뇌의 상태, 가해자의 유년시절 등을 고려했을 때, 그다지 합당하지 않은 편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인과관계를 더 넓은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자유의지에 대한 환상을 없애야 하며,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쓸모없는 증오의 논리”를 마음속에서 지울 수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종교가 그들의 신자들에게 부여하는 ‘영원한 형벌’이라는 논리도 부정할 수 있다.


  이 책은 해리스의 전략에 따라 짧고 간결하게, 때로는 반대 인용문이 많이, 그리고 재치 있는 표현과 질문들이 연달아 등장하기 때문에 독자들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릴 ‘멈춤 구간’이 많은 책이다. 문제 자체도 첨예하거니와 “과연 우리는 해리스에게 어떤 반론을 제시할 수 있을까?”를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재구성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반감이 아닌 증거를 기초로 한 논리적 반론을 우리가 얼마나 제시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나는 그다지 기대하지 못할 것 같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해리스의 주장이 과연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효용의 문제를 늘 인문학에게 물어보듯, 우리는 “그래, 그렇다면 자유의지 없는 나의 삶에 대해서 나는 어떤 기본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지?”라고 물어볼 수 있다. 해리스는 변화의 순간에, 혹은 개선의 순간에 우리가 보다 넓은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다면 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가해자를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를 예로 들며 - 내 생각에 이 예 말고도 더 많은 영역에서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데 - 생각할 여지 한 가지를 남겨둔다.


  “상황을 이해하는 태도의 변화는 보편적인 인간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 깊고 더 지속적이고 더 동정적으로 진보한 것이다.(69쪽)


  자유의지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넓게 보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서 그가 ‘정치’라는 짧은 장(章)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변화할 수 있는 지점에서는 그렇게 하고, 혹 변화할 여지가 없거나 요구가 수용되지 않는 지점에서는 무작정 밀어붙이지 않는 대신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꼼꼼하게 따져보는 태도이고, 현대인들의 특징인 ‘유용성’에도 맞는 자세이다.


  “우리가 자유의 감각을 느끼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꼼꼼히 따져보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81쪽)


  따라서 이 책은 우리에게 두 가지 면에서 충격을 준다. 하나는 “자유의지는 없다.”라는 선언 그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의지를 맹종하면서도 실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점에서이다. 이것이 시대가 기억할 만한 양심적인 ‘사건’이 될 수 있을까?


  해리스는 지식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 늘 그러했듯이 수많은 종교적 믿음, 철학적 노선, 혹은 과학적 반증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것이고, 그것들에 대응하면서 우리에게 또 다른 진실을 폭로할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와 같은 학자들의 충격적인 소수 의견, 이 글의 앞부분에서도 잠시 인용했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그 ‘소수 의견(minority report)’이 오늘날에는 쉽게 폐기되지 못하며, 충격적이고 신선한 것일수록 우리의 관심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어느 선까지 우리는 이것을 수용할 수 있을까? 전복적 사고에 대해 우리들이 지닌 저항심리, 은연중에 발동하는 경고 사이렌의 소리를 과연 해리스의 주장이 침묵시킬 수 있을까? 우선 나부터 그의 주장을 꼼꼼하게 체험해보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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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6 1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6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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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8

 

 

  이로써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을 다 읽었다. 즉흥적이었지만 이번 방학의 목표는 칼비노의 작품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반쪼가리 자작(1952)』이 나에게 준 충격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1959)』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작품은 칼비노의 3부작 중 가장 마지막 작품이었고, 나는 내친 김에 1957년 작품(3부작 중 두 번째)인 『나무 위의 남작』을 사서 읽었다. 그때, 나는 바우만과 피카르트를 같이 읽고 있었다. 어려운 글과 무거운 분위기 속에 한동안 헤매던 때라 칼비노의 작품은 단비와도 같았다. 학기 중에 틈틈이 읽겠노라고 『보이지 않는 도시(1972)』와 『우주만화(1965)』도 사뒀다.


  어쩌면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남에게 소개시켜줄 수 있는, 그런 애정과 사랑을 보낼 수 있는 작가를 만난 것이 아닐까 지금도 조심스럽게 기대해보고 있다. 아직 그의 모든 작품을 읽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를 많이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은 칼비노가 20대 후반부터 약 7년 간 문학적 기틀을 다져가며 만들었다. 작가는 40대에 접어들면 30대와는 또 달라진다고 하니, 서재에 꽂아둔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 내가 그를 정말 좋아하게 될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느낌은 아주 좋다.


  좋은 느낌의 이유를 나는 칼비노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과 거의 비슷한 대답들처럼 열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 한 순간도 독자를 지루하게 하는 법이 없는 그의 재치 있는 문장들, “있을 법 하면서도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놀라운 이야기들, 그러한 진행 속에서 분명하게 제시되는 작가의 역사·도덕관 등. 그런데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낙관적인 태도이다. 하지만 한 국내 평론가가 말한 것처럼 칼비노는 지나친 낙관과 부담스러운 비관의 사이를 ‘환상’을 통해 돌파한다.


  3부작 중 어떤 작품을 읽어도 독자들은 칼비노가 지금의 우리가 갈구하는, 이 시대에도 그가 살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부재한 채로 막연하게 추구되고 있는 인간상과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반쪼가리 자작』에서는 메다르도를 둘로 쪼개어 선악의 분리가 갖는 의미를 제시하며, 결국 두 동강 난 두 개의 가치를 하나로 봉합해 인간의 ‘원래’ 모습을 보여준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거의 허상과도 같은, 갑옷 속에서만 정신의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기사 아질울포와 그 주변의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통해 인간의 ‘전체’를 그려낸다.


  그리고 내가 가장 마지막에 읽은 - 발표 년도로는 두 번째(1957)이지만 작품 속 시대상으로는 가장 최근 작품인 - 『나무 위의 남작』에서는 칼비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미 고인이며,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고, 더군다나 그의 작품을 고작 세 편만 읽었을 뿐이라 그가 정확히 이 작품에서 ‘이상적인 인간’을 독자들에게 제시했다고 확신에 찬 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일말이라도 들게 되는 것은, 아마 대다수의 독자들이 공감하겠지만 이 작품이 세 편의 ‘우리의 선조들’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의 인생을 보여준다는 이유, 그것으로 인한 직감 때문이다.


  남작의 이름은 코지모이다. 소설 초반부에는 코지모의 어린 시절이 그려진다. 말하는 이는 코지모의 동생 비아조이다. 코지모는 판에 박힌 귀족 생활을, 단 열 두 살의 나이에 청산하기로 마음먹고 나무 위에 올라가 죽을 때까지 내려오지 않기로 결심한다. 코지모의 부모는 귀족답게 ‘정석’대로 반응한다. 아버지는 아버지처럼, 어머니는 어머니처럼 염려한다. 코지모가 나무 위에 올라가 만난 세상은 다채롭다. 코지모의 첫사랑 비올라(신포로사)도 나무 위에 있다가 처음 만났고, 나무 위를 돌아다니는 어린 좀도둑들도 만났다. 나무와 새를 진정으로 만난 것도 바로 그때였다.


  비아조가 말한 것처럼 코지모는 은자(隱者)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물물교환도 하고, 숲에 불이 난 뒤로는 마을 사람들을 단결시켜 스스로 진화대(鎭火隊)를 결성하도록 고취시켰다. 그는 나무 위에 숨어 살지만 마음은 계속해서 땅으로, 그러니까 사람들에게로 굽어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배움을 게을리 한 적도 결코 없었기 때문에 많은 책을 두루 섭렵하고, 시대의 명사(디드로, 볼테르, 나폴레옹 등)들과도 교류했다.


  코지모의 독서와 관련해서 대조될 만한 인물은 ‘악명 높은’ 잔 데이 브루기이다. 코지모와의 만남  이후 그도 코지모와 마찬가지로 책을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책에 빠져 지내는 바람에 그의 ‘역할’인 도적 두목의 일은 내팽개치게 되고, 부하들에게 등 떠밀려 마지못해 도적질을 하다가 예전 같지 않은 어리숙한 행동 탓에 체포된다. 그는 결국 사형을 당하는데, “목에 올가미가 씌워졌을 때”조차 코지모에게 소설 <클라리사>(1784~85년에 발표된 새뮤얼 리처드슨의 서간문 장편소설)의 결말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주인공이 목을 매단다고 하니 잔 데이 부르기는 “나도 그럴 건대”라고 말한 뒤 직접 사다리를 차고 죽는다.


  정체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은 삼촌 카레가(코지모와 비아조의 삼촌으로 등장하는 에네아 실비오 카레가는 왠지 『반쪼가리 자작』에 등장하는 의사 트렐로니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여러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예컨대, 트렐로니는 쿡 선장과 함께 바다로 돌아가는데 성공했지만 카레가는 터키로 돌아가려다가 회교도들의 칼에 목이 잘린다. 아마 그가 비밀거래를 마을 사람들에게 폭로함으로써 해안에서 습격당하게 된 결정적 이유를 제공했다고 여긴 듯하다.)의 죽음으로 아버지가 실의에 빠져 죽자, 코지모는 ‘디 론도 남작’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으며, 코지모는 “광적인 이야기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가 늘 결핍된 느낌이 들었다. “사랑을 모르고 다른 경험을 다 해보는 게 무슨 소용 있겠는가?(211쪽)” 이것은 비아조의 말이기도, 코지모의 말이기도 했다.


  코지모가 사랑을 아예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카를로스 3세에게 내쫓긴 귀족 가문들이 나무 위에 올라가 산다는 올리바바사에 간 코지모는 가문의 수장인 돈 프레데리코의 딸 중 우르술라와 연인 사이가 된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둘을 결국 가르게 되는 다른 이유 때문에 흐지부지 끝난다. 국왕이 “관대한 사면”을 베풀어 프레데리코의 가문이 스페인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코지모는 나무에서 내려가지 않겠다는, “난 저항을 하고 싶소.”라는 말로 압축될 수 있는 그의 오래된 결심을 끝내 저버리지 않았다. 결국 우르술라는 억지로 끌려간다. (그녀의 결말은 알 수 없다. 올리바바사에서 프레데리코를 선동한다는 이유로 코지모와 대결을 했던 예수회 신부 술피시오는 훗날 코지모와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때 그는 코지모에게 우르술라가 수녀원에서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비아조는 그것이 거짓말일 수 있다고 했다.)


  코지모와 비아조의 어머니가 죽고, 두 가지의 좋은 일 - 사실 그 중 하나는 마냥 좋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인데 - 이 일어났다. 하나는 비아조가 결혼을 한 것이다. 형을 존경하고, 역시 형의 삶을 동경했지만 비아조는 보통 귀족의 삶을 살았다. 다른 하나는 코지모가 비올라와 다시 만난 것이다. 여후작이자 과부인 비올라는 코지모와 소위 ‘밀당’을 한다. 그런 그녀는 코지모에게 “닿을 수 없는 세계의 일부분”이었고, 그녀가 들려주는 다른 남자들의 이야기에 질투를 느끼게 된다.


  로맨티스트인 그녀는 분명 계몽주의자(소설에는 “볼테르주의자”라고 언급된다.)인 코지모와 많은 면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인물이었다. 둘의 사랑 방식은 거의 완벽하게 어긋났고, 코지모는 그녀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그녀는 코지모가 너무 자주 질투심을 느끼는 완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둘은 비올라가 두 명의 기사 - 한 명은 프랑스인, 다른 한 명은 영국인 - 로부터 코지모의 사랑을 실험한 일을 마지막으로 모든 관계를 끝냈다. 둘의 사랑에 대해서 비아조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모든 불만과 변덕은, 금방 절정에 도달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서서히, 절정에 이를 때까지 키워나가려는 만족할 줄 모르는 강한 갈망일 뿐이었다. 형은 이런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가 떠나는 순간까지 그녀를 괴롭혔던 것이다.(307쪽)


  코지모는 뼈아픈 이별 이후 거의 미쳤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전채, 비범한 인물 중 한 사람”이라 존경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는데, 오직 동생 비아조만이 코지모가 추구하던 세계를 알고 있었다. 가령,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여 활동했지만 열의를 갖는 때와 그렇지 않는 때가 들쑥날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충동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못 박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아조는 “많은 단체들 중 정의롭다거나 다른 단체와 완전히 구별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이 때문에 형은 철저하게 자연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327쪽)”면서 그가 보편사회를 추구했음을 말한다.


  연이은 대격변의 시대에도 비아조가 알려준 코지모의 속마음은 그대로 드러난다. 대혁명의 여파로 옴브로사에서도 ‘불평 노트’가 작성되고, 마을 사람들은 “변화의 열망”을 갖게 된다. 결국 포도수확시기에 십일조를 거두러 온 경찰들이 포도를 담은 통 안에 거꾸로 처박히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자유의 나무’도 만들어졌고, 사람들은 “분노”를 외쳤다. 다행이도 그들은 진압되었을 때 주동자들이 도망쳤다고 주장하며 석방되었고, 언제나 그렇듯 코지모는 나무 위에서 결코 잡히지 않았다.


  칼비노는 코지모와 프랑스 혁명을 나란히 대비시키면서 이것 한 가지를 말하려는 듯하다. 진정한 혁명은 코지모의 주장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충분히 관철된 후에나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혁명가들이 보수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형식주의자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352쪽)” 코지모의 글은 ‘죽은 글’이 되었고, 세상은 그가 원하는 보편사회를 등진 채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혁명은 끝나고, 나폴레옹이 등장하여 왕정복고의 시대가 열렸다. 이 피비린내 나는 시대에 사람들을 지켜준 건 코지모였다.


  칼비노에게도 나폴레옹보다는 코지모가 더 바람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보나파르트가 코지모에게 이런 말을 해주길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이것이 코지모의 꿈이다. “당신 말이 맞았소, 시민 론도. 당신이 저술한 헌법을 다시 내게 주시오. 위원회에서도 통령 정부에서도 제국에서도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던 당신의 충고를 내게 들려주시오.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자유의 나무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전 조국을 구합시다!(360쪽)”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패퇴했을 때, 코지모는 파리로 향하는 러시아의 안드레이 왕자와 아주 잠깐 마주친다. 이렇게 프랑스와 러시아는 코지모와 무관한 사이인 것처럼 나무 밑으로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젊은이들의 이상과 빛과 18세기의 희망이 모두 재가 된” 19세기에 이르렀고, 칼비노는 비아조의 입을 빌려 그가 소설의 훨씬 이전에 독자들에게 미리 넌지시 던졌던 한 뭉텅이의 말을 다시금 상기시키도록 만든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세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며 세상 모든 것,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도 호의적이지 않은 세대의 출현으로 세상은 변해 버렸다. 이제 나무 위로 당당히 걸을 수 있는 코지모 같은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178쪽)


  그 코지모가 늙어 병에 걸렸을 때, 사람들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하지만 여전히 뭔지 잘 모르겠는 코지모만의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오랜만에 사려를 발휘해 그를 보살피려고 했지만 이 기이한 인물은 최후마저도 환상적으로 끝냈다.


  나는 그 장면이 정말 멋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거의 운명처럼 나타난 한 열기구의 닻에 뛰어들어 그것을 잡고 열기구와 함께 대양의 한복판으로 사라져가는 모습. 이것은 극적이면서도 황당무계한 결말인데, 사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코지모의 최후, 칼비노가 비아조와 마을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코지모’다운 최후였다고 말하고 싶다.


  “나무 위에서 살았고 - 땅을 사랑했으며 - 하늘로 올라갔노라.(374쪽)


  이것이 코지모의 비문이 되었다. 비문의 뒤로 옴브로사의 배경이 펼쳐지고, 그곳에 격동의 19세기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대로, 그 역시 펼쳐질 것이다. 코지모가 죽자 “옴브로사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나무를 사정없이 베어냈다. 타지에서 들어온 나무들이 옴브로사의 옛 나무들을 밀어냈고, 비아조는 옴브로사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변한 것 같았다고 했다. 야자수의 잎은 빈약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가히 ‘나무의 고장’이 됐을 법한 옴브로사의 상실이 무엇을 의미할 수밖에 없는지, 독자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    *    *

 

 

  ‘우리의 조상들’ 3부작 중 유일하게 씁쓸한 맛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반쪼가리 자작』에는 두 개의 ‘해피엔딩’이 겹쳐 있었다. 메다르도가 본래의 모습으로, 그러나 한껏 현명해져서 돌아왔고, 트렐로니는 바다로 다시 떠났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서는 비록 아질울포가 사라지긴 했지만 소설의 서술자임을 끝내 숨겨왔던 브라다만테가 랭보와 다시 만났고,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는 “이제 달라질 것이다.”라는 풍성한 의미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나무 위의 남작』에서는 사라져버린 이상과 여전히 존재하는 빈약한 현실 사이의, 그러니까 하늘로 사라져간 코지모와 땅에 남은 사람들의 일상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격차만이 오로지 확인될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칼비노 특유의 낙관적 태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코지모 그 자체이다. 사랑에 실패한 것은 분명 그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한 가지 불리한 이유(그러나 코지모가 볼테르주의자라는 것, 우르술라와의 이별, 그리고 비올라와의 파탄 등은 계몽주의가 낭만주의와 결합할 수 없다는 칼비노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소설 속 장치가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가 되겠지만 그가 땅 위의 사람들에게 제시한 이상과 직접 헌신적인 행동으로 보여준 이상은 적어도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한 어떤 가치들을 생각해볼 때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칼비노가 그런 사람의 등장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그가 희망하는 것은 우리의 열린 태도이다.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의 의미에 대한, 우리를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정말 허황된 것도 같은 주장들이 나폴레옹과 코지모,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디오게네스의 관계로 비유되는 것처럼 실은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라는 것. 이것이 바로 칼비노의 메시지이며, 또한 ‘환상’이라는 장르가 독자들에게 궁극적으로 전해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의미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가 소설을 덮고, 이제 막 밝아오는 우수(雨水)의 나무들 사이에 혹시 코지모 남작이 앉아 있나 쳐다보게 된다면, 칼비노는 우리를 보며 웃어줄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의미를 찾아가고, 그렇게 아주 미세하게 바뀌어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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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8 17: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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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8 2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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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2013.02.15

 

 

  과학의 법칙으로 인간사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유명했던 엔트로피가 그렇다. 자동차는 석유를 먹으며 달린다. 이때 자동차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석유의 ‘실종’이 아니다. 물론 석유는 없어져 매연이 된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엄밀히 말해 석유의 에너지는 매연의 에너지로 동일하게 유지된다. 엔트로피는 이렇게 변화한 에너지 형태가 이전의 형태로 돌아가지 않음을 뜻한다. 매연이 석유가 되는 연금술은 없다.


  리프킨은 이걸로 인간사, 즉 미래를 예상했다. 그러나 과학자들 중 일부는 그가 실수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엔트로피는 분자 상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영장류들을 분자 크기로 축소시켜서 자판기 커피용 종이컵에 쏟아 붓는다고 해도, 우리는 뭐가 들어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을 것이다. 과학이 다루는 엔트로피의 영역은 인간사에 비해 규모 상 훨씬 압도적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우려와는 달리 리프킨의 응용과 비유는 시기적절했다. 대중들은 과학적 엄밀함을 추궁하지 않는 대신 리프킨이 들려준 충고를 인상 깊게 들었다. 이미 태워버린 에너지는 사용가능한 에너지 형태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할 것이고, 결국 엔트로피의 천문학적인 증가로 지구는 파멸될 것이다. 그 이야기가 나온 지 벌써 30년이 지났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현대를 설명하는 또 다른 유용한 단어가 바로 ‘불확정성’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교양 삼아서라도 많은 이들이 들어봤을 것이다. 이것은 엔트로피보다 더 작은 세계를 전제로 한다. 내가 전자처럼 작다면 나를 보는 사람들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위치]와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운동량]를 동시에 알 수 없다. 자세한 내용은 너무 어려워 알아볼 엄두가 나지 않지만, 여하튼 이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사에 응용할 만한 개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확정성’이라는 단어는 매력적이다. 이 단어는 ‘불확실성’과 배다른 형제인양 대우를 받는다. ‘확정’과 ‘확실’ 사이의 의미 차도 사실 거의 없다. (확정이 ‘확실한 일’이라는 조금 확장된 의미를 갖지만 확정성을 뜻하는 영어 certainty를 우리말로는 ‘확실’이라고도 번역한다.) 이 단어가 우리에게 각별한 이유, 여타 단어들과는 달리 요즘의 우리에게 더 많이 회자되는 이유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것 같고, 실제 그렇게 살고 있다는 불안과 공포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삶을 초래했을까? 삶은 본래 불확실한 것이라고, 바로 저 단어에 기대어 위안을 받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불확정성, 혹은 불확실성으로의 사유 여행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줄 것이다. 자신이 분별력을 갖췄다고 믿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가르치려고 드는 것을 싫어한다. 삶의 불확실성에 관한 여러 진단들이 항간에 나오더라도 “그럼 대체 어떻게 살라는 건가?”라며 미간을 찌푸릴 것이다.


  사실 그들에게는 불확실성의 탐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건 어떻게든 살아남는 일이다. 자신의 요술 상자에 어떤 것은 집어넣고, 또 어떤 것은 버리고, 몇 가지는 상자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내면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일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살아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마땅히 추구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믿어왔었다. 그러나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니 이런 생각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미 오래 전에 그쳤거나, 그렇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기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눈총만큼이나 질문하려는 사람에게도 따가운 그것이 날아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질문하는 것, 혹은 배우는 것을 싫어하거나, 그럼에도 누군가를 가르치려고만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라면 나는 당신에게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원제 : 44 Letters From The Liquid Modern World)』을 읽으라고 구태여 권하진 않겠다. 현대의 삶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낡은 나룻배 위의 아슬아슬한 사투와 같다는 진단, 우리가 너무 생각 없이 소비자로서의 삶에 빠져 있다는 진단, 타인에게 대한 배려가 없다는 진단 등 지금까지 들어왔던 여러 비판들이 이 책에 소위 ‘재탕’되어 있다고 불평할 사람이라면, 당신이 만약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면 당신에게 바우만은 그저 백발의 늙은 할아버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있을까?

 

  하루에 4~5개의 편지만 읽으면서, 그러니까 많게는 고작 20~25페이지 정도의 글만 읽으면서 나는 되도록 오래 바우만의 글을 읽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를 유지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쓴 편지를 누군가가 한글로 알맞게 번역해서 나에게 44일 동안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우편으로 보내준다고 여겼다. 폭설로 우체국 업무가 마비된 일이 잦아 4~5개의 편지가 한꺼번 몰려온다는, 일종의 거짓말도 보탰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런 원인 모를, 그러나 생각하기 쉽지 않은 고통들을 겪으며 살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매 편지마다 던졌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하는 나와 한국어를 거의 모르는 바우만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나는 계속 들었고, 질문은 어느 순간 꼬리를 감췄다. 내가 할 질문을 포함해서 내가 하지 못했을 질문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44편의 편지에 모두 담겨 있었다.


  나는 바우만의 편지에서 중요한 것 같은 부분들을 발췌해둔, 노트로는 4장을 꽉 채운 정리본을 지금 키보드 옆에 두고 있다.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나는 이 책을 4일 전에 다 읽었고, 그간 도대체 무슨 말을 써야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바우만이 들려준 이야기는 많았다. 키워드들 역시 적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아주 긴 복문을 즐겨 사용하는 학자이고, 때론 재치 있는 하나의 현학적 비유만으로 3~4개의 문단을 너끈히 쓰곤 한다. 때문에 다시 읽어보더라도 예전의 정리들에서 내가 느꼈던 바를 정확히 상기시키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키워드, 개념, 혹은 바우만의 긴 문장들이 버티고 있다 하라도 이 늙은 학자가 독자들에게 정확히 지적해주는 우리의 모습은 별 어려움 없이 발견할 수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을 덮고 잠을 청할 때마다 내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했던 속말은 “내가 이 정도로 유난스럽고 청승맞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무기력한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나?”하는 의구심이었다. 딱히 아니라고 잡아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내가 주체적인 삶을 산다고 계속 주장했다.


  이것은 새삼스럽지만 큰 갈등이었다. 이 갈등은 독서의 본질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독서란 독자가 저자는 생각하거나 행동한 것을 자신은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 즉 일종의 방향성(저자에게서 독자로)을 갖는 이동을 전제로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막연하게 저자의 견해에 동조하는 건, 그것 역시 독자가 할 노릇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독자는 저자에게 확신을 갖게 되며, 독서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왜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가?’ 나는 바우만의 위력이 경제위기와 소비지상주의를 설명할 때 가장 강력했다고 느꼈다.


  읽어본 사람들은 분명하게 공감할 것인데, 바우만이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언급하면서 강조한 것은 우리가 자꾸만 뭘 사려고 한다는 것이다. ‘쇼핑’, 아니 조금 더 점잖게 멋을 부리자면 바로 그 ‘소비’라는 행위가 뭐 그리 대수로운 것인가? 이런 질문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약간의 볼멘소리와 함께 즉각적으로 튀어나올 것이다. 그러나 바우만이 지적하는 것은 ‘소비’라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뭘 사고 그 물건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학자가 보기에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쉽게 사고 그냥 버린다. 과잉과 낭비는 형제지간인 것이다. 나는 바우만이 신용카드와 대출회사와 관련해서 “펌프에 마중물을 부어 작동시키듯이”라고 비아냥거렸던 비유에서 무릎을 쳤다.


  소비지상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지금도 인터넷에 접속하면 온갖 팝업창들이 자신들의 상품을 사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걸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저 회사들이 겉으로는 사달라고 애원하거나 합리적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당신은 우리의 물건을 살 수밖에 없다.”고 확신에 차서 웃고 있다는 것, 그리고 소비가 곧 애국심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재미있는 비유를 또 한 번 보여준다. 그는 쇼핑은 치료, 매장은 약국, 그리고 우리는 환자가 된다고 했다. 불안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든 사야 한다. 악순환은 반복될 것이다. 이것은 ‘불편의 불편’, 즉 메타-불편(metadiscomfort)의 원리 속에서 무한히 진행된다. 우리는 여기서 리프킨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세태는 유대관계도 약화시킨다. 쉽다는 것은 빨리 할 수 있다는 것과도 같기 때문에 당연히 현대사회의 속도는 빠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심지어는 기억과의 유대관계에서도 빠르게 이탈하는 중이다. 그저 앞을 보라고, 우리는 도무지 그게 어딜 보라는 건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결국 그렇게 하라는 소비지상주의의 달콤한 명령에 복종한 채 그냥 보라는 곳을 바라보는 중이다. 은연중 강요당한 곳을 바라보는데 어떻게 확실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확실한 삶을 살 수 있다. 그것이 그저 ‘언어의 논리성’이라는 실험관에 담겨진,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포름알데히드 속 개구리 시체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바우만은 ‘로나’라는 여인의 삶을 예로 들어준다.


  그녀는 픽션 속 인물이지만 가능성 있는 삶의 궤적을 보여줬다. 배우자마저 상품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접하던 그녀는 밑바닥 인생인 마약중독자의 남편을 구하기 위해 소비시장의 ‘상인’들이 봤을 때에 그냥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걸 기꺼이 택했다. 확실한 삶은 결국 대부분이 봤을 때에는 몹시 쓸모없는 삶이고, 결코 행복한 삶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겉보기로는 측정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를 담고 있다. 나는 ‘로나’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굴려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울컥 솟는 걸 느꼈다.


  바우만이 책의 마지막에 붙인 세 개의 편지에 남겨놓은 인간상의 가능성을 독자들은 아마 가장 인상 깊게 볼 것이다. ‘루시퍼 이펙트’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유명한 ‘평범한 악’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타인과의 유대관계를 맺고자 할 때 걸림돌이 될 만한 불확실성을 든든하게 지원해주고 있다. 그래서 바우만은 우리의 인간성이 지닌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43번째 편지에서 “우리는 예술가이다.”라고 주장한다. 타인의 모방을 거부하며 자율적이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우리 특유의 ‘성격’을 근거로 말이다. 나는 이를 두고 지나친 낙관이라 여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44번째 편지 때문이다.


  시지포스와 프로메테우스. 둘 모두 인간에게 의미 있는 신화 속 인물이다. 그리고 카뮈 역시 우리의 기억 속에 있다. ‘아름다움과 굴욕적인 것의 사이’, ‘태양과 고통 사이’에서 걷는 이 철학자는 우리에게 반항을 가르쳐준다.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리는 운명적 굴욕을 수용[시지포스]하면서도 저항하는 것[프로메테우스]. 이 쯤 되면 독자들은 바우만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44편의 편지에서 우리의 치부를 거침없이 드러내 때론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면서도 끝내 어떤 위로와 대안을 주려고 했는지 눈치 챘을 것이다.


  “반란과 혁명, 자유를 향한 노력들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에 필연적인 측면들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존경할 만한 추구들이 폭정으로 끝나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러한 추구들에 한계를 설정해서 항상 주시해야만 한다고.(389쪽)


  반항하라. 그러나 반항이 미쳐 날뛰게 내버려두지 마라. 이것이 바우만의 메시지이며,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해 그동안 그렇게도 고독하고, 그러나 사실은 고독을 잃어버린 채 고독감만을 느껴왔던 단 하나의 이유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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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8 17: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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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8 2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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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6

 

 

  어떤 책들은 - 대다수의 책들은 그렇지 못한데 - 한 문장도 빼놓지 않고 독자를 각성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즉 독자의 각성을 위해서 작가는 일종의 마법을 부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마법은 영화나 게임, 판타지소설 등에 나오는 ‘현존불가능’한 기술이 아니라, 현존하는 기술이다. 뛰어난 작가들에게는 늘 이것이 갖춰져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 마법은 항상 요구되어 왔다. 면밀한 관찰력, 남다른 상상력, 겸손한 통찰력, 왕성한 독서. 그 실체는 바로 이런 것들의 총체이다. 내가 이것을 ‘마법’이라 부른 까닭은 그것이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책들을 만나면 각 장(章)마다 내가 읽어온 ‘도시’들을 기억하기 위해 여러 장의 이면지를 써야만 한다. 충분히 각성된 상태인 까닭에 이면지 위에 적힌 메모들 중 다수는 소위 ‘번뜩이는’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전혀 나의 것 같지 않은 문장, 생각과 생각 사이의 기발한 고리 같은 것들이 된다. 독자인 입장에서 탁월한 책들을 반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놀라운 세계와 조우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한 가지 단점이 있다.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그만큼 멈춰 생각할 거리가 많다는 것이고, 이는 이면지에 적을 것들이 많다는 것과 같다. 결국 차분히 이런 책들을 다 읽고 나면 무엇을 썼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의 많은 메모 분량을 앞에 둔 채 깜짝 놀라게 된다. 나는 너무 많은 ‘도시’들을 거쳐 왔고, 결국 내가 이 ‘도시’들을 모두 통치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씁쓸한 패배감에 휩싸이게 된다.


  조금 노련한 독자라면 바로 이 시점에서 냉철함과 겸손함을 찾아 그 메모들을 알맞게 정리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얻은 이점이란 남보다 아주 조금 더 그것들에 대해 정리했다는 만족감뿐일 것이다. 애당초 그들이 이면지 위에 적어 내려간 지도는 남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즉 그들의 지도가 남의 것보다 더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순전히 그들이 노련하게 독서를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그들에게 독서 후 찾아올 패배감의 충격을 증가시키는 원인이 될 뿐이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지도는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동시에 호기심 역시 불러온다.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전자를 감지해서 지도 해독을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후자에 매료되어 지도를 결국 읽을 것인지에 대한 몫이다.

 

 

 

 

*    *    *

 

 


  독서 능력은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이 시점에서 독자들에게 필요한 능력은 바로 현명함이다. 이 추상적인 능력은 상당히 주관적이고 또한 유동적이기 때문에 뭐라고 단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요컨대 자신의 능력이 지닌 무게와 작품 수준이 지닌 무게가 서로 앉은 시소의 기울기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다. 쉽게 말해 자신이 작품을 전적으로 이해했는가에 대해 자신을 속이거나 지나치게 믿지 않는 날카로운 눈으로 진단하는 능력인 것이다.


  이 현명함이 제대로 작동하는 독자의 법정에서는 세 가지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다. 첫째는 정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그녀의 눈에 지도가 도저히 파악되지 않는 난해한 것이라면 무리해서 그것을 해독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어리석은 독자는 자신을 속이거나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해독을 시작하며, 결국 자신을 속인 그 속임수에 또 다시 속아 넘어가면서 해독에 대해 확고부동한 신뢰를 갖게 된다. 독서는 제각각이라지만 얼마든지 잘못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무서운 것은, 어리석은 독자의 잘못된 해독은 교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스스로 해독을 부인하여 새로운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힘든데, 사실 그보다 쉬운 ‘타인으로부터의 교정’도 결코 쉬운 수준이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난해한 지도를 해독하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둘째는 정리를 유보하는 것이다. 이것은 해독의 가능성을 미미하게나마 발견한 현명한 독자가 주로 택하는 방법이다. 어떤 책은 그 책의 독서만으로는 독자들이 도무지 뜻을 발견할 수 없는, 즉 ‘작품 외 세계’와의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 잠들어 있기도 하다. 모든 책들이 자신 이외의 것들과 상호관련을 맺고 있지만, 특별한 책의 경우에는 텍스트 자체의 해독이 불가피하게, 또 유별나게 텍스트 외의 지식과 지혜를 요구한다.


  우리는 이런 책들을 어렵게 여길 수밖에 없고, 결국 현명한 독자는 각고의 노력으로 그 책을 정독하고 난 뒤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된다. 다른 책을 더 읽거나, 세상을 더 많이 경험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정도의 현명함을 지닌 독자는 분명 다른 이보다 더 많은 책을 읽거나 외부 세계를 경험했을 것이지만 그/그녀는 겸손함으로부터 충분히 ‘패배를 인정’했기 때문에 오히려 작품 앞에 패배하지 않은 당당한 독자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그/그녀는 언젠가 다시 자신의 정리를 보게 될 것이고, 또한 충분히 현명하므로 작품을 다시 읽어볼 것이다. 그 때에는 해독의 가능성이 늘어날 것이고, 혹은 뛰어난 경우 그/그녀는 단번에 모든 해독을 끝마치게 될 것이다.


  셋째는 책을 읽은 시간 이상을 공들여 천천히 해독하는 것이다. 독서는 당연하게도 ‘문자 읽기’가 아니다. 하나의 문장이 여러 의미들과 연관되어 있고, 더군다나 독자 개인의 독서경험, 삶의 경험 등과 충돌하면서 의미가 파생되기 때문에 온전한 독서 기록은 해당 텍스트의 서너 배는 족히 될 만한 생각의 분량으로 넘쳐날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독서의 과정이다. 하지만 이런 ‘독후감’을 쓸 수 있는 독자는 거의 없으며, 어쩌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열정적인 독자들은 훗날 그들이 남긴 기록이 불필요할 정도로 긴 것이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훌륭한 텍스트는 여러 생각들이 여러 개의 기둥들로 압축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하나의 문장을 견고하게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독자인 입장에서는 그것을 풀어낼 수밖에 없으므로 많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즉, 독자는 작가가 압축한 생각을 풀어내는 독서 과정을 통해 작가의 창작 과정을 역으로 쫓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역시 온전할 수가 없다. 독자는 태생적으로 작가가 아니다. 이는 독자가 글 쓰는 사람인 경우에도 해당된다.


  따라서 자신의 정리를 공들여 해독한다는 것은 지도를 있는 그대로 모두 해독한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부분을 지워가면서 작가로부터 얻은 자신의 중심 생각들만 추려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한 가지 방해를 받는다. 바로 “지도에는 쓸모없는 부분이 없다.”는 일종의 진리이다.


  모험심 가득한 탐험가는 지도의 모든 부분이 중요하다고 여길 것이며, 심지어는 표기되어 있지 않은 공백에는 어떤 신비한 이야기와 사람들, 그리고 보물과 유적들이 있을까 호기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리의 과정에서는 독자는 이러한 상상을 다소 물려야 할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독서에 개입되는 여러 종류의 상상들 중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순도 높은 광물은 극히 드물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정이 없으면 독서는 쏟아내는 만큼 족족 귀금속이 되는, 그야말로 연금술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이지만 또한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다. 독서는 연금술이 아니라, 해변에서 좁쌀 정도 크기의 보물을 찾아내는 고독한 고통에 가깝기 때문이다.


  세 번째 방법을 사용하는 독자는 독서에 매우 능숙한 사람으로, 그/그녀는 이미 이러한 방법으로 여러 번 성공적인 독서를 해냈을 것이다. 수많은 기호와 도형들, 그러한 잡다한 메모들 사이에서 커다란 길을 찾고, 그 길이 당도하는 곳의 표기들을 하나씩 살펴본 뒤 자신이 길 위로 끌고 다니는 수레에 선별적으로 담아내는 복잡한 작업을 말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신중한 일이기 때문에 그/그녀는 해독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두 번째 독서를 하는 셈이다.


  이것은 일종의 보험과도 같은 효력이 있어서 선별적으로 담은 표기들을 마지막에 가서는 또 한 번 고르고 고르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 그/그녀의 최종 지도는 말 그대로 서랍장에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작게, 즉 ‘캐비넷 페인팅’처럼 작아진다. 이 지도에는 없는 것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지도를 보는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를 유랑하며 보물찾기에 나설 수 있다. 즉, 이 최종 지도는 작품을 쓴 작가의 것 못지않게 독자들을 매료시킬 수 있다.

 

 

 

 

*    *    *

 

 


  나는 적게나마 - 그러나 크게 불만족스럽지는 않은 양으로 -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또 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우리가 책을 덮었을 때부터는 어떤 과정이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해오고 있다. 특히 내가 고려한 책들은 앞서 말한 ‘마법’으로 지어진 책이며, 따라서 그 고민 자체는 복잡하게 표기된 나의 메모를 정리하는 작업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간편하게 읽고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는 책은 애당초 고민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책들이 ‘마법’으로 지어진 책들보다 하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지도를 그려낼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고 쉽고 짧은 책들은 어떤 경우에 한해서는 독자들에게 훨씬 큰 흥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확하고 쉽고 짧은 것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장점들과는 달리 이 사회와 문화에 피치 못하게 요구되는 관찰력과 깊은 사고 등 진중한 특성에 관해서는 단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은 바로 이러한 특성의 부재들을 신랄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비판하는 책이다. 언젠가 그 리뷰를 다루며 나름 정리해보겠지만 우리 사회는 간편하게 소비할 수 있는 생각을 원하며, 그 생각은 실용적이어야 하고 - 물론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 즉각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길게 돌아가는 ‘마법’으로 지어진 책은 어쩔 도리가 없이 덜 팔리게 되고, 이는 우리가 기꺼이 흡수할 여러 생각들 중에서 그것들이 제 목소리를 낼 확률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건 일종의 손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아날로그적이긴 하지만 손으로 직접 작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나란히 병기하면서 조금 더 깊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낯설기 때문에 때론 아찔하기까지 할 정도로 깊게 나의 눈을 텍스트 너머의 빈 공간까지 침투시키는 작업을 매일 이어가고 있다. 독서의 시간 외에는 그럴 기회가 거의 없다. 망상에 젖어 밤하늘을 바라보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나만의 세계를 키워가는 종류의 작업과 독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독서의 시간은 사실 무척 예외적인 시간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예외성이 나에게 선물하는 하나의 큰 위안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남들보다 빠르게 걸어가지 않는, 때론 멈춰 서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내가 나의 속도를 나의 통제력으로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는 강력한 성취감을 얻는다. 물론 이 성취감은 여러 어려운 수준의 책들을 접하면서 얼마든지 겸손함을 발휘해 없애고, 다시 얻어내고, 또 다시 없앨 수 있다. 성취감마저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승패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달성하기 어려운 상태로 독자들을 인도해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독서의 순환을 통해 알아가고 있는 또 다른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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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2-06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지내요, 탕기님? :)

탕기 2013-02-06 18:42   좋아요 0 | URL
네 권을 같이 읽고 있어요.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이탈로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지렁이처럼 꾸물꾸물 읽고, 이면지에 쓰고, 생각 지도 그리고, 그러길 반복하고 있습니다 :)
아, 이번 달 말이면 곧 개학이라 조금씩 공부모드(?) 준비도 해야겠군요!

2013-02-08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8 2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의 고집쟁이들
박종인 글.사진 / 나무생각 / 2008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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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6

 

 

  고뇌에 가득 찬 두껍고 무거운 책들을 곁에 두는 것은 그 자체로 피곤한 일이다. 읽다 보면 쉽게 지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단박에 읽는 일은 거의 없다. 곰처럼 우직하게 앉아 있을 성격이, 나는 못 된다. 그래서 편법을 쓴다. 이면지에 꼼꼼하게 적지 않고도 고개 끄덕이며 설렁설렁 읽어 넘어갈 수 있는 책들을 간식으로 곁들이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다시 읽는다고 해도 별 부담이 없기 때문에 굳이 독후감으로 기억할 필요가 없다. 기억나면 읽는 거고, 아니면 서재에 두는 거다.


  그럴 요양으로 나는 오늘도 별 생각 없이 한 권을 서재에서 꺼내 들었다. 그 책이 꽂혀 있던 칸에는 카를 융, 리오 휴버먼, 리처드 도킨스, 레이첼 카슨, 이름만 들어도 벌써부터 부담되는 유명 작가의 저작들이 유럽의 향기를 뿜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이 책은 철수나 순이, 아니면 영희 정도이다. 저자와 출판사는 들어본 적이 없고, 겉보기에 ‘이거다’ 싶은 것도 없다. 『한국의 고집쟁이들』, 이름도 참 평범하다.


  ‘잠시 넘겨봐야지’ 하던 것이, 그런데 두 시간이 지났다. 뚝딱 읽어버렸다. 사진도 많고, 줄 사이도 널찍하다. 어려운 말도 없다. 속독하는 사람이면 한 시간 안에 읽어버릴 양이다. 그런데 말이다, 읽어버린 시간과 이 책의 내용에는 별다른 상관관계랄까, 그런 것이 없다. 초장(初章)서부터 울기 시작한 나는 뜨끈뜨끈한 욕조물 속에서 글을 읽는 것처럼, 그렇게 읽었다. 몇 번을 훌쩍였는지 모른다. 거실에 있는 가족 모르게 궁상떠느라 휴지 몇 장을 뽑아 썼는데 지금 보니 눈물을 머금고 땅땅하게 공처럼 뭉쳐 있다. 그걸 이리저리 굴렸다. 눈물을 가느다랗게 뽑아 직조한 뭔가를 글로 남겨볼 테다.

 

  고집쟁이. 좋은 고집쟁이. 그들의 삶은 우리가 갑옷처럼 입고 있는 아집이 펄펄 끓어 녹아 흘러내릴 정도의 뜨거운 열정으로 주조되어 있다. 한바탕 눈물을 흘리고 나니, 나는 그들의 단단함이 부러웠다.


  소설책 한 권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불편한 이들, 지금은 세상에 없는 이들, 한우물만 파다가 돈을 벌지 못한 이들, 혹은 부자가 된 이들, 부자의 자식이었는데 하고픈 일에 돈 다 써버린 이, 아버지가 때려죽인다는데도 일을 배운 이, 유명한 사진작가, ‘엔터테이너’ 스님, 잊혀가는 것들 끝까지 잡고 있겠다고 이 빠른 세상 속 한 구석에서 살아가는 이, 있는 거 다 물려주고 산에 들어와 사는 이. 소설 같은 삶들이다.


  ‘이거다’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 때부터 조심했다. 감동이 불러오는 섣부른 예단, 아니면 일반화, 그리고 비근한 나만의 거짓말, 그런 것들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삶을 따라한다거나 그들의 말을 앵무새마냥 종알종알 별 의미 없이 되뇌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다.


  대신 나는 그냥 읽었다. 저자는 감칠맛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는 묵묵하게 써내려갔고, 나는 조용히 따라갔다. 그러자 만난 적이 없는 그들이 그리워졌고, 보고 싶어졌다. 남궁정부氏의 구두, 김민식氏의 시, 혜관 스님(아니 ‘사장님’)의 매직쇼, 윤씨 부자의 엿, 멍딩이마을 경씨 할아버지들의 볏짚 공예품. 더 쓸 것도 없이, 나는 그들이 맺은 열매들이 류시화 시인의 말처럼 그리워졌다.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능력에 대한 욕심,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경외, 나의 삶에 대한 비관 따위 등이 그리움의 까닭은 아니었다. 정체를 조금 생각해보니, 그건 그들이 하나같이 뭔가를 지키고 있다는 든든함이었다. 미친 사람들만이 하는 거, 고집. 좋은 고집.


  고집이 가치가 될 수 있을까? 글쎄다. 용기, 정의, 사랑, 배려, 책임감, 사명감 등 그동안 숱하게 회자되어 온, 그리고 강조되어 온 가치들은 알겠는데, 고집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고집이 보여주는 건, 신기하게도 내가 방금 말한 가치들의 총합에 가까운 것 같다. 그들에게는 용기가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정의로웠다. 사랑은 죽지 않고 버티도록 그들을 도와줬다. 없는 형편이었던 그들은 없는 사람을 별 망설임과 고민 없이 있는 그대로 배려해줬다. 우리가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책임감과 사명감도 있었다.


  어쩌면 고집이라는 것은 이러한 가치들을 하나로 뭉쳐주는 ‘미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좋은 고집과 좋은 가치 사이의 고리. 헤파이스토스의 망치도 부술 수 없을 저 단단함을, 나는 방금 눈물 콧물 닦으며 읽었던 것이다.


  없으면 남아 있는 것으로 희망을 찾고, 삶이 얼마 남지 않았어도 희망으로 삶을 찾고, 감당할 수 없는 가난에 죽자고 했던 각오를 자신이 하는 일에 죽자고 열정을 토하는 각오로 바꾸고, 그렇게 뭔가를 모으면 나눌 줄 아는 것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가치들이 우리가 처음 본 그들을, 그리고 그들을 만든 주변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나는 경험이 미천해서 삶이 뭔지 모른다. 현자들도 삶의 정체를 탐구하느라 고통스러워 하니, 사실 모든 것에 겸손해야 하는 것이리라. 떵떵거리며 사는 이들, 얄팍한 경험으로 제 할 말만 진리처럼 쏟아놓는 이들, 많은 이들이 하니까 그냥 따라서 하는 이들의 말과 삶은 깃털처럼 가볍다. 서재에 꽂아놓는다면 그들의 삶은 철수, 영희, 순이, 그 평범함 정도가 될 것이다. 꽂을 가치도 없다. 서재 공간도 별로 없는데.


  그러나 이 책의 삶들은 투박하고 정나미 나는 제목과는 달리 비할 바 없는 향기를 머금고 있다. 뭐가 중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뭘 봐야 하는지는 이제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이 책에서 느낀 바가, 그래서 나에게는 소중하다.


  저자 박종인氏가 쓴 서문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글귀가 짤막하게 실려 있었다. 나는 눈앞의 일렁이던 호수가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걸 애써 참아가며 다시 그걸 읽어봤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다네
  그러나 우리 중 몇 사람은 별들을 바라보고 있지

 

  내가 앞으로 힘들 때, 지금은 얼마만큼 힘들지 전혀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나중에 내가 힘이 들 때, 저들의 고집이 나의 눈을 별로 이끌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큰 위안이다. 이 위안을 12,000원 짜리 책에서 얻는 건 순전히 도둑질이다. 저자도 수 십 년은 거치며 터득한 저들의 삶을 단 며칠만의 만남으로 알아낸 것을 도둑질이라, 아니 ‘행복한 도둑질’이라 했다. 나의 행복은 그의 행복보다 더 짙은 색일까. 비교할 것 없다. 나는 그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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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5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6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