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읽다 - 신선의 껍데기를 벗어던진 인간 장자의 재발견
왕보 지음, 김갑수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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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6



  큰 수레가 다가오고 있다. 처음에는 겁을 먹었지만 갈수록 많은 것을 배우고 있기 때문에 잘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코앞까지 굴러온 수레를 있는 힘껏 밀었다. 그러나 붙어보기도 전에 수레바퀴에 처참하게 짓눌려버렸다. 수레바퀴는 너무나도 컸고, 수레바퀴를 밀어보겠다고 호기롭게 덤빈 상대는 사마귀였기 때문이다. 이를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 한다. 옛날에 '안합'이라는 현자가 있었는데, 그가 '거백옥'이라는 사람에게 가서 조언을 청했다. 안합의 고민은 자신이 새로 교육을 맡게 된 태자가 성품이 워낙 포악하다는 것이었다. 거백옥은 걱정하는 안합에게 사마귀의 예를 들어준다. 뛰어남을 뽐내는 순간 태자가 안합 당신을 죽일 것이니 경계하십시오. 안합은 기뻐하며 돌아갔을 것이다. 잔인했던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정치판에서 살아남으려면 큰 수레바퀴를 피하는 사마귀가 되어야 했다.


  나에게는 이 사마귀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배울 기회가 있었다. 마지막 학기를 남겨뒀다는 감상에 젖어 지난 대학생활을 돌아보면 사실 별로 인상에 남을 만한 공부는 하지 못했다. 대학에 실망한 이유도 있겠고, 대학공부를 무척 게을리한 이유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별 볼일 없게 생긴 수많은 자갈들이 즐비한 개울에서 아주 소중한 자갈 하나를 손에 쥔 것처럼 두 개의 단어를 대학에서 얻었다. 그 중 하나가 장자(莊子)이다. 사실 학점 때문에 한 학기 커리큘럼에 그냥 껴넣은 과목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기말 시험지에 장자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거의 모든 명사나 주요 문장을 한문으로 적어서 제출했다. 시험공부할 시간의 절반을 한문 외우는데 썼었다. 그만큼 한 학기 동안 장자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내가 20대에 만난 최고의 사상가다. 이런 생각에 이르니 30대에는 또 어떤 사상가가 마음 속에 자리잡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이제 사설은 거두절미하고, 다시 사마귀 이야기를 좀 해보자. 당랑거철은 여러 문헌에 나오지만 장자(莊子)의 천지(天地)편에도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장자'하면 호접몽 정도로 기억할 것이다. 나 역시 강의 전에는 그랬다. 그러나 호접몽은 아주 짧게만 언급된다. 장자를 읽어보면 그가 어떻게 현실세계를 바라봤는지, 문자 그대로 '인간세(人間世)'를 어떻게 바라봤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절절하게 다가온다. 왜 장자는 현실을 절절하게 논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현실을 비관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학자들까지도 장자의 비관적인 시선을 예로 들면서 그를 서양의 니힐리즘과 묶는다. 어쩔 수 없이 뭘 해야 한다고 누군가를 설득해야 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말야." 이 문장의 단어 하나가 장자에도 나온다. 바로 '부득이(不得以)'이다. "멈출 수 없다."라는 뜻이다. 장자는 거스를 수 없다면 저항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당랑거철도 부득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 둘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에게 장자는 디스토피아에 항복하는 초라한 사상가 정도로 비춰질 것이다.


  차라리 이러한 장자의 모습보다는 굴원(屈原)이 더 멋지지 않은가? 초(楚)나라의 대부였던 굴원은 간신의 농락에 넘어간 왕에게 애국했기 때문에 눈엣가시로 여겨져 양쯔강 이남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그는 '창랑(滄浪)'이라는 거센 물살에 몸을 던졌다. 마침 늙은 어부가 막 물에 뛰어들려고 하는 굴원에게 왜 그러냐고 묻자, 굴원은 이렇게 대답한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노부이시여, 창랑의 물이 맑으면 저의 갓끈을 닦겠습니다만 창랑의 물이 더럽다면 저의 발을 닦겠습니다. 어부는 물이 더러우면 같이 더러워지면 된다고 조언했으나, 조언이 어찌 됐든 간에 굴원은 창랑으로 투신했다. 그 날이 5월 5일, 단오이다. 중국에서는 이 날이면 곡식을 강물에 뿌린다. 물고기들이 굴원의 시신을 쪼아먹지 못하도록 말이다. 굴원의 지조와 애국은 한문문화권의 많은 문인과 정치인들에게 귀감이 됐다. 그러나 내가 읽은 장자는 다름 아닌 늙은 어부였다. "대부님, 물이 더러우면 대부님께서도 함께 몸을 더럽히시구려." 장자가 거백옥의 입을 빌려 안합에게 한 조언과 똑같다.


  장자는 생각이 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권력에 가담하려면 권력에 물들어야 한다는 치졸한 '정치의 생리'를 조언으로 내세웠다는 것이 전혀 믿겨지지 않는다. 그가 「인간세」에서 한 말인데, 문단의 전문을 한 번 옮겨보겠다. 이 역시 거백옥이 안합에게 한 조언 중 하나이다.


  "무릇 말을 사랑하는 사람은 광주리로 말똥을 받아내고 대합조개의 껍질로 말오줌을 받아냅니다. 그런데 어쩌다 모기나 등에가 달라붙어 있어서 갑자기 말등을 때리면 놀란 말은 재갈을 끊고 머리를 뒤흔들며 사육사의 가슴을 걷어차 부숴버리기도 합니다. 이는 말을 사랑하는 뜻은 지극하지만 말은 때때로 그 사랑을 잊기 때문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夫愛馬者,以筐盛矢,以蜄盛溺,適有蚊虻僕緣,而拊之不時,則缺銜毀首碎胸。意有所至而愛有所亡,可不慎邪)"


  사실 인간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가치는 고대의 사상가들이 하늘과 땅, 그리고 우주, 혹은 초월자를 논하면서 뽑아낸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하다. 국지성 호우라고 비유하면 괜찮을까. 장자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비관적인 현실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라고 숨김없이 말했다. 그러나 추측해보건대 아마 누군가가 장자에게 현실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고, 장자는 저런 식으로 대답해줬던 것 같다. 하지만 장자의 진짜 가르침은 구구절절 흘러가는 「인간세」가 아닌 「소요유(逍遙遊)」편에 있다. 인간세는 현실의 비관을 들여다보는 현미경이라 할 수 있다. 그곳에서 장자의 비관을 따라가다가 갑자기 망원경인 소요유를 보면 비관적 현실로부터 멀리 날아오른 장자의 사유를 음미해볼 수 있다. 장자가 사유를 멀리까지 띄울 수 있었던 힘은 '비어 있는 마음', 즉 '허(虛)'이다. 배운 것도, 깨달은 것도 버리는 경지가 '허'이다. 유교와는 이 지점에서 전적으로 반대된다. 유교는 꽉찬 사람을 좋아한다. 하지만 장자는 비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장자』에서는 빈 그릇과 빈 배가 강조되고, 겉모습을 상관하지 않는 신체장애자들, 예컨대 인기지리무신(절름발이에다가 꼽추에다가 언청이), 옹앙대영(목에 항아리처럼 큰 혹이 달린 사람) 등이 등장하여 고민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일화가 많이 있다. 때문에 「인간세」의 일면만을 보고 장자를 니힐리즘 철학자라고 규정하는 건 너무 섣부른 진단이다. 장자의 진면목은 현실을 통째로 역전시키는 힘에 있다. 장자는 그런 사유를 정말 잘하는 철학자였다.


  「소요유」는 그 자체로 풍부한 비유가 담긴 기이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장자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 공자는 자신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학습(學習)'이라는 단어를 맨앞으로 빼냈다. 「소요유」는 장자가 우리에게 건네는 첫 인사이다. 짧게 요약해보면 이렇다. 옛날에 북쪽 검은 바다에 물고기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곤(鯤)이었다. 엄청 큰 이 물고기는 붕(鵬)이라는 이름의 새가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붕의 그 '붕'이다. 붕은 남쪽으로 간다. 즉, 북쪽의 곤이 붕으로 변신해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장자는 그 새가 날기 위해서는 마치 큰 배를 띄우기 위해서 많은 물이 쌓여야 하는 것처럼 날개 밑에 바람이 두텁게 쌓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적후(積厚)'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붕이 날기 위해서는 바람이 많아야 한다. 붕을 사람에 비유하고, 바람을 우리가 도야해야 하는 인격, 혹은 장자가 말하는 도(道)라고 생각해보면 「소요유」에서는 「인간세」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장자의 광대한 세계관을 볼 수 있다. 장자 자신도 그런 생각을 매우 큰 것, 즉 현실의 논리가 되기에는 너무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물고기 '곤'과 새 '붕'의 등이 몇 천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크고, 붕이 날아오르는 높이는 무려 9만 리나 된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장자는 현실에서 날아오르기 위해 권력싸움의 모든 걸 털어버리는 것, 즉 '비우는[虛] 것'을 강조했다. 비록 정말 조언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권력에 물들라고 말해줬지만 말이다. (덧붙이자면 장자가 중니(仲尼), 즉 공자의 입을 빌려 공자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던 안회에게 가르친 '비움'의 조건은 거백옥의 입을 빌려 안합에게 한 조언보다 훨씬 장자답다. 하지만 그 '비움'은 이곳에 적기에는 너무 분량이 많아서 생략했다.) 반면 「소요유」에서는 날개 밑에 바람을 '쌓아야[積]' 한다고 말한다. 비우는 것과 쌓는 것은 엄연히 다른 행위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우리는 현상을 정확히 둘로 나누려는 못된 습관을 갖고 있다. 이러한 습관은 동양철학이 서양철학에 흡수되면서 지적된 것이지만 사실 현대과학의 놀라운 발견을 통해서 서양 스스로가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현상은 이어져 있다. 장자가 그걸 몰랐을리는 없다. 장자에게 비우는 것과 쌓는 것은 연속되는, 혹은 동시에 발생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장자에게 있어 철학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은 그 유명한 호접지몽이 나오는 그의 「제물론」 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생략하겠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是]'과 '저것[彼]'이 동시에 생겨난다는 사상이다.) 밭에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는 잡초를 뽑아야 하는 것과 같다. 다음 해에 수확하기 위해서는 가을의 열매를 거둬들여야만 한다.


  「인간세」에 대한 오독이 장자를 이해하는데 있어 방해가 되는 사례가 너무 많기 때문에 나는 「인간세」에서 시작해 「소요유」로 거꾸로 읽는 방법으로, 학기가 끝난 후 다시 그간 배웠던 것을 복습했었다. 그리고 교수의 추천으로 산 왕보의 『장자를 읽다』를 나란히 놓고, 강의에서 다루지 않았던 구절들까지 곁들여 읽으면서 전체적인 '장자'라는 큰 그림을 그려보려고 나름 끙끙 앓은 적도 있었다. 벌써 지난 겨울방학의 일이다. 한 겨울의 얼음판 위에서 크게 넘어지듯 나는 장자를 읽을 때마다 늘 삐그덕거렸다. 아마 누가 그 모습을 봤다면 난 정말 창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자는 가슴을 따뜻하게 해준다. 장자를 읽고 있으면 왠지 고향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기분이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잔뜩 맞고 있는데,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더니 그 안에 따뜻한 손난로가 들어 있는, 그 느낌이다. 장자가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니, 주변이 춥다는 것을 알 것 같다. 더불어 장자가 위안이 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는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나'를 바꾸려고 한다. 세계는 크지만 우리의 세상은 작다. 우리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세상을 놔두고, '나'를 세계만큼 크게 만드는 것이 장자의 '프로젝트'이다. 나는 이런 적극적인 모습이 발생시키는 열을 느낀 것이 아닐까 싶다.


  사마천은 장자가 옻나무 언덕을 관리하는 관직에 있었고, 짚신을 엮어 팔았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추정컨대, 장자는 굉장히 가난했을 것이다. 그의 행적은 『사기』에서도 별로 눈에 띠지 않을 정도로 (그것도 혼자 언급된 게 아니라 한비자랑 엮여서 기록된 것이다.) 초라했다. 인간의 역사는 그를 그렇게 봤다. 그러나 왜 우리는 오늘날에도 "장자, 장자"하며 그의 나비와 꿈을 운운하고, 도저히 머리를 굴려봐도 잘 모르겠을 '도(道)'와 '허(虛)', '덕(德)' 같은 것들을 언급할까. 도가(道家)는 노자(老子)의 "감춰진 덕"인 '현덕(玄德)' 때문에 흔히 검은 이미지로 회자된다. 나는 장자를 그 검은 도화지 위에서 뜨거운 열을 내는 한 줄기 빛에 비유하고 싶다. 자신의 생각과 정반대되는 공자를 자신의 이야기 속에 끼워넣는 위트를 지닌 사상가, 온갖 자연과 사물에서 나는 소리를 묘사하면서 소리를 내는 '바람'에 대해 논한 낭만적인 사상가, 도살자가 칼로 소고기를 뼈에서 도려내는 장면에서 자연의 길[天里]를 비유해냈을 정도로 관찰력이 뛰어난 사상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상을 붙여 항간을 비판한 마음씨 따뜻한 사상가. 이런 사상가라면 살짝 마음을 기대도 되지 않을까. 내가 지금까지 읽은 『장자』 중 가장 오래 마음에 새기고 싶은 구절이 「덕충부(德充符)」에 있어 그걸 옮기고 글을 맺고자 한다.


  "그러므로 덕이 뛰어나면 겉모습은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어버리니, 이것을 정말 잊어버렸다고 한다.(故德有所長而形有所忘, 人不忘其所忘而忘其所不忘, 此謂誠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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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
크리스 임피 지음, 박병철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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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4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간다고들 한다. 두 가지에 있어 재밌는 표현이다. 하나는 정신이 정말 먼 곳까지 날아가 버릴 정도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멀리 날아간 것일까? 약 250만 광년이다. '타임머신'이라는 단어, 혹은 '상대성 이론'이라는 단어가 항간에 널리 퍼지면서 빛의 속도가 얼마인지는 사람들이 대체로 알고 있다. 그 빠른 빛이 250만 년을 날아간 거리는 km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멀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보는 안드로메다 은하의 빛은 250만 년 전의 것이다. 이를 바꿔 말하자면 그 당시 지구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가 우리의 모습으로 변할 때까지 달려온 빛이 오늘 우리가 보는 안드로메다 은하의 빛이다. 사실 이 정도 단위가 되면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로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다. 안드로메다로 간다는 표현이 재밌는 두 번째 이유는 이거다. 시쳇말로 "정신줄을 놓는다."고 하는데, 우주는 그 무시무시함과 황홀함 외에도 규모 면에서 우리에게 전혀 익숙하지가 않다. 농담으로 이야기를 꺼냈으니 하나 더 해보자면, 우리의 정신이 굳이 안드로메다로 갈 필요는 없다. 안드로메다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안드로메다 은하와 우리은하, 즉 은하수는 약 30억 년 후에 충돌한다. 아니, 여기서 '충돌'은 과학적 표현이라기보다는 타블로이드 신문에서나 할 법한 표현이다. 두 은하가 서로 얽혀서 찢어지는 격렬한 춤을 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겠다. 30억 년 후, 지구의 밤하늘은 지금보다 더 밝을 것이다.


  나는 우주를 동경하면서 여러 다큐멘터리, 서적,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의 도움을 받아왔다. 전공은 아니기 때문에 늘 어깨 너머로 듣고 용어를 쉽게 잊어버리는 편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우주의 사진을 바라보는 마음은 한결같다. 우주는 나에게 '겸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무심한 우주가 나에게 그걸 선물한 것은 아니다. 내 안에서 발현된 어떤 성향일 것이다. 그런데 이 겸손은 종교적 겸손과는 좀 다르다. 종교가 주는 겸손은 신에의 복종, 즉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지만 우주적 겸손은 오히려 그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규모 면에서 상상을 뛰어넘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표현대로 우리가 하루살이가 되기 때문에 생기는 압도가 그 겸손의 근원지이다.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과 끝내 알아내겠다는 호기가 교묘하게 섞여 있는 것, 그것이 인류가 우주를 대하며 갖게 되는 오만 가지 생각의 공통점일 것이다.


  지구에서 우주로 던지는 질문은 지구인의 근본적인 물음들에서 크게 벗어나거나 혹은 뿌리를 흔든다. 그래서 의미가 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한 질문은 SF영화나 만화의 허무맹랑한 거짓말 정도로 여기겠지만 사실 그런 질문은 과학자들이 하는 것이다. 가령, "화성이나 혜성의 파편에서 지구의 생명이 시작되지 않았을까?(포자 가설)"라는 질문이나,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는 거대한 얼음지각판이 있는데, 그 밑의 바다가 존재한다면 그곳에서 외계 생명체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이는 1977년 지구의 해저열수공 탐사 계획이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열렸을 때, 태양열에 의존하지 않는 생명체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된 이후 급속도로 불붙은 질문이다.)" 같은 대담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이는 모두 지구에 기초한 과학적 근거를 우주로 확장시켜 대답을 얻고자 하는 전문적인 시도이다. 항간에서 UFO를 쫓을 때, 과학자들은 SETI 프로젝트로 외계문명의 존재 가능성을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실측을 통해 현재 수신되는 외계 전파가 있는지 자료를 수집한다. 이는 영화 『콘택트』에서 나온 픽션에 그치는 내용이 아니다.


  우리의 고전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질문을 우주에 비춰보는 것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에서 벗어나 (약간은 그 향을 지닌 채로) 과학적인 내용으로 옮겨가고 있다. 저 먼 데모크리토스에서부터 오늘날 그 유명한 스티븐 호킹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추적해볼 수 있다. 천문학자들은 현대과학과 최첨단기술의 최전선에 서서 지구 밖으로 눈을 돌린다. 지구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허블 우주망원경은 우리가 그토록 찾고자 하는 우주의 비밀을 이미지로 전송해준다. 허블은 성운들 사이에서 아기별이 탄생하는 모습을 적외선으로 찍어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놀라운 친구이다. 보이저 호가 한 때 아홉 번째 태양계 행성으로 우리의 관심을 받았던 명왕성의 궤도마저 벗어나 저 멀리 오르트 구름 사이로 들어가는 중이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금성의 대기로 들어간 소련의 베네라 7호는 금성의 엄청난 대기압을 몸소 체험하다가 35분 만에 통신이 두절되었다. 카시니 호에 붙어 있던 탐사선 하위헌스 호는 목성의 대표적인 위성 타이탄에 착륙해 그 놀랍고도 끔찍한 위성의 모습을 전송해줬다. 지상에서도 신비의 발견은 계속된다. 우리는 오늘날 전 우주의 95%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우주의 끝을 따라잡더라도 결코 우주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과학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어둠이 죽음과 연결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죽음을 문득 떠올리게 되는 까닭 말이다. 큰 단위와 아른거리는 먼 물체는 우리에게 어떤 한계,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경계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의 호기심이 임계점에 다다르면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게 바로 공포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놀랍다. 자신도 결국 죽게 될 처지이지만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죽음, 혹은 종말을 놓고 고민한다. 죽음은 공포 그 자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호기심으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죽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은 끝난다. 우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새롭게 시작된다. 조금 억울할 수도 있다. 우주와는 달리 우리는 무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이 영원하길 바란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나를 이루고 있던 물질들이 대양과 공기, 혹은 바다로 들어가 순환하여 새로 태어날 아기의 분자를 이루게 된다. 이걸 조금 더 넓게 생각해보자. 내셔널지오그래피의 다큐멘터리인 《The Journey To The Edge Of The Universe》에 보면 우리 몸이 '별들의 핵폐기물(stellar nuclear wastes)'로 이뤄졌다는 표현이 나온다. 우리가 우주의 일부인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가 죽음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순환'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 않을까?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옛사람들의 말은 생각보다 '우주적'이다. 만약 이런 이치를 받아들이기가 거북하고 두렵다면 나는 한 권의 책을 권장하고 싶다. 크리스 임피의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원제 : How It Ends)』이다. 이 책은 크리스의 2부작 중 하나로 다른 한 권은 (이미 눈치 챘겠지만)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날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과학자들은 대개 위트가 넘친다. 그러나 그냥 재밌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부 과학자들은 리처드 도킨스처럼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여러 굵직하고 예민한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주로 'Edge'에 기고하는 과학자들이 그런 문제들을 따지는 걸 좋아한다. 샘 해리스처럼 과학과 도덕을 연결시켜 과학에 기초한 도덕을 제시하려는 급진적인 과학자들도 요즘 대세다. 판도를 그려보자면 도킨스는 이제 고전이 되었고, 해리스가 그의 바통을 넘겨받은 모양새다. 그들의 글을 읽는 건, 사실 종교보다는 과학을 존중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도 쉽지 않다. 종교나 철학을 배제하더라도 기존의 도덕관념이 저항하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리스는 어조가 강하지 않은 과학자다. 독자들이 어렵게 느끼겠다 싶으면 문단의 마지막을 위트 있는 비유로 곧잘 마무리하곤 하는데, 이게 큰 도움이 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간과하거나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던 근원적인 문제들을 지구 바깥으로 끌어낸다. 크리스는 우주생물학의 권위자다. 이런 과학자들은 외계 생명체의 가능성을 주로 연구한다. 1970년대 이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신생 학문이다. 때문에 크리스가 말하는 '세상의 끝'은 생물학적 현상인(이걸 행성이나 항성의 현상으로 이해하면 좀 어긋나겠는데) '죽음'을 우주적 단위로 끌어올린 모습이 된다. 나갔던 문제들이 다시 우리의 곁으로 돌아오면 어떤 모양이 될까? 독자의 몫이다.


  아무래도 과학책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암기할 목적이 아니라면 전문용어들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결국 우주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아니 우리가 우주에서 찾아낸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이런 책을 읽는 좋은 방법이다. 가령, 복잡한 우주와 생명을 연구하는 현대의 과학은 고전적인 이원론의 붕괴를 가져왔는데,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고대종교들이 이원론적이었다는 건 누구나 안다. 육체와 정신의 분리 말이다. 이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나는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에서 읽은 바 있는데, 그는 줄기세포 연구 반대론자들을 반박할 때, 어디서부터가 생명이고 어디서부터가 생명이 아닌지를 나누는 사고 자체가 문제라고 했었다. 그러면서 특유의 어조로 종교적 폐단을 언급했다. 크리스가 불교의 업보, 즉 카르마를 예로 들면서 이원론을 은근슬쩍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내가 인상 깊게 들은 한 교양강의의 교수도 이 업보에 대해 비판했었는데, 그는 "쥐의 업보라는 것이 있을까? 쥐에게 도덕이라는 것이 있을까?"라고 우리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 즉 이원론을 배제하는 패러다임에서는 경계가 해체된다. 나는 지금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는 죽음의 판정에 대한 여러 사례들을 들려주는데, 그로부터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죽음과 삶의 이원론적 판단은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72~73쪽에 언급된 세포자살기능인 apoptosis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섬뜩하다.) 우리는 이 책에서 우주적인 죽음에서 나의 죽음으로 회귀하는 첫 번째 여정에서부터 따끔한 충고를 듣게 된다.


  이원론을 배제하려는 크리스의 입장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삶과 진화를 이야기해야 했다. 그가 진화의 여러 학설들과 연구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은 매우 흥미롭다. 이런 내용이 책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이야기의 이면에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예측도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인간의 진화가 거의 정지된 상태라는 학설에서부터 미래에는 인간 vs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 기계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근거들, 더 나아가 외계문명이 존재할 가능성을 계산한 드레이크의 방정식 등을 통해 인간이 미래에 조우하게 될 여러 상황들, 그리고 재앙들도 언급되어 있다. "인류의 재앙 최악의 시나리오 Top. 10" 과 같은 제목으로 별로 무겁지 않게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들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들도 약간씩 언급되면서 죽음이 '나'의 죽음에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가령, 약 75억 년 후에는 태양이 적색거성이 되어 지금보다 250배 크고 2700배 밝아지는데, 이때 지구와 화성은 아예 잡아먹힌 뒤이기 때문에 크리스는 해왕성의 가장 큰 위성인 트리톤에 미리 부동산을 구입해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건 농담이다. 크리스는 다음 사실을 슬쩍 빼버렸다. 천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지구와 달의 관계와는 달리 트리톤은 해왕성이 자전하는 반대 방향으로 공전하기 때문에 해왕성의 엄청난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지금도 열심히 갈라지고 부서지는 중이다. 부동산을 구입해둔다고 하더라도 그 땅이 산산조각나면 누가 보상해줄까?


  나만 그런 것은 아니리라. 우주의 여러 모습, 특히 종말과 관련된 여러 시나리오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나는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런 감정이 나 자신에 대한 철저한 속임수일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겠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준비단계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미래에는 생물학적 한계가 극복되어 철학에서 말하는 H+, 즉 Transhumanism으로 마치 니체가 말한 '초인'과 비슷한 존재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영화 《가타카》는 그런 미래상을 언급할 때 자주 인용되는 픽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기술의 성장이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있다는 안도감, 혹은 인체 냉동기술로 수 백 년 후에 깨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 주는 안도감이 아니라, 내가 우주의 일부가 된 것 같은 상상력이 내게 주는 안도감, 어떤 일체감 같은 것이 바로 내가 느낀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대로 세상이 어떻게 끝나는가를 열심히 파헤치다보면 크리스가 그의 다른 책에서 논한 세상은 어떻게 시작하는가를 자연스럽게 들여다보게 된다. 객관적으로 말이다.


  둘은 하나다. 2호선과도 같다. 물론 한 바퀴를 돌면 예전의 나는 없고 나에게서 흩어진 분자들로 구성된 미래인이 그 역에서 기차를 잡아타겠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서운함을 주기만 하는 건 아니다. 이 책은 거대한 순리에 대한 유머러스한 소개서와도 같다. 그리고 우리에게 되묻는다. "그것은 정말 끝나는 것인가?" 이 책의 옮긴이도 책을 번역하면서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죽음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는 소극적인 자세보다, 죽음의 원인과 결과로부터 그 필연성을 이해하는 적극적인 사고를 하는 편이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들지 않을까.(p.414)" 옮긴이가 말한 전자의 자세는 우주가 너무 크니까 나는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식의 소극적인 자세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런 자세는 별 쓸모도 없고, 차라리 자세라기보다는 그냥 비관적이며 소위 '센치'한 감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가 서문에서 한 말처럼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우주를 대하는 비관적 자세는 우리에게 제한된 시각만을 줄 것이다. 우주의 95%를 볼 수 있는 오늘날의 우리가 그것의 1%만 바라보려는 보수적인 자세를 견지한다면 죽음은 그만큼 우리에게 좁게 느껴질 것이고, 우리는 예전처럼 그 앞에서 숨 막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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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사물들
장석주 지음 / 동녘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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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9



  중학생 때부터 5년 간, 나는 시를 썼었다. 아마 그에 관해서는 이 누추한 공간에서 여러 차례 말했을 것이다. 대단한 일도 아니었고, 돌이켜보면 그리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글과 생각을 한 지점에 두고, 태양의 큰 궤도를 도는 행성이다. 시를 알 것 같다고 생각(착각)했을 때 나는 시 쓰기를 그만 뒀고, 다시 시를 만났을 때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아 시를 쓰지 못했다. 이런 생각들을 시를 사랑하는 나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 정도로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시가 얼마나 어려운 산고를 치러야 태어나는 아름다운 아기인가를 깨닫고 있다.


  창조의 신비가 지닌 애매모호함을 신봉하는 사람에게는 거슬리는 말이겠으나, 시는 크게 두 개의 세계를 왕복하며 세포를 분열한다. 우리가 시를 어렵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시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순간을 느끼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하나는 관찰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의 세계이다. 전자가 우리를 시인으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후자가 그런 우리의 꿈을 산산조각 낸다. 시인은 두 세계를 왕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드물다. 우리는 대개 후자의 세계에 입국할 수 없다.


  ‘시인이 될 수 없다면 관찰의 세계는 무슨 의미일까?’ 이렇게 묻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찰의 세계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계에도 입국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뜻이다. 만약 이 누추한 공간에 들어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나는 관찰을 할 줄 알아.”하고 안도를 한다면, 그건 정말 다행인 일이다. 단 한 차례라도 관찰에 집중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물론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우리는 세계로부터 의미를 뽑아낼 수가 없다. 그런 고로, 그들에게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재앙이다.


  사람은 다양한 것에 집중한다. 서로 같지 않다. 가령, 아버지와 나는 주말 산행을 하는데, 아버지께서는 야생화를 스마트폰에 담기 위해 종종 걸음을 멈추신다.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걸어야 하는 산행에서 내가 꽃을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나도 꽃을 물론 봤다. 그러나 그건 본 것이지, 관찰한 것이 아니다. 이런 사소한 차이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적용해보자. 우리의 세계는 얼마나 다양하고도 넓은가.


  이런 이유로 장석주의 『철학자의 사물들(동녘, 2013)』을 읽으면서 굳이 그 책에 특별히 언급된 사물들에만 우리가 집중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독자들은 아마 장석주가 제시한 여러 사물들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의 사물을 찾기 위해 생각의 여유를 충분히 갖게 될 것이다.) 예컨대 이 책에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데카르트, 헤겔, 스피노자, 프로이트, 니체 등 족적이 넓디넓은 철학자들의 사유를 빌려 신용카드, 진공청소기, 담배, 거울, 책, 사과, 구두, 망치 같은 사물들이 어떤 의미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가 소개되어 있다. 물론 이걸 ‘소개’라는 단어로 표현하긴 좀 그렇다. 장석주의 글을 하나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저자는 문장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소개서’라고 설명하는 결례를 범하는 대신, 장석주 스스로가 서문에 밝힌 대로 ‘한 권의 축제’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먹기 힘들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따라서 음식의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거대한 축제.


  스마트폰을 보자. 아마 그 덩치를 호주머니에 덜렁덜렁 넣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스마트폰 소유자는 열이면 아홉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다닌다. 소위 ‘그립감’이라고 한다. 지갑 이상의 위력과 능력을 가진 이 덩치를 손에 들고 있으면 그렇게 안정적일 수가 없다. 스마트폰 중독자에게서 스마트폰을 뺏으면 손을 떤다고 하지 않던가. 기술이 우리에게 침투한 깊이를 우리는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있다. 인문학적인 눈으로 보면 그건 기술이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강탈한 흔적이다. 우리가 (사실 대부분인) 한쪽에서 기술의 진보를 여러 TV 광고들을 앞세워, 그리고 열렬한 소비자들을 앞세워 찬양하고 있을 때, 반대쪽에서는 기술의 거센 강물에 휩쓸리지 않은 채 강둑에 서서, 휩쓸려 가는 이들을 애잔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강물이 너무나도 빨라 미칠 정도로 스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것은 쉽진 않다. 굳이 맹자를 빌리지 않아도, 우리는 생활의 균형감(중용)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안다. 하지만 이건 한쪽으로 너무 쏠려버린 모양이다. 인문학자는 뭐라고 말할까?


  “휴대전화는 시공을 초월한 ‘나’의 확장이다. 이것을 가짐으로써 사람들은 ‘나’의 시공을 무한대로 확장하고, 그 대신에 ‘나’의 핵심이라고 할 자아가 자아로써 있도록 단단한 지지대 역할을 하는 고독의 온전함과 자유는 한꺼번에 잃어버렸다.(pg.28)


  그러면서 저자 자신은 새로운 스마트폰을 사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골동품 애호가라서 의도적으로 새 것이 헌 것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건 당연히 아니다. 저자는 기술의 화려한 진보에 기대는 기회를 포기함으로써 자신 안에 있는 고독과 자유를 수호한다. 고독과 자유가 우리에게 그렇게도 중요한 것일까? 둘 다 워낙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라 의미를 도통 알 수 없거나 혹은 의미가 희석된 경우가 대부분이겠으나, 이것은 우리의 영양분과 같은 것이다. (좀 더 사유를 해보고 싶은 사람은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읽어보길 바란다. 이건 확신에 찬 강력한 권유이다.) 비유컨대,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는 비타민 C를 체내에서 못 만든다. 이와 비슷하게, 기술이 고독과 자유의 섭취를 차단한다. 기술은 인간에게 고독한 상태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유의 기회를 박탈한다. 기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A사의 본점에 들어가 새로 출시된 스마트폰을 들고 나오면서 본점 직원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그런 자유?


  물론 많은 사람들은 나와 같은 ‘비평’을 하면서 자신은 기술로부터 충분히 멀어질 수 있는 것처럼 자위를 할 수도 있다. 나도 이 글을 쓰는 동안 그런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모든 행위가 사기이며, 어리석은 짓일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럴 것이다. 사기일 수도, 어리석은 짓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문학자일 수도 없고, 더군다나 자본주의를  맹신하는 종교적 분위기에서 태어난 우리와 같은 세대가 ‘머니(money)’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이 체내에서 비타민 C를 못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필연적이면서도 생물학적인 결함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기와도 같고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면서 자기 자신의 중심점을 올바른 방향으로 옮길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나는 항간에 널리 퍼져 있는 ‘자아성찰’이라는 단어의 모습이 과대 포장된 선물상자, 혹은 질소만 잔뜩 들어 있는 과자봉지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여긴다. 장석주가 여러 철학자들을 빌어 설명한 여러 사물들의 ‘오늘날의 의미’는 우리에게 다양한 강도의 저항력을 준다. 물론 중력처럼 강하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가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것을 영원히 막진 못하겠지만 인문학의 저항력은 우리가 일탈하는 속도가 끊임없이 증가하는 것을 막아준다. 이것이 우리가 인문학을 접했을 때 느끼게 되는 본질적인 이질감이다. 다른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을, 혹은 옳다는 것을 읽자마자 우리가 행동을 교정할 수 없는 당연한 모습에 비춰보자면, 인문학은 우리에게 고통(저항력)을 주는 것으로 그 역할을 마친다. 그것이 우리에게 완벽한 형태의 자아성찰인가? 그건 종교도 하지 못한 일이고, 그러므로 오늘날 판을 치는 ‘힐링’ 저서들도 하지 못하는 일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일탈적인 깨달음이 아니다. 우리는 병행해서 사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이런 단어를 쓰긴 좀 그렇지만 이건 ‘사회적 진화’에 해당하는 일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면 아무런 법 없이 살 수 없으며, 또한 그가 아니면 문명의 보고(寶庫)에서 물건을 꺼내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건, 중요한 행위는 무엇일까? 인문학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기회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멈추는 것이다. 멈춰 있는데, 눈은 뜨고 있는 것이다. 눈은 뜨고 있는데, 보는 것이다. 보는 것인데, 관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시인의 두 세계 중 전자의 세계, ‘관찰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인문학의 증언들은 우리의 여권과도 같다.


  그곳의 세계는 다양하다.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자치국들까지 포함해도) 나라들보다도 많다. 일본에 존재한다는 1억 이상의 신보다도 많다. 그곳에 가려면 대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여권이 필요한 것일까?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유로패스처럼 기차만 타면 여러 나라를 한꺼번에 여행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 그건 도둑놈의 심보다. 인문학은 작은 것 하나를 세심하게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그걸 표현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나중의 문제이고, 일단 들여다보는 자세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신기한 것이, 일단 그 나라에 들어가면 여권 없이도 다른 나라를 갈 수 있는 ‘초’이동적인 방법을 알게 된다. 마치 영화 《K-PAX(2001)》에서 주인공 프롯이 한 광속여행처럼. 쉽게 말하자면, 사물 하나에는 세계로 연결되는 수많은 노드들이 있다. 예컨대, ‘카메라’라는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장석주를 만나고 있으면, ‘거울’이라는 세계를 한창 돌아다니는 장석주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몫은 인문학 저자들의 쓴 소리를 기꺼이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생각,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를 이리저리 다듬을 용기를 지닌 독자들의 몫이다. 이런 용기가 없다면 ‘카메라’는 그냥 찍는 기계이고, ‘거울’은 그냥 비춰보는 도구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세계는 정확히 그 정도로만 느껴지고, 흘러지나갈 뿐이다.


  이곳은 사소한 세계이다. 그래서 인문학자들의 말이 여름이면 어김없이 귓가에 울리는 짜증나는 모기소리로, 아니면 한낮의 더위를 잡아먹고도 남을 정도로 격렬하게 자신의 짝을 찾는 매미소리로, 그렇게 제각각 들릴 수도 있겠다. 왜 그런 걸 신경 쓰느냐고. 왜 당연한 이야기를 그렇게 힘을 줘서 이야기를 하냐고. 저자 자신은 그렇게 살 용기가 있느냐고. 우리가 그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방식도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놀랍다. 정작 자신이 아플 때에는, 손톱이 손톱 밑의 살을 짓누르는 사소한 아픔에도 그렇게 아파하면서 우리의 세계가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도 무심할 수가 있을까? 사소한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시인의 세계에 있는 눈이며, 우리가 얻기 힘든 심안(心眼)이다. 그래서 인문학자들은 좀 보라고, 들여다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와 여러 생각을 나눈 한 지인은 알랭 드 보통을 좋아하는데, 이 매력적인 철학자의 인용문이 『철학자의 사물들』에 실려 있다. 알랭의 책 『여행의 기술』에 있는 한 대목이라고 한다. 장석주가 인용한 구절을 통째로 나 역시 인용해보려고 한다. 인문학이, 혹은 인문학적 정신이 무엇인지를 아주 감미롭게 표현했기 때문에 읽는 사람의 절박함에 그 글의 촉감이 고스란히 와 닿는다.


  “왜 다른 나라에서 현관문 같은 사소한 것에 유혹을 느낄까? 왜 전차가 있고 사람들이 집에 커튼을 달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장소에 사랑을 느낄까? 그런 사소한 (또 말없는) 외국적 요소들이 강렬한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 터무니없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다른 삶에서도 비슷한 양식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이 상대가 빵에 버터를 바르는 방식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또 상대가 구두를 고르는 취향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기도 한다. 이런 자잘한 일에 영향을 받는다고 우리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세밀한 것들로 그 속에 풍부한 의미를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pg.235-236)


  그러니 작다고 무시하지 말자. 지금 내 앞에는 A4 이면지에 온갖 생각과 독서메모를 적는 M〇〇 팬이 하나 있다. 요즘 나오는 예쁜 팬들과 비교하자면 별로 특별하지도 않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녀석을 손에 쥐고 땀이 날 정도로 이것저것을 낙서하면서도, 나는 이 녀석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가만히 들여다본다. 무엇을 만났는지, 이 공간을 찾은 당신에게는 말 안 할 거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그 어떤 것. 딱 그 정도만 말해주고, 나머지는 나의 수많은 감정 속에 교묘히 숨겨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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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0 1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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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유동하는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한상석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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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0



  배후(背後). 눈에 보이지 않는, 등 뒤의 존재, 혹은 세상. 음모론의 총본산. 실질적인(de facto) 세력. 뭐라고 부르든 우리가 그 실존을 의심하면서도 확신하는 이상한 것. 얼마 전, 모 방송사의 유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뒤돌아보면 죽는다."라는 콘셉트로 출연 연예인들이 (그들의 대화에 따르면) 몇 시간이고 고개를 뒤로 돌려보지 못해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준 적이 있었다. 한 연예인은 목에 박스를 두른 채 등장해 그날 누리꾼들의 댓글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자기 자신의 뒤든, 상대방의 뒤든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곁눈질을 해야만 한다. 배후는 호기심과 공포가 교차하는 곳이다. 실체를 확인하기 전까지 배후는 이중적 공간으로 남는다. 있거나 없거나. 그래서 우리는 믿거나, 믿지 않는다. 문제는 이것이 심심풀이 '땅콩'의 재미있는 이야기나 경험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계의 현상을 가리킬 때 발생한다. 그리고 그 현상이 우리를 괴롭히거나 살기 힘들게 만드는 것 같으면 배후는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근현대의 공포이다.


  인도 사상을 믿거나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틈날 때마다 읽고 있는『우파니샤드』에서 공포를 설명하기에 아주 적합한 문구 하나를 발견했다. "형태가 없고 …… 외부와 내부에 어디든 존재하며 탄생을 거치지 않고 숨을 쉬지 않으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완전히 순수한 그리고 다른 어떤 불멸의 존재보다도 더 훌륭한 존재.(이재숙 역, 『우파니샤드』, 191쪽)" 마지막 대목에서 '훌륭한'이라는 뜻을 존재적으로 강력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이 문구는 공포에 대한 찬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공포는 우리의 찬사를 받는 존재가 아니다. 공포가 인류를 발전시켰다는 수많은 사회인류학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공포는 우리가 제거했으면 하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거가 불가능하다는 걸 시인하는) 존재이다. 나는 이 밑줄 그어 놓은 문구를 이면지에 적어놓고, 책 한 권을 읽었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으로 인상 깊었던 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원제 : Liquid Times, Living in an Age of Uncertainty)』이다. 사실 이 책에 '공포'라는 단어가 그리 자주 언급되는 건 아니다. '공포'가 직접적인 주제도 아니다. 바우만은 원제에 적힌 부제처럼 'Uncertainty', 즉 불확실성의 대양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몹시 어색하지만 수동태 구문을 굳이 써서) "어떻게 살아지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책을 덮었을 때, 단 하나의 단어가 귓가에 맴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공포'이다.


  현대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아무래도 개방성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세상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야."라며 사람을 많이 만나서 연을 이어놓으라고 충고한다. 우리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개방적인 사람이 되라는 의무를 받는다. 그러나 이런 개방성이라면 차라리 간단하고 쉬울 것이다. 현대의 개방성은 "내가 내 방문을 열 의사도 없었는데, 외부에서 갑자기 방문이 열리는" 왜곡된 개방성을 의미한다. 생각해보면, 현대인들이 어느 시점에 "우리 방문을 함께 활짝 열자!"고 약속을 해서 국경이 열리고, 문화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시장 네트워크가 전 세계로 팔을 벌린 것이 아니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너도나도 세계가 열렸다고, 비근한 말을 빌리자면 '지구촌 사회'가 됐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아니, '개방'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무엇을 의미하게 될 것인지 알고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하늘이 열리고 비가 끊임없이 쏟아진다. 물은 삽시간에 불어난다. 폭우가 내리는데 계곡에서 물놀이를 한 경험이 있다거나, 장대비 속에서 산행을 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물이 불어나는 것은 정말이지 찰나이다.


  개방성, 아니 '전지구성'은 결국 수많은 현대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들이 사는 사회는 "자신의 여정을 확고하게 결정할 능력이 없고, 일단 선택해도 그 여정을 지킬 능력이 없는 무력한 사회(p.17)"이다. 안타깝게도 여기서의 능력은 대부분이 경제적 지위를 의미한다. 공포가 엄습하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자신의 주변을 살핀다. 정확히 무엇이 자신에게 덤벼드는지 알지 못하지만, 테마파크의 '마녀의 집'에 들어간 사람처럼 몸을 움츠리고 사위를 살핀다. 현대인들은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건강검진을 받거나, 호신술을 배우거나, 집에 CCTV를 설치한다. 그러나 이건 공포의 근원을 막아낼 수가 없다. 벽에서 물이 새고 있는데, 우리는 걸레로 바닥에 흥건한 물만 닦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현대인은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에게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한다. 미국과 같은 강대국, 내전 중인 국가, 혹은 분단국가인 우리나라가 특히 안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현대의 국가는 이미 '열린사회'를 표방하기 때문에 국가 방어의 임무를 변덕스러운 시장에게 전가했으며, 따라서 국가는 (바우만의 뉘앙스대로 말하자면) 정치인을 앞세워 호들갑을 떨면서 테러나 보이지 않는 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만 하는 '개인 안전 국가'로 전락했다.


  최근 들어 꽤 많은 불만이 쏟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불변의 완성체로 여겨지는 민주주의도 우리의 공포를 제거해줄 수가 없다. 바우만이 예로 든 분석 중에 프로이트의 것이 있다. 프로이트는 '우월한 자연의 힘', '우리 육체의 연약함'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한계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해보다가 안 되면 이런 문제들 앞에서는 차선책을 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만든 규칙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진단이 불호령처럼 떨어지게 되면 인간은 자신을 불신하거나 스스로가 무능력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심지어는 문제의 장본인이나 악당이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렇게 생겨난 공포는 자연에 대한 공포보다 어쩌면 더 고약할 것이다. 학자 카스텔은 이 모든 것이 개인화 때문에 발생했으며, 특히 사회에 있어서 규칙이, 그러니까 '법률'이 보장해주는 개인이 우리의 실존과 멀리 떨어져 있어 사회적 공포가 유발된다고 주장했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국가가 하는 일은 개인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포를 관리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물론 그 시절보다 오늘날의 법이 더 '민주적'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겠으나) 법이 보장하는 권리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충분치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바우만은 법은 "혼자 내버려둬도 이미 안전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안전해지기 위해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못 박는다. 옛 국가들이 왕의 뜻으로든 신의 뜻으로든 확실히 정해주던 자연적인 소속감이나 미래에의 약속, 이런 것들이 현대사회에 이르러 사라지면서 모든 것은 민영화되고 그 책임은 개인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사실상 우린 내던져진 존재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법으로 보장받는 개인의 한계에다가 경제적 격차가 부정적인 요인으로 부각되면서 사회적으로 권리를 부여받지 못하리라 기대되는 '위험계급'들은 마치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나오는 '광인들의 배'에 탄 사람들처럼 이 사회에서, 혹은 국경 없는 세계에서 배제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을 보고 "무슨 허황된 음모론이냐?"라고 반박하는 이들이 없으리라 기대하진 않는다. 그러나 배제된 사람들은 이미 대양 위를 표류하고 있다. 이건 비유가 아니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이란, 미얀마 등은 오늘날 가장 많은 난민을 배출하고 있는 국가이다. 보면 알겠지만 하나같이 심각한 종교 갈등, 대테러전쟁, 혹은 내전에 시달리는 국가들이다. 이곳에서 떠난 사람들은 배를 타고 인도양 위를 떠돌다가 호주로 간다. 보트피플이다. 예전에 호주의 노동당 정부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을 처리하기 곤란해지자, 인도네시아 남부의 크리스마스 섬을 거대한 난민수용소로 개조했다. 국제적인 인권단체들은 호주 정부를 비난하고 나섰지만 호주 정부도 난처해하는 눈치였다. 호주 내 무슬림의 35%가 아프가니스탄 난민 출신이라는 것만 봐도 호주 정부가 감당해야 하는 문제의 부피가 느껴진다. 난민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돌아가도 고향은 없다. 바우만은 여러 학자들이 난민의 처지에 빗댄 표현을 적어 놨다. 비공간(non-lieux), 유령마을(nowherevilles), 바보들의 배(Narrenschiften). 이들은 법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불필요해진 사람들', 잉여인간이며, 이미 비관용적으로 변해버린 세계에서 해외로 나가도 문제, 국내에 남아 있어도 문제가 된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적 지위 역시 위험하다는 걸 깨닫는다. 아마 충분한 안정권에 든 사람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를 것이다. 바우만의 진단은 이렇다. "'쓰레기' 판정은, 그것이 과거에 인식되던 방식처럼, 상대적으로 소수의 인구에만 국한되기보다는 모든 이들의 잠재적인 전망이 된다ㅡ즉, 모든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지금 쓰레기 판정을 받거나 미래에 쓰레기 판정을 받거나 그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p.57)" 이런 현상은 선진국에서는 간접적 위협이지만 후발 국가들에서는 "유일하게 번성 중인 산업(p.59)"이다. 1970년대는 세계대전 이후 '영광의 30년'이었고, 북반구와 남반구의 경제적 차이가 확연하게 벌어지는 시대였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난민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난민은 '열린 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자유무역을 표방하는 나라들에게는 "자유무역을 실시하는 한편 이민을 반대하는 정서에도 비위를 맞출 수 있는(p.88-89)" 능력이 요구된다. 바우만은 분노의 대상인 엘리트는 눈에 보이지 않을 뿐더러 막강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눈에 분명하게 보이고 제자리에 있으므로 넘쳐 나는 분노를 쏟아 부을 수 있는 손쉬운 표적(p.82)"인 난민을 아니꼽게 바라본다고 주장한다. 이건 그들에게 연민을 보내는 우리의 얄팍한 도덕관념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 난민이 지금 바로 '우리집', 혹은 '우리 마을', 아니면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공간으로 주제를 바꿔 생각해보자. 우리의 공간은 대부분 아마 '도시'가 될 것이다. 도시는 아름답다. 대체로 그렇게 느끼게 된다. 나라를 상징하는 여러 대도시들이나 역사적인 도시는 우리의 자랑이 되기도 한다. 그 안에서 여행 중인 외국인들을 보고 있자면 우리가 도시와 함께 세계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소위 '글로벌'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현대의 도시는 위험한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아무리 주변을 감시한다고 하더라도 안전에 대한 확신이 희박하다. 마치 언제 암이 걸릴지 모를 것 같은 막연한 불안처럼. 또 하나 바우만이 (사회학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여) 지적한 것은 도시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도시 안에도 여러 국가들이 골칫거리로 생각하는 난민에 비유될 만한 존재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잊음으로 해서 안락함을 얻게 된다. 그들은 '이방인'이 된다. 바우만은 우리가 원치 않는 그들과 사는 도시의 방식을 이 책의 번역본 제목인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즉 "영구적인 생활방식"이라 부른다.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는 이방인이 굳이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 지칭하는 건 아니다. 전 지구적인 문제도 이방인이 될 수 있다. 그런 문제가 세계를 표류할 때에는 별 반응이 없던 사람들도 자신들의 앞마당이나 뒷마당에서 문제의 기척이 느껴지기라도 하면 곧바로 일어선다. 그 순간 그들에게는 권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권력은 표류하고 있으며, 이미 분리된 도시공간에서 이웃 동네 사람들은 그들에게 무관심하다. 구내로 출입을 금지하는 아파트 단지들의 메마른 인심을 지적하는 뉴스 보도가 한때 새삼스러운 관심을 받았었다. 이제 우리는 이질공포증(mixophobia)에 시달리며 스스로의 공간을 '금단의 공간(interdictory spaces)'으로 탈바꿈시킨다. 과연 세계는 열렸는가?


  무관심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안전의 범위는 의외로 좁기 때문에 어디까지 안전의 경계선을 그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별로 멀지 않은 곳까지만 말뚝을 박아놓게 된다. 만약 어떤 문제가 들이닥쳐서 우리가 결코 저항을 하지 못할 것 같다 싶으면, 우리는 말뚝을 내버려두고 안전한 다른 땅을 찾아 이동할 것이다. 부동산에 가면 사람들이 대부분 물어보는 게 그거다. 윗집에 아이들 사나요? 담배 피는 이웃 있나요? 보안을 잘 되어 있죠? 이사는 어느 정도 '도망'이거나 '개인의 생존'과 직결된다. 바우만은 이러한 현상을 각각의 유토피아에서 사는 사냥터지기와 정원사에 비유해 신랄하게 설명해 놨다. 요약해보자면 이렇다.


  사냥터지기의 유토피아는 "만사는 어설프게 손댈 바에야 손대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는 신념(p.158)"에 기초한다. 반면, 정원사의 유토피아는 "머리에 바람직한 배치도를 마련한 다음에 정원을 그 이미지에 맞추는(p.158)" 방식으로 건설된다. 바로 떠오르겠지만, 사냥터지기는 전근대를, 정원사는 근대를 상징한다. 그러나 바우만은 정원사가 사라지고 많은 사람들이 사냥터지기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뭔가 바꿔야겠다는 신념을 자신의 선택으로 짊어지기 싫어하기 때문에, 입으로는 유토피아가 죽었네 살았네 비판을 하면서도 (아주 기만하게도) "숲에서 사냥감이 고갈되면, 비교적 망가지지 않아 사냥감이 우글거리는 또 다른 숲으로 옮겨(p.160)"가는 사냥터지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옮겨 다니는 숲 자체가 "우글거리는" 유토피아이다. 사냥터지기에게는 현실 자체가 유토피아인 셈이니, 그들은 비판을 할 여력도 없다. 그냥 생각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다. 정해져 있는 엔딩, 정해져 있는 능력의 한도, 정해져 있는 스토리. 흡사 MMORPG 온라인 게임을 연상케 한다. 사냥터는 나의 캐릭터가 움직이는 맵이고, 끝나지 않는 즐거운 사냥은 도무지 고갈될 기미가 없는 다채로운 퀘스트(임무)이다. 죽으면 다시 부활하기까지 하니, 무엇이 과연 우리를 두렵게 할까? 사냥터지기에게 삶은 다만 귀찮거나 즐거울 뿐이다.


  바우만은 책을 끝내며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마지막 장을 언급했다. 바우만이 인용한 구절을 소설의 맥락에서 살펴보면 이렇다. 쿠빌라이는 소설에서 마르코 폴로의 여러 '가상의 도시'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이 가상의 도시라는 것은 틀림없다. 13세기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현대적 도시들이 등장하니 말이다. 때문에 이 도시들은 세계 그 자체와 인간을 의미한다. 쿠빌라이가 소설의 말미에 가서 마르코 폴로에게 유토피아의 존재 여부를 물어보는 것은 당연한 차례였다. 마르코 폴로는 유토피아로 가려면 생각보다 사소한 것에서 단서를 찾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마치 우리 범인(凡人)들이 할 것 같은 의심을 토로한다. 그곳이 지옥이면 어쩌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폴로는 지옥에 대응하는(벗어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알려준다. 하나는 지옥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렇다.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탈로 칼비노, 이현경 역,『보이지 않는 도시들』, p.208)"이다. 이건 바우만의 말마따나 '고투'이다. 바우만은 소설의 저 구절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의 책을 마치면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지옥이 아닌지'를 알아내려고 고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들이 고집스럽게 '지옥'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 할 것(p.175)." 투사가 되라는 뜻이다. 그것은 또한 사냥터지기임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정원사가 되라는 주문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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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6



  그녀가 굳게 입을 다물어도, 나는 그녀가 속으로 삭힌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서 있어도, 나는 나 몰래 이 시간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 누군가가 그녀였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손만 잡아도, 안아 달라, 불편하다, 배가 고프다, 빨리 걷고 싶다, 걱정된다, 그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나는 그때 한창 시를 쓰겠다고 문장과 단어에 매달리던 학생이었다. 그러나 내가 백지에 적어 내려가던 그 복잡하면서도 속 깊은 모든 말이 그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된다는 걸 알았다. 나는 분명하게 알게 됐다. 표현되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반(反)구체적으로 그 세계와 교감한다. 그래서 더 생생하다. 우리의 이해는 배움 뿐만 아니라, 이 세계와의 교감에도 빚진 바가 많다.


  좀 더 크고 나는 대학생이 됐다. 대학생활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요목조목 잘 따지고, 앞에 나가서 발표 잘 하면서 사회인으로의 자질을 다듬어나가면 좋은 점수를 받는다. (그리고 대부분 그 만족은 점수가 자신의 미래와 어떻게 연관되느냐와, 콕 집어 말하자면 '취업'의 여부와 크게 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대학생의 버릇은 이제 그 생활의 막바지에 이른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 하나를 남겼다. 나는 아직도 서재에 둘러싸여 대체로 그 논리와 분석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한다. 세계와의 교감에 써야 할 정신의 여력, 뭐라고 부르든 여하튼 그 일정의 여분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불안해하는 나의 날카로운 신경에 허비하게 됐다. 내가 지금 무엇과 교감을 하고 있기는 한 걸까? 하나같이 마비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대학의 방식이나 책의 논리 등으로만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 아니라, 온갖 '잡것'들을 주워 담아 그냥 방치한 한 기괴한 모습의 세상은 나의 갤러리[추억]에서도 한참 구석에 밀려난 셈이다. 그냥 쉽게 말하자면, 너무 딱딱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 특히 문화생활 한다는 사람들이 '날것'이라는 말을 유행시키고 있는 것 같은데, 바로 이 단어가 지금 나에게 딱 필요한 것이리라. '날것'은 보고, 만지고, 먹어봐야 하는 것. 그것에 논리와 분석의 가열을 가하진 않으리라. 나는 그냥 이런 생각이었다.


  '교감', '날것',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나의 마음은 대략 절반 정도이다. 물론 그런 취지에서는 글이라는 것을 애당초 쓰지도 않을 것이다. 글은 '가열'에 해당하니까. 이 공간에, 스스로도 별로 탐탁지 않은 감상문들을 올리는 건 모두 가열하는 일이다. 책을 좋아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모두 가열이다. 날것을 그냥 먹으면 무슨 병에 걸린다더라 하는 의학적 지식이 우리의 '책생활'에 도움이 되는 상식이 아니던가. 사실이다. 책은 저자가 가공한 하나의 레이디메이드. 누군가는 책의 내용이 너무나도 참신해 그것에 '날것'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스스로 좋아하겠지만 그건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문장에는 마침표가 있으니, 우리는 예쁘게 만들어진 옷을 입는 셈이다. (자신의 독서능력, 즉 비판적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한 번 생각해보라. 반대로 너무 긴 문장이 있으면 우리가 어디 제대로 읽을 수나 있던가?) 아마 독서에 익숙한 사람에게 '교감', '날것'은 마이너(minor)일 것이다. 뭔가 현실에 꼭 대입되는 것 같아 정말 안타깝지만 나의 '메이저(major)'와 나의 '마이너'는 결코 손을 맞잡을 수 없다. 이/저쪽에서는 불에 구워 먹지 않으면 몸에 나쁘다고 하고, 이/저쪽에서는 구우면 내가 죽는다고 한다.


  우습지만 비유 하나 해보자. 여자친구와 알콩달콩 데이트를 하면서, 나는 지금 윤중로의 벚꽃을 보고 있다. 물론 보는 건 벚꽃이지만 내가 만지고 있는 손은 여자친구의 것이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도 여자친구이다. 벚꽃은 핑계이다. 그 형언할 수 없는 기쁨, 감동, 쾌감, 슬픔, 이런 것들을 윤중로 그 짧은 벚꽃거리를 걸으며 생각한다. 아니, 교감한다. 그것은 아무런 가공을 거치지 않은 '날것'이다. 그런데 그걸 지금처럼 글로 쓴다고 하자. 복잡했던 '날것'의 순간이 정렬되면서 여자친구와의 데이트에 일련의 원인과 과정 등이 '발생'한다. 그런 것이 애당초 있었을까? 알 수 없다. 생각은 상상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시를 그만 쓰기로 하면서 사랑을 시로 쓰는 건 사기 치는 일이라 생각하기도 했었다. 나는 가면을 씌우면 안 되는 '날것'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고, 그것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켜주고 싶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을 문자로 정착시키는 것보다는 그것이 서서히 안개 속으로 사라지거나, 혹은 흙 위에서 썩어 없어지는 있는 그대로의 광경을 목격하며 '표류하는 감정'을 보존하고 싶었던 것이다. 말이 쉽지,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상당히 뼈저리지 않던가.)


  나는 몇 년 간 미술의 역사와 화가, 그리고 그들의 이론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공부했었다. 당시 내가 '미술'이라는 세계에서 발견한 감동은 예술이 탄생하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물론 이건 내가 그냥 상상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특히 모더니즘 이후에는) 논리적 구성과 튼튼한 이론이 있다. 그러나 구성과 이론 사이에 예술가 특유의 번뜩이는, 무릎을 치게 만드는 발상의 순간들이 있다. 구성과 이론을 공부하던 내가 오히려 밑줄을 긋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도 어렴풋이 안다. 그들과는 달리 나는 글로 창작을 하던 때가 있었지만 무언가를 쓰기로 결정하고 구상하는 그 끔찍할 정도로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 사이에 고통의 아픔을 단번에 치유하고 창작 의지를 불태우도록 하는 '예술의 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순간 자체가 하나의 '날것'이다. 그것이 그림과 글로 정착되는 순간 우리의 '날것'은 사라진다. (이걸 굳이 형식론으로 따지자면 좀 복잡해지니 차치하려고 하는데, 미술과 문학과는 달리 음악은 '날것'이거나 '날것'에 훨씬 가깝다. 예술 양식 사이의 비교를 다룬 책을 읽어보면 대체로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읽지 않아도 직접 비교해보면 된다. 초현실주의자들처럼 글로 '자동기술'을 하는 것이 더 본능적일까, 아니면 피아노에 앉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이런저런 건반을 두드리면서 즉석에서 이도저도 아닌 '음률'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본능적일까. 참고로 전자는 좀 어려웠는지 파리에 있던 초기 초현실주의자들 중에서는 마약을 '빤'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게 위험하다는 걸 물론 사전에 알고 있었겠지만 그들은 '나중에' 그것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관뒀다.)


  책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주로 빠지는 인생의 함정은 정제된 걸 지나치게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해하면 안 된다. 책을 읽으면서도 소위 '익스트림'한 걸 좋아할 수 있다. 비싼 돈 주고 마운틴바이크를 즐기거나, 짜릿한 번지점프를 즐기는 사람도 애독가들 중 분명 많다. (오히려 애독가들이 그런 생생한 체험을 선호하는 경향도 있을 것이다. 카프카의 예로 흔히들 회고하는 것처럼, 인생에 있어 극단을 오고 가는 경험들이 서로의 동반자가 되어준다고들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건 즐기면서 추구하는 그 나름의 것이고, 문제는 그것마저도 다시 책이나 글 속으로 정제시키려는 경향이다. 나도 포함되겠는데, 우리나라의 수많은 블로거들도 그렇다. 정제된 감정들이 소통하기에도 편하다. 사실 '날것'은 개인에게 그 교감의 몫이 전적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표현되는 순간 익은 고기가 된다. 먹기[서로 나누기]에는 좋겠지만 교감의 일부분은 표현되지 않은 채 우리의 비밀로 남아 있거나, 혹은 먹을 때의 기분이 너무 좋았던 나머지 폐기되어 버린다.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독서의 감정에도 분명 '날것'이라는 것이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언제 그런 '날것'을 책에서 건져 올려봤는가? 나는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을 읽고 나자마자, 새벽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샅샅이 살펴봤다. 생각해보면 바보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나무 위의 남작'이 하늘을 나는 기구를 붙잡고 먼 하늘로 사라졌다는 책의 결말에서 도무지 헤어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날것'의 감정은 지금 글을 통해 회상되는 처지에 놓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사멸했다. 글은 그 감정의 묘비인 셈이다.) 분명 '날것'이 아닌 세계에도 '날것'은 존재한다. '날것'은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것과 교감하는 그 자체에서 발생하는 첫 번째 파동이자 순수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다양한 강도를 지니겠지만 대체로 강렬한 편이다. 하지만 그 길이가 짧다. 우리를 일순간 주목시킬 수 있을 정도의 폭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독서와 글쓰기, 혹은 비슷한 종류의 '정착시키기'를 통해서 감정의 난민들을 어떻게든 다시 우리 안으로 끌어오려고 하는 것이다. 컴퓨터가 잘 안 돌아가면 우리가 으레 하는 '조각모음'처럼.


  위에서 나는 '날것'에 집중하고 싶다는 나의 '반쪽짜리 욕망'으로부터 시작해 결국 감정이 정착되는 우리의 비근한 일상으로 되돌아왔는데, 이건 '날것'의 입장에 서 있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딜레마이다. 나는 내로라하는 장서가들도 하루 즈음은 "저 지겨운 책의 세상으로부터 떠났으면 좋겠네."라고 넋두리를 했을 것이리라 생각한다. 겁이 나서 확신까진 못하겠지만, 분명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눈에 보이는 방벽'은 '날것'이 아니라 '책(문자)'이다. 그렇다고 굳이 이런 환경에 질식할 필요는 없다. 용기를 갖고 딜레마와 또 한 번 부딪히는 것이다. 여기 가만히 앉아 있는 것과 어디 나갔다가 여기 다시 앉게 되는 것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과정 자체도 이미 다르거니와 일단 앉게 된 '이유'가 다르다. 마지못해 앉아 있는 것과 앉아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앉는 것은 동기가 확연히 다르다.


  오래도록 나는 '날것'을 마치 보이지 않는 이상향인 것처럼 여겨왔다. 책을 열심히 읽을 때에는 "책이 세상의 전부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뿌리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맞아. 전부는 아니지."라고 수긍했다. 이때, 나의 수긍에 한 몫 한 것은 '날것'에 대한 동경이었다. 물론 사람들이 비아냥거릴 때 말한 그 세상의 진의는 '날것'이 아니라, 책 밖에 있는 거친 세상일 것이다. 나는 조금 달리 생각해서 내가 세상과 접하는 방식의 이원성을 고민했다. 교감하느냐, 읽느냐. 둘은 광의(廣義)이다. 정말 내가 E.T.와 손가락 하나로 교감한다는 것, 혹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 아니라, '날것'을 그대로 놔두느냐, 그걸 요목조목 묘사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성의 고민이 여물지 않았던 때에 나는 한쪽만 추구하는 것이 옳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도 책이 지겨울 때에는 "독서, 이딴 거 다 때려치우고 말지."라는 앙탈을 부릴 때가 있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두 방법 사이를 끝없이 왕래하면서 나는 어떤 견고한 두 축을 만들어간다. (물론 '날것'은 그 모습을 절대 보이려고 하지 않겠지만 그냥 편의상 상상한다면 말이다.) 두 세계가 나의 안에서 결코 동시에 자신의 음을 내는 일은 없겠지만 하나는 '도'의 음으로, 다른 하나는 '레'의 음으로, 혹은 어떤 음으로든 서로 다른 높이의 소리를 가진 채 나에게 하나의 큰 세계를 보여준다. 아이러니이다. 둘은 공존하지 못하면서도 긴 시간의 선상에서는 분명 공존하고 있다. 한 곳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다는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을 떠올리며 갑자기 나는 '날것'으로의 어떤 깨달음(연관성이라고 할까?)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적어보는 것이다. 이는 머지않아 사라질 나의 '날것'에 대한 추모이자, '날것'이 낳은 아들과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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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8 13: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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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4 16: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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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8 20: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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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8 2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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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10: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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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21: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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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0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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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1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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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3 2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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