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위한 변론 - 우리가 잃어버린 종교의 참의미를 찾아서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준형 옮김, 오강남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2015.11.17




   이런 시대에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을 큰 다행으로 생각한다.

   언젠가 삶의 통찰이 필요할 때, 이 책이 내게 줄 도움이 얼마나 클 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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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1월 13일은 ‘9∙11’이라는 상징적 숫자와 더불어 인류사에 기억될 날이 되었다. 2004년 3월 11일 알카에다의 스페인 마드리드 열차 테러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최악의 인명 피해다. 전 세계에서 프랑스 파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우리 시각으로 18일에 있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축구 국가대표 친선전을 보러 (테러의 위협에도 프랑스는 친선경기를 강행하겠다고 했고, 잉글랜드의 감독 로이 호지슨은 그 뜻을 존중한다고 회답했다.) 경기장을 찾을 영국인들은 프랑스를 위해 함께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불러주는 캠페인을 SNS로 퍼뜨리고 있다. 세계 주요 랜드마크들은 밤이 되자 빛나는 프랑스 국기가 되었다.


    비극적인 피드백들이 연이어지고 있다. 정치에 연루된 종교의 일면만을 부각시키는 언론과 그에 휘말린 대중들은 종교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인터넷 상에서 ‘이슬람’, ‘무슬림’, ‘무함마드’, ‘알라’ 등의 용어를 무분별하게 섞어가며 통째로 이슬람을 비난했다. 나는 굳이 인용할 필요 없는 그와 관련된 수많은 댓글들을 그저께 반시간 동안 봤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난민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만연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시리아,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알바니아, 이라크 등은 오래 전부터 유럽의 부국으로 난민들을 유출시키는 무능한 정부였다. 시리아 난민 사이에 섞여 들어온 프랑스 파리의 테러범 때문에 난민들에 대한 이미지가 왜곡되기 시작했고, 가뜩이나 경제 침체로 위협을 받고 있는 유럽 각국의 국민들이 국경을 닫자는 보수주의나 자국민 우선주의, 심할 경우 극단적 민족주의에 쉽게 젖을 가능성이 있다.


    종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현대인들은 종교에 대해 이중 잣대를 얼마든지 들이밀 수 있다. 첫째는 특히 정치와 연관된 종교에게 날카로운 비난이 가해지는 경우일 것인데, 잔혹한 행위에 동원되는 종교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진리를 선사할 수 있겠냐는 시선이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를 왜곡시키는 주체에 대한 사고가 우선시되어야 하겠지만 근대 계몽주의의 전파와 과학의 발전 이후 우리에게 종교는 이미 이리저리 뒤집어볼 수 있는 사회분야의 일부로 전락한 상황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여전히 종교에서 진리를 찾아보려는 진지한 시선이다. 여기에서 ‘맹신’이라는 안타까운 현상은 제외한다. 신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근대적 종교는 현대인들의 정신으로는 수용하기 어렵게 됐다. 첫 번째 시선으로 공격받는 대상이 바로 근대적 종교이다.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둔 몇 년 사이 부쩍 ‘도킨스 류’의 서적에 빠져 지냈었다. 이른바 ‘도킨스 현상’에, 즉 브라이트 운동(Brights movement)에 강한 매력을 느꼈던 까닭이다. 샘 해리스와 히친스의 글을 연이어 읽게 된 것, 그리고 ‘Edge’의 필진들이 쓴 모음집을 읽은 것은 당연한 순차였다. 가톨릭 냉담자였던 나의 마음속에는 오래 전부터 무신(無神)과 무신(無信)이 뒤범벅되어 있었는데, 공격적인 과학적 자연주의자들, 이른바 ‘신무신론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강한 쾌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렇게 나는 신이 없는 공간으로 서서히 발을 디뎠고, 졸업을 전후해서는 의지할 곳 없는 자아가 사회의 문턱 앞에서 허둥거리고 있는 모습을 직시하게 됐다. 공교로운 상황이었다. 다행이도 졸업 전 들은 인상적인 종교 관련 강의가 무려 두 개나 됐던 까닭에 나는 30대의 목표를 종교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는 것으로 잡을 수 있었다. 종교와 종파를 초월하는 방대한 문자들의 향연에서 그 문자들이 말하지 않는, 혹은 말할 수 없는 길을 찾아내겠다는 막연한 욕망 때문이었다.


    내년부터 시작할 그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알아야 하는 건 당연 역사였다. 맥락을 모른 채 특정 텍스트에서 찾은 의미를 자기 나름대로 확장하겠다고 벼렸다가 낭패를 본 적이 대학 생활 중에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니니안 스마트의 <세계의 종교>, 폴 존슨의 <기독교의 역사>,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피터 왓슨의 <생각의 역사(1~2권)> 등을 서재에 꽂아뒀고, 출판사에서 제공해준 저서들의 도움도 받았다. 종교의 역사가 종교 그 자체가 아님은 자명한 사실이나, 시대를 거쳐 변화해온 텍스트와 그것에 대한 이해,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 대부분이 비난해 마지않는 정치상에서의 종교 행태를 샅샅이 살펴보는 1차적인 작업은 가공할 만한 마력을 지닌 종교의 앞에서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이었다. 겉만 긁는 막연한 비판서들이 아니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원제 : The Case For God)>은 그간 종교에 대한 비판, 그리고 나의 마음 반대편에서 잠자고 있었던 갈망을 동시에 건드려준 명저였다. 일개의 보통독자인 내가 별 권위도 없이 ‘명저’라는 단어를 주저 않고 쓴 까닭을, 이 책을 읽은 사려 깊은 독자라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이해해줄 것이다. 한 달 조금 넘는 시간을 이면지에 써내려가며 정독했고, 리뷰를 제외한 모든 작업이 끝난 지금의 나는 이상하리만치 편안한 마음이다. 지적으로 갖춰졌다는 환상에서 비롯된 만족감이 아니다. ‘마음속에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편해진다.’ 그걸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신을 위한 변론>은 ‘모름’에서 시작해 ‘모름’으로 회귀하게 된 인류 종교의 역사를 파헤친 기나긴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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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시절의 나는 한 종교 관련 강의를 들으며 종교분쟁과 폭력에 관심을 키워갔다. 전공인 국문의 이론에서 벗어나 현실적 문제와 맞닥뜨리는 생동감도 있었고, 역사를 알아가는 재미, 그리고 비극에 참여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 속 동질감도 가졌던 게 사실이다. (내가 당시 배운 요한 갈퉁의 적극적 평화론이 실제 세상에 참여하여 종교적 평화를 이뤄낼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한 까닭도 있겠다.) 그렇게 체첸 분쟁을 나름 심도 있게 정리해 ‘크렘린과 백학’이라는 제목으로 리포트를 냈고, 교수는 흡족해했다. 강의 말미에 나는 교수에게 종교 관련 서적 한 권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부탁의 함의는 주로 분쟁관련 비판서를 바란 것이었는데, 교수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번역된 <우파니샤드>를 읽어봐요.”


    나는 착한 학생이었다. 더군다나 폭넓은 스펙트럼의 종교적 사고를 지닌 그녀를 짧은 기간 안에 매우 존경하게 된 터였다. 교수는 개신교도이자 독일 유학파 출신의 종교비교학자였다. 그런 그녀가 내게 권한 것이 인도의 경전. 당시는 긴 휴학과 여러 부침 덕분에 늦은 대학의 나이가 돼서야 ‘대학’이라는 걸 조금은 알 것도 같은 때였다. 쉽게 말하자면 취업 준비하는 동기와 후배들 사이에서 정전(正傳) 한 권을 고집스럽고도 조용히 읽어갈 수 있는 기분이었다. 커버를 벗기니 새빨간 살을 드러낸 <우파니샤드>는 이재숙의 번역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첫 장을 펼쳤다. ‘오움―’ 이게 무슨 소리지? 표현할 수 없는 소리라고 하는데, 뭔가 회당에 모인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낮고 장중한 목소리 같기도 하고, 종교 수련의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당시의 마음으로 가장 먼저 일어난 감정은 거부감이었다. 하지만 조언을 허투루 듣는 것도 거부할 일이다. 이해 안 될 문자 사이를 부지런히 눈으로 왕복하자 이런 구절이 나왔다. 이윽고 나타났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이건 내게 다가온, 혹은 내 안에서 일어난 어떤 중대한 사건이었다.


    “아뜨만은 움직이기도 움직이지 않기도 하며 멀리 있기도 아주 가까이 있기도 하며 이 세상 안에 그리고 이 세상 밖에도 존재하도다.” (이재숙 譯, <우파니샤드>, 60쪽)


    아래 적어놓은 날짜는 2013년 2월 12일이었다. 추운 겨울의 잔인함을 두 겹의 창틀로 막아놓은 아늑하고 온기 가득한 방 안에서 나는 쪼그려 앉아 혼자 새벽의 한기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때 내가 바라본 건 창백한 검은 밤하늘에 떠있는 밝은 점들이었다. 아뜨만이 저기에도 있나? 이 우스꽝스러운 질문 뒤에 엄습한 두근거림이 있었다. 어디에나 있는 것. 초월. 무식한 나는 갑자기 신비의 뜻을 알 것만 같았다.


    “아뜨만을 아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곧 아뜨만이다. 모두가 같은 아뜨만임을 잘 알고 있는 그에게 욕심이나 슬픔이 어찌 생겨나겠는가.” (위의 책, 61쪽)


    나는 한동안 저 구절에 사로잡혀 지냈었다. 문자주의를 배격하자는 입장을 늘 고수하고 있어도 좀처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지금 다시 <우파니샤드>를 펼쳐보니 그 구절 언저리에 내가 밑줄을 쳐놓은 단어들이 세 개 있다. 증오, 욕심, 슬픔. 달리 말하자면 내가 그것들에게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초월을 안다면 그런 것들을 정말 모를 수 있을까? 물론 그런 기분을 평생 거느리고 산다고 해도 몹시 불행할 것 같진 않고, 그게 오히려 자연스런 인간이라는 생각도 있다. 그러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 왠지 부당한 것 같은 그 고통에 저항하고 싶어 하는 건, 내가 인간이라는 뜻이리라. 비극. 고전에서 말하는 “삶은 비극이다.”라는 뜻은 지극한 사실이었다.


    카렌 암스트롱도 동의한다. 그녀는 종교의 시작이 삶의 부당함과 고통에 맞서 의미를 구축하는 것이라 말한다. 근대 이전의 종교들은 그 의미를 구축하는 데 있어 초월, 모름, 경외 등을 늘 강조했다.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편견이다. 지금까지 등장하여 우리에게 큰 반향을 준 종교적 현자들, 즉 카렌 암스트롱이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부른 시대에 출현한 현자들은 하나같이 ‘모름’에 주목했다. (저 용어는 본래 야스퍼스의 것인데, 국내에는 <축의 시대>라 번역∙소개된 책인 카렌의 2006년 작 <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쓰였다.) 그들은 “그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아포파시스적 대답은 곧 침묵의 대답이다. 태초의 종교라는 것은 이렇듯 ‘말하지 않는 법’을 직감하고 있었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원제 : Die Welt Des Schweigens)>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최승자 시인의 번역이다.


    “물론 인간은 정신을 통해서 말을 원초적인 것, 강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침묵으로부터 나오는 말은 애초에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에 말에게 원초성을 부여하려고 말이 스스로 많은 힘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침묵이 이미 말에게 원초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렇게 침묵은 정신을 돕는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265쪽)


    고대인들은 피카르트가 말한 ‘원초성’이라는 것을 개념이 아닌 감각을 통해 선연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신비와 의심 속에 머무르는 능력은 원초성에 대한 확신으로 유지되기 마련이다. 종교의 진리를 탐구하려는 현대인들이 푸념 삼아 털어놓을 수 있는 억울함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이 원초성과의 거리일 것이다. 현대사회의 일상을 보라. 영성수련을 통해 체득되는 깨달음의 경지, 그 원초성에 대한 자각을 우리가 일상에서 이뤄나가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봐야 한다. 태초의 종교가 어떠했는지를.


    카렌은 이러했던 침묵의 종교가 말의 종교로 바뀐 이래 종교가 크게 두 갈래의 길을 걷게 되는 것으로 역사를 묘사한다. 하나는 여전한 수행이고, 다른 하나는 이론의 발달이다. 나는 대학의 교양으로 처음 접한 플라톤을 뭔가 딱딱한 회색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왠지 주황빛이고, 소크라테스는 아주 새빨갛다.) 이는 잘못된 기억이었다. 퓌타고라스마저 열렬한 영적 탐구를 숭배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성이 발달했으나 훈련과 절제된 삶 속에서 거듭되는 통찰로 영성을 수련하려는 이들이 많았다. 소크라테스의 부동(不動)은 흡사 근래 들어 인기를 누리고 있는 템플스테이의 좌선(坐禪)과 닮았다. 플라톤에게 철학은 죽음의 견습과정이었다. 정치∙사회적 격변기 속에서 주요 철학 학파들은 내면의 평화에 중점을 뒀다. 종교와 배치되지 않는 고대 그리스의 합리주의는 지금 보면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합리성을 무기로 한 계몽주의가 종교를 부수려고 했던 것이 바로 근대이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분명 어떤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이 현대인들이 종교에서 갈구하게 되는 진리의 열쇠인지도 몰랐겠지만.


    기독교가 유대교나 이슬람과는 달리 교리를 복잡다단하게 발전시킨 것은 특이한 일이다. (반면 후자의 두 유일신교는 정행(正行)을 강조해왔다.) 물론 초기 기독교는 달랐다. 복음서는 우리처럼 신의 뜻을 해석하라고 쓴 것이 아니라 영성을 수련하라고 적어놓은 도덕적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예수 사후 이상하게 일이 돌아갔다.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 즉 이성의 정점으로 파악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들이 2세기 즈음에 생겨났다.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기독교가 번역, 그리고 육화한 ‘로고스’인 예수의 지위 문제를 두고 골머리를 앓을 무렵에 그 종교는 완전히 ‘말의 종교’가 됐다. 지금 보면 시시콜콜한, 하지만 당시 보면 대단히 시급한 문제들이 도마에 올랐다. 학자들은 신 중심으로 생각했다. 정의하려고 했으며, 이로써 종교를 강화하려고 했다. 우리는 그 다른 편에 있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카렌의 의도이기도 하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려는 영성 노력이 필요하다는 움직임 말이다. 위(僞)디오뉘시우스의 아포파시스적 방법이 강조된다. “~도 아니다.”는 흡사 “~이기도 하고, ~이기도 하다.”는 우파니샤드를 연상시킨다.


    고대 그리스와 비잔틴, 그리고 이슬람의 지적 유산들이 유럽에 유입되기 시작하자 유럽의 신학자들도 반응했다. 전통적 가르침을 합리의 힘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장 적극적으로 빨아들인 뇌는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것이었다. 신의 존재를 열심히 증명해보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웃음거리가 된 그도 실은 ‘모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지성의 끝에서 우리는 모른다고 손을 들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렴풋이 느끼는 비경험적인 실재들을 인정하고 기뻐하는 능력”(241쪽)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앙이었다. 여기에 반대한 이들을 이른바 ‘자연과학’의 노선에 있다고 묘사해도 될 것이다. 유럽은 그보다 과거를 기준으로 보자면 이미 상당 수준 뒤틀려 있었다. 요한네스 스코투스는 아퀴나스가 틀렸다면서 신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양날의 검’으로 유명한 오컴은 신이 온갖 재주를 부리는 가상적 사고를 유행시켰다. 신학과 영성 사이에 큰 틈이 벌어져서 수백 년 동안 도무지 다물어질 생각을 않았다. 모름을 아는 것, 자기를 비우는 것(케노시스)은 저물어가는 태양. 영성의 길은 노을 속에 있었다.


    근대는 희망의 날개 대신 비타협의 발톱을 드러낸 맹수였다. 근대적 중앙집권국가들은 하나 같이 종교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했고, 세속기관들의 영향력이 종교기관을 압도하기 시작했으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과학혁명이 잇달아 일어났다. 프로테스탄트는 언어에 갇혔다. 가톨릭은 교리문답서와 종교재판으로 대응했다. 당시 과학과 종교의 충돌은 세간에 과장되게 알려진 것보다는 덜 심했다. 새로 등장한 과학의 발견을 이해한 사람이 무척이나 적었던 탓이다. 하지만 금서와 정죄 등 종교계의 반응이 광적이어서 조르다노 브루노의 화형식은 그 과장을 가능케 한 대표적인 상징으로 남기도 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성서 해석이라는 위험한 지뢰밭에 발을 들여놓고”(298쪽)는 파장의 너울에서 끝없이 출렁거렸다. 이후 과학은 신의 절대성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이들, 예컨대 데카르트와 뉴턴과 같은 거인들을 거치면서 점점 몸집을 키워갔다. 내적으로도 단단해진 것처럼 보였다. 정치 격변기였음을 고려해보면 이해할 만한 일이다. 데카르트는 시계처럼 규칙적인 우주를 꿈꿨고, 뉴턴은 데카르트, 케플러, 그리고 갈릴레오를 합치더니 종교에서 신비와 미신을 배척하고 과학이야말로 신을 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렌이 보기에 당대의 “신은 더 이상 초월적이지 않았고, 언어와 관념의 한계를 넘어서지도 않았다.”(328쪽)


    이렇게 계몽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이성이 신의 위에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성으로 신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 물론 약간의 전통적 뮈토스가 섞여 있긴 했지만 자연과 신비를 분리하는 작업은 언제나 공통분모였다. 폐단은 있었다. 스스로 사고하라면서도 오직 그 방법을 과학에만 두라는 계몽주의는 과학이 아닌 다른 것을 배척하는 근대의 편협함을, 그 한계를 드러내고야 말았다. 잠바티스타 비코와 장-자크 루소 정도가 공감을 통해 신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수련 없는 종교는 히스테리로 전락하기 쉬웠고, 그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이럴 때마다 반응한 것은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철학자였다. 과학이 펼쳐놓은 이성의 그물이라면 모든 것을 다 잡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실상은 반대였고, 사람들은 마치 가슴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자기 안의 무언가가 유실되는 기분을 느꼈다. 분위기에 민감한 저 세 부류의 사람들이 그걸 제일 심하게 느낀 모양이다. 윌리엄 페일리가 그 유명한 시계공 이론을 내놓았을 때 가장 먼저 격렬히 반응한 이는 데이비드 흄이었다. 과학적인 것 같아도 너무 섣불리 결론으로 나아간 페일리의 논리가 지닌 허점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는 페일리에게 세 가지의 근거를 들며 반론했다.) 낭만주의자들이 이윽고 등장하면서 자연을 경외하는 시인들의 명작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영문학도라면 피해갈 수 없는 퍼시 셸리, 윌리엄 워즈워스, 존 키츠가 다 그때 사람들이다. 헤겔도 처음에는 여기에 동참하는 뉘앙스였다. 신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끌어오면서 ‘존재(geist)’라는 용어를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소외감을 주는 종교로 유대교를 특정하게 꼬집어 비판하면서 근대 종교 비평의 틀을 제공하고 말았다.


    종교가 멀리 떠나가면서 사람들은 종교를 어려운 것으로 보게 됐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잘 보일 리도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복음주의다. 미국인들은 프랑스혁명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더욱 경건해져야지. 제약이 없는 합리성이 어떤 공포정치를 가져왔던가 말이다.’ 이런 생각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쉬운 종교가 필요했다. 복음주의는 전례 없는 문자주의로 성서를 해석했다. 종교의 핵심을 도덕성의 실천으로 봤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지만 이는 우상화될 위험이 있는 신을 섬기는 결론으로 나아갔다. 19세기의 미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다. 자연신학마저 주류로 들어왔다. 뉴턴과 페일리가 특이하게도 성서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유럽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오히려 프랑스혁명은 반가운 신호탄이었고, 사고를 바꾸는 반체제적 지식인들이 등장하면서 무신론이 퍼졌다. 성서를 뜯어보고, 신의 의미를 축소했다. 포이어바흐는 신을 인간의 억압적 생각이라 했고,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했다. 과학적 성과들이 연이어 전통신학을 위협했다. 지구는 6천 년 보다 훨씬 오래된 노인이었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출판 당시 너무 이상한 생각이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자연선택’의 함의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고등비평’이라는 것이 등장해 성서의 기적은 비유일 뿐이라 주장했다. 당대 최대의 핫이슈였다. 복음주의자들은 거품을 물었지만 미국에도 계속 수입되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진영 싸움이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신의 존재 여부를 왈가왈부하고 싶을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손님은 단연 다윈이다. 실제로 1870년대부터 종교와 과학은 마치 나란히 놓여 만날 수 없는 두 선의 철로 같은 사이로 지냈다. 노골적으로 반가톨릭적 편향도 나왔고, 브루노와 갈릴레오, 루터 등이 불운한 희생자로 재평가를 받았다. 존 스튜어트 밀은 신앙을 망상이라 불렀다. 종교와 과학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였다. 종교계는 다윈이 몰고 올 파장을 잘 몰라 과학을 여전히 수용하며 공부했지만 반종교주의자들은 다윈의 그 ‘파장’이란 것이 무엇이 되는지 자신이 직접 보여주려고 혈안이 된 듯 종교를 비판하며 다윈을 인용했다. 물론 그건 다 바보 같은 짓이었고 언론의 과장된 보도를 통해 탈종교화의 흐름만 가속화됐다. 하지만 정작 동료 과학자들조차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Gott ist tot.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우리가 신을 죽였다고 했다. 대신 우버멘쉬(초인)가 되어 허무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가 말한 신은 정확한 대상이다. 기독교의 신이었다. 이후 무신론은 거의 자명해져서 굳이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다윈은 자연의 무시무시함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프로이트는 종교를 정신이상에 가까운 신경증으로 결론지으면서 마음과 무의식의 무시무시함을 폭로했다. 사람들 중에는 진화론에서처럼 국가도 적자생존의 법칙으로 살아남을 것이라며 양차대전의 결말을 지켜보려는 이들도 있었고, 황폐화된 인간 정신에 비관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세상은 이제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너무 많은 것을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근대 최초의 근본주의가 미국에서 일어나면서 그간 누적되어 있던 공포가 전통을 왜곡하며 종교적으로 표출되었다. 근본주의는 언론의 공격을 받았고 더욱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들은 다시 부흥할 1970년대까지 웅크린 채 와신상담하면서 성서 문자주의와 창조과학을 꾸려갔다.


    합리성에 대한 기대를 철저하게 무너뜨린 건 홀로코스트였다. 기술에 의한 인종 학살, 과학적 인종주의, 과학이 연루된 우생학 실험, 게르만족만 특별히 이상화된 근대적 우상 숭배. 그것은 분명 ‘악’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의 일부, 아니 그보다는 좀 더 큰 일부에 가까웠다. 카렌은 이렇게 평가한다. “홀로코스트의 진짜 이유는 서구 문화에서 종교적 감정이 사라진 후의 모호한 상태, 그리고 사람들의 기운을 보다 선하고 생산적인 쪽으로 배출시키던 종교의 쇠퇴와 함께 고삐가 풀린 악한 기운”(423쪽)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리하여 지금의 신학에게는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 족쇄처럼 채워졌다. 어둠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무지의 구름으로 들어가는 것.


    나는 4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여정에서 종교가 저물어가는 것이 아니라 태초의 인간이 지니고 있던 경외의 비밀이, 그 보석을 넣은 상자가 마침내 문을 닫아 막 자물쇠에 열쇠를 꽂는 모습을 목격했다. 분명 인간은 고통에 저항하기 위해 마음 깊이 침잠하여 의미를 구축했을 것이다. 마음으로 들어가면 나를 초월한다는 건 참으로 신비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속된 말로 “머리가 자라면서” 점차 ‘물속의 소금’이었던 아트만을 확인하기 위해 물을 다 증발시키려고 종교를 마구잡이로 가열시켰다. 그 결과 예수의 뜻도, 부처의 뜻도, 공자의 뜻도 생각의 문제로 바뀌었다. 정작 행동하고 침묵하는 것이 참뜻인데 말이다. (침묵도 거대한 행동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다행스러운 까닭은 이 합리성의 시대에도 여전히 비움(케노시스)과 침묵에 주목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희망 때문이다. 신학계에서도 과학계에서도 불확실성으로 점차 변화하는 패러다임에 반응했고, 신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철학과 과학은 아포파시스적 접근으로 돌아갔는데, 안타깝게도 수련이 일상에서 멀게만 느껴질 법한 나와 같은 일반인들에게 그러한 사유와 행동은 어려울 뿐이었다. 이 부분에서 카렌은 신학자들에게 쉽게 쓴 명저들을 촉구한다.


    그런 것이 어렵고, 한편으로는 정치와 종교의 결합(일방적인 왜곡)으로 일어난 세태에 염증을 느끼는 까닭에 종교의 퇴조는 진리를 추구하려는 진지한 의도 이면에서 이 사회를 흐르는 강줄기를 이루기 마련이다. 그건 분명 피할 수 없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때일수록 종교가 과연 그런 세태를 주도했는지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카렌도 근본주의를 종교가 아닌 역사적 맥락에서 봐야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수년 전, 내가 한 달 남짓한 시간동안 체첸 관련 종교분쟁을 상세히 들여다보려고 노력한 결과로 알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의 중요성이었다. 정치는 공방(攻防)의 연속이다. 카드를 쥔 자들의 싸움이다. 여기에 진리를 기대할 수 없다. 종교는 다만 그자들의 카드를 강화시켜줄 재료로 왜곡되거나 남용된 것일 뿐이다. 숱하게 예로 드는 성서와 꾸란을 보자. 카렌은 “성서는 서로 모순되는 많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언제나 선택적으로 읽힌다.”(98쪽)고 했다. IS는 이번 파리 테러의 명목으로 꾸란을 들었지만 정작 이슬람권 사람들은 이에 분노하면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전 세계를 죽이는 것이다.”라는 꾸란의 한 대목을 강조했다. 종교는 굉장히 많은 걸 다뤄왔으므로 당연히 파편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종교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한 부분만 강조하며 공격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이 된다.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아마 정보에 민감한 사람들이라면 다 들어봤을 이름들이다. 이들 신무신론자들을 나도 한때는 거의 추앙할 정도였다. 하지만 카렌의 지적을 통해 그들의 한계는 분명해진다. “창조론자들이나 지적 설계론자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도킨스의 심정은 이해할 만 하지만 근본주의적 믿음이 기독교 혹은 종교 전체를 대변한다고 보는 그의 관점은 옳지 않다.”(463쪽) 종교에 대해서 공격적인 태도만을 보이기 때문에 이는 한쪽만 보는 눈이다. 그럼에도 도킨스 현상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왜일까? 나는 무엇 때문에 그의 신랄한 비판을 읽으며 쾌감을 느꼈던 것일까? 트렌드를 따르는 지적 호기심 탓일 수도, 근대적 신을 강조하는 일부 안일한 종교관계자들 때문일 수도, 아니면 진리에 대한 관심 이면에 있는 불신의 반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배경을 모르는 채 비판 일로에서 지적 유희를 즐긴 나의 지난날을 후회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아마 “이성이 모든 경쟁자를 파괴하려는 우상을 범할 위험성”(470쪽)을 다행스럽게도 직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잠시의 멈춤. 그런 것 말이다.


    도킨스와 달리 우리에게 과거의 통찰을, 흡사 아포파시스를 상기시키는 현상도 있다. 아니, 이건 거의 전 세계적 현상이었다. 불확실성만을 남겨놓은 포스트모더니즘은 grands récits, 즉 거대서사를 의심하도록 했다. 근대의 전지전능한 신은 거침없는 상대주의의 공격으로 허물어졌다. 이제 신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절대성이야말로 공격적인 생각, 남을 지배하려는 생각이었다. 확실성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면서 우리는 과거의 통찰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었다. 카렌이 의도적으로 이 책의 말미를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잔니 바티모, 존 카푸토 등으로 채워 넣은 것은 연대기를 따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뜻에서였다. 정확한 의미의 수미상관은 아니겠지만, ‘모름’에서 ‘모름’으로 회귀하게 된 인류의 사상적 역사에서 일말의 희망이 보이는 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희망이 없었다면, 카렌은 이런 말을 맺음말에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이 점점 불확정적인 것으로 변하고 있는 지금 신학도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좀 더 침묵과 모름을 받아들이는 신학으로 되돌아갈 때가 되었는지 모른다.”(492~4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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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 희망과 회복력을 되찾기 위한 어느 불안증 환자의 지적 여정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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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4



    모교에서 수험생들을 격려하겠다며 재치 있는 응원 현수막을 걸었나보다. 관련 인터넷 기사를 보며 살짝 웃다보니 당연 재작년까지 늦깎이로 대학을 다니던 내 모습이 그려졌다. 낯가림이 있고 소심하지만 일단 일을 맡으면 완벽하게 해내려고 하는 터라, 대부분의 모임에서 마지막 일은 내가 하게 됐다. 발표 말이다. 성격이 또 거절은 못한다. 그렇게 학기 당 대여섯 번의 발표를 맡으면 소위 ‘장트러블’에 시달리면서 새벽 늦게까지 잠을 못 잔다. 발표 당일로부터 며칠 전부터 시작되는 긴장. 결국 잠을 줄여가며 수차례 반복 연습하고 실수를 예방하려 한다. 하지만 발표 때마다 겪는 목소리 떨림, 좁아지는 시야, 등 뒤로 흥건해지는 식은땀은 어쩔 수가 없다. 소심증과 완벽주의의 결합이 나를 배신한다.


    그렇다고 약을 먹어야 할 정도의 만성 불안증에 시달리는 건 아니다. 스콧 스토셀의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원제 : My Age of Anxiety)>에 실린 저자 자신의, 혹은 유명 인사들의 실화와 비교하자면, 사실 비교할 만한 수준도 되지 않는다. 역자인 홍한별은 학교에서 토론을 할 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옆 짝꿍의 “너 볼 살 떨려!”라는 말에 자리에 주저앉은 적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도 스콧의 오래된 불안증에 비할 바 되지 못한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불안증을 갖고 있다고는 하나, 저자의 스펙터클하고 드라마틱한 경험담과 비슷한 추억에 시달리진 않을 것이다. 그만큼 스콧 스토셀은 불안에 대해 말하기 적합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렇다고 그가 마치 인문학자들이 현대와 불안을 진단하기 위해 내놓는 것처럼 자신만의 이론을, 소위 말하는 ‘썰[設]’을 펴는 건 아니다. (스콧은 잡지사의 에디터다.) 말 그대로 불안을 둘러싼 거의 모든 걸 털어놓는다.




*    *    *




    내가 누군가에게 “나 요즘 너무 불안해요.”라고 불평한다고 하자. 물론 이렇게 되묻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상대방이 내게 “대체 불안이 뭡니까?”라고 질문하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위대한 철학자도 아니고, 저명한 병리학자도 아닌 나에게는 그들의 문구를 대화에 응용할 만한 독서량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말문이 막힐 것이다. 왜냐하면 뭔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기에 불안은 피상적인 것도 같고, 한편으로는 분명하게 나 자신이 체감하는 실제적인 증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그것이 이리저리 전염된다는 것도 잘 안다. “너 다리 좀 떨지 마. 내가 다 불안해.”라고 말하거나, 앞선 면접 대기자가 한숨을 쉬면 내 마음이 건물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내려갈 것 같은 기세로 무너지거나. 그럴 때마다 확실하게 하고 싶긴 하다. 대체 불안이 뭘까?


    안타깝다. 히포크라테스 이후 그건 생물학적 문제로 취급되었지만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철학자들은 철학과 정신의 문제로 불안을 다루면서 수많은 명작들을 남겼다. 너무 다양하게 쓰이는 단어라 별로 유용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정신심리학자도 있다. 이렇듯 불안에 대한 공통된 합의는 없다. 불안, 두려움, 우울 등등이 우리가 심리를 설명하기 위해 내놓는 단어들. 거의 의미 상 무경계다. 저자 스콧은 심지어 불안이 진짜 병, 혹은 정신질환인지에도 의문을 갖는다. 정상인지 비정상(병)인지의 구분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도 말이다. 최근에는 두 세계의 경계가 없다는 인문학적 사고가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으니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의 불안, 혹은 주변에서 체감되는 불안이 진짜 병으로 진단되어야 하는 것인지 응당 의심을 품게 될 것이다.


    불안증을 치료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약물 복용이다. 물론 약을 먹으면서 건강한 생활습관을 유지하도록 의사들은 운동을 꾸준하게 병행하거나 명상, 독서, 취미생활 등을 할 것을 환자에게 권한다. 하지만 불안을 약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생각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해도 약 이외의 치료법은 없는 것처럼 그 효능이 부풀려 소개됐었다.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이 오래된 서양에서는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실존을 주목하느냐 분자로 환원하느냐의 기로에서 서양 의학은 엄청난 갈등을 겪었다. (이 갈등은 스콧의 책에 매우 강한 어조로 반복 소개되어 있는데, 주로 제약업체와 주요 학파의 기득권 싸움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스콧처럼 질문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 “불안을 순수하게 생물학적이거나 기계적인 과정으로 환원할 수 있을까?”(73쪽)


    다시 말하자면, 굳이 강조하지만 불안은 육체와 정신 모두를 괴롭힌다. 두 체계가 이어져 있음이 불안증을 통해 부정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신체가 우선 작동하고 정신이 불안해진다고 생각하는 제임스-랑게 이론도, 불안은 실존의 문제일 뿐이라는 철학적 고찰도 각각의 목소리만으로는 불안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일례로 스콧은 자신이 오랜 세월동안 구토증후군에 시달렸다고 소개하면서 이른바 ‘뇌-장축(brain-gut axis)’은 실재한다고 말한다. 위가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간디, 토머스 제퍼슨, 키케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휴 그랜트, 옐리네크, 찰스 다윈, 프로이트 등이 모두 불안증 때문에 육체적 고통을 호소했던 이들이다. (나만 발표 불안증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고도의 예민함을 통해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다. 여기에는 정신이 작용한다. 자기비판, 완벽주의, 불안, 우울, 나태 혐오 등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면 생산적인 삶을 살게 되고, 특히 불안 기질이 도덕성과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보고도 있어 이런 기질이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생각될 것은 아니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자주 불안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최근 연예인 정형돈의 프로그램 하차로 더욱 그러한 분위기인데) 그것이 우리의 환경, 즉 ‘현대사회’라는 특수한 환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파트 단지 내의 분란만 봐도 알 수 있지만 공동체가 해체된 지는 이미 오래 됐고,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가 위협 받을 수 있다는, 한편으로는 자신이 선택의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진 채 살아간다. 의지할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지지대는 사실상 실존뿐이겠지만 실존의 고찰과 일상은 의외로 거리가 꽤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위로하는 책들이 불티나게 팔린다.) 소비에 의지하거나, 맹신에 의지하거나, 외모에 집착하거나 등등. 실존을 탐구하려는 자세가 변형된 사례들은 무수히 많다. 불안은, 만약 그것이 전염된 것이 확실하다면 막연함의 경로를 타고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빌려 쓴 하몬 레온의 개념 포보포비아, 즉 '공포에 대한 공포증'이 적합한 설명이 될 것이다.


    “결국 우리를 오랫동안 괴롭혀온 것은 실상 템포가 빠르고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서 도저히 예측할 수 없기에 여러 유혹들과 위험들이 들끓고 있는 이 유동하는 근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인 바로 우리 자신들이 느끼는 그 두려움 자체에 대한 공포인 셈이다.”(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250~251쪽)


    그렇다고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사회불안이 고통 받는 당사자의 불안을 유발하는 유일한 원인일까? 정말 지그문트 바우만의 그 ‘유동하는 근대’가 우리의 자율신경계 반응을 급증시켜 고통스런 정서 상태를 일으키는 절대적인 동인이 될 수 있을까? 스콧은 사회불안증과 신경전달물질 사이에 분명한 연관성은 있으나 뭐가 원인인지는 불분명하다고 못 박는다. 게다가 중세에는 불안할 여유가 없었는데 미국의 경우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선택의 자유가 늘어날수록 불안도 커지는”(392쪽), 즉 에리히 프롬이 말한 ‘자유로부터의 도피’ 심리가 불안을 유발한다는 식의 시대별 객관화는 무의미하다고까지 말한다. “불안의 형태는 바뀌었으나 불안의 경험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402쪽) 이 책을 살펴본 이들은 알겠지만 스콧은 오랜 고통을 겪은 ‘살아 있는 증거’로서 어느 한 쪽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거나 하진 않는다. 그는 좀처럼 무엇이 원인인지 확언하려고 들지도 않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의 특징을 바로 저자 자신이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의 3부에는 무수히 많은 약 이름들과 흥미로운 사례들이 실려 있다. 스콧은 인지치료와 약 복용을 반복하는 과정을 수차례 겪었다. 일단 약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시각은 이 책의 말미까지 계속된다. 정신약리학에 있어 그 시작은 분명 ‘잘 모르고 하는 의학’이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코카인을 사랑했다. 1899년에는 아편이 불안증의 표준 치료제였다. 1914년 전까지는 헤로인이 버젓이 판매됐다. 또한 스콧은 195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정신과 약의 판매량은 제약회사의 상술일 가능성이 있다는 입장에 주목한다. 스콧이 중점적으로 살펴본 그 시점, 즉 1950년대는 신경전달물질과 관련된 정신건강이론이 탄생한 때인데, 불안과 우울을 바라보는 시점이 과학적으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약리학적으로 완전히 선회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시대였다. 1954년 소라진, 1955년 밀타운, 1959년 이미프라민. 모두 제조기업에 큰 이윤을 안긴 약들이다. 20세기 후반의 상징적 항우울제인 프로작은 천문학적인 성공을 거뒀다. 들으면 놀랄 만한 숫자의 미국 인구가 이 약들을 꾸준히 복용해왔다.


    3부는 어떻게 불안이 약으로 처방 가능한 ‘질병’으로 규정되게 됐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장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980년대 이후에는 생물학적 정신의학이 프로이트주의자들을 눌러 약이 권장∙처방되는 의료 문화가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그러나 스콧은 묻는다. 안정제가 개발되자 불안장애진단이 많아졌고, 항우울제가 개발되자 우울증 발병률이 높아졌다. 이게 환자에게 정말 이득이었을까? 반반이다.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어 우울하다는 통설이 “그건 병이다.”라는 한 마디로 일축될 수 있어 환자의 고통이 반감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교적 건강한 사람인데도 점점 확장되는 정신질환 범주 속에 포함될 수 있었다. 스콧이 의문을 갖는 것이 바로 이 ‘늘어나는 범주’다. 질병목록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차트인 DSM은 사실상 정치적 문건이고, 편찬위원회 측에서도 범주의 구분이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고 한다.


    약물 처방에 반대하는 입장도 있다. ‘약 만능주의’의 지난 수십 년 동안 가려져 있던 그 주장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는 사례들이 비일비재하게 보도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FDA는 약물의존에 대한 보고서를 입수했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정부가 안정제로 사회를 통제하려 한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마르쿠제는 자본주의의 소외 탓에 사람들이 약에 빠진다고 주장했다. 로버트 휘터커는 약이 정신병을 일으킨다고 말했다가 논란의 도마에 올랐다. 대부분 약물 처방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우려하는 건 약물의존이다. 철학적으로 보면 정신을 분자 단위로 축소하는 환원주의적 세계관을 경고하는 메시지들도 있다. 그러나 스콧은 무척 신중하다.


    “나는, 정신과 약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일에 이념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제약회사의 주장에 대해 회의할 수 있고, 인구가 약을 대규모로 소비한다면 사회 전체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우려할 수 있고, 정신과 약을 먹음으로써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 어떤 손실이 있을지에 신경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297쪽)


    불안의 유전 여부를 두고 펼쳐진 학계의 논쟁도 흥미롭게 볼 만하다. 초등학교 2학년의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의정부의 한 주공 아파트에 있었다. 물론 우리집이었다. 동생과 함께 외출을 나간 어머니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아 초조했었다. 오후 1~2시 사이였던 것 같다. 현관문을 살짝 열고 밖을 봤지만 복도는 휑했다. 그렇게 수십 분을 더 기다리던 소심한 소년은 결국 “엄마 오게 해주세요!”라고 외치면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런 대성통곡은 없었을 것이다. 그 날 오후, 어머니는 눈물범벅이 된 나를 진정시키려고 꽤나 고생하셨다. 이걸 ‘분리불안’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런 증상을 설명하는데 있어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이 존 볼비와 메리 에인즈워스의 애착 이론이다. 여기서 불안의 원인이 한 차례 입증된 듯했다. 놀랍게도 1950년대에는 육아와 아동심리발달이 별로 관계가 없을 거라는 통념이 있었다. 존과 메리의 주장은 지금 보면 상식 중의 상식이다. 어머니의 애정이 자녀의 정신건강에 중요하다. 어머니가 불안해하면 자녀들도 불안해한다. 어머니가 해서는 안 되는 최악의 육아방식은 과잉보호와 애정결핍의 결합이다. 이 당연한 말을 했다가 존 볼비는 정신분석학과 행동심리학 분야의 중진들에게서 배교됐다.


    그러나 육아와 불안의 상관관계는 “불안은 유전된다.”라고 주장한 제롬 케이건의 ‘억제 기질’ 이론으로 조만간 공격받았다. 불안을 유발하는 특정 유전자형, 예컨대 책에 소개된 COMT 유전자형으로 보자면 val/met와 met/met형을 가진 사람은 스트레스나 외상을 겪으면 심리적으로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제롬은 양육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내재된 불안 유전자가 증상을 유발하는 원인이라 주장했다. 물론 그런 과학적 발견이 있었다고 해도 나는 스콧과 같은 입장이다. (그렇다고 육아방식과 연관된다는 주장에 더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최근 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넥스트 휴먼>에서 소개된 사례인데,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쌍둥이라 할지라도 평생에 걸쳐 누적된 생활습관의 차이 탓에 한 명은 뚱뚱하지만 다른 한 명은 운동을 좋아하고 소식을 실천해 건강한 체형을 갖고 있었다. 유전자도 환경의 차이로 발현 여부가 결정된다. 또한 스콧의 말처럼 어느 하나의 유전자로 불안증 전체를 예측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불안의 복잡다단함을 강조하곤 한다.




*    *    *




    옮긴이 홍한별의 말처럼 이 책은 분명 유사경험을 제공한다. 몸이 반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답답하다가 의심도 되다가 뻥 뚫리기도 한다. ‘불안’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할 수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만약 그들 중에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에서 속 시원한 해결책을 하나 얻으려는 일말의 기대를 건 이가 있다면, 나는 그 기대를 접어두라고 조심스레 말하고 싶다. 저자마저도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나는 별로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라는 부정적인 생각은 불안을 달고 사는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걸 긍정적 피드백으로 계속 밀어내려는 노력, 그리고 자존감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것 말이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 제목처럼 불안은 곁에 두고 가는 동반자일 수도 있다. 혹은 아주 벗어날 수는 없는, 실존의 범위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일 수도 있다. 증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고, 우리는 그걸 줄여나가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뿐일 수도 있다.


    그래도 적잖은 위안은 된다. 불안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진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스콧은 이 책의 집필을 시작했고, 다사다난함 속에서 여러 약을 먹어가면서 불안을 안고 마감까지 끌어갔다. 그가 얼마나 많은 글을 읽고 참조하려고 했는지는 별도의 장으로 마련된 목록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개인의 불안에서 시작해서 우리의 불안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콧이 남겨준 이 한 마디, 불안의 양면성에 대한 체험적 고백은 독자들에게 용기를 준다. 해결책은 아니다. 다만 원망만 하면서 살진 말라는 지극히 교훈적인 위로다.


    “내 불안은 낫지 않는 상처처럼 가끔은 나의 삶을 막아서고 나에게 수치심을 안겨준다. 그렇지만 동시에 어떤 힘의 원천이자 은총이기도 하다.”(422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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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시대 열린책들 세계문학 48
보리슬라프 페키치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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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9



    대학을 하면서 가장 신경 썼던 건 고장 난 삶의 나침반이었다. 제각각의 지침을 따라 팽그르르 어지럽게 돌아가기만 하고, 가끔 내가 보지 않을 때는 무심히 멈춰 나를 기만하는 것도 같은 그 기계가 그렇게도 거슬렸다. 어떻게든 일은 얻을 테고, 그러기 위해 학점도 받을 텐데, 나는 늘 어중간한 듯했다. 허공의 십자로. 깊지도 얕지도 않은 수중 어딘가. 대학이, ‘대학(大學)’이 하나로 모아지는 결론을 내놓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뻔했지만 배신감이 컸다. 20대의 끝 무렵에야 졸업했다. 조금 더 들이부어야 할 열정, 조금 더 들여다보아야 할 고민이 있었다. 대학은 이제 공간이 아닌 시간이 됐다. 취업과 점수가 아닌 삶을 위한 대학에는 쉼이 없고 끝이 없다.


    돌아보면 늘 이런 생각이다. 얻은 것이 아주 없진 않았다. 오히려 더러 얻게 된 그것들이 어떤 결정(結晶)을 갖춰가는 마음 속 모습, 혹은 느낌 같은 것이 기운을 내라고 북돋는다. 이런 나와 같은 불안에 물 먹은 스펀지처럼 푹 젖은 사람들, 나는 아마 그 중 하수에 속하겠지만, 그들은 어떤 길을 걷든 ‘종교’라는 세계를 빗겨갈 수 없음을 잘 알 것이다. 맹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종교 대 종교, 종교 대 세계, 종교 대 자기 자신을 항시 빗대어 생각해보며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노력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 사람들이다.


    어렸을 적 내가 겪은 종교는 피상적이었다. 유아세례 받은 가톨릭 신자였지만 중학생 무렵부터 냉담자가 됐고, 견진성사까지 받았으나 교리는 모르고 신은 믿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도킨스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건 ‘종교’라는 나무에 달린 마지막 붉은 잎까지 모두 떨어뜨린, 늦가을의 비바람이었다. 하지만 그 바람과 더불어 내상도 입었다. 불신하나 종교에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희망이었는지는 올해 가을까지도 몰랐다. 오히려 이 희망이란 건 도킨스 류의 비판서(주로 ‘엣지’의 필진들), 혹은 국내 저자 중 김근수, 김경집 등 종교의 세태를 꼬집은 인문학 저서들의 일침에 쉽게 가려지기 일쑤였다. 왜 일까? 그러면서도 나는 <꾸란 주해>, <불타 석가모니>, <우파니샤드> 등을 들여다봤다. 이런 말을 가벼이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리’라는 걸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난조의 비판을 읽는 와중에도 그 마음은 죽지 않고 버텨냈다.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원제 : The Case For God)>, 도킨스 류와는 정반대에서 종교의 역사를 조망하는 그 책을 읽으며 확신했다. 진리, 그게 뭔지는 모른다. 종교적 삶을 살 것도 아니다. 그래도 왜곡된 종교를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지침들이 마구잡이로 돌아가던 내 나침반의 광기를 잠재워줄 수 있으리라, 다시 한 번 기대할 수 있게 됐다. 굳이 태양에 다가가지 않아도 빛은 늘 자신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그런 기분이다. 빛이라 말할 수 있는 뭔가에 대한 생각, 경험, 그런 것들.


    그런 탓에 주제와 테마가 종교와 관련된 것이면 마음이 가라앉고 오래 책상 앞에 앉게 된다. 이번에도 그랬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터라, 나는 보리슬라프 페키치가 <기적의 시대>에서 예수의 입을, 혹은 그 주변 인물들의 입을 어떻게 빌렸는지 읽어보고 싶었다. (이윤기의 번역이라 더욱 믿음이 간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맹신에 젖은 이들에게, 혹은 문자주의에 빠진 이들에게는 대표적인 이단소설(異端小說)로 기억될 소지가 큰,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 기적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그걸 ‘입은’ 사람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예수의 죽음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종교적 맥락에 취해 성경만 읽은 이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던질 수가 없다. 과연 그들이 예언의 성취를 무엇보다도 중시했던, ‘배반의 키스’ 장본인인 유다의 개인적 입장을 생각해볼 시도라고 할 수 있는가.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는 종교를 들여다보는 다른 눈이다. 장담컨대, 그는 우리 중 그 누구보다도 종교를 가장 많이 들여다본 이다.



*   *   *



    항간이 쓰는 ‘기적(奇蹟)’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기이한 일, 불가사의한 일. 유의어 ‘이변(異變)’이 변고의 뉘앙스를 가져 대체로 부정적인 것과는 다르다. 신의 옆에 가져다 쓸 수 있는 단어도 ‘이변’이 아니라 ‘기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적을 겪은 자, 혹은 기적을 입은 자의 삶이 이후 더욱 나아졌을 것이라 자연스레 생각하게 된다. 소설 <기적의 시대>에서 말하는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들여다봐도 그 사례들은 굉장히 많다. 종교적 체험도 일종의 기적이다. 그걸 겪고 개종한 이들 중 성인(聖人)의 반열에 든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페키치는 그 공식을 부순다. 거의 철저하게 부숴버려서, 기적을 입은 자들이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예수를 욕하고 죽이려고까지 한다. 성경은 예수의 행적 중심으로 기록됐다. <기적의 시대>는 성경 속 등장인물들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이 서있다.


    ‘에글라’는 나병 환자다. 목소리 좋은 전령관 여로보암이 전 남편이고, 지금은 나병 환자이자 시체닦이인, 힘센 거구 우리야와 산다. 그런데 예수가 에글라의 병을 낫게 해준다. 에글라는 예수를 ‘정신이 돈 듯한 젊은이’ 정도로 생각했지만 연민이 생겨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로 한다. 분명 의심은 했다. 그러나 병이 낫는다면 여로보암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우리야와의 삶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쉽게 말해 그녀는 여러 사람을 지아비로 섬길 수 있는 여자다.) 예수는 기적을 행하고 말없이 떠났다. 에글라는 정결함을 얻었다. 하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속까지 다 정화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라삐 이스마이의 주장이었다. 그는 권위가 있는 노인. 장황한 설명으로 에글라를 속 타게 하면서도 정화의식은 건성으로 했다. 그렇게 정화가 ‘선언’된 에글라는 여로보암의 집으로 간다. 하지만 그는 믿지 않는다. “정을 떨어뜨리려는 듯한 어조와 두려워하는 기색”(82쪽)이 역력했다. 돌멩이 쥔 사람들이 몰려와 에글라를 치려고 하자, 그녀는 다시 나병환자들이 있는 신(新)얍느엘로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문둥이 장로는 나병환자의 징표인 방울을 달아달라는 에글라를 막았다. “정결한 자들은 문둥이를 두려워한다더라만, 문둥이에게도 정결한 자들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96쪽) 부정하다며 쫓겨난 에글라는 정하다며 쫓겨나기도 하는 신세가 됐다.


    그녀가 한 가지 잘못한 게 있다. 이 일화가 욕정에 대한 경고라고 볼 수만은 없다. 그런 뉘앙스였다면 페키치는 여러 남자를 좋아하는 자신의 성향을 당당하게 드러낸 그녀보다 주변인들을 더 시시콜콜하게 그려낼 필요가 없었다. 에글라의 잘못은 마태오 8장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의 1절, 혹은 루카 5장 12절에 나오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는 말을 어긴 것. 그 탓에 기적은 괴상한 운명으로 반전됐다. 또 하나는 예수의 잘못도 있다. 그는 예언에 있는 기적을 행하기 위해 여러 지방을 돌아다녀야 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얍느엘에서 본 에글라가 너무 딱해 보여 유다의 만류에도 기적을 행했다. 그것은 과연 ‘기적’이었을까? 여기서부터 페키치는 기적을 변형시킨다.


    기적의 비극은 계속된다. 일그러진 손으로 오지그릇에 동전을 구걸하는 벙어리, 그리고 절름발이인 메세제베일로는 예수의 기적으로 혀가 풀렸다. 그 탓에 평소 증오하던 로마를 향해 “로마 타도, 이스라엘 만세!”를 외쳤다가 십자가형을 받았다. 바르티마에우스는 예수가 눈을 뜨게 해준 소경이다. 하지만 그는 그 기적이 싫다. “시작될 때마다 희망으로 맞은 무수한 새날들이 절망 속에 저물고는 했습니다.”(128쪽) 상상 속의 세계가 실제로는 추한 모습을 드러냈다. 온 세상을 돌아 좋은 것을 찾겠다며 방랑하던 그는 어느 날 눈을 파버린다. 예수에게 구원을 받아 의회당으로 끌려가게 된 때에는 이렇게 말한다. “구원이라는 이름의 돌림병이 돌고 있으니 저희 같은 소박한 사람은 마땅히 자구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133쪽) 두 미치광이인 아나니아와 레기온은 자신들의 독특한 두 세계에서 살고 있었는데 길손인 예수가 기적을 일으켜 이성을 찾게 됐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삶은 무서웠고, 세상은 좁아졌다. 아나니아가 말했다. “이자가 우리 세계를 부숴 놓고 말았구나.”(153쪽) 미치광이 ‘절친’이던 둘은 이성을 찾자 화를 내며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서로를 때렸다. 반죽음이 된 두 사람은 마을 사람들의 돌팔매에 맞아 죽는다.


    막달라의 기적은 충격적이다. (개인적으로는 ‘힌놈의 죽음’ 파트와 더불어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었다.) 어떻게든 예수와 만나 자신의 처지를 낫게 해달라고 할 작정이었던 막달라에게 예수의 제자들은 그 만남을 막는 방벽과도 같았다. 그러다 그녀는 토마를 만나게 되고, 의심 많은 토마는 영혼을 추구하는 매춘부 막달라에게 불쾌감을 느꼈지만 결국 예수에게 데려다주기로 했다. 그때 마침 유다가 와서 토마에게 반전을 알려준다. 막달라와 두 여자(매춘부 수산나, 간통죄 범한 여인 요안나)는 예전에 예수에게 성성을 얻고 악마와 인연을 끊은, 다시 말해 정화된 여인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 여인은 왜 또 예수를 만나려고 했던 것일까? 무엇이 부족해서? 토마는 궁금증에 뒤를 따라가 물었는데, 막달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시 매춘부가 되고자 합니다.”(194쪽) 유다의 우김으로 예수는 어쩔 수 없이 그녀들을 정화했지만 정작 그 셋은 “결국 우리의 육체는, 기적이라는 이름의 쇠고랑이 채워진 노예 신세가 되어버린 것.”(196쪽)이었다. 안에서 터져버린 시체, 즉 영혼이 감옥에서 탈출한 수산나만이 그 쇠고랑을 끊어버린 것. 성경을 통해 알려져 있는 막달라는 이 소설에서 사라지고 없다.


    부활한 라자로와 관련된 베다니아의 기적은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오기까지 한다. 라자로는 ‘혁명가’ 예수를 지붕 아래서 재웠다는 죄로 의회관리 감옥에 갇혔다가 죽었다. 하인 하므리가 그 시신을 갖고 왔는데, 예수의 곁에서 얘기만 들어 언니 마르타의 원성을 산 마리아는 예수가 라자로를 부활시킬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하므리는 기가 찼지만 라자로 장례 후 나흘이 되던 날에 예수가 나타나더니 진짜 라자로를 살렸는데 그는 구더기, 부패제, 흙 등으로 뒤범벅이 된 모습이었다. 유다는 사두가이파에 대한 구세주의 개인적 승리라고 평가했고, 예수는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런데 이번에도 라자로는 끌려갔다. 술에 취해 있다가 잡혀간 것이다. 사두가이파 니고데모는 살아 있는 것이 잘못이라며 라자로에게 “다시 죽으면 되는 것”(243쪽)이라 사형을 언도했다. 라자로는 두 번째로 부활한 날 밤에 수의를 걸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므리가 “또 예수가 그랬습니까?”(251쪽)라고 묻자 라자로는 욕지거리를 했다. 영원히 죽음과 부활이 반복될 판이었다. 그래서 주인은 하인에게 맹세 하나를 해달라고 했다. 화장을 해서 시신을 남기지 말아달라는 부탁. 화장을 하면서 기도하는 하므리의 말은 아이러니하다. 자기 주인은 기적의 최고 ‘피해자’란다.


    이렇게 일곱 편의 기적 아닌 기적이 끝나고, 페키치는 네 편의 죽음 이야기를 더 들려준다. 이것 역시 성경과 다른 성경 속 이야기다. 첫 번째인 ‘힌놈의 죽음’은 배신자의 대명사인 유다를 증오하는 신자들에게 굉장히 거북할 것이다. 이는 유다가 금전출납부에 기록해둔 이야기로 재편된 것인데, 유다 자신이 쓴 것이므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이, 예수의 무능함, 혹은 의존증과 다른 사도들의 무식함을 재료로 잘 빚어져 있다. 토마도,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도, 마태오도, 베드로도, 안드레아도, 심지어 예수도 에브라임에서 떠나지 않는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언대로 예수가 죽어야 했지만 아무도 유다의 보챔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 “유다야, 두렵다.”(289쪽)라고 말하는 예수를 겨우겨우 설득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유다는 나귀를 빌리고, 예루살렘 입성 시 굶주린 사람들을 동원해 환호하게 하고, 환전상을 내쫓고(이것 때문에 오히려 벌금만 물었다.), 앉은뱅이 기적을 행하게 했다.


    그는 예언에 절대적이다. 카리스마가 없어 율법학자들을 실실 비웃게 만든 예수의 공회당 설교 이후 상황은 말이 아니었지만 꼼꼼한 유다는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되돌아보다가 배신의 예언이 이뤄지지 않은 걸 알고 최후의 만찬을 연출한다. 물론 그 자신이 배신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고, 예수는 유다를 지목하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같이 죽게 된다는 미소. 정신을 차린 유다는 의회당에서 30냥만 받고 군병들과 함께 게쎄마니로 가 예수를 체포했다. 이후의 일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유다는 그렇게 죽지 않는다. 힌놈 골짜기로 가서 죽을 자리를 마련해놓고 왔지만 죽기는 싫다. 그런 유다는 죽어야 한다. 예루살렘의 사방의 문에서 사도들이 유다의 도망을 막는다. “성서의 말씀의 올가미가 유다의 목을 죕니다.”(346쪽) 결국 유다가 선택한 피난처는 막달라 마리아의 집. 그러나 그녀가 누구던가. 게파(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들어와 유다를 끌고 갔으며, 유다는 그들의 손에 들려 목줄이 걸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예수가 부활하는 날이니 잊지 말라는 것. 예언에 목을 맨, 자신을 예수와 야훼의 동급으로까지 여긴 유다의 최후였다.


    이어지는 모리야의 죽음은 사실 앞선 기적들과 맥락이 같다. 앉은뱅이로 태어나 중노동을 하지 않아도 벌어먹을 수 있어 다행인 발람은 예수의 기적을 받아 다리가 나았다. 의형제간인, 같은 앉은뱅이이자 비럭질을 해 먹고 사는 에녹이 먼저 낫고 나서 예수를 발람에게 데려간 것이었다. 하지만 둘은 역시나 중노동을 하며 예수를 저주하게 됐다. 훗날 발람과 에녹은 예수의 기적을 입었다는 동패들과 예루살렘에서 만나던 중, 예수의 기소 소식에 증언을 하러 의회당으로 갔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것이니 그를 기소하여 죽게 하는 건 미친 짓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던 차였다. “은혜를 입은 뒤 팔자가 나아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361쪽) 그러니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발람은 자살하고 에녹은 채석장으로 돌아갔다.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에는 바라빠도 등장한다. 다핫의 아들이자 모압 사람, 과월절의 전통에 따라 사면된 도둑. 그 대신 십자가형에 처해진 이가 예수다. 바라빠가 15년의 옥살이를 하게 된 이유는 로마를 찬양하는 헤로데의 염탐꾼의 목을 비틀었기 때문이다. 그는 선동자들의 웅변에 감화된 이. 로마에 대한 하느님의 복수를 꿈꾸다가 오랜 옥살이 중 생각을 거듭해 ‘복수’만 머리에 남게 됐는데, 그 복수를 위해, 즉 사면의 순간 간수장 티론에게 적절한 저주를 퍼붓기 위해 온갖 표현들로 문장을 다듬어왔다. 그러나 배우지 못한 그가 문장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 여러 도움을 받으면서도 예수 ‘탓’에 사면되는 바람에 시간이 모자라 예수를 증오하게 됐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예수에게 물어봐도 예수는 모르쇠다. 결국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던 바라빠에게 그 저주의 긴 문장은 “너, 너…… 로마의 개새끼야.”(391쪽)로 줄어든다. (더불어 몸도 야윈다.) 그는 사면될 때 티론이 아닌 새로 온 간수장을 만났다가 예루살렘 도성으로 나왔는데, 예수가 자신에게 건넨 말을 생각해내더니 1시간 만에 수레에 치어 시신을 발견됐다.


    마지막 골고타의 죽음은 페키치가 ‘예수의 부활’이라는 종교적 사건을 완전히 틀어버린 부분이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 세상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었으리라. 그것이 지금 세상의 결과다. 그렇다면 <기적의 시대>를 빌어 펼쳐낸 픽션에서는 성경을 어떻게 비틀어야 했을까. 답은 하나다. 예수가 예언대로 죽지도, 부활하지도 않으면 된다. 그렇게 예수 대신 십자가형에 처해진 이는, 정말로 “나는 이 모든 역사와 고통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403쪽)고 말할 수 있었던 이는 다름 아닌 키레네 사람 시몬이었다.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짊어진 이다. (그가 억지로 짊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페키치는 기꺼이 그 일을 했다고 썼다.) 아무런 관련도 없던 시몬이 보기에 예언 속 ‘하느님’은 오지 않는다. 자신의 죽음은 개죽음이다. 그러니 죽어가는 와중에 무슨 진리가 있는가. 불레셋 사람과 즈가리야 사이에 박혀 있는 채로 시몬이 느끼는 가장 큰 고통은 육신의 것이다. “진리 말고 물을 다오 로마인들아.”(403쪽) 허망한 삶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몬의 말을, 페키치는 쉼표와 마침표도 없이 적어 내려간다.


    하지만 이 모든 충격적인 반전은 시몬이 불레셋 사람에게 밝힌 자신의 정체를 독자인 우리가 눈으로 읽기 전까지 알 수가 없다. 시몬의 모든 불평과 의심은 예수의 것처럼 적혀 있다.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말까지도 예수의 불평 같다. “나는 키레네 사람 시몬이다.”(406쪽)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새 왕국을 간절히 바라던 시몬은 예수를 대신해 잠시 십자가를 질 요량으로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예수는 군중 속으로 사라지고 술에 취한 군병들은 예수를 찾지 못해 시몬을 대신 못 박았다. 중죄가 두려웠던 백인대장은 시몬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으로 발표했다. 페키치는 시몬의 말을 빌려 분명하게 말했다. “세상은 구원되지 않았다. 원죄는 닦이지 않았다.”(407쪽)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 글레오파 마리아에게 일요일에 나타났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준 뒤 흑해 동쪽의 먼 땅으로 떠나 두 번 다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예언에 빠진 유다, 십자가를 짊어진 시몬만 죽고 예수는 살았다.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해괴망측한 망언과도 같은 이 픽션은 구원받지 못한, 다르게 말하자면 종교의 이름으로도 어쩔 수 없는 (혹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기도 하는) 지옥과도 같은 세상 비극에 대한 해석인 것이다.



*   *   *



    “나는 페키치의 이 소설이 우리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있을지언정 신성을 모독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410쪽)


    번역을 맡은 이윤기의 말이다. 종교의 권위가 다듬어온 전통에는 사고 범위의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걸 벗어나면 이단이자 신성모독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교를 벗어나 종교를 이해하려는 지난 노력들 덕분에 그 한계를 벗어나 생각해봐야 하는 까닭을 잘 알게 됐다. 이를 내다본 종교 관계자들은 ‘열린 종교’를 표방하며 세상과의 적극적인 대화에 나선다. 마찰도 있겠지만, 이를 통해 열린 문으로 오고 가는 진솔함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끔 자극하기도 한다.


    그들은 아마 페키치의 질문, 그가 소설에 담은 질문의 의미를 꿰뚫고 있을 것이다. 기적을 입은 이들이 실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면, 그것이 그들의 타고난 신체적, 혹은 정신적 불안정으로 과장되어 있긴 하나, 과연 그것이 기적일 수 있겠는가. 예수 사후 우리는 그가 말하던 삶의 최고 가치들을 얼마나 흡수하여 실천했는가. 모든 것을 예전의 전통대로, 그리고 문자대로 해석할 수 있는가. 이건 페키치가 종교 자체에만 던지는 질문이 아니다. 우리가 그 과녁이 되어 질문을 맞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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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재나 E. 플로레스 지음, 안진희 옮김 / 책세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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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2



   “정작 온라인 세계는 사람들 간의 접속이 지속되는 시간을 오히려 축소시키는 방식을 통해서 그런 사람들 간의 접속을 무한히 증대시킨다. 그 결과 지속적인 접속 기간을 요구할 뿐 아니라 때로는 그 지속 기간을 더 강화시켜야만 유지될 수 있는 그런 인간들의 유대관계는 오히려 약화시킨다.” (지그문트 바우만,『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41~42쪽)


    두 세계가 각기 다르다는 것은 온라인 세계를 충분히 만끽한 세대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세계에 들어온 사람들은 마음껏 꾸밀 수 있는 무한의 세계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거의 직감했다.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우리 모두가 처음인 세계였다.) 그렇게 우리는 아바타를 사고, 프로필 사진을 위해 사진 각도를 배우며, 좀 더 생각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자 아포리아들을 찾아다녔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말의 진의는 사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싶다’였다. 선망의 영역 언저리에서 우리는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문제는, 그렇게 멋진 ‘나’와 ‘나’들이 서로 만나면 나체도 아닌데 왠지 헐벗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일찌감치 하차했지만 아직도 그 선로 위를 달리는 이들이 많다. 온라인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죽음도 0과 1 사이에서 맞이한다.


    수재나 E. 플로레스 박사의 <페이스북 심리학(원제 : Facehooked)>은 온라인에 묶여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하지만 극단적이거나 선정적인 사례들이 주목을 끌었다. 불편하긴 했다. “뭐 이런 사람들이 있나?” 우리가 익히 들어온 온라인의 폐해 지적과 비교해도 딱히 변별되는 주장이나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온라인 중독의 해결 방안으로 제시되는 ‘인터넷 끊기’ 류의 일반적인 대책을 제시한 것도 평범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온라인 세계의 발달과 같은 궤도 안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강박적으로 SNS를 확인하고, 스마트폰이 손에 없으면 불안한, ‘좋아요’ 반응이 올라오면 그때만 반짝 흥분하는, 전형적인 IAD(인터넷 중독 장애) 증상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나타나고 있다면 이런 책에서 탈출의 실마리를 찾아봐야 한다. 이 책은 기호에 맞춰 읽는 종류의 책이 아니다.


    SNS 사용을 위해서는, 아니 최소한 그 세계에 접속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보여주고 공유할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야 했다. 그 이미지는 대개 이상적인 페르소나로 편집된 것이다. 그런 페르소나를 향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지나친 기대를 부과한다.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는 물론 인터넷 상의 ‘나’가 먼저다. 현실은 낮은 자존감, 우울증, 의존증 등에 시달린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페르소나 편집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그게 잘못될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있는 게 문제다. 편집된 페르소나가 현실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면 우리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 로그아웃하는 순간 까마득한 높이를 떨어지는, 기분 나쁜 현실의 중력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공감과 동의, 그 ‘좋아요’를 눌러주는 세계로 들어가려고, 들어가서 나오지 않으려고 한다.


    SNS의 친구는 과연 진짜 친구일까? 우스갯소리지만 진짜 친구와 SNS를 하는 경우는 제외하자. 수재나 박사는 온라인의 친구는 ‘관객’이라고 일축한다. 물론 건강한 온라인 친구도 있다. 얼굴도 본 적 없고 서로 전혀 몰랐던 사이인데 장문의 편지만 주고받으면서 평생 서로 긍정적인 자극이 되어주고 인생의 멘토가 되는 사례는 컴퓨터라는 걸 상상할 수도 없었던 옛날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이를 기대하기에 우리의 ‘온라인’이라는 환경은 참을 수 없이 가볍다. 수재나 박사는 “태생적으로 가볍고, 정보나 긍정적 반응, 지지를 받기 위해 유지된다.(95쪽)고 썼다. 이런 가벼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온라인 친구와의 문제를 인생 최대의 미제로 남겨놓은 채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례가 있다. 심리치료 분야의 흔한 주제라고 한다. 가짜 페이스북 프로필을 보고 사랑에 빠지거나, 질투, 스토킹, 강박, 복수 등 극단적인 애정 행위를 하기도 한다. 페이스북이 양날을 갖고 있다면 이런 비극의 주인공들은 스스로 베어내는 날만 휘두르는 셈이다. “페이스북은 사람들을 갈라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합하도록 만들어진 소셜네트워크다.”(132쪽) 혹 이런 문제는 사용자 본인이 한 번만 깊게 생각해보면 익히 해결될 것은 아니었을까.


    20대에서 30대로 슬며시 넘어가면서 나는 SNS를 통한 피드백에 많은 회의를 느끼게 됐다. 좋은 말 남기는 사람들을 ‘팔로우’하던 시절도 있었고, 지금은 없어진 한 커뮤니티 서비스에 온갖 사진을 올리고 방명록을 남기며 옛 친구들(대부분은 고등학교 동창들)과 교우한 적도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본다. 그때 방명록에 남길 말들, 지금 SNS에 남길 말들은 전화해서 직접 하면 되는 거였는데. 다른 사람의 말이 좋아서 ‘팔로우’하는 거, 짧고 좋은 말들이나 아포리아 좋아하던 건 그냥 멋져 보여서 였지. 뭐 이런 생각들 말이다. 실제의 만남은 깊고 길다. SNS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짧은 말들은 사실 긴 말의 일부분이라 우리 멋대로 발췌해서 해석하면 곤란한 경우가 많다. 우리가 진득하게 붙어 있어야 할 공간은 그곳이 아니다.


    열심히 인터넷에 목을 매던 시절에는 수재나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개인정보가 어디까지 노출될 수 있는지 큰 고민을 하지 않았던 듯도 싶다. 나는 “공개광장을 통한 자기표현을 사회적 표준으로 여기며”(154쪽) 자란 세대까지는 아니다. 자신을 꾸미는 것에서 더 나아가 스스로를 가감 없이, 일상과 감정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신체까지 노출시키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이들을 보면 우리가 과연 어느 선까지 온라인 세계에 자신을 담아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인터넷 세계의 변화를 목격한 세대는 너무 빨라진 기술의 속도에 일순간 거부반응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랬으면 하는 것이, 그래야만 제동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현재의 환경에 적응하게 되는 새로운 세대들은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문제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10대들이 유독 SNS 문제에 노출되어 있는 까닭 중 하나가 이로 설명된다. 그 때문에 수재나 박사는 부모들이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방법을 적었다. 여러 세대가 조금씩 다르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수재나 박사도 SNS의 건강한 측면을 간과하지 않는다. 오히려 박사 본인도 SNS에 푹 빠져 있던 일반적 경험을 한 당사자다. 다만 그녀가 주목하고 싶은 건 우리가 그 세계에 중독되어 잃어버리게 될 우리 자신의 가치다. 부모가 게임 하는 아이 뒤에서 잔소리를 쏟아낸다. 아이는 당연히 싫어한다. 부모는 격동의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와 사이가 조금 틀어질 수도 있다는, 부모 입장에서는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는 결단을 내리고서라도 아이를 공부시키고 싶다. 아이는 게임과 공부가 서로 상극처럼 느껴진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무언가에 중독된다는 것은 그 중독의 대상에게 자기 자신의 많은 부분을 거의 무담보로 넘겨준다는 뜻. 부모는 아이 스스로가 주체로 자라길 바란다. 공부가 다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어른이 “공부 좀 해라.”라고 말하는 것, 그 속뜻을 아이가 알기에는 너무 어리기도 하다. 중독의 대상에 의존하지 말 것. 이것은 중독의 마력을 지닌 무수히 많은 이 세상의 것들 앞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제 1 원칙이다.


    “페이스북에 무엇을 올릴지를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근거하여 결정하면 그들에게 당신의 행복을 결정하는 힘을 넘겨주는 셈이다.”(241쪽)


    작업수행능력이 떨어진다. 기억력도 감퇴한다. 우울증이 생길 수 있고, 심한 경우 자살을 시도할 수 있다. 마약에 가까워질 확률도 높아진다. 강박충동이 일어나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할 수도 있고, 섭식장애가 와서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수재나 박사가 파괴자(사보타주), 나르시시스트, 순교자, 유혹자, 스토커, 이렇게 다섯 부류로 나눈 ‘SNS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들’에게 사로잡혀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간헐적 강화(Intermittent Reinforcement) 때문에 SNS 반응을 받을 때만 반짝 기분이 좋아 감정의 굴곡이 심해질 수도 있고, FOMO(소외 공포증)를 겪어 불안해질 수도 있다. 뭔가 포스팅을 남겨야 할 것 같은 강박 관념에 정작 올리지 말아야 할 것을 올려버리는 말 못할 해프닝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저건 분명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전혀 건강하지도 않다. 박사가 말했듯이 대부분의 SNS는 분명 화합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의 자존감을 스스로 갉아먹거나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면 우리는 애당초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이용하는 사람 자신에게 있다. 해결책도 개개인에게 다르게 주어질 것이다. 자본의 생리는 앞서 말한 폐해의 책임을 이용자에게 고스란히 넘기곤 한다. 이용자인 우리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단히 식상한 말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일상 습관을 건강하게 다져놓는 것밖에는 없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보면, 인터넷의 홍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물에서 나오기만 하면 된다. 페이스북 중독 예방책이라고 해서 수재나 박사가 10가지 방법을 적어놓았다. 다 모아서 합쳐놓으면 “담근 발을 조금씩 빼라.”로 일축된다. 금연하려면 담배를 멀리해야 하고, 살을 빼려면 가급적 덜 먹어야 하며, 도박을 끊으려면 도박장 근처에도 가지 않으면 된다. 박사의 지침대로 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자신이 일상과 SNS 세계 사이에서 훌륭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는, 기분 좋은 느낌이 온몸에 퍼지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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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리언 유니버스 - UFO, 외계인, 외계 지적 생명체에 관한 모든 것
돈 링컨 지음, 김지선 옮김 / 컬처룩 / 201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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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5



    다큐멘터리인 척 하는 영화에 <유로파 리포트(Europa Report)>라는 2013년 SF 스릴러가 있다.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에서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만났다는 단순하면서도 충격적인 결말에 대원들의 역경과 희생, 불신 등으로 살을 붙인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샬토 코플리(우리에게도 영화 <디스트릭트 9>의 비운의 주인공으로 비교적 잘 알려진 배우)가 희생하는 대원으로 나와 반가웠다. 사실 NASA와 세계 유수의 우주 관련 학자들은 유로파에 생명체가 살 확률을 높게 잡는다. 여러 다큐멘터리를 통해 국내에도 소개되었는데, 이를 아는 이에게 <유로파 리포트>는 ‘정해진 결말을 향해가는 그저 그런 영화’ 정도로 비춰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이 글의 서문을 영화 이야기로 연 까닭은, 그럼에도 <유로파 리포트>가 외계생명체라는 주제에 대해 많은 생각할 거리를 주기 때문이다. 스포일러 하나.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외계생명체는 흡사 영화 <매트릭스>의 ‘추적자’를 생각나게 하는, ‘오징어’형이다. 눈으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불빛도 쏜다. 일그러진 화면이라 아무리 돌려봐도 정확히 볼 순 없지만 이 영화 역시 우리가 생각해온 전형적인 외계생명체 중 하나를 등장시켰다. 그래도 ‘오징어’형 외계생명체가 유로파에 실제 있을 수 있다. 유로파의 광활한 얼음 대지 밑은 바다로 추정된다. 지구의 바다에는 오징어가 있다. 아무렇게나 영화 제작자들이 그런 외계생명체를 가져다 CG로 심어놓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선 밝히겠는데, 나는 외계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 <E.T.>나 <디스트릭트 9>, <에일리언>, <프로메테우스>, <스타워즈> 시리즈, 드라마 <X 파일>처럼 주로 서구 문화가 흥행몰이를 위해 개량한 외계생명체의 형태가 실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영화 <콘택트>처럼 신비한 체험으로 그들을 만날 가능성도 낮다고 본다. 외계‘인’에 대한 인류의 로망은 정말 오래되었지만 나는 그런 지적 존재가 우리와 접촉할 가능성, 그리고 그들의 문명이 우리와 만날 만큼 충분히 오래 지속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다소 회의적이다. 단지 바다를 유영하거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혹은 땅을 기어 다니거나 뛰는 정도의 외계생명체는 이른바 항성계의 ‘골디락’에 들어가 있는 행성에서는 충분히 출현할 수 있을 거라 본다. 문제는 그게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동서양에서는 온갖 공상들이 나왔지만 별로 과학적이진 않았다.



*    *    *



    이 책 <에일리언 유니버스(원제 : Alien Universe : Extraterrestrial Life in Our Minds and in the Cosmos)>에서 저자 돈 링컨은 외계생명체에 대한 우리의 로망을 확인하고, 실제 존재가능한 형태의 외계생명체를 지구의 조건과 사례를 기준으로 추정한다. 증명하거나 아직까지는 발견할 수 없는 그 존재들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혹자들은 물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은 단순히 외계만 바라보진 않는다. 오히려 이 책에는 지구의 유구한 물리∙화학적 역사가 담겨 있다. 이 책에서 제시된 조건들 안에서 인간이 탄생했다는 건, 그 단순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생명에 대해 많은 걸 얘기한다. 어쨌든 외계‘생명체’이지 않은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들을 만나면 과학계는 (마치 화성의 물을 보고 실성한 우리처럼) 또 한 번 발칵 뒤집히겠지만 우리는 그 ‘전혀 다른 방식’을 아직 알지 못하기에 확인가능한 방식으로만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은 우리가 모를 수도 있는 영역에 대해 활짝 열려 있다.


    보통 우리가 ‘외계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그 저변에는 일종의 음모론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외계문명이 인류의 주요 고대문명들을 키워줬다는 이른바 ‘역기술론(역공학)’이 대표적일 것이다. 드라마 <X 파일>도 음모론의 대표주자다. 특히 돈 링컨은 이 드라마의 성공으로 “비합리적인 사람들이 합리적인 사람들보다 더 합리적이라는 위험한 생각을 강화할까봐 걱정스럽다.”(193쪽)고 우려를 드러냈다. 스컬리가 항상 멀더에게 결과적으로 승복하는 플롯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음모론들을 잘 들여다보면 그 입증 외에도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하는 부분이 있다. <음모론>이라는 데이비드 사우스웰의 책을 번역한 이종인은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소개된 음모론은 휘어진 공간의 착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기발하고 파격적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또한 생각의 힘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심외무물(心外無物)이라는 말도 있듯이 인간의 생각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데이비드 사우스웰, <음모론>, 이종인 譯, 9쪽)


    돈 링컨은 <에일리언 유니버스>의 거의 절반이 넘는 분량을 이 ‘생각의 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사례로 입증하는데 사용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정말 재밌다. 달에 기이한 존재들이 산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가십거리들로 가득한 페니 프레스, 즉 1 페니면 살 수 있는 저급 신문에 실리면서 1835년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는 이야기, 외계인을 목격했다고 와전된 대표적 사례인 푸 파이터(이건 미국의 밴드 푸 파이터스가 아니다.), 지금도 ‘재탕’되면 늘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로스웰 사건, 자신들이 외계인과 접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혹시 이런 접촉 사건을 다룬 인상적인 영화를 찾는다면 영화 <포스 카인드>를 추천한다. 나이지리아의 젊은 감독 올라턴드가 만든 이 영화의 주연은 밀라 요보비치다.) 등을 저자는 위트 있는 문체로 전한다.


    이런 사건과 더불어 인간의 창작물이 외계에 대한 인류의 환상이 다양해지고 점점 강력해지는데 일조했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톰 크루즈 주연 영화 <우주 전쟁>으로 알려진 H. G. 웰스의 <우주 전쟁(1898년)>은 한 라디오 감독이 각색했다가 미국 뉴저지 주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기도 했다. 오래된 소설과 영화 중 최근에 리메이크되어 다시금 조명을 받은 작품들도 꽤 있다.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의 <바숨> 시리즈는 앤드류 스탠튼 감독의 <존 카터 : 바숨 전쟁의 서막>으로 2012년 개봉했었고, 1951년의 <지구 최후의 날>은 2008년,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지구가 멈추는 날>로 리메이크되었다. (하지만 후자는 거의 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블록버스터가 미국의 영화시장을 상징하게 되면서 <스타 트렉> 시리즈, <스타워즈> 시리즈, <에일리언> 시리즈, <스타게이트> 시리즈, <미지와의 조우> 등이 환상을 불어넣었고, 드라마 <X 파일>이 거기에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음모론을 조장하며 종지부를 찍었다. 사실 오늘날 나오는 이와 비슷한 종류의 영화들은 그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나마 가장 최근의 독창적 사례라 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영화가 아니라 PC 게임이다. Maxis 사에서 2008년에 내놓은 게임 <스포어(Spore)>는 진화론과 환상의 조화나 다름없다.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로 ‘크리처’를 진화시켜 지성을 얻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게 목표이고, 진화의 단계를 넘을 때마다 모습을 각양각색으로 바꿀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게임을 일컬어 플레이어에게 무궁무진한 권한을 줬다 하여 ‘God Game’이라 부르는데, 사실 나름 과학적인 구석이 많은 게임이다.)


    여기까지가 1~4장의 내용이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MBC의 TV 프로그램인 <서프라이즈>를 생각하며 다채로운 사례들에 매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돈 링컨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5장부터 나온다. 지구의 생명이 등장한다. 놀랍게도 그 모습은 흡사 외계에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기이하다. 하지만 그 생명들은 다름 아닌 지구에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환상하는 외계인의 모습에 너무 젖어있지 말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언젠가 만나게 될지 모르는 외계인이 그토록 친숙한 존재일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전무하다. 선사 시대로의 방문은 외계 세계가 얼마나 이상할지를 보여주는 가장 미미한 실마리일 뿐이다.” (224쪽)


    지구에는 진핵생물, 균, 식물, 동물 등이 있다. 나는 대학의 한 과학 관련 강의에서 노(老) 교수가 한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우주에는 수많은 원자∙분자들이 있으며 그 가능한 조합의 경우의 수도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지구의 생물들이 보여주는 조합의 경우의 수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러니 그 교수는 우주에는 얼마나 많은 ‘가능한 생물’들의 형태가 존재하겠느냐고 학생들에게 반문했다. 물론 그 가능한 경우의 수가 전부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돈 링컨도 마찬가지. 그는 몸 대칭성, 다리의 수, 체구, 골격, 신경계, 이동, 속도 등 여러 조건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외계인은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라는 우리의 공상을 좀 더 현실적인 이미지로 그릴 수 있게 도와준다. 지구중심적이며,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는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돌아보게 한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알아낸 바로는 생명의 4대 핵심 필요조건이 있다. 열역학 불균형(에너지 이동과 관련), 원자결합(탄소와 생명 관련), 액체 환경(액체는 생명의 ‘보편 용제’), 그리고 진화 구조(자기 복제 관련)이다. 6장 원소는 화학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 다소 어려울 수도 있지만 이는 외계생명체와 외계인을 생각해볼 때 꼭 고려해봐야 하는, 적어도 지구인의 입장에서는 들여다봐야 하는 중요한 문제들을 담고 있다. 과학자들은 다양한 생명의 방식을 잘 안다. 그 생명은 꼭 인간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엄청난 고도에서 사는 벌레나 열수공에서 서식하는 해저 생물들이 과학계에 안겨줬던 충격을 잊지 않고 있는 과학자들은 외계도 역시 그러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외계인’에 한정해서는 지구와 비슷한 조건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믿음이 아니라 체계적 학문에 따른 지금까지의 결론이다. 6장 원소를 보면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콘택트>에서는 외계(베가 항성)에서 온 전파를 수신하는 순간이 아주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콘택트>는 1950년대에 등장한 전파천문학과 드레이크 방정식을 기초로 한 영화다. 그 방정식의 값은 시대와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제시되었지만 이 기저에는 오늘날 SETI 프로젝트가 그러하듯 외계문명에 대한 인류의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 1964년에 제시된 니콜라이 카르다셰프의 ‘카르다셰프 척도’도 그렇다. 외계문명의 유형에 대한 이론이다. 돈 링컨은 이 책을 2012년에 썼는데, 향후 길면 몇 십 년 안에 “우리가 유일한 존재인가?”에 대한 확답이 내려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나는 화성이나 유로파가 그 답의 근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가능성과 환경을 생각해볼 수 없다.) 아마 저자의 기대가 현실이 된다면 외계문명에 대한 인류의 로망 ‘수치’는 역사상 최고를 기록하게 될 것이다.




*   *   *




    <에일리언 유니버스>가 외계를 향한 나의 환상을 부추겼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다. 과학은 인류의 오래된 질문인 “우리는 혼자인가?”에 답하기 위해 실제로 행동하고 있으며,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혼자이지 않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말한다. 이는 믿음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믿음과 별개이기도 하다. 과학은 확증에 기초한다. UFO 신봉자들이 그린 외계인의 해괴한 모습과 과학이 제시하는 ‘가능한 생명체의 형태’는 엄연히 다르다. 그렇다고 과학이 우리의 환상을 억지로 막진 않는다. 오히려 나처럼 이 책을 읽은 많은 이들이 도심의 밝은 밤하늘에서 익숙한 별자리를 찾아보려고 검은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될 것이다. 돈 링컨도 이렇게 책을 닫는다.


    “하늘을 감시하라.”(3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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