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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2013.02.15
과학의 법칙으로 인간사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유명했던 엔트로피가 그렇다. 자동차는 석유를 먹으며 달린다. 이때 자동차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석유의 ‘실종’이 아니다. 물론 석유는 없어져 매연이 된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엄밀히 말해 석유의 에너지는 매연의 에너지로 동일하게 유지된다. 엔트로피는 이렇게 변화한 에너지 형태가 이전의 형태로 돌아가지 않음을 뜻한다. 매연이 석유가 되는 연금술은 없다.
리프킨은 이걸로 인간사, 즉 미래를 예상했다. 그러나 과학자들 중 일부는 그가 실수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엔트로피는 분자 상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영장류들을 분자 크기로 축소시켜서 자판기 커피용 종이컵에 쏟아 붓는다고 해도, 우리는 뭐가 들어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을 것이다. 과학이 다루는 엔트로피의 영역은 인간사에 비해 규모 상 훨씬 압도적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우려와는 달리 리프킨의 응용과 비유는 시기적절했다. 대중들은 과학적 엄밀함을 추궁하지 않는 대신 리프킨이 들려준 충고를 인상 깊게 들었다. 이미 태워버린 에너지는 사용가능한 에너지 형태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할 것이고, 결국 엔트로피의 천문학적인 증가로 지구는 파멸될 것이다. 그 이야기가 나온 지 벌써 30년이 지났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현대를 설명하는 또 다른 유용한 단어가 바로 ‘불확정성’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교양 삼아서라도 많은 이들이 들어봤을 것이다. 이것은 엔트로피보다 더 작은 세계를 전제로 한다. 내가 전자처럼 작다면 나를 보는 사람들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위치]와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운동량]를 동시에 알 수 없다. 자세한 내용은 너무 어려워 알아볼 엄두가 나지 않지만, 여하튼 이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사에 응용할 만한 개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확정성’이라는 단어는 매력적이다. 이 단어는 ‘불확실성’과 배다른 형제인양 대우를 받는다. ‘확정’과 ‘확실’ 사이의 의미 차도 사실 거의 없다. (확정이 ‘확실한 일’이라는 조금 확장된 의미를 갖지만 확정성을 뜻하는 영어 certainty를 우리말로는 ‘확실’이라고도 번역한다.) 이 단어가 우리에게 각별한 이유, 여타 단어들과는 달리 요즘의 우리에게 더 많이 회자되는 이유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것 같고, 실제 그렇게 살고 있다는 불안과 공포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삶을 초래했을까? 삶은 본래 불확실한 것이라고, 바로 저 단어에 기대어 위안을 받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불확정성, 혹은 불확실성으로의 사유 여행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줄 것이다. 자신이 분별력을 갖췄다고 믿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가르치려고 드는 것을 싫어한다. 삶의 불확실성에 관한 여러 진단들이 항간에 나오더라도 “그럼 대체 어떻게 살라는 건가?”라며 미간을 찌푸릴 것이다.
사실 그들에게는 불확실성의 탐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건 어떻게든 살아남는 일이다. 자신의 요술 상자에 어떤 것은 집어넣고, 또 어떤 것은 버리고, 몇 가지는 상자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내면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일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살아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마땅히 추구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믿어왔었다. 그러나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니 이런 생각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미 오래 전에 그쳤거나, 그렇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기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눈총만큼이나 질문하려는 사람에게도 따가운 그것이 날아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질문하는 것, 혹은 배우는 것을 싫어하거나, 그럼에도 누군가를 가르치려고만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라면 나는 당신에게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원제 : 44 Letters From The Liquid Modern World)』을 읽으라고 구태여 권하진 않겠다. 현대의 삶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낡은 나룻배 위의 아슬아슬한 사투와 같다는 진단, 우리가 너무 생각 없이 소비자로서의 삶에 빠져 있다는 진단, 타인에게 대한 배려가 없다는 진단 등 지금까지 들어왔던 여러 비판들이 이 책에 소위 ‘재탕’되어 있다고 불평할 사람이라면, 당신이 만약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면 당신에게 바우만은 그저 백발의 늙은 할아버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있을까?
하루에 4~5개의 편지만 읽으면서, 그러니까 많게는 고작 20~25페이지 정도의 글만 읽으면서 나는 되도록 오래 바우만의 글을 읽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를 유지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쓴 편지를 누군가가 한글로 알맞게 번역해서 나에게 44일 동안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우편으로 보내준다고 여겼다. 폭설로 우체국 업무가 마비된 일이 잦아 4~5개의 편지가 한꺼번 몰려온다는, 일종의 거짓말도 보탰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런 원인 모를, 그러나 생각하기 쉽지 않은 고통들을 겪으며 살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매 편지마다 던졌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하는 나와 한국어를 거의 모르는 바우만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나는 계속 들었고, 질문은 어느 순간 꼬리를 감췄다. 내가 할 질문을 포함해서 내가 하지 못했을 질문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44편의 편지에 모두 담겨 있었다.
나는 바우만의 편지에서 중요한 것 같은 부분들을 발췌해둔, 노트로는 4장을 꽉 채운 정리본을 지금 키보드 옆에 두고 있다.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나는 이 책을 4일 전에 다 읽었고, 그간 도대체 무슨 말을 써야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바우만이 들려준 이야기는 많았다. 키워드들 역시 적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아주 긴 복문을 즐겨 사용하는 학자이고, 때론 재치 있는 하나의 현학적 비유만으로 3~4개의 문단을 너끈히 쓰곤 한다. 때문에 다시 읽어보더라도 예전의 정리들에서 내가 느꼈던 바를 정확히 상기시키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키워드, 개념, 혹은 바우만의 긴 문장들이 버티고 있다 하라도 이 늙은 학자가 독자들에게 정확히 지적해주는 우리의 모습은 별 어려움 없이 발견할 수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을 덮고 잠을 청할 때마다 내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했던 속말은 “내가 이 정도로 유난스럽고 청승맞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무기력한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나?”하는 의구심이었다. 딱히 아니라고 잡아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내가 주체적인 삶을 산다고 계속 주장했다.
이것은 새삼스럽지만 큰 갈등이었다. 이 갈등은 독서의 본질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독서란 독자가 저자는 생각하거나 행동한 것을 자신은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 즉 일종의 방향성(저자에게서 독자로)을 갖는 이동을 전제로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막연하게 저자의 견해에 동조하는 건, 그것 역시 독자가 할 노릇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독자는 저자에게 확신을 갖게 되며, 독서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왜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가?’ 나는 바우만의 위력이 경제위기와 소비지상주의를 설명할 때 가장 강력했다고 느꼈다.
읽어본 사람들은 분명하게 공감할 것인데, 바우만이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언급하면서 강조한 것은 우리가 자꾸만 뭘 사려고 한다는 것이다. ‘쇼핑’, 아니 조금 더 점잖게 멋을 부리자면 바로 그 ‘소비’라는 행위가 뭐 그리 대수로운 것인가? 이런 질문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약간의 볼멘소리와 함께 즉각적으로 튀어나올 것이다. 그러나 바우만이 지적하는 것은 ‘소비’라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뭘 사고 그 물건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학자가 보기에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쉽게 사고 그냥 버린다. 과잉과 낭비는 형제지간인 것이다. 나는 바우만이 신용카드와 대출회사와 관련해서 “펌프에 마중물을 부어 작동시키듯이”라고 비아냥거렸던 비유에서 무릎을 쳤다.
소비지상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지금도 인터넷에 접속하면 온갖 팝업창들이 자신들의 상품을 사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걸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저 회사들이 겉으로는 사달라고 애원하거나 합리적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당신은 우리의 물건을 살 수밖에 없다.”고 확신에 차서 웃고 있다는 것, 그리고 소비가 곧 애국심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재미있는 비유를 또 한 번 보여준다. 그는 쇼핑은 치료, 매장은 약국, 그리고 우리는 환자가 된다고 했다. 불안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든 사야 한다. 악순환은 반복될 것이다. 이것은 ‘불편의 불편’, 즉 메타-불편(metadiscomfort)의 원리 속에서 무한히 진행된다. 우리는 여기서 리프킨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세태는 유대관계도 약화시킨다. 쉽다는 것은 빨리 할 수 있다는 것과도 같기 때문에 당연히 현대사회의 속도는 빠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심지어는 기억과의 유대관계에서도 빠르게 이탈하는 중이다. 그저 앞을 보라고, 우리는 도무지 그게 어딜 보라는 건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결국 그렇게 하라는 소비지상주의의 달콤한 명령에 복종한 채 그냥 보라는 곳을 바라보는 중이다. 은연중 강요당한 곳을 바라보는데 어떻게 확실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확실한 삶을 살 수 있다. 그것이 그저 ‘언어의 논리성’이라는 실험관에 담겨진,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포름알데히드 속 개구리 시체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바우만은 ‘로나’라는 여인의 삶을 예로 들어준다.
그녀는 픽션 속 인물이지만 가능성 있는 삶의 궤적을 보여줬다. 배우자마저 상품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접하던 그녀는 밑바닥 인생인 마약중독자의 남편을 구하기 위해 소비시장의 ‘상인’들이 봤을 때에 그냥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걸 기꺼이 택했다. 확실한 삶은 결국 대부분이 봤을 때에는 몹시 쓸모없는 삶이고, 결코 행복한 삶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겉보기로는 측정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를 담고 있다. 나는 ‘로나’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굴려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울컥 솟는 걸 느꼈다.
바우만이 책의 마지막에 붙인 세 개의 편지에 남겨놓은 인간상의 가능성을 독자들은 아마 가장 인상 깊게 볼 것이다. ‘루시퍼 이펙트’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유명한 ‘평범한 악’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타인과의 유대관계를 맺고자 할 때 걸림돌이 될 만한 불확실성을 든든하게 지원해주고 있다. 그래서 바우만은 우리의 인간성이 지닌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43번째 편지에서 “우리는 예술가이다.”라고 주장한다. 타인의 모방을 거부하며 자율적이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우리 특유의 ‘성격’을 근거로 말이다. 나는 이를 두고 지나친 낙관이라 여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44번째 편지 때문이다.
시지포스와 프로메테우스. 둘 모두 인간에게 의미 있는 신화 속 인물이다. 그리고 카뮈 역시 우리의 기억 속에 있다. ‘아름다움과 굴욕적인 것의 사이’, ‘태양과 고통 사이’에서 걷는 이 철학자는 우리에게 반항을 가르쳐준다.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리는 운명적 굴욕을 수용[시지포스]하면서도 저항하는 것[프로메테우스]. 이 쯤 되면 독자들은 바우만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44편의 편지에서 우리의 치부를 거침없이 드러내 때론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면서도 끝내 어떤 위로와 대안을 주려고 했는지 눈치 챘을 것이다.
“반란과 혁명, 자유를 향한 노력들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에 필연적인 측면들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존경할 만한 추구들이 폭정으로 끝나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러한 추구들에 한계를 설정해서 항상 주시해야만 한다고.(389쪽)”
반항하라. 그러나 반항이 미쳐 날뛰게 내버려두지 마라. 이것이 바우만의 메시지이며,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해 그동안 그렇게도 고독하고, 그러나 사실은 고독을 잃어버린 채 고독감만을 느껴왔던 단 하나의 이유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