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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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3.02.04

 

 

  운동이 끝나고 아버지와 돌아오는 길이었다. 폭설의 전조가 화려하게 시작됐다. 경기 북부에 한하던 대설주의보가 이곳 일산에도 곧 내려질 것이라고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날씨였다. 교통정체와 각종 접촉사고 관련보도들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대설 속보들 사이로 전해진 뉴스 하나에 나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보험금을 타기 위해 부모를 죽이고, 새벽에 들어와 형까지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피해자에게도 처지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보험금을 꼭 당장 손에 쥐어야 했을 것이다. 자신의 사정으로, 그러나 사람이 여럿 죽었고, 도덕의 가치는 처참하게 훼손되었다. 사실 그에게 사정을 물을 것도 없다. 나는 이런 비극적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그 고리타분하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떠올린다.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말. 우리의 일상이 그의 명령과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아마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지켜져야 할 상황은 존재한다. 명령은 주관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객관적으로 적용되고, 우리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도덕적 상황은 분명히 있다.


  우리는 상대주의를 좋아한다. 근래 겪어보고 들어본 바를 뭉뚱그려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주관적 상황에 대한 옹호가 자기변호로 곧잘 이어진다는 것이다. 상대주의가 발현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조건은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다채로운 가치들에게 저마다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환경이다. 우리는 이것을 잘 활용해서 무관심 속, 혹은 수면 아래의 가치들을 끌어올려 대중들로 하여금 생각해보게 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다양한 직종이나 문화에 대한 폭넓은 관심은 다원주의를 구축하는 좋은 밑거름이 되고 있다. 두 말 할 것 없이 이는 열린사회와 발전을 위한 청신호이다.


  그러나 상대주의가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점에서 나는 칸트와 롤스의 편이다.) 특히 도덕의 영역이 그러하다. 도덕적 판단을 개인에게 맡겨버리는 것은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 낮은 도덕을 가진 자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이만큼 위험한 모험도 없다. 도덕적 판단은 전통과 공론 상의 토론 등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형성된 고귀한 도덕적 가치로부터 어느 정도 견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개인에게 이러한 숙고의 시간을 주지 않는 분위기가 장시간 이어진다면 도덕적 해이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질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만 한다.


  “왜 도덕인가?”


  도덕의 든든한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개인에게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자유가 주어진다고 생각해보자. 부모가 아이의 도덕 교육에 열의를 다하지 않으면 아이는 사회의 도덕을 등진 채 자신에게 유리하고 편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움직일 것이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어른에 대한 공경, 약자에 대한 배려, 질서를 위한 양보, 공동체적 가치를 위한 헌신 등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사회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위협을 받는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우리의 권리를 무시할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변덕에 당황하게 된다.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원제 : Why Morality)』는 도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공동체에 대한 철학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발전되어 왔는지, 그 반대편의 논지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다양한 사례들로 풀어 설명한 철학·윤리 명저 중 하나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이하 ‘정의’라 표기)』와 같은 선상에 있는 책이라는 것은 이미 여러 논평과 보도들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정의』에 있는 주장과 사례들이 거의 고스란히 인용되어 있기도 한데, 두 책을 병행해서 읽거나 순차를 두고 읽는 것은 도덕의 쟁점들을 학습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샌델의 정치철학은 미국 정치철학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당연한 배경이다. 우리의 고민은 그들의 것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시키려는 응용이 될 수밖에 없다.


  ‘도덕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제 1장은 경제, 사회, 교육, 종교, 그리고 정치의 영역으로 나눠 그것들과 도덕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는 공간이다. 샌델은 방대한 양의 사례들을 이곳에서 제시한다. 대부분은 『정의』에서도 그대로 인용된 사례이다. 공공기관의 상업화는 대학의 역할에 대한,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에 대한 『정의』의 주장에서도 살펴볼 수 있고, 소수집단 우대정책인 일명 AA는 『정의』의 것과 동일하다. 존엄사, 배아 복제, 낙태, 동성애, 그리고 클린턴의 교묘한 거짓말(그것과 칸트 사이의 관계) 등도 그러하다.


  제 1장의 역할은 소제목 그대로 독자들에게 질문에 답할 시간을 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도덕·철학적으로 어느 한 쪽의 주장을 올곧이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애매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인간의 도덕적 난해함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사례들이 즐비하다. 때문에 A라는 사례에 대해서는 자유지상주의를 옹호하던 사람들도 B의 사례에 대해서는 “그래도 이건 개인의 판단에 맡기긴 어렵다.”고 입장을 바꾸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 쯤 되면 눈치 빠른 독자들은 샌델의 의도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는 개인에게 도덕적 판단을 맡길 때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막대한 논란들이 얼마나 큰 문제를 유발하는지 체감시킨다.


  충분히 사례들을 읽은 독자들은 제 2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공동체(共同體)’라는 가치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된다. 오늘날 ‘나’라는 개인 한 명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까지 여겨지는 사적 공간을 지니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권리가 있는 ‘나’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나’가 아닌 다른 영역으로부터 수많은 개입을 받아서 ‘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체성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이다. 전자는 사회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후자는 결합되어 있다. 이를 각각 ‘무연고적 자아’, 그리고 ‘연고적 자아’라 부른다.


  샌델의 철학적 목표는 도덕성의 회복에 있다. 사실 미국에서 도덕이 부각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시대에나 도덕이 부족하다는 설명으로는 이 현상을 진단할 수 없다. 그들이 도덕을 갈구하는 배경은 자유지상주의의 전성기가 끝나가는 근래의 미국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은 그들이 대외적으로 보여주거나 주장하려고 하는 것과는 달리 공동선의 부족에 시달리는 중이다. 최근 문제가 된 여러 비극적 사건들이 미국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고 주장하는 언론의 보도에는 일면 타당성이 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서로를 묶어주는 힘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이것은 국가와 공론의 개입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독립된 자아들이 연결된 자아들로 변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도덕의 부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 2장을 읽어보면 우리는 샌델이 ‘도덕적 연대’의 구성을 역설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위한 반박된 논리는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 그리고 롤스이다. 공리주의가 반박되는 곳은 우리도 쉽게 예상하겠지만 다원성의 영역이다. 공리주의에 대해서는 자유지상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 노직도 반박했는데, 그에 따르면 공리주의는 분배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샌델이 보기에는 자유지상주의에도 문제가 있다. 그들은 ‘행운의 임의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누군 태어날 때부터 잘 생기거나 예쁘고, 또 누구는 부모가 부자이거나 스타이다. 어떤 사람은 지독한 가난을 배경으로 세상에 발을 내딛는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과연 무시해야 할까?


  롤스가 이를 반박하고 ‘차등원칙’이란 걸 내놓았는데, 이도 샌델의 비판을 받는다. 차등원칙은 ‘행운의 임의성’이 허용되는 한계를 설정한 것이다. 롤스는 최소수혜자들에게 최대 이익이 돌아가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된다면 ‘행운의 임의성’은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롤스에게는 그러한 인정을 할 최초의 집단인 도덕적 연대가 없다. 그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롤스는 분명 자유지상주의자가 아니지만 공론의 장에서 종교와 신념 등 가치가 개입될 사안에 발 담그는 것을 꺼려했다. 차라리 그런 사안이 발생하면 우리는 침묵해야만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도덕적 연대’라는 단어에서 중요한 것은 ‘연대’이다. 연대는 무언가의 신념을 토대로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 신념이 반드시 종교나 국가 등에 한정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샌델의 말을 인용해본다.


  “도덕과 확신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우리 자신을 특정한 인간으로, 즉 가족과 공동체와 국가와 민족의 구성원이자 그 역사를 떠안은 사람으로, 공화국의 시민으로 간주하는 것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도덕과 확신의 힘은 어느 정도 이러한 사실에 기인한다. 적어도 이 두 가지를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독립적인 자아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190쪽)


  분리되지 않은 개인. 이것은 사회로부터 정체성을 부여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 사회에게는 결코 낯선 개념이 아니다. 『정의』의 리뷰에서도 밝힌 바 있는데, 어떤 면에서 샌델의 공동체주의는 우리 사회의 공동체주의를 상기시키는 정도밖에 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일종의 비판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일찍부터 자유주의의 호수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공동체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제 2장에는 『정의』에서 언급된 적이 없는 한 명의 위대한 철학자가 등장한다. 바로 존 듀이이다. 그를 제 2장에서 소개한 건 순전히 샌델의 전략이다. ‘실용주의’, ‘교육자’ 등의 타이틀로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관심을 받은 적이 있는 듀이는 실용주의와 자유주의, 이 두 가지의 카드를 쥐고 당시 미국 사회를 진단했다. 샌델의 지적처럼 듀이의 실용주의과 자유주의는 그 쓰임이 우리의 비근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우선 그의 실용주의는 철학이 사람들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자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이는 철학적으로도 중요한 지적으로 당시 논쟁되었다. 또 하나, 그의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개인들 저마다의 역량을 깨닫게 하는 공동생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여기서 떠오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긴 이야기는 차치하고, 여하튼 듀이는 샌델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


  “듀이의 자유주의가 찬양하는 개인은 자신의 일과 가족, 지역공동체, 그 공동체의 정치에 참여하고, 강요나 위협, 타의에 의해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으며, 주어진 일에 몰두하는 시민이다.(216쪽)


  그러나 이미 느꼈겠지만 이는 상당히 이상적인 시나리오이다. 문제는 이것이 어떻게 실천, 혹은 실현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냉소적 비판을 견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설득력이 있다. 샌델도 두 가지 목소리를 언급한다. 그들은 첫째로 거대사회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최근 번역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행복의 경제학』이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리프킨의 『엔트로피』는 미래의 사회적 재앙을 막기 위해 소규모 사회와 지역경제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저서들이다. 이미 거대사회의 문제를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 불가역의 흐름인 듯도 하다.


  둘째로 문제시되는 건, 과연 우리에게 어떤 확고한 의지가 있어서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러한 전환에는 도덕의 개입이 불가피할 것인데, 이것이 난점이다. 샌델의 지적처럼 “덕성을 주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에 대한 샌델의 대답은 무엇일까? 그의 대답은 다분히 ‘미국적’이다. 우리에게는 해당될 여지가 미국보다 훨씬 적어 보인다. 샌델은 공동정체성이 증가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로부터 희망을 보는 듯하다. 그는 시민들은 미국의 거대정부를 “멀리 떨어진 곳의 강력한 힘”이라 여기는 동안 일종의 괴리감을 보상받기 위해 다중연고적 자아를 형성해왔다. 그는 역설한다.


  “우리 시대에 특히 두드러지는 시민 덕성은 때로는 주어진 의무를 수용하고 때로는 저항하면서 자신의 길을 협상하고,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다.(304쪽)

 

 

 

*    *    *

 

 


  우리나라의 독자들은 여기서 몇 가지 생각의 선택을 할 수 있다. 하나는 거의 직관적으로, 이 모든 논의들이 우리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나에게 『정의』에 대한 가르침을 줬던 교수도 학우들에게 『정의』가 등장하게 된 미국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개인주의와 지역이기주의 등으로 말이 많은 사회이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공동체’라는 단어를 피부로 느끼는 대표적인 국가 중 하나이다. 때문에 이런 것들에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한 그 독자는 공동체주의를 특별한 논의로 수용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혹시 우리의 잃어버린 가치를 공동체주의 논의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우리 사회의 도덕적 쟁점들을 검토해보는 방법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공동체주의의 정치철학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모습과 우리 사회의 것이 그렇게 일치하는 것 같진 않다. 공동체의 부정적 단면들이 자주 회자되는 한 그것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회의 모습이라고 보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판적 논평들이 어떠하든 간에 그 독자는 우리에게 부족한 점들을 찾고자 노력해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전자보다 더 건강한 생각이라고 본다.


  당연한 결론이겠으나, 도덕은 특유의 난해함을 갖고 있으므로 우리 사회의 판단능력을 검증해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다. 질문은 언제든지 던져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 던져질 질문들 중에는 우리 사회가 한 번도 고민해보지 못한 것들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일례로 다문화가정이라는 사회적 현안으로부터 다원주의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근래의 모습은 예전 세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열린사회를 지향해가는 과정에 있는 우리가 올바로 판단할 수만 있다면 고민은 해결되고 편견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샌델의 논의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한 가지 간과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 고민의 사례들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야만 한다는 도전적인 의지이다. 샌델의 지적처럼 미국은 정치철학의 불모지 중 한 곳이었으나, 오늘날에는 그 불명예를 씻기 위해 수많은 갑론을박으로 도덕의식을 형성해가고 있다. 사실 여기에, 즉 미국의 시민의식에 미국이 사활을 걸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비판하고 우리 역시 스스로 체감하고 있듯이 우리 사회는 공론의 장을 마련하고 그것에 대해 여럿이 모여 생각하는데 익숙하지 않고, 잘 하는 것도 아니다. 고민거리들이 생기면 편을 이룬 집단의 양적 공세를 빌려 그 순간을 넘기는데 급급한 것도 사실이다. 간단한 수준의 흑백논리도 따라서 이 사회에서는 여전한 위력을 갖는다. 이를 두고 수준이 높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샌델의 책은 방향성이 명확하지만 우리는 그가 방향을 잡기 위해 가지를 쳐나간 부분에서부터 다시금 고민을 시작해볼 수 있다. 분명 우리가 놓치고 지나간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실천이 고민으로부터 나올 것이라는데 한 치의 의심도 갖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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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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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31

 

 

  ‘내가 옳았어.’


  싯다르타는 지혜를 가르칠 수는 없는 법이라고 부처에게 말했다. 나는 그때 무릎을 치면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면지에 그간의 생각들을 거칠게 적어 내려갔다. 장자(莊子)를 공부하던 때의 기억들이었다. 노장(老莊)은 가르침[敎]을 멀리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흥분을 숨기지 않았다. 항간에 떠도는 ‘멘토링’ 저서들의 수많은 문장들, 자신의 삶으로부터 지혜를 전수하려는 연장자들의 수많은 말들이 초라하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전적으로 싯다르타의 편이었다.


  그러나 헤세의 『싯다르타』를 다 읽고 난 지금, 나는 지금 무척 어지럽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 나는 성찰, 경험, 고민, 욕망, 여하튼 여러 면에서 그저 평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재치 있게 말을 할 줄 아는군요.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똑똑하지 않도록 경계하시오!”


  부처는 왜 이 말을 싯다르타에게 남겼을까. 나는 이 말이 왜 중요한가를 곰곰이 추적하면서 누군가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마음이 번잡하다. 글로 풀어보려고 한다.

 

 

 

*    *    *

 

 

  데미안을 제외하면 나는 헤세와 만난 적이 없다. 부끄럽지만 사실 오히려 다행이었다. 나는 소설 속 싯다르타가 부처(고타마)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는 부분에서 내가 그간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고타마 싯다르타((瞿曇 悉達多). 헤세는 그를 둘로, 즉 고타마와 싯다르타로 나눴다. 아니, 나눈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싯다르타’가 당시 한 사람만 일컫는 이름은 아니었을 테니까. 여기서 나는 잠시 쉬어가야겠다며 책을 덮었다. 싯다르타가 고타마를 만나러 가는 길. 헤세가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고타마와 싯다르타의 만남은 나에게 별로 숭고하지 않았다. 큰 깨달음을 얻게 되거나[大覺], 어떤 섬광을 보거나, 신을 만나거나 하는 체험은 없었다. 다만 나는 지혜와 관련된 나의 의문을 싯다르타의 말을 통해 곱씹게 되었다.


  지혜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그건 교육이 할 수 있는 몫이 아니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식뿐이다. 그렇다면 세존(世尊)의 제자들이 세존에게서 배울 수 있는 건 깨달음과 관련된 지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별 의미가 없는 지식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오직 세존 혼자이다.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본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위대한 종교적 지도자들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자신이 아는 바를 설파하는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여기서 일종의 관계가 발생한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여기에 함정이 있다. 모르는 자들은 아는 자가 깨달음을 얻은 과정을 겪더라도 결코 아는 자의 ‘앎’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이건 아주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사실이다. 부처의 깨달음은 부처가 한 고행의 방식을 모방한다고 해서 마땅한 결론인양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 속 싯다르타가 또 다른 세존이 되는 결말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삶으로도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정리하건대 깨달음은 결국 각자의 것이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의 저마다 다른 깨달음. 그러나 그 경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 그것 하나로 단일하다.


  헤세의 『싯다르타』는 결국 헤세가 하고자 하는 말 하나 때문에 ‘종교적 성장소설’이라는 타이틀과는 무관하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된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소설. 말도 안 되는, 아니면 딜레마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만약 누군가가 ‘실패’라고 말하고자 한다면 ‘성공적인 실패’이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나의 말에 반드시 동의할 것이다. 그들은 싯다르타가 어떤 기구한 삶을 살았는지 충분히 알기 때문이다.


  “가장 내면적인 곳까지 뚫고 들어가 보도록 애써볼 터이다.”


  세존을 만나고 나서 싯다르타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자 노력한다. 다시 태어났다는 선언과 함께 1부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나를 보는 작업. 결론적이지만 이것은 범아일여의 ‘아(我)’를 성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고집스러운 집착은 예상과는 달리 싯다르타를 일상의 탐욕으로 끌고 들어가 버린다. 아름다운 여인 카말라를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사실 탐욕의 전조가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관하다. (아니면 그보다 앞서 만난 한 여인의 욕정에 싯다르타가 문득 욕정으로 응대한 것을 시점으로 봐도 되겠다.) 그는 카말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사랑을 배워보자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소.”


  싯다르타는 계획을 착실하게 밟아간다. 부유한 상인 카마스와미의 일을 도우면서 이름도 널리 알리고, 신뢰도 얻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을 모으게 되면서 그는 카말라와의 관계를 이어간다. 아마 그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남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유희로 여기며 범인(凡人)과 자신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놓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오로지 카말라만이 이 ‘범인’의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일상에의 집착이 시작된다. 헤세는 그것을 뭐라고 표현했을까.


  “정말로 실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실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정말로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자기에게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였던 것이다.”


  카말라는 이를 간파했다. 그녀는 싯다르타에게 “당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유희할 뿐, 사랑하지 않는 그의 삶은 분명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영혼에 집착하는 삶을 포기하고 그는 카말라와의 애무로 상징되는 감각의 삶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사실이 그에게는 결정적인 실수였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과 같다. 결국 싯다르타는 “흉한 모습”으로 변했다. 우리가 불안감을 점점 높이면서 그로부터 자극을 얻고자 하는 것처럼. 아니, 스스로 찢어지려는 것처럼. 쉽게 말해 그는 윤회의 덫에 걸린 것이다.


  싯다르타가 윤회의 덧없음을 깨닫게 되는 계기를 헤세는 한 마리의 새가 죽는 꿈으로 묘사해놓았다. 새의 딱딱한 시체. 싯다르타는 무가치하게 끌어온 자신의 인생을 반추한다. 그러나 아직 ‘큰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는 자살을 시도했다. 강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다. 그러나 내면의 소리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는다. 꿈으로부터의 깨달음, 그리고 내면의 소리. 싯다르타가 겪은 두 번의 반전은 헤세가 말했듯이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것이다. 우리가 비근하게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싯다르타는 “기차를 제대로 탄 것”이다.


  자살의 고비를 넘기고 강가에서 회생한 후, 싯다르타가 얻게 된 높은 가치는 바로 사랑이다.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은 여기서 한 번 쯤 헤맬 것이다. 부처는 사랑을 말하지 않았다. 사랑은 그리스도교적 가치이다. 부처는 자비를 말한다. 자비와 사랑은 다르다. 그러나 헤세는 둘을 섞는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헤세는 싯다르타를 빌려 세존 역시 사랑을 왜 모르겠는가 하고 고빈다(소설 속 싯다르타의 오랜 친구. 싯다르타와는 달리 세존을 따르는 스님이 된다. 싯다르타와 헤어진 후 고빈다는 강가에서만 싯다르타와 세 번 만난다. 실제 브라만교의 높은 인물 중 한 명이다. 고타마 싯다르타와는 활동시기가 다르다. 고빈다는 7세기 사람이다.)에게, 아니 독자들에게 말한다. 헤세에게는 사랑이 그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가온 듯하다. 흔히 말하는 고귀한 사랑이든, 아니면 세속적인 사랑이든 소설 속 싯다르타는 사랑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카말라에게서 배운 사랑은 종교적 의미로 본다면 참된 사랑이 아닐 것이다. 집착에 가까운 사랑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사랑의 고귀함을 깨달은 뒤 이렇게 생각하고, 또한 이렇게 행동하게 된다.


  “자기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싯다르타에게 사랑은 “사랑한다.”는 존재만으로 그 빛을 내뿜는 것이다. 사물과 세상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 그 자체인 것이다. 여기에 자비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 있을까?


  “내가 절망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모든 생각들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 그러니까 자살할 생각까지 품을 정도로 나락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자비를 체험할 수 있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옴을 듣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올바로 잠을 자고 올바로 깨어날 수 있기 위해서였어.”


  사랑과 자비를 구분하려는 것은 ‘단어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모조리 체험했다. 죽기 직전까지의 상황도 체험했고, 썩어 들어간 삶도 체험했다. 그런데 더러운 구렁텅이에서 싯다르타는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이 과정은 깊고 낮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깊고 낮다는 것. 그것은 싯다르타를 자연스럽게 뱃사공 바주데바와 만나도록 한다. 둘은 이미 한 번 만났으나, 바주데바가 보기에 지금의 싯다르타는 예전의 싯다르타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고빈다 역시 싯다르타를 만날 때마다 그의 오랜 친구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아직 한 가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그것은 카말라와 자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에 대한 그의 집착으로 표현되어 있다. (싯다르타는 아들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카말라와 아들을 보자마자 바로 알아낸다.)


  싯다르타는 아들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싯다르타의 아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거의 방관에 가까울 정도로 싯다르타는 아들에게 어떤 ‘가이드라인’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은 그의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를 거대한 감옥처럼 느꼈다. 다시 말해 싯다르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들을 가르치려고, 도와주려고, 혹은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다. 때문에 아들이 험한 말을 하고 떠났을 때, 싯다르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들에 대한 집착. 그것을 끊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웠던 것 같다. 사랑은 상처를 주니까. 상처가 아프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더 강해진 사랑에 매달릴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독자들은 짐작했을 것이다. 싯다르타가 아들을 보내줄 것이라는 사실을.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싯다르타는 또 다른 세존이 된다. 그러나 그는 고타마 싯다르타와 같은 세존이 아니다. 그는 다른 방법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에게서 나는 후광은 빛이라는 점에서 고타마의 것과 다르지 않겠지만 우리는 독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그가 빛나게 되었는가에 집중해야 하고, 사실 헤세는 그것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헤세가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것은 싯다르타의 비참한 삶이 우리의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싯다르타는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그것이 그와 우리의 차이이다.

 

 

 

*    *    *

 

 

 

  나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싯다르타』에 대한 나의 생각을 풀어놓고자 했다. 어지럼증이 가신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헤세가 들려준 메시지는 단 하나였으며, 소설은 해피엔딩이었고, 헤세의 메시지와는 달리 나는 뭔가를 한 건 해결한 같은 포만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이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순간 나는 다시 어지럼증에 포위되고, 한동안 비참해지게 된다. 얼마나 굴러 떨어졌고, 또 그곳으로부터 얼마만큼 기어 올라갔는지를 나 스스로 진단할 수는 없겠지만 나도 싯다르타처럼 인생의 어느 지점에 와 있고, 삶의 고도를 언젠가 체감할 것인데, 나는 과연 구렁텅이에서, 아니 윤회에서 빠져나와 어떤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인지, 이것을 멀찌감치 떨어진 채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비참함의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했다.


  나는 헤세의 작품 앞에서 진솔한 사람으로 남으려고 한다. 항간에는 이 작품이 전 세계의 청춘들에게 지대한 영향과 깨달음을 줬다고 평가하는 글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헤세라면 그렇게 말했을까. 그는 진리를 묻는 우리들에게 다만 침묵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싯다르타』는 우리를 위한 작품이 아니라, 헤세 그 자신을 위한 작품이다. 이제 독자에게 남은 것은 명확하다. 나에게로 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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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31 17: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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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4 04: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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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기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9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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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5

 

 

 

  칼비노에게 물어볼 것이 많다. 그러나 그는 내가 태어나기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현존하지 않는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비석(碑石)을 앞에 둔 기분이 든다. 살아 있는 작가들에게 시시콜콜 편지나 메일로 뭘 물어볼 성격인 것도 아닌데, 괜스레 그렇다. 죽은 자들이 남긴 질문은 파피루스에 그려진 이집트 문자 같다.


  이 이해할 수 없는 문자(작품)들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을 보면 놀랍기만 하다. ‘여전한 문제’가 존재한다는 뜻이니까. 나와 같은 기분으로 칼비노 역시 미해결의 문제를 탐구했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원제 : Il Cavaliere Inesistente)』는 그가 1959년에 발표한 <우리의 선조들> 3부작 중 가장 마지막 작품이며, 인간을 끝없이 괴롭히는 난제, 아니 난어(難語) ‘존재’에 대한 흥미로운 환상소설이다. 그는 제목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만들었다. 하얀 갑옷 속에는 아무 것도 없으나, 명령을 하고 움직이는 존재.


  “존재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힘에 의해 눈을 감고 스스로의 의식을 놓아 버리고 시간의 진공 속으로 잠겨 들었다가 얼마 후 잠들기 전과 똑같이 깨어나서 삶의 끈들을 다시 엮어 나가는 건지 아질울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사실 육체만 존재하지 않을 뿐, 의지는 존재한다. 여기서 의지만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과학적 논쟁은 차치한다. 이런 논쟁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육체 없이 존재하는 의지가 얼마나 불안한 상태일지에 대해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다. 그 상태란 쉽게 말해 공중에 붕 떠 있는 아찔함일 것이다. 부재(不在)라고 해도 좋겠다. 그런 까닭에 아질울포는 실제로 존재하는 이들과 친분을 원하면서도 특유의 거만함으로 수줍음을 가린다. 그러면서도 그는 단순하고 사무적이어서 몰두하기 쉬운 일 따위로 항상 자신이 분명하게 무언가를 인식하고 있어야만 한다. 아질울포 자체가 ‘인식’이다.


  그는 정확하다. 모든 기록을 기억하며, 또한 모든 것을 기록한다.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완벽함을 추구하고, 동작 또한 정확해서 그의 무용을 따라잡을 용장은 없다. 때문에 적군인 사라센인들에게 그는 두려움의 상징이고, 아군인 카롤루스 대제 휘하 장수들에게는 가시바늘이다. 그는 항상 명확함을 추구할 만큼 의식적으로 불안정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의 ‘실제’ 존재 자체도, 즉 관계도 불안정하다.


  칼비노는 또 다른 인물들을 연이어 소개한다. 수많은 이름을 가진 구르둘루는 근래 내가 만난 작품 속 인물들 중에서 단연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 세상 이름을 모두 가질 수도 있는 사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그는 정신병자이다. 사물과 자신을 일치시키기도 하고, 해괴한 짓, 음탕한 짓에도 도가 텄다. 아니, 사실 본능과 생각 사이의 경계가 거의 없어 그는 기상천외한 생각을 할 줄 아는 짐승에 가깝다. 카롤루스 대제가 그를 처음 발견했을 때, 구르둘루는 오리인 양 굴었고, 나중에는 말의 등에 올라타 말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가져다대고 털털 걸어갔는데 칼비노는 그것이 말의 머리인지 구르둘루의 머리인지 모를 지경이었다고 표현했다.


  랭보는 아질울포와 구르둘루의 환상적인 행보에 잠시 가려 있다가 소설 말미에 가서 자신의 존재감을 폭발시키는, 이른바 ‘숨은 주인공’이다. 랭보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적장 이소아르와의 대결을 간절히 바라는 젊은이이다. 열정이 대단하다. 그러나 그는 아질울포를 만나고 “확실히 존재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고, 난삽한 인간들보다는 차라리 “존재하지는 않으나 의식이 분명한” 아질울포가 진정한 ‘존재자’라는 역전의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 쯤 되면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들이 거의 눈에 보인다. 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복수에 대한 자신의 열정이 아질울포가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단순히 반복하기만 하는 것들에 대한 열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에 빠진다. 그러다가 ‘존재’하는 것을 의심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이소아르와 대결할 때에 “나의 적이 맞는가?”라고 자문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하려고 하는 것이 정확한 복수인지도 확신을 하지 못한다.


  이들의 행동은 아질울포의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게 묘사된다. 칼비노가 환상소설들을 쓸 때 사용한 풍자의 전략은 때론 그로테스크하기도 하다. 가령 전쟁의 참혹함이 그려지는 모습이 그렇다. 욕의 등급에 따라 보상이 달라지기 때문에 통역관이 반드시 참전하는데 그들에 대한 묘사도 그렇고, 랭보가 마주한 실제 전쟁의 모습도 그렇다. 전쟁의 시작 신호가 다름 아닌 ‘기침’이라는 구절에서는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의 모습과 그들이 곧 마주하게 될 죽음의 운명이 묘하게 겹친다. 칼비노는 전설 속의 전투들이 곱게 모셔져 있던 포장지를 뜯고, 실제 그랬을 법한 우스운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존재’라는 이 소설의 중심 테마는 우리에게 이 환상세계를 우리의 삶으로 끌어오게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4장의 시작이다. 돌연 ‘테오도라’라는 이름의 수녀가 등장해서 앞의 이야기를 쓴 사람과 이어질 이야기를 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이로써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액자소설이 된다. 그러나 테오도라가 소설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극히 드물다. 차라리 독자들은 테오도라가 칼비노 자신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테오도라는 모든 것을 꿰뚫고 있으면서 종종 여러 사건들의 의미를 평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테오도라가 글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한다는 것이다. ‘글 쓰는 수녀’라는 가상의 직함을 빌려 칼비노는 고뇌하는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해봤을 난점들을 툭툭 떨어뜨려 놓는다. 나는 미진하게나마 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인 탓에 존재의 테마 외에 별도로 테오도라의 고백을 정리해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공간을 빌려 나의 정리를 풀어놓자면 이렇다. 첫째, 테오도라는 자신이 전해들은 바와 상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 그녀의 이 고백은 거짓말임이 밝혀진다. 그러므로 나의 정리는 그녀의 거짓말에서 분리된 ‘글쓰기의 한계’만을 뜻한다. 이 거짓말의 정체는 뒤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우리는 과연 얼마만큼 경험할 수 있고, 또한 경험한 바를 얼마나 쓸 수 있을까? 일기만 해도 그렇다. 일기는 고작해야 하루의 수 천 분의 1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아질울포처럼 모든 것을 남기는 건 살인적인 일정이 될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험을 글로 옮기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고, 때문에 아무리 위대한 책이라고 해도 모든 경험을 다룰 수는 없다. 그럼에도 글 쓰는 이들은 자신의 경험이 특별히 가치 있는 것이라 여기는 전제 하에 타인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과연 그것은 얼마나 정당한 판단일까? 게다가 ‘상상’이라는 것이 더해진다면 우리는 과연 세상의 이야기들에 대해 얼마나 신뢰를 보낼 수 있을까? 이건 굉장히 초보적인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글쓰기는 영혼을 구원하는 수단으로 적격하지 않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수녀원장이 추천해준 ‘글쓰기’라는 회개 방법을 꾸준히 이어나갈 것이라 당당하게 밝힌다.) 이는 글쓰기가 단순한 이야기나 기록이 아니라, 한 개인의 수양으로 여겨질 때에 글 쓰는 이들이 갖게 되는 고민이다. 이는 실존과도 곧장 연결되므로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시화(詩畵)가 하나의 수련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지금도 “배운 것을 글로 쓰지 못하면 그건 배운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통설로 입 모아 전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를 글로 표현하지 못하면 나는 나를 잘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성립된다. 하물며 글과 신, 영혼의 관계를 고민할 수 있는 마음 상태의 사람들에게 글은 어떤 의미일까. 종교적 함의까지는 아니지만, 나 역시 글을 쓰며 나를 정화해나가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를 매일 자문한다. 하지만 이처럼 불안한 작업도 없다. 테오도라는 글을 쓰다 보면 “영혼은 사라져 버리고 없다.”고 술회했다.


  셋째, 이것은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데, 테오도라가 말하기를,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서술하지 못하며,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별 의미가 없는 일임을 고백한다. 글은 기록이 아니다. 기록과는 달리 다른 부분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글쓰기이다. 누가 어딜 지나서, 어느 마을을 통과하거나 들르는 것, 혹은 어느 성문을 지나서 또 어떤 이름의 섬까지 무슨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 따윈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때문에 테오도라는 마치 지도 위에 부대의 이동선을 그리는 장군처럼 (내가 그녀의 행동을 장군에 비유한 것을 빈 말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뒤에서 밝혀진다.) 여러 인물들이 어딜 지나갔는지를 직선과 곡선으로 빠르게 서술한 것은 따라서 글을 쓰는 과정에 대한 본질을 올바르게 짚은 것과 같다. 글을 쓰는 것은 아질울포의 기술(記述)적 엄격함과는 전혀 다르다.


  4장 이후부터는 각 장의 시작마다 항상 테오도라가 등장하고, 그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수녀원에서 힘겹게 글을 쓰고 있음을 계속 밝히기 때문에, 내가 위의 몇 문단을 굳이 거칠게 뜯어 붙여 글쓰기에 대해 서술한 것은 결코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 세 명의 인물과 테오도라의 개입으로 돌아가던 이야기가 갑작스레 빨라지기 시작한 건 랭보가 청색 갑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전사 브라다만테를 사랑하게 된 것, 그리고 그 브라다만테가 아질울포의 엄격하고 이성적이며 정확함을 사랑하게 된 것을 비롯해서, 랭보에게 또 다른 기사 토리스먼드가 나타났는데 그는 다름 아닌 스코틀랜드 왕녀 소프로니아의 아들이었고, 소프로니아는 아질울포가 예전에 구해준 처녀였다는 사실이 폭로된 시점부터이다.


  이 폭로는 소설의 전환점이다. 토리스먼드는 콘월 공작의 아들이라는 가짜 신분으로 기사 작위를 유지했다. 그것이 가짜임을 스스로 밝혔으므로 그는 기사 작위를 박탈당할 수 있다. 아질울포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알기에 소프로니아는 처녀였다. 그런데 그녀에게 아들 토리스먼드가 있다. 처녀를 구해준 것이 아니므로 아질울포의 기사 작위 역시 박탈당할 수 있다. 결국 아질울포는 소프로니아의 처녀성을 입증하겠다고 주장했고, 대제는 휴가를 허한다. 아질울포가 떠나면 브라다만테가 그를 쫓을 것이고, 랭보는 브라다만테를 쫓을 것이다. 구르둘루는 아질울포의 하인이 되었다. 토리스먼드도 자신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성배기사단’을 찾아 떠난다. 또 다른 모험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중간에 등장하는 프리쉴라의 의미는 정확하지 않다. 아마 그녀는 색정, 음란, 색욕 등의 상징일 것인데, 아질울포의 이성적인 모습에 반해 소위 ‘플라토닉’한 사랑을 발견하여 아질울포에게 경외 섞인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는 교만한 여인이다. 랭보나 구르둘루가 아질울포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임이 증명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의 또 다른 소설 『반쪼가리 자작』에도 야성의 처녀가 등장한다. 그녀는 반쪼가리 자작 중 착한 자작에게서 교화를 받는다. 그러나 그 교화는 역시 반쪼가리 성공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 처녀와 프리쉴라는 연관될 것도 같다.)


  모험의 묘사는 압축적이다. 소프로니아는 ‘팔미라 수녀’라 불렸는데, 모로코의 군대가 쳐들어와 노예로 잡혀갔다. 그리고 술탄의 새 후궁이 되었다. 계략을 낸 아질울포는 그녀를 구해 도망치다가 난파를 당해 한 섬의 동굴에 그녀를 남겨놓고 대제에게 간다. 그러던 사이 토리스먼드가 섬에 도착하고, 그는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둘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아질울포가 보게 되고, 아질울포는 자리를 뜬다. 대제에게 간 소프로니아는 사실 토리스먼드는 자신의 의붓동생이었다고 고백하고 대제는 죄가 없다며 인정해준다. 이어 결혼을 승낙한다. 랭보는 아질울포를 찾아가지만 그는 갑옷을 벗고 사라진 뒤였으며, 갑옷은 아질울포의 유언에 따라 랭보의 것이 된다. 아질울포의 갑옷을 입은 랭보를 여전히 아질울포라 여긴 브라다만테는 랭보와 관계를 멪지만 사실을 알고 난 뒤 랭보를 내차고 도망간다.


  내용 상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할 것 같은 이 중세적인 이야기는 빠르고 짧게 묘사되어 있다. 만약 독자가 칼비노를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난 것이라면 그가 너무 성기게 마무리 지으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을 읽은 이라면 이런 그의 서술 방식에 대해 불만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칼비노는 테오도라의 말을 빌려 구태의연한 변명을 하는데, 이 변명이 예기치 못한 반전이다. 테오도라는 다름 아닌 여전사 브라다만테였다!


  앞서 나는 불가피하게 괄호를 동원하여 그녀의 글쓰기에 대한 첫 번째 고백이 거짓말이라고 밝혔었는데, 사실 그녀는 모든 것을 경험했다. 여전사였으므로 저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었고, 전투와 사랑, 그리고 명상을 했다. 따라서 그녀의 글은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신뢰 있는 글이다. 그녀는 랭보를 내찬 뒤 수녀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기를 자신이 글을 빨리 전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랭보가 자신에게 왔음을 알기 때문이며, 그녀는 랭보를 곧 만나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사랑에 대한 열정이 바로 반전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자는 사라졌고, 살아 있는 자의 뜨거운 열정만이 남아 있다. 소설은 끝났고, 그녀는 분명 랭보와 만나 사랑을 나눴을 것이다. 이만한 실존이 또 어디에 있을까? (또 하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존재의 의미 중 하나는 ‘평등’인데, 이는 토리스먼드가 섬에 도착해 소프로니아를 만나기 전에 쿠르발디아라는 마을에서 성배기사단의 역겨움과 마주한 이야기에서 도출된다. 그는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오로지 ‘성배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성배기사단이 마을을 습격하는 장면에서 분노를 느꼈으며, 마을 주민들을 위해 싸웠다. 훗날 카롤루스 대제는 그와 소프로니아를 결혼시키고 쿠르발디아의 통치자로 임명했는데, 마을에 도착한 둘에게 주민들은 투쟁으로 얻은 동등함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고, 결국 둘은 백작의 높은 지위를 포기했다.) 아질울포는 프리쉴라가 교태를 부리며 사랑을 갈구할 때에 사랑의 이성적인 것들에 대해 장황하고 엄숙한 언변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랭보는 브라다만테와 사랑했고, 토리스먼드는 소프로니아와 결혼했다. 유일하게 사라진 존재는 오직 ‘존재하지 않는 자’였다.


  『반쪼가리 자작』에서도 그러했지만 칼비노는 극단의 대상들을 놔두고 가치와 의미가 대립하는 현상에서 모순을 찾아내는 작가이다. 존재하지 않는 자, 존재는 하지만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자, 존재하는데 존재하는지 모르는 자. 이성적이고 엄격한 자,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자를 동경하는 자, 그리고 전혀 그렇지 않은 자.


  우리에게는 이 모든 면들이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 소설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정확하고자 하는 사람은 실제 정확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아질울포는 우리에게 동경의 대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연민의 대상이기도 하다. 어떻게 정확하기만 할 수 있단 말인가! 육체가 없어 심해의 보행이 가능하고, 아무리 걸어도 숨 한 번 차지 않는다는 이점이 우리에게 뭐가 중요한가! 한편으로는 심지어 구르둘루의 해괴망측한 행동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랭보와 토리스먼드는 젊은 존재의 심각한 방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의 ‘한 때’, 혹은 ‘지금’이자 ‘미래’인 것이다.


  확실한 존재에는 혐오스러운 존재와 영예로운 존재가 있다. 불안한 존재는 부정하는 존재와 의심하는 존재를 거느린다.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에게 속해 있는 존재이다. 다행이도 우리의 여러 존재들을 『반쪼가리 자작』에서와 같이, 사라센인들의 대포 앞에 세워두고 정확하게 몇 등분으로 나눠 우리 앞에 대면시킬 수는 없다. 존재들에게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다. 물어보는 것은 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의 질문에 우리가 답하는 셈이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은 나의 존재가 바깥으로 나가는 것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타인의 존재와 우리의 존재가 경합하며 열정을 만들어낸다. 칼비노는 그 중 열정적인 사랑이야말로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존재의 근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뜨거워 테오도라가 소설을 급하게 마치고 독자들을 이 책에서 퇴장시킬 만큼 위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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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9 16: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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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9 23: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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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4

 

 

1

 

  나는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한다. 이것저것 잡다한 생각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에서 수많은 의미들을 찾아내는 사람. 작은 것을 볼 줄 안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작은 점으로 수축시킬 수도, 각자가 상상할 수 있을 만큼 큰 거인으로 확장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연함은 의미를 발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다채로움을 연결시키는 뛰어난 상상력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들을 동경하는 까닭은, 우리가 대체로 몇 안 되는 어정쩡한 것들만 반복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집요하다. 그들의 집요함은 가느다란 거미줄과 같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이 거미줄에 걸린 대상은 자신이 지닌 의미를 발설하기 전까지는 결코 그들의 집요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여러 거미줄로 이뤄진 의미망을 만든다.

 

 

 


2

 

  나는 그들을 좋아하므로 그들이 의미망을 만들어가는 동작 하나하나를 보는 것 역시 좋아한다. 그것은 그들의 글을 읽는 일이다. 거미줄이 글로 짜여 있다는 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글은 훌륭한 직물 재료이다. 고고학적 유물과도 같고, 범인이 남겨놓은 고유의 지문이라 해도 좋겠다.


  비유컨대, 흔적 없이 올라가는 건물은 없다. 그리고 그 건물에는 건축가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방이 여러 개 있다. 건축가는 그 방에 건축의 철학을 남겨놓는다. 그 방에 들어가는 건, 건물에 들어가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우리도 삶을 살면서 건축가들처럼 집요하게 매달리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명명되어 있다. 그것은 늘 곁에 두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아직 성취하지 못한 무엇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무언가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것에는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3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유연하기 때문에 그 일을 잘 한다. 너무나도 잘 해서 그들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영속적으로 추구되어 오는 수많은 가치들을 저마다의 언어로 정리할 수가 있었다. 그들의 언어로 된 정리는 마치 노란 종이 위의 검은 점과 같아, 그것을 보면 그것이 가리키지 않는 전체(노랑)가 보인다.


  우리의 ‘무언가’란 그들이 언어로 정리해놓은 가치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의 점으로 전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언가’는 결국 그들이 정리한 하나의 작은 점으로 소급된다. 역설적이게도 이 작은 점 하나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유연한 까닭은 그들이 작은 점 하나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모든 것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작은 것을 잊어버리진 않으므로 모든 것과 작은 것은 그들의 세상에서 시간차 없이 공존한다. 종이의 노란 바탕과 검은 점이 실제로 공존하는 것처럼.

 

 

 

4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노란 바탕 위의 검은 점만을 찾진 않을 것이다. 파란 바탕, 하얀 바탕, 그리고 심지어는 검은 바탕 위의 검은 점을 찾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들에게 전체는 매우 다양한 색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색의 수만큼,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수많은 세계를 보게 된다. 그들은 어딜 가나 작은 것에 맨 처음 집중할 것이지만 그 때마다 거대한 세계 여러 개를 발견할 수 있다.


  다양함을 아는 그들의 세계에는 맹목이라는 것이 없다. 작은 것을 볼 줄 안다는 것은 작은 것만 보는 것과는 다르다.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그 행동이 펼쳐놓을 수 있는 모든 의미와 가치를 체험한다는 것이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은 작은 것보다 더 작은 것을 보는 일이기도, 결코 작지 않은 것을 보는 일이기도 하다. 이 유연하고 놀라운 상상은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받지 못한 축복이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중 아주 적은 부류만 작은 것을 본다.


  작은 것을 보는 능력은 태생적이지만 학습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중 대부분은 작은 것을 보는 능력을 깨울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운 좋게 기회를 얻은 사람들의 대부분도 훗날 그것을 별 가치 없는 것이라 아주 쉽게 치부해버린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5


  작은 것을 보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일상에 대해 생각해보면 우리는 때때로 감상에 젖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다. 그러나 보상 받을 길이 없는 막대한 손해임을 안다면 호소를 그치고 일상에 다시 수긍하게 된다. 바로 이 선택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최대의 실수이다. 그들은 노란 바탕의 검은 점을 보면 검은 점만 보게 될 것이고, 노란 바탕을 보면 노란색만 보게 될 것이다. 둘을 동시에 보지 못하면 검은 점이 다른 색 위에 있는 것을 상상할 수도, 노란 바탕이 다른 색 점 주위에 깔려 있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다. 결국 그들은 상상의 모든 능력이 빠르게 소실되어 가는 비극적인 고통을 맛보게 된다.


  작은 것은 중요하다. 작은 것은 확장되는 세계이고,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작게 쪼그라드는 세계이다.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작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우리는 작은 것을 볼 수 없으면 큰 것도 볼 수 없다.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런데 작은 것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큰 것을 본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우리는 주변에서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들의 주장에 휩쓸려 가다보면 우리도 상상의 부재로부터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


  내가 “큰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으로 시각의 유연함을 고찰하고자 한 까닭은 아주 단순하다. 우리가 대체로 큰 것을 잘 보기 때문이다. 큰 것을 보는 것은, 여간해서 실수할 수가 없는 쉬운 일이다. 그것은 잘 보이기 때문에 잘 볼 수밖에 없다.


  큰 것만 볼 줄 아는 이들에게 큰 것의 부분들을 설명해달라고 하면 그들은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다. 작은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나눌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해서 우리가 그들의 설명을 따라가면 우리는 그들이 스스로 나눈 여러 부분들을 합해 다시 전체를 만드는 데는 실패하는 실망스러운 장면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뭘 나눴는지도 모른다.

 

 

 

6


  책을 읽는 사람에게 반가운 소식은, 사려 깊고 진지한 저자들의 대부분이 작은 것을 볼 줄 아는, 아주 잘 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에게 독서는 유연한 세계를 체험해보는 것과 같다. 작았던 세계가 커지고, 큰 세계는 작아지며, 마치 전자처럼 작은 세계와 큰 세계가 한 공간에 동시에 공존하는 이상한 일도 체험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인간의 사유 방식이 바로 이렇다. 그것은 동시적이고 복잡하다. 작은 것만, 그리고 큰 것만 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낯설고 어려울 뿐이다.


  유연함은 곧 고뇌의 최대 간격이다. A와 B라는 세계가 있다면 고뇌는 두 세계 사이를 오고 갈 수 있을 만큼 우리를 최대한 벌려놓는다. 세계의 간격을 실감하는 만큼 우리는 얼마든지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고뇌가 인류의 저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고통을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고뇌는 축복이다. 고뇌는 상상이고, 또한 유연함이며, 인간의 본성이다. 본래 갖고 있는 것을 사용하지 않고, 정신의 나태함 속에 그것을 고통이라 인식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다. 본래 인간은 고뇌한다. 그것은 멋있는 것도, 끔찍한 것도 아닌,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 중 대부분은 본성을 잊고 산다. 소수의 고뇌를 아포리아나 삶의 지침표로 참고만 할 뿐, 그들은 스스로 고뇌하지 않는다.

 

 

 

7

 

  비유컨대 인류가 멸망하는 날은 아마 지구상의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고뇌의 본성을 잃어버린 날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뇌의 포기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비참한 상황에 놓일 것이다


  획일적인 이데올로기에 침체된 사람들이 단 하나의 단어와 단 하나의 진리만을 입 모아 말하는 사회가 늘 그러했듯이, 이 비참한 상황은 고뇌하는 자를 별종, 정신병자, 혹은 광인으로 취급하도록 종용하여 결국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생각이 없는, 소위 ‘소설과 같은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


  작은 것에서 시작한 나의 고찰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다행스러운 우려로 끝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쩌면 ‘작은 것’이 가리키는 것은 우리가 우려하는 상황, 그것 단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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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4 1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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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4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크리스 임피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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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3

 

 

  얼마 전, 영화 <콘택트(Contact, 1997)>를 다시 봤다. 지금 보기에는 약간 어설픈 컴퓨터그래픽과 다소 비약 있는 반전이 눈에 거슬리는 사람도 있겠으나, 사실 그보다는 감독이 관객들에게 심어주는 호기심, 그리고 자연스레 관객들이 받게 되는 질문이 더 중요한 영화이다. <콘택트>는 외계문명과의 조우를 꿈꾸는 열정적인 과학자들을 보여준다.


  영화를 다 보고, 나는 자석처럼 이끌려 영화가 시작하는 부분으로 돌아갔다. 극중 스파크(조디 포스터)의 아역을 맡은 지나 멀론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묻는다.


  “Could we talk to moon?”


  스파크의 질문은 목성과 토성으로 이어진다. 목성과 토성에 외계인이 살 확률은 영에 가깝다. 그러나 21세기는 어린 소녀의 질문을 더 이상 실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우주과학자들은 결코 그녀를 비웃지 않는다. 그들은 당장 관측과 조사를 시작할 것이다. 과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보이저 호가 목성과 토성을 지나갔다는 사실(각각 1979년 3월 5일, 1980년 11월 12일)을 알 것이다. 스파크는 심오한 과학적 질문을 던졌다. 외계지적생명체탐사, 소위 SETI와도 관련이 있다. (영화의 내용도 미국 정부의 지원이 끊긴 SETI가 사기업들의 투자에 의존하게 된 1995년 실제 상황을 모티프로 한다.) 조만간 지구형 행성에 관한 만족스러운 데이터파일들이 축적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스파크가 정말 하고자 한 질문은 이것이다.


  “Could we talk to mom?”


  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면서, 아버지는 아무리 큰 안테나라도 죽은 엄마가 있는 곳까지는 닿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혹시 죽은 엄마와 무선으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증명된 바가 없으므로 아직까지는 “없다.”고 대답해야만 한다. 달, 목성, 혹은 토성의 누군가와 통신을 할 수 있다는 상상과 죽은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상상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후자의 것은 철학과 종교의 영역이다.


  과학은 ‘죽은 엄마와의 대화’를 위한 어떤 논리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간혹 과학의 무능력함을 논하곤 한다. 무엇의 무능력함일까? 과학에게는 억울한 일이겠지만, 인류가 지금껏 추구해왔던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답변을 과학은 내놓지 못한다. 대신 과학은 “우주에는 공짜가 없다.”, “자연은 우리에게 의미를 주지 않는다.”, 혹은 “우리는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다.” 등 생소한 결론을 잇달아 발표했는데, 사람들은 이런 답변들의 차가운 온도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치곤 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과학의 전부일까? 물론 아니다. 과학도 철학적인 질문들에 답하는데 성공했다. 과학의 방식대로 달성한 성공이었다. 과학의 성공적인 답변들은 세계의 인식을 바꿔놓기에 충분했고, 앞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다.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시작은 가장 궁극적인 탐구대상 중 하나이다. 과학은 이 질문에 답한다. 그리고 이것은 크리스 임피가 쓴 『How It Began』의 한국어 번역본 제목이기도 하다. 임피는 이 책에서 과학이 궁극의 답을 찾기 위해 어떤 힘겨운 과정을 밟아왔는가를 소개한다. 그는 복잡하고 수많은 과학적 정보들을 다루면서도 대중들이 숨 쉴 수 있는 고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노련한 조종사이다.


  이 책은 분명 흥미롭다. 그러나 지구에서 다중우주에 이르는 긴 여정을 감행하면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질문은 만만치 않다. ‘세상의 시작’은 아직도 우리가 분명하게 밝혀내지 못한 문제이다. 천재적이고 헌신적인 수많은 과학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는데도 대중들은 아직도 이 문제를 종교와 철학으로 다루는 것에 익숙하다. 복잡한 데이터들과 씨름하느니, 차라리 그 편이 쉬운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스티븐 호킹, 칼 세이건, 미치오 카쿠, 빌 브라이슨(엄밀히 말해 빌은 과학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비전공인 과학을 책으로 다루기 위해 그가 한 엄청난 양의 공부는 세인들의 혀를 내두르게 하기 충분하다. 그의 책을 국내에 소개한 이덕환 교수에게 들은 건데, 빌은 과학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시중에 나온 과학책을 무려 3백여 권이나 섭렵했다고 한다. 빌을 소개하는 강의에서 이 교수는 우리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주기도 했다. 대학생이란, 조금씩 맛보기로 공부하고 나서 뭔가 아는 척 하기 좋아하는 부류이니까.), 그리고 임피와 같은 대중적인 저자들의 노력은 전 세계에서 큰 환영을 받아왔다.


  임피는 어려운 과학을 대중의 곁으로 잡아당겨 내렸다. 독자들은 역으로 그 긴 실타래를 잡고 높은 곳까지 놀라가게 된다. 독자마다 ‘과학의 고산증’을 느끼기 시작하는 고도는 다를 것이나, 장담하건대 나처럼 교양으로, 혹은 초보적인 호기심으로 과학책을 들춰보는 독자들이라면 한 번 쯤 고산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임피는 과학의 위대함이 아니라 과학의 겸손함을 소개하는데 더 주력한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며 우주과학에 대해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알아가게 되면서 독자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들은 우주과학이 비춰주는 놀라운 세계로부터 생경함, 두려움, 경외감 등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그건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세기동안 우주과학은 많은 것들을 밝혀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훨씬 많은 것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물리학과 수학이 우주의 공통분모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우주는 지극히 낯설다. 우리가 시를 쓰기 위해 올려다보는 밤하늘은 과학자들에게 낯섦 그 자체이다. 그들은 매일 익숙한 성운과 별자리를 반복적으로 관측하지만 늘 새로운 데이터들과 마주한다.


  “자연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현상으로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데이터를 수집하게 되었을 때, 과학자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므로 상당히 당혹스러워한다. 그 중에는 애써 부인하려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과학의 힘은 데이터가 정직하고 정확하게 수집된 것이라면 반드시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결론을 뽑아내는 것에 있다. 낯선 것에 대한 도전적인 접근이다. 이러한 과학의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과학자들은 냉혈안일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데이터들과 엉켜 살면서 이런 말을 한다. 베라 루빈의 술회이다.


  “우리는 유치원을 졸업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 수준일 뿐이다.”


  겸손함의 대명사인, 이와 비슷한 뉴턴의 명언(“나는 진리의 큰 바다를 앞에 둔 바닷가에서 한 개의 조개를 주운 것에 불과하다.”)을 떠올린 이도 있을 것이다. 루빈은 “초등학교 3학년 수준”이라 했지만 사실 인류의 우주과학기술과 그간의 연구 성과는 그야말로 ‘초고속 압축 성장’을 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 성장속도는 훨씬 빠를 수 있었으나, 늘 예산이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 성장을 보고 또 한 번 오해를 하게 된다. 지구를 세상의 중심이라 굳게 믿었던 시대의 사람들처럼 그들은 혹시 우리가 우주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요컨대 ‘주인’이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러나 임피는 우리가 ‘우주의 주인’은 아니라고 못 박는다. 그저 ‘충분히 똑똑한 존재’이면 족하다는 것이다. (보이저1호에 있는 금속판에는 임피가 말한 겸손함이 인사말로 새겨져 있다. 금속판의 함의는 우리 이외의 지적문명에 대한 존경이다.)


  많은 독자들과 마찬가지도 나 역시 어떤 낯선 책을 접하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고 해야 옳다. 책이 낯설다는 것은 평소 생각하지 않는 주제가 실려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너무 많은 정보들이 실려 있어 일반적인 의미를 도출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과학책은 두 경우 모두에 해당할 수 있다. 이는 과학책의 저자라면 반드시 생각해봐야 하는 위험이다.


  다행히도 노련한 임피는 위험을 현명하게 피해갔다. 낯섦의 충격을 익숙한 비유들로 상쇄시켰고, 독자들이 의미를 도출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아예 의미심장한 문장들을 여기저기에 배치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중 하나의 의미에 집중하게 되었다. 조금 에둘러본다.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여러 의미들 중에 가장 비근하게 논의되는 건 아무래도 종교와의 관계일 것이다. 나는 진화론을 읽었다. 다윈의 원서를 읽진 못했으나 최재천과 리처드 도킨스라는 훌륭한 저자들의 도움을 받아 “진화론에 발은 담가봤다.”는 - 말 그대로 - ‘거드름’ 피울 정도는 된다. 매트 리들리도 읽었는데 그는 DNA에 관한 세계적인 저자이다. 결국 나는 영아 때부터 가톨릭 신자였던 나의 과거와 단절된 채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신론은 과학의 영향과는 무관한 또 하나의 ‘믿음’인 경우가 있다. 과학에 대한 맹신을 ‘과학(지상)주의’라고 부르는데, ‘주의(ism)’라는 단어만 봐도 알겠지만 이건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공정함을 추구하는 독자라면 본인이 과학과 종교가 앉은 거대한 시소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두 세계가 지닌 가치를 한 번씩 곱씹어봐야 한다. 진화론과 우주과학을 읽고, 그와 동시에 성경, 쿠란, 우피나샤드, 불경 등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 모두에서 가치를 찾는 작업을 하다보면 궁극에 대한 인간의 지고지순한 탐구 욕망, 그것 하나를 공통적으로 도출하게 된다.


  이 확실한 욕망은 인간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인간이 던진 질문은 우주의 끝, 혹은 신의 근처까지 먼 여행을 하고 휘어져 인간에게 돌아온다. 인류의 역사는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매번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피드백을 받는, 의외로 단순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패턴이 바로 과학과 종교이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돌아오는 답은 다를 수 있지만 그 답이 의미하는 욕망은 여전히 하나이다. 이 패턴들에서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다. 패턴을 유지하도록 하는 ‘욕망’이 중요한 것이다.


  과학책과 종교 경전을 나란히 놓고 그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는 임피가 이 책의 마지막에 남겨둔 멋진 메시지를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우주가 영원하다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보잘것없는 자신에 대해서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는 고대의 진리를 상기해야 한다. (중략) 부처님은 모든 것이 변화한다고도 말했다. 오늘 진리인 것이 내일은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우주에 대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임피는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답을 쫓는 과학의 놀라운 역사를 소개하면서도 그 마지막에 가서는 불가피한 불확실성을 토로한다. 겸손은 이렇듯 ‘역전’을 동반한다. 한껏 흥겹게 그간의 지식들을 풀어놓고 난 독자가 “우리의 여행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라고 했을 때 독자들이 느끼는 순간적인 감정. 그것은 종교를 대할 때, 우리가 신의 앞에 자신을 세웠을 때에 느끼는 무한한 겸손과 결코 다르지 않다.


  과학책과 종교 경전은 읽는 이의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고개 숙인 순간부터 우리는 욕망을 직시한다. 우주의 끝으로, 혹은 신에게로. 임피가 책의 말미에 불교와의 에피소드를 실은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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